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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 1 (입문, 마르코 복음)
Ⅰ. 공관복음의 문제
1. 공통점과 상이점
공관복음을 정확히 비교해 보면 우선 그 내용에 있어서 공통점을 보인다. 세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다루는 순서에서도 서로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세 세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예수님의 세례에서부터 시작하며, 이어서 갈릴래아와 가파르나움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후에 팔레스티나를 가로질러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전하며, 예루살렘에서 반대자들과 논쟁을 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공관복음서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수난, 죽음, 장례에 관한 이야기, 부활에 관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공생활은 한 줄로 그어놓은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예수님은 공생활동안 적어도 네 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으로 되어 있다.
공관복음에는 공통점뿐만 아니라 상이점도 상당히 많다. 특별히 이야기의 소재와 어휘의 선택에서 서로 다르다. 예를 들면 마르코는 예수님의 활동상을 전하지만 독립적인 교훈연사가 거의 없다. 반면에 마태오와 루가에서는 연사가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또한 마르코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족보, 유년시절 이야기가 전혀 없는 반면 마태오와 루가에는 이런 것들이 모두 나온다. 그렇지만 같은 내용을 전하더라도 마태오와 루가의 내용과 어휘가 상당히 다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도 서로 상당히 많이 다르다. 또한 각 복음서에만 나오는 특수사료 역시 공관복음의 상이성을 드러낸다.
2. 문제해결을 위한 가설 (2원천설, 이출전설)
위에 언급한 공통점으로 보아 우리는 세 복음서가 아무런 상호관련성이 없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면 세 복음서는 서로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초대교회 교부들부터 현대의 학자들이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웠다. 이 문제에 대하여 원복음서 가설을 최초로 내세운 사람은 1778년 G. E. Lessing이다. 1797년 J. G. Herder가 구전복음서 가설을 내세웠다. 세 복음사가들은 내용이 충실하고 풍부한 구전을 이용하여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와서 학자들은 2원천설을 주장한다. 이 가설을 최초로 내세운 사람은 독일의 유명한 언어학자 Karl Lachmann(+1851)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마르코 복음서가 세 복음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복음서이다. 마태오와 루가가 마르코를 사료로 이용했다는 증거가 있으며, 마태오와 루가에는 마르코에 없는 예수님의 연사가 많이 나타난다. 이 연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내용도 있지만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들도 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마태오와 루가 사이에는 어떤 문학적인 의존관계를 상정할 수 없다. 더욱이 예수님의 유년시절 이야기와 부활 이야기에서 마태오와 루가는 아주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마르코에는 없지만 마태오와 루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은 마태오와 루가가 마르코 복음 외에도 어떤 제2의 사료를 함께 이용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학자들은 마태오와 루가가 공통으로 이용한 그 사료를 Q 문헌(예수님의 어록집)이라고 한다. Q 문헌에는 주로 예수님의 말씀과 연사가 수록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2원천설이 공관복음의 상호관계를 완벽하게 설명해준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임에 틀림없다. 2원천설에 근거하여 공관복음 상호간의 관계를 도식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Mk(마르코) Q 문헌
↓ ↘ ↙ ↓
↓ ↙ ↘ ↓
Ms →Mt(마태오) Lk(루가) ← Ls(마태오의 고유자료) (루가의 고유자료)
Ⅱ. 복음서의 형성
1. 관심의 확대
초대교회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체험한 후에 거기에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이분이 도대체 누구이신가? 이분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무슨 일을 하셨나?’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래서 쓰여진 복음이 마르코 복음이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의 관심의 폭이 좀더 확대되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공생활 이전에 어떻게 사셨는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경위와 나자렛 생활에 대하여 우리에게 전해준다. 특별히 루가 복음은 예수님의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의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더 후대에 쓰여진 요한복음은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갔다.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이분이 도대체 누구이신가?’ 요한복음은 이분이 천지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라고 선포한다.
2. 복음서가 형성된 삼 단계
1) 예수 그리스도 사건
마지막 때가 되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행동과 말씀으로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음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셨다.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고 여러 가지 행적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분은 수난을 겪고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그런데 십자가에 처형되신 그분이 부활하셨다.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요약하는 말이다.
2) 사도들의 선포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나자렛 사람 예수가 부활하였다. 사도들은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체험하였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들이 선포한 기쁜 소식의 핵심이 사도행전에 잘 나타나 있다(2장과 3장 참조).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선포한 기원후 30년에서 70년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구전전승만이 존재하였다. 구전전승은 설교와 전례와 교리교수 등을 통하여 보존되고 후대로 전해졌다. 곧이어 구전전승이 본격적으로 기록되어야 할 상황이 도래하였다.
3) 복음사가들의 기록
기원후 70년경부터 복음사가들이 출현하여 그 동안 전해져 내려오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쁜 소식을 모아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이들은 그리스도 사건을 과거의 사건으로서 정확하게 기록하려는 의도로 복음서를 쓰지 않았고 다만 그들이 믿고 고백하는 바를 진술하였다. 우리는 복음사가들이 믿음 깊은 신앙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공관 복음서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을 포함하여 4복음 모두가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4복음서는 ‘믿음의 기록, 믿음에 의한 기록, 믿음을 위한 기록’이다. 과거의 사건을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쓴 역사문헌이 아니라 ‘신앙고백서’이다. 사실이 이렇기 때문에 4복음서를 통하여 역사적 예수님의 본모습을 재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A. 슈바이처 박사(1875-1965년)의 <예수전 연구사>가 이것을 말해주는 고전적 문헌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나자렛 출신의 자연인 예수님이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 ‘교회의 그리스도’이다. 즉 예수님을 따르던 초대교회와 그 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 사건에 대해 체험하고, 그 체험한 바를 해석한 것에 따라 형성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비극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Jesus' own teachings)보다 예수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teachings of the Church about Jesus)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라고 한다. ‘가르치는 예수님’(teaching Jesus)보다 ‘가르쳐진 예수님’(taught Jesus), '선포자‘(preacher)로서의 예수님보다 ’선포되어진 자‘(the preached)로서의 예수님에 더 역점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신학계의 동향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faith about Jesus)보다는 ’예수님의 믿음‘(faith of Jesus)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수님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교리나 이론을 믿기보다는 예수님의 믿음과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예수님의 그 믿음과 마음을 본받아보자는 것이다.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숭배하기 이전에 그분의 신앙이 어떠했는지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복음사가들이 복음서를 쓰기 전에 그들 앞에 놓여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수많은 구전전승과 기록전승이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다양한 전승 자료들을 기초로 삼고 자신의 고유한 신학사상으로 보완하여 복음서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의 작업을 전승단편들의 짜깁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복음서를 편집하고 저술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전승단편들을 사용하면서도 거기에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힘있게 불어넣었다. 복음서 저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쁜 소식’의 증인이 되려고 하였다.
3. 공관복음서의 작가들
1)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이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다. 사도들은 이분이 살아 계시다는 놀라운 소식을 선포하였다. 복음의 출처는 예수님의 부활이다. 따라서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초대교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초대교회가 복음서를 쓴 의도는 예수님의 생애를 사실 그대로 보고하거나 혹은 그분에 대한 흥미 있는 이야기를 전하는데 있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데 있었다. 한마디로 복음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초대교회의 해석이요 선포이다.
부활전승은 사건의 역사적인 순서에 의해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지만 복음의 원천이요 복음의 바탕이다.
2) 복음사가들은 당대의 교우들을 위하여 복음서를 작성하였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언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시대 교우들을 위하여 초대교회가 전해준 전승을 수집 정리하여 복음서를 집필하였다. 마르코 복음서는 로마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록되었으며, 마태오 복음서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신자들을 위하여 안티오카에서 작성되었으며, 루가 복음서는 이미 입교한 이방인을 대상으로 작성되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는 좀더 후대에 장시간에 걸쳐 기록되었다.
3) 복음사가들은 고유한 그리스도론을 갖고 있었다.
복음사가들은 당시 초대교회가 사용하던 여러 호칭 중에서 하나 둘을 골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개진하였다.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서 벽두에서부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소개하는데, 특별히 의미심장한 대목에서만 이 호칭을 사용한다. 마르코는 입교한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의 신성을 가르치려고 했다.
반면 마태오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하려 하였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분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성서말씀을 완성하셨다. 성서를 완성하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한으로 하느님의 통치를 완성하며 구원을 이룩하셨다. 마태오 공동체의 신자들은 구약성서를 잘 아는 유다인들이었으므로 예수님의 신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구약성서를 숙지하지 않으면 마태오가 소개하는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오해할 수도 있다.
루가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작성하면서 초대교회가 개발할 ‘주님’이라는 호칭을 많이 사용했다.
4) 복음사가들은 고유한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시대를 구원의 시대로 소개한다. 즉 예수님이 활동을 개시하자 하느님의 통치가 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활과 더불어 시작된 이 구원의 시대는 세상 끝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 구원의 시대는 예수님의 계시로 시작된다. 예수님의 신비가 계시되면 될 수록 구원은 구체화될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신비가 계시되는 순서에 따른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마르코 복음서는 2부로 나눌 수 있다. 제1부(1,1-8,3)는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비밀시기’이다. 예수님의 신비를 알아챈 악령들과 치유혜택을 받은 환자들이 비밀을 잘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이 날로 퍼져나갔다. 제2부(8,31-16,20)는 ‘계시의 시기’이다. 수난예고와 더불어 시작되는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계시는 그분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서 완전히 이루어졌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비밀보다는 ‘하늘나라의 신비’에 관심을 보인다.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이미 와 있는 나라와 장차 완성될 나라 사이의 긴장 속에서 예수님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루가는 역사를 3단계로 나누었다. 즉 인류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시대를 거쳐 예수님의 시대, 교회의 시대로 완성된다고 보았다.
4. 공관복음서의 저작연대
공관복음서의 저작연대를 밝히는 기준으로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기원후 70년 로마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불질러버린 사건이다. 복음서들 중에는 마르코 복음서가 가장 먼저 쓰여 졌다는 것은 이미 학계에서 인정된 이론이다. 왜냐하면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은 예루살렘 멸망 사건을 이미 하나의 과거로 돌아보고 있지만 마르코 복음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코 복음의 저작연대를 기원전 70년 이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Ⅲ. 마르코 복음
1. 독서를 위한 열쇠들
1) 마르코의 선교경험. 마르코는 이방인들 지역에서 선교경험을 갖고 있다. 그의 복음서를 읽어보면 그것을 알 수 있고, 그 선교경험이 힘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 베드로와의 관계는 잘 드러난다. 왜 전통은 베드로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복음서에 들어있는 증언을 사도의 권위 아래 놓기 위해서이다.
3) 로마와의 관계. 그가 상정하는 지리적 영역은 어디인가? 마르코 복음을 읽어보면 이 복음서가 이방종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해서 쓰여졌고, 그들에게 유다교의 관습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런 관습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유다인들은 시장에서 돌아오면 정화예식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이방인 출신 신자들에게 설명해야 했다(마르 7장 참조). 이런 책이라면 이방인 지역에서 쓰여 졌음이 분명하다. 로마에서 쓰여 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2. 마르코 복음서의 구조
1) 지리적인 구조에 따른 분석
1,1-13 서론(요르단 강가에서의 준비)
1,14-9,50 갈릴레아 활동기
10장 예루살렘 상경기
11-16장 예루살렘 활동기
갈릴래아와 예루살렘 사이의 긴장과 대조가 이 책 전체에 작용하고 있다. 이야기는 먼저 갈릴래아에서 시작하고 예루살렘에서 끝난다.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에 관한 부분 안에서 예루살렘이 언급될 적마다 상당히 적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한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시리라”고 천사들이 전한다(16,7). 이것은 예수님이 복음 선포를 시작하셨던 바로 그곳에서부터 복음이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 안에서 예루살렘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도시로 나타난다(3,22 참조). 결국 나라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예루살렘에서 체포하여 사형을 내리고 이방인들의 손에 그분을 넘겨주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활동안 적어도 네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세 번의 과월절 축제를 지내셨다. 사람들은 요한의 이런 증언에 따라 예수님의 공생활을 3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활 중에 단 한번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거기서 수난 부활하심으로써 구원을 이룩하셨다. 마르코 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유일한 목적지가 예루살렘인 것처럼 보인다. 마르코의 이러한 지리적 설정을 마태오와 루가도 이어받았다.
마르코 : 갈릴래아 → 예루살렘 → 갈릴래아
마태오 : 갈릴래아 → 예루살렘 → 갈릴래아
루가 : 갈릴래아 → 예루살렘 → 로마( = 온 세상)
요한 : 지리적 구도보다는 시간적 구도를 중시함.
2) 예수님의 신비가 계시되는 과정에 따른 분석
1,1-13 하늘의 소리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
1,14-8,26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인가?
8,27-16,8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
16,9-20 후대에 첨가된 결문(結文)
마르코가 설정한 지리적인 공간 안에서 하나의 드라마가 전개된다. 그 드라마는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가?”(마르 4,41)라는 물음이다.
마르코 복음 1장 21-28절에는 마르코 복음의 그리스도론을 푸는 열쇠가 숨어있다. 그것은 1장 24절이다. “나자렛 예수님,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마귀의 이러한 신앙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좋아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야단을 치시고 함구령을 내렸다. 그것은 예수님이 마귀를 구원하러 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마르코 복음은 독특한 그리스도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소위 말해서 ‘메시아의 비밀’이다. 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1,1). 그리고 마르코 복음의 제일 마지막 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15,9)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서 첫머리에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놓고 그 다음부터는 철저히 그분의 정체를 감추려고 한다. 그분의 정체를 아는 자에게 그분은 함구령을 내렸다(1,34; 3,12은 마귀들에게/ 1,44; 5,43; 7,36; 8,26은 치유혜택을 받은 사람들에게). 이것이 소위 말하는 ‘메시아의 비밀’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이 비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은 날이 갈수록 퍼져나갔다(6,53-56). 이렇게 발설되기 시작한 메시아의 비밀은 결국 십자가 밑에서 한 이방인에 의해서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사가의 의도에서 나온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다. 나자렛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밝혀나갔던가?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이다. 아직 때가 차지 않았는데도 당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이룰 수 있는 당신의 사명완수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린 것이다. 수난을 받고 부활하실 메시아에 대한 신앙이 확립되기 전에는 군중이 예수님을 오해할까봐 그 비밀을 지키라고 함구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의 비밀’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 사실 적에는 사람들의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낸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보다 예수님과 내적인 관계,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마귀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과 내적으로 일치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내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던 마귀들보다 나을 것이 없고,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하고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 도무지 몰랐던 이스라엘 백성보다도 더 나을 것이 없다.
3. 마르코 복음의 사상
1)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이 구절은 마르코의 신앙고백을 요약하는 말이고 사실은 마르코 복음서의 핵심이요 결론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에 관한 소식은 복음이다.
1세기에 복음은 책이 아니었다. 그리스도 신자들에 의해 신앙 안에서 선포되고 받아들여진 ‘기쁜 소식’ 그 자체였다. 이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아들을 예수님과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아들은 예수님에게 적용된 호칭이기 때문이다. 마르코가 이 두 호칭을 복음서의 첫머리에 놓은 이유는 이 두 호칭이 그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고, 또 앞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써나가는 주축으로 삼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2) 제자의 길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결단을 요구하셨다. 하느님의 통치(=하느님의 나라)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회개를 요구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면 통치의 요구조건(정의와 평화, 진리와 자비, 충실)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통치와 윤리 도덕적인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복음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더불어 계명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계명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르심과 도우심을 받는다면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로서 가능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마르코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논쟁들을 전하면서 동시에 마르코는 나름대로의 편집 작업을 했다. 즉 마르코는 예수님의 추종문제와 예루살렘 상경여행을 결부시킨다. 8장 31절-10장 52절에서 수난예고와 더불어 예수님의 요구가 기록되어있는데 여기에서 마르코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스승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수난을 당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굿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