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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40권
4. 왕생품을 풀이함③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여 보살마하살의 법안(法眼)이 청정한지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법안으로써 다음과 같이 아느니라.
‘이 사람은 수신행(隨信行)이요 이 사람은 수법행(隨法行)이며 이 사람은 무상행(無相行)이다.
이 사람은 공해탈문(空解脫門)을 행하며 이 사람은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을 행한다.
이 사람은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을 행하여 5근(根)을 얻고,
5근을 얻기 때문에 무간삼매(無間三昧)를 얻으며,
무간삼매를 얻기 때문에 해탈지(解脫智)를 얻고,
해탈지를 얻기 때문에 유중견(有衆見)ㆍ의(疑)ㆍ재계취(齋戒取)의 3결(結)을 끊나니,
이런 사람을 수다원이라 한다.
이 사람은 사유도(思惟道)를 얻어서 음(婬)ㆍ에(恚)ㆍ치(癡)가 얇아져 사다함이 될 것이요,
사유도에 한층 더 나아가서 음ㆍ에ㆍ치를 끊고는 아나함이 될 것이며,
사유도에 한층 더 나아가서 색염(色染)ㆍ무색염(無色染)ㆍ무명(無明)ㆍ만(慢)ㆍ도(掉)를 끊어 아라한이 될 것이다.
이 사람은 공ㆍ무상ㆍ무작의 해탈문을 행하여 5근을 얻고,
5근을 얻기 때문에 무간삼매를 얻으며,
무간삼매를 얻기 때문에 해탈지를 얻고,
해탈지를 얻기 때문에 쌓임의 법[集法]은 모두가 멸하는 법[滅法]임을 알고는 벽지불이 되리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법안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다음과 같이 아느니라.
‘이 보살이 처음 뜻을 내어서 단(檀)바라밀을 행하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을 성취하며,
선근(善根)이 순수하고 두터우면서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몸을 받되,
혹은 찰리(刹利)의 큰 성바지에 나기도 하고 혹은 바라문(婆羅門)의 큰 성바지에 나기도 하며 혹은 거사(居士)의 큰 집안에 나기도 하고 혹은 사천왕천(四天王天) 내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태어난다.
이 보살은 그 안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성취시키고 그들의 좋아하는 바에 따라 모두 베풀어 주며, 또한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모든 부처님을 만나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 이르며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법안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마찬가지로 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났다고 알고,
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고 알며,
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授記)를 받았다고 알고,
이 보살이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받지 못했다고 아느니라.
이 보살이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에 이른 것도 알고,
이 보살이 아직 아비발치의 지위에 이르지 못한다고 알며,
이 보살이 신통을 두루 갖춘 것도 알고,
이 보살이 아직 신통을 두루 갖추지 못한 것도 알며,
이 보살이 이미 신통을 두루 갖추어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로 날아가서 모든 부처님을 뵙고는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는 것도 알고,
이 보살이 아직 신통을 얻지는 못했고 장차 신통을 얻게 될 것도 아느니라.
이 보살이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했다거나 혹은 아직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지 못한 것도 알고,
이 보살이 중생을 성취시켰다거나 혹은 아직 중생을 성취시키지 못한 것도 알며,
이 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칭찬을 받고 있다거나 혹은 칭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알고,
이 보살이 모든 부처님을 친근(親近)한다거나 혹은 모든 부처님을 친근하지 않는 것도 알며,
이 보살의 수명이 한량이 있다거나 혹은 수명이 한량없는 것도 알고,
이 보살이 부처님이 될 때의 비구 대중은 한량이 있다거나 혹은 비구 대중이 한량없는 것도 아느니라.
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때 보살로써 승가[僧]를 삼는다거나 혹은 보살로써 승가를 삼지 않는 것도 알고,
이 보살이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닦았다거나 혹은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닦지 않은 것도 알며,
이 보살이 일생보처(一生補處)라거나 혹은 아직 일생보처가 아니라 함도 알고,
이 보살이 맨 마지막 몸을 받았다거나 혹은 아직 맨 마지막 몸을 받지 못한 것도 알며,
이 보살이 도량(道場)에 앉을 수 있다거나 혹은 도량에 앉을 수 없는 것도 알고,
이 보살에게 마(魔)가 있다거나 혹은 마가 없는 것도 아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법안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보살마하살은 처음 발심할 때 육안으로써 세계의 중생들이 모든 괴로움을 받는 것을 보고는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면서,
모든 선정을 배우고 5신통을 닦아 얻고는 천안(天眼)으로써 6도(道) 안의 중생들이 갖가지로 몸과 마음의 고통을 받는 것을 두루 보고서 더욱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니,
그 때문에 혜안(慧眼)을 구한 뒤에 그들을 구제하고자 한다.
이 혜안을 얻고 나서는 중생들의 마음 모양이 갖가지로 같지 않음을 보고,
“어떻게 하면 중생들로 하여금 이 진실한 법을 얻게 할까?”라고 하고,
그 때문에 법안(法眼)을 구하여 중생을 인도하면서 법 가운데에 들게 하기 때문에 법안이라 한다.
이른바 “이 사람은 수신행(隨信行)이요 이 사람은 수법행(隨法行)이다.”라고 함은,
처음 무루의 도[無漏道]에 들어갈 때 근기가 둔한 이를 수신행이라 하는데, 이 사람은 처음에 믿음의 힘[信力]을 의지하는 까닭에 도를 얻으니 수신행이라 하며,
근기가 영리한 이면 수법행이라 하는데, 이 사람은 모든 법을 분별하는 까닭에 도를 얻으니 이를 수법행이라 한다.
이 두 사람은 15심(心) 중에서는 역시 무상행(無相行)이라 한다.
여기를 지나서부터는 혹은 수다원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사다함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아나함이라 하기도 하나니,
15심 중에서 신속히 그 모양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무상(無相)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비롯됨이 없는 세계로부터 성품됨이 항상 질박 정직하여 진실한 일을 좋아하는 이가 있고,
어떤 사람은 버리고 여의기를 좋아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세상마다 언제나 아주 고요함을 좋아하는 이도 있다.
진실을 좋아하는 이는 공해탈문(空解脫門)으로써 도를 얻나니, 모든 진실 안의 공으로써 첫째를 삼기 때문이다.
버림[捨]을 좋아하는 이는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을 행하여 도를 얻으며, 아주 고요함(善寂)을 좋아하는 이는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을 행하여 도를 얻는다.
【문】 무엇 때문에 5근(根)을 얻는다고 말씀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온갖 성인의 도를 5근이라 한다.”라고 하나니,
5근에 의해 성립되기 때문이다.
8근(根)이 모두 선(善)이라 하더라도 3무루근(無漏根)과 다름이 없나니, 이 때문에 단지 5근만을 말한다.
과위를 취할 때에 상응한 삼매를 무간삼매(無間三昧)라 한다.
이 삼매를 얻고 나서 해탈지(解脫智)를 얻으며, 이 해탈지로써 3결(結)을 끊으면서 과증(果證)을 얻게 된다.
유중견(有衆見)이란 5수중(受衆) 가운데서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의(疑)란 3보(寶)와 4제(諦)를 믿지 않는 것이며, 재계취(齋戒取)란 96종(種)의 외도(外道)의 법 중에서 이 법을 취하여 괴로움에서 해탈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문】 견제(見諦)에서 10결(結)을 끊음으로써 수다원의 과위를 얻는데, 무엇 때문에 단지 세 가지만을 말씀하고 일곱 가지는 말씀하지 않는가?
【답】 만일 유중견을 말하면 벌써 온갖 견결(見結)을 말한 것이 된다.
마치 경에서의 말씀과 같아서 유중견은 62견(見)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나에 집착하면 다시 나를 생각하면서,
“이것은 항상하다[常]”거나 이것은 “항상하지 않다[無常]”라고 하게 된다.
만일 항상하지 않다 한다면 단멸견(斷滅見)에 떨어져서 삿된 소견을 내어 죄복이 없다고 여기며,
만일 항상하다 한다면 항상하다는 상견(常見)에 떨어져서 재계취(齋戒取)를 내어 도(道)를 얻기를 바라거나 혹은 후세의 복덕을 닦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일을 얻기를 바라므로 계율[戒]을 취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인연을 구하기 때문에 “하늘이 짓는 바”라 여기면서 다시 견취(見取)를 낸다.
만일 유중견을 말하게 되면 이 변견(邊見)과 사견(邪見)의 두 가지 소견을 포섭하게 되며, 만일 재계취를 말하게 되면 벌써 견취를 말한 것이 된다.
나머지 4결(結)은 아직 그 근본을 뽑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이 10결(結)은 삼계(三界)의 4제에서 끊을 바[四諦所斷]에서 분별하면 여든여덟 가지가 있나니, 수다원 내지 벽지불이다.
성문과 벽지불의 도를 분별하는 것은 먼저 설명한 것과 같다.
보살의 법안(法眼)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분별하면서 성문과 벽지불의 방편으로서 도를 얻는 문[得道門]을 아는 것이고,
둘째는 보살의 방편으로서 도를 행하는 문[行道門]을 아는 것이다.
성문과 벽지불에 대해서는 먼저 이미 곳곳에서 설명했으므로 이제는 보살의 법을 분별하겠다.
만일 보살은 이 보살이 6바라밀을 깊이 행하여 모든 번뇌가 얇아졌기 때문에 신근(信根)과 정진근(精進根)으로써 그리고 방편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몸을 받았음을 안다면,
이 보살은 나고 죽는 육신이고 아직은 법성(法性)과 신통(神通)과 법신(法身)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3근(根)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금생에는 보시의 공덕과 신근과 정진근을 행하고 후세에는 찰리의 큰 성바지 내지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태어나니, 먼저 원인[因]을 알고 뒤에 결과[果]를 아는 것이다.
또 이 보살이 물러나지 않는다[不退]라는 것에 대해서는 먼저의 설명과 같으며,
물러나지 않는 모양[不退轉相]에 대해서도 역시 뒤의 아비발치품(阿鞞跋致品)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나니, 이것과 반대되는 것을 물러난다[退]고 한다.
물러나지 않는 보살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수기[記]를 받은 이고,
둘째는 아직 수기를 받지 못한 이다.
마치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의 사종수기(四種受記) 중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신통을 두루 갖추었다[具足神通]라는 것은,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 안에서 일시에 한량없는 몸을 변화할 수 있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며 법을 듣고 설법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미칠 수 있는 이가 없되 그는 맨 마지막 몸의 보살이기 때문이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을 두루 갖추지 않았다[不具足]고 한다.
또 저마다 자기 지위 안에서 모자라는 것이 없음을 일컬어 두루 갖추었다고 하며,
각각의 지위 안에서 아직 성취하지 못했으면 이것을 두루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신통을 얻은 이에 두 부류가 있나니,
작용이 있는 이[有用者]와 작용하지 않는 이[不用者]이다.
아직 신통을 얻지 못했다[未得神通]라는 것은,
어떤 보살이 새로 뜻을 냈기 때문에 아직 신통을 얻지 못했거나 혹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요 마음이 게으르기 때문이며 다른 법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직 얻지 못했다 한다.
위의 것과 반대의 것이면 바로 얻었다 한다.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한다[淨佛世界] 하고 혹은 아직 청정하게 하지 못했다.” 함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중생을 성취시킨다[成就衆生]라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어떤 이는 먼저 자기 자신이 공덕을 이룬 후에 중생을 제도하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먼저 중생을 성취시킨 후에 자신이 공덕을 이루는 이가 있다.
마치 보화부처님[寶華佛]께서 열반하려 할 때,
미륵(彌勒)보살과 석가문(釋迦文)보살의 이 두 보살을 자세히 살펴보니,
미륵보살은 자신은 공덕을 성취했으면서도 제자들이 아직 성취되지 못했고,
석가문보살은 제자들은 성취했으면서도 자신은 아직 성취되지 못했었다.
그리하여 생각하기를,
‘여러 사람을 성취시키기는 어렵되 자신이 이루기는 쉽다.’고 하시고는,
설산(雪山) 골짜기의 보굴(寶屈) 안에 들어가 몸에서 광명을 놓으시자,
이때 석가문보살은 부처님을 뵈옵고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한 발을 들고 밤낮 7일 동안을 서 있으면서 한 구의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했나니, 이 인연 때문에 9겁(劫)을 초월한 것이다.
이와 같은 등으로 중생을 성취시키고 혹은 중생을 성취시키지 않은 이를 알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칭찬을 받는다[諸佛稱譽]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면 칭찬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모든 부처님을 친근한다[親近諸佛]는 것과 한량없는 수명[無量壽命]이라는 것과 한량없는 비구의 승가[無量比丘僧]라는 것과 순수한 보살로 승가를 삼는다[純菩薩爲僧]는 것과 고행을 닦지 않는다[不修苦行]는 것 등은 초품(初品)의 끝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일생보처(一生補處)라는 것은,
어떤 이는 몸매[相]로서 알기도 한다.
마치 아사타선인(阿私陀仙人)이 그 몸의 상(相)을 보고서 금생에 성불할 것을 아는 것과 같고,
산야바라문(珊若婆羅門)이 우유죽[乳糜]을 보고서 오늘 성불하실 이가 드실 것임을 아는 것과 같으며,
변길(遍吉)보살과 관세음(觀世音)보살과 문수사리(文殊舍利)보살 등이 이 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몸매와 같은 것을 보고 장차 성불하실 분임을 아는 것과 같나니, 이러한 것 등이다.
도량에 앉는다[坐道場]라는 것은,
어떤 보살은 보살이 가는 곳을 보니 땅 아래에 금강(金剛)으로 된 땅이 이 보살을 받치고 있었으며,
또 하늘과 용과 귀신들이 갖가지의 공양거리를 가지고 도량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았었나니, 이러한 등으로 도량에 앉을 것을 안다.
악마가 있다[有魔]라는 것은,
전생에 다른 이가 행하는 도와 갖가지로 구하는 불도의 인연을 차단하고 자비를 베풀기를 기뻐하지 않았으며 공 등의 그 밖의 다른 법을 행하기를 좋아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전생에 다른 이가 행하는 도를 깨뜨렸기 때문에 악마의 파괴가 있는 것이다.
【문】 어떻게 맨 마지막 몸의 보살이 나쁜 업의 과보를 받고 악마가 와서 파괴하게 되는가?
【답】 보살은 갖가지의 문으로써 부처님의 도에 드나니,
혹은 자비의 문으로부터 혹은 정진과 지혜의 문으로부터 부처님의 도에 들어가기도 한다.
이 보살은 정진과 지혜의 문을 행하면서 자비의 문을 행하지 않나니, 정진과 지혜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귀한 사람[貴人]이 비록 갖가지의 좋은 옷이 있다 하더라도 간혹 한 가지만을 입고 그 밖의 것은 입지 않은 것과 같나니,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갖가지의 행을 닦아 부처님의 도를 구해야 하는데도 혹은 정진과 지혜의 도만을 행하면서 자비의 마음을 쉬기도 한다.
행하는 도를 깨뜨린다[破行道] 함은 증상만(增上慢) 때문이다.
모든 장수천이나 용이나 귀신의 방편을 모르는 이들은 악행의 인연을 지었는데도 만일 그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을 보면 아주 없다[斷滅]는 소견을 내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실제로 과보 받는 것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비록 죄의 인연이 없다 하더라도 실제로 악마가 오며 방편의 힘으로써 악마가 있는 것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온갖 성문과 벽지불과 모든 보살의 갖가지 방편의 문은 중생들로 하여금 도에 들게 하나니, 이것을 법안이 청정하다 한다.
【경】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여 보살마하살의 불안(佛眼)이 청정한지요?”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도를 구하면서 마음이 차례로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에 들어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으며,
그때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과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성취하나니,
이 보살마하살은 일체종지로써 온갖 법 안에서 법마다 보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듣지 못함이 없으며, 법마다 알지 못함이 없고 법마다 식별하지 못함이 없느니라.
사리불아,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 불안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다섯 가지의 눈[五眼]을 얻고자 한다면 6바라밀(波羅蜜)을 배워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사리불아, 이 6바라밀 안에는 온갖 착한 법으로서 성문의 법과 벽지불의 법과 보살의 법과 부처님의 법을 다 포섭하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만일 어떤 진실한 말이 있어 온갖 착한 법을 포섭한다 한다면 반야바라밀이 바로 그것이니라.
사리불아, 반야바라밀은 능히 다섯 가지의 눈을 내나니, 보살로서 다섯 가지의 눈을 배우는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논】 해석한다.
보살은 10주(住) 안에 머물러서 6바라밀 내지 일체종지를 두루 갖추고, 보살이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에 들어가 모든 번뇌의 습기를 깨뜨리면 즉시 모든 부처님의 막힘없는 해탈[無礙解脫]을 얻어 즉시 불안이 생기나니,
이른바 일체종지와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 내지는 대자대비의 모든 공덕이 그것이다.
이것을 불안이라 한다.
【문】 지혜로 물건을 보는 것이 바로 눈의 모양인데 어떻게 대자대비 등을 눈이라 하는가?
【답】 모든 공덕은 모두가 혜안(慧眼)과 상응하기 때문에 통틀어서 눈이라 한다.
또 자비의 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중생연(衆生緣)과 법연(法緣)과 무연(無緣)이다.
범부의 사람은 중생연이요,
성문과 벽지불과 보살은 처음에는 중생연이었다가 나중에는 법연이며,
모든 부처님은 필경공(畢竟空)을 잘 수행하기 때문에 무연이라 하나니,
그러므로 자비도 역시 불안이라 한다.
이미 불안은 해설했고 이번에는 불안이 작용하는 바를 해설하겠다.
이 눈이야말로 법마다 보지 못함이 없고 듣지 못함이 없으며, 알지 못함이 없고 식별하지 못함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10주(住) 보살은 부처님과 아무 차별이 없다.
마치 변길(遍吉)ㆍ문수사리(文殊舍利)ㆍ관세음(觀世音) 등 같은 이는 부처님의 10력의 공덕 등을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부처님이 되지 않으니, 중생을 널리 제도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의심을 내나니, 이 때문에 불안의 모양을 말하면서,
“시방의 중생과 모든 법 가운데서 보지 못함이 없고 듣지 못함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보살은 그 밖의 보살들보다 위대하지만 부처님에 비교하면 두루 알지를 못하나니,
마치 달의 광명이 크다 하더라도 햇빛에서는 나타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문】 눈은 보는 모양인데 어찌하여 듣는다고 말씀하는가?
【답】 중생의 지혜는 6정(情)에서 생기어 6진(塵)을 안다.
사람들은,
“부처님도 듣지 못하는 바가 있다.
마치 외경서(外經書) 안에서 혹 듣지 못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라고 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로는 듣지 못한 바가 없다.”라고 한다.
또 이식(耳識)의 인연으로 지혜를 내고 그 지혜로 알기 때문에,
“법마다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라고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세 가지 식(識)으로 아는 바를 합하여 하나로 하는가?
다른 세 가지 식으로 아는 바는 셋으로 구별하여 눈은 본다 하고, 귀는 듣는다 하며, 뜻으로 아는 것은 식별[識]한다 하면서 코ㆍ혀ㆍ몸으로 아는 것은 깨닫는다[覺]고 하는가?
【답】 이 세 가지 식은 길을 돕는 특성[助道法]이 많으므로 구별하여 말하였고, 나머지 세 가지 식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합하여 말한다.
이 세 가지 식은 단지 세간의 일만을 알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로 말했고,
다른 세 가지는 역시 세간도 알고 출세간(出世間)도 알기 때문에 구별하여 설명한다.
또 이 세 가지 식은 단지 무기(無記)의 법만을 반연하지만,
그 밖의 세 가지의 식은 선(善)을 반연하기도 하고 혹은 불선(不善)을 반연하기도 하며 혹은 무기를 반연하기도 한다.
또 이 세 가지의 식은 능히 3승(乘)의 인연을 내게 되나니,
마치 눈으로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을 보고 귀로는 법을 들으며 마음으로는 헤아리면서 바르게 기억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차별하나니, 이 때문에 6식으로 아는 일을 네 가지로 분별한다.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했는데,
사람의 눈은 가까운 것은 보면서도 먼 것은 보지 못하고,
안은 보면서도 바깥은 보지 못하며,
거친 것은 보면서도 미세한 것은 보지 못하고,
동쪽은 보면서도 서쪽은 보지 못하며,
이것은 보면서도 저것은 보지 못하고,
화합한 것은 보면서도 흩어진 것은 보지 못하며,
생길 때는 보면서도 소멸할 때는 보지 못한다.
육안(肉眼)으로는 보면서도 천안(天眼)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안근(眼根)은 성취했으면서도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한 범부이기 때문에 천안이 없어서이다.
천안으로는 보면서도 혜안(慧眼)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범부의 사람이 천안의 신통을 얻었기 때문에 혜안이 없어서이다.
혜안으로 보면서도 법안(法眼)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한 성문(聲聞)의 성인이 갖가지로 중생을 제도하는 도(道)를 모르기 때문에 법안이 없어서이다.
법안으로는 보면서도 불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보살이 도종지(道種智)를 얻어서 갖가지로 중생을 제도하는 도를 알지만 아직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佛眼)이 없어서이다.
또 육안과 천안으로는 보면서도 혜안과 법안과 불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범부의 사람이 안근이 성취되고 천안의 신통만을 얻었기 때문이며, 혜안과 법안과 불안이 없어서이다.
육안과 혜안으로는 보면서도 법안과 불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안근이 성취된 성문의 성인이 갖가지로 중생을 제도한 도를 모르므로 법안이 없고 성문의 사람이기 때문에 불안이 없어서이다.
육안과 법안으로는 보면서도 불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처음으로 무생인(無生忍)을 얻었으나 아직 법성생신(法性生身)을 받지 못한 보살이 도종지는 얻었지만 아직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이 없어서이다.
천안과 혜안으로는 보면서도 법안과 불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욕망을 여읜 성문의 성인이 천안의 신통을 얻었으나 보살이 아니기 때문에 도종지가 없고 도종지가 없기 때문에 법안이 없으며 성문의 사람이기 때문에 불안이 없어서이다.
천안과 법안으로는 보면서도 불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보살의 신통을 얻고 갖가지로 중생을 제도하는 도를 알면서도 아직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이 없어서이다.
혜안과 법안으로는 보면서도 불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보살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무생법인을 얻은 뒤에 능히 온갖 중생의 도를 얻는 인연을 관찰하면서 갖가지의 도로써 그들을 제도하기는 하나 아직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이 없어서이다.
또 육안과 천안과 혜안으로는 보면서도 법안과 불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안근이 성취된 성문의 성인이 천안의 신통을 얻었으나 도종지가 없기 때문에 법안이 없고 성문의 사람이기 때문에 불안이 없어서이다.
천안과 혜안과 법안으로는 보면서도 불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법성생신(法性生身)의 보살이 6신통을 갖추고 갖가지의 도로써 중생을 제도하지만 아직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이 없어서이다.
또 육안과 천안과 혜안과 법안으로는 보면서도 불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은 처음으로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이 아직 육신을 버리지 못했고 보살의 신통과 무생법인을 얻어서 도종지는 두루 갖추고 있지만 아직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이 없어서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법마다 보거나 듣거나 깨닫거나 알지 못함이 없다고는 하지 않는다.
만일 불안으로써 모든 법을 관찰한다면 이야말로 보지 못하는 바가 없고 듣지 못하는 바가 없으며 깨닫지 못하는 바가 없고 식별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고 한다.
5진(塵)을 이치에 따르면서 분별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3승(乘) 등의 모든 착한 법과 이 다섯 가지 눈의 인연으로 된 착한 법은 모두가 6바라밀에 포섭되고 이 6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근본이 되나니,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능히 다섯 가지의 눈을 낸다고 한다.
보살이 점차로 이 다섯 가지의 눈을 배우면 오래지 않아서 부처님이 될 것이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신통바라밀(神通波羅蜜)을 닦고 이 신통바라밀로써 갖가지 뜻대로 되는 일[如意事]을 받게 되느니라.
곧 능히 대지(大地)를 움직이고,
하나의 몸이 변화하여 헤아릴 수 없는 몸이 되며,
헤아릴 수 없는 몸이 도로 하나의 몸이 되며,
자유자재로 숨고 나타나며,
산과 벽과 나무를 모두 통과하면서도 걸림이 없음이 마치 공중을 다니는 것과 같으며,
물을 걷는 것이 마치 땅과 같으며,
허공을 날아다님이 마치 새와 같으며,
땅속을 들락날락함이 마치 물속을 드나드는 것 같으며,
몸에서 연기를 뿜음이 마치 큰 불더미와 같으며,
몸 안에서 물이 나옴이 마치 설산(雪山)에 물이 흐르는 것 같으며,
해와 달은 큰 덕과 위력이 있어서 감당하기 어렵거늘 붙잡거나 어루만지며,
나아가 범천(梵天)에 이르기까지 몸이 자유자재하느니라.
그러면서도 이 여의신통(如意神通)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신통 부리는 일과 자기의 몸을 모두 얻을 수가 없음은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이고 자성을 여의기 때문이며 자성은 남[生]이 없기 때문이니라.
따라서 “나는 여의신통을 얻었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오직 살바야(薩婆若)를 위한 마음만은 제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여의신통지증(如意神通智證)을 얻느니라.
이 보살은 천이(天耳)가 청정하여 사람들의 귀보다 뛰어나니, 하늘의 소리나 사람의 소리 두 가지의 소리를 다 들으면서도 역시 이 천이신통(天耳神通)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천이와 소리와 자기의 몸을 모두 얻을 수가 없음은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고 자성을 여의기 때문이며 자성은 남이 없기 때문이니라,
따라서 “나에게는 이런 천이가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오직 살바야를 위한 마음만은 제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천이신통지증(天耳神通智證)을 얻느니라.
이 보살은 여실히 다른 중생들의 마음을 아나니,
만일 욕망이면 여실히 욕망인 줄 알고,
욕망을 여읜 마음이면 여실히 욕망을 여읜 마음인 줄 알며,
성내는 마음이면 여실히 성내는 마음인 줄 알고,
성냄을 여읜 마음이면 여실히 성냄을 여읜 마음인 줄 알며,
어리석은 마음이면 여실히 어리석은 마음인 줄 알고,
어리석음을 여읜 마음이면 여실히 어리석음을 여읜 마음인 줄 아느니라.
갈애(渴愛)의 마음이면 여실히 갈애의 마음인 줄 알고,
갈애를 여읜 마음이면 여실히 갈애를 여읜 마음인 줄 알며,
느낌[受]이 있는 마음이면 여실히 느낌이 있는 마음인 줄 알고,
느낌이 없는 마음이면 여실히 느낌이 없는 마음인 줄 알며,
거두어진 마음[攝心]이면 여실히 거두어진 마음인 줄 알고,
흩어진 마음[散心]이면 여실히 흩어진 마음인 줄 아느니라.
작은 마음이면 여실히 작은 마음인 줄 알고,
큰 마음이면 여실히 큰 마음인 줄 알며,
선정의 마음[定心]이면 여실히 선정의 마음인 줄 알고,
어지러운 마음이면 여실히 어지러운 마음인 줄 알며,
해탈한 마음이면 여실히 해탈한 마음인 줄 알고,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면 여실히 해탈하지 못한 마음인 줄 알며,
위 있는[有上] 마음이면 여실히 위 있는 마음인 줄 알고,
위없는[無上] 마음이면 여실히 위없는 마음인 줄 아느니라.
그러면서도 이 마음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마음은 마음의 모양이 아니고 불가사의하기 때문이고,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며, 자성을 여의기 때문이며, 자성은 남이 없기 때문이니라.
따라서 “나는 타심지증(他心智證)을 얻었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오직 살바야를 위한 마음만은 제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타심신통지증(他心神通智證)을 얻느니라.
이 보살은 숙명지증통(宿命智證通)으로써 한마음 내지 백 가지 마음을 기억하고 하루 내지 백일을 기억하며,
한 달 내지 백 달을 기억하고 일년 내지 백년을 기억하며,
한 겁 내지 백 겁, 헤아릴 수 없는 백 겁, 헤아릴 수 없는 천 겁, 헤아릴 수 없는 백천 겁 내지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 겁의 세상을 기억하면서,
“나는 그곳에서는 이러한 성씨와 이러한 이름으로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음식을 먹고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그러한 수명으로 그렇게 오래 살면서 그 같은 고통과 쾌락을 받았었다.
나는 그 안에서 죽어서 저곳에 태어났고 저곳에서 죽어서는 이곳에 태어났다.”라고 하느니라.
모양이 있고 인연이 있음을 알면서도 역시 이 숙명신통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숙명신통의 일과 자기의 몸을 모두 얻을 수 없음은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고, 자성을 여의기 때문이며, 자성은 남이 없기 때문이니라.
따라서 “나는 이 숙명신통이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오직 살바야를 위한 마음만은 제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숙명신통지증(宿命神通智證)을 얻느니라.
이 보살은 천안(天眼)으로써 중생들의 죽는 때와 태어나는 때ㆍ단정함과 누추함ㆍ나쁜 곳과 좋은 곳 또는 크고 작은 것을 보며 중생들이 업의 인연을 따름을 아느니라.
이 모든 중생은 몸의 나쁜 업을 성취하고 입의 나쁜 업을 성취하며 뜻의 나쁜 업을 성취한 까닭에 성인을 헐뜯고,
삿된 소견의 인연을 받는 까닭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지옥 가운데 태어남을 보느니라.
혹은 이 모든 중생들이 몸의 착한 업을 성취하고 입의 착한 업을 성취하며 뜻의 착한 업을 성취한 까닭에 성인을 헐뜯지 않고,
바른 소견의 인연을 받는 까닭에 목숨을 마치면 선도(善道)에 들어가고 천상에 태어난다고 아느니라.
그러면서도 이 천안신통에 집착하지 않으니, 천안신통의 일과 자기의 몸을 모두 얻을 수 없음은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고, 자성을 여의기 때문이며, 자성은 남이 없기 때문이니라.
따라서 “나는 이 천안신통을 얻었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오직 살바야를 위한 마음만은 제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천안신통지증(天眼神通智證)을 얻으며,
또한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 안의 중생들이 나고 죽고 나아가 천상에 나는 것도 보나니,
네 가지의 신통도 역시 그러하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누(漏)가 다하는 신통으로 비록 누진신통을 얻는다 하더라도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으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또한 다른 법에 의지하지도 않느니라.
그러면서도 이 누진신통에 집착하지 않으니, 누진신통의 일과 자기의 몸을 모두 얻을 수 없음은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고, 자성을 여의기 때문이며, 자성은 남이 없기 때문이니라.
따라서 “나는 누진신통을 얻었다.”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오직 살바야를 위한 마음만은 제하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누진신통지증(漏盡神通智證)을 얻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신통바라밀을 구족하며 신통바라밀을 구족한 뒤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더욱 증익(增益)시키느니라.
【논】 해석한다.
마치 큰 바다 속에는 갖가지의 보주(寶珠)가 있어서 어떤 것은 독을 없애고 어떤 것은 귀신을 막으며,
어떤 것은 병을 낫게 하고 어떤 것은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을 없애주며,
어떤 것은 사람들의 소원에 따라 모두 다 주는 등 이러한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보주가 있는 것처럼,
대승(大乘)의 바다 속에도 역시 그와 같아서 갖가지 보살의 보배가 있나니,
어떤 보살은 3악도(惡道)를 깨뜨리고, 어떤 보살은 3선도(善道)의 문을 열며,
어떤 보살은 다섯 가지의 눈[五眼]이 생기고, 어떤 보살은 신통바라밀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모든 보살은 기특하고 희유한 일을 하게 되나니,
이른바 허공 모양[空相]을 취함이 많으면서 땅 모양[地相]이 적으면 마음대로 땅을 움직일 수 있고, 한 몸이 여러 몸으로 되기도 하며 여러 몸이 한 몸으로 될 수가 있다.
허공 안에는 언제나 작은 티끌이 가득 차 있으므로 이 사람은 욕망을 여읜 복덕의 인연 때문에 모든 작은 티끌들을 모아 모든 몸을 만들어서 모두를 그와 비슷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비인(非人)이 공경할 때 이 욕망을 여읜 보살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변화하면서 모두 교화한다.”라고 한다.
전륜성왕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고 조그마한 복덕의 인연이 있는데도 모든 귀신을 오히려 부리게 되는데 하물며 욕망을 여의고 무량심(無量心)을 행하는 사람이겠는가?
또 이 마음의 모양은 안이거나 밖이거나 크거나 작거나 간에 머무른 데가 없으며 선정의 힘 때문에 그 마음은 조복되고 신속히 모든 몸에 두루하면서도 도로 되돌아옴도 역시 빠르다.
비유하건대 마치 천 개의 머리를 가진 용은 눈과 귀가 각각 2천 개요 천 개의 입이 있지만 마음은 일시에 작용하는 것과 같다.
용은 바로 거친 몸인데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좌선(坐禪)하는 사람의 일과 지니고 있는 세력은 불가사의하므로 하나의 몸이 한량없는 몸으로 되고 한량없는 몸이 한 몸으로 된다.”라고 한다.
돌과 벽의 걸림이 없다[石壁無礙]라는 것은,
돌과 벽에 다 허공 모양[虛空相]을 취하므로 작은 티끌들이 열리면서 마치 말뚝이 땅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물을 밟는다[履水]라는 것은,
땅 모양[地相]을 취함이 많기 때문에 물을 밟는 것이 마치 땅과 같아지고,
물 모양[水相]을 취함이 많기 때문에 땅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물과 같아지며,
불 모양[火相]을 취함이 많기 때문에 몸에서 불을 내뿜는다.
해와 달을 붙잡는다[捫摸日月] 함은,
신통의 불가사의한 힘 때문에 손으로 하여금 해와 달까지 미치게 하며,
화정(火定)에 들기 때문에 달이 차게 하지 못하고,
수정(水定)에 들기 때문에 해가 뜨겁게 하지 못한다.
【문】 이 신통의 힘은 이에 4선(禪) 안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는 어찌하여 범세(梵世)까지만 몸을 자유자재로 한다는 것인가?
【답】 이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범(梵)은 바로 첫 문이기 때문에 ‘범세’라고 말하면 곧 온갖 색계(色界)를 다 포함하게 된다.
또 세간 사람들은 모두가 범왕(梵王)을 귀히 여기어 세계의 주인[世界主]으로 삼기 때문이다.
또 이 보살은 욕계(欲界)의 산란한 마음에서 그 자유자재함을 나타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에 욕망을 여읜 인간들 안에 이르기까지 짓는 바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신통의 모양은 한량없고 수 없지만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약간의 비유를 들었다.
모든 외도(外道)는 이 신통에 있어서 두 가지의 잘못이 있다.
첫째는 나라는 마음을 일으켜,
“나는 이러한 일을 일으킬 수 있다.”라고 하면서 교만을 내며,
둘째는 이 신통에 집착하는 것이다.
마치 탐이 많은 사람이 보물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외도의 신통은 성인들의 신통에는 미치지 못한다.
보살은 이 신통력에 대하여 온갖 법은 자성이 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으며 단지 일체종지(一切種智)만을 염(念)할 뿐이다. 이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다.
그 밖의 5신통도 그와 같으며 마치 그 법을 분별할 때는 먼저 그의 모양을 설명하고 나중에는 모두가 공함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6신통(神通)의 그 밖의 이치는 「찬보살품(讚菩薩品)」 안에서 5신통(神通)의 이치에 대한 설명과 같다. 이 6신통으로써 널리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니,
이 때문에 “두루 갖추어 얻는다[具足得]”라고 말하며,
이와 같은 신통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더욱 증익(增益)시킨다.
【경】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단(檀)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薩婆若道]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畢竟空)이어서 간탐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시라(尸羅)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이어서 죄라거나 죄가 되지 않음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찬제(羼提)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이어서 성을 내지 않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비리야(毘利耶)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이어서 몸과 마음이 정진하고 게으르지 않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선(禪)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이어서 어지럽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반야(般若)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이어서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6바라밀에 머무르면서 살바야의 도를 청정하게 하나니, 필경공이기 때문이요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기 때문이며, 보시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기 때문이요 계율도 아니고 범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며, 참는 것도 아니고 성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요 정진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기 때문이며, 안정하지도 않고 어지럽지도 않기 때문이요 지혜롭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기 때문이니라.
이때 보살마하살은 보시하거나 보시하지 않는 일ㆍ계율을 지니거나 범하는 일ㆍ인욕하거나 성 내는 일ㆍ정진과 게으름ㆍ마음이 안정하거나 어지러운 일ㆍ지혜롭거나 어리석은 일을 분별하지 않으며, 헐뜯음과 해함과 손해와 경만함 그리고 공경도 분별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사리불아, 생함이 없는 법[無生法] 안에서는 헐뜯음을 받는 이도 없고, 해함을 받는 이도 없으며, 경만과 공경을 받는 이도 없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와 같은 모든 공덕을 얻느니라.
성문이나 벽지불로서는 얻을 수 없는 이러한 공덕이 구족되어서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며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느니라.
【논】 해석한다.
이 보살은 처음 뜻을 일으켜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점차로 그 밖의 공덕도 행하나니, 이른바 단바라밀 등이다.
보살은 단바라밀에 머물러서 살바야의 도를 닦고 다스리며, 온갖 법은 필경공인 줄 관찰하면서 간탐하는 마음을 내지 않나니,
이 두 가지의 일 때문에 살바야의 도를 여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필경공 가운데는 간탐이 없기 때문이다.
간탐의 근본이 끊어졌기 때문에 단바라밀을 두루 갖추게 되고,
단바라밀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장엄하며,
나아가 반야바라밀은 필경공이기 때문에 항상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시되,
“온갖 법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보시도 없고 받는 이도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지혜롭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문】 만일 이와 같이 6바라밀을 관하고 행하면 어떠한 이익을 얻는가?
【답】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되,
“이 보살은 베풀어 주는 바가 있다거나 베풀어 주는 바가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베풂이 있다고 생각하면 허망한 법 안에 들어가고 또 보시에 집착하여 마음에 교만을 내게 된다.
만일 베풂이 없다고 생각하면 곧 삿된 소견 안에 떨어진다.”라고 하셨다.
이 보시에 대한 논의(論議)는 바로 부처님 법 가운데서 첫문인데, 어떻게 없다거나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어리석음이 있다거나 지혜로움이 있다고 하겠는가?
이 사람은 마치 금강산(金剛山)과 같아서 4면에서 바람이 일어나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이 보살은 그때 설령 욕설을 하거나 찬탄하거나 간에 마음에는 달라짐이 없다.
왜냐하면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되,
“생김이 없는 법 안에서는 욕하는 이도 없고 해치는 이도 없으며 공경하는 이도 없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문이나 벽지불에게 어떤 이가 해를 끼치면 자비의 마음이 깊지 못하기 때문에 그만 잠자코 있거나 또는 멀리 떠나버리게 되지만,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인자한 마음을 더욱 더하여 그를 사랑하기를 마치 아들처럼 여기면서 방편을 부려 제도하게 된다.
이 때문에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게 능히 온갖 중생들을 교화하나니, 인욕과 자비의 방편이 깊기 때문이다.
원을 따르고 청정한 업의 인연 때문에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며, 이 법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서 일체종지를 얻게 된다.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온갖 중생 가운데에 평등한 마음[等心]을 내고,
온갖 중생 가운데서 평등한 마음을 낸 뒤에는 온갖 법들의 평등함을 얻으며,
온갖 법들의 평등함을 얻은 뒤에는 온갖 중생들을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에 세우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현세에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호념(護念)을 받고 또한 온갖 보살과 온갖 성문과 벽지불의 호념도 받나니,
이 보살은 태어나는 곳마다 눈으로는 끝내 좋지 못한 모양을 보지 않으며, 나아가 뜻으로는 좋지 못한 법을 깨닫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줄지 않게 하느니라.
【논】 해석한다.
부처님께서 만일 모든 보살의 모양을 자세히 말씀하려 한다면 겁(劫)이 다 하여도 다하지 못한다.
지금 부처님은 이 품(品)의 마지막에서 그 모양을 간략하게 말씀하시는데 이 모양만으로도 족히 모든 보살로서의 통상의 행한 바가 된다 하리니,
이른바 큰 자비가 있기 때문이고 처음부터 온갖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이 평등한 마음으로 중생을 관찰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고 온갖 법의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 때문에 온갖 중생들에 대하여 평등한 마음을 내고 이 평등한 마음을 얻은 뒤에는 온갖 모든 법의 평등함을 얻는다.
온갖 법이 평등하다 함은 앞에서 중생의 평등함[衆生等]과 법의 평등함[法等]에 대한 이치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제 다시 설명해 보면 4생(生)의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면서 일심으로 이익되게 하려 함을 중생의 평등이라 하며,
4념처(念處)를 관찰하면서도 역시 몸을 보지 않는 것을 법의 평등이라 한다.
4정근(正勤)의 모든 네 가지의 법도 역시 그와 같다.
또 5도(道) 안의 중생들이 모두가 무상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데에 빠지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을 중생의 평등이라 하며,
이 신근(信根) 등의 5근(根)과 또는 5신통을 행하면서 일심으로 이 중생들을 제도하려 하면 이것을 법의 평등이라 한다.
또 중생들 가운데서 인욕과 자비 등의 복을 행하면 공덕이 한량없다.
공덕이 한량없기 때문에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에 신속히 선정을 얻으며,
선정을 닦기 때문에 마음이 뜻대로 조복되고,
마음이 뜻대로 조복되기 때문에 세간의 장점ㆍ단점[長短]과 남자ㆍ여자와 희고 검음[白黑] 등을 깨뜨리고 한 모양의 법에 들어가니, 이른바 모양 없는 것[無相]이다.
이 법의 평등을 얻은 뒤에는 온갖 중생들로 하여금 이 법의 평등을 얻게 한다.
이 보살은 이 두 가지의 평등을 얻고는 한량없는 복덕과 지헤를 성취하기 때문에 현세의 과보를 얻나니,
모든 부처님의 호념(護念)을 받는 것과 그 밖의 사람의 호념을 받는 것이다.
애착하면서 호념한다면 이는 모두가 허망하다.
오직 모든 부처님의 호념만이 진실한 호념일 뿐이니, 애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모든 부처님조차도 오히려 호념하시는데 하물며 성문이나 벽지불이나 보살이겠는가?
성문이나 벽지불로서 번뇌[結]를 끊은 이조차도 오히려 사랑하고 호념하는데 하물며 범부로서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한 이겠는가?
보살의 복덕과 인연으로써 생겨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금세(今世)의 과보를 얻게 되며 후세에도 태어나는 곳마다
눈으로는 끝내 악색(惡色)을 보지 않는다.
악색이라 함은 이른바 괴로운 느낌[苦受]을 내는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법(法)이며, 나아가 근심을 생기게 하는 마음이다.
마치 6욕천(欲天)이 6정(情)으로 대하는 깨끗하고 묘한 5욕(欲)에 의해 뜻대로 환희하는 것과 같다.
중생이 조그마한 복덕을 심어서 천상에 나는 것조차도 이러하는데 하물며 보살의 복덕과 진실한 지혜가 한량없고 끝이 없어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그 밖의 모든 성현들의 호념을 받는 것이겠는가?
【경】 이 「반야바라밀품(般若波羅蜜品)」을 말씀하실 때 3백의 비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은 옷을 부처님께 올리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다.
부처님이 그때 빙그레 미소 지으시자 갖가지 빛의 광명이 입 안에서 나왔다. 그
때 혜명(慧命) 아난(阿難)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매만지고 합장한 채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웃으시는지요?”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3백의 비구들은 이로부터 61겁을 지나면 부처님이 되리니, 그 명호는 모두 대상불(大相佛)이라 하리라.
그리고 이 3백의 비구는 이 몸을 버린 뒤에는 아촉불(阿閦佛)의 나라에 가 날 것이며, 나아가 이 6만의 욕계 천자(天子)들은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어 미륵불(彌勒佛)의 법 안에서 출가하여 부처님의 도를 행하게 되리라.”
이때 부처님의 위신력 때문에 이 세간의 사부대중들은 시방의 방편에서 각각 천 분의 부처님을 뵈었으니, 이 시방의 세계는 장엄하고 청정하여서 이 사바(裟婆)세계로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때 1만의 사람들은 원을 세우며 말하기를,
“저희들은 청정한 원(願)과 행(行)을 닦겠사오니 이 청정한 원과 행 때문에 장차 저 부처님 세계에 태어나게 해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그때 부처님은 이 선남자들의 깊은 마음을 아시고 다시 빙그레 미소 지으시자 갖가지 빛의 광명이 입 속에서부터 나왔다.
그러자 아난이 의복을 매만지고 합장하며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미소 지으시는지요?”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이 1만의 사람들을 보았느냐?”
아난이 말씀드렸다.
“예, 보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1만의 사람들은 여기서 목숨을 마치면 저 세계에 태어나서 끝내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을 것이며 뒤에는 부처님이 되리니, 모두 명호를 장엄왕불(莊嚴王佛)이라 하리라.”
【논】
【문】 마치 부처님의 결계(結戒)와 같아서 비구의 3의(衣)는 더 모자라면 안 되는데 이 비구들은 무엇 때문에 시라(尸羅)바라밀을 깨뜨리면서 단(檀)바라밀을 짓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12년을 지난 뒤에야 계율을 결성(結成)하셨으니, 이 비구들이 옷을 보시할 때는 아직 계율을 결정하기 전이다.”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비구들은 옷을 청정하게 보시할 마음이 있어서 당연히 받으셔야 했으니, 이 때문에 보시한 것이다.”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모든 비구들은 아는 일이 많아서 또한 능히 일을 만나 지체하지 않고 했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모든 보살이 단바라밀을 행한 모든 공덕과 세력은 한량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과 상응하게 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마음에 크게 뛸 듯이 기뻐하면서 곧 옷을 보시한 것일 뿐 달리 다른 뜻이 없었으므로 계율은 깨뜨린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법이 필경공(畢竟空)인지라 집착함이 없이 법애(法愛)를 끊었다.
곧 세제(世諦) 때문에 결계한 것일 뿐 제일의(第一義)가 아님을 알았다.
이 비구들은 부처님으로부터 으뜸가는 이치와 보시 등의 6바라밀을 들었고 ,또 모든 보살들은 갖가지의 큰 위력으로 중생들을 가엾이 여긴다 함을 들었으면서도 모든 번뇌에 가리어져서 이 보살의 공덕을 얻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어 중생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뜻을 내었으니, 이 때문에 옷을 보시한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탐욕과 성냄과 두려움과 삿된 소견과 공경하지 않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면서 계율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것을 파계(破戒)라 하겠지만 이 모든 비구들은 도무지 이런 마음은 없었나니, 이 때문에 파계의 죄는 없다.
【문】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미소 지으셨는가?
【답】 웃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재주를 부리면서 풍악을 울리는 것을 보고서 웃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속으로는 성을 내고 있으면서 웃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교만 때문에 웃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웃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일을 다 마친 뒤에 기뻐서 웃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짐짓 웃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거짓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착한 체하기 위하여 웃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희유한 일을 보고서 웃기도 한다.
부처님은 지금 비구들이 한 벌씩의 가사(袈裟)를 보시한 까닭에 미래 세상 동안에 불사(佛事)를 성취할 것을 보시고는 그것이 희유한 일이라 이 때문에 미소 지으신 것이다.
【문】 아난은 무엇 때문에 언제나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실 때마다 물었으며 그 밖의 다른 비구들은 묻지 않는가?
【답】 이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을 친히 가까이하지 않고 또 공경하면서 어려워하는 마음이 많기 때문에 감히 묻지 않았다.
아난은 사람들의 상(相)을 잘 알고 모든 비구들의 뜻을 알며 또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신 것을 보고 의심이 있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중생의 모양도 없고 법의 모양도 없으며, 삼계(三界)는 마치 꿈과 같고 환과 같은 줄 아시는데 이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부처님을 웃게 하였을까?
부처님은 마치 수미산이고 대지(大地)이며 대해(大海)와 같아서 조그마한 인연으로써는 움직이지 못한다.”라고 했다.
이 때문에 미소 지으시는 까닭을 물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업의 인연과 과보는 서로 이어져 불가사의하니, 이 3백의 비구들은 이로부터 61겁 후에는 부처님이 되어 모두의 명호를 대상(大相)[보시는 손으로 물건을 들고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모양(相)을 삼음으로 그에 따라 명호를 붙였다.]이라 하리라.”라고 하셨으니,
61겁 동안에 이 사람들은 근기가 영리하고 부처님의 설법을 만나 반야바라밀과 상응할 것이므로 이 사람들은 신속히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비구들은 아직 천안(天眼)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의심하면서 어디에 태어날 것인지를 모르며, 모든 공덕을 쌓지도 못한 채 도(道)에 이르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이 몸을 버리고는 아촉불의 세계에 가 날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6만의 욕계 천자들은 틀림없이 전생에 복덕과 인연을 함께했기 때문에 3백의 비구들과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것이며, 이들은 미륵(彌勒)이 제도해야 할 이들이었으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미륵 때에 출가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금 부처님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아촉불의 세계에 태어난다.”라고 수기하셨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다 함께 모든 부처님의 청정한 세계를 보려고 했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대중으로 하여금 시방의 각 방면에서 천 분의 부처님을 뵙게 한 것이다.
이 사부대중은 이 청정하고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았고, 모든 부처님의 몸은 수미산보다 더 크며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보살과 대중들에게 에워싸였음을 보았다.
범음(梵音)의 소리가 한량없고 끝이 없는 세계까지 사무쳤으므로 저마다 그들의 몸을 천박하게 여기면서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을 구하기 위하여 저 부처님의 세계에 가 나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니,
마치 청정한 세계의 행원(行願)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미소 지으시는 인연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1만의 사람은 여기서 목숨을 마치면 저 나라에 태어나리니,
그 나라에 태어남에 따라 행업(行業)의 인연이 두루 갖추어지고 이 세간에서 깊고 두터운 한량없는 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끝내 부처님을 여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고서 발심한 까닭에 모두의 명호를 장엄왕불(莊嚴王佛)이라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