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루 현판
정암루 오르는 계단
정암루 뒷쪽
정암루 앞쪽
홍의장군 동상 /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 나라를 구한 역사의 인물입니다.
홍의장군 동상
홍의장군 동상 / 홍의장군은 백마를 타고 붉은 옷을 입고 손에는 진검 대신 깃발을 들었습니다.
홍의장군 동상 / 오월의 이팝나무꽃이 반겨주고 있습니다.
의령관문에서 바라본 의병광장의 홍의장군 동상
의령은 충렬의 얼이 힘차게 흐르고 있는 곳입니다.
벼슬도 버리고 나이 40에 의령 외갓집 앞 고목(현고수)에 북을 달아 힘차게 두들기며 의병을 모집했습니다.
관문 왼쪽에 있는 성곽모습
의령관문 앞쪽
의령관문 대들보에 쓰여있는 상량문
의령관문 뒷쪽
남강 옛다리 / 사람만 통행, 차량은 통행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길이는 400 미터
밤이면 아름다운 조명이 였다리를 수놓습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남강이 유유히 흘러오고 있네요. 조금만 더 흘러가면 낙동강과 합류가 됩니다.
의령관문 바로 앞에 있는 남강 현재의 다리/ 이 다리로만 차량이 오고 갑니다.
힐링카페 / 홍의장군 동상 바로 곁에 있습니다.
의병광장 공원입니다.
남강 벼랑에 위치한 의병광장 전경입니다.
홍의장군 곽재우 시(詩)
홍의자군 곽재우 친필
정암진인 남강 옛다리 바로 아래에 있는 솥바위/ 솥은 다리가 3개 / 3명의 재벌이 생김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솥바위 근방에서 금성재벌, 효성재벌, 삼성재벌이 나왔습니다.
솥바위는 임진왜란의 아픔을 안고 묵묵히 강물 속에 앉아 있습니다.
참고로 백부흠 작가의 글을 함께 올렸습니다.
제4회 천강문학상에 낙방하고
白富欽
모집 작품에 투고 했다가 낙방 헸으면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무슨 낯으로 라고 비웃을 독자도 있을 것을 예상하면서 투고하였던 작품을 밝힌다. 그 이유는 역사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곽재우 장군의 업적을 이렇게 보았다고 밝히고자 함이다.
담당자가 아니니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투고된 작품의 수가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모집 요강에 당선작은 한 사람으로 규정하였으니 많은 사람의 낙방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문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문필 생활이 20년이 가까우니 본인의 글 실력을 가늠해 볼 기회도 되고, 오늘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곽재우 장군이 남긴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도전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의령군청에서 거액을 들여 작품을 공모한 이유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곽재우 장군의 공적을 널리 홍보하려는 것이 첫째 목적이고, 둘째가 의령을 널리 알리고자 함이라고 판단하였다.
솔직히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전에는 의병장 곽재우로만 알고 있었다.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곽 장군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임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의 경우는 난중일기(亂中日記)가 있으니 대략적인 흐름은 알 수가 있지만 곽 장군의 경우는 전설에 가까울 만큼 기록이 없다. 그래서 먼저 『조선왕조실록』에서 자료를 찾기 시작하였다. 곽재우는 어떤 사람인지 그 집안을 알고자 아버지 곽월(郭越)의 관력(官歷)까지 찾아보았다. 다음으로 임란은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것이니 일본이 왜 조선을 침략했는지를 자세히 알아 보았다. 이를 위해 침략자인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자료가 필요했고, 조선의 종주국(명나라)의 원병이 왔었으니 중국과의 관계에서 제독 진린(陳隣)과 정벌장군으로 파견되었던 이여송(李如松)의 자료도 필요하였고, 임란의 주체인 선조의 국정을 알기 위해『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뒤졌고, 임란을 수습한 『광해군 실록』과 『수정실록』도 살펴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 본 자료만도 A4 용지로 천여 장이 되었고, 전설로 연구된 석사 논문과 북한에서 번역된 곽재우에 대한 저서 등은 도서관의 소장본을 빌려다 보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비록 입선은 되지 못하였더라도 의령 군청이 시도하는 곽재우 장군의 공적 홍보에는 구우일모(九牛一毛)의 도움이라도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추후 입선작의 발표가 있겠지만 심사자들의 심사 경향을 참고하는 것이 다음 기회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낙방된 작품을 공개하는 것이다.
곽 장군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군인이 아니었다. 오직 이웃과 향토와 나라를 위하여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임란에서 나라를 구출하여 우리의 오늘이 있게 한 영웅이었다. 이 글의 근거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서술하였기에 역사를 조작하거나 과장한 바가 없다.
낙방한 글을 밝히는 것은 의령 군청이 목적하는 바가 곽 장군의 업적 홍보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필자의 낙방작도 곽 장군의 공적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서다. 아울러 이 글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주면 다음 투고자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1. 영원한 생명 앞에서
곽재우장군 동상
저기 말 탄 사람이 누구야? 어린 손자의 눈에도 멋있게 보였는지 잡았던 할아버지의 손을 놓고 고사리 손가락으로 동상을 가리킨다. 안내문을 읽던 할아버지는 안경을 닦으면서 다 읽고 이야기 해 줄게. 이 때 아이 엄마가 달려와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고 아이를 꾀여 데리고 간다. 아들 내외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손자와 함께 문화체험 나들이 온 가족인 것 같다,
우리 역사에는 외침(外侵)이 잦았다. 그 국난의 고비 때마다 풍전등화와 같던 나라를 구출한 우리의 조상들이 있다. 님은 갔어도 그들의 숭고한 애족 정신만은 영원히 우리 민족의 혈관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그 은인들의 거룩한 영상(影像)을 영구히 보존하고자 청동으로 조각하여 모시고 있다. 소재가 청동이니 검은 빛이다, 당시의 갑옷이 검었으니 사실(史實) 고증에 의한 색상의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검은 빛으로 조각된 장군의 근엄하고 엄숙한 위용에서 당시의 위급하였던 전황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검은 빛이 주는 어두움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망우의 동상은 다르다. 사실(史實)이 홍의 장군이었고 백마를 탔으니 화려한 색의 조화도 멋이 있지만, 우리 민족의 앞날을 암시해 주는 밝은 색상이 더욱 멋있다. 동상을 스쳐온 훈풍에 장군의 인간적 향기가 실려 온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붉은 옷에 백마를 탄 장군의 동상 앞에 서면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이어야 할 텐데 멋있는 사나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무장(武將)의 상징인 칼을 차지 않고 바람에 나부끼는 홍기를 들고 멈춰선 백마에 앉은 장군의 모습은 적도(賊徒)를 물리치고 개선(凱旋)한 용사의 위용이다.
멋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장군의 동상이 시사하는 멋은 밝고 화려함도 있지만 그의 인품에서 풍기는 향기와 애민애족의 숭고한 정신이 어우러진 고결한 멋이다.
망우는 이 민족을 지키려 하늘이 내리신 천사이다. 그는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를 지닌 군인도 아니고, 명예를 지키려는 학자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오직 이웃과 향토를 지키려는 애민 정신으로 가족의 안위와 본인의 생명까지도 돌보지 않고 의병의 선봉에 나선 의리의 사나이였다.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명벌차도(明伐借道<명나라를 칠 것이니 길을 빌려 달라>)라는 억지 구실을 앞세워 조총으로 무장한 17만 대군을 700여 척의 병선에 싣고 조선을 기습 침략했다. 그 때가 1592년 (선조 25년) 4월 13일 오후이다.
부산 첨사 정발(鄭撥)장군은 대마도에서 조공하러 오는 세견선(歲遣船)으로 착각한 나머지 성을 지키지 못하고 전사하였으며, 이어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도 낡은 재래식 무기로 싸우다가 순국의 영혼으로 낙화(落花)하니 전세는 패전으로 기울어졌다.
조총의 위력을 실감한 관군은 왜구가 온다는 말만 듣고도 성을 비우고 도망치는 수령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곽 장군은 급히 구레의 본가로 달려갔다. 가묘[祠堂]에 들어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고유하고 삼대 묘의 봉분을 헐어 평지로 만들어 후일 왜구들에게 도굴 당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하였다. 이때 계모 허 씨와 가족들이 현풍에 살고 있었는데 난을 피하여 비슬산 속으로 피신 가려던 참이었다.
곽재우는 가족을 데리고 강을 건너 경상 우도의 깊은 산속에 가족들을 안정시키고 의령으로 돌아와 즉시 의병을 일으켰다. 당초 의병의 수는 가동(家僮) 십여 명으로 시작하였다. 이불을 찢어 군기를 만들고 중국 황제로부터 받은 홍의를 입고 백마를 타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고 칭하였다,
이때 장군의 나이 40세, 인생의 황금기였다. 행복한 가정의 꿈도, 피땀으로 모은 재산도 다 버리고 연전연패(連戰連敗)하는 관군으로는 가족과 향토는 물론 유구한 역사의 나라까지도 존망(存亡)의 위기였다. 하늘같은 남편이 가족을 버리고 의병으로 나서려는 장군의 결정에 부인은 무모한 짓이라고 만류하였으나 장군의 애족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의병장 곽재우는 의주 목사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외손서이다. 남명의 학문적 영향으로 도학(道學)의 심오한 이치를 터득하였고 주역(周易), 춘추(春秋), 성리(性理), 천문(天文), 지리(地理), 음양(陰陽), 의학(醫學) 등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곽재우는 정시(庭試<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宣祖는 정책 비판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과거 자체를 취소하였다. 장군은 이를 계기로 과거를 포기하고 무예를 읽히면서 가사에 진력하여 재산을 크게 늘렸다.
장군이 관직을 포기한 동기는 아버지 곽월이 시국정책(時局政策)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가 그로 인하여 관직을 물러나게 된 때부터 관직 포기의 결심은 태동하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상소를 쓸 때 지필묵(紙筆墨)의 시중을 들면서 상소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부자간에 상의를 했을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런 내용의 상소를 수용치 못하고 역으로 아비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선조의 처사를 보고 관직에 염증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일편단심 애민(愛民)정신으로 봉기한 의병이었으니 하늘도 군민(郡民)들도 곽 장군의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을 것이다. 따라서 많은 장사(將士)들이 그의 휘하에 모였고. 그의 전술도 오랜 세월 수련한 무예와 병법을 응용하고 천지운기를 읽으면서 지형지물에 따라 순리로 지혜롭게 변통하였을 것이다. 바람이 불듯 물이 흐르듯 거침없이 나아가다 막힘이 생기면 질러가거나 돌아갈 줄도 아는 전술이 있었고, 적군의 눈에 잘 뜨이는 홍의를 선택한 것도 휘하 여러 장수들에게 홍의를 입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전술로, 금방 조총의 사정거리 밖에 있었던 홍의장군이 눈 깜짝할 사이 등 뒤에서 화살을 쏘아대니 혼비박산(魂飛魄散)한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퇴로 찾기에 바빴을 것이다.
벼슬아치들의 당파 싸움이 왜적을 불러들여 나라가 곤궁에 빠졌지만 장군은 개의치 않았다. 혼탁한 당쟁에 치우치지 않고 오직 애민 정신으로 왜병들이 정암진(鼎巖津)을 건너지 못하도록 사력을 다하여 향토를 지켰다. 조선 전체가 왜적의 말발굽에 유린되었으나 경상 우도의 백성들은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기강(岐江<지금의 남강>)에 지금은 4차선 교각이 놓여 차를 타고 건널 수 있지만 당시는 나룻배로 건넜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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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관문
지금의 관문에서 동쪽으로 약 200ⅿ지점의 강변에 동산이 있고 그 산마루[山頂]에 정암누각(鼎巖樓閣)이 있다.
누각의 마루[板子]에는 새 다리[新橋] 공사에 일하던 인부들과 이 고을 한로(閑老)들의 휴식 공간이다. 인부들은 오료 후에 잠들었고, 바둑 두는 몇 사람 외의 노인들은 누워서 한담 중이다. 책에서만 읽었던 정암진에 대하여 알고자 하였더니, 백발머리에 주름 잡힌 노인이 옛날이야기를 어제 겪은 일처럼 현실감 있게 설명해준다. 왜놈들이 여러 척의 배로 한꺼번에 강을 건너오면서
조총을 쏘아 대었으나 의병들은 솥뚜껑으로 총알을 막았고, 나루터를 벗어난 왜군의 배가 뻘이나 갈대밭에 좌초되어 움직이지 못하자 의병들이 불화살로 배를 불태웠다. 늪에 빠진 왜병들은 화약이 물에 젖었으니 쓸모없게 된 조총을 메고 갈팡질팡 허둥대는 왜병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킨 곳이라고 설명하는 노인의 무용담은 직접 그 전투에 참여했던 용사처럼 흥분하여 열을 올린다. 솥뚜껑으로 총알을 막았다하여 솥 정(鼎)자를 써서 정암진이라는 설명이다.
정암루
옆 자리에서 모로 누워서 듣고 있던 노인이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보충 설명으로 말을 이었다. 노인은 손가락으로 강의 동남쪽을 가리키며 저기 물 위에 떠있는 섬이 보이지요.
강 복판의 물위에 떠있는 솥뚜껑의 손잡이라는 섬
저 섬이 솥뚜껑의 손잡이라고 하는데 물속에 들어가 보면 솥의 세발[三足]이 있다고 합니다. 이 바위는 크기도 하지만 솥처럼 생겼다고 하여 정암(鼎巖)이라고 한답니다. 솥은 밥을 짓는 그릇이니 의령에는 부자가 많이 난 고장이라고 하면서 한국의 재벌 누구누구를 들먹이며 고향 자랑을 늘어놓는다. (삼성, 금성, 효성 재벌)
정암루 서쪽 암반의 뿌리를 기점으로 새로 시작한 다리 공사가 완공 단계에 있다. 이 다리가 개통되면 남강은 일방통행으로 교통의 안전지대가 되는 의령군의 야심찬 계획인 것 같다.
누각 아래로 내려가 보니 강의 폭은 눈 어름으로 400ⅿ는 되어 보인다. 당시 조총의 사정거리는 확실치 않으나 왜구들의 많은 배가 일시에 도강(渡江)을 시도했다면 도선장을 벗어난 배는 늪이나 갈대밭에 좌초되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곽 장군의 개전(開戰)이 완승의 전과를 올릴만한 장소였다.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경상도 체찰사 김수(金睟)는 부산 첨사 정발 장군과 동래부사 송상현 공의 전사 소식을 듣고는 싸우지 않고 양산에서 밀양으로 밀양에서 초개로 퇴주하고 있었다. 김수의 행위에 격분한 곽 장군은 김수를 죽이려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으나 향리들의 만류로 중지하고 김수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여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낌새를 눈치 챈 김수는 곽재우를 도적떼라는 장계를 올렸다. 한 손에는 김수의 장계를 또 한손에는 곽재우의 상소를 든 선조는 어떻게 처리할 지 그 대책을 찾고자 중신들을 소집하였다. 중신들이 모였다고 일치된 대책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 난리판에 한 사람의 장수가 아쉬운 판국인데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킨 장수를 도적이라니 말도 안된다는 주장에 반하여 전쟁은 불리하면 후퇴할 수도 있다는 주장으로 갑론을박(甲論乙駁)하다가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에게 중재를 맡기기로 하였다. 초유사 김성일은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과 동시대 관직에 있었던 사람이다.
얼마 후에 정암진(鼎巖津) 전투가 조정에 알려지자 곽 장군에게는 통훈대부행유곡도찰방(通訓大夫行幽谷道察訪)이라는 관직이 제수되었다.
敎旨(通訓大夫行幽谷道察訪)
곽 장군은 오염된 정치의 티끌 속에 살면서도 항상 티끌을 벗어나 있었다.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재물이나 명예로는 살 수 없는 현자(賢者)였기에 가능하였다. 오직 애민하는 인간 본연의 처사에 조정에서도 파당(派黨)을 초월하여 그의 전공에 찬사를 보내고 그 전과에 대한 보상으로 관직을 높여 제수하였다.
장군은 처음부터 관직에는 뜻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관군과의 작전 계획도 필요했지만 의병의 수가 늘어나니 무기의 공급과 군양의 보급에는 국가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러니 조정에서 제수하는 관직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왜병은 정암진 길이 막히자 계획을 바꾸어 조령을 넘어 서울로 직행하는 길을 택하고 파죽지세로 치달았다.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중국에 지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선조는 파천(播遷)의 길에 올라야 했다. 임금이 서울을 떠나자, 도성안의 노비들은 노비문서를 보관하던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다. 불을 끌 사람이 없으니 궁궐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군사를 모집하려 함경도로 갔던 임해군과 순화군은 관군에 지원자가 없으니 모병은 하지도 못한 채 적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곽 장군의 의병 기병(起兵) 일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朝鮮王朝實錄』에는 임진란이 일어난 9일 후인 4월 22일로 기록되어있다. 당시의 교통수단과 임란 초기의 전황 등을 감안하면 그보다 앞선 날 일 것으로 추측을 할 수 있지만 주장할 수 있는 고증자료는 없다. 의병 기병 날짜를 중시하는 이유는 곽 장군의 의병 활동을 계기로 조정은 희망을 가졌고 장군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전과를 올릴 때마다 승진된 관직을 제수하니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 주도자들은 전직 관료와 유생들이 많았다. 전과(戰果)에 따라 서는 복직도 되고 집안을 일으켜 세울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이 때 조정의 유일한 희망은 중국의 원병이 왜구를 물리쳐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원군의 태도는 조정의 기대와는 크게 달랐다. 중국에서는 제독(提督)으로 진린(陳璘)과 정벌 장군으로 이여송(李如松)을 파견하였다. 왜구들은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니 일본은 중국에 조공을 조건으로 협상을 하였고 제독은 중국군의 희생을 최소화한다는 이유로 화전(和戰) 양면 작전으로 전세가 이외의 방향으로 전개되니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전쟁 양상이 되었다. 평양성을 단시간에 탈환한 이여송(李如松)이 계속 추격하면 섬멸할 수 있는 왜병을 추격하지 않고 퇴로를 열어주고 일본이 스스로 물러가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물러간다던 왜구가 선조 26년 6월에 30만 군을 동원하여 진주성 공격에 나섰다. 우리도 수비를 위하여 관군과 의병을 동원하였고 곽 장군에게도 진주성에 들어가 수비에 가담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곽 장군은 불응하였다, 그러자 좌순찰사(左巡察使) 김늑(金玏)이 꾸짖기를,“그대가 대장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군율(軍律)에 어쩌려는가.”라고 하자, 곽 장군이 말하기를,“이 몸이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으나 백전백승인 군졸들을 차마 사지에 데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이기는 전쟁에도 희생자가 따르는데” 라고 하자, 곽 장군에게는 정진(鼎津)을 지키게 하였다. (장군은 전쟁의 승패를 예측한 듯하다.)
이 때 조정에서는 곽 장군을 방어사(防禦使)로 임명할 것을 논의 하고자 도 체찰사가 격서로 곽 장군을 불렀다. 그러나 곽 장군은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하여 선조는 곽재우를 오만(傲慢)한 인물로 판단한다. “도 체찰사는 일국의 중임을 맡아 4도를 총괄하는 직책인데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곽재우를 믿을 수 없는 인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곽 장군을 다시 조방장으로 강등 조치하였다.
일부에서는 체찰사가 곽재우를 부를 때 소하(蕭何)가 한신(韓信)을 부르듯이 정중히 예를 갖추었으면 재우가 반드시 왔을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 말에 대해 장군의 해명은 이러하였다. “내가 사재를 털어 의병을 일으킨 것은 무도한 왜적을 쳐부수고자 일으킨 것인데 왜놈들과 협상을 하자는 사람들과 만나서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부름에 응하지 않았노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협상파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임란의 결말은 일본의 관백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음으로써 일본이 물러갔지만 곽 장군의 단호한 의사 표명이 협상파들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그 때 협상이 이뤄졌다면 대동강을 경계로 하였거나 아니면 한강을 경계로 북은 중국, 남은 일본 땅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곽 장군의 전략은 빛이 났다. 북방이 불안하여 함경도 감사를 제수하고자 여러 사람을 거론하다가 임금이 곽 장군을 지목하였다. 광해군 2년 8월 9일 곽 장군을 함경감사로 제수하였으나 곽 장군은 부임하지 않고 사직상소를 올리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벽곡(辟穀-솔잎, 콩, 대추, 밤 등의 생식)을 시작하였다. 광해군은 너무나 아쉬워 부임해 주기를 간청하는 내용을 상소에 대한 답신 형식으로 보내고 부임해 주기를 바랐다.
그 답신의 내용은 “상소를 살펴보니 정말로 가상하게 여겼다. 경에게 곤수의 임무를 맡기어 장성(長城)처럼 의지하려 하였는데 이렇게까지 사양하는 바람에 변방의 곤수자리가 오래도록 비어있다.” “옛날 장량(張良)이 벽곡을 한 것도 천하를 평정하고 유씨(劉氏)를 안정시킨 뒤에 있었던 일이다. 오늘 나라를 살펴보니 실로 신하가 스스로 안일하게 지낼 때가 아니다. 의당 전에 내린 전지에 따라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는 답신을 보낸다.
그래도 곽 장군은 부임하지 않고 사직(辭職)의 뜻을 여러 차례 밝혔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고 조정에 있어주기를 권고함에도 끝내 부임하지 않으니 그 해 9월 14일에 한준겸(韓浚謙)을 함경 감사로 제수하였다.
광해군 4년 11월 1일 정인홍이 좌의정의 직을 사임하면서 곽재우를 통제사(統制使)로 천거하였으나 전에 함경감사로 제수했을 때도 부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그래도 아쉬워 5년 4월 16일에 전라병사로 제수하였으나 곽 장군은 역시 사양하였다.
나는 무도한 적을 쳐부수고자 의병을 일으킨 것인데 전쟁이 끝났으니 관직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집에 고양이를 기르는 이유는 쥐를 잡기 위함인데 쥐가 없어졌으니 고양이를 기를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왕명으로 내린 관직이니 그 해 6월 21일에 사직 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 후 4년여를 영산(靈山)과 현풍사이의 산중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면서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낙동강변의 동산에 망우정을 짓고 기거하였던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의 집은 언제 새로 지었는지 모르지만 두 칸의 방에 마루가 있을 뿐 부엌이 없다. 그러니 여기서도 벽곡으로 살았다는 증거가 된다.
이 집을 지으면서 쓰신 시 한 수를 소개하면 (지금은 지명이 바뀐듯하다)
(창암에 처음으로 집을 짖고)
바위 깍아 터 닦으니 섬돌은 무엇 하리
아슬한 층암 위라 나들 길 가파르네
이 고장 볼 것 없다 벗님들 말 마시라
이 씨,소 씨도 찾아와 밝은 달 구경하리
初構滄巖江舍
拓土治巖階自成
層層如削路危傾
莫道此間武外護
李三蘇百翫空明
마루에는 여현정(與賢亭<현자와 더불어 담소하는 곳>) 방에는 망우정(忘憂亭<근심 걱정을 잊는 곳>)이라고 해석해도 될는지? 하여간 두 종류의 현판이 걸려있다.
여현정에서 현자와 함께 달에 취하고 천일주에 취한 현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를 감상하면
(중양절에 정자에서 성이도와 만나)
강이며 산 모습 참말 좋구나
그 풍치 그 기상 봉래산인 듯
잣만 씹고 살아가니 신선이리라
계수나무 불 지피니 속류는 아니리
우리함께 천일주 마시고 나서
오색구름 핀 정자에 취해 누웠네
가소롭다 만년 장수 꾀하는 사람
부질없이 부귀영화 꿈을 꾸누나
重陽成以道會於江亭召命適止
江山形勝最 風氣接蓬丘
㗖栢眞仙子 爛柯豈俗類
共觴千日酒 同醉五雲樓
可笑偷桃客 徒從金馬遊
산중의 집과 강변의 정자를 오가면서 살았던 것 같다.
이 정자에 와서 남긴 시를 보면
낙동 강변에 있는 정자의 마루에는 與賢亭 방에는 忘憂亭의 현판이 걸려있다.
(강가의 정자로 돌아가며)
어지러운 세상일에 그릇쳤던 몸
백발만이 수없이 드리웠구나
가을바람 들국화 향기 날릴 때
달빛 어린 강가로 돌아 가노라
歸江亭
誤落塵埃中 三千垂白髮
秋風夜菊香 策馬歸江月
망우정(房)에 들어가서는 이런 시를 읊지 않았을까
(회포를 읊노라)
부귀 복록 다 버리고 산속에서 지내거니
할 일 없고 시름없어 이내 몸 한가하네
이 세상에 신선 없다 말하지 말라
내가 바로 신선이라 마음속에 느껴지네
泳懷
辭榮棄祿臥雪山 謝事忘憂身自閒
莫言今古無仙子 只在吾心一悟間
이 집을 개축하면서 옛날 기와를 보존하고 있으니 도자사(陶瓷史)연구에 참고 자료가 될 듯하다. 이 정자의 역사는 지을 당시의 시가 있으나 연도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대문 옆에 수령 500년은 되어 보이는 팽나무가 말해 주고 있다.
정자입구의 고목
이 정자 뒤에 두 기(基)의 비석이 있다. 먼저 세운 비석은 崇禎紀元後三己酉四月 이니 1789년 (正祖 23년 4월) 이다. 이 비석의 주문(主文)은 忠翼公忘憂郭先生遺墟碑라고 되어 있고, 뒤에 세워진 비석은 1991년 지방 유지들의 성금으로 건립된 것인데 주문의 내용은 같은 뜻이나 뒤에 건립된 비석에는 집 당(堂) 자가 추가되었다. (곽 장군의 호는 忘憂이나 집에 현판으로 걸 때는 집 당(堂) 자를 썼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일 것이다.) 전후 비석의 건립 시차가 202년이다. 비석에 조각된 글자 획의 구성과 운필이 다른 글자가 보인다. 이런 경우를 한자의 변천과정이라고 보아야 할지 모르지만 구성이 다른 글자는 「忘자와 翼자와 碑자」이다.
忠 翼公忘憂郭先生遺墟碑 뒷면(崇禎紀元後三己酉四月)
비석 정면 건립일자 1991년
곽 장군의 노후는 숙식(熟食)을 하지 않고 생식으로 신선같이 살면서 임금이 함께 하기를 기다리던 관직을 수임치 않고 세사(世事)에 구애됨이 없이 살다가 1617년 (광해군 9년) 4월 25일에 세상을 떠난 현인(賢人)이다.
국난이 끝났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논공행상(論功行賞)이다. 그러나 나라가 온통 초토화가 된 마당에도 당파싸움은 그치지를 않았다. 따라서 논공행상조차 못하고 시간은 흘러갔다. 임란을 맞아 나라를 구한 것은 관군이 아니고 의병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명예는 경종(景鍾<공훈을 세기는 큰 종>)에 이름을 새겨 후세에 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경종에 이름자를 새긴 사람의 명단은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곽제우(郭再祐),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 조헌 (趙憲) 등이다.
곽 장군이 판서의 증직과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받은 때가 1711년(숙종 37년)6월 16일이다. 그러니 임란이 끝난 후 112년 뒤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곽 장군을 의병장이라는 칭호로 예우하지만 장군에게 의병장이라는 칭호가 내린 것은 1812년 (순조 12년) 6월 10일 이다. 그러니 임란이 끝나고 213년 후의 일이다.
필자는 부산 생활이 60년이 넘지만 의령 방문은 이번이 초행이다. 그것도 충익사 참배를 위한 걸음이었다. 그러니 임란이 끝나고 413년만의 일이다.
의령군은 한국의 4대 재벌이 출생한 고장이다. 천기(天氣)는 타고 나지만, 지기(地氣)는 받는 것이 라고 하니 의령의 양택(陽宅-집터)에는 명당이 많은가 보다. 산세(山勢)는 나직나직하고 올록볼록한 금형(金形<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오행의 金山이다.>) 산이 높지 않으니 강물의 흐름도 완만하다. 따라서 의령은 급하지 않고 조용하고 안정된 도시이다. 산세와 강의 흐름도 배산임수(背山臨水)가 적절하고 충익사의 정화사업도 잘 정돈되어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18 의병의 의병탑이 참배객을 숙연케 한다.
의병탑
의병탑에는 모두 같은 크기의 고리 18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 참배객의 마음에 따라 곽 장군의 위치가 결정된다. 높은 곳에 올라야 더 멀리가 보이니 맨 위가 곽 장군의 상징이라고 보는 이도 있을 것이고, 의병장의 무거운 책임을 졌으니 맨 아래의 고리가 곽 장군을 상징하는 고리로 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 탑은 후대의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지만 장군의 평등사상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생명의 존귀성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철저한 사상이 있었으니 이웃과 향토와 국가를 위해 생명과 재산을 바쳤을 것이고 동지의 생명을 내 생명처럼 아꼈기에 의병으로 성공하였을 것이다. 시대를 뛰어 넘은 평등사상에 무한한 존경을 보내며 영혼으로 잠든 지금도 이 나라를 지켜 주시기를 비는 마음이다.
충익사
말끔히 단장된 충익사의 계단을 오르니 참배객의 기도를 위한 향과 향로가 있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의사 18명의 위패가 하나의 판에 기록되어 있다.
壬亂倡義十八將諸位
우리들의 오늘이 있게 해준 의사들의 명단이다. 무슨 말로 감사의 뜻을 밝혀도 부족한 신위 앞에 분향하고 합장을 한다.
뒤에 한 젊은이가 바쁜 걸음으로 단을 오르더니 내부의 위패와 분향을 위한 향로에는 관심도 없고 우선 방명록에 이름을 기재하고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는 바쁘게 계단을 내려선다.
홍의장군의 동상
이 사진은 의령 관문 옆에 안치된 홍의장군의 동상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필자의 생각은 홍의장군의 동상을 봉안한 단이 너무 높다는 생각이 든다. 단이 높아야 하는 이유는 참배객이 우러러 보라는 뜻일 것이다. 단 위에 모신 상(像)이 신상(神像)이거나 성인상(聖人像)인 경우는 높아도 무관하다. 성인상이 아니라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나 강감찬을 비롯한 무장들은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군인이었으니 높은 단이 그들의 권위의 상징일 수 있지만 홍의장군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장군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군인이 아니었다. 다만 이웃과 고향을 지키고 나아가서 나라를 지키려는 순수 애민애국의 정신으로 의병 활동을 하셨으니 권위보다는 인간의 정으로 통하는 우리들의 할아버지다. 그러니 참배객은 혈육의 정으로 바라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장군의 영혼을 위로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백마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장군 모시느라 수고가 많았다고 노고를 치하할 수 있는 높이가 적당한 높이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2012년 4월 29일 백부흠 씀
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청송 최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