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광개토대왕비문과 일본응신묘
일본 오사카에 가면 응신묘와 인덕묘 (p 215)가 있습니다. 이 응신묘 (길이 425m, 후반길이 250m, 높이 35m)의 크기는 피라미드 (저변 230.4m, 높이 137.8m)보다 큽니다. 이런 규모의 고분은 일본의 자존심이 되어야 하는데, 이 응신묘를 일본인들에게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합니다. 일본에 자존심이 되어야 할 유산을 학계에서 감추는 이유가 무었일까요?
[일본서기]에 이런 기사가 있습니다. 응신 1, 390년, “태초에 하늘은 응신에게 삼한을 주었다고 합니다 (p 215)”. 일본도 아니고, 왜도 아닌 삼한을 주었다고 합니다. 응신능에서는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된 것과 같은 황금 마구가 발굴되었으며, 인덕능이라 전해지는 거대고분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되는 유사한 청동거울과 가야지역에서 발굴되는 유사한 갑옷이 발굴됩니다.
다행히도 이 응신묘를 설명하는 열쇠는 광개토대왕 비문으로 풀게 됩니다. 비문에 대한 연구가 한일역사학자들 간에 공방전이 이루어졌지만, “왜가 신라를 침입했다”라는 비문의 구절에 대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 입증에 대한 공방전을 벌였고, 부분적인 구절에만 중점을 둡니다.
하지만, 비문 전체를 그대로 읽어보면, 한(韓)역사의 비밀을 풀 아주 중요한 사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광개토대왕의 주적은 당시 백제 아신왕이 아닌 응신으로 밝혀집니다.
광개토대왕의 (금강)공격 (396년)으로 한반도에서 밀려난 *삼한백제가 왜열도에서 ‘왜국(倭國)’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일본서기]는 “응신은 왜열도에서 왜국을 건설”합니다 (397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도 “왜국에 축하 사신을 보내고, “태자 전지를 왜국에 볼모로 보내는 기사 (397년)가 나오는데, [일본서기]로부터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응신은 *한반도 중부이남의 지역을 아신왕에게 주는 대신 태자 전지를 볼모로 삼습니다”.
* 삼한백제, 김상 (2004) 삼한사의 재조명에서 삼한백제 명명.
* 한반도 중부이남의 지역은 침미다례 (제주도), 현남 (전남, 전북남부), 지침 (충청, 전북북부), 곡나 (황해도북부, 경기북부), 동한 (경남 서부)의 5지역을 말합니다.
광개토대왕에게 당한 설욕을 회복하기 위하여 백성에게 징발령을 내립니다. [삼국사기], 아신왕, “백제가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병마를 징발하자, 군역을 피하여 신라로 달아난다”고 합니다 (399년)”. [일본서기]에는 “백제 궁월군이 120현민을 데리고 낙동강으로 내려갔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비문] 역시,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399년). 그리고, “백제가 고구려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맹세 (p. 227)를 저버린 이유로 광개토대왕은 (낙동강)으로 처들어 갑니다 (400년)”.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백제’와 [비문]에서 말하는 ‘왜’는 동일하며, 광개토대왕은 주적인 ‘백제 또는 왜’를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몰아내며, [신라본기]에 역시 “왕이 타던 내구마가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운다”고 어려움에 처한 신라를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대성동 고분과 부산동래 복천동고분 (p. 141, 142)이 이를 설명해줍니다.
이 가운데 응신왕이 죽고 아들 토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고 (403년), 이때 고구려가 후연으로 전선을 이동하게 되면서, “황해도 북부지역의 (대방계)지역을 침입하게 되나, 다시 궤멸하게 된다”고 [비문]에 나옵니다 (404년). [일본서기]는 “아신왕이 죽자, 전지왕은 한반도로 돌아오게 되고, 동한의 땅을 돌려주게 됩니다”. 한반도로 돌아온 전지왕은 동진과 교류를 하고, 힘을 모으게 되자, “광개토대왕은 대대적으로 (영산강)유역을 초토화시킨다”고 [비문]으로 알게 됩니다 (407년).
(2) 한반도 회복을 위한 처절한 노력
왜열도로 내려간 백제는 다시 한반도로 오기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남사 백제전, 송서]에 의하면, 동진으로부터 전지왕 (416)은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이란 책봉을 받게 됩니다. 이때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죽고, 장수왕이 즉위하며, 백제 또한 전지왕이 죽고 구이신왕이 즉위합니다 (420).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때 왜열도 역시 궁월군(인덕천황)이 죽고, 큰 혼란이 일어나고, 아지사주(반정천황)가 즉위합니다 (425). 응신세력과 인덕계세력은 왜열도의 세력에 의하여 한반도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그에 대한 중거로 일본 천황가의 무덤인 장고형고분 (p. 247)이 한국 전남지방에서 발견됩니다.
구이신왕이 죽고, 비유왕이 즉위 (427)하면서 신라와 동맹 (433)을 맺게 됩니다. 이때, 한반도 5개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한반도와 왜열도에 있는 실세들은 책봉형 외교전쟁을 통해서 주장하게 됩니다. 왜열도 실세인 아지사주 (p. 250)는 “안동장군 왜국왕”이란 관직을 받게 되고 (송서 왜국조), 목토숙녜(윤공천황) (p. 253)는 “사지절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제6국제군사 안동장군 왜국왕” 이란 관직을 받습니다 (송소 왜국조, 443).
비유왕이 죽고 (한강에 흑룡 출현, 455), 당시 실권자인 여비가 옹립하고, 그의 아들인 여경 (개로왕)은 한반도를 지배하고, 여곤 (곤지)은 왜열도로가서 웅략천황으로 활약합니다. 개로왕은 경기북부, 황해남부, 요서지역을 어우르고, 북위와 함께 고구려를 치려고 준비하나, 이를 안 장수왕에 의하여 한성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은 죽게 됩니다.
이때 문주왕이 웅진 (공주)지역으로 천도를 하게 되고, 곤지는 문주에게 왕위를 잇게 합니다만, 왜열도에서 한반도로 돌아온 곤지는 문주와의 권력 다툼으로 죽게 됩니다. 곤지는 후에 안동대장군 왜왕으로 제수됩니다.
[삼국사기]의 동성왕은 한반도 백제왕으로 알고 있지만, 왜열도에 있을 때는 말다왕으로 활약하고,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고,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북위와 싸우고, 그 지역을 관리하게 됩니다. 진동대장군이 된 아버지 곤지를 후에 정동대장군으로 승격시킵니다. 동성왕은 후에 백제귀족 세력의 반발로 백가에게 암살됩니다.
그 후 무령왕이 다시 세력을 가다듬고 담로 22개 지역을 유지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갱위강국이란 기록이 보입니다. 그 후 성왕, 위덕왕 시기에 신라 진흥왕의 역공으로 백제의 힘의 균형은 한반도에서 왜로 이동됩니다. 무왕, 의자왕은 집권초기와 달리, 집권후반에는 신라에 밀리게 됩니다. 결국 당과 손을 잡은 신라는 백촌강 전투 (p. 330)를 통하여 백제를 밀어내고, 힘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왜로 옮겨집니다. 왜의 지배층은 * 남부여(南夫餘) 본국이 멸망 (660년)하고 남부여 (백제) 부흥군이 무너집니다 (663년).
* [백제 성왕은 서기 538년에 도읍을 사비성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고쳤습니다. 이는 역사서인 『동국통감』에 나오는 사실입니다].
(3) 일본서기의 조작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부정
* 일본서기 https://www.nahf.or.kr/gnb07/snb02.do?mode=view&page=&cid=25183&hcid=27658
* 삼국사기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
======================================================
일본서기
일본서기는 일본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로, 고사기까지 포함하면 현존하는 두 번째로 오래된 일본 역사서입니다. 덴무천황의 명으로 680년경에 시작하여 720년에 완성했고, 일본의 신화시대부터 지토천황의 시대까지를 취급합니다. 1669년, 일본서기 필사본이 존재합니다. 일본서기는 백제기 (근초고왕-개로왕), 백제신찬 (웅진시대) 백제본기 (성왕-위덕왕) 등 한국의 사료와 위서와 진서등 중국의 사서를 병용하고 있어, 일본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저술한 역사서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서술된 한국과의 관계는 왜의 신공황후가 한반도 남부의 신라와 가야를 황당무계하게 정복하였다는 대목이 있고, 연대도 백제의 기년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이주갑인상으로 설명하는 사실이 드러나, 한국 학자 중에는 「사서」(詐書; 허위글)라고 평하는 사학자도 있습니다.
========================================================
720년, 일본의 지배층은 ‘왜(倭)열도 안에서 이루어진 역사’와 ‘비류백제 또는 삼한백제의 역사’를 합친 뒤, 그것을 뒤틀어 [일본서기]를 씁니다. [일본서기]의 역사기준은 응신천황이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내려가 왜국을 건설한 응신을 기준으로 시작됩니다. 한반도에서 내려오게 된 기록을 삭제하기 위하여 3세기에 있었던 신공기록을 5세기 응신천황으로 연결시키고 신공연도를 왜곡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한반도의 삼국의 기록으로부터 조작이 들어날 것을 숨기기 위하여, 일본서기에 백제의 왕조 연력을 슬쩍 넣게 됩니다. 기록을 보면, ‘신공 64년, *귀수왕이 죽고, 침류왕이 왕위를 잇는다’고 합니다.
* 일본서기, 귀수왕, 귀할 귀, 모름지기 수 (모름지기 귀한왕)
* 삼국사기, 구수왕, 원수 구, 우두머리 수 (원수의 우두머리왕)
일본서기 상고사연표 일본서기내용 2주갑인상
신공 55 초고왕 훙
신공 56 귀수왕 입
신공 64 귀수왕 홍, 침류왕 입
========================================================
신공 55 255 초고왕 훙 (213) 근초고왕 훙 (375)
신공 56 256 귀수왕 입 (214)
신공 64 264 귀수왕 훙 (234), 침류왕 입 (384), 근구수왕 훙 (384), 침류왕 입 (384)
신공 65 265 침류왕 훙 (385), 진사왕 입 (385)
응신1 270 390
[일본서기]에는 신공 64년, 264년, 귀수왕이고, [삼국사기]로는 고이왕 (234-286)에 해당됩니다. 일본사학자들은 이 기록에 당황하게 됩니다. 이 기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귀수왕 연도에 120년을 더합니다. 결과적으로 상고사연표를 기준으로 2주갑인상 (1주갑 60년, 120년)으로 설명하면 귀수왕이 근구수왕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공 55년 기사도 초고왕이 근초고왕으로 됩니다. 초고왕과 귀수왕의 상고사 연표에 120년을 더하면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연대와 같아지고, 그러면 설명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틀리다고 말하고, 근초고왕 이전의 기록은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면,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이전의 왕의 연력은 신뢰하기 어렵게 됩니다. *일본역사학자들이 (예. 츠다 소키치)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합니다.
* 일본역사학자, 츠다 소키치
일본은 [삼국사기] (13세기)보다 [일본서기] (7세기)가 먼저 지어졌다는 이유로 일본서기에 대한 신뢰성이 우선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의 근초고왕 이전의 기록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4) 칠지도의 발견이 “일본서기 기록의 조작” 증명
저는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 (p 128)’에 관한 부분을 논리적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록이 *칠지도로 판단이 가능합니다.
일본서기 상고사연표 일본서기내용 동진 4세기 칠지도 위 3세기 칠지도
태화 4화, 369 230
=========================================================
신공49 249 백제의 가야7국 평정 내해 32, 227
신공 52 252 + 120 = 372 칠지도 받음 372 230
* 칠지도(七支刀)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 중인 길이 74.9cm의 양 옆으로 모두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로 칼에는 표면 (앞면)에 35자, 이면 (뒷면)에 27자로 총 62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X-레이 촬영결과 앞면에 十(십)자가 숨겨져 있음이 발견되어 1자가 늘었다). 명문(銘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위키백과, 2016).
이 기록에 대한 진위를 정확히 판별하여야 하는데, 마침 칠지도의 발견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칠지도 (p 130, 132)의 발견으로 인하여, 거기에 적혀있는 연호가 태(*) 4년으로 나옵니다. 태(화) 4년의 판독으로 이해하며, 이 판독이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허구인지 진실인지를 판단하는 열쇠가 되어줍니다. 태화의 연호를 살펴보면, ‘일본이 주장하는 4세기 동진연호’와 ‘한국은 4세기 근초고왕’으로 말합니다.
태(화) 4년은 동진일 경우, AD369년이고, 일본이 주장하는 동진 4년은 일본서기 연표에 2주갑 (120년)을 더하면, 372년이 됩니다. 3년의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설명하기를, 칠지도를 실제로 만든 것은 369년이고, 칠지도를 준 연도는 372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동진은 태화 5년으로 끝나고, 태화 7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본이 주장하는 동진 4세기의 태화 4년은 맞지 않습니다.
한국의 주장을 보면, 당시 동진보다는 백제 근초고왕이 더 강했기 때문에 태화 4년은 근초고왕이라고 하고, ‘근초고왕’이 ‘일본’에게 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양직공도]와 [남제서]의 기록으로 ‘백제’가 ‘왜’에 준 ‘칠지도하사설’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백제의 왕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칠지도를 준 주체는 근초고왕으로 주장하지만, 또 다른 백제를 전제로 한다면, 근초고왕인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태(화) 4년이란 기록이 나오질 않고, 금석문 증거도 없습니다.
태화 4년에 해당하는 연호 가운데, 위魏의 연호가 있는데, 일본과 한국학계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위의 연호인 태화 4년은 AD230년인데,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가야 7국 평정기록과 [삼국지위지 왜인전]에 나오는 3세기 비미호의 기록으로 정확히 복원이 됩니다. 한성백제 근초고왕도 아니고, 4세기중반이 아닌, 삼한백제 (김상, 2004) 왕세자이고, 3세기초기입니다.
=========================================================
일본서기에는
신공, 서기 170년 집권하여, 서기 247년에 죽는다.
신공 49년, 백제가 가야7국을 정벌한다.
신공 52년, 태화 4년, 칠지도 받음
삼국지 위지왜인전에는
비미호가 173년부터 179년 반란을 일으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아달라이사금 173, 비미호가 사신으로 온다.
내해 32, 227, 2월, 서남의 군읍을 순수하다가 3월에 돌아왔다.
내해 32, 227, 3월, 파진찬 강훤을 이찬으로 삼는다.
=========================================================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은 [삼국지]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비미호”랑 인물이 겹칩니다. 집권기간, 반란기간과 백제의 가야정벌 시대가 일치합니다. 또한 [일본서기]의 신공 49년 기록은, [신라본기]와 비교해볼 때, 이 시기에 *5번 싸우는 기사가 나오는데, 4번은 백제가 주적이고, 나머지 하나는 내해 32년, 주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신라를 중심으로 서남이면 가야지역이 됩니다.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9년, 23년, 27년, 29년, 그리고 내해 32년 (5회 기사)
필요에 의하여 삭제한 부분은 있지만 삼국사기 전체 기록으로 볼 때, “서술하되 없는 내용을 지어내지 않는다 (술이부작)”는 역사서 편찬의 중요한 원칙을 지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백제가 가야 7국을 정벌한 기사는 내해 32년, 227년의 기록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삼국지위지 왜인전]과 [신라본기]를 보면, [일본서기] 신공은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반의 인물이 됩니다. [삼국지위지 왜인전],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 23년과 함께 검토를 해보면, [일본서기]에 쓰여진 신공 49년은 백제가 가야 7국을 점령하다는 기록은 AD 227년이 되고, 3년후, * 신공 52년, 230년에 백제로부터 왜가 칠지도를 받은 것으로 됩니다. 실제 칠지도에 쓰여진 태(화) 4년은 위의 연호인 AD230년으로 칠지도에 쓰여진 연호와 각국 나라에서 보여주는 사서의 기록들이 정확히 일치함을 볼 수 있습니다.
* 신공 52년이 AD230년이라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 [일본서기] 응신 25년, 414년, 가야 7국을 공격한 목라근자의 아들이 목만지라고 나옵니다. 만일 백제가 왜에게 칠지도를 보낸 해가 위나라 태호 4년의 해인 230년이면,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 차이가 184년 이상이 되기 때문에 신공 52년은 AD230년이 아니고 근초고왕인 AD369년이 맞다고 합니다.
신공 52년에 아들을 난 경우라면, AD369년이고, 아들의 나이는 AD414년에 45살이 되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나이가 됩니다. 하지만 응신 25년은 비정상적인 기록이고, 기년복원이 안 됩니다. 인덕천황 41년, 420년으로 복원됩니다. 다음장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p 122, 244).
목만지의 기록은 [일본서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475년, 목협만치 (문주가 목협만치 {106살}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기록이 나옵니다. 2주갑 인상설에 의한 동진 4년, 369년이라 주장한다면, 목라근자가 가야를 공격한 년도는 AD369년이 되고, 아들인 목협만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여 AD 475년이 됩니다. 106년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일본서기의 목만지 기록으로도 목라근자는 동진 4세기 인물이라고 주장하기 힘듭니다.
신공이 4세기라는 기록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라근자가 가야를 정복한 년도를 369년으로 하면, 아들인 목만지가 [일본서기] 응신 25년, 414년으로 연결되어 보이지만, 응신기에 목만지를 목라근자 아들이라고 조작한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 475년의 목협만치 기록으로 딱 걸리게 된 겁니다. 이 구절은 소아씨가문 (목씨성가문)이 일본열도의 큰 세력으로 부상하고, 가문의 정당성과 우수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목라근자를 정통으로 연결을 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김상, 2001).
(5)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을 통한 3-4세기 한국의 역사복원
한국에서는, 1145년, 고려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삼한백제의 역사를 빼고, 한성백제의 역사만을 가지고,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만듭니다.
===========================================================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이 1145년 (인종 23)에 완성한 삼국시대사입니다. 한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정치적 흥망 변천을 주로 기술한 정사체의 역사서입니다. 삼국사기에 대해 신라 위주로 서술되었다는 점, 백제의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 고조선을 비롯한 가야, 동예, 옥저, 삼한, 발해 등의 역사가 빠져 있다는 점, 사대주의적이라는 점 등의 비판이 있습니다.
삼국사기 평가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황제만이 쓰는 본기로 기록했으며, 고구려가 중국을 싸워 이긴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기록합니다. 또한 중국사서가 자국의 불리함을 숨겼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일제식민시기 단재 신채호씨는 묘청이 김부식에 패함으로 이땅에는 사대주의가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태워 없앤 것이다라고 합니다.
오히려 조선시대 선종때는 서거정이 쓴 동국통감에 의하면, 고려 500년 동안 오직 삼국사기가 있는데 그 기록이 고르지 못해 빠진 것이 많고 공손함을 잃었다라고 합니다. 권근은 동국통감 서문에 삼국사기는 장황해 읽으면 잠이 생각나고, 황당하고 거짓이 있고, 이야기 한 사람이 불경하다라고 혹평하면서 유교적 방식이 철저하지 못함을 지적합니다. 동국통감에 의하면 매년 반드시 중국연호를 먼저 적어서 존중한다. 신라가 자주 연호를 사용해 중국을 감히 흉내 냈으므로 삭제한다고합니다. 이처럼 삼국사기는 시대에 따라 평가를 달리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보수사학자들도 4세기 이전의 근초고왕 전의 기록들은 대체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동조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국보수사학계는 일본이 주장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부정’을 인정합니다.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적인 논문을 통하여 삼국사기 초기기록 부인을 인정합니다.
예를들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기사는 과장된 것으로 말합니다. 근초고왕 기사중에 없어진 초기기록 19년을 김부식이 온조대에 넣었다고 합니다 (p 82). 이런식으로 주장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초기기록 부정’을 주장하는 이유 속에는 비밀의 진실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보수사학자들은 그에 동조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한국의 『역사』를 보면, 부여의 시조 (해모수),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주몽),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비류왕),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거서간과 석탈해이사금과 김알지), 가야의 시조 (수로왕)를 소개합니다. 하지만 그 후, 1세기부터 3세기 초는 건너뛰고, 고이왕 (3세기 중엽)과 근초고왕 (4세기 중반)만 설명하고, 신라는 4세기 초반은 건너뛰고, 내물마립간 (4세기 후반) 이후부터 설명합니다.
백제는 250년간, 신라는 300년간을 교과서에서 소개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설명할 내용이 없어서 일까요? 너무 어려워서 일까요?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일까요? 제외된 삼한사의 역사기록이 그 시대에 존재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쓰이는 『역사』 교과서 (금성출판사, 2016)의 구절(또는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소국병합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는 마한소국의 하나였던 백제국이 급성장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웠다고 전한다 (기원전 18). 이는 고구려계 이민이 한강유역의 토착세력과 힘을 합쳐 백제를 건국하였음을 보여준다. 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마한의 목지국을 압도하며 이 지역의 맹주로 발돋움을 하였다.
신라의 건국과 진한의 소국병합
한반도 동남부에도 큰 변화가 진행되었다. 진한지역에서는 경주지역의 사로국이 신라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가 이 지역의 추대를 받아 신라를 세웠다고 전한다 (기원전 57) 사로국에서 시작한 신라는 3세기 후반 중국 서진과 교류하며 진한의 맹주로 떠올랐다. 그 뒤 주변 소국을 병합하여 4세기 중반에는 진한 전역을 다스리는 영역국가로 발돋움을 하였다. 이 무렵 신라의 왕은 자치권을 지닌 6부와 함께 국가를 운영하였고, 복속지역은 토착세력을 통해 간접지배하였다. 그러나 4세기 후반 내물왕 대에는 왕권이 크게 강화되어, 박, 석, 김 3성이 번갈아 계승하던 왕위를 김씨가 독점하였다.
=========================================================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서문에는 온조와 비류를 다룬 기사들이 나옵니다. 온조를 다룬 기사는 상세하고, 백제본기 첫 머리에 독립된 조목을 이루고 있지만, 비류를 다룬 기사는 <백제본기> 서문에만 아주 짧게 나옵니다
광개토대왕 비가 발견된 후에, 이에 대한 의문으로 김성호님이 그것을 바탕으로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1982)>을 썼고, 그 책에서 백제를 ‘온조의 백제’와 ‘비류의 백제’라는 두 나라가 합쳐진 것이라고 가정하고, 땅 이름을 고찰하는 가설로 금강유역과 영산강유역을 다스린 나라가 “비류백제”임을 증명하였고, 그 후, 김상님은 <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2001><삼한사의 재조명 1, 2, 2004, 2011>으로부터, 비문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일본서기>, 중국 역사서들을 참조해서 “삼한백제”를 복원합니다. 이로써 한국사의 수수께끼들을 합리적으로 풀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삼한백제의 역사를 너무 정밀하게 삭제했기 때문에, [백제본기]의 빈 곳, 즉,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곳을 보면,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이 삼한백제 지역은 한국사 2-3세기에 해당되는 삼한사 부분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한국사에서 이 부분에 해당되는 기록을 제외한 결과, 백제와 신라 초기기록이 삭제되어 한국교과서가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3세기, 4세기 당시 한반도 역사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일본서기]의 주체가 삼한백제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삼한백제에 해당되는 기사는 이유있는 삭제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로는 신라위주로 기록된 [삼국사기]는 2-3세기 당시 삼한백제가 마한, 변한, 진한, 임나, 왜열도 지역에 세력권을 행사했고, 마침내 가야와 신라를 접수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을 담기 힘들었을 겁니다. [삼국사기]에서 삼한백제 부분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실체를 알 수 없게 만들었지만, 중국사서에 나오는 대륙백제에 관한 기록들이나, 고고학으로 출토되는 유물까지 부인하여 설명하기는 역부족입니다.
비류가 마한의 한왕체제를 대신해 진왕체제로 바꾸고 한성백제, 임나, 변진한에 세력권을 두는 것이 3세기초기입니다. 신라가 가야를 도와줌에도 불구하고, 삼한백제는 왜열도의 도움으로 가야를 멸망시키고, ‘칠지도 (230)’가 이를 입증합니다. 고구려는 왕조초기부터 요동과 만주지역에서 활약하고, 3세기초기에 지나반도의 漢이 망하고, 난리를 겪으면서 피난민들이 한반도로 밀려오게 되며, 요동지역은 공손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나, 삼국시대에 魏나라와 고구려의 침공으로 요동의 대방인들은 황해도로 밀려옵니다. 이때 한반도로 말갈인들이 밀려오게 되고, 이들의 침입과 함께 한성백제는 초고왕 구수왕을 거치고, [삼국사기]에는 말갈기록이 사라지며 고이왕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증명하듯, 고고학적 유적으로 ‘고구려식 적석총인 석촌동고분 (p 155)’ 등장합니다.
3세기중반에 요동지역의 대방군은 황해도 지역으로 이동하고, 비어있는 요동지역을 탈환하기 위하여 위나라와 고구려는 전쟁을 치룹니다. 싸움에 밀린 위나라는 일부가 신라지역으로 들어갑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46년, 위나라 요동태수라 불리는 관(무)구검 (선비족)이 고구려와 싸우고, 그 후 무구검 군인들은 신라인이 되었다는 기록이 [북사신라전]과 [수서신라전]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듯 3세기후반 가야지역으로 알려진 김해지역에는 가야고분군으로부터 무장군인들이 사용한 북방계 (선비족) 유물인 동복과 호형대구뿐만 아니라 철갑옷등이 발견됩니다. 가야고분군에서 나오는 북방계유물과 순장문화 (p. 141)는 북방기마 민족과 관련되고 있다고 합니다 (신경철, 부산대 고고학과). 하지만 북방계 유물을 문헌사학으로는 4세기 금관가야의 주체로 설명하고, 북방의 선진기술을 도입해 투구와 철갑으로 무장한 기마전사를 양성하였다고 합니다 (김태식, 홍대 사학자).
가야 멸망 이후 북방계의 침입으로 잠시 주춤한 삼한백제는 다사 신라를 공격합니다. 이 시기의 [신라본기]를 보면, 유례이사금 15, 298년, 사로국은 안개가 낀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왕은 죽습니다. 이 당시 [후한서]와 [삼국지]는 백제를 동이강국, 한예강성이라고 부릅니다. 백제는 한반도 중부이남을 통일하고 신라를 45년간 지배합니다.
3세기중 후반은 금강, 영산강 지역뿐만 아니라 (낙랑, 대방), 창령, 왜열도까지 백제지역 전체에 걸쳐서 발견된 백제의 유물,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등이 나주 옹관묘 (p. 141)와 함께 그 당시의 백제를 증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합천군 옥전 유적지의 다라국에서는 용봉문환두대도 (p. 191)를 비롯하여, 백제의 유물을 포함한 16만점에 달하는 엄청난 유물들이 가야지역에서 나와서, 이 시대 백제를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4세기초기에 그 후 넓은 지역을 차지한 백제는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낙랑 대방 사람들을 신라지역으로 이주시키고 (기림이사금 3, 300), 국호를 다시 신라로 변경합니다 (기림이사금 10, 307). 그리고 백제는 신라지역 사람들을 김제벽골제 (p. 178)로 이주시키고, 벽골제를 완성합니다 (흘해이사금 21, 330년). 학계는 김제의 벽골제가 백제지역에 있기 때문에 백제 비류왕을 신라 흘해이사금으로 잘못 기록했다고 하는데, 신라본기에 기록된 것처럼 흘해이사금으로 정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삼한백제의 역사는 삭제 대상이기 때문에 백제기록은 없는 게 정상입니다.
석씨신라의 원래 지역이었던 대륙의 월주지역은 이때 韓의 세력권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백제는 대만, 동티모르, 인도 남부지역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원주 법천리나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계수호나 청동초두도 백제가 대륙 동쪽지역까지 진출 했음을 알려주는 유물입니다.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된 미추왕릉 C 지구에서 발견된 신라인면구술 (p. 184)은 3세기 후반이나 4세기 초반의 백제의 세력권을 말해주고 동티모르의 진출과 관련됨을 말해주고, 후에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에서 나오는 코끼리 모습과 토우에서 보여주는 고상가옥, 개미핥기, 물소, 원숭이모양 (p. 185)역시 백제의 세력권과의 상관관계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신대 권오영교수는 3세기의 한반도 상황을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한반도는 한사군으로부터 중국문물을 수입하였고, 그 후, 313년, 낙랑 대방을 한반도에서 죽출하고 (300년에 이미 낙랑 대방인들은 신라지역으로 이주됨) 선진문물의 수입중단이라는 심한 충격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동진제 초두와 계수호 (p 182)를 예로 들면서, 4세기 중반 한반도에 최고급 중국문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낙랑과 대방으로부터 중국문물을 수입해왔는데, 해체된 이후, 동진제 초두와 계수호가 어텋게 수입됐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역사스페셜).
하지만 당시 한반도 공주와 영산강을 중심으로 지방지역에서 발견된 금동관모의 우수성에 비하면 동진제 청동초두와 계수호가 초라해 보이는건 사실입니다. 어떤 근거로 중국의 선진문물의 중단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칠지도, 금동관모, 환두대도의 상감기술 등은 3-4세기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세계 최고의 기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3세기의 삼한백제의 우수성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는 한사군의 낙랑과 대방으로부터 4세기까지 선진문물을 수입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전대 역사학과, 이한상 교수는 지방에서 출토되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p 149)의 주체는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한성백제의 왕으로부터 권위의 상징으로 지방수장에게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왕은 4세기중반 근초고왕이라고 합니다 (역사스페셜). 하지만 지방수장들의 권위가 중앙권력으로부터 나왔다는 상관관계의 증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 후 기후의 한랭화로 4세기에 만주에는 5호 16국 시대가 펼쳐지며, 마한 또는 백제의 세력권 안에 있었던 신라는 국제질서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4세기중반에 백제의 힘의 균형은 한성백제 근초고왕으로 옮겨지며, 훈족의 일파로 알려진 연나라 모용황의 군대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신라를 장악하고, 이를 증명하듯 적석목곽분이 나타나게 됩니다. 페르시아와 로마식병기로 무장한 군대가 신라에 나타나고, 4세기후반의 황남대총 (내물이사금)을 비롯한 5세기의 금관총 (자비마립간), 금령총 (소지마립간), 서봉총 (조생부인), 그리고6세기 초의 천마총 (지증마립간)등과 함께 150년간 존재한 마랍간시대의 신라금관이 발견됩니다 (김병모, 1998, 2001).
역사교과서에서 소개하기를 4세기중반 백제의 근초고왕이, 5세기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6세기에 신리의 진흥왕이 활약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복원하자면, 위에서 설명하듯이 3세기초기에 비류백제 또는 삼한백제가 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하고, 한성백제, 임나, 왜열도와 함께 가야를 접수하고, 3세기중반에 신라에 선비계 북방민족이 내려와 전쟁을 치루지만, 4세기초기에 삼한백제는 신라를 접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서, 월주, 동티모르, 인도지역으로 뻗어나게 됩니다.
(6) 주변국들의 자국역사를 위한 처절한 노력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간 삼한백제는 왜열도에서 왜국으로 존재하지만, 후에 일본이란 이름으로 둔갑하여 일본서기를 만들고, 그의 연표도 필연적인 조작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고려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만들 때, 유감스럽게 삼한 (비류백제, 삼한백제)과 관련된 삼한사가 빠져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빼고 기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사의 韓은 한민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이나 [삼국사기] [일본서기]와 함께 검토해보면, * 배달민족의 정체성이 역사적인 사실로 숨겨져 있습니다. 그토록 우리가 찾았던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내용은 사뭇 충격적이며, 인정하기 힘든 부분도 들어 있습니다.
* 배달민족, 아사달달문화, 동이족, 동이문화
우리는 한국역사를 반만년 역사로 기억하고,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위대성을 강조하고 삼한일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우리의 역사는 고조선이 망하고, 열국시대가 시작하면서, 삼한에 대해서 배웁니다. 한국역사책에는 한반도지역 중에서 한강유역이남, 서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마한, 남한지역에 변한, 남동부 지역에 진한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중국사서 위지 동이전에는 삼한의 크기가 4000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배운 삼한은 뭔가 부족한 면이 있음을 느낍니다. 한반도를 3000리 금수강산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배운 한반도는 삼한을 아주 작은 부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韓과 관련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그 실체가 쉽게 들어나지 않습니다.
또 한가지 일본은 일본사를 살리기 위하여 한국사를 말살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조선 총독부시절 (1910-1945)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한국역사를 철저히 말살합니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말살하려는 것은 “漢나라의 漢사군 설치에 의한 대동강 낙랑지역 지배”와 그 이후 “가야지역의 임나일본부에 의한 지배”로부터 韓국의 역사는 시작되었다라고 하면서, 단군역사를 신화로 만들고, 역사로부터 분리하며, 한국 스스로가 아닌 漢나라와 일본의 지배로부터 역사는 발전되어, 타율성과 의존성이 발전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조선의 당파싸움이 한국역사의 근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일본은 왜 한국역사를 말살시키려 하나요? 단순히 강자라 그럴까요? 제국시대의 흐름이라 그런 걸까요?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을까요? 일본은 일본서기를 만들 때,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과 함께 위魏서, 진晉서를 사용합니다. 백제의 역사를 가지고 일본역사가 탄생됩니다. 백제를 가지고 일본서기를 만든 역사가 일본역사가 됩니다. 그리고 후에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만듭니다. 이에 김부식은 신라, 고구려, 백제를 합쳐 삼국사기를 만들지만, 한성백제를 백제로 교체하고 삼국사기를 만들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한반도 백제를 가지고, 일본서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삼국사기를 만들 당시에는 한성의 십제를 백제로 대체화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사학자들은 삼국사기 초기역사를 허구라 주장하고, 한국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를 허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 그에 관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논리적인 대응보다는 비전문가로 매도하는 분위기입니다.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도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관한 논문을 내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가지 의문이 더 드는 점은 문헌사학과 고고학이 이 시기에는 일치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고고학적인 유물과 문헌사학과 맞지 않는 부분은 이해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백제본기 서문에도 소개가 되었듯이, 한반도에 온조십제 (한성백제)와 비류백제 (삼한백제)가 존재하였지만, 삼한백제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적과 유물들이 한성백제만으로 설명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실하 (한국항공대학교 인문자연학부, 2007) 교수님에 의하면, 중국 정부의 역사왜곡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지방 역사’로 만드는 일인 동북공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고조선을 세운 단군과 그 후신(後身)인 부여의 역사까지도 ‘중국의 역사’로 만드는 이론인 ‘요하문명론’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 규모가 아주 크고, 배달민족의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한국 국민으로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바로잡아야 하는데, 현재 한국의 사학계, 특히 국민의 혈세로 이루어진,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오히려 중국에서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국제사회에 인정해주는 실정입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삼국사기』에서 빠진 삼한사를 알아차리고, 비문 (광개토대왕 비문)과 다른 역사서들을 견주어 그것을 바르게 이해했을 때, 설사 큰 충격을 받고 새로 알게 된 것이 고정관념이나 기존 인식과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실지라도, 일단 진실을 아는 것이 먼저고, 그것을 가치로 판단하는 일은 나중에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이 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편년체 식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정리하는데 사학과 석사, 이재환님께 감사드립니다. 부디 이 책이 여러분에게 ‘역사를 이해하는 새 길’을 열어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