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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불교사 >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33)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미국에 도래하는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동양의 대안적 영성을 찾아 나섰던 이래로 150년간 지속되었던 구도역정의 종착지였다. 유럽계 지식인 미국인들의 내밀한 관심사로부터 이른바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글 | 김형근
1970년대의 미주에서 한국불교 (2)
숭산.법안스님(왼쪽 앉은 스님)
지난 호에서 기술한 것처럼 1970년대는 미주에 한국불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고, 미주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일들도 많이 있었다. 또 지금까지 논란이 되는 부분도 있다.
1970년대가 본격적인 해외포교의 시작이었지만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종단인 조계종을 비롯하여, 태고종, 천태종, 보문종 등 어느 종단도 해외포교에서 종단적인 행정지원, 재정지원, 인적지원이 없었다. 공식적인 것은 1974년 정정달 스님이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에서 환계식을 하고 주지 직을 물러나 공석이 된 후, 관음사 신도들이 조계종단에 스님을 파송해 달라고 요청을 해서 1975년 도안스님이 총무원장 임명장을 가지고 온 것이다. “이것이 조계종단이 1970년대부터 수 십년 간 미주한국불교계에 한 공식적인 것의 전부이다”고 도안스님은 생전에 말했었다 . 당시의 조계종단은 미국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스님은 서경보 스님이 유일했을 것이다. 또한 해외포교에 대한 예산도 지원할 재정도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해외포교를 지원할 여력이 전혀 없던 상태였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 온 모든 스님들은 개인 역량으로 미국에 도착했다. 미국에 온 스님들도 해외포교 경험도 없고, 언어장애와 재정이 없어서 생존이 급선무였다. 준비가 안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하던 그대로 가정집을 세를 얻어 임시 법당을 만들어 법회를 하였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곧 건물을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이 점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L.A. 관음사
사찰에서 무엇을 하였는가? 역할과 한계
1970년대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본격적인 이민 바람이 분 시기였다. 당시 한국은 살기가 어려운 시기이므로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이전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의사 등 전문가들은 별천지인 미국으로 좀 더 나은 환경을 찾아 무작정 온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미국을 방문했던 사람도 거의 없었고, 인터넷이 없던 세상이라 이민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정확한 정보도 별로 없었다. 또한 미국인들을 비롯해서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과 언어소통이 되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 온 것도 아니고, 태평양 건너 이민을 온 것이니 의지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사찰이나 교회, 성당 등 종교단체로 대부분 나가게 되었다. 종교단체에 가서 교제도 하고, 정보도 얻고 도움도 받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70년대부터 한인사회는 80년대, 90년대 까지 종교단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종교단체들은 종교집회를 하면서 신도들의 사교장이었고, 사업과 직업,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에 관한 정보교류 장소였고, 어린이들의 한국어 교육을 하였다. 미주의 한국 사찰들도 대체로 이러한 역할을 하였지만 타종교에 비해 자녀들의 한국어 교육을 하는 곳도 별로 없었고, 타종교에 비해 신도들의 숫자가 적었고, 의사,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인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 불교신자였던 사람들이 타종교 단체로 가는 사람도 많았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경향은 강화되었다. 개종자들이나 무종교 사람들이 이민자들의 울타리 역할을 불교보다 타종교가 잘한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간 것이다. 필자가 1986년 뉴욕 원각사에서 기거 하면서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법안스님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당시에 뉴욕시에는 불교인 공인회계사가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 공인회계사에게 세금관련 서류를 맡기고 있었다.
도안스님
고성스님
이민 초기에는 우선 정착이 중요하므로 이민자들에게는 종교 고유 기능보다도 이런 종교외 기능이 필요했다. 또 관혼상제에 대한 신도들의 요구에도 부응해야 했다. 이 외에도 장기적으로 사찰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설정을 해야 하고, 타민족 불교는 어떻게 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한국 불교는 해외포교에 대한 경험도 없었고, 연구도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한국에서 하던 법회를 그대로 할 뿐이었다. 미국 현지인 포교는 고성스님, 숭산스님, 삼우스님 이렇게 세 스님이 하게 되었고 대부분은 한국인 이민자들 대상이었다. 타민족 사찰과 교류도 거의 없었다.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가질 사정이 아니었던 것 같다. 초기 한국불교의 지도자였던 로스 엔젤레스 도안스님은 미국에 오기 전에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옹스님을 찾아뵙고 미국에서의 포교 방향에 대해 문의하였다고 한다. 서옹스님은 일제시대에 일본 유학을 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서옹스님은 이에 대하여 “문화적인 방향으로 포교를 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도안스님은 미국에서 한국문화를 알리는 것에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 현재의 장소로 이사를 한 후에는 ‘한국불교문화원 Korean Buddhist Culture center'라는 간판을 건물 한 복판에 내걸었다.
도안 스님은 이 외에도 장기적으로 관점으로 신자들의 묘지를 확보하고, 방송국으로부터 시간을 렌트해서 불교방송도 하는 등 다른 사찰과 차별적인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혜안이 있었기 때문에 도안스님은 이후 한국불교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된다.
이 시점에 타민족 불교들 중에 일본 조동종 스즈킨 순륜과 마에즈미 스님, 티베트 쵸감 트룽파, 중국인 선화 선사 등은 미국사회를 향한 커다란 행보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 1970년대는 미국 주류 사회에서는 불교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았다. 그래서 동양에서 온 선사들인 스즈키 순류를 비롯한 일본스님들, 중국 선화스님, 티베트 스님들과 쵸감 트룽파 린포체 그리고 숭산스님에게 미국의 젊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영어를 잘 구사할 줄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선화스님, 숭산스님, 티베트 스님들처럼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없는 스님들도 있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동양에서 온 선사라는 것에 당시 미국인들은 큰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장기적으로 미국인 포교뿐만 아니라 현지에 정착하려면 영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준비하여야 하는데 대부분의 스님들은 학교에 가서 영어를 배울 여건이 되지 않았다. 이 시기에 학교를 다닌 스님은 숭산스님, 법안스님, 무착스님 외에는 거의 없었다.
이 시기에 몇 가지 논란 ?
최초의 미주한국사찰은 어느 사찰인가?
어느 사찰이 미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사찰인가?
미국은 동부와 서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서부는 다시 로스엔젤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남가주,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 등 지역의 북가주 지역이 있고,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시애틀.타코마 지역과 오레곤주 지역이 있다. 동부는 뉴욕,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그리고 남부에 조오지아와 플로리다이다. 여기에 중부의 시카고, 디트로이, 미네소타와 덴버가 있고, 이외에 텍사스, 하와이가 미국이다. 카나다는 토론토와 밴쿠우버가 있는데 이 미국과 카나다 합해서 미주한국사찰 거점 지역이 된다.멕시코는 매우 미미하다.
1989년 미주현대불교가 발행되기 전까지 미주한국불교 사찰에 관해 정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았다. 누구도 자세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미주현대불교가 발행되면서 비로소 정확하게 파악이 되기 시작한다. 필자는 발행되기 전에 미주의 중요한 지역을 전부 방문하였다. 당시에 없던 사찰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창간호에 삼보사를 소개하면서 미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라고 보도하였다. 당시에 삼보사 신도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미주현대불교발행 이후에는 전미주에 걸쳐 삼보사는 최초의 미주한국사찰이라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필자는 미주현대불교 발행할 때 서경보 스님의 ‘조계선원’이나 고성스님의 ‘혜능선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에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불타기전에 삼보사
삼보사 공사를 하는 이한상 거사
삼보사와 재미홍법원간의 ‘최초’ 논쟁
필자는 1987년 가을에 버클리대학교에서 열린 수 십개국에서 종교학자, 스님, 목사, 신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라는 대규모 학술행사가 있었다. 그 행사를 마치고 박성배 교수와 함께 삼보사를 방문하였다. 당시에 이 한상 거사는 작고하여 없었고, 대신 부인 상품화 보살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박성배 교수와 상품화 보살님과의 미국한국 최초 사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아래는 그 대화의 요지이다.
“숭산스님이 미국 최초의 한국 사찰을 프로비덴스에 있는 재미홍법원이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삼보사는 개원하기 전에 미리 터를 사고, 또 건물 공사를 하여 법당, 범종각, 요사채 등을 구비하고 한국에서 3분 스님을 초청하여 여법하게 개원하였다. 그러나 숭산스님은 그냥 월세로 집을 얻어서 시작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큰 차이가 난다. 그래서 그 주장에 동의할 수가 없다” 상품화 보살의 주장이다.
숭산스님 미국 입국과 프로비덴스 선원
1972년 4월 미국 입국, 9월 현판식, 10월 22일 Providence Zen Center 개원
이한상 거사 미국 입국과 삼보사 개원
1971년 7월 미국 입국, 1973년 1월 28일 삼보사 낙성식
이에 대한 숭산스님의 주장은 ‘천강에 비친 달’이라는 책 113페이지에 나온다. 이 책은 1987년에 출판되었는데 저자에 숭산행원, 편역에 한정섭, 김호성, 발행인에 대한불교조계종 화계사와 재미홍법원관음선종회로 되어있다. 숭산스님의 법어와 저서 설법을 한정섭씨와 김호성씨가 편집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내용에 있었서는 년도와 사실 관계에 정확하지 못한 점들이 있다. 이 책에 ‘재미홍법원과 삼보사’라는 소제목이 있고 그에 관한 내용이 있다.
“정달스님의 삼보사 낙성식이 1973년도이고, 우리 홍법원이 정식으로 발족된 것이 1972년 9월에 현판식을 했다.
삼보사는 우리보다 훨씬 크게 덕산거사가 지어서 1973년 1월 25일엔가 낙성을 하였으니까 우리보다 몇 개월 늦다.” 라고 되어 있다.
숭산스님의 주장대로 개원 날짜로만 따지면 삼보사보다 프로비덴스 선원이 3개월 먼저 개원을 했다. 그러나 당시 상품화 보살 주장대로 삼보사는 몬트레이에 땅을 구입하고, 수개월에 걸쳐 법당, 요사 채, 범종각 등을 지어서 개원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은 그 차이가 있다. 숭산스님이 미국에 먼저 온 것도 아니고, 삼보사보다 1년 먼저 개원한 것도 아니다, 숭산스님 미국에 오기 전부터 절을 건립하기 위해 땅을 매입하고, 오랜 기간 건물 공사를 하면서 준비를 한 삼보사를 제치고 프로비덴스 선원이 먼저라고 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 논리대로 하면 ‘조계선원’이나 ‘혜능선원’이 미주최초의 사찰이어야 한다.
필자는 조계선원과 혜능선원에 대해 창간 후 몇 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서경보 스님은 미국에 입국할 때 관광비자가 아니고, 유학생 비자인 F1로 온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에 도착이후 공부를 하면서도 스님으로서 미국인 포교와 선 지도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스님에 관한 언론보도와 스님 자료집에 보이는 사진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숭산 스님
혜능선원, 가운데 서경보 스님
서경보스님과 미국인들
미주최초의 사찰에 관한 것은 한국스님으로 미국에 가장 먼저 온 서경보 스님과 관련이 있다. 이에 관한 언급은 1964년에 뉴욕으로 들어와 196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조계선원’이라고 한 것이 기록에 보이는 첫 번째 사찰이다. 이에 관한 자료는 사진이 ‘세계불교법왕청 초대법왕 일붕서경보실록-1914년 ~ 1992년)’에 사진이 있는데 이 실록을 편찬한 사람들은 사진 설명에 “서경보 큰스님께서 25년전 미주에 불교를 개척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시민에게 불교와 선을 지도하고 있다.”라고 되어있다. 연도와 장소, 조계선원에 관한 기록은 없다. 또 1982년도에 호암출판사에서 발행한 ‘일붕 서경보 미주선풍월’에 실린 서경보 스님의 연보에도 미국에서의 조계선원‘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 기록이 없는 것은 기록자들과 서경보 스님이이 부분의 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서경보 스님으로부터 직접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제자인 백림사 주지 혜성스님도 있고, 2004년에 뉴욕에서 열린 ’미주전법 40주년 기념행사‘에서 필라델피아에서 1960년대부터 거주했던 사람들이 나와 ’조계선원‘에 다녔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 곳은 아파트였는데 아파트 거실이 ’조계선원‘ 법당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 분들과 함께 서경보스님이 살던 아파트를 찾아서 사진을 찍고 주소를 기록해 두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조계선원이 있었다면 스님의 거처의 거실이 법당이었을 것이다. 스님의 거처 거실을 법당으로 하여 스님과 소수의 신도들이 법회를 한 것이다. 미주한국불교 역사에 처음 등장한 사찰이름이지만 그 기간이 너무 짧고, 서경보 스님도 이 사찰에 대한 언급이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주한국불교 최초의 사찰에서 제외되었다.
그 이후에 나타나는 이름이 ‘혜능선원’이다. 이 ‘혜능선원’은 메릴랜드 주에서 ‘한국사’를 건립한 고성스님이 펜실바니아 이스톤에 1971년 설립한 것이다. 미국에서 한국 스님이 건립하였는데 이름이 중국 출신인 ‘혜능’에서 따와 ‘혜능선원’이다. 그 당시에 한국불교계가 오직 ‘간화선’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처음에는 ‘혜능선원’이라고 했던 고성스님은 거처를 워싱턴 DC지역으로 옮기면서 사찰 이름을 몇 차례 바꾸는다. 한국인 스님으로 ‘혜능선원’이 본인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불국사’도 있고 최후에는 ‘한국사’로 이름을 정하였다. 미주현대불교에서 미주최초의 사찰을 ‘삼보사’로 내세운 것에 대해서도 고성스님은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계선원’과 ‘혜능선원’은 미주한국불교 최초의 사찰 이름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삼보사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서경보 스님 미국 입국과 조계선원, 혜능선원
1964년 미국 입국
196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조계선원’ 개원한 것으로 추정됨
1967년 서경보스님 필라델피아 템플대학교 앞에 조계선원 개원
고성스님의 혜능선원 (고성스님은 서경보 스님의 제자임)
1971년 고성스님 펜실바니아 이스톤에 혜능선원 개원 (1973년까지 3년 운영)
1975년 고성스님 버지니아 알링톤 동사무실에서 법회 시작하여 1년 동안 함 (불국사)
이한상 거사 71년 7월 미국 입국
1973년 1월 28일 삼보사 낙성식
숭산스님 프로비덴스 선원
1972년 4월 미국에 입국하고,
10월 22일 숭산스님 Providence Zen Center 개원
창건주 논란
뉴욕 원각사 창건주를 두고 법안스님과 숭산스님의 갈등
미주에서 사찰을 누가 설립했는가에 대한 창건주 논란이 몇 개가 있는데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뉴욕 원각사를 두고 벌어진 숭산스님과 법안스님 두 스님간의 날카로운 대립이었고 논쟁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몇 신도들만 관심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신도들은 별 관심이 없었다.
법안스님
당시의 상황 설명
1974년 4월 28일 뉴욕에서 법안스님과 신도들이 뉴욕시 플러싱 권성도심보살님 집에서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가졌다. 뉴욕주에서 가진 첫 번째 봉축행사였다. 이 봉축행사는 1973년 뉴욕주 시라큐스주립대학교에서 영어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1974년 뉴욕시 맨하탄의 한인식당을 찾아서 식사를 하던 중 권 보살님등 불교신자들을 우연히 만났다. 이들은 식당 바닥에서 법안스님께 절을 하면서 반가워했다. 이들의 요청으로 갑자기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성황리에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마친 신도들은 법안스님께 사찰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당시 법안스님은 가을학기부터 하바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 가서 공부하려고 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이 신도들의 요청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법안스님은 몇 차례 더 법회를 한 후에 이 신도들에게 숭산스님을 소개하였다. 당시 숭산스님은 프로비덴스 선원을 건립하고 미국인들에게 선을 지도하고 있었다. 법안스님은 이후 하바드대학교에서 숭산스님과 함께 주로 영어공부를 하면서 주말에는 프로비덴스로 갔다. 이렇게 하여 법안스님으로부터 신도들을 소개받은 숭산스님은 일본에 있는 제자인 구윤각 스님을 초청하여 1974년 가을에 맨하탄 40가에서 원각사를 개원하게 되었다.
「천강에 비친 달」, 숭산스님
여기에 대한 숭산스님의 주장은 ‘천강에 비친 달’ 116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다.
“그때 스님이 초청한 사람이 황진경, 법안, 또 보살 1명해서 여러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황진경 스님은 L.A.만 들려서 가고 법안스님은 그때와서 시카고에 박창조라는 사람이 유학하고 있었는데 이 곳에 가서 있었다. 또 하버드 대학에 길 선생이라는 박사과정 밝는 사람과 연관을 시켜서 법안스님이 하바드에서 2년간 연구과정을 다니게 했다.
박창조 교수는 지금 입정대학 학장으로 있다. 그때에 스님이 시카코에 있다가 하바드로 와서 하바드의 종교학과 연구 교수들이 있는 아파트가 있는데 그 방을 하나 주어서 법안스님과 함께 하바드에서 여름에 있는 영어연구 학교에 같이 다녔는데 나는 보스톤에 선방이 있으니까 나는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다니고 법안스님은 기숙사에서 다녔다. 이렇게 여름을 마치고 법안스님은 하바드에서 쭉 있다가 그 다음에 여러 사람이 뉴욕에 한국 절을 하나 만들었으면 자꾸 이야기해서 일본에 있는 윤각이라는 내 상좌가 홍법원장 대리를 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을 불러다가 뉴욕의 원각사를 만들어서 그 상좌에게 맡겼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숭산스님의 주장이고 법안스님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다. 법안스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본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한국일보 1974년 5월 7일 보도에 나온다. 그 보도 내용에 구윤각 스님이 언급되어 있지만 그 전 4월 28일 부처님 오신 날 법안스님이 설법을 하면서 봉축행사를 성대하게 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법안스님이 봉축행사도 했고, 그 전부터 하는 그 신도들을 숭산스님에게 소개한 것이다.
초대 주지 구윤각 스님은 1년도 못되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숭산스님이 원각사 2대 주지를 맡았다. 하지만 숭산스님은 원각사 주지로 원각사에만 상주할 수 없었다. 프로비덴스 선원을 비롯하여 카나다 토론토, 보스튼 하바드대학교가 있는 캠임브리지 선원을 개원하였기 때문에 이 선원들을 방문하면서 지도해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각사 신도들은 보스톤으로 법안스님을 찾아가 원각사에 방문하여 신도들을 지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법안스님은 보스톤과 뉴욕을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 이후에는 한 달에 두 번 법회를 하였다. 그리고 1975년 말에는 아예 뉴욕 원각사로 부주지로 와서 상주하게 되었고, 학교는 뉴욕대학교로 옮기게 되었다. 숭산스님 주지, 법안스님 부주지 체제가 된 것이다. 1976년 봄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마친 후 숭산스님은 원각사 주지를 법안스님에게 넘긴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원각사를 떠나갔다. 이후에는 법안스님이 주지를 맡게 되었다. 숭산스님은 구윤각 스님부터 계산하면 대략 1년 6개월 정도 관계가 있었다. 숭산스님으로만 계산하면 1년이 안된다.
법안스님은 원각사 창건 전부터 신도들과 인연이 되었고, 그 신도들을 숭산스님께 소개하였고 또 구윤각 스님이 떠난 후에는 보스톤에서 뉴욕을 매달 정기적으로 오가면서 실질적으로 원각사를 이끌었다. 그리고 1975년 말 부터는 원각사에 상주하면서 법회를 하였다. 숭산스님이 스스로 주지 자리를 법안스님에게 물려받을 당시에 자산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원각사는 월세를 내면서 법회를 하였던 것이다. 이후 법안스님은 개인 서예전을 통해 현재도 신도인 조일환, 조순자 신도회장 부부 등 신도들의 후원을 받아 기금모금을 하여 잭스하이츠 건물을 사 이전을 하였다. 이후 이 건물을 팔고, 또 서예전을 하여 다시 맨하탄 17가 법당을 사 이전을 하였다. 이후에 그 법당을 매각한 후에 현 원각사 터를 구입하여 이전을 하는 등 단지 토대 주지 구윤각 스님이 잠시 있던 과정을 제외하면 뉴욕 원각사 모든 과정을 법안스님이 주도하였다. 1985년부터 맨하탄 원각사에 나갔고, 이후 원각사에 상주하면서 법안스님의 부탁으로 ‘원각’회보를 만든 필자는 법안스님으로 이러한 과정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여러 차례에 걸쳐 들었다. 숭산스님 창건주라는 이야기를 하면 이런 배경 설명을 하면서 불같이 화를 내었다. 이런 사정으로 법안스님은 본인이 원각사를 창건하였다고 주장하였고, 법안스님 생전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뉴욕 원각사 창건은 이처럼 법안스님과 숭산스님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창건되기 전에 법안스님이 신도들과 먼저 인연이 되었고, 봉축행사를 한 후에 이들을 숭산스님과 연결시켜 숭산스님 제자 구윤각 스님을 주지로 하여 원각사가 개원이 되었던 것이다, 구윤각 스님이 떠난 후에 숭산스님이 2대 주지였지만 부주지로 실질적으로 원각사 법회를 하면서 원각사를 이끈 스님은 법안스님이었다. 숭산스님이 2대 주지로 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결정적으로 오늘날의 법당마련과 원각사 토대는 법안스님에 의하여 이룩된 것이다.
이러한 창건 배경이 있는 원각사를 두고 두 스님은 서로 원각사 창건주라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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