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원은 창설당시의 기록이 없다.
다만 문도들의 문집 등에서 약간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1572(선조 5)년 4월에 제자들이 도산서당에서 모임을 갖고 상덕사를 세울 것을 합의하여 1574년에 공사를 하여 1575년에 완공하여 여름에 사액이 내려왔다.
1576년 정월에 여강서원에서 도산과 여강서원의 위패봉안 의절에 대하여 논의를 하여 2월13일(丁丑. 陽3.13.)에 양 서원이 같은 날 위패를 봉안하였다.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은 석봉石峯공이 어전御前에서 썼다고 한다.
현판 좌측에 작은 글씨로 ‘만력삼년육월 일 선사萬曆三年六月 日 宣賜’라고 써져 있다. 즉 ‘1575년 6월 어느 날 임금이 내리다.’라는 말이다. 가끔 서원을 방문하는 관광객이나 안내자들이 ‘선사宣賜’를 선조宣祖임금이 내렸다는 뜻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서원의 사액은 당시 임금 생존시生存時에 현판을 비롯한 서책과 전답 노비 등을 내렸던 것이다. 임금의 묘호廟號(明宗. 宣祖. 肅宗 등)는 사후死後에 정하여 지기 때문에 생존 시에는 ‘선조宣祖’라는 묘호가 없었다. 따라서 ‘선사宣賜’는 선조임금이 내렸다는 말보다 ‘임금이 베풀어 하사下賜하다.’라고 설명하여야 한다. 사액된 서원을 방문하여 보면 현판에 ‘선사宣賜’ 또는 ‘사액賜額’이라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 그 서원은 나라로부터 사액된 서원임을 알 수 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는 현판은 석봉石峯(1543~1605, 韓濩)이 썼다고 하고, 글씨에 대한 전설이 입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일간지에 보도되어 소개한다.
1575년 6월 어느 날, 선조는 석봉을 어전에 불러 편액 글씨를 쓸 준비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무엇을 쓸 것인지 알려주지 않고 부르는 대로 쓰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도산서원’ 편액 글씨를 쓰라고 하면, 젊은 석봉(당시 32세)이 퇴계와 도산서원의 명성이나 위세에 눌려 글쓰기를 양보하거나 마음이 흔들려 글씨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씨 쓰는 순서도 거꾸로 하기로 했다. 선조는 그에게 첫 글자로 집 ‘원(院)’ 자를 쓰라고 했다. 석봉은 ‘원’ 자를 썼다. 다음은 글 ‘서(書)’ 자를 쓰게 하고, 이어서 ‘산(山)’ 자를 쓰도록 했다. 석봉은 쓰라는 대로 여기까지는 잘 썼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떤 편액 글씨를 쓰는지 몰랐다. 마지막 한 자가 남았다. 바로 질그릇 ‘도(陶)’ 자다. 이 자를 말하면 석봉도 도산서원 편액을 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조는 ‘도(陶)’ 자를 쓰라고 했고, 석봉은 그때 도산서원 편액 글씨를 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도’ 자를 쓰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잘되지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운데 붓을 떨며 가까스로 ‘도’ 자를 완성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쓴 ‘도’ 자가 다른 세 자와 달리 약간 흔들린 흔적과 어색한 점이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봐서는 그 점을 알아채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이 이야기가 사실은 아닐 것이다. 도산서원 사액 글씨를 명필 석봉이 쓴 점을 모티브로 퇴계선생과 도산서원의 위상을 드러내는 설화라 하겠다.
그러나 서원의 창설 당시의 기록이 없어서 위 전설을 입증할 수가 없다. 글씨에 대하여 “‘도陶’자는 질그릇에 무언가 차곡차곡 담은 모양이다. ‘산山’자는 뻗어 내린 영지산과 동취병, 서취병을 그림처럼 형상화했다. ‘서書’자는 획 사이가 고르면서 필획筆劃을 굵고 가늘게 구사해 음양陰陽의 조화를 도모했다. 한마디로 질박質朴하며 건실하다. 역대 서예가를 혹평했던 원교圓嶠(1705~1777, 李匡師)도 한호韓濩를 첫 째 가는 명필로 꼽았으니 이 현판에 무슨 토를 달겠는가. 다만 이 현판은 석봉체石峯體의 특징인 비후肥厚(살이 찌고 두터움)함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평評을 하기도 하고, 또 “방정方正하면서도 근골筋骨이 강하다.”고 평評하기도 한다.
테두리 그림은 여의두문如意頭文이라는 문양이다. 이 문양을 닮은 모양으로 감꼭지 또는 소코뚜레 문양이라고도 한다. 여의如意는 모든 것이 뜻과 같이 된다는 의미이고 형태는 영지靈芝나 서운瑞雲에서 본뜬 것이라고 한다. 또한 여의如意의 문양은 ‘평안여의平安如意’ ‘사사여의事事如意’ ‘백사여의百事如意’ ‘만사여의萬事如意’ ‘길상여의吉祥如意’ ‘화합여의和合如意’ 등의 문구로 해석되어 그에 해당하는 여러 상징적인 그림을 그려서 붙이고 축송하였다.고 한다.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사祠와 재齋를 겸비한 최초의 서원이다.
서원은 모셔진 선현先賢의 연고지에 설립하는 것이 관례화 되어 있었다.
예를 든다면 학문을 탐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던 곳, 귀양살이를 하였던 곳 등 이다. 도산서원도 퇴계선생께서 도산서당을 설립하시어 역책易簀하시기 직전까지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가르치시던 서당의 뒤편에 창설創設하였다. 곧 도산서당이 도산서원으로 넓혔다고 볼 수 있다.
‘서원書院’이라는 용어는 당唐나라 현종玄宗(在位 712∼756) 때 궁중에 있던 서적書籍의 편수처編修處이던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래한 것인데, 송나라 때 지방의 사숙私塾(개인적으로 학문을 가르치던 곳)에 조정朝廷에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준 데서 학교의 명칭이 되어 수양睢陽( ? 年,河南省 商丘)·석고石鼓(997年,湖南省 衡陽) ·악록嶽麓(976年,湖南省 長沙)·백록동白鹿洞(940年,江西省 廬山) 등의 4대서원이 생겼다. 이후 서원은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를 아울러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향현사鄕賢祠 등과 문익점文益漸(1329~1398,호 三憂堂, 시호 忠宣)을 제사하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1401년(태종 1) 단성丹城(오늘날 경남산청군 단성면)에, 김굉필金宏弼(1454~1504,호 寒暄堂, 시호 文敬)을 제사하는 천곡서원川谷書院이 1528년(중종 23) 성주星州에, 김구金坵(1211~1278,호 止浦, 시호 文貞)를 제사하는 도동서원道洞書院이 1534년(중종 29) 부안扶安에 각각 세워졌으나 모두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겸비한 서원은 없었다.
1542년(중종37)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1495~1554, 호 愼齋, 시호 文敏)이 관내 순흥順興 백운동白雲洞에 고려 유교儒敎의 중흥자中興者 안향安珦의 옛집이 있음을 알고 거기에 사우祠宇를 세워 향사를 지내고 서적을 구입하여 유생들을 모아 가르치니 이것이 사祠와 재齋를 겸비한 최초의 서원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그 뒤 퇴계선생께서 풍기군수로 부임하시어 이를 보고 중국 백록동 고사古事처럼 조정에서 사액賜額과 재산을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明宗은 1550년(명종 5)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로 쓴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노비奴婢를 급부給付하면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免稅· 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明宗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국가 공인公認의 절차인 사액賜額의 청원에 따라 사액을 내린 서원도 늘어나 숙종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다.
초기의 서원은 존현양사尊賢養士로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지방 양반층의 이익집단화利益集團化하는 경향을 띠게 되어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仁祖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손을 대지 못 하였다. 효종·숙종 때는 사액賜額에 대한 통제를 하고 누설자累設者를 처벌하는 규정까지 두었으나 잦은 정권 교체로 오히려 증설되기도 하였다.
1738년(영조14)부터 서원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으나 그래도 700여 개소나 남아 있었으며 1864년(고종1)에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萬東廟와 화양서원華陽書院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書院 27, 世德祠 20)만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다. 도산서원은 훼철되지 않은 서원에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