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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성경의 속성
1. 성경, 하느님의 자기소개
그리스도교는 ‘계시(啓示) 종교’이다. 계시를 다루지 않고는 그리스도교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계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이다.
1) 계시(啓示, revelatio)
‘계시’가 무엇인지는 한자의 의미를 살펴볼 때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계시(啓示)’는 ‘열 계(啓)’와 ‘보일 시(示)’의 합성어로 ‘열어서 보여주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계시에 해당되는 라틴어 ‘레벨라시오(revelatio)’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드러내는 데, ‘베일(velum: revelatio에서 중간 부분에 위치해 있는 vel에 해당)을 젖혀 보이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시란 가려지고 감추어져 인간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하느님을 마치 연극 무대의 휘장(베일)을 젖히듯 열어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연극이나 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는 휘장으로 가려져 있다. 당연히 뒤에 누가 있는지 어떤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휘장 뒤에 등장인물들이 존재하고 있고, 내용을 보여줄 준비에 여념이 없다는 것을 알고 믿기에 관객은 그들이 보여줄 내용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하느님의 존재도 비슷하게 설명될 수 있다. 휘장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 분명 존재하시는 분이며 우리를 위해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고 계신 분이다.
교회는 이러한 하느님의 자기소개(계시)가 ‘성경(聖經)’과 ‘성전(聖傳)’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과거에 말씀하셨던 자신의 주님께서 오늘도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과 성경을 통하여 당신 말씀을 전해 주기를 멈추지 않으신다는 확신으로 살아갑니다. 실상 하느님의 말씀은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며, 성경은 영감 받은 계시의 증언으로서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과 함께 신앙의 최고 규범이 됩니다.”
“성전으로 교회는 성경의 온전한 정경을 인식하게 되었고 또한 성전으로 성경은 한결 더 깊이 이해되고 교회 안에서 그 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경에 앞서 있고 또 성경을 넘어서지만, 그럼에도, 하느님께 감도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2티모 3,16 참조) ‘완전히 독특한 방식’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느님의 백성이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을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식하면서 그 성전과의 연관 속에서 성경에 접근하도록 분명하게 교육과 양성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2) 여러 방법을 통한 계시
하느님의 계시는 여러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곧 자신을 소개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셨는데, 이는 반대로 인간이 하느님을 얼마나 쉽게 인식하지 못했는지를 증명해 준다. 알려주었는데도 존재를 믿지 못하니 온갖 방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태초부터 각 시대 사람들의 심성과 선호 경향을 참작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상대방이 가장 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셨다.
사실 인간 삶의 갈등과 문제점들은 언제나 소통과 전달에서 발생한다. 내가 원하는 뜻을 정확히 전달한다는 것은 상대가 가장 인상 깊고 강하게 느끼게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광고인데, 팔고자 하는 물건을 누가 구매할 것인가에 따라 광고의 내용과 스타일이 뚜렷이 달라진다. 구매 그룹의 성별, 나이, 직업, 문화적 코드 등을 정확히 구별하여 그 대상이 가장 ‘필(feel)’을 받을 수 있는 영상과 메시지, 배경을 광고가 제작되는 것이다. 젊은 층을 겨냥한 의류나 전자제품에 대한 광고에 중년이나 노년층이 공감하기는 어렵고, 중년을 겨냥한 제품 광고를 십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와 영상으로 전달할 리 없다.
하느님의 계시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전달되었다. 고대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장르가 법조문과 신화, 설화였기에 하느님의 계시도 이 장르를 선택하여 전달되었다. 이후 시대가 바뀌어 부족 연합이 형성되고, 더 나아가 왕국이 건설되면서 인간들의 의식이 세련된 ‘신탁’으로 전달되기 시작하자 성경에도 신탁 문형이 대거 사용되었다(예언서의 경우). ‘시(詩)’가 유행이어서 사람들이 시라는 양식을 통해 마음 표현하기를 좋아한다면 하느님도 시로써 당신 말씀을 전달하셨고(시편), ‘잠언’이 유행이라 그 시대 사람들이 잠언을 세련된 장르로 여긴다면 ‘잠언’과 ‘속담’으로 말씀하셨다(각종 지혜문학 작품들). 또한 신약 시대로 들어가면서 ‘비유’라는 형식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자 예수님도 이를 적극 활용하여 가르치셨다(복음서). 그 결과 성경은 여러 가지 다양한 ‘문학 유형’의 총체로 구성되게 되었다.
설화, 법조문, 신화, 시, 예언, 족보, 신탁, 기도, 노래, 연설, 잠언, 비유, 꿈, 환시 등 모든 문학 유형이 총망라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양식 중 이른바 ‘계시 사건의 절정’이라 표현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이다.
구약 시대 내내 온갖 문학 양식을 동원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표현해 왔지만, 여전히 그분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던 인간들에게, 드디어 보고 만질 수 있으며 함께 먹고 마시고 생활하는 ‘가시적 존재’로서 또 다른 자신을 보내신 것이다(히브 1,1-2 참조).
그러나 그렇게 모습을 보여주고 목소리를 들려주었는데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인 이들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결국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키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무지함과 유한함은 성경을 현재처럼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느님을 보고 들어야 소통이 가능한 인간에게, 그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설명하다 보니 그렇게 많은 내용이 수록된 두꺼운 책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인간 의식의 발달과 함께 이루어진 계시
하느님의 계시는 또한 ‘인간 의식의 발달’에 따라 그에 상응한 내용을 전달되었다. 고대에는 고대인들의 문화와 의식 수준에 맞추어 전달되었고, 더 진보된 사회에서는 그들의 의식 수준에 맞추어 내용이 조정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내용을 표현하고자 할 때, 상대의 의식 수준에 따라 표현은 달라지게 된다. 세 살짜리 여자아이에게 표현할 때와 결혼할 상대에게 할 때, 그리고 손위 어른에게 표현할 때 동일한 방법과 내용을 적용할 수는 없다. 세 살짜리 여자아이한테는 ‘세상에서 네가 가장 예쁘다’는 말로 표현해야 말하는 이가 원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비록 그 아이가 별로 예쁜 얼굴이 아니더라도. 그러나 같은 표현을 잘 모르는 타인한테나 그동안 냉랭하게 대하던 이에게 적용한다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확하게 수용되지 못하게 될 확률이 높다. 다 큰 성인한테는 허위와 과장으로 포장된 내용이 오히려 큰 모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창조설화는 인간 존재와 그 존재 방식에 대한 고대인의 우주관을 그대로 반영한다. 곧 인간의 의식 발달 상황에서, 아주 초기적이고 원시적인 우주관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현대과학으로 검증된 우주의 실체를 그대로 전달하지 않으시고, 고대인들의 의식 수준에 맞추어 메시지를 전달하셨음을 드러낸다.
만일 지구는 평평한 땅으로 되어 있어서 계속 걷다 보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에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관(지구는 둥굴며 태양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작은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는)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계시하셨다면, 고대인들은 거기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둥근 지구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 살짜리 아기에게 진실을 말한답시고 서른을 넘은 사람이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치다.
이처럼 진리를 서로 다른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해 말의 표현은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다름’이 도덕적 기준에 위배된다고 비판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세 살 짜리 여자아이에게 네가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했다고 해서 그것을 사기 행각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이처럼 진리는 절대 불변하지만, 때로는 상대적으로 표현을 달리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겉 표현 방식이 아니라 본질적인 내용인 것이다.
또한 성경을 대하면서 많이 놀라게 되는 것이 있다. 놀라울 정도의 폭력성과 윤리적 도태, 원시적이고 미개한 사고 등이 자주 발견된다는 점이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자주 발견하게 되는 하느님의 별명이 ‘만군(萬軍)의 주님’(전쟁의 최고신이라는 의미)일 정도로 성경은 전쟁을 당연시한다. 일부일처(一夫一妻)로 구성된 건강한 가정은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의 성경 인물들은 일부다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생활한다. 설상가상으로 근친상간이나 간통 사건 또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도대체 절대적 진리를 제시한다는 성경에서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을 찾고자 제안된 성경 연구 방법론이 바로 ‘역사 비평적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은 어느 일정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본문이 제작된 시대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비평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이 방법론의 취지이다. 곧 구약 시대에는 전쟁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윤리 의식도 현대인들의 진화된 의식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어야 그 의미가 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여러 교재를 통해 성경 본문의 제작 배경과 시대정신을 공부한다. 분명히 할 것은 적어도 21세기의 고급화된 윤리 의식이나 시대정신을 기준으로 성경의 내용을 폄하하거나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2. 성경의 무류성(無謬性)
이와 함께 설명되어야 할 내용은 성경의 ‘무류성(inerrantia)’이다. ‘’무류성’이란 성경에 제시된 모든 말씀은 진리이며 ‘오류가 없다’는 개념이다.
물론 성경 첫 부분에서부터 오류를 지적할 수도 있다. 창세기를 ‘글자 그대로’ 읽다 보면 성경에 오류가 없다는 말이 오히려 분명한 오류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과학 지식과 창세기에서 제시하는 창조의 역사가 다를 뿐 아니라 성경 자체도 창조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전승(창세기 1장과 2장이 제시하는 창조가 서로 다름)을 제시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서로 다르게 보도하는 두 전승 가운데 하나가 틀렸거나 둘 다 틀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의 관점으로 성경 본문을 본다면 이 관점의 주인공은 ‘창조’ 또는 ‘인류’, ‘지구’가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의 본질을 철저히 외면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느님을 계시하는 책’이고, 따라서 이 책의 주인공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성경은 일종의 ‘신학 보고서’인 것이다. 이는 성경이 이스라엘 역사가 주인공이 되는 ‘역사적 보고서’가 아니며, 또한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나를 제시하는 ‘과학적 보고서’가 아니다.
만일 성경이 이스라엘을 주인공으로 하는 문헌이라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하여 모순적으로 보도하는 본문 중 한 본문은 분명한 ‘오류’로 판정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인공이 되는 신학 보고서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이 어찌 되었건, 그들의 에피소드를 서로 다르게 보도하는 본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의 역사가 주인공인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를 서로 다르게 보도하고 있지만, 본문의 주인공이 ‘지구’ 또는 ‘창조’가 아니라 창조를 이루어 내신 ‘하느님’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창조 과정이 다르게 보도되었다 해서 이를 충돌된 본문으로 간주하지는 않는 것이다.
성경에서 자주 발견되는, 특히 구약성경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본문의 문제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머리 좋은 성경의 저자 또는 편집자들이 서로 모순되고 충돌되는 내용을 담은 본문을 그대로 공존시켜 두었던 이유는, 그 본문들의 모순됨을 발견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하느님의 계시’라는 신학적 목적에 잘 부합되는 본문이라면, 부차적인 부분이 다소 충돌을 일으킨다 해도 문제 삼지 않고 ‘계시된 진리’를 절대적 경외심을 가지고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만화책을 볼 때와 자연과학 관련 논문을 읽을 때 같은 마음 자세로 그 문헌을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설을 볼 때와 신문을 읽을 때도 독자들은 그 본문이 제시할 내용에 대하여 매우 다른 기대치를 가지고 본문을 읽게 된다.
똑같이 책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지만 황당하고 허구적인 이야기가 만화나 소설에 들어 있을 때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기발한 이야기가 나올수록 창의력이 돋보인다고 칭찬한다. 하지만 정직성과 정확함을 근간으로 하는 과학 논문이나 신문에 거짓 이야기가 꾸며져 있음을 발견한다면 모두가 불쾌한 마음이 되고 만다. 이러한 현상의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문헌의 속성을 전제하고 글을 읽어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성경의 속성에 대한 물음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보도하기 위한 역사적 보고서가 아니며 지구의 생태계를 탐구한 과학 보고서도 아니다. 감추인 듯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에 대한 체험을 묘사하고 설명하기 위해 고심한 신학 보고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그 진리의 잣대를 마치 신문이나 논문을 읽듯이 한다면, 이미 성경이 어떤 책인지 그 본질조차 모른 채 접근하는 우를 범하는 꼴이 된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인간 사랑을 서술한 책이 성경이고, 그래서 늘 인간과 공존하면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살아 계신 분이심을 계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성경은 한치의 오류도 없는 본문으로 이루어졌기에, 우리는 성경이 ‘무류’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뱀은 언제 창조되었나요? 카인이 아벨을 죽인 후라면 지구상에 아무도 없었을 텐데 왜 다른 사람들의 폭력을 두려워하나요? 한 가지 사건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보도하고 있는 경우가 왜 이리 많은가요? 등의 질문은 그다지 훌륭한 질문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이 어떤 책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문학적이고 내용적인 균열에만 집중한 질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