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 素軒 鄭源熹 선생(下)
민족의학 의권수호에 일생 바쳐
"나는 이 땅에 한의학을 심었다" 술회
동양의학전문학원 인수
오인동지회가 한·양방 이원제 국민의료법 통과에 애쓰던 시절, 부산에는 동양의학전문학원이란 한의학 교육기관이 설립 돼 있었는데 오인동지회(한국의약회)가 학원을 인수하면서 이우룡 선생이 학원장, 나머지 넷은 부학원장으로 취임해 한국 초유의 한의과대학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 시기에 이원제 국민의료법이 통과됨으로써 본격적으로 한의대 승격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했으나 서울에 한의대 설립인가가 먼저 나는 바람에 승격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소헌 선생은 그의 유고집을 통해 동양의학전문학원은 국민의료법 통과에 큰 기여를 했다고 회고했다.
오인동지회가 국민의료법 통과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 노력하던 당시 200여명의 학원생들은 국민의료법안 국회심의를 방청하며 한·양의 양측의 논전이 벌어지고 한의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환호로써 시위하는 등 희생적 활동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소헌 선생은 일제의 유물인 한지한의사 제도를 철폐하지 못한 것이 큰 한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오인동지회 중 소헌 선생을 비롯 3인이나 한지 의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의계 전체를 위한 이원제 국민의료법을 제정시키기 위해 한지한의사 철폐를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이다.
한의계 모순점 통렬히 비판
이즈음 동아일보는 ‘대한민국의 기적이 둘 있으니 하나는 한의과대학 인가요, 하나는 한글철자법 문제’라고 기사화 해 한의대 인가를 비판했다.
이에 소헌 선생은 날카로운 필력으로 ‘여론 자유의 탈선자, 진리정의 사고력의 결핍자, 천성이 경망한 자’ 등의 표현으로 강하게 성토했다.
또한 한 지방지에 한의학을 사이비 의학이라고 기고한 어떤 양의사에 대해 강한 논조로 반박문을 작성하기도 해 특유한 필력과 정연한 논리로 강력하게 한의의 의권수호에 앞장섰다.
한편 정원희 선생은 한의계 내부의 부패와 모순점에 대해서도 누구의 눈치보지 않고 통열히 비판했다.
“의료업자는 모든 위생상의 선구자요, 지도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의원 내부의 불결한 주위환경을 만들어서 뒤떨어진 의료업자의 초라한 행색을 나타내게 하며 전체 의료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사가 적지 않다”고 설파하며 “단체운동에 비협조적인 인사, 비방적인 언동을 일삼는 자”에 대해서도 강하게 지적했다.
한의사회 창립 주도
국민의료법 공포에 따라 한의사 대표단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오인동지회 중 한명인 이우룡 선생을 상임위원장으로 한의사회 창립 작업이 추진됐다.
정원희 선생은 결성 총회 전까지 회칙을 기초하는 일과 결성총회 시 축사에 대한 답변 연설을 하는 일을 맡았다.
52년 12월 10일 각도에서 선출된 한의사회 대의원들이 모여 대한한의사회 결성총회를 갖고 이우룡 선생이 임시의장으로 선출되고 정원희 선생은 이사직을 수행하는 등 오인동지회가 주요 임원직을 차지했다.
이처럼 한의학의 제도화에 여러모로 힘써 온 정원희 선생은 68년 9월 25일 제 1회 ‘한방의 날’(9월 25일은 이원제 국민의료법 공포일) 기념식에 51년 부산 피난 시절에 국민의료법이 제정될 때 한의사제도를 입법화하는데 헌신적으로 노력한 것에 대해 감사장을 받았다.
카톨릭 입문, 봉사활동 펼쳐
정원희 선생의 둘째 아들 정문교(48) 씨는 부친 생전의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 중 선생이 말년에 “인간 정원희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했는가” “나는 이 땅에 한의학을 심었다”라고 자문자답했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정문교 씨는 “임종하실 마지막 순간에도 한의학 발전을 위한 당부의 말씀을 끝으로 운명하셨다”며 “그만큼 한의학을 사랑하고 후배들이 의권수호에 앞장서 주길 바라셨다”고 밝혔다.
선생의 큰아들 정흥교(57) 씨는 “의권운동에 전념하신 탓에 생업은 소홀히 해 집안 형편이 유복하지는 못했지만 큰 것을 이루는 데는 한사람의 희생이 필요한 것 같다”며 아버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헌 선생은 부친이 임종한 후 천주교로 입문해 신자로서도 많은 일을 했다. 그는 성당에서 강론을 하고 신자로서 많은 글을 남겼으며 신자들에게 다양한 치료활동을 하는 등의 신앙 생활에도 주력해 당시 일반 남자들은 출입을 못했던 수녀원에서도 인술을 베풀 만큼 천주교계에서 그의 덕망은 널리 알려졌었다고 한다.
소헌 선생의 제자로 그의 유고집을 정리했던 박태수(부산 성모한의원)원장은 “정원희 선생 삶의 중심은 카톨릭과 의권 사업이었다”고 말하고 “학문적으로도 신경통, 관절통 등 치료에 능해 경남 각지에서 환자들이 찾아 올 정도였으며 그 당시만 해도 주로 탕약과 첩약이 주류를 이뤘는데 선생은 환약 등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알약을 만드는 등 임상의로서도 유명했다”고 말했다.
후학들에 의권수호 강조
84년 12월 작고하기 한달 전까지 당시 한의사협보에 ‘해방 후 한의학의 발자취’에 대한 기고를 완결했던 소헌 선생은 그동안 한의사협보에 썼던 글과 평소 집필했던 글을 책으로 묶어 전국 한의사에게 무료 배포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80년대 당시 침구사법, 의료일원화 등 한의계 의권문제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전국 한의사들이 너무 관심이 없다”며 “한의사가 제도화되기까지 과정이 각고의 노력으로 얻어진 결과임을 상기시키고 그런 정신과 기개로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 나아갔으면 한다”는 유언에 따라 88년에 완성된 유고집은 전국 2천여 한의사에게 우송됐다.
현재 소헌 선생의 셋째 아들 정봉교 씨의 딸 정현지 양이 동의대 한의대 예과 2학년으로 한의계의 대를 잇고 있다.
오늘날 젊은 한의학도와 한의사들이 한의계를 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대는 변했지만 여전히 한의학의 의권수호를 위한 투쟁은 반복되고 있다. 아마 소헌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자신의 생업에만 몰두한 채 한의계의 위기에 대해서 무관심 한 일부 후학들에게 큰 질타와 함께 한의학 발전을 위한 적극적 대처를 촉구했을 것이다.
양두영 기자
첫댓글 정말 훌륭하신 분이시네요~존경스럽습니다.
'나는 이땅에 한의학을 심었다'는 말씀 가슴 뭉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