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이후 활동한 언론인, 만화가, 화가 홍우백(洪祐伯, 1903년~1982년)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숙선(叔先), 호는 경산화백(耕山畵伯), 예명은 사백(思百)
고조부는 통덕랑 홍부한(洪扶漢), 증조부는 홍낙종(洪樂宗), 조부는 홍현모(洪鉉謨), 부는 전보사주사 홍문주(洪文周)이다.
경성제2보통고등학교(현재 경복고) 출신으로, 이학교의 일본인 미술교사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에게서 서양화를 배웠다.
1920년대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가 서울특별시 청파동 숙명여대 앞에 설립한 조선미술원에서
공부하며 조교로 활동했다. 이마동, 홍우백(洪祐伯), 구본웅(具本雄), 백남순(白南舞)등이 동창이다.
1928년부터 1944년까지 총14차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과 특선을 받았다.
1928년 조선미술전람회 7회에 「庭(정)」을 출품해 특선하였고,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 11회 특선작 「靜物圖(정물도)」는 조선총독부에서 작품을 구입했다.
이후 1944년까지 모두 14차례나 입상했다.
1934년 6월 조직한 신회화예술협회는 정현웅, 신홍휴, 구본웅, 김경준, 권영준, 홍우백이 조직한 서양화가 단체이다.
1938년 조선일보 연재소설 박태원의 「우맹(愚氓)」에 삽화를 그린 것으로 나오는데, 이 무렵 조선일보의 자매 잡지인
『여성』에도 아릉다운 채색 화문을 남겼다.
1943년 금강산을 방문하여 그린 몇 점의 수채화가 지금까지 전한다.
1946년 2월 이승만(李承萬), 윤희순(尹喜淳), 김규택(金奎澤), 정현웅(鄭玄雄), 최영수(崔永秀), 김용환(金龍煥), 김의환(金宜煥),
조병덕(趙炳悳), 홍우백(洪祐伯), 한홍택(韓弘澤) 등과 함께 삽화가, 만화가의 친목단체인 소묵회(素墨會) 결성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 은퇴할 때까지 조선일보 광고부, 영업부에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