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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혼 안에 주름들 31 Les plis dans l'âme 20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le baroque, 1988)
- 들뢰즈, 이찬웅, 문학과지성사, (1988) 2004 (원192, 번272)
겹주름과 주름: 전자에서는 뉴턴식의 공간에서 3차원 연장의 등질성(等質性)과 등방성(等方性)의 성격과 달리 지그재그와 겹침과 덧붙임의 공간도 있다. 이에 비해 클레의 표현에서는 직선이나 타원과 다른 임의 곡선에서 그은 선이 구분하는 것은 등방성도 덧붙임과도 달리 여러 위상이 생긴다. 곡선임에도 좌우, 상하, 바깥과 안면, 이 절편과 저 절편, 이 두께와 저 두께, 베이컨의 그림에서 이 강도와 저강도의 차이가 선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이 위에 그려진 ... 의 계단의 이동은 폐쇄 된 면들임에도 시작과 끝이 없다. 내부의 무한정과 외부의 무한함은 다르다. (53RMC)
라이프니츠가 플로티노스와 브루노를 알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가 우주를 열지 못 햇던 것은 어쩌면 데카르트적 우주의 총량의 일정하다는 수학적 상수를 인정하는 데서 온 것이 아닐까? 영혼이 열려는 노력을 함에도 순수 무한으로 향하는 것이 수학적 무한의 한계 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적분의 깊이에 대한 상념에 빠져있었던 것은 아닐까? (53RMF)
제1부. 주름 Le pli
§2. 영혼 안에 주름들 31 Les plis dans l'âme 20
[들뢰즈는 「영혼 안에서 주름들」에서 주름들이란 추억들의 통합(intelgrale 시간적 적분) 방식을 의미할 수 있다. 즉 우리 추억은 어떤 방식으로는 연대기적일 수 있다. 모여서 차곡차곡 쌓일 수 있다. 추억들은 매우 다양하여, 그 방향과 크기, 부피, 강도, 밀도, 무게 등이 다르지만 그래도 서로 간에 접합에서 거의 우연(hasard)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추억과 추억 사이의 굴곡(l'inflexion)은 매우 미묘하다. 영혼에서 주름들은 신체에서 겹주름과 달리, 각각의 주름이 자아(주체)의 분신(double)과 같은 효과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분신은 자의 변동(변주, variation)과 같은 효과일 것이다. 이 변주는 얼핏 보아 자아와 달리 보일지라도 대자아(le Moi)의 부분이다. 이 부분을 사람들은 그 개인의 인격으로 판독한다. 개인의 인격은 보다 깊은 곳에 있다. 즉 주름들의 통합(시간적 적분)에 인격 즉 주체가 있다. 이 주체는 상징도 아니고, 상상도 아닌 실재성이다. 상상은 분신들의 놀이정도 일 것이다. (44RMA)]
- L'inflexion - Les singularités - Les mathématiques baroques et la variation: nombre irrationnel, quotient différentiel, famille de courbes - Nouveau statut de l'objet - Le perspectivisme: variation et point de vue - Nouveau statut du sujet - De l'inflexion à l'inclusion - Le département - La monade, le monde et la condition de clôture
§2.1. [변곡] 31 L'inflexion 20
[아마도 변곡은 곡선이 급변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
20 변화 가능한 곡률(la curbure)의, 즉 주름의 이상적인 발생적 요소는 바로 변곡(l'inflexion)이다. 변곡은 진정한 원자(le véritable atome), 탄력적인 점(le point élastique)이다. (20 31)
칸딘스키(Kandinsky, 1866-1944)에게는 각도 점도 단단하며, 이것들은 외부적인 힘에 의한 운동 안에 놓여 있다. 그러나 클레(Klee, 1879-1940)에게 “비-모순의 비개념적 개념”인 점은 변곡을 겪는다. (20 31)
그것은 주름 점이다(le point-pli). 클레는 일련의 세 형태[21쪽 세 가지 선 그림]로부터 출발한다. 첫째는 변곡을 그린다. 둘째는 혼합 없는 엄밀한 형태도 없으며, .. “다른 곡선과 뒤섞이지 않는 어떤 유한한 본성을 지닌 곡선,..”도 없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원자들이 있을 때처럼 어떠한 사물에도 결코 어떤 정확한 표면을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볼록한 면에 그림자를 표시해서 오목한 부분과 그 곡률의 중심을 추출해내는데, 여기에서 이것들은 변곡점의 양쪽에서 면이 바뀐다. (그림 설명: 21쪽에 있으나 20쪽의 설명이다.)(20 31) * 클레의 도형들(Figures de Klee):
첫째 그림: [그림1: S자를 길게 눕혀 놓은 도형이다.]
작용적인(active 능동적인) 선은 뛰놀 듯이 자유롭게 움직인다. 특별한 목적이 없는, 산책을 위한 산책. 작용자: 운동 상태에 있는 점(도형1).
둘째 그림과 셋째 그림: 여러 형태의 부속물을 가진 같은 선.
§2.2. [독특점(특이성)] 31 Les singularités 20-22
베르나르 카쉬(Bernard Cache, 1958-)는 변곡 또는 변곡점을 내재적인 독특점(singularité intrinsèque 특이성)으로 정의한다. “극점(extrema)”(외래적인 독특점, 최대와 최소)과 반대로, 이 내재적 독특점은 좌표로 귀착하지 않는다. 이것은 높은 곳에도 낮은 곳에도 있지 않고, 오른 쪽에도 왼쪽에도 있지 않고, 감소도 증가도 아니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이중적 기호(un“signe ambigu” 양면적)라고 부른 것에 상응한다. (20 31-33)
가능한 변형들, 카슈의 관점에서 세 종류의 변형(transformations)을 이미 거친 것은 바로 이러한 자격으로서 이다. (21-22, 33)
첫째 [변형들]는 접해있는 반사 평면에 대해 백터적인 것, 즉 대칭(symétrie)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광학 법칙에 따라 작동하며, 변곡을 ‘방향 전환되는 점’(le rebroussement)으로[여기서 심한 굴절이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지만, 단어 상으로 굴절이라기보다 반사에 가깝다], ‘첨두에 있는 점’(l'ogive)으로 변형한다. 첨두의 아치는 유체 흐름의 선들의 형태 배치에 합치하는 움직임의 형태를 표현하며, 방향 전환되는 점은 계곡의 물이 하나의 흐름의 통일성 하에서 정돈될 때 그 바닥의 단면을 표현한다.(22 33)
그림설명: 베르나르 카쉬의 도식,
(1) 첨두아치(ogive),
(2) 방향 전환되는 점(point de rebroussement),
(3) [(1)과 (2)의 좌표 상에서처럼 계속으로서] 고딕식 운율반복(scansion gothique): 첨두아치와 방향전환(ogive et rebroussement) - (22 34)
둘째 변형들은 사영들(projectives)이다: 이것은 ‘숨은 매개변수들’과 변수들 또는 잠재적인 독특점들[특이성들]에 의해 정의되는 내부 공간을 외부 공간 위에 투사하는 것을 표현한다. .. [일곱 가지 특이성들;] 주름(le pli), 구김살(la fronce), 제비꼬리(la queue d'aronde), 나비(le papillon), 쌍곡선돌기(l'omblic hyperbolique), 타원형 돌기(l‘omblic elliptique), 포물선 돌기(l‘omblic parabolique). (22-23, 34)
2.3. [바로크 수학들과 변동: 무리수, 미분계수, 곡선들의 가족] 34 Les mathématiques baroques et la variation: nombre irrationnel, quotient différentiel, famille de courbes 23
마지막으로[셋째 변형들], 변곡은 그 자체로 무한한 변화 또는 무한하게 변화하는 곡률과 뗄 수 없다. .. 이것이 바로 코흐의 곡선(la courbe de Koch)이다. 이 곡선 무수히 많은 각진 점을 통과하고 이중 어떤 점에서도 접선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끝도 없이 스폰지 같이 구멍난 세계를 포괄하며, 선(線)보다 더하고 면(面)보다는 덜한 무엇인가를 구성한다(프랙탈 수, 즉 무리수, 차원없는 수, 차원사이의 수인 만델브로의 프랙탈 차원). (23, 34)
게다가 상사의 변환(l'homothétie)은, 마치 지리학적 해안의 길이의 경우에서와 같이, 축적의 변화에 따라 변동(la variation)을 일치하게 한다. (23, 34-35)
바로 여기에서는 점에서 점으로가 아니라 주름에서 주름으로 나아가며, 모든 윤곽의 곡선이 재료의 형상적 역량들(des puissances formelles du matériau)을 위하여 흐려진다. 이 때 이 역량들은 표면에 드러나며 굴곡과 보충적인 겹주름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23, 35)
이 변곡은 곡률의 중심에서 무한정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며, 그리고 어떤 순간 “높이 비상하거나 우리 위로 떨어질 위험을 지닌다.” .. 소용돌이(une turbulence)는 단독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소용돌이의 나선은 프랙탈의 구성방식을 좇아가는데, 이 방식에 따라 새로운 소용돌이들이 항상 앞선 소용돌이들 사이로 끼어든다. 소용돌이는 소용돌이들로부터 자라나며, 윤곽을 지우면서 오직 거품으로(두 écume) 또는 갈기 모양으로(en crinière) 끝맺음된다. (23-24, 35-36)
§2.4. [대상의 새로운 지위] 38 Nouveau statut de l'objet 25
24 바로크 수학들의 정의는 라이프니츠와 더불어 등장한다. 바로크 수학들은 대상을 가변적 크기를 가진 ‘새로운 변용’(nouvelle affection)이라고 간주하는 데, 이것은 변동 그 자체(la variation même)이다. (24, 36)
확실히 프랙탈 수 안에서 또는 대수적인 정식 안에서도 그러한 것으로 고려되는 것이 가변성(la variabilité)은 아닌데, 왜냐하면 각 항들은 특정한 값을 갖거나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리수와 이것에 상응하는 급수 계산, 미분계수와 미적분학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여기에서는 변동이 현행적으로 무한하게 된다. (24, 36)
* 그림(24쪽, 36)에 대한 해석: AC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리면서 x의 위치를 잡을 수 있다면, C의 각이 직각이면, CB는 AC(반지름으로 하는 원)의 접선이다.
* 그림(25쪽 37)에서 C/E의 비율은 C/Y와 비례이다. 그리고 c/e로 비율(rapport)을 점점 줄여가면서 주름-점 A에 접근할 때 (게다가 이것은 반지름과 C에서 각에 알맞은 탄젠트 사이의 비율이다). AC/AE의 탄젠트 값은 같음에도 EA와 CA는 동시에 줄어든다. 무한히 줄어든 A에 가까운 점은 그래도 탄젠트 값은 여전히 있다. 이점에서 C점은 A에 무한히 가깝게 된다. AC 사이의 거리는 차이가 있다. (24-25, 37) [그 차이가 강도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44RMA)]
간단히 말해, 언제나 변곡(une infliction)이 있는데, 이 변곡은 변동을 주름으로 만들고, 주름 또는 변동을 무한으로 실어 나른다. 주름 그것은 “거듭제곱(puissance, 역량)이다. 마치 근호에서 값을 내는 무리수에서 주름을 보는 것과 같고, 크기와 거듭제곱의 비례연관(rapport)에서 값을 내는 미분계수에서 주름을 보는 것과 같다. 이것은 변동의 조건(condition de la variation)과 같다. 거듭제곱(la puissance, 잠세태) 자체가 현실태(actes)이며, 주름의 현실태이다. (25, 37-38) [기억은 잠세태이며 그 자체가 현재와 와 닿아있는 현실태이다. 위의 그림에서 바깥에 CY의 현실이 AC의 잠세태의 반영이다. 주름은 미분계수처럼 무한 분할의 주름들로 되어 있다. (44RMA)]
25 수학들이 변동(la variation)을 대상으로 삼을 때, 이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함수의 관념인데, 대상의 관념 또한 변하면서 함수적인 것이 된다. (25 38).
“주어진 하나의 곡선에 속하는 하나의 점에서 접하는 하나의 직선을 찾는 대신에, 우리는 무한한 곡선들에 속하는 무한한 점들에서 접하는 곡선을 차는데 전념한다. 곡선은 [접선에 의해] 접해는 것이 아니라, 곡선들에 접하는 것이다. 접선은 직선, 유일한 것, 접하는 것이 아니라, 곡선, 무한한 군, 접해진 것이 된다.”(접선들의 역의 문제). (25, )
이 새로운 대상을 대상류(objectile)라 부르자. 베르나르 카슈가 제시했듯이, 이것은 기술적인(technologique) 대상을 매우 현대적 개념화 한 것이다. (26 39)
대상의 이러한 새로운 상태로 인해, 그것은 이제 공간적 주형(鑄型), 즉 질료-형상 연관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연속적인 변동의 상태에 놓이게 됨을 함축하는 그리고 그 만큼 형상의 연속적인 전개를 함축하는 시간적 변조(變造)와 연관된다. 변조에서, “주형에서 벗어나기 위한 정지란 결코 없다. 왜냐하면 에너지를 실현하는 매체가 회전하는 것은 영속적으로 주형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변조기는 시간적 주형이다. ‥…주조하는 것은 한정된 방식으로 변조하는 것이며, 변조하는 것은 영원히 변화하면서 연속적인 방식으로 주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라이프니트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정의한 변조(la modulation)이 아닌가? 급수의 법칙(la loi de la série)은 곡선들을, 이 곡선들이 만나는 교차점들의 곡선이 연속적으로 접하며 연속적인 운동 상태에 있는 “같은 선의 흔적(la trace de la même ligne)으로 정립한다. (26, 39)
§2.5. 관점주의: 변동과 시선의 점 40 Le perspectivisme: variation et point de vue 27
27 만일 대상의 상태(statut, 지위)가 근본적으로 변한다면, 주체 또한 변한다. 우리는 변곡 또는 변화하는 곡률로부터 오목면의 곡률 벡터들로 이행한다. (27 40)
그것은 정확히 점은 아니지만, 하나의 장소, 위치, 자리, 선들로부터 나온 선, 즉 “선의 초점”(un foyer linéaire)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변동 즉 변곡을 대신하는 한에서 시선의 점(le point de vue)라 부른다. 그러한 것이 관점주의(perspectivisme)의 토대이다. (27 40) [벩송의 다음 측정(recoupement)과 연관있다.]
* 그림 설명(27, 40),
[(3차원)곡선으로 두 번 휘어지면 두 번 움푹한 자리가 난다. 들뢰즈는 하나에는 선들의 모임처럼 즉 광학에서 빛의 선들의 모임 점으로서 초점처럼 묘사하였고, 다른 하는 선들이 없이 중심점처럼 표현하였다. 이 곡선의 변동에서 즉 굴곡(변곡)에서 감각적으로 중심은 초점과 비슷할 것이다. 예를 들어 스케이트 선수가 이 곡선을 달린다면 무게의 중심으로 향한 몸이 매순간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그려 보라, 그러면 선들로부터 나온 선, 즉 선들의 초점을 그려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4RMA)]
주체(sujet)는 아래 던져진 것(un sub-jet)이 아니라, 화이트헤드(Whitehead, 1861-1947)가 말했듯이 “위로 상승하는 자”(un superjet, 솟는 자, 솟대)이다. 동시에 대상이 대상류가 되고 주체는 “솟대”가 된다. (27, 40)
왜냐하면 처음에는 모든 시선의 점은 변동 위에 있는 시선 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적어도 처음에는, 주체와 함께 변화하는 시선의 점은 아니다. 반대로 우발적 주체가 변동(variation = métamorphose, 변태), 또는 어떤 것= x(anamorphose 왜상 歪像, 점진변화)을 파악하는 조건이다. (27 41)
라이프니츠, 니체,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 화이트헤드 등에서 전망주의는 물론 하나의 상대주의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상대주의이다. (27 41)
27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시선의 점이 오목한 면과 더불어 건너뛴다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무한한 변동의 연속성과 시선점의 불연속성 사이에는 모순이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것은 많은 작가들(칸트를 뒤이어서)이 라이프니츠를 비난하며 연속성의 법칙과 식별불가능자의 원리 사이에 있다고 말한 바로 그 모순이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이 처음부터 연속성(continuité)과 인접성(conguïté)을 혼동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면 말이다. (27-28 41)
변곡점들은 부피(l'étendue) 안에서 첫째 종류의 특이성들을 구성한다. .. 시선점들은 공간(l'espace) 안에서 둘째 종류의 특이성들이고, 거리의 불가분적 연관들에 따라서 포괄자들(des enveloppes, 봉인들)을 구성한다. (28, 41-42) [첫째 물리적, 둘째 수학적, (셋째 영혼적 - 포함)]
라이프니츠는 길이(l'etendue, extensio)를 자리(le situs)의 또는 위치(la position)의, 다시 말하면 시선점의 “연속 반복”으로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피란 시선점의 속성이 아니라, 공간(l'espace, spatium)의 속성이다. 이 공간은 시선점들 사이의 거리의 질서로서, 이 반복을 가능하게 한다. (28, 42)
28 변동 위에 놓인 시선점은 어떤 형태 또는 형태 배치의 중심을 대신한다. 가장 유명한 예는 원뿔들(les coniques)의 예이며, 여기서 고깔의 꼭지점은 시선점이다. (28, 42)
이것이 바로, 원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의 기초로서, 데자르그가 변동에 의해 포괄된 연관 또는 법칙을 “안으로 말림”(involution)이라고 명명한 이유이다(예를 들어, 한 삼각형을 어떤 축 둘레로 회전시켰을 때, 축 위의 세 꼭지점을 투사하고, 세변을 연장해서 정의되는 점들의 배치). .
*그림 설명(29, 43)
[삼각형을 회전시키면 중간이 비고 배가 모나게 불룩한 원통형이 생긴다. / 3변을 기준을 회전변환하면, 윗변의 연장으로 꼭대기에 초점을 찾을 수 있고, 아래에는 두 개의 초점이 찾을 수 있다.(44RMA)]
그 누구도 미셀 세르(Serres 1930-2019)보다 이 새로운 원뿔곡선 이론이 갖는 결론들과 전제들을 더 잘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무한 세계 또는 모든 중심을 상실한 가변적 곡률의 세계 안에서, 사라지는 중심을 시선의 점이 대체한다는 것의 중요성; 지각의 새로운 광학적 모델, 그리고 ‘시각(vision)의 건축’을 위하여 촉각적인(tactile) 개념들을 거부하는 지각 속에서 기하학의 새로운 광학적 모델; 변태를 통해서만 또는 단면들의 굴절 변화(la déclinaison) 에서만 현존하는 대상의 상태(statut); (진리의 상대성이 아니라) 상대성의 진리로서 관점주의. 시선의 관점은 변동의 각 영역 안에서 사례들에 순서를 부여하는 역량(puissance d’ordonner les cas), 진리가 현시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29, 43-44)
이를 테면 뿔의 꼭지점으로부터 번갈아 나타나는 원뿔의 계열(유한한 점, 무한한 곡선, 유한한 원, 무한한 포물선, 유한한 타원, 무한한 쌍곡선), 또는 산술 삼각형의 꼭지점에서 시작하는 2의 거듭제곱의 계열, 그리고 만일 그것이 없다면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다시 말해 변동을 계열화하고 사례들을 결정할 수 없게 되는 바로 그 시선의 점(le point de vue)을 모든 영역에 부여할 필연성. (29-30, 43-44)
30 우리는 지금까지 가변적 변곡에서 (오목한 면의) 곡률의 초점으로, 변동에서 시선점으로, 주름(le pli)에서 포괄(l'enveloppement)로, 간단히 변곡에서 포함으로(De l'inflexion à l'inclusion)으로 이행했다. (30, 44-45)
“두 선의 각 또는 경사도가 발견되는” 것은 이미 꼭지점 안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인 것이 시선의 점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에 주저한다. (30, 45)
이것은 더 이상 알(卵, 란)처럼 유기적 부분들의 “상호 포괄”(enveloppement) 안에서 결집(cohérence)이나 응집(cohésion)의 포괄이 아니다. 그러나 밀착(d'adhérence)의 즉 접착(d'adhésion)의 수학적 포괄이 아니다. .. 이것은 내속의 포괄(une enveloppe d'inhérence), 즉 일방적 내유(d'inhésion unilatérale)의 포괄이다. (31 45)
31 그때부터 정확하게 말하자면 포함하는 것은 시선의 점이 아니다. 또는 최소한 시선점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오직 동인(agent)이라는 자격으로서만 이지, 목적인 또는 실현된 현실태(acte achevé, entélechie)로서는 아니다. 포함, 내속은 울타리의 즉 폐쇄의 조건을 갖는다.(L'inclusion, l'inhérence a une condition de clôture ou de fermeture que...) 라이프니츠는 이것(울타리 또는 닫힘)을 그의 유명한 정식 속에서 “창이 없다”고 진술하고, 시선의 점은 충족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진술한다. (31 45-46)
변곡(L'inflexion)은 자신[변곡]을 포함하는 영혼 안에서만 현실적으로 현존하는 이상성(une idéalité) 즉 잠재성(virtualité)이다. 이리하여 영혼이 주름들을 갖고, 주름들로 가득차있다. 주름들이 영혼 안에 있으며, 그리고 영혼 안에서만 현실적으로 현존한다. 이것이 이미 “타고난 관념들”(l’idée innées)의 진실이다: 이것들은 순수 잠재성들, 순수 역량들인데, 이것들의 현실태는 영혼 안에 (접혀 있는) 습성이나 기질에 있고, 이것들의 완성된 현실태는 영혼의 내부적 작용(내적 전개)에 있다. (31, 46)
§2.6. [주체의 새로운 지위 47] Nouveau statut du sujet 32 -
[주체의 새로운 지위로서 시선의 점(영혼의 점, 포함의 점):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관점이 주체이다(44RLJ) /
이상으로부터 3종류의 독특성들(singularités 특이성)처럼, 3종류의 점들의 구별이 나온다. 물리적 점은 변곡을 겪는 점, 즉 변곡점 자체이다. .. 한편으로 이것은 정확한 점의 가치를 훼손하며,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수학적인 점이 새로운 지위, 정확하지 않으면서 엄밀한(rigoureux) 지위를 갖도록 한다. ... 만일 수학적 점이 초점이라는 내밀한 것이 되기 위해서 이렇게 선의 극단이기를 그만둔다 해도, 그래도 여전히 하나의 단순한 ‘양상’은 남아 있다. 이것은 신체 안에 연장된 사물 안에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았듯이 이것은 그러한 자격으로서 다만 셋째 점이 신체 안으로 투사된 것이다. 이것이 형이상학적 점, 영혼 즉 주체이며, 시선의 점을 점유하는 것, 시선의 점 안으로 투사되는 것이다. (32 47-48) ... [세 종류의 특이성은 28(41-42)쪽에 두 종류의 특이성만 나온다.]
따라서 영혼은 신체 안에서 한 점 위에 있지 않고, 그 자체로 상위의 점이며, 시선의 점에 대응하는 또 다른 본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변곡의 점, 위치의 점, 포함의 점을 구별할 수 있다.(32 48)
§2.7. [변곡에서 포함으로 48 De l'inflexion à l'inclusion 33
[물리학을 조건[요소]로서 두고서, 수학의 변곡(상층)과 심리학의 포함(심층)으로 이중화한다. 물론 심리학이 없던 시대인데, 라이프니츠는 내재성의 강도, 힘, 역능을 다룬다.]
33 우리는 라이프니츠가 형이상학적 점인 영혼 또는 주체에 어떤 이름을 부여했는지 알고 있다: 모나드. 그는 이 이름을 신플라톤주의자들(néo platoniciens)로부터 빌려왔다. 이들은 일자의 상태(un état de l'Un)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했다. (33 48) [플로티누스겠지]
단위(통일성)는 다양체를 포괄하고, 다양체는 온일자(l’Un)를 ‘계열’의 방식으로 전개하는 한에서 통일성이다. (33, 48)
하지만 이렇기 때문에 포괄들(les enveloppements 봉인들)과 전개들(les développements, 개봉들), 안으로 접힘(implication)과 밖으로 펼침(explication)은 아직 특별한 운동들이며, 이 운동들은 이것들 모두를 “접어 아우르는”(compliquer)고 또 일자들 모두를 접어아우르는 보편 통일성(Unité 단일성)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모나드들의 체계를 보편적 접어아우름의 수준으로 가져간 것은 부루노(Bruno)였다. .. 안으로접힘(impliquer)-밖으로펼침(expliquer)-한데접어어우름(compliquer)라는 주름의 삼위일체(la triade)를 형성한다. (33, 48) [모나들의 안과 밖의 운동의 종합으로서 단일성 속에서 무한 접어 아우름을 생각한 부르노는 주재적 신을 상정하지 않고 자기 생산과 소멸의 과정을 자체(자연, 신) 속에서 이루어지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범신론적이라기보다 내재주의에 가깝지 않을까?(44RMB)].
밖으로 펼침(Expliquer)-안으로 접힘(impliquer)-접어 아우름(compliquer)은 주름의 삼위일체(la triade)를 형성한다. 하지만 왜 모나드라는 이름이 라이프니츠와 관련되어 있는지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라이프니츠가 두 가지 방식으로 개념을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변곡의 수학이.. 다른 한편으로 포함의 형이상학이... 통일성을 환원 불가능한 개별적 통일성으로 정립하도록 허용했다. (33 48-49) [그는 먼저 시선점의 물리학이 있다. 그리고 양 갈래(이중화)로 변곡의 수학과 포함의 형이상학으로 갈라진다. 포함의 형이상학은 심층을 다룬다. (53SLD]
보편적 복잡화를 대체하고 범신론의 위험 또는 내재성의 위험을 몰아내는 것은 바로 독특한 시선점들의 일치, 즉 조화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보편적 ‘정신(Esprit)’이라는 가설 또는 차라리 그러한 기체(hypostase)를 지속적으로 비난했다. 보편적 정신은 복합화를 개별자들을 망가뜨리는 추상적인 작용으로 만들 것이다. (33-34, 49) .
34 이 모든 것은 모호한(obscur) 채 남아있다. 플로티노스((Plotin, 205-270)가 어렴풋이 그린 은유를 라이프니츠가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 모나드를 일종의 도시 위의 시선점으로 만든다면, 각 시선점에 어떤 형상이 상응한다는 점을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일까? (34, 49)
곡률 또는 변곡의 무한한 계열, 이것이 이 세계이며, 온 세계는 한 시선점 하의 영혼(l'âme) 안에 포함되어(inclure) 있다. (34 50) - [세계라는 변곡들의 무한 계열이 영혼 안에 들어 있다면, 데카르트는 라이프니츠보다 단순하게 신체의 표상이 영혼의 관념에 일치 하에 있다고 보는 점이 아닐까? (44RMB)]
§2.8. [행정단위(道 도, 구역)] 50 Le département 34-2
34-2 세계는 무한히 많은 점에서 무한히 많은 곡선과 접하는 무한한 곡선, 유일한 변수를 갖는 곡선, 모든 계열들이 수렴하는 계열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보편적 유일한 시선점은 없을까?
각 모나드는 개별적 단일성으로서 모든 계열을 포함하고, 이와 같이 전 세계를 표현하지만, 그러나 모나드는 세계의 작은 지역, “행정단위”(un département), 도시의 구역, 유한한 배열(séquence)을 보다 명석하게 표현하지 않고서는 전 세계를 표현하지 못한다. 두 개의 영혼[모나드와 세계]은 동일한 질서를 갖지 않는다. (35, 50-51)
영혼은 무한하게 주름으로 가득 차 있는 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자신의 행정단위 또는 구역을 구성하는 것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조금만 펼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35-51)
변곡의 두 초점이라는 기본적인 도식으로 되돌아가 보자. 사실 그것들 각각은 모든 변곡위에 있는 시선점인데, 이것은 (회고적 운동) 전도된 순서 안에서, 그리고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로서) 대립되는 행정단위(구역) 따르면서 이다. (35, 51) - [27쪽 그림에서 두 초점이 있다. 하나는 변동의 연관에서 다른 변동의 바깥에서이라고 한다면, 하나는 신체 다른 하나는 영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44RMB)]
§2.9. [모나드, 세계, 울타리의 조건 51] La monade, le monde et la condition de clôture 35
그러나 왜 세계 또는 계열에서부터 출발해야(partir) 할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거울(le miroir) 또는 시선점이라는 주제가 모든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 세계는 단지 이 세계를 포함하는 주체들 안에서 존재하는데(exister),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35 51)
영혼은 신이 선택했던 세계로부터 결과 된다. 세계는 모나드 속에 있기 때문에, 그 각각은[각 영혼은] 세계 상태의 모든 계열을 포함한다. 그러나 세계를 향해 있기 때문에, 그 각각은 계열의 ‘이유’를 명석하게 담고 있지는 않다. 여기에서 모나드들은 모조리 이 이유의 결과로 생기며, 이유는 모나드들의 일치의 원리로서 그것에 외부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다. (36, 52)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가 주체-세계 관계의 여전히 너무 경험적인 규정으로서의 지향성을 넘어서려고 노력할 때, 그는 창없는 모나드라는 라이프니츠의 정식을 하나의 길로 제시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 세계를 향한 존재라는 규정을 오해 한다.
울타리(la clôture)는 세계를 향한 존재 조건이다. 울타리 조건은 유한자의 무한한 열려 있음과 관련되어 적용된다: 울타리는 “무한을 유한하게 표상한다”. 울타리는 세계가 각 모드 안에서 다시 시작될 가능성을 부여한다. (36-37 52-53)
* 그림 설명(36, 53쪽):
[들뢰즈는 이상하게 모나드들을 중첩적으로 그려 놓았다. 그리고 세계를 둥글게 그려놓았다. 우선 세계란 그 둥근 것만큼이 울타리이다. 이 울타리의 확장(열림)이 무한하다 하더라도 여전히 한정된 세계이다. 그리고 모나드들은 따로 떨어져 독자적으로 현존하는 모나드들이라기보다 이 세계를 둘러보는 모나드들의 집단으로 그려 놓았다. 이것은 모나드들이 자기 속에 세계를 가졌다는 것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모나드들은 어쩌면 자신이 돌아본 관점들만이 자신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려 한 것은 아닐까?(44RMB)]
영혼은 세계의 표현(l'expression)인데(현실태 actualité), 그러나 왜냐하면 세계가 영혼의 표현된(l'exprimé)된 것이기 때문이다(잠재태 virtualité). (37 53)
변곡에서 포함으로. 결국 잠재적인 것이 육화되거나 또는 실행되기 위해서, 영혼 안에서의 그러한 현실화 이외의 다른 것이 더 필요할까? 물질의 겹주름들이 영혼 안의 주름을 배가시키게 하기 위하여, 물질 안에서 실현화(réalisation)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것을[앞 문장]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장(章)이 우리에게 그것을 믿도록 초대하지. (37, 53)
(7:20 44RMB) (11:22, 53RMF) (11:28, 53SLD)
**인명록 *****************
205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205-270), 알렉산드리아 학파 철학자. 네오플라톤주의(« néoplatonisme »)
412 프로클로스(Proclus (Proclus de Lycie) ou Proclos, Πρόκλος, 412-485), surnommé « le Diadoque » (διάδοχος, successeur), 네오플라톤주의 철학자.
1401 쿠자누스(Nicolas de Cues, Nicolas Krebs, deu. Nikolaus von Kues, 1401-1464), 독일 신학자. 철학자, 천문학자. 추기경, 교황 비오2세의 부제(vicaire temporel)였다.
1548 브루노(Filippo Bruno, dit Giordano Bruno, 1548-1600) 도미니므수도자, 이탈리아 철학자. 1594년 두 편의 시를 썼다: « Du triple minimum » (« De triplici minimo ») et « De la monade, du nombre et de la figure »(« De monade, numero et figura »)
1591 데자르그(Gérard Desargues, 1591-1661), 프랑스 기학학자 건축가. 사영기하학.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
1612 아르노(Antoine Arnauld, 1612-1694) 포르르와얄 학파. 쟝세니스트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1651 페르모제르(Balthasar Permoser, 1651–1732) 독일 조각가. 후기 바로크와 전기 로코코 사이의 작가. - 조각작품: Apotheosis of Prince Eugene (1718–21);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Apothéose du prince Eugène]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관념론자.
1842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미국 심리학자, 철학자.
1843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 영국 국적 미국 작가, 소설가. 위의 윌리엄 제임스 동생.
1859 세자로(Ernesto Cesàro 1859-1906) 이탈리아 수학자. 미분 기하학 전공자. Leçons de géometrie intrinsèque, 1894)에서 프락탈 곡선 설명
1861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 철학자, 논리학자, 수학자. avec Bertrand Russell, Principia Mathematica, 1912. 과정과 실재성(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1929)
1866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러시아화가 미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 1921) 점, 선, 면(Punkt und Linie zu Flache, 1926)
1870 코흐(Helge von Koch 1870-1924) 스웨덴 수학자. 프락탈 곡선의 선구자이다. 1906년 프락탈이란 용어 발명했다. “코흐 송이”(le flocon de Koch)
1870 패랭(Jean Perrin, 1870-1942) ENS 출신, 프랑스 물리학자, 화학자, 정치가. 1926노벨 물리학상.
1872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사회비평가, 노벨상(Nobel laureate, 1950) 수상자. A Critical Exposition of the Philosophy of Leibniz. 1900 .
1879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스위스 화가이자 음악가. 현대 예술론(Théorie de l'art moderne(1924 Über moderne Kunst ('On Modern Art'))
1884 뵘(Alfred Boehm, 1884-1964) 스트라스부르 대학 신학 교수, 독어로 저술했다. Le « vinculum substantiale » chez Leibniz. Une énigme historique et sa solution, Revue des Sciences Religieuses 17 (2):144-167 (1937)[Vrin, 1962재판]
1889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 철학자. Die Grundprobleme der Phänomenologie. 1927 (trad. Jean-François Courtine), Les problèmes fondamentaux de la phénoménologie, Paris, Gallimard, 1989, 410 p.
1891 게루(Martial Gueroult, 1891-197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Descartes selon l'ordre des raisons, 1953,(Paris: Aubier, 2권)
1905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프랑스의 철학자, 작가.
1906 강디약(Maurice de Gandillac, 1906-200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La philosophie de Nicolas de Cues, 1941, Bd. Aubier 참조.
1908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프랑스의 철학자. 행동의 구조(La Structure du comportement, 1942), 지각의 현상학(La 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 1945), 의미와 무의미(Sens et non-sens, 1948),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Le Visible et l’invisible, 1964)
1915 따똥(René Taton, 1915-2004) 프랑스 과학사가. L’oeuvre mathématique de Desargues, 1951
1922 셰레(René Schérer, 1922-) 프랑스 철학자, 파리 8대학 명예교수. L’Âme atomique. Pour une esthétique d’ère nucléaire (avec Guy Hocquenghem), Paris, Albin Michel, 1986.
1923 톰(René Thom, 1923-2002) 프랑스 수학자, 카타스트로프 이론 창시자(théorie des catastrophes) 1958년 필즈상 수상(la medaille Fields, 1958).
1924 만델브로(Benoît Mandelbrot, 1924-2010) 리투아니아 유태계, 프랑스 에꼴 폴리테그니크에서 공부, 꼴레쥬드 프랑스 교수, 프랑스-미국 수학자. 프락탈 발견자(le découvreur des fractales) Fractales, hasard et finance, Flammarion, 1959. / 프락탈(fractales) 이론 1974년 발표.
1924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 프랑스 철학자. ENS, 철학교수 자격, 파리 대학 재편 후 파리5대학 교수, 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1964 .
1925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 철학자, 파리 8대학교수
1925 뻬루(Jean Peyroux, 1925-2012) 프랑스 기술자(Ingénieur des Arts et métiers) 과학 작품 번역가 Oeuvre concernant le calcul infinitésimal (1983) avec Jean Peyroux (1925-2012) comme Annotateur
1930 세르(Michel Serres, 1930-2019) 프랑스 철학자, 과학사가.
1939 토로(Yvonne Toros, 1939-) 프랑스 여성 철학자. 스피노자와 데자르그 연구자. 국가박사 학위: Étude spinoziste, Spinoza et l'espace projectif : étude sur Spinoza, Desargues et l'Ecole hollandaise : Jean De Witt, Johann Hudde, Franz van Schooten, etc../ Yvonne Toros, 1990.
1946 호깡앵(Guy Hocquenghem, 1946-1988) 프랑스 기자, 수필가, 소설가 호모 운동가. Avec René Schérer, L'Âme atomique : pour une esthétique d'ère nucléaire (1986)
1958 베르나르 카쉬(Bernard Cache, 1958-) 건축에 기초한 독립 이론가. 프랑스 디자이너, “비표준 건축(non-standard architecture)” 개념 설정. / L’ameublement du territoire / Terre Meuble, 1997. 이 책은 영어로 먼저 출판되었다. Earth moves: the furnishing of territories, tr. Anne Boyman, MIT Press, 1995. 부드러운 땅, 안소현 옮김(근간)[2020년인데 찾을 수 없다]
1958 하인즈(Eric Haines, 1958-) 미국 소프트웨어 기술자, 그래픽전공자. Real-Time Rendering(2002)의 공동저자. 그는 공간형-송이(la fractale sphereflake)를 도형을 만들었다(코흐는 평면이었다).
[1958 끌레-마르땅(Jean Clet-Martin 1958-)은 자신의 들뢰즈 연구서 제목으로 이 개념(변주)을 내세운다. (variation, 변동(變動). 음악에서 변주(變奏).)
GM V. -Leibnizens mathematische schriften, 저자: Gottfried Wilhelm Leibniz.; K Gerhardt, 출판사: Berlin, A. Asher, 1849-63. 시리즈: Leibnizens gesammelte werke, 3. folge: Mathematik, bd. 1-7.
(13:41, 53RMF) (14:08, 53S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