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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소개코너 스크랩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저자 최태영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210 13.08.21 02: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

저자
최태영
출판사
눈빛

실존인물 단군이 반만 년 전에 고조선을 개국하여 현재 중국의 요동을 중심으로 크게 활약한 선진 광역국가였음을 역사자료에 의하여 밝히고, 당시 후진국이었던 일본은, 오랜 역사오 함께 선진국이었던 한국의 영향을받은 바 크다는 것을 확인하려는데 있다.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밝임에 있어서 그 기원은 일찍이 고조선 말기의 민족이동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서두를 시작한다.

 

최태영(崔泰永, 1900년 3월 28일 ~ 2005년 11월 30일)은 대한민국법학자이자 역사학자이다. 한국인 최초로 1925년에 법학 정교수가 되어 한국 근대 법학의 초기에 보성전문학교서울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상법·민법·헌법·국제법·행정법·법제사·법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치며 법학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대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병도와 함께 《한국 상고사 입문》을 펴내기도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1919년 메이지대학 예과에 입학하였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법학부에서 수학하여 법철학 및 상법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보성전문학교에서 교수 및 강사로 일하면서 경신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에서 변호사 자격을 인증받은 뒤, 1946년부터 부산대학교 교수 겸 인문대학장을 지냈다. 1947년 12월 16일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겸 학장이 되었다.

1949년부터 1962년까지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겸 학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58년에는 동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는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겸 대학원장을 지냈고, 1957년부터 1968년까지는 청주대학 교수 겸 학장 겸 대학원장을 지내는 등 활발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술활동에도 열의를 보여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7년부터 1972년까지는 한국상사법학회 회장을 지냈다. 저술로 국내 최초로 상법과 관련된 《현행 어음·수표법》을 집필하였고,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977년에 출간한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은 학술원 저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대사 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단군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하였다. 《삼국유사》의 ‘환인(桓因)’은 ‘환국(桓國)’의 조작이라는 주장을 통해 잘 알려졌다. 1989년에는 이병도와 함께 《한국 상고사 입문》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후 90세 이상의 고령일 때도 활발한 저작활동을 펼쳤다.

 

 

고조선 이래의 종교, 사상, 철학, 습속과 사회변천을 알려면, 먼저 그 기반이 되어 있는 고유의 조상숭배

와 하늘에 대한 제사, 무속과 풍류(현묘지도)를 알아보고 나서 한인(韓人)이 유교, 불교, 도교 같은 외래

의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여 독창적인 전통을 만들었는지를 상고해야 한다.
 
하늘에 제사지내고 보본(報本)하는 조선족의 전통은 오래된 것이다. 신시시대-고조선 이래 하늘

과 조상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는 제천은 계승되었다. 백두산은 고조선 개국 이전부터 조선족이 제천

하던 곳이고 우리 조상족이 제일 먼저 개척한 송화강 연안은 고대에는 소밀, 속말, 소머리, 즉 우수(牛首

), 우두(牛頭)라고 하였다. 흰 소를 잡아 제천하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박달나무 아래 제단을 만들고 소도를 세워 하늘과 조상을 숭배하는 수도교(소도교)를 펴

고 법질서를 두루 보호하며 교화하여 살았다. 고조선의 개조인 단군임금이 제천하는 제주 천군과 치국

하는 군왕의 두 신분을 겸하였다.
 
삼한 지역과 백제에도 소도라는 종교적 성지가 있어 이곳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가 행해졌음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중국 [위지]의 고구려전과 삼한전에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이 있어 솟대라고 하는 나무를 세

우고 제사 지낸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말의 학자 이백의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신시를 세운 환웅천왕

의 공덕은 수두, 제천의 고속(古俗)에 의하여 분명히 전송되어 잊히지 아니했다."고 했다. 또 [마한세기]

에 "이로부터 수두제단이 도처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고, 최치원이 쓴 비문에 "백제에도 소도행사가

있었다."고  했다. 문경 봉암사의 신라 지중대사 적조탑(寂照塔)비에는 "동국이 정립하였을 때, 백제에 민

족축제 소도의식이 있었다."고 새겨져 있다.
 
대개 삼한시대 혹은 삼국시대까지 그런 행사가 있었던 듯하다. 근세까지도 황해도 장련에는 솟대백이라

는 지명이 남아 있었다. 신채호가 조선 한족(韓族)의 특징이 하느님과 조상을 받드는 수도교에 있

다고 본 것은 매우 주목할 일이다. 고조선의 수두교는 요, 금, 중국 등 각지에 널리 분포된 사실

도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한민족이 고대 이래 처음부터 그렇게 위하고 섬기는 하늘-천(天)이란 인정법(人定法)에 대한 자

연법, 즉 사람이 인위로 정하지 않은, 이상적인 법으로서 자연법의 개념이다. 중국의 천(天)은 우

리의 하늘 개념과는 달리 자연법칙, 자연적으로 그런 결과가 온다는 사상이다.
 
삼한을 포함한 고조선 왕국에서 숭배하였던 최고 신은 하느님이었고 그 기본정신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홍익인간)'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고선교(古仙敎)라고 하였다. 고대 한국민족은 하늘을 숭배하였

기 때문에 스스로 천손족이라고 불렀다. 제사장을 천군(天君)이라고 하였다. 고대 신라 초기의 임금

중에도 신직(神職)을 겸한 예가 있다. 대체로 고조선 열국 시기 및 삼한에서 제정이 분리되었는데, 이는

통치자의 권력이 강화 확대되면서 종교적 직분을 분리시켜 왕권의 예속하에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고의 소도행사나 고대의 국중 대축제는 모두 제천을 주된 목적으로 삼았고, 중세와 근세에 있어서도 제

천 즉 천지의 주재자를 받드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여에서는 영고, 고구려에는 동맹, 동예에는 무

천, 삼한에는 5월제와 10월제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추수철을 맞아 하늘과 조상에 감사하는 제천의식의

성격을 띠는 동시에 술과 노래와 춤으로 유흥하는 때이기도 하였다. 10월 상달의 이러한 민족적 대축제

는 내가 매우 중시해 온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받들며(경천숭조), 근본에 은혜를 갚고(보본), 하

늘과 사람이 합하고(천인합일), 임금과 인민이 함께 즐기고(군민공락) 민족이 뭉치기 위한 뜻깊은

나라행사였다.
 
제천하여 경천, 숭조하는 동이의 전통에 대한 기록은 수없이 많다. [규원사화] 단군기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보본하는 예는 단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에도 역대 왕들은 즉위하면 제일 먼저 건국

시죠묘에 제사하여 보본했으며, 발해에도 보본단이 있었다. 조선 태종때 학자이자 정치가인 변계량은 "단

군의 강림은 요임금 즉위년인 무진년과 같고 하늘에 제사하는 의례는 동방의 전통이므로 어떤 이유

로도 폐지할 수 없다."고 했다.

 

[어제와 오늘] 최태영의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세상에 드문 일이다. 102살의 할아버지가 책을 냈다. 2002년 9월 나온 최태영 박사의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다.

1954년 학술원이 세워졌을 때부터 회원이며 부산대 인문대학장, 서울대 법대 학장, 중앙대 법문학 부장, 청주대 대학원장을 지낸 최태영 박사. 20세기가 시작되던 1900년 3월28일(음력) 황해 은율에서 태어난 최 박사가 11월30일 106세가 넘어 타계한 것은 가족 외에는 몰랐다.

많은 사람들은 최 박사가 77세 때 1만4,000장에 달하는 ‘서양 법철학의 배경’을 저술,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받은 사실(史實)을 몰랐다.

더욱 몰랐다. 88세에는 한국 사학계, 서울대 사학과의 태두인 이병도 박사(1896~1989)와 함께 ‘한국 상고사 입문’을 낸 것이다.

그때까지 이 박사는 단군과 고조선의 사실에 대해 약간의 회의를 느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박사는 “(당신은) 한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일본사만 공부하고 일본인과 이완용에게 이용된 것입니다”는 최 박사의 비평에 종래의 사관을 바꿨다.

이 박사는 ‘상고사 입문’을 최 박사와 같이 내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예부터 단군을 국조로서 사당을 세우고 최고의 조상으로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은 일제의 강점 때부터였다. 지금까지도 여러 곳에 그 제단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 그 제사의 진설도(陳設圖)와 세년가가 세전 되어오고 있다. 신화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처럼 역대 왕조에서 조의에 의하여 받들어지지는 아니 했을 것이다. 아무튼 실존 인간 단군과 영구한 역사를 이어온 고조선에 관하여는 더 연구할지언정 신화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썼다.

최 박사가 법학 교수에서 벗어나 고조선과 단군의 나라를 연구하는 것은 1935년 ‘5천년간의 조선의 얼’(후에 1946년 ‘조선사 연구’로 출간)을 쓴 위당 정인보(1892~1950ㆍ납북 사망, 초대 감찰위원장)의 사관을 따른 것이다.

최 박사는 메이지 대학을 1924년 영어ㆍ법학ㆍ철학을 공부한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 다음해 보성전문 법과의 첫 한국인 정교수가 됐다.

정인보는 그의 부친과 친교가 있었고, 보성전문의 교수였던 김성수(1891~1955ㆍ3대 부통령) 집에 모이는 4인 사랑꾼이었다.

최 박사는 6ㆍ25때 그가 납북되자 그의 단군과 그의 나라, 그 문화에 대해 한문, 일어, 영어의 실력을 구사해 연구했다. 그 결과가 ‘상고사 입문’이었다. 100세가 되자 이 책을 좀더 대중화시켜 ‘한국 상고사’로 개작하고 ‘인간 단군을 찾아서’의 역사 회고록을 냈다.

그가 이병도 박사를 설득했듯이 “단군은 서기전 2333년에 백두산 근처에 환국(桓國)을 세운 임금이며, 제사장이며, 고조선의 개조며 널리 사람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弘益人間) 신념을 가진 예, 맥, 고구려, 부여, 신라, 백제의 한족의 ‘우리 할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는 옛 역사서들의 실증에 30여 년을 쏟아 102세 때 회고록과 실증사실을 종합해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를 냈다. 아마 102세 할아버지가 책을 낸 것을 세상에 없던 일이 아닐까.

그러나 88세 할아버지가 낸 ‘상고사 입문’을 몰랐는지 1988년 후의 한국정부는 단군에 대해 냉랭했다.

1991년에 최 박사는 정원식 문교부 장관을 찾아 갔다. 한ㆍ중ㆍ일ㆍ소 한국학 학자들의 한민족 학술대회 후원 때문이었다. 정 장관은 “역사학자 다수가 단군은 실증주의에 맞는 게 아니라며 없다고 하는데 선생은 왜 단군 찾는 세미나를 한다고 하시오”하며 거절했다.

최 박사가 맞섰다. “역사는 사실이지 다수결이 아니다. 다수결 좋아 마라. 이완용, 송병준 그자들도 나라 말아 먹을 때 내각 다수결이라며 한ㆍ일 합방에 조인했다.”

이어령 문공장관이 나서 “그렇다면 문공부가 후원하겠다”고 해 세미나는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102살의 최태영 박사는 역대정권의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역사의식을 회고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친일파들과 일했지만 단군연호를 법률로 채택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1980년대에 안국동 한옥 저택에 ‘국사찾기운동본부’를 만들어 단군에 관한 강연을 하도록 했다. 윤 전 대통령은 “단군의 존재는 인정하고 그 모임을 만든 것인데 그의 사후 모임은 없어지고 기록도 남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가 1961년 단기를 폐지한 것은 큰 실책이다. 이 때문에 서기전의 일들이 모호한 것처럼 격하되었다. 단기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단군문제는 지금처럼 복잡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은 물었다. “몽고와 우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최 박사는 “같은 후손이지만 우리가 몽고의 후손은 아니다”고 대답했다.

역대 대통령의 단군에 대한 생각에는 뉘앙스가 다르다.

“역사를 다수결로 결정할 수 없다”, “홍익인간은 최대다수의 최대의 행복”이란 것을 단군에서 1세기를 넘어 산 최태영 박사는 느꼈다.

대선에 나설 후보들은 단군에 대한 사관을 가지려면 최태영 박사의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를 꼭 읽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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