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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천태수행(天台修行)
1. 삼제원융(三諦圓融)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삼제(三諦)가 원융(원융(圓融)하다는 가르침은 대단히 중요(重要)한 천태불교(天台佛敎)의 교의(敎義)이다. 부처님의 교설(敎說)에는 번뇌(煩惱)를 없애고 열반(涅槃)에 이르러야 한다는 가르침도 있지만. 일체법(一切法) 즉(卽) 일체(一切)의 존재(存在)를 어떻게 파악(把握)해야 할 것인가 하는 가르침도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나 자신(自信)과. 내가 살고 있는 세계(世界)에 대한 올바른 판단(判斷)이 있어야 한다. 만약에 자신(自信)이 살고 있는 세계(世界)를 잘못 판단(判斷)하고. 잘못 알고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바른 삶을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천태불교(天台佛敎)에서는 이 세계(世界)를 공(空). 가(假). 중(中)의 세 가지 측면(側面)으로 관찰(觀察)하고 이 세 가지 원융(圓融)한 것이라고 판단(判斷)하였다. 바로 이러한 판단(判斷)이 삼제원융(三諦圓融)의 도리(道理)이다.
첫 째 : 존재(存在)하는 일체 세계(一切 世界)는 모두가 공(空)이라고 파악(把握)하는 것을 공제(空諦)라고 한다. 이 세계(世界)의 그 어떠한 것도 실체(實體)는 없다. 실체(實體)가 없는 것은 연기(緣起)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연기(緣起)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체(實體)가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세상(世上) 모든 것은 실체(實體)가 없다. 둘 째 : 아무리 실체(實體)가 없다고 하지만 현상(現想)은 엄연(奄然)히 존재(存在)하고 있다. 산도 있고 강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지 않는가. 이렇게 실체(實體)는 없지만 현상(現想)은 엄연(奄然)히 존재(存在)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眞實)이 아니므로. “가(假)”라고 한다. 이 “가(假)”라는 말은 임시(臨時)로 꾸며진 것이라는 뜻이고. 또 진실(眞實)이 아니라 가짜라는 의미(意味)이다. 그래서 모든 현상(現想)은 다 임시(臨時)로 꾸며진 가짜. 즉(卽) 가상(假想)이라고 하는 것이다. 연기(緣起)한 것이므로 실체(實體)가 없고. 실체(實體)가 없으니 결국(結局)“공(空)”이다. 실체는 없지만 현실(現實)은 엄연(奄然)히 존재(存在)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現想)은 인연(因緣)이 다하면 없아지고.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變)하는 일종(一種)의 가상(假想)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世界)를 어떻게 파악(把握)해야 할까. 셋 째 : 실체(實體)는 없지만 현실(現實)은 엄연(奄然)히 존재(存在)하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현상(現想)을 가르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이를 일러 “중(中)”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체법(一切法)은 공(空)한 것이고. 가(假)인 것이고. 중(中)인 것이다. 이것이 삼제(三諦)라고 한다. 공(空). 가(假). 중(中)의 삼제(三諦)는 서로 원융(圓融)하여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삼제(三諦)는 하나로 어우러져 원융(圓融)한 것이 된다. 삼제(三諦)가 원융(圓融)하다는 것은 이 세계(世界). 즉(卽) 존재(存在)를 영원(永遠)한 것이라고 집착(執着)하지 말고. 변(變)하고 허무(虛無)한 것이라고 가볍게 여기지도 말고. 실체(實體)가 없는 속에 현상(現想)이 있고. 현상(現想)은 가유(假有)이지만 엄연(奄然)히 존재(存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것을 가리켜 중(中)이라 하며. 공(空).가(假). 중(中)의 세은 원융(圓融)하여 모순(矛盾)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지관(止觀)수행(修行)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천태지관(天台止觀)이라는 말은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顗)스님께서 주창(主唱)하신 천태종(天台宗)의 수행방법(修行方法)을 가르키는 말이다. 천태종(天台宗)은 위로는 용수(龍樹)보살(菩薩)로부터 6세기 중엽(六世紀 中葉)북제(北齊)의 헤문(慧文)스님과 남악(南岳) 혜사(慧思) 선사(禪師)를 거쳐 천태(天台) 지의(智顗)대사(大師)에 이르러 그 사상(思想)의 수행체계(修行逮繫)가 완비(完備)된 종파(宗派)이다. 천태(天台)의 중심사상(中心思想)으로는 제법실상(諸法實相). 원융삼제(圓融三諦). 일념삼천(一念三千) 설(說)을 들 수 있고 수행방법(修行方法)으로 천태지관(天台止觀)이 있다. 지의(智顗)스님은 천태종(天台宗)을 개창(開倉)하신 조사(祖師)로서. 아주 독톡하고 훌륭한 수행방법(修行方法)을 창안(創案)하시어 개시(開始)하시었다. 불교(佛敎)의 수행(修行)에는 크게 보면 두 가지 방법(方法)이 있다. 첫 째는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번뇌(煩惱)를 없애는 것이다. 끊임없이 요동(搖動)치는 번뇌(煩惱)를 잡지 않고는 중생(衆生)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번뇌(煩惱)가 끊고 있는 사람은 항상(恒常) 고통(苦痛)에서 벗어날 수가 없거니와. 본래(本來)의 밝은 마음이 번뇌(煩惱)에 덮여 캄캄한 밤중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 번뇌(煩惱)를 없애는 것은 불교 수행(佛敎 修行)의 중요(重要)한 목표(目標)이다. 이같이 번뇌(煩惱)를 없애는 것을 “지(止)”라고 한다. 둘 째는 일체법(一切法)을 바로 보아야 한다. 나 자신(自信)에서부터 객관세계(客官世界)를 포함(包含)한 이 모든 것을 바르게 보아야 한다. 존재(存在)하는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고. 실체(實體)가 없으며[무아](無我) 실체(實體)가 없는 이것을“공(空)”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체(實體)는 없지만 현상(現想)은 엄연(奄然)히 존재(存在)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현상(現想)은 임시(臨時)로 가설(假說)된 것이므로. “가(假)”라고 한다. 그러니 이러한 실상(實相)을 직시(直視)하여. 있다는 것에도 없다는 것에도 얽매이거나 집착(執着)해서는 안 된다. 실체(實體)는 없지만 현실(現實)은 존재(存在)한다는 양면(兩面)을 볼 수 있어야 하니. 이것을 중(中)이라고 한다. 이 같은 이치(理致)를 “삼제(三諦)가 원융(圓融)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심(一心)으로 삼제(三諦) 공(空). 가(假). 중(中)가 원융(圓融)하다고 보는 것을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고 한다. 만약 중생(衆生)들이 일체법(一切法)을 바로 보지 못하는 그것은 무지(無知)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존재(存在)를 바로 보아 실상(實相)을 제배(擠排)로 파악(把握)해야 한다. 이것을“관(觀)”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 수행(佛敎 修行)은 지(止)와 관(觀). 두 가지 수행(修行)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천태대사(天台大師)는 불교(佛敎)의 8만 4천법문(八萬 四千法門)을 지관 이문(止觀 二門)으로 요약(要約)하는 수행법(修行法)을 널리 펴셨으니. 이는 참으로 수승(隨乘)한 묘법(妙法)이 아닐 수 없다. 선가(禪家)에서는 선(禪)만을 강조(强調)하여 오로지 선 일변도(禪 一邊倒)의 수행(修行)을 권장(勸獎)하고 있다. 이는 선 수행(禪 修行)을 통(通)해 번뇌(煩惱)를 다스리는 일에만 열중(熱中)하기 쉽다는 단점(斷點)이 있다. 선수행(禪修行)이란 화두(話頭)를 들지 않거나. 그것은 오직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으로 지(止)에 해당(害黨)될 뿐이다. 바른 견해(見害). 바른 판단(判斷)이 없이 고요함을 구(求)하는 것은 또 다른 잘못을 가져올 수가 있다. 그러니 반드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바로 보는 수행(修行)[관](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악회양(南嶽懷讓).(677-744)선사(禪師)도 앉아서 참선(參禪)하는 것만으로 부처가 되려는 것은 기와(起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고 경계(境界)하였다.
남악회양 선사(南嶽懷讓 禪師)가 제자 마조(弟子 馬祖)스님이 매일(每日)같이 앉아서 좌선(坐禪)만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하루는 남악회양 선사(南嶽懷讓 禪師)가 기왓장을 가지고 마조(馬祖)스님이 좌선(坐禪)을 하고 있는 선실(禪室)앞에 가서 돌에다 갈고 있었다. 마조(馬祖)스님이 선실(禪室)을 나오다가 그 광경(光景)을 보고 남악선사(南嶽禪師)에게 물었다. “기왓장을 갈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남악선사(南嶽禪師)가 대답(對答)하였다.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네” “기왓장을 간들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坐禪)을 한다고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컨대 소가 수레를 끌 때 만약 수레가 가지 않으면 소를 때려야 하는가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이 말에 마조(馬祖)스님은 크게 깨우치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勿論)이 경우(境遇)는 좌선(坐禪)하는 것만으로 성불(成佛)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지만. 부처는 선 수행(禪 修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할 때도 성품(性品)을 보고 성불(成佛)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성품(性品)을 본다는 것을 “자신(自信)의 마음이 성품(性品)” 즉(卽)“마음자리(慈梨)”를 본다고 생각(生角)하는 경우(境遇)가 많다. 그러나 마음은 볼 수도 없고. 마음자리(慈梨)라는 것을 보려면. 마음자리(慈梨)를 객관화(客觀化)시켜야 할 것인데. 마음은 그 자체(自體)가 보는 놈이지 보여지는 놈이 아니다. 그래서 성품(性品)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고 할 때. 성품(性品)은 자신(自信)이 불성적(佛性的)존재(存在> 즉(卽)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性品)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確信)을 하고 부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 말은 넓게 해석(解析)하면 견성(見性)의 성품(性品)은 단순(單純)한 자기(自己)의 성품(性品)이 아니라 존재(存在)의 본질(本質). 즉(卽)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보고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뜻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지(止)와 관(觀)을 함께 닦지 않는 수행(修行)은 반(半)쪽 수행(修行)이요. 바른 수행(修行)이 될 수 없다. 조계(曹溪)의 지눌(知訥)스님도 정혜(定慧)를 쌍수(雙修)해야 한다고 하지않았는가. 그러니 천태(天台)의 지관수행(止觀修行)은 선(禪) 수행(修行)을 포함(包含)한 불교(佛敎)의 모든 수행(修行)을 다 함축(含蓄)한 것으로. 불교수행(佛敎修行)의 근간(根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3. 사종삼매(四種三昧)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불교(佛敎)의 수행(修行)이란 결국(結局)은 마음을 닦는 공부(工夫)이다. 이 마음을 닦는 것을. 지관(止觀)을 겸수(兼修)한다거나 정혜(定慧)를 쌍수(雙修)한다고도 한다. 그러니 지관겸수(止觀兼修)나 정혜쌍수(定慧雙修)는 모두가 마음 닦는 방법(方法)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의(智顗)스님께서는 마음 닦음을 삼매(三昧)라 하시고는 그 닦는 방법(方法)으로 네 가지를 설명(說明)하였으니. 이것을 사종삼매(四種三昧)라고 하였다. 사종삼매(四種三昧)는 삼매수행(三昧修行)의 네 가지 방법(方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첫째 : 앉아서 수행(修行)하는 것을 상좌삼매(常坐三昧)라 하였고. 둘째 : 서서 다니며 닦는 것을 상행삼매(常行三昧)라 하였다. 셋째 : 반(半)은 서서 다니고 반(半)은 앉아서 하는 수행(修行)을 반행반좌삼매(半行半坐三昧)라 하였으며. 넷째 : 이 외(外)의 여러 가지 기타(其他) 행위(行爲)를 가르켜 비행비좌삼매(非行非坐三昧)라 하였다. 이같은 지의(智顗)스님의 가르침을 보면 삼매(三昧)를 닦는 수행(修行)에는 특별(特別)한 자세(仔細)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행(修行)은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며. 서기도 하고 앉기도 하면서 한다. 그 외(外)의 어떤 자세(仔細)로 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삼매(三昧)의 수행(修行)을 앉아서만 해야 한다거나. 서서만 해야 한다거나 하여 수행자(修行者)가 자세(仔細)에 얽매어 있는 수가 많다. 수행자(修行者)에게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그 당사자(當事者)의 마음가짐이지 몸이나 행동(行動)의 자세(仔細)가 아니다. 삼매(三昧)란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으로 오직 일념(一念)의 청정(淸淨)한 경지(境地)가 되도록 하는 것으로. 삼매(三昧)에는 여러 종류(種類)의 삼매(三昧)가 있다. [천수경](千手經)에도 백천 삼매(百千 三昧)란 말이 있는 것처럼 경(經)이름이 그대로 삼매(三昧)의 이름으로 나타난 것으로는 화엄삼매(華嚴三昧). 법화삼매(法華三昧). 능엄삼매(楞嚴三昧) 등이 있다. 반주삼매(般舟三昧)도 경전(經典)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반주(般舟)라는 말은 한자(漢字)가 아니라 범어(梵語)로서. 불립(佛立). 또 견불(見佛)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반주삼매(般舟三昧)는 부처님 앞에 서서 부처님을 만나는 삼매(三昧)이다. 이렇게 보면 수능엄(首楞嚴)도 경(經)의 이름이기 이전(以前)에 용맹(勇猛)이라는 뜻을 갖는 인도(印度)말이다. 이 용맹(勇猛)이라는 말은 용맹정진(勇猛精進)한다고 할 때의 용맹(勇猛)이 된다. 이러한 삼매(三昧)는 수행(修行)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경전(經典)을 통(通)해서 많이 나타나기 시작(始作)했다. 그래서 [법화경](法華經)의 법화삼매(法華三昧). [화엄경](華嚴經)의 화엄삼매(華嚴三昧).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의 반주삼매(般舟三昧). [수능엄경](首楞嚴經)의 수능삼매(首楞三昧)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종삼매(四種三昧)는 삼매(三昧)의 유형(有形)이 아니라 삼매(三昧)를 얻고자 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어떤 자세(仔細)로 삼매(三昧)를 닦는 것인가를 제시(提示)한 수행 방법(修行 方法)에 해당(害黨)된다. 그러나 사종삼매(四種三昧)의 내용(內容)을 보면 어떠한 자세(仔細)로 삼매(三昧)를 닦아도 무방(無妨)하다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 있는 여러분득이 관음정진(觀音精進)을 하거나 또는 참선(參禪)을 할 때에 그 자세(仔細)에 대해서는 크게 구애(拘礙)받을 필요(必要)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드러느워서 하라는 뜻은 아니다. 혹시(或是) 몸이 아파서 일어나 앉을 수 없다면 누워서 해도 될 것이다. 그러니 서서 해도 되고. 앉아서 해도 될 것이며. 밭을 갈면서 해도 되고. 지게를 지면서 해도 되는 것이니. 아무쪼록 부지런히 정진(精進)하기 바란다.
4. 삼종지관(三種止觀)수행(修行)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천태불교(天台佛敎)의 근본수행(根本修行)은 지관수행(止觀修行)은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선(禪) 수행(修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 수행(禪 修行)을 세밀(細密)하게 분석(分析)하면 지(止)와 관(觀)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여러분들게 염불수행(念佛修行)을 권(勸)하고 있지만. 염불수행(念佛修行)도 결국(結局)은 선 수행(禪 修行)과 같은 것이다. 염불수행(念佛修行)도 긍극적(肯劇的)으로는 마음을 고요히 하는 수행(修行)으로 번뇌 망상(煩惱) 妄想)을 제거(除去)하는데 그 목적(目的)이 있다. 선 수행(禪 修行)도 마찬가지로 번뇌 망상(煩惱 妄想)을 없애고 견성(見性)을 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 수행(禪 修行)에는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지(止)와 제법(諸法)을 분명(分明)하게 보는 관(觀)의 두 가지 측면(側面)이 있다. 그래서 천태불교(天台佛敎)에서는 지관(止觀)이라고 표현(表現)하고 있는 것이다. 지관수행(止觀 修行)은 중생근기(衆生根機)의 이둔(利鈍)에 따라서 점차지관(漸次止觀). 부정지관(不定止觀). 원돈지관(圓頓止觀)의 삼종지관(三種止觀)으로 제시(提示)하고 있다. 점차지관(漸次止觀)은 초기단계(初期段階)의 수행(修行)으로서 중생(衆生)의 근기(根機)와 성향(性向)에 따라서 처음은 얕고 마지막에는 깊은 곳에 도달(到達)하는 다양(多樣)한 수행(修行)의 내용(內容)을 제시(提示)하고 있다.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이나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에서는 번뇌심(煩惱心)이 많은 사람은 수식관(數息觀)을 탐욕심(貪慾心)이 많은 사람은 부정관(不淨觀)을. 진에심(瞋恚心)이 많은 사람은 자비관(慈悲觀)을. 치암심(痴暗心)이 많은 사람은 인연관(因緣觀)을. 두꺼운 업력(業力)으로 말법시대(末法時代)에 태어난 둔근(鈍根)의 사람은 염불관(念佛觀)을 닦도록 설(說)하고 있다. 모든 수행(修行)은 중생(衆生)의 근기(根機)에 맞아야 그것이 좋은 수행 방법(修行 方法)이 된다. 아무리 훌륭한 수행방법(修行方法)이 있다 해도 중생(衆生)의 근기(根機)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좋은 공부방법(工夫方法)이 못된다. 그런데 요즈음에 선(禪)을 수행(修行)하는 사람들이 선수행(禪修行)만이 제일(第一)좋은 수행방법(修行方法)으로 여기며. 그 중(中)에서도 간화선(看話禪)만이 최고(最高)로 여기고 있으니. 이것 또한 집착(執着)의 병(病)이다. 이렇게 간화선(看話禪)에만 치우쳐 잇는 사람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 석가(釋迦)부처님과 달마대사(達磨大師)와 혜능(慧稜)스님이 과연(果然) 간화선(看話禪)을 닦았는가? 이땅의 선법(禪法)을 중흥(中興)한 지눌(知訥)스님도 공안(公案)을 가지고 간화선 수행(看話禪 修行)을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지관(止觀)은 하나의 수행 방법(修行 方法)이기도 하지만 수행(修行)의 목표(目標)도 된다. 어떻게 하면 지(止)와 관(觀)의 경지(境地)에 도달(到達)할 것인가. 이에 대한 수행방법(修行方法)에 대해서 천태불교(天台佛敎)는 자세(仔細)하게 일러주고 있다. 점차지관(漸次止觀)에서는 식(息). 색(色). 심(心)을 관찰(觀察)하는 방법(方法)이 설(說)해져 잇다. 부정지관(不淨止觀)에서는 수식(數息). 수식(隨息). 지심(止心). 수관(修觀). 환문(還門). 정문(淨門)의 육묘(六妙)의 법(法)이 있다. 이 같은 수행방법(修行方法)은 번뇌(煩惱)를 쉬고 지혜(智慧)를 열어 청정(淸淨)한 마음을 이루는 것이다. 부정지관(不淨止觀)은 특별(特別)한 단계(段階)나 순서(順序)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점차지관(漸次止觀)를 수행(修行)하고. 어떤 때에는 원돈지관(圓頓止觀)를 수행(修行)한다고 하는 것이다. 때로는 관(觀)을 멈추는 것을 지(止)를 비추는 것을 관(觀)으로 행(行)하는 것이 부정지관(不淨止觀)이다. 원돈지관(圓頓止觀)은 대발심(大發心). 수대행(修大行). 감대과(感大果). 열대망(裂大網). 귀대처(歸大處)의 5단(五壇)이 설정(設定)되어 있다. 이 같은 수행단계(修行段階)는 대심(大心) 즉(卽)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사종삼매(四種三昧)를 닦아 지혜(智慧)를 통달(通達)하고. 법신(法身)과 반야(般若)와 해탈(解脫)의 구경처(究竟處)에 돌아가자는 것이다. 마하지관(摩訶止觀)에서는 고(苦)와 집(集)이 없으므로 세간(世間)이 없고. 도(道)와 멸(滅)이 없으므로 출세간(出世間)이 없다고 하였다. 또 법성(法性)이 고요함을 지(止)라 하고 교요하면서 항상(恒常)비추는 것을 관(觀)이라 하고. 비록 처음과 나중을 말하나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이것을 원돈지관(圓頓止觀)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천태(天台)의 지관수행(止觀修行)은 특정(特定)한 하나의 수행방법(修行方法)에만 고집(古集)하는 그런 막힌 수행방법(修行方法)을 선택(選擇)하지 않는다. 근기(根機)에 따라서 여러 가지 방법(方法)이 통용(通用)되는 수행(修行)이다. 그러니 찬태불교(天台佛敎)에서 삼종지관(三種止觀)을 시설(施設)한 깊은 뜻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5. 일념삼천(一念三千)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천태(天台)의 교설(敎說) 중(中)에서 대단히 중요(重要)한 가르침이 있어니 그것은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이다.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 한 생각(生角). 즉(卽) 일념(一念)에 3천 법(三千 法)이 다 포함(包含)된다는 내용(內容)이다. 여기서 3천 법(三千 法)이란 우주(宇宙)의 모든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 포함(包含)된다. 그러니 3천 법(三千法)은 일체법(一切法)의 또 다른 표현(表現)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귿이 숫자(數字)로 표현(表現)하여 3천(三千)이라고 하였지만. 3만(三萬)일 수도 있고. 3백만(三百萬)이라고 하여도 무방(無妨)할 것이다. 누가 와서 묻기를 지옥(地獄)과 극락(極樂)이 어디에 있느냐고 한다면. 어디에 있다고 대답(對答)해야 하겠는가. 또 묻기를 무엇이 부처이며. 무엇이 중생(衆生)인가라고 한다면 어떻게 답(答)해야 하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극락(極樂)은 하늘 위에 있고. 지옥(地獄)은 땅 속에 있다고 한다면 과연(果然)이 말은 옳은 대답(對答)인가. 또 부처는 3십2상(三十二相)과 8십 종호(八十 種好)를 갖춘 무구(無垢)한 분이고. 중생(衆生)은 고해(苦海)를 헤매는 불쌍한 존재(存在)라고만 생각(生角)한다면 이 말은 맞는 말인가.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對答)이다. 극락(極樂)과 지옥(地獄). 부처와 중생(衆生)이 한 생각(生角) 가운데 있다는 가르침이 일념삼천(一念三千)이다. 어찌 극락(極樂)과 지옥(地獄)뿐이겠는가. 산천초목(山川草木).산하대지(山河大地) 등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한 생각(生角) 가운데 ]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한생각(生角)[일념](一念)을 떠나서는 극락(極樂)도 없고 지옥(地獄)도 없으며. 부처도 없고 중생(衆生)도 없다는 것을 분명(分明)하게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은 두 가지 큰 의미(意味)가 있다. 첫째 : 이 세계(世界)를 바라보는 바른 견해(見解)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 있다. 이 세계(世界)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世界)일 뿐이다. 여기에는 슬픔이나 괴로움이 있지 않다. 행복(幸福)과 불행(不幸)도 없다. 일념(一念)이 작동(作動)하지 않으면 객관세계(客觀世界)는 나와는 아무런 관계(關係)가 없으며 나의 세계(世界)도 너의 세계(世界)도 아니다. 둘째 : 그러니 모든 객관세계(客觀世界). 즉(卽) 3천 법(三千 法)은 한 생각(生角) [일념](一念)에 의해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며.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중생(衆生)의 모든 문제(問題)는 이 일념(一念)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념(一念) 즉(卽) 우리의 한 생각(生角)이 어떤 작용(作用)을 하느냐에 따라서 세계(世界)는 달라지는 것이다. 불교수행(佛敎修行)이라는 게 무엇인가. 이 일념(一念)의 한 생각(生角)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깨끗이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을 깨끗이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편(方便)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쉬운 방법(方法)은 불. 보살(佛. 菩薩)의 명호(名號)를 지극(地極)한 마음으로 부르는 칭명염불 수행(稱名念佛 修行)이다. 여러 신도(信徒)들이 삼천제법(三千諸法)이 오직 일념(一念)의 작용(作用)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이 일념(一念)을 맑혀서 삼천(三千)의 제법(諸法)을 바로 보고 바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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