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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편(Catholic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크리스토스를 내세우며, 삼신신앙, 도그마를 믿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의 피를 뿌렸는가, 피의 역사이지 라고 하신 분은 박홍규 선생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굴종과 노예의 도덕을 심었던 것을 비판 한 철학자는 니체가 아닌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민에게 자발적 예속이란 말이 있기는 할 것인가? 초기 크리스트교에서 공포가 순교를 낳지는 않았던가? 제국주의 앞잡이로서 성직자들의 행태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 나로서는 진솔한 순교자는 1600년에 로마 교황청 광장에서 산채로 불에 타 죽은 브루노일 것이라 생각한다.
누가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2억년 전에 공룡이 놀던 시절, 또는 35억년 전에 전 지구를 덮고 있는 단백질 수프가 있을 때, 하느님은 무엇을 했을까? ... 그리고 한 가지 더 6살짜리 산타클로스 할배를 믿는 착한 심성을 인정하지만 그다음 공부를 하지 않은 믿음은 독단에 빠진다. 이들은 글자로 쓰인 실정(實定)을 좋아하지 600만년 전에 침팬치에 가까운 유인원이 무엇을 했을 것인지 실증(實證)에 대해 공부하지 않은 꼴꽁이다. 이 꼴꽁이 이승만을 거쳐서 박근혜, 홍준표에로 연결되는 것 같다. 꼴꽁은 실증과 실정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꼴꽁은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땅하고 같이 찬 하루밤을 살아봐야 깨닫을 것이다. (50OK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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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편(Catholic Philosophy): 제1부 교부철학, 제2부 스콜라 철학, 459-722
* 머리말 461
이 책에서 가톨릭 철학(중세철학)이라고 칭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동안에 유럽 사상을 지배한 철학을 가리킨다. (461) [나로서는 가톨릭과 희랍정교의 분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
자기 시대의 교회 철학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평신도가 작품을 쓴 것은 단테(Dante, 1265-1321)가 처음이다(단테 시대까지의 작가는 모두 교직자였다). (462)
고대와 달리 중세에는, 여러 종류의 이원론이 제창된다. 성직자와 세속인의 이원성, 라틴민족과 튜튼(Teuton, 게르만 민족의 일파)의 이원성, 신국과 현세 국가의 이원성, 그리고 교황과 황제의 이원성. .. 교직자와 세속의 관계는 중세 동안에 줄곧 사무엘(Samuel)과 사울(Saul)의 관계로 .. 신국과 현실 국가의 이원론은 신약에서 기원을 찾아 볼 수 있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The City of God)에서 체계가 잡혔다. 영과 육의 이원론은 플라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신플라톤 철학자들이 이를 강조했다. 이것은 성 바울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462-463)
[러셀이 본 중세는 전기, 암흑기, 후기 이다] 암흑기 이전의 중요인물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72-337, 재위306-337)황제의 개종, 보에티우스(Boethius, 470경-524), 그레고리오 대교황(Grégoire Ier, 540경-604, 재위 590-604)이다. .. 이후로 암흑이며 .. 11세기에 교회가 봉건 귀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 암흑에서 벗어난다. (463-464) [우리는 러셀과 달리 전쟁, 즉 십자군 전쟁이다. 내면에서는 천년왕국이래로 평민이 크리스트교에서 멀어진 것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50NMJ)]
13세기까지 종합된 중세체제는 완전성과 궁극성을 지닌 듯이 보였으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파괴되었다. 이 원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부유한 상인계급의 대두라고 할 수 있다. (464) [왜 러셀은 십자군 원정의 패악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그동안 교황권은 지금까지 누려오던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11세기 12세기, 13세기의 도덕적 우위는 대체로 교황권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월성을 상실 .. 첫째는 교황들이 아비뇽(Avignon)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에 굴복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교회의 대분열(the Great Schism)로 교황이 서방세계에 무한한 독재를 할 수 없게 되었으며, ...(465)
이러한 불행감은 이 무렵의 유럽 전체에 일어난 일들을 반영하고 있다. 3세기는 재난의 시기였다. 4세기의 소강상태를 거쳐, 5세기에 이르러 서로마 제국이 종말을 고하며... (465)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기[476년] 이전 시기와 이후 시기... [이전 시기]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 Aurelius Augustinus, 354-430) .. [이후 시기] 보에티우스(Boèce, Boethius, 470경-524), 아일랜드인 존 스코트(John the Scot), 안셀무스(Anselme, 1033-1109)가 있을 따름이다.
중세의 역사에는 ... 철학자들 중에서 암브로시우스, 샤를마뉴, [가톨릭을 이해하려면] 힐데브란트 만큼 철학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드물다. (468) - [럿셀이 철학자들 중이라고 왜 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 나로서는 암브로시우스 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샤룰마뉴보다는 알쿠이누스, 힐데브란트보다는 안셀무스(Anselme, 1033-1109)나 아벨라르두스(Abelard, 1079-1142)를 떠올린다. (50NMJ)]
(50NMJ)
# 인명록 ***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 라틴계 밀라노 주교
안셀무스(Anselme, 1033-1109) 신의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논증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 Aurelius Augustinus, 354-430) 북 아프리카 타가스트(Tagaste)에서 태어나다.
보에티우스(Boèce, 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vers 470-524) 테오도리쿠스(Théodoric le Grand)시대 라틴 철학자, 정치가.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철학의 위안(De philosophiae consolatione) Consolation de la philosophie, 524)』/ 그는 ‘마지막 로마인이자 첫째 스콜라철학자’
샤를마뉴(Charlemagne, lat. Carolus Magnus, ou Charles Ier dit « le Grand », 742 (voire 747 ou 748)-814) 카롤링 왕조.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272~337, 재위기간 306~337) 크리스트교와 결탁?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크리스트교 공인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서(西)유럽 문학의 거장.
그레고리우스 1세(Grégoire Ier, 540경-604)(재위 590- 대(大)그레고리우스, 제64대 교황, 대화록(Dialogues)의 저자.
힐데브란트 / 교황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PP. VII, Papa Gregorio VII, 1020–1085: 재위: 1073-1085). 본명 일데브란도 디 소아나(Ildebrando di Soana)[Hildebrand von Soana, als Papst Gregor VII.]
존 스코트(John the Scot, John Scotus Eriugena, or Johannes Scotus Erigena, 815경– 877경) 아일랜드 신학자.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시인. The Division of Nature
사무엘(Samuel, 히브: שְׁמוּאֵל, 전1103-전1017년경) 이스라엘 민족역사 중 한 장인 판관(사사)시대 최후의 판관(사사), 판관(사사)이 활동한 시대의 말기에서 왕정 시대의 초기(BC 약 1050-1000)에 걸쳐 활약했다. 사무엘과 다윗은 동시대 인이다.
사울(Saül, hébreu. Sha'ul « Désiré », 전1050경–전1010경) 사무엘 1권에 나오는 인물, 사무엘다음으로 계승한 판관. 다비드 사울을 만나 악기(하프) 연주 그림이 있다.
[바울(Paul de Tarse, 본명 Saul, ou saint Paul 8년경-67년경) 현 터키 남동부 지중해 연안지방인] 킬리키아(Cilicie, Κιλικία)지방의 타르소스(Tarse, Ταρσός) [스토아학파들을 많이 배출한 도시) 출신. 로마에서 죽었다. 대낮에 신을 보았다는 점[환각]에서 파라노이아 망상에 빠진 적이 있다.]
375 훈족이 게르만 족 공격함으로써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95 아틸라(Attila 395?-453) (별칭은 Flagellum Del ‘신의 징벌’이란 뜻) 훈족의 왕(434~453년 재위, 445년까지는 형 블레다와 공동 통치) 로마 제국을 침략한 새외(塞外) 민족 최고의 왕이며 남부 발칸 지방과 그리스, 이어서 갈리아와 이탈리아까지 공략했다. 아틸라는 중세 독일의 전설적인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에서 에첼, 아이슬란드의 무용담에서는 아틀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로마사).
476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Odoacre, roi des Hérules)에 의해 서로마 제국 멸망하였다.
529 아카데미 폐쇄: 유스티아누스는 529년에 다마스키오스(Damascios le Diadoque διάδοχος 458-538)가 이끌던 아테네의 네오플라톤주의 학교를 폐쇄하였다. 이 학교는 기원전86년에 문 닫았던 유명한 아카데미를 연장한 것이다.
1054 동서 기독교 간의 갈등을 거듭해오다가 1054년 성 소피아 성당에서 상호파문조치로 결별하게 된다.
1096 제1차 십자군 전쟁: <모두 9차례(Croisades, 1096-1291) (I 1096-1099, II 1147-1149, III 1189-1192, IV 1202-1204, V 1217-1221, VI 1229, VII 1248-1254, VIII Loui IX 튀니지에서 사망, IX 1291) >
1204 제4차 십자군 원정. 이 원정 때 로마교회 소속 군대가 이슬람 국가가 아닌, 정교국가에서 약탈과 방화를 저지른 사건이다. 제4차 십자군은 일반 건물의 약탈에서 더 나가, 정교회 성당의 제단 장식, 십자가와 성상, 성인들의 유해 같은 성물까지 약탈하기도 했다.
1309 교황 아비뇽에 정착: 필립4세는 교황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는 1305년 압력을 행사하여 마침내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선출하게 만들고, 교황을 로마가 아니라 아비뇽에 머물게 했다. (이런 관행은 1370년까지 계속된다)
1347 흑사병(la peste noire, 1347–1352) 유럽인구의 30-50% 감소
1378 교회의 분리 [교황이 서방세계에 무한한 독재를 할 수 업게 되다]
1453 콘스탄티노플 함락. 동로마제국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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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교부철학 469-578
제1장 유대교의 발전 471
기독교는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러 야만인들에게 전달되었으며, 그때까지 세 가지 요소를 구비하게 되었다. 첫째는 철학적 요소이다. 이것은 주로 플라톤과 신플라톤학파에서 도입하고, 부분적으로는 스토아학파에서 도입한 것이다. 둘째 요소는 유대인에게서 나온 도덕과 역사에 관한 개념이며, 셋째 요소는 기독교의 고유한 몇 가지 교리로, 그 중에서도 특히 구원에 관계된 교리이다. 그러나 이것도 일부는 오르페우스 종교나 근동의 그와 유사한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471)
기독교의 유대교적인 요소를 들어보자.
1)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신성한 역사 – 이 역사는 신이 인간에게 행한 것 모두가 정당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2) 신이 특히 사랑하는 소수의 백성이 있다는 것 – 유대인들에게는 이 소수의 백성은 선민(選民)이었고, 기독교인들에게는 택(擇)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3) 의(義)애 대한 새로운 개념 – 예들 들면 구원의 덕은 후기 유대교에서 기독교에 도입되었다. 세례(洗禮)를 중요시하게 된 것은 오르페우스주의나 또는 동방의 이교(異敎)인 신비종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천면에서 박애주의가 기독교인이 숭상한 덕의 한 요소가 된 것은 유대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 [스토아 중기부터 즉 6대학장부터 스토아 본류가 심층으로 잠수하는 셈이다.] .
4) 율법 – 기독교인은 히브리 율법의 일부를 지켜왔다. 예컨대 십계명(十誡命)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히브리 율법 중에 형식적이고 또 의식[의례]적인 부분은 버렸다. ...
5) 메시아 – 유대인은, 메시아는 지상에 번영을 가져오고 또한 그들의 원수에 대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또한 그 메시아는 보다 후일에 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바라던 메시아는 바로 역사적인 예수였다. 예수는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와 동일하게 간주되었다. - [성령 또는 메시아는 누스로, 예수는 로고스로 간주한 것처럼 보인다.]
6) 천국 – 저세상에 대한 개념은 어떤 의미에서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후기 플라톤주의자들과 공통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리스 철학자들보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 더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 그리스 사상[플라톤주의]에서는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감관계(感官界)는 일종의 환각(幻覺)[착각, l’illusion]에 지나지 않으며, 지적이고 도덕적인 훈련을 쌓아야만 인간은 비로소 영원한 세계에 사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471-472)
유대인의 몇몇 역사적 사실 ...
다윗과 솔로몬을 역사상 실재한 임금으로 간주하여 무방할 것이다. .. 이스라엘과 유대라는 두 왕국이 있었다. 경전 외의 다른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첫 인물은 이스라엘의 아합(Ahab)왕이다. 기원전 853년에 아시리아 문서에 아합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앗시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에 이웃에 있는 다른 왕국을 정복하고 그 나라 주민들을 거의 다 포로로 삼아 데려갔다. (473)
유대왕국은 아시리아 보다 얼마간 더 오래 존속되었다. 바빌론인과 메디아인들이 기원전 606년에 니네베를 점령하자 아시리아 세력은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기원전 586년[전587년]에 느부갓레살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그리하여 성전은 파괴되고 대부분 주민들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473) [전587년 제1차 예루살렘 성전 파괴 – 들뢰즈 기호계의 출발의 사건으로 삼는다. - 둘째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후70년이다. 그리고 회교점령으로 지금가지 회교 성지로 되어 있다.]
바빌론 왕국은 기원전 538년에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에게 정복되어 멸망했다. 기원전 537년에 키루스는 영을 내려 모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돌아가는 것을 허가했다. 그리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영도아래 고국으로 돌아갔다. 성전은 재건되고 정통적인 유대교는 크게 발전하였다. (473)
포로시대[전587-537]와 이 시대를 전후해서 유대종교는 크게 발전하였다. .. 여호와(Yahweh)는 본래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사랑하는 민족 신에 지나지 않았다. .. 첫째 계명으로 “나 이외 다른 신을 두지 마라”라고 한 것은 포로 직전에 이루어진 혁신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이것은 초기 예언자들의 많은 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473) - [모세의 계명은 전587 성전 파괴이전에 그리 중요하게 전승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상층의 성직자들이야 억압을 도구로 삼았겠지만 인민은 중동지역의 전쟁 속에서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으리라. .. 전쟁이 혁명의 씨앗이 된 것은 현대 공산주의 전개에서만이 아니다. 중동은 기원전에도 십자군 시대에도 1차대전과 2차 대전에도 전투장이었다. - 이상한 것은 그곳이 농업보다 동서의 상업적 지정학적 위치라는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분명히 상업의 발달과 연관이 크다. 가치의 대표자로서 화폐가 전제정의 힘을 빌려 대리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50OKD)]
예레미아와 에스겔은 다른 종교가 다 거짓이며, 여호와는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는 관념을 발견했던 것 같다.
「예레미아」서에는 매우 흥미있는 구절이 있다. .. 예레미아는 한 동안 이집트 유대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예레미아는 유대인 피난민들에게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들의 아낙네들이 다른 신에게 분향을 하여, 여호와께서 노하신 나머지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 “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나의 큰 이름으로 맹세하였으므로, 이집트 온 땅에 거하는 유대인들의 입에서 다시는 내 이름을 일컬어서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라 하는 자가 없게 되리라. 내가 지켜보겠노니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이집트 땅에 있는 유대 모든 사람이 칼과 기근에 망하여 절멸되리라”(예레미아, 44장 11-끝) (474)
후세에 유대 종교의 특색이 된 것 중에는, 포로기간[전587-537]을 통해서 발전된 것이 많다. ..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희생을 드릴 수 없게 되자, 유대인의 종교의식의 하나인 희생을 드리는 의식도 자연히 없어졌다. .. 이 시기에야 비로소 안식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유대인의 할례(割禮)도 이때부터 더욱 소중히 여기에 되었으며, ... 이방인과 잡혼도 이때부터 금지되었다. (476)
「이사야서」는 두 예언자의 작품이다. 하나는 포로 이전의 작품이며, 다른 하나는 포로 이후의 작품이다. 둘째 작품을 쓴 사람은 성서학자들에게서 ‘제1의 이사야’라 불리고 있으며 예언자들 중에 가장 저명한 사람이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까닭일 것이다. .. 그의 「제2이사야서」의 메시아의 예언은, 그리스도[메시아]가 오신다는 전조(前兆)를 보여주는 주요한 자료가 되었다. (476)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원문에 대하여, ... 유대인들은 올바른 번역이 ‘한 젊은 부인이 잉태하여’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거짓말한다고 생각하였다). (477)
예언이 가장 분명한 곳은 53장이다. “그는 멸시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나는 자라.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에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에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477)
[내가 보기에 예레미아는 과거의 존중이고 이사야는 미래의 희망을 표현한다. 전자는 정태적이고 후자는 고난을 이겨나가는 동태적이다. 전자가 줄친 평면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매끄러운 면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50OKD)]
예스라와 느헤미야 이후 유대인들은 잠시 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 .. 예루살렘 주변은 불과 10내지 15마일의 좁은 지역으로 되어 있다. 알렉산더대왕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쿠스 왕조[(Αυτοκρατορία των Σελευκιδών)] 사이에 이곳을 에워싼 쟁탈전이 벌어졌었다. ..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자유롭게 신봉할 수 있었다. (477-478) [로마시대에도 지배함에도 예루살렘에 총독이 들어가지 않았다. (50OKD)]
이 당시 도덕적 격률은 집회서(Ecclesiasticus)에 나와 있다. 이 책은 아마도 기원전 200년경에 썼을 것이다. 그리스어 판 .. 최근에 히브리어 원문이 발견되었는데, ... 이 책이 그리스 영향을 받고 있는 유일한 증거는 의학을 숭상하는 점이다. (478) [나의 추측으로 알렉산드리아 영향일 것이다.]
노예를 너무 친절하게 다루어서는 안된다. “먹이와 채찍과 무거운 짐, 이것은 나귀의 천직이요. 빵과 징계와 노동은 종의 천직이다. ... 종에게 일을 맡기되 그에게 알맞게 맡겨라. 만일 종이 순종치 않으면 보다 무거운 [쇠]고랑을 채워라”(23장 24, 28) “그와 동시에 우리는 종에게 대가를 지불하였다는 것을 상기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도망쳤을 경우에는 우리의 재산을 잃는 것이 된다. 따라서 가장 유익하고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23장 30-31) .. 책의 저자는 여인을 열등하게 평가하였다. “여인의 옷에서는 좀이 나오고, 그 마음으로부터 사악함이 나온다.” (42장 13) [이 집회서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와 닮았다. 아리씨는 노예와 여자를 재산의 일부로 다루었지 않았던가! / 중국의 소인과 여인을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사고의 바탕은 천상의 절대적 권한이 실재한다고 믿는데서 온 것이리라. (50OMG)]
이처럼 평온한 속에서의 독선적인 삶은 셀레우쿠스 왕조(Seleucid)의 안티오코스 4세가 자기의 모든 영토를 헬레니즘화하기로 결심하여 이와 같은 평온을 깨뜨렸다. 기원전 175년에 그는 예루살렘에 체육관(Gymnasium)[중등학교]을 세우고 청년들에게 그리스 모자를 씌워서 체육을 가르쳤다. .. 대제사장으로 된 제이슨이란 유대인의 협력을 받았다. .. 그들은 “하시딤”(Hasidim, 거룩하다)이라 불리는 일당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시골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479)
전170년에 안티오코스[셀레우쿠스 왕조]가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조]와 전쟁에 휘말려 들어간 사이에, 유태인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 후 즉시 안티오코스는 성전에서 기물들을 탈취하고, 그 대신 신(神)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는 여호와를 제우스와 동일시하였으며, 다른 곳에서도 이를 따랐다. (479)
당시의 역사는 매카비 제1서(書)에 나타나 있다. (479)
그리고 유대교가 소멸되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나 이슬람교도 존재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타운센트(Townsend)는 매카비 제4서의 번역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 유대교가 안티오코스 치하에서 소멸되었던들, 기독교의 토대는 없어졌을 거이라고 한 것은 적절한 말이라고 하겠다. 유대교를 구출한 마카베우스 순교자들의 피는 결국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신교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마카베우스 일가의 덕택이라고 하겠다.” (481) [타운센트(Townsend, s.d.) 못 찾았다]
안티오코스에 대한 반란은, 유다스 마카베우스(마카비, Judas Maccabée, 전2세기경)가 영도했다. 그는 유능한 사령관으로 먼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기원전 164) .. 그의 형제 요나단은 대제사장이 되고, 예루살렘에 주둔하여 사마리아 일부를 정복했으며, .. 그는 로마와 협상하여 자주권을 얻는데 성공했다. 헤롯왕 때까지 대대로 대제사장은 그의 가문에서 나왔고 이른바 하스모니아 왕조라고 불렸다. (482)
이 민족의 종교적 특성은 이들을 민족적으로 단결시키는데 공헌하였다. .. 예언자적 정열은 결코 소멸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 저자의 이름을 감추었을 뿐이다. .. 에녹서(書)(The Book od Enoch)는 여러 저자들의 작품을 모은 것으로 가장 오랜 작품은 매카비 시대 직전의 것이며 가장 나중의 것은 기원전 64년경에 쓰였다. .. 이것은 기독화된 유대교의 일면으로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Clément, 142-215)나 테르툴리아누스(Tertuelien, 160-220) 같은 사람들은 이 책을 성경으로 간주하였으나, 제롬(Jerome,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347-420)과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가 이를 거절하였다. (483)
에녹서의 저자들은 하시딤(Hasidim) 가문 사람들과 그 후계자들인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왕과 군주를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바로 하스모니아 왕조와 사두개 교인들을 의미한다. (483)
이 책[에녹서]은 주로 “비유”로 되어 있으며, 이 비유들은 신약 성서의 비유들보다 더욱 우주적이다. (484)
「12지파의 서약」을 보면, 이 책은 기원전 109년에서 107년에 사이에 하스모니아 왕조의 한 대제사장이던 존 힐카누스를 숭배하던 어떤 바리새인이 기록한 것이다. .. “산상수훈은 몇 가지 점에서, 이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그 책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대목도 있다. 복음서의 많은 글들이 같은 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이 책을 불후의 서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찰스, 291-292쪽) (486)
대제사장 통치시대 이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친구 헤롯을 유대 왕으로 삼았다. .. 그는 옥타비우스[아우구스투스]가 분명히 패권을 잡게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재빨리 안토니우스를 배반하였다. .. 기원전 4년에 죽었다. 그가 죽자 로마는 왕정의 제도를 폐지하고 유대나라에 총독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서기 26년에 총독이 된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487-488)
유대인은 서기 66년에 젤롯당(Zealots, 유대교 열심당)의 교시를 받아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488)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은, 유대지방의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헬레니즘에 젖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구약성경을 그리스로 번역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셉투아긴타(Septuagint, 70인역 성서)였다. 펜타툭(Pentateuch, 모세5경)은 기원전 3세기 중엽에 번역되었으며, ... (489)
구약성경의 보다 훌륭한 번역은 3세기에 오리게네스(Origen)의 노력 ... 5세기경에 제롬이 불가타(Vulgate, 라틴어판) ... (489)
그리스도와 같은 시대의 철학자 필로(Philo)는 사상적인 면에서 유대인들에게 끼친 그리스 영향을 알아보는데 가장 좋은 표본이 되어 있다. (489)
1세기 이후에는 기독교가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도 매우 적대적이고, 따라서 서로 관계가 없게 되었다. (490)
십자군은 무서운 유대인 학살과 관련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의 유대인들은 푸대접을 받지 않았다. 특히 무어인들이 살았던 스페인에서는 유대인들이 학문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1135-1204)는 스피노자 철학의 원천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490) - [맑스의 젊은 시절 별명이 ‘무어인’이었다. 맑스 가계도 아세키나제가 아니라 세파라드일 것이다.(50OKD)]
제2장 첫4세기 동안의 기독교 492 .
처음의 기독교는 유대인에게 전하는 새로운 유대교에 불과하였다. 성 야곱이나 성 베드로는 기독교를 이 정도로 보급시키려고 하였다. 아마도 성 바울이 아니었던들, 그들의 뜻대로 되었을 것이다. (492)
성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특히 특정 음식물 금지 율법]을 요구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던 것이다. ... / 그러나 선민(選民)이라는 견해는 그대로 남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자존심에는 불쾌한 것이었다. 그노시스파에서는 이러한 견해에 전적으로 반대했다. (492) [그노시스파의 다른 형식으로 근현대의 등장이 내가보기에 프랑-마송이다. 이 비밀단체는 결사체까지는 아닐지라도 결속을 위해 선별의식이 있다.]
이와 같은 유대교의 단순성은 대체로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그 특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요한복음에 이르면 벌써 그 특징이 사라진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플라톤과 스토아학파의 로고스와 동일하게 간주된다. (495)
그리스 철학과 성경의 종합은 오리게네스(Origène, 185-253) 때까지는 우발적이고 단편적인 일에 지나지 않았다.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에서 필로 같이 살았었다. ..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204-270)와 함께 암모니우스 사카스(Ammonius Saccas 175?-242)의 제자였다. (495)
오리게네스의 가장 큰 저술은 켈수스를 논박함(Against Celsus)이라는 책이다. 켈수스는 기독교를 반박한 책(지금은 분실되어 없다)을 내었다. (497)
콘스탄티누스는 가톨릭과 아리우스파(Arians)의 분쟁에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인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마음먹고 이들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기를 원했다. ..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고 이 회의에서 니케아 신조(信條)를 작성하였다. (499)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자기들만이 천국에 들어가고, 이교도들에게는 내세에 무서운 형벌이 내릴 것을 믿고 있었다. .... 가령 자연을 숭배하는 종교에서는 타우로볼리움(Taurobolium)이라는 의식이 있는데 이것은 세례의식과 비슷한 것이지만, 이것을 가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 [의식에 황소를 잡아야 하는데 귀족이 할 수 있는 것이지 자유민 노예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 내세에 대한 가르침은, [이집트를 거쳐서] 서방에서는 먼저 오르페우스교에서 가르쳤으며, 다음에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떤 히브리 예언자들[이사야서]은 육체의 부활을 가르쳤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영혼부활을 믿게 된 것은, 그리스인들에게서 배운 것으로 생각된다. (500-501)
[천국, 부활, 기적, 내세에서 영생 등이 기독교 선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것은 다른 종교도 가지고 있다.] - 내(러셀)가 보기에, 기본(Gibbon)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간과한 것 같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가 성경[텍스트, 쓰여진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501) - [이 “쓰여진 것들”(les ’Ecritures)이 사실이나 유물의 증거에 근거하기보다 이야기, 서술(논리적 담론이나 진위의 문장이 아니라)에 치중하여, 고난, 고뇌, 고통, 고행, 고독 등에서 벗어나는 실재적인 상상(상징도 가상도, 환상도 아닌)을 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이 장점을 잘 활용하여 등장하는 이야기가 19세기에 단편과 장편소설들이다. 이 상상을 미래에 투영하여 쓰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이다. 영화도 이에 한 몫을 한다. (50OKF)]
기독교인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불행하게도 그들의 종교적인 열의를 그들 서로서로에 대하여 발휘했다. 즉 이때까지는 이단자들이 적지 않았다. (503)
이 시기의 영웅은 아타나시우스(Athanase, 297-373년경)였다. 그는 긴 생애를 통하여 니케아 정통 신조의 가장 용감한 투사였다. (503) [무지의 용감이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렸는가를 생각해 보라.]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칼케돈 공의회(the council of Chalcedon, Σύνοδος της Χαλκηδόνας 451)에 이르기까지 기간은, .. 두 가지 문제가 계속해서 기독교 세계를 혼란에 몰아넣었다. 첫째 삼위일체(三位一體)[la trinité]의 성질에 관한 것이며, 둘째로 도성인신(道成人身 Incarnation)[육화]의 교리에 대한 문제이다.(503)
사벨리우스파(이단) 한 존재자의 다른 국면으로 보았다. [사벨리우스(Sabellius, 3세기경) 리비아 출신 신학자 크리스교 성직자, 양태론(modalisme, 양상론) 주장] .
아리우스파(Arianistes) [이단] 성부와 성자의 지나친 구별 [사벨레우스와 아리우스(양태론과 삼신론)]
379년 황제 테오도시우스(Théodose Ier 재위 379-395)는 가톨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로마 제국의 전역에 걸쳐 가톨릭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 성 암브로시우스(340-397), 성 제롬(347-420),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모두 가톨릭의 승리 시대에 생존한 사람이다. (505)
황제들은 ...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리우스파의 견해를 좋게 보았다. 다만 율리아누스만이 예외였다.
마지막에 이르러 ... 유스티니아누스(Iustinianus, Ιουστινιανός 482경–565) 황제와 프랑크인은 – 그리고 마지막에는 랑고바르드인도 – 정통주의에 가담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카톨릭 신앙이 [서유럽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505) (11:2, 50OKF)
70 예루살렘 성전의 둘째 파괴(서기 70년).
<초기 크리스트교 옹호자들>
호교론자(Apologists)
유스티누스(Justin, 100-165) , -> 년사 유대크리트
테르툴리아누스(Tertuelien, 160-220)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학파
클레멘스(Clément, Κλήμης, 142-215) ,
오리게네스(Origène, Ὠριγένης 185-253
에우세비오스(Eusèbe gr. Εὐσέϐιος, lat. Eusebius, vers 265경-339)
카파도키어(Cappadocien)파 [Cappadocia: 터키내부 흑해 연안 지방]
나치안츠 그레고리우스(Grégoire de Nazianze, 329-390), 바질리우스(Basile, 330-390)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égoire de Nysse, 335-394)
디오니오시스 아레오파기타(Denys l'Aréopagite, 500년경),
요하네스 다마스케네스(Jean Damsacène) 680-750
크리스트교의 내부에서 이단에 대한 투쟁: 아타나시우스(Athanase, 295-373): 정통
마르씨온파(Marcionites) 영지주의, 성서 경전
아리우스파(Arianistes) 크리스트 신성부정(325년 이단) 아리우스(Arius, 280-336)
도나투스파(Donatistes) 성사론
네스토리아파(Nestorianistes) 크리스트에서 두 개의 본성
펠라기우스파(Pélagianites) 은총설 (431년 이단)
313 <밀라노 칙령에 의해 크리스트교 공인. >
325 <니케아 공의회(Concile de Nicée) 아리우스파(인성)[콘스탄티노플과 서아시아]를 이단으로 하고 아타나시우스파(신성)[알렉산드리아] [삼위격]를 주축으로 삼다> / 아리우스(Arius, 280-336)
325 제1차 공의회: 니케아 공의회(Ier concile de Nicée) 콘스탄티누스 시절, 325년 니케아종교회의이다. 3위 일체를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와 그것을 부인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사이에서 아타나시우스파의 승리... / 신지학파(la gnose)과 아리우스파(l'arianisme, doctrine d'Arius)를 단죄하다.
431 에페소스 공의회(Le concile d'Éphèse) 크리스트교의 셋째 공의회, 시릴(Cyrille d'Alexandrie) 총주교에 의해 개최되었으며, 200주교들이 모였다. 네스토리아스를 이단으로 몰았다. .
354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 Aurelius Augustinus, 354-430)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주교를 지냈고, 교부 철학자이다. 카르타고의 기독교가 반달족에 몰락하는 시기(429)이다.
529 <유스티니아누스(Iustinianus, Ιουστινιανός 482경–565) 황제 제위(527-565) 대제 아테네 아카데미아 학당 폐쇄>
(12:21, 50OKF) (13:1 50O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