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 · Gauguin |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 이외는 그리지 않는다고 쿠르베는 말한 적이 있다 <바람은 과학으로 불고 있다. 우리가 좋든 싫든 사실의 정확한 연구로 밀려가고 있다. 시대의 동향은 확실히 사실주의적 또는 실증주의적이다> 자연주의 문학의 기수였던 에밀졸라의 전시 평이 말하듯이, 물리과학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있어 인간의 정신적 가치는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변(思辨)을 배격하고 관찰이나 실험 등으로 검증 가능한 지식만을 인정하였다.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엄밀한 과학적 태도를 강조하며 보여지는 세계, 원칙적으로 객관적인 세계만을 강조하던 리얼리즘의 시대에서, 확실한 것, 정확한 것, 유기적인 것, 실용적인 것만 강조하던 그들과는 달리 무엇을 보느냐 보다는 어떻게 보느냐를 놓고 보이는 세계에서 안보이는 세계로 진일보한 작가들이 있었다.
감각적인 눈보다는 마음의 눈을 추구하며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 혼의 영역까지 탐구적인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감각적인 눈보다도 마음의 눈을 더욱 절실히 추구한 작가의 하나로서 고갱을 들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 보다도, 사유의 신비스러운 중심에서, 현상의 주변에서가 아니라 내부세계의 근원에서, 외부의 재현보다는 심리적인 내용을 담는 표현을 열정적으로 탐구하였다. 그자신의 말처럼 원시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예술적인 욕구가 외부의 재현 보다는 심리적인 내용을 담은 표현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고갱은 그림을 통하여 우리에게 예술로 승화된 존재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내 아들아 너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단다. 너는 네가 단지 육신뿐인지 또는 네가 정신뿐인지 또는 네가 하나로 된 육체와 정신인지 그것조차 증명할 수가 없단다. 너는 네가 불멸성을 가졌는지 또는 네가 죽는 몸인지 그것도 증명할 수가 없단다.
내 아들아 , 더 기막힌 것은 너는 너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내가 네 자신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내가 아니라는 것조차 증명할 수가 없단다. 왜 그런지 아니? 증명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고 또 증명도 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이 애야 신중하거라. 항상 의심의 밝은 부분만을 붙잡거라. 신앙의 형태를 넘어서서 신앙 그자체로 기어 올라가도록 하거라.
테니슨(Alfred Tennyson) 은 '옛 시대의 현자라는 시'에서 증명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증명이 될 수 없고, 또 증명이 안 되는 것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노래하였다.
인간이 알고자 하는 본능은 철학자의 본능만은 아니다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창조론이던 진화론이던 인간의 공통적인 의문은 나란 존재 때문이다.
나는 창조되었는가? 진화되었는가? 그것은 다시 말한다면 나란 존재는 불멸에 대한 소망을 간직할 수 있는지, 아니면 무로 없어질 존재는 아니지 모든 희망을 버릴 지어도 내가 존재하므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이 변화되고 발전되어 미래로 나아간다 하여도 무엇을 증명하거나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사유하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본연의 존재를 영원히 종속시키려는 의지인 것이다. 신이 존재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는 바로 내가 존재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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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from "Sister Wendy's American Masterpieces":
"This is Gauguin's ultimate masterpiece - if all the Gauguins in the world, except one, were to be evaporated (perish the thought!), this would be the one to preserve. He claimed that he did not think of the long title until the work was finished, but he is known to have been creative with the truth. The picture is so superbly organized into three "scoops" - a circle to right and to left, and a great oval in the center - that I cannot but believe he had his questions in mind from the start. I am often tempted to forget that these are questions, and to think that he is suggesting answers, but there are no answers here; there are three fundamental questions, posed visually.
"On the right (Where do we come from?), we see the baby, and three young women - those who are closest to that eternal mystery. In the center, Gauguin meditates on what we are. Here are two women, talking about destiny (or so he described them), a man looking puzzled and half-aggressive, and in the middle, a youth plucking the fruit of experience. This has nothing to do, I feel sure, with the Garden of Eden; it is humanity's innocent and natural desire to live and to search for more life. A child eats the fruit, overlooked by the remote presence of an idol - emblem of our need for the spiritual. There are women (one mysteriously curled up into a shell), and there are animals with whom we share the world: a goat, a cat, and kittens. In the final section (Where are we going?), a beautiful young woman broods, and an old woman prepares to die. Her pallor and gray hair tell us so, but the message is underscored by the presence of a strange white bird. I once described it as "a mutated puffin," and I do not think I can do better. It is Gauguin's symbol of the afterlife, of the unknown (just as the dog, on the far right, is his symbol of himself).
"All this is set in a paradise of tropical beauty: the Tahiti of sunlight, freedom, and color that Gauguin left everything to find. A little river runs through the woods, and behind it is a great slash of brilliant blue sea, with the misty mountains of another island rising beyond Gauguin wanted to make it absolutely clear that this picture was his testament. He seems to have concocted a story that, being ill and unappreciated (that part was true enough), he determined on suicide - the great refusal. He wrote to a friend, describing his journey into the mountains with arsenic. Then he found himself still alive, and returned to paint more masterworks. It is sad that so great an artist felt he needed to manufacture a ploy to get people to appreciate his work. I wish he could see us now, looking with awe at this supreme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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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냐 · 저것이냐
나는 무신론자 · 無神論者인가, 유신론자 · 有神論者인가, 그렇지 않으면 범신론자 · 汎神論者인가, 또는 유물론자 · 唯物論者인가, 관념론자 · 觀念論者인가, 아님 기독교신자인가, 자유주의자인가?
헉슬리는 자신의 지적 성숙기에 이르러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보았으나 배우고 더 생각하면 할수록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한다.
자신이 어떤 부류에 속한다기보단 어떤 지식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고 존재의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해결하였는지 생각해 보았으나 그 어떤 강한 확신도 가질 수 없었다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명칭을 하나 생각했는데, 곧 ‘아그노스틱 (agnostic) 즉 불가지 · 不可知 란 말이었다.
모든 사물의 기준을 내재화하고, 초경험적 대상에 대해서는 적극적 판단을 보류하며, 과학이 제공하는 자료와 경험을 토대로 한 실증주의의 입장을 최대한으로 긍정하면서도, 초월적 존재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이성만으로 사유하고 판단하기엔 불가능하다며, 부정과 긍정을 공유하는 불가분의 관계가 바로 불가지론 · 不可知論일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추리나, 신비적 체험, 자연계를 통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해 왔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도덕성을 토대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신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신은 최고 진리 · 眞理요, 최고의 존재 · 存在요, 최고의 선 · 善이기 때문에 완전한 존재였다.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관념 자체는 필연적으로 참된 존재라고 생각한 것이다.
신의 관념 속에는 이미 신의 실재가 포함되어 있고, 이것은 마치 삼각형의 내각의 총화는 필연적으로 두각의 총화와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추상적인 사상을 가지고 참된 존재를 결론지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성적인 측면에서 항상 의심스러운 문제였다..
모든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가 없다고 말한 이가 르네 데카르트였다
혼자 어둠속을 걸어가는 사람처럼 전에 가졌던 모든 의견들이 의지하고 있던 원리 자체를 따져보며, 과연 감각적 지각은 믿을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지금 깨어 있음과 잠들어 있음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지, 우리의 모든 지식이 기반을 두는 진리마저 혹시 기만은 아닌지, 나아가 하나님 대신 기만하는 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지, 고심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명제를 우리에게 던짐으로, 신앙인가 이성인가를 분별시켜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
우리가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신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증명하진 못한다.
신의 존재 증명은 너무나 사변적이며 추상적이며 이론적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신의 존재를 논증한다 하여도 신을 증명할 수 있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은 무엇보다도 과학적 논증이 아니라, 자기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인간은 각자 자기만이 가지는 신비적 체험을 통해서만 신을 인식할 뿐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불합리한 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없으나 그래도 신이 우리들에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을 알려고 할 때 이성의 논리에 의존하지 않고 직관의 논리에 의존해야한다고 말한다.
괴테가 말하기를 <신비주의란 마음(heart)의 스콜라요, 느낌의 변증법이다.> 라고 하였다.
만약 영혼에 대한 신의 신비적 역사의 경험 없이 아무 종교도 진정한 가치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생과 사의 문제 속에서 인간이 해결해야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는 신을 인식하는 문제였다. 누구든지 자기가 가지는 느낌을 통해서 신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이성적인 측면에서 신의 존재를 말하기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즉 우리의 이성만으로써는 신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은 우리의 지식작용의 단순한 객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을 증명하는 도구인 이성은 순수한 이성이 아니라 신앙의 빛에 의해서 조명된 이성이라야 만이 신을 사유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가 신을 증명한다는 것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신앙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하다.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고> 사유 없이 인간은 결코 신앙에 이르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들이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키려고 하나 아는 것이 믿는 것에 전제되어야 하는 법이다. 우리는 믿으면서 사유하고 사유하면서 믿는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어차피 인간은 결딴을 내려야 한다. 깨어나든지 회의론자가 되든지, 유신론자이던지 무신론자이던지. 인간은 선택 할 수밖에 없다 중립은 불가능하다. 불가지론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물음을 이야기하고 증명하려고 한다. 있느냐 없느냐는 곧 사느냐 죽느냐의 물음이다 의심할 수 없고 그럼에도 절망할 수 없는 나란 존재가 실존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신을 다시 증명할 때가 되었다. 신의 형이상학적 증명은 인간의 추리에서 너무 멀므로 일반인에게 감명을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고 어떻게 자신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신의 존재를 무너지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튼튼한 반석처럼 확실성을 보여줄 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다.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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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 · 頓悟
나는 세존·世尊께서 영산·靈山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묵묵히 있었지만 가섭존자·迦葉尊者 만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전등록·傳燈錄에 이르기를 선문·禪門에는 본래 남북·南北이 없건만, 옛날 여래·如來께서 정법안장·政法眼藏을 가섭·迦葉에게 전해 주셨고, 차츰 대대로 전해지다가 제28대 조사인 보제달마·菩提達磨에 이르러 중국으로 오셔서 초조·初祖가 되었다.
第五朝(祖)인 홍인·弘忍대사에 이르러 동산에서 법문·法問을 여니 이때에 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 중 한명이 혜능·慧能으로 법·法을 전해 받았으며 영남에 살면서 第六朝가 되었고, 또 다른 한명은 신수·神秀로 북쪽에서 교화를 펼쳤다. 그 이후에 신수의 제자인 진숙이 자기의 스승을 第六朝로 받들고 자신은 第七朝로 자처했다.
그들이 얻은 법은 비록 하나지만 가르치고 깨달음을 얻게 함에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차이가 있어 남돈·南頓과 북점·北漸이라 말하였지만, 선종에 본래 남북의 명칭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섭존자가 꽃을 보고 미소 지은 것은 바로 존자·尊者의 오묘한 깨달음이요 마찬가지로 천축·天竺에서 오신 보제달마·菩提達磨깨서 제자들을 보고 "너는 나의 육신·六身을 얻었고 너는 나의 골수·骨髓를 얻었다 " 말씀하신 것이나, 노행자·盧行者가 보리수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명경·明鏡도 본래 경대·鏡臺가 아니다 라고 한것은 모두 깨달음의 선적·禪的이다.
그러나 세존이 꽃을 집어 들자 가섭이 미소를 지은 것처럼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깨달음이란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면 사실 공염불이다. 소나무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비추듯이 오묘한 진리란, 공중 속으로 울려 퍼지는 소리처럼 형상을 추구하기가 힘이 든다.
미혹·迷惑에서 벗어나 뛰어나고 오묘한 이치를 얻는다 하여 내가 깨닫는 것이 아니요, 물속에 비친 달과 거울 속에 비친 꽃을 잡을 수 없듯이, 가르침을 전하는 문장이 모두 선·禪이라 하여 내가 깨달음을 얻을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 분별하고 이름을 붙인다 하여 이치를 깨닫는 것도 아니요, 경망스럽게 감흥·感興하여 만법萬法을 깨달은 양 봉갈·棒喝한다면, 그것이 바로 거울속의 꽃이요 물속의 달일 뿐이다.
무릇 오묘한 깨달음은 반드시 한걸음에 다가서지 못한다. 두루 널리 깨달음이 있어야 하며 세상만사를 이해하여야 한다.
가벼운 바람이 수면에 잔잔한 바람을 일으키듯, 깨달음이란 깊은 인생의 목적과 우주존재에 대한 회의와 탄식이다.
동편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면서 유유히 남산을 바라본다, 고 힘써 추구하여 깨달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손을 대는 사이에 영양·羚羊이 그 모습을 감추듯 달아나 버릴 것이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오히려 등불이 가물거리는 곳에 있더라고, 정적·靜寂속에 풍덩 뛰어드는 개구리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도 있고, 세존이 꽃을 집어 들자 가섭이 미소를 지었다지만, 깨달음이란 향상일로 · 向上一路 라 영원이 순간에 있고, 순간이 영원에 있어 일상적 논리와 사유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법문의 도와는 다르지만 어떤 순간의 만남, 그 말씀, 그 손길을 잡는 순간이 바로 나에게 있어 직절근원 · 直截根源이요, 돈오 · 頓悟이자, 단도직입 · 單刀直入이 아니었는지...
반야(般若). "어떤 것을 반야(般若)라고 하는가? 반야는 지혜이다. 모든 때에 있어서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곧 반야행(般若行)이라고 하느니라.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나거늘, 마음속은 항상 어리석으면서 '나는 닦는다'고 스스로 말하느니라. 반야는 형상이 없나니, 지혜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니라.
어떤 것을 바라밀(波羅密)이라고 하는가? 이는 서쪽 나라의 범음으로 '저 언덕에 이른다(彼岸到)'는 뜻이니라. 뜻을 알면 생멸을 떠난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서 물에 파랑이 일음과 같나니, 이는 곧 이 언덕(此岸)이요, 경계를 떠나면 생멸이 없어서 물이 끊이지 않고 항상 흐름과 같나니, 곧 저 언덕(彼岸)에 이른다고 이름하며, 그러므로 바라밀(波羅密)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미혹한 사람은 입으로 외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으로 행한다. 생각할 때 망상이 있으면 그 망상이 있는 것은 곧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 생각마다 행한다면 이것을 진실이 있다고 하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반야의 법을 깨친 것이며 반야의 행을 닦는 것이다. 닦지 않으면 곧 범부요 한 생각 수행하면 법신과 부처와 같으니라.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보리니(卽煩惱是菩提), 앞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처이니라. 선지식들아,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라, 머무름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로 부터 나와 큰 지혜로써 저 언덕에 이르러 오음(五陰)의 번뇌와 진로(塵勞)를 쳐부수나니, 가장 높고 가장 으뜸이며 제일이니라. 가장 으뜸임을 찬탄하여 최상승 법을 수행하면 결정코 성불하여, 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내왕 또한 없나니, 이는 정(定)과 혜(慧)가 함께 하여 일체법에 물들지 않음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이 가운데서 삼독을 변하게 하여 계 · 정 · 혜 (戒定惠)로 삼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팔만 사천의 지혜를 좇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 팔만 사천의 진로(塵勞)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진로가 없으면 반야가 항상 있어서 자성을 떠나지 않느니라. 이 법을 깨친 이는 곧 무념(無念)이니라. 기억과 집착이 없어서 거짓되고 허망함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곧 진여(眞如)의 성품이다.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 모든 법을 취하지도 아니하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자성을 보아 부처님 도를 이루느니라.
돈오(頓悟) ! 선지식들아, 나는 오조 홍인화상의 회하에서 한 번 듣자 그 말 끝에 크게 깨쳐 진여(眞如)의 본래 성품을 단박에 보았으니라. 그러므로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보리(菩提)를 단박 깨쳐서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기의 성품을 단박 깨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이는 모름지기 큰 지식들을 찾아서 지도를 받아 자성을 받아 자성을 볼 것이니라.
어떤 것을 큰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최상법이 바른 길을 곧게 가리키는 것임을 아는 것이 큰 선지식이며 큰 인연이다. 이는 이른바 교화하고 지도하여 부처를 보게 하는 것이니, 모든 착한 법이 다 선지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느니라,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자성을 볼지니라. 만약 자기의 마음의 삿되고 미혹하여 망념으로 전도되면 밖의 선지식이 가르쳐 준다 하여도 스스로 깨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반야의 관조를 일으키라. 잠깐 사이에 망념이 다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곧 자기의 참 선지식이라, 한번 깨침에 곧 부처를 아느니라.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이니라.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로 하여 오고 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 행 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이라고 하느니라.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 육조혜능조사
형상추구 · 形 上 追 求
전등록·傳燈錄을 보면 효의선사가 말하기를
만일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면 그대들은 말의 의미를 찾고 문장의 의미를 쫓겠지만 내가 만일 영양·羚羊이 뿔을 걸어 놓듯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어디를 더듬겠는가?
창랑시화가 중국미학의 표준이 된 것은 전적으로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영양·羚羊이 뿔이 걸려 쫓지 않아도 구할 수 있듯이 묘·妙한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한데 모일 수 없고 공중에 울려 퍼지는 소리, 형상속의 모습 거울 속에 비친 꽃, 물속에 비친 달 같은 것은 허상과 같아서 언어는 다했어도 그 의미는 다함이 없는 법이다 오등회원·五燈會員에 승려가 묻기를
사물에 따라 형체가 드러나는 것이 마치 물에 비친 달과 같다고 하는데 어떠한 것이 달입니까? 라고 하자 선사가 불자·拂子를 치켜들었다라고 하였다.
형상을 모방하고자 하면 손을 대는 사이 달아나 버리듯이 경화수월·鏡花水月은 환상의 미일뿐이다. 환상이 아름다운 것은 그 경지가 높고 운미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환상이 미가 되는 것은 인식에 호소하지 않기 때문이요 윤리에 호소하지 않으며 결코 사변적인 허무로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달 밝은 가을밤 울어대는 뭇 벌레는 다락 난간에 몸을 기대어 자신을 잠들게 하고 차가운 겨울 상풍에 놀란 참새는 나뭇가지를 안아서 아늑함을 찾으려 한다. 굴원은 삼 덩굴을 입고 줄기로 허리띠를 띤 여신의 이미지에서 이소를 써 냈고 이하는 우귀·牛鬼나 사신·蛇神의 정을 시로 읊는 것을 즐겨 병이 될 정도였다. 초사를 읽고 장자와 이하를 안다하여도 간보의 수신기나 포송령의 요재지이를 모른다면 산해경이나 목천자전을 읽었다 하여 기담과 연정을 말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환상이란 일종의 본체에 대한 깨달음이다 무릇 오묘한 깨달음이란 반드시 한걸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배움이 있으면 이해되는 것이 있을 것이고 배움에 있어 깨달음이 없다면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법이다. 깨달음을 통하여 이해하도록 하고 형상에 얽매여 구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보리수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명경·明鏡도 본래 경대가 아니듯이 세존이 연꽃을 따는 것이 가섭이 미소 짓는 것과 하등차이가 없는 법이다
※ 돈오점수 (頓悟漸修) : 불교용어. 단번에 깨닫는 일 또는 그 깨달음을 돈오(頓悟)라 하고, 단계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점오(漸悟)라 한다. 돈오점수 (頓悟漸修)는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돈오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 이전이나 이후에 점진적 수행단계(修行段階)가 따른다는 뜻. 돈오(頓悟)한 후에 점수(漸修)한다(先悟後修 · 선오후수)는 주장과, 그 이전에 점수(漸修)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중국 당(唐)나라 신회(神會), 고려 지눌(知訥)은 전자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의 선승(禪僧) 종밀(宗密)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돈오돈수(頓悟 頓修) · 돈오점수(頓悟漸修) · 점수돈오(漸修頓悟) · 돈수점오(頓修斬悟)의 4구분 중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최고라 하였다.
※ 고려(高麗)시대의 종파로는 오교(五敎)의 교종(敎宗)과 구산(九山)의 선종(禪宗)이 아울러 발전하였다. 교종(敎宗)의 5종파는 화엄(華嚴) · 법상(法相) · 법성(法性) · 열반(涅槃 )· 계율(戒律)이다. 고려(高麗)의 국사(國師) 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과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다. 의천(義天)은 선 · 교(禪 · 敎)가 각기 한쪽에 치우치는 폐단을 고쳐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세우고 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였다. 지눌(知訥)은 9산의 선문(禪門)을 통합하여 조계종(曹溪宗)을 개창하고 돈오점수(頓悟隷修) ·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창하여 선문(禪門)에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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