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재 지
| 전북 전주시 교동 치명자산 |
지리좌표
| 묘지 앞 상석 북위 35°48′32″ 동경 127°10′07″ |
문 의 처
| 치명자산 기념성당 |
이곳은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의 가족들을 합장한 묘소가 있는 곳으로 동정 부부 이 루갈다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루갈다 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주 시내를 굽어보는 중바위는 전주 8경 중 손꼽히는 기린봉 능선에 위치해 호남의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치명자 산을 가려면 전주 시내 전동 성당 앞 로터리에서 고속 국도 방향으로 우회전해 한 블록을 달린 후 도청 사거리에서 다시 우회전해 기린로 사거리에서 전주 공전길로 직진하면 군경 묘지에 이른다.
군경 묘지에서 산길로 100미터 정도 올라가면 우측에 일광암과 순교자 묘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고 이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면 치명자산 바로 앞까지 승용차로 갈 수 있다.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돼 있는 치명자산 유항검 일가 합장묘에는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였던 유항검과 그의 부인 신희(申喜), 두 아들 유문석·유중성, 제수 이육희의 유해 그리고 동정 부부 순교자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들은 원래 치명한 후 김제군 재남리(현 용지면 남정리)에 가매장됐다가 전동 본당 초대 신부인 보두네 신부를 비롯한 신자들이 1914년 4월 19일에 이곳으로 옯겨 모셨다.
1993년 11월 29일에 이 묘소를 개장, 유해 확인 작업을 벌인 결과, 이 가족 묘소에는 7개의 옹기에 각각 유해가 담겨져 있었으며, 백사발에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고, 숯을 담은 채 옹기를 막아 놓아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했다.
진주 유씨 소재공파(素齋公派) 8대손인 유항검은 1784년 권일신의 집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가성직 제도에 의해 신부의 권한을 위임받고 고향인 전주 초남리(현재 전북 완주군 이서면 조남)에 내려와 호남 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유항검은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나며 독성죄가 됨을 깨닫고 이를 시정키 위해 북경 주교에게 문의 편지를 내게 했으며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전라도 지방에서 제일 먼저 체포돼 서울로 압송당한 유항검은 대역 부도(大逆不道)죄로 능지 처참형을 받고 전주 감영으로 다시 이송, 1801년 10월 24일 46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또한 유항검의 부인 신희와 동정 부부로 유명한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둘째아들 유문석과 동생 유관검이 순교했다.
이렇게 해서 유항검 일가는 지상의 모든 삶을 영생의 세계로 옮겼고 이들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의 확신은 일가의 단종을 가져왔다. 조정은 이들의 흔적을 아예 없앨 요량으로 대역 죄인의 집을 헐고 집터를 깊게 파 연못을 만들어 버리는 파가 저택(破家猪宅)의 형을 내렸다.
전주 초남리에서 시작된 유항검 일가의 길고도 먼 여정은 이렇게 치명자산에서 마쳤고 그 길은 시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우리 신앙의 후손들은 생명은 물론 가문의 단절까지도 감수하며 천주를 섬겼고, 그 흘린 피의 대가로 호남 천주교회의 초석을 이루었던 유항검 일가의 고결한 신앙을 구비진 능선을 따라 산을 오르며 되새기는 것이다.
찾아가는 길 |
전주 시청 앞에서 기린로를 따라 800m쯤 남행하다 전주 지방 병무청을 지나자마자 전주 공전 쪽 길로 접어들어 1.2km 정도 들어가면 군경 묘지가 나오고 여기서 800m를 더 올라가면 동고사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155계단을 올라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