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일 7.2.(토) 인천(13:30) -> 모스크바(17:50) 이동( KE 923 편 )
* 시차:6시간, 예정비행시간 9시간30분, 실제비행시간 8시간 40분
아침에 일어나니 지난 밤 내내 내리던 비가 그치고 소강상태다. 인천공항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할 무렵부터는 햇빛이 쨍쨍 빛나는 전형적인 여름 날씨로 변했다. 이번 여행의 밝은 전조인 것 같았다.
오늘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탔지만, 지금까지 나는 러시아에 관해 별로 호감을 가지지 않았었다. 북극곰으로 상징되는 광활한 동토의 나라, 제정 러시아 시대 차르의 전제폭압통치,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실험과 철의 장막을 치고 냉전 시대를 주도했던 나라, KGB의 음험한 비밀공작, 공산당 일당독재, 무자비한 숙청 등 차갑고 부정적 이미지들이 먼저 떠오르는 나라였다.
더구나 나는 어린 시절에는 반공교육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소련 사람들은 험상 굳고 무서운 얼굴에다 머리에는 뿔이 달린 괴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했었다. 소련은 스탈린 시절에 북한을 앞세워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1990년 우리나라와 수교 이전에는 북한의 강력한 우방이었다. 수교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우리보다는 북한에 더 가까운 나라로 간주되어 왔으며, 소련을 계승한 지금의 러시아연방도 북한의 핵 문제 등 주요 안보문제에 대하여서는 우리와 엇박자를 놓는 경우가 많아 나로서는 못 마땅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갖고 있던 이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니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작년 한 해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한국인의 수가 3만 명을 넘어섰으며, 방문자 수는 해마다 증가추세에 있다고 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데 두 나라가 수교이후 25년이 지났으니 변화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문화적으로도 K-pop, 한국어, 태권도가 러시아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으며, 양 국민 간 수준 높은 문화 예술 교류가 매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격세지감이 든다. 하긴 푸틴 대통령의 사위가 한국 청년이라는 말도 있고, 한국으로 시집오는 러시아 아가씨들도 많다고 하니 격세지감 운운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지도 모르겠다. 어떻던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격언의 의미를 실감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까운 과거를 되돌아보아도, 1920년대, 1930년대 일제의 압박 하에 있던 우리 민중과 지식인들은 강한 민중성에 바탕을 둔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크게 공감하고 친밀감을 느꼈던 때도 있었다. 그때만은 아니다. 푸시킨의 서정 넘치는 시들과 톨스토이의 소설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과 러시아 발레 등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는 물론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제 우리와도 친선, 우호관계가 증진되고 있는 이상 나도 개인적으로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를 태운 항공기는 예정보다 약 50분을 단축하여 8시간 40분의 긴 비행 끝에 목적지 상공에 도착했다. 곧 착륙할 것이라는 기장의 방송도 있었다. 그러나 세 번씩이나 착륙을 시도하며 공항 주변을 선회했다. 그러는 동안 기내의 한 백인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아기의 심상찮은 울음소리에 나도 불길한 생각이 들어 긴장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사이에 드디어 착지에 성공했다. 울던 아기가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까르르 웃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승객들도 일순간에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기내에는 안도감이 흘렀다. 나로서는 여행 중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모스크바 공항의 입국심사는 매우 느리고 불친절 했다. 에어컨도 없는 좁은 공간에 수백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심사관들은 자기 볼 일 다 보며 늑장을 부리는 듯 했다. 외국인은 물론 자국민들도 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도 불평하거나 재촉하는 사람이 없었다. 비자 면제 대상국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입국심사는 1시간 반이나 걸렸다. 인천 공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인천공항에서 이랬더라면 아마도 큰 일이 났을 것이다.
나는 짜증을 억누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착륙 직전의 불안했던 마음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참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여행 중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여행 중 해프닝은 여행을 더욱 짜릿하고 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양념이다.” 무사히 안착 한 것만으로도 벌써 빼놓을 수 없는 양념거리를 만든 하루가 아닌가!
세레메체보 공항에서 모스크바 시내까지의 거리는 약 18Km, 이동 중 현지 가이드( 윤신영, 27세, 쉐프킨 연극대학 3년)는 러시아와 모스크바에 관해 설명했다. 과녁 형태의 모스크바 시내 도로망부터 주거사정, 생활수준, 주말농장 타차, 잘 웃지 않는 러시아인들의 속성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빠른 속도로 소개했다. 연기 지망생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카랑 카랑하고 억양이 극적인 데가 있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러시아는 한반도의 78배나 되는 면적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다. 인구도 약 1억 5천 만 명이나 된다. 약 140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전체 인구 중 러시아인이 82%로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정교를 믿었으나 공산화 이후 급격히 신도가 줄어 지금은 인구의 27%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기후는 매우 추운 긴 겨울과 짧고 서늘한 여름을 가지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다. 사계가 뚜렷한 우리 기후와는 너무 판이하게 다르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250여 년간의 몽골 타타르 지배가 끝나는 16세기 초까지는 유럽에서 변방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18세기 초반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대제는 강력한 유럽화 정책을 추진하여 지위향상을 도모했다. 그는 발트 해에 면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이전하고, 해군력을 강화하여 당시 이 지역의 패권국이었던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승리했다. 러시아는 이때부터 핀란드를 병합하는 등 북유럽국가와 어깨를 겨루는 강대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때까지 스웨덴 중심의 북유럽은 러시아를 유린하던 입장에서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는 오히려 러시아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입장으로 역전되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거치며 러시아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레닌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이 결성되고, 레닌이 죽은 후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스탈린이 레닌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 공산권 확대를 목적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과 대립하며 냉전체제를 주도했다. 1991년 12월 소비에트사회주의 연방이 해체되면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로 막을 내렸고, 지금의 러시아연방이 된 것이다.
특히 러시아가 주도했던 세계최초의 공산주의 실험은 세계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세계는 이로 인해 동서 냉전체제하에 들어갔고, 소련의 영향아래 있었던 공산주의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 국가들은 소련이 해체되자 동시에 신속하게 체제를 전환했다. 유독 북한만이 공산당 일당독재를 내세운 김일성 왕조체제를 수립, 3대 세습 독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와의 관계 개선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우리의 근대사에 남북분단이라는 비극을 가져다 준 원인을 제공한 나라라는 점은 계속 유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비치는 모스크바 시내의 모습은 생각보다 후져 보였다. 내가 생각했던 초강대국 수도의 면모는 아닌 듯 했다. 급진적 이념을 앞세웠던 정치실험의 실패를 곳곳에서 확인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현지 시간으로 저녁 6시경 모스크바 시내의 Izmaylovo Alfa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긴 비행시간과 시차 때문에 매우 피곤하여 더운 물로 목욕을 한 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