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정성일씨 글입니다. 이분 아실지 모르겠는데...
저도 영화는 잘 모릅니다. 이 분 어투가 특이하죠...
며칠전에 이 영화봤는데-친구가 보자그래서...
이글 참 재미있어서 퍼왔어요...
참 정성일씨가 나오는 라디오방송알고 계시면 알려주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영화 "친구"를 보고
"저 세 그루 나무들을 어디서 보았었지? 저 나무들을 본 것이 내 인생의 아주 옛 시절이었기에, 그 나무들을 둘러싸고 있는 경치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것일까? 아니면 읽은 것이 없었다고 생각한 책에서 어떤 페이지를 발견하고 흥분하게 되는 것처럼, 내 어린 사절의 망각한 책에서 세 그루 나무들만이 떠오르는 것일까?"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아가씨들" 편
"유년 시절은 이제 멀리 지나가 버렸다. 드디어 그것은 지상에 대한 요구를 평소에는 밤에만 그렇게 해왔지만, 낮의 모습 앞에서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에 관한 꿈의 하늘에 있던 나의 유년시절은 지평선 위로 높고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 발터 벤야민 "베를린의 유년시절"
갑자기 기억이 문제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영화에서 기억은 매우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왜냐하면 기억을 말하기 시작하면, 기묘하게 몸을 뒤틀면서 역사를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설정되면, 우리는 그를 믿어야만 한다. 우리들은 그의 기억 안에 들어가고, 그 안에서 세상의 질서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배열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같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 안에 들어가서 동일화하는 척 하면서 그를 훔쳐보는 내면의 관음증이다. 그것을 영화는 매우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영화가 기억장치가 된 것은 오손 웰즈의「시민 케인」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이미 죽은 인물이다. 그를 다섯 명의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자기의 위치에서 다시 불러낸다. 그러니까 찰스 포스터 케인은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그를 완전하게 죽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남은 자들 안에서 여전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경우에도 완전히 죽지 않으려면 결코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을 남겨놓으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문이 따른다. 만일 기억하는 사람이 지나 가버린 일을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하거나, 그 무언가와 혼동을 일으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알랭 레네가 누보 로망 소설작가 알랭 로브-그리예의 도움을 받아 만든「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는 기억과 시간이 어떻게 불일치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여기서 레네는 분명하게 모든 것을 모호하게(이 말이 갖는 이중적인 아이러니의 효과) 만든다. 예술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 반복해보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 반복하고 싶은 것일까? 그것은 시간의 매듭을 풀어나가는 반대로 이미 풀어진 시간을 자기의 방식으로 매듭을 지려는 것이다. 그 매듭이 풀기 어려운 것은 양쪽 중 어느 쪽을 잡고 풀어야 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매듭은 짧은 쪽을 잡고 풀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 짧은 것인지, 아니면 다가올 일이 짧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매듭이 풀리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그건 매듭을 가위로 자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둘로 잘리고, 그 둘은 서로 다른 하나가 된다. 영화에서 기억을 다루는 영화들이 유난히 죽음에 사로잡힌 것은 그것이 매듭을 푸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듭을 그냥 내버려두든지, 아니면 잘라서 하나였던 것을 둘로 나누어야 한다.
지금 이 자리는 곽경택 감독의「친구」를 보면서 그 영화에 관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신(나는 이 영화가 사람들이 말하는 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한 사유는 다음 번에 꼼꼼하게 검토될 것이다. 지금 막 감동을 받고 나온 당신에게 반대 의견을 개진하고, 거기에 동의시키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자신과 반대 의견에 부딪치면 그걸 받아들이는 것을 틀린 시험지 채점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힘들어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영화를 보는 것은 자기가 본 것에 대한 평가에 대해 과도한 신뢰를 갖게 한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방금 보고 나온 것이 사실상 상상적인 재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추억에 먼저 기꺼이 몸을 내맡겨볼 생각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대한 글은 그 다음의 일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나는 여기서 일기를 쓰다가 매우 특별한 메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메일을 보낸 사람은 "영화평론가들은 언제나 영화를 보고 나면 재판관이 됩니까? 영화를 보는 것이 조금도 즐겁지 않으십니까?"라고 의아하게 질문했다. 나는 이 메일이 사실은 핵심을 지적했다고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우리들의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너무 많은 영화에 관한 글들은 자기 자신을 재판관과 동일시한다. 그건 영화비평가라는 이름을 걸었건, 아니면 동호회의 모임에서 쓰여진 것이건, 학회지의 모임에서 돌려읽기 위해 작성된 것이건, 또는 홈페이지에서 스스로 흥에 겨워 쓴 것이건 너무나도 이런 방식에 전염되어 있다. 그래서 종종 영화에 관해 점수를 매기거나, 더 나아가 그것을 놓고 선과 악으로 나누기조차 한다. 그렇게 하고는 흐믓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글들은 매우 고통스럽게 쓰여졌거나 아니면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작성된 것 같다. 재판관은 결코 피고와 연애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대상과 관계를 설정하는 한 사랑은 생겨나지 않는다. 설혹 생겨나더라도 그것을 의심하거나 숨기려고만 할 것이다. 그러나 증오보다 사랑이 더 숨기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대신 영화를 대상으로 설정하지 말고 개념으로 놓고 사유해볼 것을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서 세계를 다시 구성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가서 우리들의 정서와 감각으로 이미 주어진 것을 다시 배열하여 의미와 표현을 창조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서 영화는 세상에 대해 토픽의 절단을 던지는 문제틀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하려는 것은 곽경택 감독의「친구」을 말하기 위해서 먼저 나 자신의 내면 안에 감추어진 추억을 끌어내고, 나와는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나는 곽경택 감독보다 5살이 많다) 완전히 다르게 살아온(나는 서울에 살았으며, 그는 부산에 살았다. 그와 나는 95년 서울 단편영화제에서 만날 때까지 서로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두 사람 사이의 차이를 먼저 인정할 생각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영화에 관한 글에서 영화를 만든 사람과의 차이를 통해 결국 무엇이 사라지고, 어떤 것이 덧붙여지는 지에 대해서 말할 생각이다.
곽경택 감독의「친구」를 보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갑자기 나 자신의 추억에 잠겼다. (그리고 이것이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남자" 영화평론가들의 이상하게 공통된 서두이다. 그 반대로 이 점을 예외없이 "여자" 영화평론가들이 지적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 "성차(gender)’에 대한 매우 노골적인 논쟁을 담고 있는 영화이다) 나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곽경택 감독처럼 깡패 친구들을 두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데) 나는 중학교 시절 거의 깡패의 길을 걸어갈 뻔했다. 나는 주먹질을 하고 다녔으며, 반에서 싸움이 붙으면 바로 의자를 들어서 상대방을 부서지도록 내려 패곤 했다. 겁을 주기 위해서 맨 손으로 유리창을 깼으며, 지금도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은 그때 싸움을 하다가 부러진 손마디가 완전히 접히지 않는다. 삼학년 선배들은 나에게 자기네 써클에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으며, 주말이면 롤러 스케이트장에서 예쁜 여학생들에게 휘파람을 불곤 했었다. 언제나 모자는 삐딱하게 쓰고 다녔으며, 수업시간은 아예 돌아앉아 잡담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입만 열면 상소리를 하고, 얼굴을 잘못 맞아서 코피를 흘리면 그걸 손바닥에 바르면서 상대방의 뺨을 갈기곤 했다. 피에 젖은 손바닥으로 뺨을 맞으면 그 다음날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기 때문이다. 싸움을 하기 위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처음 상대방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릴 때이다. 둘이서 싸움이 벌어지면 먼저 붙잡을 생각을 먼저 한다. 그것은 상대방을 때릴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때려서는 안된다고 배웠으며, 그러한 교육을 위반하는 것은 이미 몸 안에 육화되어있는 제도에 의해서 집행되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단 한번만 상대방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면 그 다음부터는 그러한 망설임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가는 것은 오랜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 반대로 문명에서 야만적이 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다. 그저 위반하면 된다.
내게는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하나는 거의 코미디언이라고 할만큼 급우들을 항상 웃기는 친구였으며, 다른 한 명은 매우 아는 게 많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그런데 그 책이라는 건 대부분 무협지이거나, 아니면 연애소설들이었다) 이상하게도 학교 공부와는 담을 쌓은 친구였다. 우리들은 매일 같이 어울려 다녔다. 우리들은 학교가 끝나면 동시상영 영화관으로 달려갔으며, 거기서 왕우와 깡따위, 적룡, 텐풍, 리칭, 정페이페이가 나오는 홍콩영화에 열광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이소룡 영화는 별로 였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항상 친구들에게 진짜 홍콩영화는 주연이 문제가 아니라구! 도연이라고 쓴 데에 장철(Zhang Che)이라고 쓴 걸 보라구!라고 주장하곤 했다. 도연이라는 말이 감독이라는 걸 안 건 고등학교에 가서이다) 밤이면 나는 집에서 무협소설을 집필하느라고 밤을 새우곤 했다. 정릉이 집이었던 나는 성북구의 거의 모든 만화가게를 뒤져서 무협지를 독파했다. (나는 일주일에 무협지 한 질씩을 읽었는데, 이건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2학년 마지막 겨울까지 계속된 나의 독서이다. 나는 남들이 고전이라고 부르는 소설들의 대부분은 대학교에 가서야 읽었다. 일년이 52주이니까 260질정도 읽었다는 뜻이다. 보통 한 질이 5권이었는데, 그렇다면 1300권 정도 읽었다는 말이다. 그럴 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좋아하던 무협지를 수집하기도 했는데, 부모님 몰래 200권 정도를 모아놓기도 했다) 우리는 학교 수업이 끝나고, 어둠이 내리고 나면 휘황찬란하게 불 켜진 도시의 밤거리를 쏘다니면서 세상의 비밀이라도 안 것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 영화관들은 동시상영이거나, 아니면 "쑈도 보고 영화도 보고"라는 이름을 내걸고 엉터리 쑈 단을 불러와 되지 않는 우스개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 나이 때에도 아무리 봐도 아줌마가 분명한 뚱뚱한 여자들이 마치 물랭 루즈 캉캉 춤이라도 출 듯이 나온 뱃살을 힘겹게 감당하면서 올라가지 않는 다리를 들어 올릴 때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속옷에 어린 나의 친구들은 울렁이는 가슴을 숨기기 위해 야유를 보내곤 했다. 가수들의 이름은 너훈아, 남준, 김춘자, 이민자로 이어지는 유명 가수들의 철자놀이에 가까운 명단이 줄을 이었다. 종종 가수들은 오리지널과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나왔지만, 그들의 노래 솜씨는 형편 없었다. 음정 박자가 전혀 맞지 않는데도, 지금 생각해보니 신기한 것은 그들이 절대 립 싱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때로는 객석에서 보다 못해 뛰어 올라간 인근 동네 청년이 훨씬 근사하게 노래를 한 곡 뽑고 내려오곤 했다. 그때 본 영화들 중에서「심야의 결투」와「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용호의 결투」,「권격」,「13인의 무사」,「아랑곡의 혈투」,「화월춘야」는 "내 어린 시절의 명작"들이다. 나는 이 영화들을 여전히 좋아할 지가 정말 궁금하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어떤 경로로도 이 영화들을 다시 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이 이 영화들을 제작한 홍콩의 쇼 브라더즈사가 자신들의 판권을 값을 올려 팔기 위해 움켜쥐고 있는 까닭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지금 부천 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인) 김홍준 감독이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결국 무산되면서였다. 우리는 그때 레드 제플린과 디퍼플 중에서 누가 더 진짜 잘하는가를 놓고 다투었으며, 야전이라고 불리던 야외 전축 하나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밤마다 콧수염을 기른 이장희가 진행하는 동아방송의 영시의 다이얼을 들었으며, 그의 라이벌 라디오 프로그램은 허스키한 목소리의 서유석이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새벽 열 두시가 넘어서 그 프로그램에 전화를 하는 여고생들이 정말 궁금했다. 만일 그 시절 내가 잠을 안자고 라디오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버지는 나를 거의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나는 원치 않았는데도 라디오를 듣다가 잠이 들어서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에 깨어보면 가끔 북한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중학교 이학년 생이었으며, 세상에는 박정희가 살아 있었고, 아직 베트남전이 끝나지 않았으며, 나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이승복과 동갑이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이상한 나의 동갑내기가 세 명인데, 한 명은 이승복이고, 다른 한 명은 "천재소년"으로 알려졌다가 오랜 시간 동안 완전히 사라졌던 김응용씨이고, 마지막 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이었던 박지만이다. 단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내가 살아왔던 시대의 아우라를 "본다".
그런데 나는「친구」를 보면서 곽경택 감독이 친구들에 대해서 갖고 있는 관심에 비하면 이상하게도 그의 동세대에 대해서 유난히 무관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또는 그 스스로 "자서전적인 영화"라고 밝힌 이 영화 속에서 이상할 정도로 자기가 살아온 시대에 대해서 그 어떤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는 것은 참으로 낯설게 보였다. 왜냐하면 그 시절은 살아오면서 세상에 대해 가장 예민했던 시절로 남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 같은 깡패 소년에게도 그러할지언데, 곽경택 감독처럼 모범생이 그러하다는 것은 내게 일종의 의도처럼 읽혔다. 정말 그럴 지도 모른다.) 낮에는 학교에 트랜지스터를 들고 가 오후 3시가 되면 알 수 없는 반항적인 기분이 넘쳐나는 양희은이 진행하는 방송을 들을 지, 아니면 차분하면서도 소녀 같은 청순함이 감도는 박인희가 진행하는 방송을 들을 지 점심 때부터 근심에 잠겼다. 그러나 내가 깡패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나날은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끝났다.
나의 중학교 이학년 담임선생님의 별명은 삼룡이였다. 담임선생님은 자주 아이들을 때렸다. 물론 나쁜 일을 한 아이들을 때렸지만, 담임선생님에게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매를 드는 대신 종종 아이들의 뺨을 때리곤 하였다. 내 친구는 전 날도 청소를 안하고 집에 갔다. 더더구나 그날이 이학년을 마치는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에 더더구나 그랬던 것 같다. 우리는 그 전날 사이좋게 종로에 있었던 한일극장에 가서 홍콩영화를 보았었다. 이제 막 시작할 봄방학 앞에서 자못 들떠서 그날도 빨리 종업식을 끝내고 영화를 보러갈 참이었다. 그런데 그 전날 청소를 안하고 도망친 친구들의 명단을 불렀다. 내 친구는 입버릇처럼 "한번만 더 내 뺨을 때리면 죽여버린다"고 말하곤 했었다. 나는 그걸 그저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교실 안에서 담임선생님에게 저항한다는 건 중학교 이학년인 나이에 상상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친구는 불려 나갔다. 나는 그저 재수 없군, 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친구가 맞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공책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내 친구의 큰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버지도 뺨을 안때리는데 니가 먼데 때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내 친구는 주먹으로 담임선생님의 얼굴을 정확하게 때렸다. 아이들은 모두 얼어붙었고, 담임선생님은 순간적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처럼 멈칫 하였다. 그냥 일방적으로 내 친구에게 서너대를 더 맞았다. 그때 담임선생님의 반응을 나는 잊지 못한다. 삼룡이는 내 친구와 같이 갑자기 주먹질을 시작한 것이다. 그건 싸움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건 시장 바닥에서 시비가 붙어 난 주먹질이었다. 그 모습은 길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체육선생님이 달려와 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내 친구를 바로 발로 배를 걷어차서 죽은 개처럼 던져버렸다.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말 그대로 내 친구는 허공에 붕 뜬 다음에 책상 세 개를 넘어 곤두박질 쳤다. 종종 체육선생님은 자신이 국가공인 태권도 3단이라고 자랑하곤 했다. 우리는 그걸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은 정말이었다. 그리고 어린 열네살 내 친구를 상대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였다. 넘어진 채 도망칠 수 없을 정도로 쓰러진 내 친구를 향해 공부하는 책상을 밟고 건너가더니 위에서 뛰어내리면서 발로 십여분을 걷어차고 짓밟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친구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내 친구를 질질 끌고 갔다. 내 친구는 퇴학을 당했고, 나는 일주일 후에 삼 학년이 되었다. 나는 우리 반에서 주의 인물이었고,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내게 의미심장한 얼굴로 청소가 하기 싫으면 그냥 집으로 가라고 했다. 아이들은 아무도 내게 싸움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후 아무와도 싸우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내게 싸움을 건 같은 반 아이에게 그냥 일방적으로 맞았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런 일이 싫어졌다.
그 해 겨울 나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어버렸다. 그 후 두세 번 더 만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빠르게 변했다. 삼룡이와 돈을 주고 합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장선생님에게도 돈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없던 일로 한 다음 몸이 아파서 일년 쉬었다고 학적부를 정리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학교도 오래 다니지 않았다. 다음 번에 만났을 때에는 검정고시를 다닌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이미 여자에게로 옮겨가 있었다. 내게 여자를 임신시킨 다음 어떻게 유산시키는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재미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영화를 혼자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내 친구에게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도 내가 더 이상 재미없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친구가 지금 무얼 하는지 모른다.
이 모든 이야기는 내 기억 속에 얼룩처럼 남았다. 그 얼룩은 일종의 찌그러진 모습으로 남겨진 나의 징후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 기억들이 왜 무미건조하게 남지 않는지가 궁금해졌다.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기억들은 자꾸만 나를 그 장소에로 다시 데리고 가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보려고 한다. 그 사건을 보는 나를 내가 본다. 그것은 내가 그 순간 친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만든다. 그런데 정말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만일 내가 그 친구를 찾으려면 더 현실적이고 쉬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자꾸만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그 순간에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소환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또는 지금의 나에게 상실된 그 무엇이 있어서 그것을 자꾸만 채워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실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말 채울 수 있는 것일까? 혹시 잘못과 상실은 서로 연결된 것이 아닐까? 그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된 것이라면 그 둘 사이의 고리는 무엇일까? 그러니까 친구는 내게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모든 사람들의 기억은 다를 것이다. 그러나「친구」를 보면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친구는 그런 의미에서 친구인 것이 아닐까? 혹시 내가 가장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을 엿보게 만드는 그 안에서 나는 이미 친구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럼으로써 친구의 자리가 기억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것은 친구라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의 모습으로 자리잡은 질문처럼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연장하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친구를 그 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친구는 자꾸만 나에게 대답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무언가를 쓰러트리려고 한다. 나는 친구의 힘을 빌려, 그 사건의 논리를 끌어들여, 상징적인 그 무언가를 무시하고, 그 힘으로 질서 없는 혼란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 친구와의 좋은 기억 중에서도 유독 가장 나쁜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나는 기억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쁜" 내용을 바라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필요해진 것일까? 내가 영화「친구」에서 물어보려는 것은 그것이다. 나는 그것이 곽경택 감독의 기억 안에서 얼마만큼의 진정성 여부를 갖고 있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를 이끄는 것은 사람들이 왜 이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 가에 있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영화는 그 안에 대중들의 무의식의 합의가 담겨있는 것이다. 나는 그 합의의 정체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