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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 7식주와 2처, 8해탈, 중아함경_097. 대인경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루수를 유행하실 때에 도읍인 검마슬담에 머무셨다.
그때 존자 아난이 한가히 홀로 지내면서 연좌하여 깊이 생각하다가, 마음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연기는 매우 기이하고 지극히 깊으며, 이해하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관찰하여 본 바로는, 지극히 얕고도 얕다.’
이에 존자 아난은 저녁때 연좌에서 일어나 부처님 처소로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나 한쪽에 서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 한가히 홀로 있으면서 연좌하여 깊이 생각하다가, 마음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연기는 매우 기이하고 지극히 깊으며, 이해하기도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관찰하여 본 바로는, 지극히 얕고도 얕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이 연기는 지극히 얕고도 얕다’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마라. 무슨 까닭인가? 이 연기는 지극히 깊고, 이해하기도 또한 매우 어렵다.
아난아, 이 연기를 참답게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보지도 못하며, 깨닫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 중생들은 베틀이 서로 얽매는 것 같고, 넝쿨풀이 어지러운 것 같으며, 바쁘고 부산하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고,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며 왔다 갔다 하면서, 태어남과 죽음을 뛰어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난아, 그러므로 이 연기는 지극히 깊고, 이해하기 또한 매우 어려운 줄 알아야 한다.
[연기법]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늙고 죽음에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늙고 죽음에는 연이 있다.’하고 대답하라.
또 어떤 이가 ‘늙고 죽음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태어남에 인연한다.’하고 대답하라.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태어남에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태어남에도 역시 연이 있다.’하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이가 ‘태어남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존재에 인연한다.’하고 대답하라.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존재에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존재에도 연이 있다.’하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이가 ‘존재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취함에 인연한다.’하고 대답하라.
아난아,
만일 어떤 이가 ‘취함에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취함에도 역시 연이 있다.’하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이가 ‘취함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갈애에 인연한다.’하고 이렇게 대답하라.
아난아, 이것을 ‘갈애를 인연하여 취함이 있고, 취함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으며, 존재를 인연하여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으며, 늙음과 죽음을 인연하여, 걱정과 슬픔이 있고, 울음, 걱정, 괴로움, 번민은 모두 늙음과 죽음을 인연하여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구족하면, 오로지 큰 괴로움의 음만 생긴다.
아난아,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으면, 이것을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말한다. 알아야 한다. 이른바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태어남이 없다면, 고기면 고기 종자, 새면 새 종자, 모기면 모기 종자, 용이면 용 종자, 신이면 신 종자, 귀신이면 귀신 종자, 하늘이면 하늘 종자, 사람이면 사람 종자 등, 아난아, 저마다의 중생들이 저마다의 처소를 따라 태어남이 없을 것이다. 제각기 태어남이 없다면, 가령 태어남을 떠나더라도 늙음과 죽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늙음과 죽음의 원인, 늙음과 죽음의 성취, 늙음과 죽음의 근본, 늙음과 죽음의 인연은 곧 태어남이다. 무슨 까닭인가? 태어남을 인연하여 곧 늙음과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존재를 인연하여 태어남이 있으면, 이것을 ‘존재를 인연하여 태어남이 있다’고 말한다. 알아야 한다. 이른바 존재를 인연하여 태어남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존재가 없으면, 고기면 고기 종자, 새면 새 종자, 모기면 모기 종자, 용이면 용 종자, 신이면 신 종자, 귀신이면 귀신 종자, 하늘이면 하늘 종자, 사람이면 사람 종자 등, 아난아, 저마다의 중생들이 저마다의 처소를 따라 존재가 없을 것이다. 제각기 존재가 없다면, 가령 존재를 떠나더라도 태어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태어남의 원인, 태어남의 성취, 태어남의 근본, 태어남의 인연은 곧 존재이다. 무슨 까닭인가? 존재를 인연하여 곧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취함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으면, 이것을 ‘취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알아야 하니, 이른바 취함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취함이 없어 제각기 취함이 없다면, 가령 취함을 떠나더라도 다시 존재가 있거나 존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존재의 원인, 존재의 성취, 존재의 근본, 존재의 인연은 곧 취함이다. 무슨 까닭인가? 취함를 인연하여 곧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갈애를 인연하여 취함이 있으면, 이것을 ‘갈애를 인연하여 취함이 있다’고 말한다. 알아야 하니, 이른바 갈애를 인연하여 취함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갈애가 없어 제각기 갈애가 없다면, 가령 갈애를 떠나더라도 다시 취함이 있거나 취함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취함의 원인, 취함의 성취, 취함의 근본, 취함의 인연은 곧 갈애이다. 무슨 까닭인가? 갈애를 인연하여 곧 취함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이것을 갈애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고,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으며,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고,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으며,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고,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으며,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고,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다고 말한다.
아난아, 지킴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칼과 몽둥이,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으며,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구족하면, 오로지 큰 괴로운 음만 생긴다.
아난아, 만일 지킴이 없어 제각기 지킴이 없다면, 가령 지킴을 떠나더라도, 칼과 몽둥이,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칼과 몽둥이,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과,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키는 원인, 성취, 근본, 인연은 곧 지킴이다.
무슨 까닭인가? 지킴을 인연하기 때문에, 곧 칼과 몽둥이, 싸움, 아첨, 속임, 거짓말, 이간하는 말이 있고, 한량없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구족하면, 오로지 큰 괴로운 음만 생긴다.
아난아,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으면, 이것을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다’고 한다. 알아야 한다. 이른바 집을 인연하여 지킴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집이 없어 제각기 집이 없다면, 가령 집을 떠나더라도 지킴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한다. 지킴의 원인, 지킴의 성취, 지킴의 근본, 지킴의 인연은 곧 집이다. 무슨 까닭인가? 집을 인연하여 곧 지킴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으면, 이것을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다’고 한다. 알아야 한다. 이른바 아낌을 인연하여 집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아낌이 없어 제각기 아낌이 없다면, 가령 아낌을 떠나더라도 집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집의 원인, 집의 성취, 집의 근본, 집의 인연은 곧 아낌이다. 무슨 까닭인가? 아낌을 인연하여 곧 집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으면, 이것을 ‘집착을 인연하여 아낌이 있다’고 한다.
아난아, 만일 집착이 없어 제각기 집착이 없다면, 가령 집착을 떠나더라도 아낌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아낌의 원인, 아낌의 성취, 아낌의 근본, 아낌의 인연은 곧 집착이다. 무슨 까닭인가? 집착을 인연하여 곧 아낌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다’고 한다. 알아야 한다. 이른바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욕심이 없어 제각기 욕심이 없다면, 가령 욕심을 떠나더라도 집착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집착의 원인, 집착의 성취, 집착의 근본, 집착의 인연은 곧 욕심이다. 무슨 까닭인가? 욕심을 인연하여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으면, 이것을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다’고 한다. 알아야 하니, 이른바 분별을 인연하여 욕심이 있다.
아난아, 만일 분별이 없어 제각기 분별이 없다면, 가령 분별을 떠나더라도 욕심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욕심의 원인, 욕심의 성취, 욕심의 근본, 욕심의 인연은 곧 분별이다. 무슨 까닭인가? 분별을 인연하여 곧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으면 이것을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다고 한다. 알아야 한다. 이른바 이익을 인연하여 분별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이익이 없어 제각기 이익이 없다면, 가령 이익을 떠나더라도 분별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분별의 원인, 분별의 성취, 분별의 근본, 분별의 인연은 곧 이익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익을 인연하여 곧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으면, 이것을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다’고 한다. 알아야 한다. 이른바 구함을 인연하여 이익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구함이 없어 제각기 구함이 없다면, 가령 구함을 떠나더라도 이익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익의 원인, 이익의 성취, 이익의 근본, 이익의 인연은 곧 구함이다. 무슨 까닭인가? 구함을 인연하여 곧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갈애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으면, 이것을 ‘갈애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다’고 한다. 알아야 한다. 이른바 갈애를 인연하여 구함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갈애가 없어 제각기 갈애가 없다면, 가령 갈애를 떠나더라도 구함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구함의 원인, 구함의 성취, 구함의 근본, 구함의 인연은 곧 갈애이다. 무슨 까닭인가? 갈애를 인연하여 곧 구함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욕망에 대한 갈애와 존재에 대한 갈애, 이 두 법은, 느낌을 인하고 느낌을 연하여 오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느낌에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느낌에도 연이 있다’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느낌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접촉을 인연한다’고 대답하라. 알아야 한다. 이른바 접촉을 인연하여 느낌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눈의 접촉이 없어 제각기 눈의 접촉이 없다면, 가령 눈의 접촉을 떠나더라도, 눈의 접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귀, 코, 혀, 몸도 역시 그러하며, 만일 뜻의 접촉이 없어 제각기 뜻의 접촉이 없다면, 가령 뜻의 접촉을 떠나더라도 뜻의 접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느낌의 원인, 느낌의 성취, 느낌의 근본, 느낌의 인연은 곧 접촉이다. 무슨 까닭인가? 접촉을 인연하여 곧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접촉에도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접촉에도 연이 있다’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접촉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이름과 빛깔을 인연한다’고 대답하라. 알아야 한다. 이른바 이름과 빛깔을 인연하여 접촉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행하는 바와 연하는 바에 이름의 몸이 있다. 이 행을 떠나고 이 연을 떠나더라도 상대 가 있는 접촉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행하는 바와 연하는 바에 빛깔의 몸이 있다. 이 행을 떠나고 이 연을 떠나더라도 접촉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가령 이름의 몸과 빛깔의 몸을 떠나더라도, 접촉이 있어 접촉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접촉의 원인, 접촉의 성취, 접촉의 근본, 접촉의 인연은 곧 이름과 빛깔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름과 빛깔을 인연하여 곧 접촉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이름과 빛깔에도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이름과 빛깔에도 연이 있다’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름과 빛깔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인식을 인연한다’고 대답하라. 알아야 하니, 이른바 인식을 인연하여 이름과 빛깔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인식이 어머니 태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이 몸을 이루는 이름과 빛깔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만일 인식이 태에 들어갔다가 곧 나온다면, 이름과 빛깔이 정을 만나겠는가?”
“만나지 못합니다.”
“아난아, 만일 어린 소년과 소녀의 인식이 처음부터 끊어지고 부서져서 없다면, 이름과 빛깔이 더 자랄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이름과 빛깔의 원인, 이름과 빛깔의 성취, 이름과 빛깔의 근본, 이름과 빛깔의 인연은 곧 인식이다. 무슨 까닭인가? 인식을 인연하여 곧 이름과 빛깔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인식에도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인식에도 역시 연이 있다’고 대답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인식에는 어떤 연이 있는가?’하고 묻거든, ‘이름과 빛깔을 인연한다’고 대답하라. 알아야 한다.
이른바 이름과 빛깔을 인연하여 인식이 있는 것이다.
아난아, 만일 인식이 이름과 빛깔을 얻지 못하고, 만일 인식이 이름과 빛깔에 서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다면, 인식은 과연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괴로움이 있겠는가?”
“없습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인식의 원인, 인식의 성취, 인식의 근본, 인식의 인연은 곧 이름과 빛깔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름과 빛깔을 인연하여 곧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아, 이것을 이름과 빛깔을 인연하여 인식이 있고, 인식을 인연하여 또한 이름과 빛깔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말을 보태고 거듭 말을 보태어 설명하고, 전하고 전하여 설명하며, 주장할 만한 것이 있게 되니, 그것은 곧 ‘인식과 이름과 빛깔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느낌과 신에 관한 주장들]
아난아, 무엇을 어떤 사람이 신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하는가?”
존자 아난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오직 원하건대 그것을 해설하여 주십시오, 저는 지금 그것을 들은 뒤라야 널리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그것을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겠다.”
존자 아난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은 느낌을 신이라 보고, 어떤 사람은 느낌을 신이라 보지 않으면서, 신은 능히 깨닫고 또 신의 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본다.
또 어떤 사람은 느낌을 신이라 보지 않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의 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느낌을 신이라고 보거든, 그에게 ‘세 가지 느낌, 곧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는데, 너는 이 세 가지 느낌에서 어느 느낌을 신이라고 보는가?’하고 물어야 한다.
아난아, 다시 그에게 말해야 한다.
만일 즐거운 느낌을 깨닫는다면, 그때 그는 두 가지 느낌, 곧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멸하고, 오직 즐거운 느낌만을 깨달을 것이다.
즐거운 느낌은, 무상의 법이며 괴로움의 법이며 멸하는 법이니, 만일 즐거운 느낌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난아, 만일 다시 한 가지 느낌, 곧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그는 그때에는 두 가지 느낌, 곧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멸하고, 다만 괴로운 느낌만을 깨닫는다. 괴로운 느낌은, 무상의 법이며 괴로움의 법이며 멸하는 법이니, 만일 괴로운 느낌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난아, 만일 다시 한 가지 느낌, 곧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으면, 그때 그는 두 가지 느낌, 곧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이 멸하고, 다만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만을 깨닫는다.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의 법이며 괴로움의 법이며 멸하는 법이다. 만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이미 멸해 버리면, 그는 신이 멸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아난아, 그가 이와 같은 무상의 법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나고서도, 다시 느낌을 신이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그가 이와 같은 무상의 법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떠나기만 한다면, 다시는 느낌을 신이라고 보지 못할 것이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느낌을 신이라고 보지 않으면서, 신은 능히 깨닫고 신의 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거든, 그에게 말하기를, ‘네게 만일 느낌이 없다면 깨달을 수가 없어, 응당 이것은 내 소유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아난아, 그가 다시 이렇게 느낌을 신이 아니라고 보면서도, 신은 능히 깨닫고 신의 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이, 느낌을 신이 아니라고 보면서, 신은 능히 깨닫고 신의 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느낌을 신이라고 보지 않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의 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보거든, 그에게 말하기를, ‘네게 만일 느낌이 없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신이 느낌을 떠나면 응당 신은 청정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아난아, 그가 다시 느낌을 신이 아니라고 보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의 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볼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아난아, 그러므로 그는 응당 이와 같이, ‘느낌을 신이 아니라고 보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의 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다만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난아, 이것을 어떤 사람이 신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한다.
아난아, 무엇을 어떤 사람이 신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
존자 아난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오직 원하건대 그것을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는 지금 그것을 들은 뒤라야 널리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해 그 뜻을 분별하리라.”
존자 아난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은 느낌을 신이라고 보지 않고, 또한 신이 능히 깨닫거나 신의 법도 능히 깨닫는다고 보지 않으며, 또한 신은 깨닫는 바가 없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보지 않은 뒤에는, 곧 이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은 뒤에는 곧 피로해하지 않으며, 피로해하지 않은 뒤에는 곧 열반에 든다. 그래서 ‘내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쳤으므로,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안다.
아난아, 이것이 거듭 거듭 말을 보태어 설명하고, 전하고 전하여 설명하며, 주장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곧 받아들임이 없을 것이다.
아난아, 만일 비구가 이렇게 바르게 해탈하면, 그는 다시 여래는 마침이 있다고 보거나, 여래는 마침이 없다고 보거나, 여래는 마침이 있으면서 마침이 없다고 보거나, 여래는 마침이 있는 것도 마침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보는 일이 없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아난아, 무엇을 어떤 사람이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는 것이라 고 하는가?”
존자 아난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오직 원하건대 그것을 해설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 그것을 들은 뒤라야, 널리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리라.”
존자 아난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빛깔과 신에 관한 주장들]
“아난아,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을 신이라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는 않지만,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는 않지만,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도 않으며, 또한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지도 않지만, 한량없는 빛깔 없음을 신이라고 주장한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적은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면, 그는 지금 적은 빛깔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만일 적은 빛깔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을 신이라 주장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을 신이라 하며 견해에 집착한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적은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는 않지만,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면, 그는 지금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하여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만일 한량없는 빛깔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주장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하며 견해에 집착한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적은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는 않으며, 또한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도 않지만,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면, 그는 지금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만일 적은 빛깔 없음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고 하는 견해에 집착한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적은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도 않으며, 또한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지도 않지만, 한량없는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면, 그는 한량없는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다가,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볼 것이며, 만일 한량없는 빛깔 없음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여,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한량없는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한량없는 빛깔 없음을 신이라고 하는 견해에 집착한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아난아, 무엇을 어떤 사람이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존자 아난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법의 주인이시며, 법은 세존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원하건대 세존께서는 그것을 해설해 주십시오, 저는 그것을 들은 뒤라야, 널리 그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곧 말씀하셨다.
“아난아,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여라. 나는 너를 위하여 그 뜻을 분별하겠다.”
존자 아난이 분부를 받아 경청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을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적은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적은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만일 적은 빛깔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을 신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을 신이라 하지 않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만일 한량없는 빛깔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한량없는 빛깔을 신이라 하지 않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또한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만일 적은 빛깔 없음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적은 빛깔 없음을 신이라 하지 않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다.
아난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한량없는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으며,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나서도 신이 있다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보지 않을 것이며, 만일 한량없는 빛깔 없음을 떠나더라도 또한 이러이러하다 생각하지 않고 또한 이렇게 늘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난아,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한량없는 빛깔 없음을 신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한량없는 빛깔 없음을 신이라 하지 않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다.
아난아, 이것을 어떤 사람은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일곱 가지 인식의 머무름]
다시 아난아, 일곱 가지 인식의 머무름과 두 가지 처가 있다.
어떤 것을 일곱 가지 인식의 머무름이라고 하는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인간과 욕계천이다. 이것을 제 일의 인식의 머무름이라고 한다.
다시 또 아난아,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초선천에 태어나 요절하지 않고 사는 범천을 말한다. 이것을 제 이의 인식의 머무름이라고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황욱천이다. 이것을 제 삼의 인식의 머무름이라고 한다.
또 아난아,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변정천이다. 이것을 제 사의 인식의 머무름이라고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빛깔이라는 생각을 벗어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멸하여 약간의 생각도 없어, 한량없는 공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곧 한량없는 공처천이다. 이것을 제 오의 인식의 머무름이라고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한량없는 공처를 벗어나, 한량없는 식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곧 한량없는 식처천이다. 이것을 제 육의 인식의 머무름이라고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한량없는 식처를 벗어나,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곧 무소유처천이다. 이것을 제 칠의 인식의 머무름이라고 한다.
아난아, 어떤 것을 두 가지 처라고 하는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들은 생각도 없고 느낌도 없으니, 무상천이다. 이것을 제 일의 처라고 한다.
다시 아난아, 어떤 빛깔이 없는 중생들은 일체의 무소유처를 벗어나, 비유상 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곧 비유상 비무상처천이다. 이것을 제 이의 처라고 한다.
아난아, 제 일의 인식의 머무름이라는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인간과 욕계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인식의 머무름을 알고, 인식의 머무름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인식의 머무름을 좋아하고, 그 인식의 머무름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 이의 인식의 머무름이라는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다른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초선천에 태어나, 요절하지 않고 오래 사는 범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인식의 머무름을 알고, 인식의 머무름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인식의 머무름을 좋아하고, 그 인식의 머무름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 삼의 인식의 머무름이라는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황욱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인식의 머무름을 알고, 인식의 머무름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인식의 머무름을 좋아하고, 그 인식의 머무름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 사의 인식의 머무름이라는 것은, 어떤 빛깔이 있는 중생들은 서로 같은 몸에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곧 변정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인식의 머무름을 알고, 인식의 머무름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인식의 머무름을 좋아하고, 그 인식의 머무름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 오의 인식의 머무름이라는 것은, 빛깔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빛깔이란 생각을 벗어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멸하여 약간의 생각도 없는, 한량없는 공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한량없는 공처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인식의 머무름을 알고, 인식의 머무름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인식의 머무름을 좋아하고, 그 인식의 머무름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 육의 인식의 머무름이라는 것은, 빛깔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한량없는 공처를 벗어나, 한량없는 식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한량없는 식처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인식의 머무름을 알고, 인식의 머무름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인식의 머무름을 좋아하고, 그 인식의 머무름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 칠의 인식의 머무름이라는 것은, 빛깔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한량없는 식처를 벗어나,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무소유처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인식의 머무름을 알고, 인식의 머무름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인식의 머무름을 좋아하고, 그 인식의 머무름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두 가지 처]
“아난아, 제 일의 처라는 것은, 빛깔이 있는 중생으로서 생각도 없고 느낌도 없는 것이니, 곧 무상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 처를 알고, 그 처의 성취를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처를 좋아하고 그 처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제 이의 처라는 것은, 빛깔이 없는 중생이 일체의 무소유처를 벗어나, 비유상 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니, 곧 비유상 비무상처천이다.
만일 어떤 비구가 그곳을 알고, 그곳의 성취를 알고, 그 멸함을 알고, 그 맛을 알고, 그 근심을 알고,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사실 그대로 안다면, 아난아, 이 비구는 그래도 그 처를 좋아하고 그 처에 집착하여 머물려고 생각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저 일곱 가지 인식의 머무름과 두 가지 처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알고,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아 해탈을 얻으면, 그를 비구 아라하라 하고, 지혜 해탈이라 부른다.
[여덟 가지 해탈]
아난아, 여덟 가지 해탈이 있으니,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빛깔을 빛깔로 관찰하니, 이것을 제 일의 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안으로 빛깔의 생각이 없이 밖으로 빛깔을 관찰하니, 이것을 제 이의 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청정한 해탈을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니는데, 이것을 제 삼의 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일체의 빛깔의 생각을 벗어나, 대상이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도 없는 한량없는 공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이것을 제 사의 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일체의 한량없는 공처를 벗어난 한량없는 식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이것을 제 오의 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일체의 한량없는 식처를 벗어난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이것을 제 육의 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일체의 무소유처를 벗어난 비유상 비무상처를 성취하여 노니는데, 이것을 제 칠의 해탈이라고 한다.
다시 다음에는 일체의 비유상 비무상처를 벗어나, 생각과 앎이 멸한 해탈을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닐고, 지혜로 모든 누진지를 관하여 아는데, 이것을 제 팔의 해탈이라고 한다.
아난아, 만일 어떤 비구가 저 일곱 가지 인식의 머무름과 이 두 가지 처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알고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아, 해탈을 증득하고, 또 이 여덞 가지 해탈을 순역으로 해서 몸으로 증득하여 성취하여 노닐며, 또한 지혜로 관찰하여 모든 번뇌를 다한다면, 그를 비구 아라하라 하고, 구해탈이라고 부른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과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