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자 '밀 거래'의 부담은 점점 더 커졌다.
아이들은 떼죽음을 당했고 어른들은 땀에 젖은 빵을 먹었다.
기원전 8500년 여리고의 평범한 사람은
기원전 9500년이나 기원전 1300년의 사람에 비해 더욱 힘들게 살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세대는 전 세대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살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여기 저기 작은 개선이 일어났을 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일련의 '개선'이 합쳐져서 농부들의 어깨에 더 무거운 짐을 얹혔다.
각각의 개선은 삶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치명적인 계산오류를 범했을까?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이유와 동일한 이융서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려을 갖고 잇지 않았다.
추가로 노동을 더 하려고 결정할 대, 가령 씨를 표면에 뿌리기보다 괭이로 당을파기로 결정할 때,
서람들은 이렇게 생각햇다.
'이러면 일을 더 해야하는 건 사실이지만, 수확량이 많이 능러날 거야,
흉년 걱정을 할 필요가 더 이상 없을 거야, 아이들이 배가 고픈 채로 잠자리에 드는 일도 없을 거야,'
그것은 이치에 닿았다.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삶이 더 나아지겠지.' 계획은 그랬다.
계획의 첫 단계는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보지 못했다
추가로 생산된 밀은 숫자가 늘어난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초기 농부들이 예측하지 못한 것이 또 있었다.
아이들에게 모유를 덜 먹이고 죽을 더 많이 먹이면 면역력이 약해져
영구 정착촌이 점염병의 온상이 되리란 사실이었다.
그들은 또한 단일 식량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가뭄에 더욱 취약해진다는 사실을 내다보지 못했다.
또한 풍념에 넘쳐나는 창고는 도둠과 적을 유혹할 것이며
이를 방비하려면 성벽을 쌓고 보초를 서는 수뱎에 없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계획이 빗나갔을 때 농경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작은 변화가 축적되어 사회를 바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고
그때 쯤이면 자신들이 과거에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 때문에 돌아갈 다리가 불타버렸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쟁기질을 도입함으로써 마음의 인구가 1백명에서 110명으로 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중 자신들이 자발적올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이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열 명이 있었겠는가?
돌아갈 길은 없었다. 덫에 딱 걸리고 말았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셈이었고 이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 중 상당수는
돈을 많이 벌어 35세에 은퇘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수 회사들에 들어가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면 거액의 주책융자, 학교에 다니는 자녀,
적어도 두 대의 차가 있어야 하는 교외의 집,
정말 좋은 와인과 멋진 해외 휴가가 없다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들이 뭘 어떻게 할까?
뿌리채소나 캐는 삶으로 돌아갈까?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서 노예 같은 노동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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