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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채비를 준비해야할 한류의 훈풍
장석용(한국영화학회 학술이사․총무이사․재무이사역임, (현)대외정책이사)
국내에서 곳곳에서 한류연구가 한창이다. 기업은 물론이고 대학도 대학연구소 중심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고, 한류 세미나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서강대 동아연구소(2001), 연세대 미디어 아트센터(2002년), 연세대 유럽문화정보센터(2001년), 중앙대 한류 아카데미(2005),성공회대학교(2005)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의 논문들이 전문 학술지에 발표되고 있고, 저서로 묶어져 나왔다. 필자 또한 한류 대담을 한 적이 있고(공연과 리뷰), 대중매체의 취재기사를 읽고 시청하면서 한류의 위력을 실감하였다. 이번 영화학회 세미나에서 한류에 대해 같이 생각해보고 이에 관한 연구물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하면서 부족하나마 지난 2005년 11월 5일 한국인문사회과학회 질의자로 참석하여 토론한 결과물과 몇 권의 한류관계 서적 등을 참고하여 가볍게 느낄 수 있는 글을 엮어 본다.
1. 한류의 시원과 주변 현황
막강 한국 문화는 전 세계에서 한류를 주도하고 있다. 경계어린 눈초리에서 출발한 한류寒流라는 명칭은 이제 당당히 한류韓流로서 코리안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 한국물결 Koreanische Welle의 파고는 아시아의 동서남북은 물론이고 미국 본토까지 공략하고 있다.
90년대 후반부터 촉발된 ‘한류’ 열풍은, 주로 중국을 중심으로, 대만, 일본, 홍콩,태국,베트남,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동아시아 전 지역에 나타나고 있으며, 최근에는 아시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L.A. 뉴욕 등 북미주 일부지역과 멕시코, 유럽의 일부지역에도 퍼져나가고 있다. 요즈음 한류 진원지인 한국의 남단 부산 APEC 회의에서 조차 한창 한류의 파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한류는 1999년 중국의 베이징 <청년보>에서 한국의 대중문화와 대중연예인들에게 빠져있는 젊은이들의 유행을 비판하는 의미가 포함된 용어로 처음 사용한 말이고, 한때 중국, 동남아에 유행했던 일본문화의 유행을 일컫던 일류(日流)에 대응하는 말로 쓰였다.
한류란, 언급된 아시아지역에서 한국의 가요, 방송드라마, 영화, 게임 등 대중문화가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현상을 말한다. 이제는 단순한 대중문화의 선호단계를 넘어서 한국의 음식, 유행과 패션, 한국의 제품, 관광, 한국어 공부 등 한국인의 생활양식 전반을 선호하고 열광하는 단계로 확대되고 있다. 한국배우나 한국가수들에 향한 선호도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제품을 선호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고급 ‘한류’의 또 다른 얼굴로는 한국이 주빈국이 된 2005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이 지난 10월 18일 개막 28일까지 치루어진 것과 설치미술가 전수천이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 천을 긴 기차에 덮고 7박 8일간 5500킬로미터를 달리는 미대륙 횡단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긴 것 등이 있다.
아시아의 맏형 중국의 한류에 대한 울림은 결국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97년 CCTV에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방영으로 중국에 본격 소개된 한국영상물은 1억 5천만의 관객을 모으며 한국을 알리는 팜프렛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98년 HOT의 음반이 출시되었고 2000년에는 HOT와 안재욱의 공연, 2001년 핑클의 베이징 공연이 있었다. 2005년 현재 지금 우리는 중국과 수교한지 13년 만에 <대장금> 방영이란 우리의 작은 문화교류로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
ꡐ한류열풍의 단적 증거는 드라마 ‘대장금’이 지난 5월 홍콩에서 마지막 회에 47%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것이다. 영화, 음반, 드라마, 게임 등 한류가 연평균 20% 이상 증가하고 욘사마의 ‘겨울연가’ 경제효과는 약 3조원으로 추정된다. 드라마 촬영지 투어, 스타와의 만남캠프 등으로 2004년 관광객이 40% 증가하면서 한국에 대한 친밀감도 높아지고 있다.ꡑ고 2005.10.21 일자 내일신문 김병수 기자는 밝히고 있다.
사실 문명국인 고구려, 백제, 신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고 조선 후기까지 문화 유입의 유일한 창구인 조선은 일본인에게 문화의 갈증을 해소케 해주었고, 우리로부터 받은 대륙 문화는 일본인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 왔었다.
국교정상화 40년, 1998년에 우리는 제1차 일본 문화개방을 했다. 2002년 보아는 오리온 차트 1위를 차지했고 2003년에는 NHK는 한․일경제적 효과 2조 3,269조에 달하는 <겨울연가>를 방영했다. NHK는 <겨울연가> 한편으로 450억의 기본 수입을 챙겼다. 2004년 본격적 욘사마 바람이 불더니 이제 일본은 우리의 드라마․영화의 최대 수입국이 되었다.
한류가 중국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할 무렵 문화관광부는 당시 중국에 인기 있던 한국가수들이 부른 한국의 가요 CD를 한류(韓流)란 타이틀로 제작, 중국의 방송, 문화기관 등에 1~2차에 걸쳐 배포하였다.
그런데 한류(韓流)는 그 음이 같은 한류(寒流)라는 부정적 의미로도 쓰였으며, 요즘은 한류(韓流)의 매섭고 찬 기류가 거세게 몰려오는 현상(寒流)이라고 경계의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특히 한류를 좋아하는 10대, 20대의 젊은이들을 하한주(哈韓族-말라리아에 걸려 추워서 벌벌 떠는 열병환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또한 일본문화에 열광하던 젊은이들을 일컫던 하르주(哈日族-열사병에 걸린 환자)와 대칭되는 말이다.
숭실대 심정순 교수는 ꡒ기존의 한류논의는 크게 보아, 긍정적/부정적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한류는 고유한 지역문화인가/세계문화의 아류인가, 한류는 문화인가/경제적 상품인가 등의 논의로 나누어진다. ꡓ밝힌다.
일본이 엄격하게 감추어져 왔던 한국에 대한 통제의 힘은 그들의 문화 원류를 찿는 과장에서 업신여겨도 될 대상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이 섬겼던 문화의 뿌리를 간직한 신적 소도를 탐방하는 신비의 땅이 되었다. 그래서 일본인에게 한국은 동경의 대상이고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고향의 향수를 가진 곳이다. 그래서 한류는 자연스럽게 생길 수밖에 없다.
한류 현상은 서구중심의 가치관과 공격적이고 획일주의적인 서구의 상업문화의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서, 아시아인들이 아시아의 문화적 전통과 정체성을 인식하고 자각한 로컬 스탠더드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꾸밈없이 솔직한 한국 문화의 힘, '겨울연가'의 성공 요인도 드라마 주인공의 진솔한 감정표현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산하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술품 같은 곳은 없다. 그곳에서 태어난 문화 역시 동화같이 매력적이다. 우리문화가 우리 주변국을 흡인시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과거에는 한국영화가 아시아 문화의 일부로서 클래식하게 보여져 왔으나 이제는 아시아적 가치를 고유하면서도 헐리우드적 매력을 지닌 제품임이 입증되는 것은 영화 수출가와 작품수를 살펴보면 된다. 조용히 묻혀져 있던 한국의 영화 작품들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영화들을 즐기던 독일과 형편이 같다고 하면 적당한 비유가 될 수 있을까? 어쨌건 유현목 감독의 작품 12편이 일본 동경근대박물관에서 12월 5일부터 3주간 상영되는 것도 크게 보면 한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한류의 질풍노도를 이끄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 선두주자는 가요와 드라마이다. 베트남은 98년 <모델>,99년 <의가형제>,<별은 내 가슴에>, 03년 <유리구두>, 04년 <노란 손수건>,<겨울연가> 05년 <대장금>이 방영으로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녹이는 나라가 되었다. <별은 내 가슴에>는 2002년 멕시코와 남미에 상륙하기도 하였다.
2004년 한국영화의 해외 수출은 5,828만 4,600달러(약 600억원)를 기록했다.10년 전인 1995년의 20만 8,679달러(약 2억 1,000만원)에 비해 무려 280배 가까이 폭등한 액수이다. 일본은 2004년 40여 편의 한국영화를 수입 상영하였으며, 특히 그동안 『쉬리』,『공동경비구역 JSA』,『엽기적인 그녀』는 흥행에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한류는 아직 맹위를 떨치고 있다. 중화권과 인접지역 베트남에서의 한국의 가요, 드라마, 패션, 관광, 영화 등 한국의 대중문화를 향유 소비하는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일본엔 NHK 공중파에서 2005년 10월 8일자로 <대장금>을 방영하고 있고 , 중국도 <대장금>의 열풍이 거세다.
한류는 김휴종의 ‘한류 스타파워, 가치와 재고찰’에서 지적되듯 ‘한류는 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본주의, 가족주의등 철학적 개념부터 아시아인으로서의 얼굴모습, 피부색, 체격조건, 겸손함 등이 망라된 개념인 아시아적 가치와 글로벌 가치의 황금비율적 융합에 의한 성공’으로 비춰지고 있다.
드라마를 포함한 한국의 영상물들은 섬세한 화면구성과 화려한 배경, 낭만적 스토리로 볼거리를 제공하며 같은 동양권이지만 세련되고 수려한 외모의 배우들이 많아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밖에 웃음유발 요소, 제스처, 미의식, 가족의 유대감 등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꼭 같지만은 않다는 점이 나라마다 다른 이유에서 좋아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아시아 각국간의 문화적 유대감과 동질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아시아의 미래지향적인 문화연대, 문화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볼 수 있다.
한류의 스승, 영화는 오래전부터 아시아에서 그 영역을 지키며 얼굴을 익히고 있었지만, 방송매체의 파급효과는 영화의 고답함을 일거에 깨고 말았다.
2004. 문화관광부 문화산업 백서가 지적하듯 ꡐ한류는 우리의 대중문화를 단순히 한 지역, 한 국가의 문화로 인식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아시아 지역 문화교류라는 소통행위에 있어 우리 대중문화가 적극적이면서 능동적인 문화생산자 및 유통자로서 기능하게 하는 바, 이는 아시아적 정서와 가치관에 맞게 아시아인들이 대중문화를 독창적으로 재구성하는 역량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ꡑ
조용히 영화, 음식문화, 미술, 민속음악, 의상 등 나름대로 오랜 세월동안 한류화를 진행시켜온 장르가 있고, 한국산 가전제품들도 예술의 도움이 없었다면 명품을 만들지 못하였을 것이다. 어느 나라를 가도 대도시에는 대기업들의 광고판이 서있다. 그들의 디자인, 색상 등은 미술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시아는 한국의 문화상품에 매료되고 열광하고 빠져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만과 교만이라는 단어를 배우면 않된다. 우리의 솔직함과 순수함이 강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겪어왔던 우리영화사와 이슈에 걸친 과거와 현재를 돌아 볼 필요가 있다.
2. 한류의 토양과 환경/영화적 측면
한국은 연간 극영화 70여 편을 생산하는 영화 산업국이다. IMF의 파고는 1998년 43편 제작이라는 비극적 수치를 기록 했지만 드물게 2004년엔 82편을 생산하여 73편을 개봉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반면 외국영화는 285편이 수입되어 194편이 개봉되었다. 한국 내에서 267편의 국내외 영화를 개봉극장에서 볼 수 있다.
20세기 마지막을 장식한 1999년『쉬리』의 대박이후 2000년 59편,2001년 65편,2002년 78편,2003년 80편을 제작하여 영화제작에 대한 관심사와 산업으로서의 영화의 위상을 실감나게 하여주었다.
1919년부터 해방까지 참혹한 일제시대에 걸쳐있는 150여 편의 영화들의 초라한 제작편수와 1919년Kinodrama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로 발아가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장정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해방정국의 우리영화는 광복영화라고 불리워지는 애국심 고취의 영화들 몇 편이 주류를 이루다가 다시 6․25 동란기를 맞아 16mm 필름으로 명목을 잇는 고달픈 시련의 길을 걸어왔다. 이후 미군정하의 영화들은 길 잃은 양들에게 먹이를 주고 정신적 안식처와 위안을 주는 역할을 해왔다.
자본과 기자재와 연기자가 턱없이 부족한 어려운 여건 하에서 영화 전성기를 일군 감독군은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에 의하여 이루어져왔다. 그들의 열정과 땀이 오늘에야 결실을 이루고 있다. 그들의 가난과 열정은 이제 돈과 여유로 환치되었다.
군사정권하의 한국영화는 정권 유지의 홍보, 혹은 가혹한 검열 하에서 정권의 시녀 역을 톡톡히 하였다. 검열에 따른 침체기가 이어지다가 70년대 TV의 영향으로 초토화된 한국영화는 저예산 의무제작으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고, 이를 타파하는 수단으로 멜로드라마와 액션물들로 흥행을 하겠다는 제작자들이 많았다.
또 한편의 제작집단은 군사정권이 한국의 반공영화 양산을 고양시키는 길목에서 편승하여 외화수입권을 겨냥하여 재산축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60년대 영화전성기의 3감독들은 각각 전통사극, 문예물,인간의 본능과 여성심리 묘사물 등으로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우리영화 작품들은 찿아 보기가 힘들었다. 유현목의 『오발탄』은 상영불가라는 서리를 맞았고, 이후 제작자나 감독들은 당국의 눈치 보기로 영화를 제작 연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여건하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천편일률적일 수 밖에 없었고, 관객들의 한국영화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그래도 숨통을 트이게 해준 영화들은 미국/독일/프랑스 문화원을 중심으로 한 외국들 이었다. 이들 영화를 보면서 영화 버퍼buffer들은 영화를 새로운 창을 만들어 그들만의 시선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 문화원의 씨네클럽과 독일문화원의 동서영화클럽은 대학생과 영화 애호가들의 영화토론장이 되었다.
70년대 신기한 영화들이 있으면 미군부대나 외인아파트의 영화 소장가들과 같이 영화를 보던 아나로그적 낭만시대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비디오는 감히 상상도 못하던 때였다. 지루했던 70년대가 지나고, 3김 시대의 어수선함은 현실의 억압적인 욕구불만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던 때였다.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 배창호의 『꼬방동네 사람들』은 닫힌 현실에서 열린 영화를 지향하는 커다란 신호탄이 되었고,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영화 감독들은 외국영화들을 접할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만큼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닫힌 영역에서 열린 영역으로의 과감한 방향전환은 88올림픽이 계기가 되었다. 영화에서 금기되었던 공산권 영화를 접한 우리 관객들은 비교적 덤덤했다. 기우를 깬 것이었다. 직배 반대투쟁에도 불구하고 미국영화 직배(‘88)는 강행되었다. 비로소 한국영화는 데미안의 알을 깨고 나왔다.
한국영화는 외형적으로 잔잔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내부는 경천지동의 세포분열을 가속화 시키고 있었다. 한국소형영화작가협회 등이 교육해온 홈 비디오적 가벼움에서부터 『닫힌 교문을 열며』,『광주항쟁』,『상계동 올림픽』과 같은 작품이 영화관객의 저변확대를 자동적으로 유도하게 되었고, 영화단체들은 이제 분명한 칼라를 갖게 되었다.
우리영화가 세계에 알려지고 제대로 평가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이었다. 한국이 가입하고 최초로 우리대표가 파견되어 목소리를 낸 사건은 영화적으로 커다란 사건이었다. 때는 1994년 10월 27일부터 9박 10일 동안 당시 한국본부 사무국장인 본인이 Derec Malcom데렉 말콤 회장과 Klaus Eder 클라우스 이더 사무총장을 이태리 Saint Vincent생 빙 생에서 만나고 우리 영화의 현황을 브리핑 하였다. 이미 이더씨와는 남산 영화진흥공사에서의 2시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고, 면식이 있는 사이여서 반가움은 더욱 더했다.
이듬해 나의 도움으로 후배 전양준이 Manheim만하임/Heidelberg하이델베르크 심사위원에 파견되었고, 그 노하우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탄생시켰다. 1회 영화제(‘96)는 어설픈 이었지만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를 업으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화들의 등장은 분명 엄청난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영화진흥기금이 신설되어(‘97) 영화제작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 졌다. 제작비의 일부분인 3억원 정도가 저리로 융자되었고, 남양주 종합촬영소 완공(‘97)은 세트 제작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해결책의 일부분이 되었다. 본격적 영화진흥법 제정(‘98)이 실현되고, 4대 국제영화제 수상작 중심으로 일본영화가 수입을 개시했다.(‘98 10월)
99년 2월 13일 개봉된 강제규 감독의『쉬리』는 전국 620만 동원으로 이전의 최다관객 동원 숫자를 단숨에 넘겨버렸다. 『쉬리』는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한국영화 중흥기의 화려한 서막을 올린 작품으로『타이타닉』의 기록을 깨며 한국형 블럭버스터의 가능성을 증명해주었고, 한국영화의 시스템적 붐업에도 크게 기여한 영화이다.
99년 9월 10일 일본영화 2차 개봉이 시작되었으나 이후 일본영화에 대한 폭발적 반응은 없었다.
2000년 9월 9일『JSA,공동경비구역』 개봉으로 남북의 이념 구분과 민족에 대한 서로 껴안기가 명제로 떠올랐다. 01년 3월 31일 『친구』가 개봉되어 국내에서는 엄청난 관객을 모았으나 대만에서는 수모를 당할 정도의 관객을 모았다. 90년대 초 몇 작품씩 보따리금으로 팔리던 임권택 감독의 작품은 마침내 02년『취화선』으로 깐느영화제 미장센(감독상)상을 공동이나마 수상했다. 세계3대 영화제에서 첫 수상이 된셈이다. 02년 5월 1일 영화검열법이 완전 폐지되었다. 03년 12월 24일 『실미도』개봉,11,081,000명의 관객 동원으로 천만관객시대를 열었다.04년 2월 5일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되어,11,746,135명의 관객을 동원, 연 이은 천만 관객을 모았다. 04년 일본만화가 원작인『올드보이』는 57회 깐느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영화는 그레이드 업 되었다.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이 30여개에 달하는 국내외 최다상 수상의 기록을 갖고 있지만 이에 못지 않게 한국의 빠조리니 김기덕은『 섬』, 『나쁜 남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빈 집』 등으로 98년 제 1회 호주 누사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월드 시네마상, 99년 제6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99년 제21회 판타스 포르토 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99년 브뤼셀판타스틱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대상, 03년 제56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청년비평가상 1등상,
03년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청년비평가상 1등상, 04년 베를린영화제(사마리아), 베니스 영화제(빈집) 감독상을 수상했다.
자갈치 시장은 역동적인 코리언들을 보여주는 곳이고, 이미 세계 10대 국제영화제의 주빈국이 된 부산국제영화제는 역동적 한국영화들을 계속 생산하도록 고무하고 있다. 한국영화의 힘, 즉 한류를 가능케 하는 힘은 지속적 연구, 정체하면 도퇴되고, 언제나 경쟁을 생각하는 시스템이 이미 도입되어있다.
세계3대영화제에서 수상의 경험이 있게 된 나라 코리아, 그러나 감독상들은 받았지만 아직 최우수 작품상을 받지 못한 나라이다. 국제영화제의 수상 이면에는 원로영화인들이 닦아 놓은 피땀으로 쌓아온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검열의 완화와 민주화를 위해 희생된 숱한 영화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영화들은 자유의 바람을 맡고 있다. 스크린 쿼터 투쟁으로 오늘의 극장을 확보할 수 있다. 이제 우리영화는 제3세계에 생산 공장을 갖추고 있지만 그 활동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시키고 있다. 헐리우드의 제작시스템을 자연스레 배웠지만 우리만이 해낼 수 있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 한류를 가동시키는 원자로를 갖고 있는 셈이다.
쉽게 말해서 잔머리, 좋게 말해서 기획력, 그러나 마케팅에 이르는 과정은 아직 미숙하다. 일본에서 부는 한국영화 붐은 어느 측면에서 일본의 기획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아쉽다. 외국 공중파에서 분 한국영상물의 점진적 바람이 코리언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이다.
금년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의 작품이 충분히 국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여상물이 국제적이 될 수 잇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우수외국영화는 우리영화의 토양을 살찌게 하는 교과서였다. 관객의 힘도 우리 것을 국제화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며, 프린트 제한 벌 수 폐지(‘94)와 복합 상영관 수의 증가는 스크린 수의 비약적 팽창을 가져 왔으며, 동방에 떠오른 영화제전은 우리 관객의 수준을 높이는 기여하였고, 엄청나게 수입된 영화제용 영화들은 한국영화의 빈곤한 상상력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역할을 하였다.
영화제는 우리영화를 홍보하는 시장이다. 생존경쟁에 선 우리영화는 국제시장에 우리영화들을 출품해도 손색이 없게 노력하는 감독들과 영화 제작진들에 의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감독들의 무덤이었던 극장의 횡포나 제작자들의 요구에서 벗어나 있지만 감독들의 생활고는 아직 해결할 수 없는 실정이다. 비약적 발전을 한 한국영화는 IMF가 준 교훈으로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으며, 10년간 한국영화는 이미 산업으로 발전해 있다. 우리영화는 미국 대중영화의 한계가 허망하듯 대중영화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면서 질적으로 도약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3. 한류의 형성배경
우리의 대중문화가 90년대 중반이후 최근 10년 새에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경이적인 한류를 일으키고 꾸준히 확산되는 원인과 배경을 한류 진원지 중화권에서 찾아보면 대략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중국은 라이벌 미국의 문화적 이질성과 이데올로기적 특성 때문에 반미감정이 있고, 미국 자본주의의 상업적 오락문화를 직수입하는데 경계심을 갖는 있다.
2) 일본문화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선정성, 퇴폐성, 강한 일본적 색채에 대해 심한 거부감이 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반일감정이 있다.
3) 정치적 고려로 대만에 대하여는 의도적으로 문화수입을 배제해왔다.
4)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시기에 우연히 우리 문화가 그 틈새를 적기에 잘 파고들 수 있었다.
성장한 한국의 경제력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올림픽, 월드컵 등을 통해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고, 신뢰감도 한․ 중 수교 양국간에 별 갈등이 없었기에 문화적 동질성과 정서가 비슷한 한국 문화를 수용하는데가장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을 위시하여 주변 국가들의 시장개방, 생활수준의 향상, 새 세기에 들어서 뉴미디어의 대한 하드웨어의 폭발적인 보급과 채널의 증가로 많은 문화 콘텐츠가 필요한 때 한류상품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는 (1) 동양적 특성을 띄는 종교가 혼합된 문화적 동질성과 가치관, 국민적 정서가 유사하다. (2) 우리 대중문화가 미국과 서구의 문화를 동양적 정서로 정제, 아시아적 취향과 정서에 맞게 독창적으로 재구성하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3) 중국 들 동남아에 진출해 있는 기업들이 9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문화마케팅을 해왔다. (4) 우리 대중문화가 진출 당시 선도역할을 했던 대중가요와 TV 드라마가 뛰어난 댄스 실력과 화려하고 세련된 패션 스타일, 준수한 외모와 유행 감각 등 화려한 연예인들의 이미지가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5) 방송영상콘텐츠, 뮤직비디오 등 내용면에서도 잘 짜여준 구성, 빠른 이야기의 전개, 감각적인 트렌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세련미, 동양적인 가족애와 사랑 등 우리 문화콘텐츠가 그들에게 매혹적인 문화상품으로서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6) 한국정부와 기업, 그리고 한 발 앞장서서 몇 몇 유능한 엔터테인먼트 업체의 홍보전략, 현지방송과의 협력관계, 현지인의 기호도 조사를 바탕으로 한 중국어 음반제작 등 현지화 전략과 보아, 동방신기에서 보듯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연예인의 장기적 기획 하에 양성하는 등 문화마케팅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4.외국에서의 우리영화에 대한 시선
영화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한 한국영화를 보는 시각이 남다르다. 일찍이 인도와 일본에 애정을 보내던 시각의 일부분이 대만, 중국에 이어 중동으로 이동되더니 이제 코리아로 와 있다.
영화 사상 유례 없는 천만 관객돌파와 함께 한국 영화는 국제영화제에서 당당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1989년 로카로노 영화제에서 황금표범상은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의 심오한 불교 철학에 바탕에 둔 수려한 작품으로 세계인들, 특히 서구 평론가들을 당혹케 만든
충격적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이 연속적이 못한 것처럼 한국영화가 앞으로 제대로 대접을 받으려면 지속적 시네아스트의 활동이 필요하다. 상업적 시각으로는 현재의 난관을 타개할 수 없으며 이와 더불어 외국의 시선도 따가울 것이며 세계영화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작가도 탄생하지 못할 것이다.
부산에서 타 오르는 영화 봉화는 부천, 전주, 광주로 이어지고 먼 산악에 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화제는 자국 영화 생산품과 비례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류의 물결을 만들어야지 외국영화를 수입해 영화제의 명성을 쌓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앞으로의 영화제들이 충격적인 뉴스로 비춰지지 않도록 지금 영화제들을 점점하고 제작 준비 중인 영화들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조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우리영화를 세계영화로 만들 것인가? 『레이』의 재즈리듬은 전세계에 퍼져 뿌리를 내리고 있고 빔 벤더스의 『부에나 비스타 소시얼 클럽』 쿠바 리듬은 아직 귓전에 생생하다. 우리영상의 생존법은 박진감있는 전개로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다양한 장르로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재능있는 배우들을 육성해야 한다. 헐리우드 스타일을 잘 이용해야한다. 그러나 마케팅 전문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우리는 헐리우드 스타일을 이용해 아시아적으로 풀어내는 힘을 갖춘 나라이다.
우리나라 영화의 첫 국제영화상 수상은 1961년 제1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대진감독의 『마부』가 첫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실제적으로 경쟁부문에서 수상한 경력을 따져보면 1984년 제20회 시카고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여인잔혹사(이두용 감독)』가 최우수촬영상을 탄 것이 첫 수상이다. 세계 3대 영화제의 첫 수상은 『씨받이(임권택 감독)』에서 강수연이 1987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이다..
우리영화의 국제영화제 수상 내역을 대충 살펴보면 외국영화제가 우리영화에 관심을 둔 작품들을 알 수 있다.
1961 제11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마부(강대진 감독)>-국제영화제 최초 수상
1984 제20회 시카고 국제영화제 <여인잔혹사(이두용 감독)>-최우수촬영상
1984 제21회 시카고 국제영화제 <땡볕(하명중 감독)>-최우수촬영상
1986 제22회 시카고 국제영화제 <길소뜸(임권택 감독)>-게츠 세계평화메달상
1987 제4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씨받이(임권택 감독)>-최우수여우주연상
1988 제 2회 동경 국제영화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장호 감독)>-국제비평가협회상
1989 제16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아제아제 바라아제(임권택 감독)>-최우수작품상 및 국제 비평가협회상 등 4개부문 특별상
1989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배용균 감독)>-최우수작품상
1990 제12회 낭뜨 3대륙영화제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 감독)>-심사위원특별상, 최우수여우주연상(심혜진)
1991 제15회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은마는 오지않는다(장길수 감독)>-최우수여우주연상(이혜숙), 최우수각본상
1992 제16회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감독)>-우수제작자상
1992 제 5회 동경 국제영화제 <하얀전쟁(정지영 감독)>-최우수작품상/최우수감독상
1993 제18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살어리랏다(윤삼육 감독)>-최우수남우주연상(이덕화)
1993 제1회 상해 국제영화제 <서편제(임권택 감독)>-최우수감독상,최우수여우주연상(오정해)
1994 제44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화엄경(장선우 감독)>-알프레드바우어상(영화예술창안상)
1994 제16회 낭뜨 3대륙국제영화제 <장미빛 인생(김홍준 감독)>-최우수여우주연상(최명길)
1994 제42회 산세바스찬국제영화제 <헐리우드키드의생애 (정지영 감독)>-국제비평가협회상
1996 제20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학생부군신위(박철수 감독)>-최우수예술공헌상
1997 제12회 타쉬켄트 국제영화제 <학생부군신위>-Grand Prix
1998 제11회 동경 국제영화제 <아름다운 시절(이광모 감독)>-Tokyo Gold Prize
1999 제52회깐느국제영화제 <소풍(송일곤 감독)>-단편경쟁부문 심사위원상수상
1999 제12회동경국제영화제 <송어(박종원 감독)>-심사위원특별상수상
2000 제35회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박하사탕(이창동 감독)>-심사위원특별상
2000 제13회 동경국제영화제 <오!수정(홍상수 감독)>-심사위원특별상
2000년 이탈리아 우디네이 아시아영화제 최우수 관객상 <정(배창호 감독)>
2000년 프랑스 베노데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최우수 관객상 <정>
2001 제54회 로카르노국제영화제 <나비(문승욱 감독)>-최우수여우주연상(김호정)
2001 제14회 동경 국제영화제 <봄날은 간다(허진호 감독)>-최우수 예술공헌상
2002 제55회 칸느국제영화제 <취화선(임권택 감독)>-최우수감독상
2002 제26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마리이야기(이성강 감독)>-장편 경쟁부문 대상(그랑프리)
2002 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오아시스(이창동 감독)>-감독상, 젊은 연기자상(문소리)
2004년 57회 깐느영화제『올드보이』 심사위원상 수상
2004년 김기덕 감독 베를린영화제(사마리아)와, 베니스 영화제(빈집)에서 감독상 수상
이제 한국영화는 리메이크 판권까지 팔리고 있는 실정이다. 2001년 『조폭마누라』(95만 달러), 2002년 『달마야 놀자』(30만 달러),『엽기적인 그녀』(75만 달러),『시월애』(50만 달러),『가문의 영광』(50만 달러), 2003년 『광복절 특사』(50만 달러),『장화,홍련』(100만 달러+100만달러),『선생 김봉두』(65만 달러),2004년 『폰』(제작비의 2%),『올드보이』(밝히지 않음),『령』(50만 달러),『인형사』(130만 달러) 등이 미국의 메이저 회사들의 구매 대상이 된 영화 시나리오들이다.
우리 영화는 국내시장의 활성화와 해외수출시장의 증가, 수출단가의 상승, 해외펀드의 선투자 등 성장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2001년 2002년 블록버스터 영화의 흥행실패, 제작비 상승, 주연배역의 개런티의 상승, 스크린 수 증가에 따른 전국 개봉에 따른 홍보, 마케팅 비용 등의 폭발적 증가 등 수익성 악화와 리스크 증가, 투자자본의 위축 등의 위험요소가 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상산업은 발전가능성과 전망은 수출호조 등에 힘입어 더욱 발전해 나갈 것이다. 2003년 영화의 해외수출은 3,097만 달러로 전년도에 비해 107% 증가되었으며, 2001년 1,000만 달러를 돌파한 이후 수직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편당 수출가격도 188,896달러로 엄청난 가격상승을 보이고 있다. (2004년의 경우, 300,436달러 잠정추세) 1995년의 경우 우리나라 편당 영화수출가격은 13,466달러였다 (당시 제작비는 편당 10억 원, 현재는 42억 원). 수출실적을 국가별로 보면, 일본이 1,383달러로 45%, 미국이 448만 달러로 14%, 독일이 190만 달러로 6%를 기록했다. 최근 해외에서 한국영화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바, 과거에 비해 일본에 대한 수출 집중도가 줄어들면서 미국, 유럽지역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수출증가와 수출의 다각화 현상은 상당기간 계속될 전망이다. 특히 지난 주에 LA 산타모니카에서 개최된 아메리카 필림 마케트에서도 한국 영화의 국제경쟁력은 크게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외출"이 일본에 70억 원, "내 마음의 지우개"가 32억 원, "청춘만화"가 52억 원에 수출되는 등 가격경쟁에 있어서도 높은 상승률을 보인다. 영상물 수출액 (영화, DVD 등 포함)이 7,146만 달러로 수입액 3,109달러를 2배 이상 상회하고 있다.
헐리우드 마저 빈약한 아이디어를 한국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의 일정한 부분이 한국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의 결과인가? 결국 지옥 같다던 교육의 결과가 우리의 위상을 세우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궁무진한 장르나 소재의 확장은 다양한 과목을 소비해내는 우리의 교육의 공헌이고, 다양한 연기자들의 등장도 교육의 기여이다. 아직 교육은 허기에 져 있다. 진정한 한류화는 체계적인 인간을 만드는 교육에서 출발한다. ‘한류의 비빌 교육에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단순한 그러나 심오한 테제이다.
5. 한류의 성과와 가능성
한류의 가시적 성과를 방송․영상 콘텐츠와 게임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국내 영상 산업은 국내시장을 대체할 해외시장에서 활로를 찾기 위한방안으로 영화․방송 콘텐츠의 수출 및 문화콘텐츠의 공동기획, 공동제작 등 다각적인 방법을 모색해 왔다. 아시아 시장을 내수화하지 않고서 우리 영화나 방송․영상 콘텐츠 산업은 발전에 한계가 있다.1990년대 중반 이후 아시아 국가의 뉴미디어 시대개막으로 인한 문화콘텐츠의 수요증가와 질적 경쟁력을 확보한 한국 방송영상 콘텐츠의 일본수출가의 가격상승으로 한류 특수를 누리게 되었다.방송․영상 콘텐츠의 해외수출은 매년 30%이상 높은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1996년 수출총액 5,986,000 달러, 수입 63,904였던 것이 2002년에는 수출 28,813,000 달러, 수입 25,111,000 달러로 수출이 수입을 넘어섰고, 2004년에는 수출 71,461,000 달러에서 수입 31,086달러로 현재 계속 수출이 수입을 앞지르고 있다.
우리나라는 많은 Cable-TV 개국과 함께 방송채널의 증가로 외국의 방송콘텐츠의 수입이 기하급수적으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었던 것과 달리자체생산으로 대체 효과 한국 드라마의 중국수출단가가 편당 452만 달러이고, 중국드라마 편당 평균 수입가격은 32만 달러로 한국드라마의 수출가격이 15배 가량 높은 가격으로 수출.2003년도 우리나라 게임수출은 2002년도보다 28.9%가 증가한 1억 8,154만 달러로 영화시장을 6배나 상회한 커다란 문화시장이다. 반면 수입액은 3.4% 증가한 1억 6,645만 달러로 1년 만에 다시 수출이 수입을 능가하였다. 영화와 게임을 비교해볼 때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경우 4년간의 준비기간에 147억 원을 투입하여 1,170만 관객을 동원하여 약 500억 원의 수입을 올린데 비해, 게임인 "카드라이더"의 경우는 3명이 1년 6개월간 30억 원을 투입하여 작업한 결과, 실제는 "태극기를 휘날리며"보다 많은 수익을 올렸으며, "라그나로크"를 제작한 그라비티의 김정율 사장의 경우, 최근 나스닥에 상장한 주식을 4,000억 원에 처분하여 큰 돈을 벌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온라인 게임과 모바일 게임에서 세계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며, 앞으로 발전가능성은 매우 높다.
국내 게임의 수․출입 현황을 보면, 2004년 수출 25,416만 달러, 수입 19,974만 달러로 수출이 크게 앞서 있다. 2003년 게임 해외 수출 주요국가로는 중국(52.4%), 대만 (16.6%)로 중화권에 집중되어 있으며, 미국(5.7%), 유럽 (2%) 등 선진국은 미미한 실정이나, 향후 수출다각화 전략을 체계적으로 추진한다면 크게 신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2005.11.10~15일 일산 한국국제전시장(KINTEX)에서 개최된 게임쇼 'G스타 2005'는 한국게임의 발전가능성을 한층 더 높여주었고 2005년도 수출예상액 34,312만 달러 (38% 증가 예상)이다.
콘텐츠 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문화산업의 시장 규모는 2002년 약 31조원으로 GDP의 대비 5%를 차지하고 있으며 연평균 20% 이상 (1999~2004년)의 고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세계문화산업시장 성장률 5.2%에 비하면 3~4배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시장 점유율을 1.5% 내외로 세계10위권 수준으로 미국 (40.9%), 일본(7.8%), 독일(5.6%), 영국(5.4%), 프랑스(3.5%), 중국(2.9%), 이탈리아(2.4%), 스페인(2.1%), 캐나다(2.1%), 한국(1.5%) 수준이다. 그러나 2008년에서 늦어도 2010년에는 세계5대 문화산업 강국으로 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문화산업이야말로 반도체 산업을 이룰 제2의 반도체 산업인 것이다.
2005년 세계문화산업 시장규모는 약 1조4천억 달러로 IT 하드웨어시장 약 1조1,600억 달러를 추월할 것이다. (Dataquest 2002) 또한 우리는 2002년을 기점으로 한류의 심화기, 확장기로 불리어질 만큼 문화산업의 수출액이 수입액을 넘어섰고, 이는 한국의 상품,관광까지 크게 확대되고 있다.
2010년에는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은 1,000만이 넘어서는 그야말로 꿈의 1,000만 관광시대가 될 것이다. 정부가 발표한 창의한국-21세기 새로운 문화비전(2000년, 문화관광부, 360면)에는 2008년까지 세계5대 문화산업국가 5대 강국의 청사진을 보면 추진전략(확대 강화 전략)과 실천방안(인적, 기술, 금융, 물적, 정보 인프라 등)에는 생산 유통 프로세스에 대한 연구와 국․내외 시장 확대 방안도 지역문화기반지원기관 지원 환경 인프라 등이 세부 항목에 대한 발전 방안이 마련되어 있다. 이와 같은 전략은 허황된 꿈이 아니다. 우리의 문화산업은 문화산업 각 분야에 걸쳐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온라인 게임은 연간 70%, 모바일 게임은180% 이상 매년 급성장 하고 있다.
분야별 2003년 문화산업정책비전에서 제시한 주요 산업분야별 성장가능성을 살펴보자
< 주요 분야별 성장 가능성 >
분야 |
성장가능성 (잠재력과 전망) |
게임 |
초고속인터넷 인프라 기반, '온라인 게임'의 성공 잠재력이 큼 아시아의 온라인 게임시장의 40~50% 이상을 한국산 게임이 점유 인터넷게임 세계1위, 모바일게임 세계3위 |
영화 |
성장속도가 빠르고 방송, 게임, 음반 등 연관산업 부가가치 창출효과가 큰 종합예술산업 연간 수입대체 효과 약5억 달러 (2002년) 수출액: 1997년 50만 달러 -> 2003년 2,500만 달러 (50배 증가) 무영검 : 해외 38개국에 1,000만 달러에 수출계약 (2005.11) |
방송 영상 |
아시아 시장에서의 수요증가 및 경쟁력 우위, 한류열풍에 따라 드라마의 중화권 수출호조 (한류의 기폭제 역할) 가을동화 : 12개국 368,000달러 수출(1년), 대만지역 시청률 1윌 기록 수출액: 1997년 831만 달러 -> 2003년 4,213만 달러 (5배 성장) 일본에 "겨울소타나" 신드롬 유발(NHK 위성 및 공중파 방송) 욘사마의 경제적 효과는 3조원 이상(한국1조원, 일본 2조원) 겨울연가 촬영지인 남이섬은 한류관광객에게 최고 인기관광지로 부상 (추가적 관광수입 8,400억 원, 국가홍보효과 330억 원) |
음악 |
인터넷,모바일 음악 서비스 매출 증가, 마케팅 프로모션 활성화, 아시아권을 리드하는 초대형 가수의 출현 (스타발굴 가능) 가수 보아 : 일본 오리콘차트 1위, 500만 장 이상 판매, 1,000억 원 매출, 런칭 로열티 100억 원 이상 수익, 경제가치 1조원 |
출판 |
세계수준의 인터넷서점 성장률 (2002년 매출 2,000억 원 274% 증가)과 e-book 제작기술 보유 아동,어학 등 경쟁력이 있는 전문분야별 출판 역량 제고 |
창의 한국 - 21세기 새로운 문화비전 (2003, 문화관광부, 356면) 최진용 보완 재구성
6. 한류, 타 장르를 살펴보며 지속적 확산 방안을 생각해보자
한류열풍이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래서 문화산업진흥기본법 (1999.2.8법률 5927호)이 제정되고, 문화산업진흥기금을 설치되었으며, 문화콘텐츠진흥원(2000.12.4)을 설립되었다. 한류가 문화현상으로 승화되도록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한명의 배우와 가수가 지속적으로 한류를 끌고 갈 수는 없다. 작품의 이미지에 열광했던 사람에게 또 다른 작품을 소개해야 한다. 한사람의 문화인에게 열광하는 현상은 문화교류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초기과정이다. 문화전파는 과정적 단계가 연결되지 않으면 유행으로 끝난다.
많은 연구자들의 결론은, ‘한류의 지속화, 세계화’를 위해 ‘문화콘텐츠의 빈곤과 개발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그러나 구체적, 실천적 개선방안에 대해서는, 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는 ‘문화콘텐츠 개발’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한류 개개 작품의 예술미학적 문제(예술적 형식, 작품에 내재된 정서, 감성 및 가치관)와 이를 받아들이는 글로벌 촌 관객의 수용문제가 핵심적 관건인데도 불구하고, 기존 한류의 토론은 실질적, 구체적 개선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추상적 토론에 몰두해 왔다.
조각가 文信은 한류화를 위해 어떤 작업을 해왔나 살펴보자.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작가의 동ㆍ서 유럽 순회초대전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미국 NBC TV 는 전 세계 52개국에 文信조각을 동시 방영하였다. 文信의 동ㆍ서 유럽 순회 초대전은 우리 문화예술의 수출로 한국의 국위선양을 하는 동시에우리 상품들의 수출전략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라스베가스 보석쇼 2001년부터 1년 6개월동안 중국 북경의 한국문화원에 국정홍보처의 해외홍보관 상설 특별전을 하여 한국의 고미술품들과 함께 우리 예술의 한류화에도 참여하였다.
2000년 밀레니엄 쇼에 작품방영 CNN 37개국 동시 방영, 2004년 9월 30일부터 현재까지 미국 뉴욕 주재 한국 유엔대표부의 갤러리에서 "한국의 빛"이란 전시를 계속하며 세계 각국 외교 사절들에게 한국의 예술 및 문화를 알리는 특별전을 하고 있다.
발렌시아 비엔날레에서는 文信, 소토, 알파로 등 세계 거장들의 특별초대전을 마련하였고 남불 지중해안의 뽀르ㆍ발카레스에 서 있는 조각 「태양의인간」이 있는 뻬르삐녕시에선 2006년 초대전을 의뢰하고 있는 상태이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발카레스의 아트샵에는 文信의 조각이 서 있는 엽서를 팔고 있었다.
수 십년에 걸친 마산ㆍ코리아의 명성을 떨친 그는 이미 우리 예술작품의 한류열풍에 기여하고 있다.
아프리카산 아비동 목재로 만든 작품으로 인해 세계적 조각가로 명성을 날리는 문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그의 작품은 바로 미술의 한류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하나의 예로 세계적 거장 文信의 조각이나 드로잉에서 한국 고유의 캐릭터 상품을 창출할 수 있고, 캐릭터상품으로 개발할 수 있다. 스포츠와 관련 캐릭터로 유명작가의 작품을 활용할 수 있다.
무용 측면에서도 한류 지속을 위해여 공유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내고 상호 교류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엘리트의 고급문화, 기층 토착적인 민속문화, 그 중간의 대중문화로 통합된 문화가 교류되어야 한다. 상업성과 예술성의 적절한 병행이 필요하다.
장쉰(江迅)은 “한국인들은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고 끈기가 대단하며 유행을 이끄는 민족이다. 생기 있고 화려한 한류는 사실 보수적이며 소박함을 내포한 뿌리 깊은 동양 문화가 깃들여 있다. 유행 문화를 이끌고 있는 한류의 성공은 사실 한국인들이 한민족의 문화적 내포와 서방 현대사상을 자신 있게 결합시킨 결과이다 ”라고 평가하였다(영국 BBC, 2005.10.21).
그러면 지금의 한류열풍이 지속되는데 필요한 무용의 작품구성은 다른 분야의 제언과 문화의 상호교류, 통합된 문화교류, 상업성과 예술성의 병행을 고려해야 한다. 보편성과 대중성 그리고 적응력 있는 맞춤식 무용문화도 대량으로 창출해야 한다.
우리 춤이 일시에 전 세계에 전파를 타고 흐르는 것을 올림픽과 월드컵 경기에서 이다.다양한 주제 무용은 수요가 많이 창출될 것이다.
연극에서는 2005 한일우정의 해/한일공동방문의 해를 맞아 11월 11일-13일 까지 공연되었던 세계적으로 알려진 일본의 다카라즈카 공연은 의미있는 문제점을 지적해준다.
일본 대중 여성가극 다카라즈카 공연은 ‘일류’(日流) 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한국관객들에게 대표적인 다카라즈카 레퍼토리인 <베르사이유의 장미>(1부)와 <소울오브시바>(2부)를 선보였다. 다카라즈카 극단은 전원 미혼여성으로만 구성된 여성가극단으로, 남성역할을 여배우가 연기한다.
다카라즈카는 지금까지 16개국, 120여개 도시에서 공연되어, 익히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하고 있는 대중공연 형식으로, 일본만화, 브로드웨이 뮤지칼, 세계명작소설 등등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구성된다. 이를 테면, 일종의 ‘일류’(日流) 공연인 셈이다.
리요코의 일본 순정만화를 무대화한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한때 한국소녀독자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케다 것이다.
이러한 장면 만들기가 글로벌 관객들에게는, 일본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을 융합시키는 장면으로, 그들이 동일시 하고 즐길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검정색 턱시도를 입은 일본 여배우들이 창조하는 서양 남성인물들의 단체율동과 노래장면은 섹시하다 못해, 도발적이기 까지 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일본의 글로발 문화 전략을 읽을수 있다.
오토쿠야쿠인 고즈키 오타루의 연기가 눈부시게 인상적이다.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바탕으로, 프랑스 역사를 빌려와 극적 이야기를 구성하면서도, 일본 대중가요를 기본으로 한 노래작곡을 톻해, 이번 다라카즈카 공연은, 일본 대중문화적 특성과, 글로벌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보편성을 효과적으로 혼합한, 대중공연 형식을 선보였다 할 것이다. 한류의 세계화를 논하는 이즈음 여러 가지 문화전략에 대해 생각할 점을 일깨워준다.
지금의 한류는 대부분 대중 예술에 국한되어 있다. 주잉제 중국문화원의 ꡒ한류의 미래가 밝지 않다ꡓ고 지적한다. 그 이유는 한류의 진원지인 중국을 포함한 동남아 각국의 한류는 ‘경제 수준에 따른 서구식 생활방식의 동경’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데, 조만간 그들의 경제가 한국을 따라잡게 되면 ‘한류는 열기가 식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어 ‘지속 가능한 한류’로 고급예술 분야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홍콩영화의 예가 이를 입증한다. 많은 관객이 동원되었지만 식자층에게는 환영을 받지 못했고, 현재는 그 열기가 식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래서 지속 가능한 한류의 대안으로써 지식계층에 어필할 고급 예술을 통한 접근이 필요하다. 아울러 거대시장 인도와 전쟁이 끝나는 이라크를 비롯, 아랍권도 한류의 대상으로 삼을 만 하다..
순수예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한류 창조도 있어야 한다. 미술, 음악, 연극 등의 ‘한류의 고급화’, ‘한류의 대상지역 확대’는 미술에서의 문신의 전 세계의 조각 활동 , 음악에서 김진묵의 ‘새로운 동양음악 창조’, 문학에 있어서의 번역작업, 무용 교류 등의 작업 등을 들 수 있다..
미적 가치가 입증된 전통 작품을 현대화 하는 것도 한류를 확산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월드뮤직의 대두’, ‘프랑스에서 불교의 확산’, ‘자본주의 문화의 비인간화에 대한 자각’ 및 미국과의 전쟁을 회피하지 않은 아프가니스탄과과 이라크의 전례에서 보듯, 민족의 역사는 자존심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민족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속성이 있다. 우리 문화의 저변을 이루는 불교문화는 인도의 불교문화를 수용하면서 자생한 민족문화이다. 이런 점에서 이질적 문화의 교류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생명력을 얻어 다음 세대 문화권에 수용된다.
한국의 전통음악과 다양한 나라의 전통음악을 접목시켜 새로운 동양음악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그 첫 번째 작업이 우리나라의 산조(散調)와 인도의 전통음악인 라가(Raga)의 공통분모를 찾아 새로운 현대음악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대중문화에만 치우친 한류에서 벗어나 ‘전통음악의 세계화’라는 예술작업으로 평가된다.
비즈니스 차원으로 이루어지는 한류를 넘어 지속 가능한 문화교류 혹은 서로를 이해하는 구심점을 . 인도의 음악 문화에서 새로운 창작의 원천을 찾으려는 서구인들에게도 귀감이 되었고, 그들은 이를 통해 한국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한국과 인도의 월드 뮤직 그룹 ‘쌍깃프렌즈’의 성공이 그 밑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모두 동양의 전통악기만을 사용했다. 한국의 경우, 민속악과 가야금은 퓨전국악에서 많이 사용하는 관계로 정악(여창)과 거문고를 사용했다. 동양권에는 저음악기가 희귀한 관계로 거문고를 베이스 악기로 사용하였다. 한류 대상지역의 아랍권 으로의 확대도 필요한 시점이다.
세계 평화를 위한 월드뮤직 그룹 ‘조화로운 지구’(Earth Concerto)는 한류의 세계화라는 의미 외에 진정 세계를 한 마음으로 모을 수 있는 미래의 인류를 위해 긍정적 기여를 했다. 고급문화의 한류화 혹은 세게화에도 당국의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류 훈풍에 대해 관련학자, 업계, 문화정책 관련자 중 상당수가 한류 중요한 문제점과 한계를 들어 우려를 해왔다. 거품현상의 근거는 (1) 일부 인기 있는 몇몇 대중 예술인에 의해 한류 붐이 생성되고 유지되고 있다는 점 (2) 한국 문화산업 구조의 근본적인 취약점 및 내수시장의 협소 (3) 지속적인 양질의 문화콘텐츠 생산의 한계 및 다양성의 부족 (4) 단기이익을 노린 대중문화 일변도의 공격적인 한류현상(5) 혐한류(일본), 항한류(중국), 반한류(베트남)에서 나타나듯 일방적인 한류에 대한 거부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2002~2003년도를 기점으로 한류가 한풀 꺾일 것이라는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오히려 한류의 심화기, 발전기에 들어서지 않았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한다.
한류의 지속 및 확산을 위한 정책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우수한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문화역량을 구축하고 문화산업의 기반과 체질을 강화하는데 있다. 아울러 한류의 파급효과를 통하여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고 한국의 이미지를 고급화하며 한국상품의 수출과 한국관광산업과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이 한류의 지속화 및 확산을 위한 효과적인 정책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한류의 확산, 진화는 민간주도로 추진하되 정부는 민간활동의 지원과 저작권 보호 등 한류의 장애요인 제거 등 여건 조성에 힘쓰는 한편, 문화 한류, 경제 한류, 디지털 한류의 통합적 추진을 통하여 한류의 효과를 확산하고 일방적인 한류확산 보다는 문화교류차원의 쌍방향 교류와 협력을 통한 상호교류가 이루어져야 최근 일고있는 항한류, 반한류, 혐한류를 해소하고 한층 진화된 한류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류의 지속 및 확산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살펴보자.
국내 문화산업 기반 강화 면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사업 관련 업체는 선진국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영세하여 산업적 기반도 취약하다. 문화콘텐츠 산업은 많은 투자 위험요인을 안고 있으며, 투명성 미비 등 산업으로서 투자 및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안고 있다. 따라서 수준 높은 문화콘텐츠,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정책적 지원이 더욱 확대되어야 하고, 산업적 체제 등이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투자유치의 확대, 유통환경의 개선, 문화콘텐츠 저작권 보호 강화, 통합전산망의 확충과 공동물류 센터의 구축 등 영상을 유통체제의 현대화가 지속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내부적으로 국내문화산업의 발달 없이는 국제경쟁력은 기대할 수없기 때문이다.
문화콘텐츠 창작역량 강화는 우수한 기획자, 홍보 및 마케팅 전문가, 아트 엔드 엔터테인먼트 전공(Art & Entertainment MBA) 예술경영 전공 등 문화산업 발전의 유능한 인재가 지속적으로 육성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문화산업 종사자의 70%가 2년제 대학이하의 졸업자이며, 각 분야별 유능한 전문가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CT(Culture Technology) 핵심 인력 양성을 위한 대학원 대학의 설치 운영 등이 필요하다. 또한 유능한 현장실무인력을 재교육할 수 있도록영화, 드라마, 게임, 디자인, 캐릭터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산업 아카데미(영화진흥위원회의 영화아카데미 수준의 1년~2년 과정)를 운영하고 산, 학, 연을 연계한 문화산업특화연구(CRC)를 통한 인력양성이 중요하다. 이와 더불어 해외 유명문화산업 관련대학과 제휴하여 운영하는 "문화콘텐츠 글로벌 리더과정", "현장실무 인력 해외기업 파견 프로젝트" 등을 추진함으로써 국제적 감각과 능력을 갖춘 문화산업 인력의 정예화 정책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교류 차원의 한류정책으로는 한류의 일방적 공세, 단기적인 이익을 노린 상업적 접근 일변도 보다 고급문화와 대중 문화가 동반 진출하여 우리나라의 뛰어난 문화역량을 보여주는 한편, 상호 쌍방향적인 문화교류확대 및 대상국가와 문화협력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또한 문화프로그램 또는 방송영상, 콘텐츠, 영화 등의 공동기획, 공동제작 등을 통한 장기적인 협력강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류 대상국가와의 인력교류 및 협력강화를 위한 아시아권 전문, 인력교류 및 협력, 지원강화를 위하여 영상기술인력, 차세대 문화리더 연수프로그램 등을 운영하여 아시아권의 엔터테인먼트 전공 대학생의 4년제 대학 연수유치, 언론계, 문화계 유력인사의 방한 초청 등이 다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아시아 문화산업 포럼, 세미나 등을 수시로 개최하여 인적 교류를 활발히 하고 한류 확산에 기여한 국내외 기업인, 학계, 언론계, 문화계 인사 등에 대한 초청, 연수, 포상 등이 적절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쌍방향 문화교류를 위해서는 총 66개국 444개 도시 간 자매결연 등의 협력체제로 민간차원의 다양한 협력 네트워크 구축이 필요하며 아시아 각 도의 자매결연 및 이들 도시간의 교류활성화가 필요하다.
한류 마케팅 강화를 위해 해외 현지 마케팅의 강화를 위해서는 해외의 KOTRA 무역관, 한국관광공사 해외지사 등을 활용여 한국의 IT, 문화콘텐츠를 소개하는 거점으로 활용하여 우리문화산업의 소개채널을 다양화하고 점차적으로 한국 콘텐츠 진흥원 사무소나 한국문화센터를 확충하여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IT 협력단, 로드쇼 시연단 등을 파견하여 한류 문화콘텐츠와 연계시키고 국내에서는 2005 G스타 게임쇼를 세계5대 게임쇼로 발전시켜 한국문화콘텐츠의 위상을 강화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세계3대 게임 쇼인 로스앤젤레스 E3, 도쿄게임쇼, 차이나 조이 등 게임박람회, IT박람회 등에 적극 참여하여 한국문화콘텐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전략이 필요하다.
글쓴시점/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