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꽃
이병기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고나.
지난 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가람 이병기 선생의 냉이꽃 조동화(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은 1891년 전북 익산국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서 변호사 이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릴 때 고향 사숙에서 10여 년 간 한학을 배웠으며, 1906년 충남 논산군 두마면 은동 광산김씨 문중의 규수 수와 결혼하였다. 이 무렵 중국의 계몽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량치차오의 <음빙실전집>을 읽고 신문학 공부를 결심하여 19세 때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고, 곧 이어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한성사범학교 재학시 조선어강습원(1년)을 수료했는데, 이때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문법 강의를 듣고 큰 감화를 받았다. 이후 남양, 전주, 여산 등의 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동광 휘문보고 교사를 역임하였는데, 보통학교 재직 때부터 국문학 및 국사학에 관련되는 문헌의 수집과 국문학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1921년 권덕규, 임경재 등과 조선어 연구회를 발기하여 그 간사에 선임되었으며 1925년 [조선문단] 지에 <한강을 지나며>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조 창작에도 매진하였다. 1926년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문학온동이 전개될 때, 선생은 조선주의의 표방아래 시조부흥운동을 활발히 일으켜 <시조란 무엇인가>를 동아일보에 연재한데 이어 <율격과 시조>,<시조와 그 연구,<시조의 현재와 장래>,<시조는 혁신하자>,<시조의 기원과 그 형태> 등 본격적인 시조론을 발표하였다. 특히 <시조는 혁신하자>에서 실감실정의 표현, 취재범위 확장, 용어의 수삼, 격조의 변화, 연작시조쓰기, 짓는법과 읽는 법 등 6항의 창작론을 주창하였는데, 이는 고시조의 관념성과 추상성을 배격하고 참된 개성과 리얼리티의 획득을 주장한 점에서 현대시의 이론과 상통하여, 수사적-제재적 이론과 함께 상투어의 탈피, 자기 언어의 발견 등을 강조한 점은 고시조와 다른 현대시조의 중요한 특성이 되고 있다. 선생은 창작 면에서도 활발하여 <고향으로 돌아갑시다>,<으스름 달밤>,<매화,수선화>,<옥잠화>,<밤비>,<봄>,<백운대> 등의 시조를 꾸준히 발표했으며, 1939년 시조집 [가람시조집]을 문장사에서 펴내어 시조 중흥을 이룩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선생의 시조는 자연의 생생하고도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청신한 감각을 펼처 보임으로써 현대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생전에 선생은 난초와 매화를 늘 가까이 두고 사랑하였고, 성품이 호탕하여 술과 더불어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가운데 좌중을 압도하는 품위와 위력이 있었으며, 1909년 4월 13일부터 작고 전날까지 일기를 남겼는데, 이는 국문학적으로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1952년 1.4 후퇴 때에는 고서를 트럭에 실어 서울에서 향리까지 옮겨 고전 발굴뿐 아니라 고전 수호에 큰 몫을 했다. 이와 아울러 선생은 고전문학 연구에도 지대한 공을 세웠는데, 논문 <고전문학에 나타난 향토성> 외에 발표 간행된 것으로 <한중록 주해>,<인현왕후전>,<역대시조선>,<의유당일기>,<근조내간집>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1942년 10월 22일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제국주의 일본경찰에 피검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기소유예로 출감한 후, 곧 낙향하여 고전문헌 연구와 농사에 전념했다. 해방 후 다시 상경하여 군정청 편수관, 편찬과장, 서울대 문리대 교수 등을 역임하고 단국대, 신문학원 등에 출강했다. 1952년 전북대 문리대 학장이 되고 1954년 4월에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6년 중앙되 문리대 교수 겸 서울대 대학원 강사 등을 역임하고, 같은 해 정년으로 전북대에서 퇴임했다. 이어서 1957년 학술원 추천 회원이 되었고, 일체의 강단직을 사임하고 향리로돌아갔다. 낙향중인 1960년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함과 아울러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고, 1961년 전북대 총장으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듬해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앞서 기록한 저서 외의 주요 저서로는 [시조의 개설과 창작],[국문학전사],[현대시조선총],[국문학개설],[가람문선],[가람 이병기 박사 송수논문집] 등이 있다. 선생의 시조 <시름>을 새긴 가람 시비가 전주 다가공원에 세워졌고,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 있는 선생의 생가는 1973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 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1979년 창립된 가람시조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가람시조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해오고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흔히 현대시조의 아버지라 불린다. 시조부흥 운동이 초기에 최남선, 이광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고시조의 연장 혹은 재현을 넘지못하고 있던 차, 가람과 노산에 의해 비로소 연시조와 구별배행시조 등 새로운 현대시조가 만들어지고, 악곡의 창사로서의 시조가 아니라 한국의 언어적 특성과 민족적 리듬이 나타나는 단시로서의 시조가 가지는 중요성과 타당성이 확인되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람 선생은 전술한 대로 1932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시조는 혁신하자>라는 글에서 현대시조의 나아갈 길을 밝혀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몸소 세련된 감각과 감수성으로 시조 창작에 임해 현대시조가 나아갈 길을 활짝 열어놓은 분이었다. 따라서 ‘현대시조의 아버지’라는 찬사는 현대시조에서의 선생의 위상이 이처럼 남다르다는 점에 말미암은 지극히 자연스런 찬사라 할 것이다.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고나.
지난 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떨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이병기 <냉이꽃> 전문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지금부터 꼭 30년 전이었다. 세상이 알아주는 책벌레인 아내가 시집오면서 챙겨온 몇 권의 책 가운데 희한하게도 [가람문선] 이란 책 한 권이 끼어 있었고, 막 시조에 눈뜨던 나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가뭄에 단비 격이었다. 지금이야 온갖 책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책이 귀하던 당시로서는 출판된 지 이미 여러해가 흘러가 버린 책을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그것이 가장 알고 싶었던 한 분의 한 평생 갈고 다듬은 글들이 고스란히 집대성되어 있는 보배중의 보배이었음에랴.
흔희 선생의 대표작으로 <난초>를 꼽는다. 난초는 고서와 더불어 선생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또 <난초>라는 작품도 다른 작품에 비해 빼어나 있어 당연한 귀결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그동안 ‘가람’하면 ‘난초’요, '난초‘ 하면 ’가람‘ 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 시인의 정신 세계가 <난초>라는 시 몇 편과 난초에 얽힌 일화만으로 다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닐진대, 다른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도 의의가 깊은 일이라 여겨져, 굳이 이 <냉이꽃>을 선정해본 것이다. 이외에도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선생의 작품들을 보면 묘사가 두드러진 작품이 많은데 이 <냉이꽃>은 묘사가 아닌 정감이 주조를 이룬 작품으로 낭만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독자에게 주는 인상이 여타의 작품에 비해 매우 화려하고 강렬하다. 굳이 <난초>와 <냉이꽃>을 단적으로 비교해본다면, 전자가 정적인데 반해 후자는 동적이며, 또한 전자가 차렷 자세인데 반해 후자는 편히쉬어 자세라고나 할까. 아무튼 무어라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냉이꽃>은 선생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매력 만점의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선 3수의 연시조로 된 이 작품의내용 면을 살펴보면, 첫째 수에서는 밤에는 잠자고 낮에는 세끼 밥을 먹고 때때로 시도 읊는 시인의 유유자적한 삶을, 둘째 수에서는 봄에 피는 진달래와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궁극적으로는 해마다 별반 다를바가 없지마는 새롭게 느껴짐을, 셋째 수에서는 지구에 빛을 보내주는 태양은 한결같은데 지구에 사는 인류는 대량살상무기인 수소탄 원자탄을 만드는 살벌한 현실을 상기시키면서 작은 냉이꽃 한 잎에게라도 그 목숨을 누가 넣을 수 있겠느냐며 대미를 맺고 있다. 3수로 된 이 연시조의 짜임을 편의상 기, 서, 결로 본다면, 기는 말 그대로 이 시조의 첫 내디딤이다. 밤이면 잠을 자고 낮이면 세 끼 밥을 먹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 삶의 전형이다. 따라서 이 기는 시인의 자족한 삶을 노래한 것이 될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이 l조가 아니고 음수율에 제한이 없는 시였다면, 유난히도 고서와 난과 술을 좋아했던 선생의 행적으로 미루어볼때, 아마도 종장은 틈틈이 고서를 벗하고 곁들여 난과 술이 있으니 시도 읊고싶다는 내용이 되었을는지 모른다. 서는 형식상으로는 기에 이은 전개에 해당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오히려 기와는 도치의 관계에 있다. 곧 해마다 피고 우는 진달래와 꾀꼬리가 새롭게 느껴지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그것이 시의 좋은 동기가 되고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는 항상 새로움을 창조하는 작업으로, 가령 ‘春草年年綠, 王孫歸不歸’라는 옛 시구만 떠올려 보더라도 그것은 보다 확연해진다. ‘春草年年綠’이라는 시구는 내용면에서 분명 ‘새롭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王孫歸不歸’ 라는 후구를 이끌어내는 좋은 동기가 되고 있지 않은가. 자연 속의 사물들은 사시사철 신선한 느낌으로 시인의 오감에 닿아오고, 그러기에 시인은 기쁘거나 슬프거나 시를 쓰는 시인일 수 있는 것이다. 결은 내용상으로 보나 형식상으로 보나 마무리이다. 자연 가운데 하나인 태양은 불타는 존재이지만 태초부터 지금까지 만고불변인데 반해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는 그렇지 못하다고 운을 떼어, 그것이 바로 인간 자신이 만든 대량살상무기인 수소탄 원자탄 때문임을 종장에서 밝힌 다음, 그러한 첨단 살상무기를 만드는 인간의 뛰어난 지혜로도 작은 냉이꽃 한 잎에게 생명을 불어넣을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지금이야 핵문제가 인류가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누구나 인식하고 있지만, 핵 개발의 초창기에 수소탄 원자탄의 위험을 직시한 혜안이 놀랍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이 인간 성정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것은 오묘한 섭리의 깨우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평화에의 희구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가지는 의문은 이 작품이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하는 점이다. 일견 보아서 3수의 내용이 제각기 너무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람 선생 같은 대 시인이 이 작품의 이면에 어떤 통일성을 부여하지 않았을 리는 없는일, 여기서 쉽사리 낙담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마음을 냉정하게 가다듬고 몇 번 더 음미해 보는 동안에 우리는 마침내 어렴풋하나마 하나의 일관된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만,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삶’ 이라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현대시는 ‘베일의미학’ 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나타내고자 하는 실상을 가능한 한 숨겨서 독자로 하여금 의식의 복잡한 미로를 거친 뒤 그 의도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도록 배려한 현대시의 한 속성을 일컫는 말이다. 가령 어떤 시를 한번 읽는 즉시 그 밑바닥까지 훤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싱거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현대의 시인들은 치밀한 그나름의 계산을 가지고 설명이 아니라 오직 제시 내지 표현을 함으로써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를 될 수 있는 대로 숨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미당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동천>이나 김춘수의 저 유명한 <나의 하나님> 같은 시가 바로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람 선생의 최고 대표작으로 <난초>가 아닌 이<냉이꽃>을 꼽고싶다. 그것은 <난초>를 폄하해서가 아니라, 이 <냉이꽃>이야말로 ‘베일의 미학’이라는 현대시의 속성에 너무도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가람 선생은 시조가 아닌 문장에서도 일세를 풍미한 분이셨다. 일찍이 치웅 선생이 자신이 쓴 [수필문학입문]에서, “문장의 품격은 가람 이병기를 첫째로 꼽을 것이니, 한문의 소양을 기초로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내간체 문장에서 탈회된 것으로 온아 간결하고 겸허하여 조촐한 선비의 고담한 품격이 있다. 만년의<가람문선서>는 흠잡을데 없는 아품이다.“ 라고 극찬했던 그것을여기서 잠시 일별해보자.
고향에 돌아온 지 어언 여러 해가 된다. 흔히 항간에서는 落鄕이라고들 말하지만, 落鄕이 아니라 歸鄕이요, 歸去來 前의 심정에서 옛 보금자리를 찾아왔던 것이다. 새소리에 날이 밝아오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송뢰에 해가 저무는 속에, 나는 오늘도 淡淡히 잔을 기울이다가 그만 하루해를 보내고 있다. 梅花도 늙고 보면 성근 가지에 한두 송이 꽃을 꾸며 족하듯이, 이제 나는 허울을 더 떨어버린 한 그루 古梅로 그저 無念無想이면 넉넉하다. 回顧하면 모두 아득한 옛날, 내 周邊을 지켜주고 보살펴주던 친구들의 이젠 저 山 너머 오고가는 한 점 구름처럼 내 마음의 한 구석을 지나가는 그림자요, 산골을 흘러내리는 물 위에 떠가는 꽃이파리들이다. 문득 헤아려보면, 내 나이 이른 여섯 해 동안 崎嶇한 속에서 나날을 보냈고, 쌓아놓은 學問 또한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채 餘生을 보내고 있는 것이 어찌 생각하면 面愧스럽기 그지없는데도, 이처럼 知己와 後輩들의 알뜰한 정성이 結晶하여 그동안에 記錄한 것들 중에서 골라 [文選]을 上梓하게 되니, 한편 내 옛 얼굴을 다시 對하는 듯도 하다. 다만 이 조촐한 容器에 담을 만한 것들이못됨을 恨할 따름이요, 그에 따른 香氣가 또한 짙지 못함을 부끄러워할 따름이다.
보다시피 이것은 한 책의 짤막한 서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그 시적 표현에서, 대가이면서도 대가연하지 않는 그 겸허함에서, 새소리와 송뢰로 하루해가 뜨고 저무는 속에 담담히 잔을 기울이는 그 여유와 멋에서 우리는 말로만 듣던 옛 선비의 모습을 홀연히 바라보게 된다. 특히 “梅花도 늙고 보면 성근 가지에 한두 송이 꽃을 꾸며 족하듯이, 이제 나는 허울을 더 떨어버린 한 그루 古梅로 그저 無念無想이면 넉넉하다.”라는 부분은 높은 인품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득음이다. 이형기의 시 <낙화>에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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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람 이병기 선생의 냉이꽃에서 기개를 배웁니다 지조를 배웁니다 물질문명의 종말과
자연사랑의 숭고한 가치를 배웁니다 나라솔/송태준 선생님의 시조사랑 값진 노고로
클럽이 이 아침 큰 힘을 얻습니다 갑사합니다
전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지난 주말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의 가람 선생님 생가(수우재)에서 개최된 제 5회 가람문학제에 다녀왔습니다.
현대시조의 아버지라 할 가람 선생님의 체취가 오롯이 느껴지는 생가가 잘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시조뿐만 아니라 시서화에 두루 능하셨고, 특히나 학자 및 지사로서 고매한 생을 사시고 가신 선생님의 높은 덕이 새삼 우러러 보입니다. 해서 선생님의 대표작에 대한 감상평을 퍼왔습니다.
지독했던 더위도 가고, 계절은 어김없이 가을 초입에 왔군요. 여전히 활발한 활동 하시며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