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절사"(彰節祠)에서 나와 "영모전"(永慕殿)을 가려 했는데 그만 길을 못찾았다.
내려오면서 이정표를 기웃거렸는데 "영모전"이란 표시가 아무리 살펴도 보이지 않는다.
내려오다 보니 "영월 경찰서"까지 와 버렸다.
"영모전"(永慕殿)을 포기하고 "관풍헌"(觀風軒)으로 가기로 한다.
봄이나 가을에 다시 한번 올 생각을 먹었기 때문이다.
"영월부 관아"(寧越府 官衙 : 관풍헌) 외삼문(外三門)
관아(官衙)안에 웬 "약사전"(藥師殿)이란 엉뚱한 현판이 있다.
현재는 "관풍헌(觀風軒)이 "조계종 보덕사" 소유의 "포교당"(布敎堂)이라고 한다.
건물이 없어지고 현대식 빌딩이 들어선 것은 아니지만 뭔가 국가의 유물관리가 허술한듯하다.
관풍헌(觀風軒)은 영월객사의 동헌(東軒)으로 조선 태조 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홍수를 피해 이곳으로 이어(移御)하여 머무르다가 1457년(세조 3) 10월 24일 사약을 받고 승하(昇遐)하였다.
1998년 전면 보수를 하였으며, 현재는 조계종 보덕사 소유로 포교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건물 뒤로도 넓은 범위의 땅이 "영월부 관아"(寧越府 官衙)였는데 어찌하여 민가(民家)가 들어었는지,,,
넓은 마당 한켠에 "자규루"(子規樓)가 홀로 떨어져 있다.
앞뒤의 현판이 다르게 씌어져 있다.
한쪽은 "매죽루"(梅竹樓)라고 씌어 있고, 반대쪽에는 "자규루"(子規樓)라고 씌어 있다.
근래에 새로 지어 내부의 단청(丹靑)이 무척 화려하고 환하다.
"자규루"(子規樓) "상량문"(上梁文)
단종어제 자규사(端宗御製 子規詞)
月白夜蜀魂啾 (월백야촉혼추)
含愁情依樓頭 (함수정의루두)
爾啼悲我聞苦 (이제비아문고)
無爾聲無我愁 (무이성무아수)
寄語世上苦榮人 (기어세상고영인)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신막등춘삼월자규루)
역(譯)
달 밝은 밤 두견 杜鵑새 울 제
시름 못 잊어 樓 머리에 기대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것을
世上에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春三月 子規樓에는 오르지 마오
"단종"의 자규시(子規詩)는 또 있다.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窮恨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聲斷曉岺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血淚春谷落花紅 혈루춘곡낙화홍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何奈愁人耳獨聰 하나수인이독총
譯
한마리 원한 맺힌 작은 새 궁중에서 나온 뒤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깊은 산속 헤맨다.
밤이 가고 또 밤이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해가 가고 또 해가 와도 한은 끝도 없구나.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 걸친 달빛만 희고
피눈물 뿌린듯 봄 골짜기에 떨어지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듣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 귀만 밝아 모두 들리는가.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단종(端宗)이 지은 "자규시"(子規詩)는 모두 봄의 장면이다.
그리고 밤에 새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단종"은 봄이 아닌 여름에 이곳에 왔다.
그러면 자규(子規)라는 새는 어떤 새일까?
국어사전에는 뻐꾸기와 비슷하게 생긴 "두견잇과에 속한 새"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추가 설명으로 "두견새 우는 밤에……"라고 읊은
시(詩)에 등장하는 두견새(울음소리)는 야행성인 "소쩍새"를 혼동한 것이다.
"두견새"는 주로 늦은 봄의 낮에 큰소리로 운다.
그래서 그 시기에 피는 진달래를 다른 이름으로 "두견화"라고도 부른다.
흔히들 봄날 산에서 "홀딱 벗고"!라고 큰소리로 외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 분은 이 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두견새(검은등뻐꾸기) 인터넷에서 발췌.
"홀딱 벗고 새"의 원래 이름은"검은등 뻐꾸기"다.
희귀종 봄,여름새이다.
이 "홀딱벗고 새"에 얽힌 전설도 있다.
아래는 "원성스님"의 글이다.
"홀딱 벗고 새"의 전설
홀딱 벗고 마음을 가듬어라.
홀딱 벗고 이상도 던져 버리고
홀딱 벗고 망상도 지워 버리고
홀딱 벗고 욕심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홀딱 벗고 정신차려라.
홀딱 벗고 열심히 공부하거라.
홀딱 벗고 반드시 성불해야 해
홀딱 벗고 나처럼 되지 말고
홀딱 벗고 홀딱 벗고~~
아득한 옛적부터 들려오는 소리.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않고 들려오는 소리.
강당(講堂)으로 향하는 길목에 어김없이 들리는 소리.
온종일 가슴 한켠 메아리치는 "홀딱벗고 새" 소리.
공부는 하지않고 게으름만 피우다가 세상을 떠난
스님이 환생하였다는 전설의 새.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더 열심히 공부해서
이번 생에는 반드시 해탈하라고 목이 터져라 노래한다.
홀딱 벗고 홀딱 벗고 모든 상념을
홀딱 벗고...
그러면 "단종"이 들은 새소리는 어떤 새의 소리일까?
한밤에 슬프게 우는 "소쩍새"(또는 접동새라고도 한다)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 새는 주로 밤에 울며, "솟적다, 솟적다" 또는 "솟쩍, 솟쩍"소리를 반복해서 낸다.
전설에 의하면 그 해에 "솟쩍", "솟쩍"하고 울면 흉년이 들고,
"솟적다", "솟적다"하고 울면 "솥이 작으니 큰 솥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풍년이 든다고 한다.
"소쩍새"(접동새) 인터넷에서 발췌.
이 새는 주로 밤에 운다.
시인 "김소월"은 "접동새"를 이렇게 표현했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랩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갑작스러운 물난리로 "단종"은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다.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끓는 이 하소연 듣지 못하는가" 하면서
세상을 원망했지만 민심이 그리 무심하지않아 단종 복위의 여론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예나 지금이나 정통성 없는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은 공포정치다.
정적을 제거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내게 도전하는 자의 끝은 이렇다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 주기위해 무자비한 숙청을 이어간다.
"관풍헌"으로 옮겨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단종"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경상도 "순흥"(順興)으로 유배된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종 복위 계획이 실패하여 관련자들이 참수되고,
이 사건으로 인해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봉된다.
결국 단종도 자규루에 오르는 것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계속되는 복위 운동의 불씨를 없애자는 "정인지", "한명회" 등의 진언으로 "세조"는 단종을 처형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세조의 명을 받아 사약을 가지고 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이
사형을 집행한 당시의 상황은 한참 뒤에 씌여진 "숙종실록"의 기록에 나온다.
"숙종실록" 25년 1월 2일 자에
"단종대왕이 영월에 계실 적에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고을에 도착하여 머뭇거리면서 들어가지 못하다가
마침내 입시(入侍)했을 때 단종대왕께서는 관복을 갖추고 마루로 나오시어
온 이유를 하문하셨으나, "왕방연"은 차마 대답을 못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말로는
왕방연이 머뭇거리자, 단종을 모시던 자가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조였다고도 하기도 하고,
단종이 관졸의 활을 빼앗아 스스로 목을 조였다고도 한다.
어떤 경우든 세조가 사약을 내린 것은 사실이고,
이로 인해 단종은 유배 온 지 4개월 만인
1457년 10월 24일 유시(음력)에 단종의 나이 17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단종의 죽음에 대해 "세조실록"은
"송현수"(단종의 장인)가 교형(絞刑)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노산군"이
스스로 목을 매어서 죽어, 예를 갖춰 장사를 지냈다".
라고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즉 세조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는 변명이다.
이제 동강(東江)쪽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