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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만난 송광사의 산들 바람을 우리는 두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청량각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이 그랬고 마음 위를 흘러다니는 생각이 그랬다.
巳時의 햇살은 창을 넘어와 먼지를 비추는 빛처럼 차분했다. 때마침 육조를 깨우친 금강경의 일구가 떠올라 절 입구 서점에서 육조단경 두권을 구입했다. 영수증도 못내주고, 카드도 안된다는 서점 주인장의 억지같은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여기는 송광사가 아닌가! 때를 맞추어 생각이 얼음 위에 비친 나무 그림자처럼 차갑게 흔들렸다
휴일 아침 산사는 의외로 고요했다 사람들이 아주 없는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처럼 성탄절날 굳이 산사를 찾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일상을 병풍처럼 딱 가려두고 勿生一念 오늘 하루 아무 생각없이 한번 걸어 볼 작정이다. 날씨는 걷기에 딱 좋았다.
일행은 벌써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나는 우화각 아래에 설비치는 나무 그림자처럼 혼자다. 사실 송광사를 방문한지 채 한달도 되지 않았다.
나는 익숙해진 경내를 더 익숙한 발걸음으로 옮겨다녔다. 잘 맞는 옷을 입은듯 마음이 쾌적했다. 부처님의 가피처럼 잘 쓸어놓은 절마당에는 바람이 겨울빛을 희롱했다.
쓸쓸함에도 격이 있는 모양으로 常도 我도 없는 마음이 수수로왔다.
오늘은 오늘이지 다시 오는 오늘이란 없다는 송광사 방장 보성 노스님의 결제 법어처럼 우화각 아래를 흐르는 신평천의 물빛이 시간의 냉혹한 속성을 보여주려는듯 얼어붙었다.
물 밑으로 검은 빛의 玄旨가 번뜩인다. 얼음이 아무리 두텁다한들 현현한 물의 흐름을 막을 수 없듯 마음을 아무리 무겁게 가라앉힌들 생각만 수고로이 고요할 뿐이다.
돌 아래의 壓草처럼 생각을 누른들 그것이 사라지랴!
비워라,없에라,放下着하라 하지만 내 마음은 술잔이 아니다.
아! 서러운 술잔이여 술잔의 마음이여 도대체 난 어쩌란 말이냐.
생각만 고요히 하려는 겁니다. 인적이 끊긴 겨울의 절마당처럼.
아무리 고요하려해도 고요해 지지 않기에 고요가 오히려 몸부림같습니다.
應無所主 而生其心
이것이 마음의 본색이라고 합니다. 마당을 봅니다 텅빈 마당이 良久인듯 고요합니다. 차분하고 긴 바람이 끌처럼 마당을 훑고 갑니다.
능허교와 우화각
마음을 깃털처럼 가벼히 하고 건너라는 뜻이다.
사자루
수차례 송광사를 방문했지만 오늘처럼 완벽한 비움의 경지를 느껴보지는 못했다
내가 송광사를 찾은 때가 일요일이기도 하거니와 등반 시즌과 주로 맞물려 있었기 때문일것이다 절은 늘 관광지였다.
원동태허(圓同太虛) 송광사 절마당이 원동태허의 시원한 스케일을 보여 주는것은 왠만한 절이면 으레이 등장하는 석등이라던지 석탑을 수용하지 않은데 있다. 마치 시원한 시골 툇마루에 앉은 기분이 든다. 얼마나 호방한가! 비움의 경지란.
송광사에 없는것은 사실 석탑 뿐만 아니다 대웅전 기둥에는 주련도 걸려있지 않다. 집에 가훈이 있고 학급마다 급훈이 있듯 대웅전 기둥에는 그 절을 대표하는 주련 하나쯤 걸려있기 마련이지만 스님의 정진을 중요시하는 승보사찰답게 섣부르게 아는것을 피한다는 뜻으로 주련을 달지 않았다고 한다 풍경소리조차 수행을 방해한다고 하여 달지 않았다.
송광사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가람의 배치이다 대웅전이 최상부에 배치되는 일반적인 형식과는 달리 대웅전 뒤로 스님들의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다 승을 중요시하는 무언의 암시이다.
마음은 본래 원동태허이다 모자람도 남음도 없이 제 스스로 완벽하다 추우면 추운줄 알고 더우면 더운줄 알고 그것이 마음이다 無欠無餘다 자동 센서다.
구족신통력 광수지방편 시방제국토 무찰불현신
너무나 유명한 보문품 사구게입니다. 관음묘지력을 찬양한 대목이지요 하지만 송광사 관음전은 고종황제와의 인연을 뗄래야 뗄 수 없습니다. 관음전 내부를 보면 관음 보살 뒤에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일월도가 보이고 주위에는 왕을 모시는 신하의 상이 그려져있습니다. 왕이 있을 자리에 단지 관음보살을 배치시킴으로써 임금과 관음보살을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관음묘지력 능구세간고 구족신통력 광수지방편 시방제국토 무찰불현신" 세간의 고통을 구하는것은 관음보살의 묘지력 뿐만 아닙니다 살아있는 神이신 임금께서도 능히 지녀야할 능력이었나 봅니다.
- 펌 - 이 인자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에 처절했던 경안군의 슬픈 이야기를 품은 저고리와 배자, 많은 불경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여느 절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관음보살상 그 이상은 전혀 상상하지 않았다. 이토록 복잡한 사연을 품고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은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보살상이 만들어 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전각과 불상은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관음전과 관음보살상은 전혀 그렇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사연이 있다. 관음보살상은 원래 송광사 관음전에 봉안되어 오다가 1902년 고종 황제가 망육(望六, 51세)이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성수전(聖壽殿)으로 옮겨오게 된다. 지금 관음보살상이 봉안된 감실 속에는 원래 고종의 무병장수와 돌아가신 명성왕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殿牌)가 모셔져 있었다. 전패를 치우고 관음보살상을 봉안하였기 때문에 관음전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불이문
일반과 이반이 구별되고 無와 有가 구별되는 不二란 없다.
길상헌
송광사의 옛이름이 길상사이다 그래서 송광사 아래에 길상식당이라는 식당도 있다 밥을 팔아도 뭘 알고 팔면 격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송광사에 들르면 길상 식당에서 꼭 식사를 한다.
방장 보성스님의 법문
行深般若
행하되 반야의 지혜로써 행하라 보시에 관한 짧고도 박력있는 법문이었다.
불교는 이렇듯 어렵지 않아야한다 그래서 至道는 無難이라고 했다. 자리를 떠려는 우리를 다시 불러앉히고 내려주신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법의를 벗은 홀연한 모습의 노스님처럼 소박하였지만 근기에 맞춘 평범한 설법이었기에 마음에 와 닿은 바는 더 컸다.
일생을 통해 얻기 어려운 행운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 다음 일정은 아무래도 좋았다. 산골짜기 샘에서 달디단 물을 마신것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이 청량했다.
송강사 법당은 亞자 형태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목조건물이다 어디서 바라 보아도 아름답지만 대각선에서 바라 본 추녀선은 더욱 멋지다 신비한 코발트빛의 단청이 푸른 모스크의 벽을 보는듯 황홀하다
흐르는 물처럼 길 또한 집착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갈 뿐.
내가 산행에 빠져든 이유도 머뭄이 없는 해방감,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움이 길에는 있기 때문이다.
情을 추구하면 情에 빠져들듯 나는 길이 주는 자유와 해방의 마성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송광사 뒤란을 사랑한다. 내 산행의 첫 시발지이기 때문이다.
나의 첫 산행의 시발은 선암사에서 송강사에 이르는 그 유명한 트래킹 코스였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 때 산행에 참가하지 못했다. 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행들이 돌아오는 송광사 뒤란에서 하릴없이 그들을 기다려야만 했다. 추색이 완연했던 그 가을. 걸을 수 없었기에 걷고싶은 열망은 또 얼마나 컷던가! 그 후로 나는 선암사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이 산길을 다섯번 넘었다. 다섯번을 넘었지만 한번도 같은 느낌을 받은적은 없다.
세상을 걸어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늘 앞서간 사람의 뒤만을 보고 걷는것같지만 걷고나면 어느새 자기만의 길이 되어있다. 꼭 같은 길이란 없다. 그러기에 다시 이길을 걷고 싶다.
여름에는 가을의 길들을 믿을 수 없다. 가을에는 겨울의 길들을 믿을 수 없다. 나에게 모든 길은 다시 가야할 시작 길이다. 나는 내 몸이 가지 못하는 길을 가지 못한다. 길은 몸 안으로 흘러 자꾸 나를 재촉하지만 지금 나아가고 있는것은 몸이 아니라 길일 뿐이다.
-2008년도 송광사를 방문했을 때의 글-
아껴 마시는 커피처럼 가을을 한모금 마신다. 산은 단풍의 사태로 가을이 흘러 넘치는듯 한데 나는 조바심에 두손을 모은다.
한 무더기의 잎이 진다. 잎들은 떨어 지면서도 흔들린다. 흔들리지않고 떨어지는 잎은 없다. 흔들리며 살아가는 인간사도 다 자연을 닮은것인가 보다. 가을이 떠나가야 할 시간을 재촉한다.
-2008년 가을 송광사에서-
여행의 결과를 두고 어떤점이 참 좋았다던지 나빴다던지로 성과를 마무리 하는것은 별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좋고 나쁨의 분별, 간과 택의 해악에 대해서는 불서를 통해 누누히 들어온 바가 아니던가. 여행의 결과는 우리가 얼마나 새로운 환경에 잘 빠져들었느냐에 있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에 자신을 대비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이 지닌 본연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 여행의 참 의미이다.
배에 물이차 배가 서서히 가라앉듯 그렇게 새로운 세상에 녹아드는 것이다. 뜨거운 물에 홍차의 맛과 향과 색이 우러나듯 그렇게 우러난 본연의 성품을 보는것이다. 여행을 통해 내가 지닌 감성과 본성의 경계를 만났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진리는 부연을 싫어한다.
일생을 걸어 아깝지 않은 일. 마음공부.
내 삶의 한 生이 종반으로 향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도대체 일생을 걸어야할 목표 따위가 없다.
그러니 그 목표를 두고 아깝다 아깝지 않다는 평가 조차도 의미없을 뿐이다 공연히 절에가면 모르고 지냈던 번뇌망상이 이리떼처럼 몰려들고 법당 부처님을 만나면 발복의 잡망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돈을내면 업장이 소멸 된다는 편의는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절에가면 망상이 떠오르고 절을 떠나면 오히려 번뇌가 잠잠해진다. 종유몰유의 이치처럼 有를 보낼려다 유에 빠져버리고 마는 격이다.
절은 내가 지닌 탐욕을 계량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럴 바에는 오히려 산길을 소요자제하는것이 괴로움을 더는 더 좋은 방편이다. 절을 벗으나 산길로 접어들면 산길이야말로 곧 절집이요, 마음이 곧 법당인것을 느낄 수 있다. 마음에 다른 생각이 없다면 萬法이 一如란 말이있지 않은가. 나에겐 포행삼매가 딱 제격이다.
불일암 가는 길
갈라진 암벽에 피는 꽃이여! 나는 그대를 갈라진 틈에서 따 낸다. 나는 그대를 뿌리 채 내 손에 들고 있다.
-테니슨-
자세히 살펴보니 냉이꽃이 피어있네. 울타리 밑에.
-바쇼의 하이쿠-
두 사람이 꽃을 보았지만 한 사람은 뿌리 채 꽃을 뽑아 손에 들고 있고 한 사람은 울타리 밑에 쪼그려 앉아 냉이 자그마한 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소유와 존재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시이다.
테니슨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꽃의 소유가 필요했다면 바쇼는 꽃을 관조함으로써 자연과의 영적 일체감을 맛보았다
- 펌 -
에리히 포름의 '소유냐 삶이냐'와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나의 대학시절 급격한 산업화로 들떠있었던 그 시기에 내 정신세계에 최초의 지평을 열어주었던 책들이다.
갓 대학생이 된 나에게 이 두권의 책은 내 삶에 존재양식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던 소중한 지침서였다. 지금은 없어지고만 깨알같은 글씨의 문고판이었던 '무소유' 어떻게 보면 스님도 나와 동시대의 아픔을 함께 겪은 사회적 동료라 할 수있다.
스님도 가고 스님이 남기신 무소유란 책도 절판되고만 지금 나는 책장 속에서 하염없이 간택을 기다리는 스님의 책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펌-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착해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무소유에서 법정스님은 난초를 가지게 된 후 생기는 마음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스님은 다른 스님으로부터 난초화분 2개를 얻게 된다.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여 애지중지 정성을 들였는데, 어느 날 햇볕에 내어 둔 것을 깜빡 잊고 외출을 했다가 돌아와 보니 난초가 모두 시들어 버린 것을 보게 된다. 정성 들여 다시 살려 놓았지만 그 때부터 스님은 난초가 신경 쓰여 외출도 삼가게 됐다. 마음속에 ‘집착의 괴로움’이 싹튼 것이다. 이후 지인에게 난초를 주고 나니 스님은 비로소 얽매임에서 벗어나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난초 2개 분을 갖게 되면서 생기는 집착의 괴로움이 이러한데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
겨울 햇살이 얌전히 내려앉은 불일암에서 나는 오지호의 '남향집'을 그대로 옮겨놓은듯한 인상을 받았다.
소녀와 강아지를 대신해 안거 중인 스님의 하얀 신발이 선돌 위에 고요를 과장하며 얹혀있었다.
푸르스름한 회벽에 비친 그림자... 그늘은 빛이 가려진것이 아니라 빛이 변화한것이라는 인상주의의 이론을 그대로 대변하는것 같았다.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환경,고요가 스님의 체취를 그대로 느끼게 했다.
금강경 일구로도 깨달음의 指南을 얻은 사람이 있는 반면 팔만대장경을 다 꿰고도 일생을 허송세월한 사람도 허다하다.
그 시절의 무소유는 내 인생의 지남이었으며 사구게였다. 그에 대한 신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난초 화분 선물 받을 때가 제일 겁난다.
적막의 미간
정공량
적막의 미간에 불을 켠다
적막 속에 슬픔의 알레그로
흰꽃들이 돌아눕는 세월의 끄트머리
오늘은 약속도 없는지 바람들이 흩어진다
싱싱하다
여윌 때까지 오로지 빛낼 독거
차고 넘는 시간들의 막막한 불연속선
흔들어 낮은 깃발의 그리움을 일으킨다.
샤워장
"소나무에 관한 일은 소나무에게 배우고 대나무에 관한 일은 대나무에게 배워야 한다."
지금 이 시간 나는 무엇을 배우고 있고 누구에게 물을것인가?
반짝이는 차밭 너머에 걸쳐있는 대밭이 눈부시다 제대로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제대로된 상대에게 질문해야한다는데 이전에 나는 색즉시공의 뜻을 중국인에게 물어 본 적이있다. 그 중국인의 대답은 "영화제목"이라는 것이었다. 색즉시공의 뜻을 원어민인 중국인도 알지 못했다.
수준에 맞지 않는 질문을 해봐야 답은 본질과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잘못된 답을 통해 얻은 편견과 오해는 잘못된 견해를 낳고 잘못된 견해는 잘못된 판단을 낳고 잘못된 판단은 잚못된 삶을 만든다.
소나무의 일은 소나무가 제일 잘 알고 대나무의 일은 대나무가 제일 잘 안다는데 내 삶의 문제를 도대체 누구에게 물을것인가? 그 답을 말해 줄 나는 오늘도 스스로 웃을 뿐이다.
카네기 홀을 찾아가던 어떤 사람이 길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주위의 노인에게 길을 물었다 "카네기홀로 갈려면 어떻게 가야합니까?" 그런데 그 노인의 답이 의외였다 " 연습 또 연습"
"부처님께 다가갈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정진 또 정진"
정진이라! 돈점의 알음알이가 길을 막는다.
선암사 승선교
한잔의 커피가 허락하는 시간이란 잔이 비기까지의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 비워질 때까지의 시간이다.
자신을 오롯이 바라 볼 수 있을 때까지의 시간 그것이 모자라 나는 매번 커피를 마시지만 도대체 내 마음은 좀처럼 비워지지가 않는다.
상념을 지워내고 오로지 마음의 세계에 몰입하는것. 커피의 세계와도 유사하다.
한잔의 커피로도 세계의 끝에 도달할 수는 있다 세상의 끝에서 마시는 커피도 괜찮을것 같다.
승선교
어제의 허무만큼 세월이 빠르네요.
당신은 잘 살고 있나요?
햇부추 같았던 청춘 시절에도 나는 똑 같은 의문을 가졌지만 오늘은 왠지 양귀비보다 가벼워요!
삼인당
삼인당을 바라보면 늘 계란 후라이가 생각난다. 여름의 끝무렵 꽃무릇 붉게물든 연못을 바라 볼 때도 그랬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모든것은 변하며, 머무르지 않으며 나라고 할만한것도 없으므로 이를 깨닫으면 열반에 든다는 말씀
나라고 하는것이 언제나 문제다. 지금의 나는 열반은 고사하고 계란 껍질 하나 부수어 낼 근기조차 없다. 나란 놈을 명태처럼 탕탕 쳐서 삼인당 연못물에 던져버리고 싶다.
선암사에는 천왕문이 없다. 천왕의 역할을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이 맡고 있기때문이다. 대신 그자리에는 기념품 가계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 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 기념품 가게. 그것이 있다고 얼마나 절집 살림이 나아질 지는 모르겠으나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니다. 더구나 여기는 태고종의 본사가 아닌가.
고찰은 고찰답게 고졸한 멋으로 지켜져야한다. 길상사에서 볼 수 있듯 그것도 일종의 수행이다. 그 원칙이 강하면 강할수록 절은 더 아름다와 진다.
불편함을 잘 수용하는것은 스님들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선암사의 절집 사랑이 누구보다 크기에 하는 말이다.
송광사에 이어 선암사에도 三無라고 하여 없는것이 세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로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천왕문이 없다는 사실이고 두번째로 선암사 대웅전에는 어간문이 없다. 어간문이란 대웅전의 중앙문으로 일반적으로 큰 스님들만 드나드는 문이다. 하지만 선암사 대웅전은 보는 바와 같이 중앙문 아래쪽에 주황색을 칠해 좌우와 구별을 해 놓았다. 이것을 머름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한다는 의미로 오직 부처님처럼 깨닫은 분만이 이곳을 통과할 수있다는 뜻으로 만든 장치이다.
세번째로 송광사처럼 대웅전에 주련이 없다라는건데 보다시피 지금은 주련이 걸려있다. 하지만 이전 사진에는 분명히 주련이 달려있지 않다 이처럼 대웅전에 주련을 달지 않는것은 開口卽錯 즉 깨닫음은 말이 필요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선암사의 후원은 미로와도 같이 복잡하다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절집이 들어서서인지 일반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정형화된 배치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선암사 뒤란의 이런 불특정적인 아기자기함이 오히려 더 좋다. 위압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절집과 절집을 둘러싼 미로와 공간을 구획하는 벽과 문들이 마치 주제별로 정리된 테마파크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런 공간 구성을 더욱 돋보이게하는것은 철마다 피어나는 꽃일것이다.
선암사에는 꽃과 나무의 종류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아름다운 꽃나무들이 계절을 달리하며 절집을 장식함으로써 자연과 함께하는 공간 자연이 건축이 되고 건축이 곧 자연으로 스며드는 가장 한국적인 건축으로 살아나는것이다.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김익겸이 썼다는 6조고사 편액
고청량산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 )> 일주문 뒷쪽 편액
나는 일주일에 한번 새로운 커피를 사러간다 로스팅된지 얼마 안된 원두를 사서 월요일이면 첫 시음을 한다. 한자리에 앉아 세계각지에서 온 다양한 커피를 마실 수 있게된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하지만 처음 내린 커피에 만족하는 경우는 대단히 더물다. 나는 그것이 처음에 커피의 문제인줄 알았다. 좋지 않는 커피를 고른탓에 맛이 엉망인 커피가 추출되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다보니 세상의 모든 커피에는 그 커피만이 가지는 나름의 특성이 있다는것을 알았다.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커피가 원하는 방식대로 커피를 내려야 제대로된 커피를 맛볼수 있다는거다. 유레카! 이런 비밀이 숨어있었다니.
커피의 특성을 읽어내듯 우리 삶의 흐름도 읽어 낼 수 있어야한다. 지극한 도는 무난이라고 했다. 어려울게 없다고 한다 그 無難이란 어떤 경지일까? 이상적인 삶의 흐름
간택의 장애가 없는 경지... 무애의 강물과 같은 경지 ... 술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국수와 같은 경지... 친구와 마시는 기분 좋은 술과 같은 경지...
인생의 가을도 얼추 지나간 느낌이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턱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세월을 만난다면 나이 따위는 무슨 소용이겠는가!
순천만
순천만 낙조를 찍으러 간적이 있었다. 하지만 조류독감의 여파로 입장조차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때가 안 맞은 것이다 세상만사 모든 일은 다 때가 있다고 한다.
다 때가 있다는 말은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사람을 위한 위로의 말처럼 들리기도하고 열심히 힘을 기울여 모험이나 도전을 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격려의 말로도 들린다.
안개가 없는 맑은 겨울 하늘은 한없이 청명하고 순천만의 일몰을 찍기에 그저 그만인 날씨였다.
뭔가를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야말로 때를 알려주는 타이밍이 아닐까? 이 날은 순천만 낙조를 구경하기에 그야말로 제대로 때를 만난것 같았다.
취하라
항상 취하라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것은 없다
무엇으로 취할것인가?
술로 시로 사랑으로 구름으로 덕으로....
네가 원하는 어떤것으로던 좋다.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지나가는 모든 것,
2014년 최고의 드라마 미생에서 인용되었던 보들레르의 시다.
한 잔의 깊은 호프맛이 그리운 가운데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갈대밭을 향해 물어본다 "지금은 몇시인가?"
"취할 시간" 정말 미치도록 취하고 싶은 황금빛이다. 저녁 햇살에 젖어 그냥 움직이는 하나의 물결, 아니 물결이 흐트러지게하는 저 투탄카멘의 항금빛이 되고 싶었던 순간. 술이 익어가는듯한 긴 길을 따라 우리는 구름에 달가듯 걷고 있었다.
함빡 사랑해주기
아직 사랑을 다 주지못한 탓일까 새들은 떠나지 못했다. 사랑하란다 함빡 사랑하란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세상 그 무엇이든. 함빡!
세상이 붉게 젖었다. 청춘과 같았던 한낮의 열기는 모두 마름되어 붉게 벽을 적셨다.
새들이 운다. 서산을 넘어 온 모든 소리들은 통곡이어서 어느 소리 하나 아프지 아니한것이 없었다.
저항을 잃은 세상의 신념들이, 해풍에 꾸들꾸들 말라가던 사랑이, 모든 견고했던것들이 무너지고 밟혔다.
격렬함이 식고 열정은 순응으로 힘을 잃었다. 삶이 죽음으로, 그리하여 삶에서 죽음으로 스며드는 모든 소리들이 서로를 찔러 아프게하고 있었다.
변곡점
내릴 역을 지나친 후회처럼 삶의 변곡점은 늘 있다.
망설임에 머뭇거리다 발밑에 제 구구덩이를 파고만 것처럼 때로는 시간의 살들을 스스로 갉아먹는다.
망설임... 모든 망설임도 결국은 선택이었다. 다만 기차를 내리고 싶지 않았을 뿐.
재빠른 결단만이 늘 승리하는것이 아니듯 선택은 항상 변곡의 선상에 있다.
空忍
空의 됨됨이를 표현하는 말 중에 空忍이란 말이 있다.
내가 그 경지를 알리 만무하지만 벅차도록 끓어오르는 일몰의 광경을 두고 말문을 닫아버릴것 같은 감동을 받았을 때 空忍이란 단어가 몰록 떠올랐다.
공인이란 어쩌면 이럴 순간의 감정이 아닐까 마음을 비우기 위해 온갖것들을 억누르다 마침내 가슴이 터져버릴것처럼 극에 달한 경지 그래서 공인에 머물지 말라는 주문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내려 어둠에 저항하는 마지막 하나의 저항마저도 사라져버린다.
마음과 세상에 남은 한줄의 극이 선연하다.
날이 저물자 빛이 간절해졋습니다. 간절한것은 아름다운 법으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간절함에 메달려 사진을 찌고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실낱같이 남은 저 한줄기 빛이 아쉬워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였습니다.
소년의 배움은 여명의 별빛과 같고, 장년의 배움은 한낮의 햇빛과 같고, 노년의 배움은 촛불의 밝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내게 남은 촛불과 같은 희망, 하지만 촛불이 밝다고만 하면 어두움을 경계할 필요가 있을까요? 나이가 들수록 지혜의 불을 더 밝혀야합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움직여야합니다. 그래야만 나이를 두려워 하지 않게됩니다.
세상이 사라진 자리에 잠시 한풍이 드나듭니다. 돌아가야할 시간입니다. 가서 이겨내겠습니다.
바다는 아주 은은한 소리로 울었다 점점 여위어가는 나무들은 겨울을 향해 마지막 손을 흔들었다 어둠에 살아난 빛들은 흐름을 깨트리며 기뻐하고 있었고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의 궁극에서 마침내 허무의 규범을 만들었다. 죽음도, 유전의 생도 다 저마다의 숙업이란다. 별이 내려와 쓸쓸한 어둠의 뜰을 덮었다.
어둠이 내립니다 어둠은 한가지로 세상을 평등하게 다 보듬습니다
一種平懷 속에 無와 有가 사라지고 애와 증이 다 사라집니다. 분별과 선택의 턱이 없는 세상. 그러기에 어두움이 내리는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사라지는것이 다 자연스러웠습니다
움직이고 싶다면 움직이는대로 두세요. 그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은 달처럼 멈춘듯 움직이며 움직이는듯 멈춥니다.
마음이 멈추어 있다면 멈춘대로 두세요 그것이 마음입니다 움직이는것을 멈추게 하는것이 수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갈등입니다. 고요한 달을 보듯 그렇게 바라보는것이 수행입니다.
여행은 언제나 신선하다 고였던 웅덩이를 떠나 마침내 어디론가 흘러드는듯한 기분. 긴 기다림의 정차 끝에 막 차가 떠날 때의 흥분같은것이다.
어쩌면 여행 그자체가 자기 구원의 수단이 될지도 모르겠다. 변화된 환경을 통해 새로이 자신을 모색하려는 시도, 자신을 느슨하게 놓아버림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역설....
자신을 일신하는데 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할 필요는 없다. 배낭 하나 짊어지고 훌쩍 떠나버리면 그만이다 짧은 한숨 고르고 나면 벌써 다른 나이니까.
- 후 기-
산도 바다도 절도 그 어느것도 오늘 하루 마음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앞은 늘 말들의 허물로 어지러웠다.
세상에 그 모든것을 덮어줄 수 있는 어둠이 있다는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내일이면 드러날 상처는 오직 내일의 몫이다.
처녀의 가슴에 처음 얹어 본 손처럼 나도 그 泯然(민연)의 어둠 속으로 내 모든것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Sichiliano in G minor, BWV1031 2nd M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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