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6권. 19세기: 체계들의 시대(1800-1850)
제15장 프랑스에서 사회철학(연속): 오귀스트 꽁트 La philosophie sociale en France: Auguste Comte 751-778
[생애와 작품]
오귀스트 꽁트는 1789년 몽펠리에에서 났으며, 1814년에서 1815년까지 100일 천하의 시기를 포함하여,에꼴 폴리테크니크의 학생이었다. 1817년 이래로 생시몽의 비서였다. 그는 생시몽 주변에서 실증 정치학의 체계를 초안했으며, 1824년에 그를 떠났다. 그는 이 시기에 그는 견해들과 욕망들 사이의 일반적 분리(Séparation générale entre les opinions et les désirs, 1819), 근대 과거의 일체에 대한 요약평가(Sommaire appréciation de l’ensemble du passé moderne, 1820), 사회의 재조작화를 위한 필수적인 과학적 작업들에 대한 계획(Plan des travaux scientifiques nécessaires pour réorganiser la société, 1822)을 출판했다. 그는 1826년에 청강하는 과학자들 앞에서 실증 철학의 첫 강좌의 강의들을 시작했으며, 이 과학자들 중에서 생리학자인 브랭빌(Henri-Marie Ducrotay de Blainville, 1777-1850)과 수학자 쁘왕소(Louis Poinsot, 1777-1859)도 참석하였다. 이 강의는 두뇌 신경 발작으로 중단 되었고, 이어서 상당히 오래 우울증의 의기소침에 시달렸다. 그는 1929년에 강의 다시 시작했으며, 이 강의로부터 1830년 7월에 제1권을 출판했다.이어지는 여러 권들은 1835년, 1838년, 1839년, 1842년에 나타난다. 이 글들은 실증적 정신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esprit positif, 1844)과 실증주의 일체에 관한 담론(Discours sur l'ensemble du positivisme, 1848)에 의해 완성된다. 에꼴 폴리테크니끄의 복습교사의 상황에서 변변치 못하게 살아가는, 그는 이 학교의 자리를 지명해줄 어떠한 지지도 찾을 수 없었고,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과학사들의 역사의 자리를 정초하기 위한 지지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1833년에 기조(François Guizot, 1787-1874)장관에게 헛되이 꼴레쥬 드 프랑스에 자리를 간청했었다. 실증철학 강의 6권의 전문에 서문에 모든 환멸들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는 이런 환멸들을 과학자들의 편협한 전문화의 탓으로 돌렸다. 이 찰나에서부터 꽁트는 특히 실증주의의 친구들의 자발적 기부들로 살았다. 1844년에 끌로띨드 보(Clotilde de Vaux, 1815-1846)를 알았는데, 그녀는 1846년 4월에 세상을 떴다. 또한 이 찰나로부터 꽁트는 인류애의 종교를 꿈꿨다. 그는 스스로 이 종교의 첫째 대 성직자라고 선언했다. 끌로띨드의 사랑은 그의 영감의 원천이었고, 그 추억이 예배들의 많은 부분에서 주재해야 했다. 실증정치학의 체계(Système de politique positive, 1851-1854)(4권) 실증주의 교리문답(Catéchisme positiviste, 1852), 주관적 체계, 즉 인류의 정상적 상태에 맞는 개념작업들의 보편적 체계(Synthèse subjective ou système universel des conceptions propres à l’état normal de l’humanité, 1856) 등은 이 시기의 중요 저술들이다. 1857년에 세상을 떴는데, 제1철학과 도덕 체계에 관한 일련의 출판물들을 기획 중이었으며, 이것의 출판은 1867년까지 단계적으로 이어졌다. (752) (57SKJ)
제1절 꽁트의 출발점 – Le point de départ de Comte 752
오귀스트 꽁트 사상의 중요 동기는 어떤 것인가? 과학들의 개혁, 마치 데카르트처럼 지적인 개혁이 있는가? 확실히 말하면, 아뇨 이다. 그의 목표는 사회의 재조직화이며,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하여 지적 개혁이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직접 실천적 행동에 의해 사회를 다시 만들기를 원하면서도, 마치 그가 자신을 푸리에주의자들과 생시몽주의자들이기를 원한다고 비난하는 것처럼, 잘못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잘 진행하기 위하여] 우선 지성에게 인간 정신의 향상 상태에 부합하는 새로운 습관들을 부여해야만 한다. 사물들을 넓은 방식으로 본다면, 정치적 진보를 지식의 일반적 진보에 의존하게 하는 이런 방식은 정치 철학의 대부분에 있어서 공통적이다. 플라톤의 이름과 18세기의 모든 철학들의 이름을 인용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이런 의존은 매우 다른 두 방식들로 간주되었다. 사람들이 지식의 진보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과학적 정신 일반을, 방법을, 또한 마찬가지로 사회를 대상으로 삼았던 특별한 과학의 창조를, 몽상할 수 있다. 플라톤의 폴리테이아[공화국]는 이 두 관점들을 통합한다. 왜냐하면 그 작품은 사회적 구조와 동시에 과학들의 일반적 방법을 다루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정치학과 같은 작품은, 마치 따로 떨어진 사물에 대하는 것처럼, 하나의 사회과학에만 전념하고, 그리고 윤리학은 이 과학적 삶을 형식적으로 마치 사회적 연결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고려한다. 홉스 같은 사상가들은 정치학을 과학적 철학에 종속시키는 경향을 지녔다. 반대로 몽테스키외 같은 다른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18세기에 사람들은 백과전서에서 두 흐름들을 분명하게 본다. 사회의 행복은 흐름에 도달했는데, 때로는 과학들에 의해 밝혀진 이법의 일반적 발전으로부터이고, 때로는 마치 정치경제학처럼 사회적 사실들에 직접적으로 연관 있는 과학들로부터이다. 사람들은 오귀스트 꽁트가 이 두 흐름들을 통합한다고 말 수 있다. 그는, 과학적 정신이 사회적 현상들의 과학을 기초하지 않는한, 그 과학적 정신이 그 자체에 의해서 사회를 조직화하는 덕목을 갖는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데 그 현상들의 과학이 없이는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분산하는 전문화의 상태에 남아있을 것이고, 콩트는 자기 시대의 과학자들에게서 이런 상태를 정열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사회학이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현상들의 연구로 확장에 의해서와 달리 기초될 수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들이 과학들의 백과전서적 단계를 관통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는 마치 어떠한 앞선 준비작업 없이 소위 사회적 사실들을 다룬다는 모든 학설들에처럼 정치 경제학에 완전히 적대적이다. 마치 데카르트에서 나온 “도덕철학” 전체처럼 이런 종류의 과학들은 과학들의 연구를 가장 단순한 연구 위에 근거하게 하지 않고서, 가장 복잡한 현상들을 연구한다는 잘못을 범한다(강의, 4판, VI, p. 253) 이런 분과학문들은 “불충분한 철학자들”이라는 문학가들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 문학가들은 철학을 특수성에 환원하면서 철학의 품위를 떨어뜨린다. 사회과학 없는 과학적 정신의 무용성(그리고 심지어는 유해성), 과학들의 완전한 위계질서 없는 사회 과학의 불가능성, 이러한 것은 꽁트의 한결같은 두 주제들이다. (753)
이 두 주제에, 첫 두주제와는 완전히 독립적이고 셋째 주제를, 즉 비판적 또는 혁명적인 그리고 조직적 또는 안정적인 시대들의 반주제(antithèse)를 덧붙인다. 그 셋째 주제는 메스트르, 보날, 생시몽주의의 반혁명적 철학으로부터 도출된다. 혁명과 무정부는 이것들 자체에게서 동일한 사물이다. 이것들은 시대적인 권력과 정신적 권력이라는 합법적 권력들에 대한 파괴 의 시도이다. 그 파괴는 결국에는 가정에까지 그리고 소유에까지 펼쳐진다. 혁명 후 체제들의 업무는 위기에 의해 훼손되었던 권력들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런 반주제의 기저에는, 이번 차례에서는, 사회의 자연에 관한 두 이론들 사이에 반주제가 있는데, 하나는 사회를 개체들의 – 개체들의 고유한 주도권 일체를 축약하는 개체들의 - 부스러기로 환원한다. 다른 하나는 개체들을 초월하는 사회적 실재성들을 인정한다. (753)
사람들은, 얼마나 반주제(antithèse)가 그 당시 역사적 상황들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본다. 꽁트에게서 단지 이 반주제는 그가 18세기 철학으로부터 빌려온 넷째의 주제, 즉 진보의 주제와 더불어 조합하게 된다. 이로부터 역사에 대한 매우 다른 평가가 나온다. 반동분자들에게서, 반주제는 마치 실천적 귀결처럼 앞선 권력들의 복고[재건]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나폴레옹시대 이래로 그리고 하물며 신성동맹[1815년]과 더불어 프랑스 정치학의 동인이었다. 꽁트에게서는 아주 반대로 과거는 당연히 되돌아오지 않으며, 혁명은 필수불가결한 위기였다. 보날이 혼동했던 두 요소를 유기적 시대에서는 구별해야만 한다. 그는 혁명을 근거지우는 믿음 없는 사회적 권력은 없다.게다가 그가 말하기를, 신적 권리를 믿지 않는 시대적 정신적 권력도 없다.그러나 사회를 기초하는데 있어서 신학적 신념과 다른 신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만일 사정이 그러하다면, 모든 재조직화는 절망이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적 신념들을 제거하면서, 18세기의 철학과 이를 이어받은 대혁명은 합법적이고 필연적 작업(une oeuvre)을 이루었다.신념들은 실증과학들의 진보가 결정적으로 고발했던 착각(une illusion)에 근거한다.따라서 꽁트의 마지막 목표는 보날의 목표와, 즉 시대적이고 정신적인 권력들의 회복[복고]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권력들은 당연히 신념들 위에 근거되어야만 한다. 신념들은 또한 신학적 신념들만큼이나 효과적이며, 철학적 비판에 성공적으로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구조도 마찬가지이며, 그 구조는 중세 이래로 서방에서 전통적 구조와, 즉 시대적이고 정신적인 그리고 가정적이고 소유적인 두 권력들을 지닌 구조와, 대체로 동일하다. 그러나 구조의 견고성과 합법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과학적 정신에 의해 요청된 실증성을 전적으로 갖는 신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꽁트가 사회의 구조에 관한한 혁신가가 거의 아니라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이 구조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물을, 그리고 그 구조자체에 의해 진보를 행할 수 없는 사물을 본다. 이것은 그 자신의 연구에 부여한 정태적(statique) 자격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진보 전체는 이것의 토대들인 신념들 속에 있다. 이 신념들은 이제 사라지고 있는 신학적 상태로부터 [형이상학적 상태를 거쳐서] 실증적 상태로 이행한다. (754)
그러나 이렇게 이해된 셋째 주제는 앞의 두 주제들과 재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꽁트의 사유에서 다른 과학들 일체와 접목되어 있는 사회과학은, 사회적 조직화에 필수불가결한 신념들 일체를 제공할 임무를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꽁트에 앞서 매우 빈번하게 해체되었던 첫 두 주제들의 연결의 근거를 본다. 왜냐하면 사회학 없는 과학적 정신은 순수하게 비판적이고 부정적일 것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사회적 사실들의 연구는 다른 과학들의 지지 없이도 임의적인 주자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주제의 통합 덕분에 사회적 재조직화의 문제는, 전통주의 학파들에 의해 헛되이 제시 되었는데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꽁트가 과학들의 진보에 관하여 사회적 진보를 지지하는 것은 아주 새로운 의미(방향)에서이다. 왜냐하면 이런 정식은 18세기에 이법[이성]의 확산에 의해 많은 수의 사람들의 행복의 증가를 의미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꽁트에게서는 과학들에게 부여된 사회학적 충분함에 의해 사회적 제도들의 연대성의 증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첫째의 경우에서는 자연에 관하여 보다 더 권능 있는 인간에게 보증하는 진보가 중요하다. 둘째의 경우에서는 사회적 제도들 속에서 인간에게 보다 더 안전성을 부여하는 변화가 중요하다. (755)
이로부터 대혁명 이래로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꽁트의 판단들이 나온다. 행정부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문제는, 신학적 믿음들이 몰락했던 시기에 그리고 실증주의의 믿음들이 태어나기 이전 시기에, 전체 통일성을 반대하는 학설과 더불어 사회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문제의 유일한 실천적 해결책은, 완전히 벌거벗은 권위에 의해 진행하는 독재(la dictature)이다.이러한 조건들을 가장 잘 포함하는 의회는 국민 공회(혁명의회 La Convention)이다. 특히 당통(Danton, 1759-1794)은 일시적인 체제에 임시 독재가 필요하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꽁트의 모든 공감을 받았다. 거꾸로 그는 영국으로부터 모방된 의회 체제를 갖는 헌법제정의회(la Constituante)를 비난했다. “비판적 개념작업들을 조wlr적 개념작업들로 변환하는” 그 제헌의회의 헛된 시도를 비난했다 (그것은 신적권리의 부정으로 인민 자체에 의한 정부의 긍정적 원리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분할상태의 경향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꼬방의 노력을 반대하고자 원했던 지롱드당원들을 비난했다. 그는 루소에 따를 이법의 제단을 제정했기 때문에 또는 고대 민주제를 복원하려고 원했기 때문에 “소피스트같은 야망가”인 로베스삐에르(Robespierre, 1758-1794)를 “퇴행하는 반동”이라 고발한다. 소유권에 반대하는 바뵈프(Babeuf, 1760-1797)의 운동은, 마찬가지로 루소에게서 나온 운동인데, 반대 이유들 때문에 단죄 받았다. 사회주의는, 소유권이 그 사회의 영속적 요소인데, 그 사회 구조 자체를 공격했다(강의, IV, 289-320). (755)
따라서 독재, 완전히 맨몸이며 학설도 없는 독재는 단지 자신의 눈 덕분임을 안다. 그것은 그가 나폴레옹을 비난하는 것은 그 독재가 아니라, 퇴행이며, 즉 후진 문명으로부터 나온 인간이다. 그것은 루이-필립 시대의 나폴레옹의 회고를 복원하는 시기에 쓰여진 몇 쪽에서, 그는 나폴레옹을 마치 대혁명의 중요한 대표자로서 선포하고자 이끄는 “이상한 착오(l’étrange aberration)”에 대해 말한다. 나폴레옹 이래로 프랑스는, 비판에 반대하지만 사라진 학설들을 재확립하기 위해 헛된 시도를 했던 왕정복고를 거쳐서, 지적이고 도덕적인 어떠한 질서도 정립하기를 단호히 거부했던 루이-필립의 정부로 이행했다. 7월 군주제(왕정)가 되었다. 이 왕정은 물질적 이익에 전적으로 예속되어 있으며, 순순하게 억압적이고, 전혀 지도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왕정[군주제]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질서를 정립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왕정은 신문기사의 철학 이외 다른 정신적 영역을 알지 못하는 부정적인 철학의 전형 그 자체이다.(같은 책, 321-331) (756)
1852년 쿠데타 이후에,꽁뜨 실증주의 체제의 미래에 아주 가깝다고 믿었을 때, 여러 동일한 고찰들[논문들]이 그를 나폴레옹 3세에게 매우 호감을 갖게 했다. 그의 꾸데타는 “영국적인 전환에 알맞는 헛된 의회 초기”에서부터 “프랑스의 진실한 독재적 국면”으로 이행을 표현한다. 이런 “경험적 독재”는, 학설도 없으며, 단지 무정부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방향 잡았으며, 실증주의의 “조직적 학설” 속에 그것의 자연적 동맹을 갖는다. 꽁뜨는 보수주의자들에 호소에 관한 자신의 직업을 그만두었다. 그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실증주의를 마치 혁명가들을 훈련하는 유일한 수단처럼 제시하였다.(실증정치학(Politique positive) 신판, 2권, 전문과 p. xii, p. xxxii). 그리고 이 후자의 태도와 1848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에게 행했던 전진들 사이에 모순은 전혀 없다. 사실상으로 이 찰나에서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 찰나에 프롤레타리아에게 자기 학설에게로 전향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이런 경향성을 만날 때 마다, 그가 비난했던 이런 자유로운 또는 헌법적인 경향성들은 결정적으로 1852년에 폐기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가 블리뉘에르(Célestin de Blignières, 1823-1905)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언하기를 “만일 현재 독재제도가 퇴행에 의해 무산된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이 독재와는 어떤 다른 것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의회의 지배는, 독재의 필요들을 더욱 돋보이게 할 가능한 짧은 막간극(중간)들을 제외하고, 되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끝난다.” (756)
따라서 꽁트의 정치적 주제는 간단하다. 사회적 통일성은 학설의 통일성에 의해 반드시 이루어지며, 이 학설이 가능할 때이며, 이 학설이 가증하지 않을 때, 임시적인 독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실증주의의 학설은, 신학적 학설이 토대를 만들려다가 좌초했던 이런 통일성을 단호한 방식으로 보증해야만 한다. (757) (57SLA)
제2절 지적개혁과 실증과학들 – La reforme intellectuelle et les sciences positives 757
따라서 지적인 개혁은 꽁뜨에게서 핵심적인(primordial) 것이다. 그러나 지적 개혁을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적 학설들의 내용을 형성하는 실증과학들은, 마치 그것들의 역사가 제시하는 것처럼, 발전의 거대한 조건들을 갖고 있고, 그리고 진리의 탐구 이외 다른 목표를 갖지 않는다. 외적 목적에 완전히 예속된 것으로부터 해방된 이런 발전에 의해서, 아르키메데스(Archimède, Ἀρχιμήδης, 전287경-전212)의 수학들이, 갈릴레이와 뉴턴의 물리학이, 라브와지에(Lavoisier, 1743-1794)의 화학이 생겨날 수 있었다. 이어서 사람들은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응용들 속에 이런 인식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런 응용들은, 심지어 과학자들의 정신 속에서 탐구의 동기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동기는 이런 탐구의 자유를 전혀 변질할 수 없었다. 그런데 꽁트는 실증과학들은 사회 개혁의 수단이다. 직접적으로건 또는 아니건 간에, 이 과학들은 이런 목적에 맞게 완전히 배열되었다. 그리고 만일 과학의 확실성이 관찰에 그리고 추론에 요구된다는 것을 이런 목적이 막지 않았다면, 만일 이런 목적이 결과물들의 객관성에 전혀 도달하지 않았다면, 그 목적은 꽁트에게서, 그것들의[실증과학들의] 탐구들의 방향과 한계들을 깊이 감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사실상 감화시켰다. 실증철학의 강의(1830-1842) 전체에서, 과학의 급진적 자유와 과학에게 마치 수단처럼 부과하는 요청들 사이에 깊이 숨겨진 충돌이 있다. 비록 하나의 학설이, 이 충돌 덕분에, 실증 정신을 모든 영역에서 도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학설은 과학들의 몇가지 효과적인 방향들을 무시하거나 또는 비판하며, 이 과학들의 탐구 영역을 가끔은 축소하였다. (757)
예를 들어 수학에서, 꽁뜨는 라플라스(1749-1827)에 의해 개연성들의 계산에 적대적이다. 천문학에서 그는 별들의 물리학적 구성을 규정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비난했다. 그리고 그는 태양계 한계들 바깥에 있는 모든 우주 발생론에 적(l’ennemi)이었다.물리학에서 그는 사람들이 물질의 구성을 규정하고자 애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데카르트의 역학의 전형적 체계를 마치 반쯤 형이상학에 속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생물학에서 그는 종들의 모든 진화론을 단죄[비난]했다. 마치 사회학에서 사회들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탐구 전체를 비난하듯이 말이다. (758)
이 모든 배제들은, 그 중에서 여러 배제들은 과학의 현실적 경향성들에 아주 반대되는 것이었는데, 같은 정신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각 과학에는 그 대상에 맞는 자연에 정확한 기능과 한계 지워진 기능이 할당되었다.수학들을 사회적 현상들에 직접적으로 응용[적용]하면서, 개연성들의 계산[확률론]이 과학의 한계들로부터 벗어난다. 천체물리학은 중심 힘들에 복종하는 한에서 오로지 물질만을 연구하는 천문학과 양립할 수 없다. 물리화학의 역학 또는 원자론은, 물리적과 화하의 대상들을 벌거벗은 물질로 환원하면서, 과학의 대상을 사라지게 했다. 그 만큼이나 생물학에서 또는 사회학에서 발생적 학설들도 그와 같이 사라지게 했다. (758)
이런 정신이 가장 잘 표출되는 것은 과학의 개념작업일체 속에서 이다. 과학들은 현상들 사이에서 일정한 법칙들 또는 관계들을 탐구하고, 내밀한 자연과 실재성들의 원인 또는 본질들은 무시한다. 뉴턴의 물리학은, 18세기에 의해 이해되었던 대로, 원인들의 헛된 탐구들 대신에 법칙들의 규정작업을 진실로 대체하였다.이런 대체의 목표는, 법칙을 수단으로해서, 현상들을 매우 다른 국면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뉴턴의 운동은 법칙의 통일성을 향한 노력을 파생명제로 삼았다. 반대로 오귀스트 꽁트의 합법칙주의(le légalisme)의 특성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는 자기 속에서 본질의 다양성을, 그리고 이 다양성과 더불어 법칙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들에 대한 위계질서의 주제는 합법칙주의의 근본적 이념에 반대되게 하거나 또는 적어도 독특하게 변형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동일한 영향을 느끼며, 사람들은 자연의 철학에서 이 영향을 재발견한다. 뉴턴 이래로 중력작용으로 환원할 수 없는 힘들에 관한 과학들이 창조되었다: 즉 전기성, 자기작용, 화학, 생물학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이 힘들로부터, 사람들은 본질을 인식한다고도, 그리고 중력의 본질을 인식한다고 더 이상 주장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순히 힘들의 작용의 법칙들을, 자기작용의 분배의 법칙, 음극과 양극의 전기성의 법칙들, 화학에서 한정된 비례들의 법칙들 등을 탐구한다. 이런 법칙들의 다양성으로부터, 사람들은 법칙들이 힘들의 작용을 계산한다하여, 힘들의 다양성으로 결론짓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뉴턴의 합법칙주의의 정신에 그대로 남아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으로 본질들의 위계질서가 있을 것 같은 것은, 진실로 법칙들의 경험적 위계질서일, 서로서로 층계지워진 질서일 뿐이다. (759)
이리하여 마치 법칙들의 탐구와 같은 과학의 개념작업은, 꽁트에게서는 새로운 과학의 발견에 의해서도 변질되지 않았던 하나의 전통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그 개념작업은, 그의 시대에 과학적 어떤 흐름들에 개념작업을 묶어내는 특별한 성격을 띤다. 꽁트는 조셉 푸리에(Joseph Fourier, 1768-1830)의 열에 대한 수학적 이론에 의해 놀랐다.푸리에는 어떤 가설을 제기함이 없이, 열의 자연에 관하여, 역학적으로 또는 다른 방식으로, 열의 퍼짐의 수학적 법칙을 발견했고 표현했다(열에 대한 분석론(Théorie analytique de la chaleur, 1822)). 반면에 수학적 물리학은, 예를 들어 라플라스에 의해 물리학이 생각된 대로, 분자들에 관한 역학적 가설들에 항상 연결되어 있었다.꽁트에게서는 푸리에의 방향을 따라, 반쯤 형이상학에서 그가 이름 지은 역학적 가설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온 질적 본질들에 관한 어떤 가설을 부과하는 과학들 속에서는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었다. 같은 정신에서, 뀌비에는 생명의 자연에 관하여 어떠한 가설도 없이 살아있는 존재의 구조의 법칙들을 탐구했다.그런데 유기화학에서 쉬브뢸(Chevreul, 1786-1889)은 무엇보다 먼저 분류학자이다.사람들은 꽁트에게서 재현된[표상된] 경향성들의 일체를 본다. 그는 이렇게 썼다. “모든 착한 정신들은, 우리의 실재적 연구가 현상들의 효과적인 법칙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현상들의 분석에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오늘날 인정한다.” (강의, III, 209: 39) (759)
다른 한편 과학의 개념작업은 그가 지적 개혁을 생각하는 방식에 연결되어 있다. 현상들의 생산적 실재성들에 관한 신학적 시대와 형이상학적 시대의 주관적 개념작업들 대신에, 순수하게 객관적인 개념작업이 중요하다. “인간의 두뇌를 외적 질서의 정확한 거울로 변형해야 한다(실증정치학(4권), II, 382).”[꽁트의] 이런 정식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모든 과학들을, 또한 천문학과 마찬가지로 사회학을 잘 생각해야 한다. 꽁트에게서 질서(ordre)라는 단어는 사물들의 구조의 고정성(la fixité)을 의미한다. 인간 지성은 그 자체적으로 질서의 원리를 찾지 못한다. 그리고 꽁트는 지성의 연약함을 지칠 줄 모르고 고발한다(강의, VI, 193-194; 278); 지성 그 자체 속에 있는 조직화는 여전히 소위 말하는 외적 질서의 반영이다. 이런 질서는 마치 신학적 상태 속에서처럼 허구(fictif)적이거나 또는 그 질서는 마치 실증적 상태에서처럼 실재적이거나 이다. 그는 표현적으로 그리고 여러 번, 소위말해 내적 관찰과 자기반성에 의해, 지적 원리들에 도달한다는 꾸쟁의 정신주의의 주제를 거부한다. 이런 비판은 심리학을 마치 의식의 현상들의 과학이라는 것이라기보다, 심리학적 관찰에 기초한 인식이론을 목표로 한다. 지성은, 헛되이 자기로 회귀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스스로 모델을 삼으면서 만이 자기의 고유한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의 이런 개념작업은 과학의 합법칙적 개념작업과 연대한다. 왜냐하면 지성의 주장은, 만일 지성이 반성하는 질서가 상상적인 것이 아닐 경우에만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서가 더 이상 증명될 수 없거나 또는 적어도 경험에 의해 증멸할 수 없자마자, 그 질서는 상상적이 된다.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모든 가설은, 꽁트 시대에 마치 일치되었던 것처럼, 심지어 모든 사실들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빛의 에테르설 또는 전기적 흐름설과 같은 가설들은 절대적으로 비난 받았다. 허락된 유일한 가설의 전형은 법칙의 예상참여(l‘anticipation)이다. 지성의 타고난 연약함은 실재적인 것에 충실성 이와 다른 치료제를 갖지 않는다. 이 충실성은 과학들을 법칙들의 규정작업에 한정하면서 만이 그 자체로 가능할 뿐이다. (760)
꽁트는 과학들의 대상들 사이에 구별하는 본질들을 정의한다고 전혀 주장하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생명에 대해서도, 그리고 양에 대해서 또는 사회에 대해서도 정의가 없다. 구별된 본질들로부터 그는 단지 논리적 성격들을, 통상적 논리학이 외연(extention)과 내포(compréhension)라 불렀고, 그가 일반성(généralité)과 복잡성(complexité)이라 불렀던 특성들을 유지한다. 그에 따르면 본질들은 줄어드는 일반성에 따라서, 그리고 증가하는 복잡성에 따라서 정돈되어 있다. 이것은 옛 관념의 새로운 정식이며, 이 정식은 내포에서 본질들의 풍부함이 증가함에 따라 본질들의 외연이 축소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런 고찰은, 실재성들의 깊은 자연[본성]을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실재성들을 분류하도록 해준다. 이로부터 근본적인 여섯 과학들이 나온다. 이 과학들 각각은 이 과학들로부터 나왔던 예술과 기술들을 지배한다. 수학들은 양을 연구하며, 모든 과학들 중에 가장 단순하고 가장 비규정적인 실재성을 연구한다. 천문학은 그 양에게 힘을 첨가하며, 끌어당기는 힘들을 부여받은 덩어리[질량]들을 연구한다. 물리학은 그 힘에 질을 첨가하고, 그것의 대상은 열, 빛 등등과 같은 질적으로 다른 힘들이다. 화학은 질적으로 구별된 물질들에게로 올라간다[깊이 들어간다]. 생물학은 생명을 대상으로 삼으며, 생명은 천연의 물질에게 유기체화를 첨가한다. 마지막으로 사회학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조직화로부터 독립적인 연결에 의해 그 살아있는 존재들 일체를 다시 연결하는 사회를 연구한다. 이런 근본적인 여섯 과학들의 위계질서는 또한 필연적인 역사적 순서를 지적한다. 이 순서에서 과학들은 탄생했고, 정신은 가장 단순한 대상 이후에 가장 복잡한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수학들과 천문학은 고대로부터 현존했다. 그러나 물리학은 17세기에 태어났으며, 화학은 라브와지에와 더불어 시작했고, 생물학은 비햐와 함께 시작했다. 반면에 꽁트는 스스로 마치 사회학의 창설자로서 생각했다. 논리학적이고 역사학적인 이런 순서는 동시에 교육학적이다.수학들은 필수적인 입문을 형성하고, 사회학은 교육의 정점을 형성하다. (761)
실증철학 강의는 연속적으로 근본적인 여섯 과학들에 다루고 있으며, 방법에 대한 논저가 아니다. 왜냐하면(III, 68), “방법은 가장 폭넓고 가장 완전한 방법의 응용들 속에서와는 다른 곳에서 진실하고 풍부한 효과성을 가지고 연구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규정된 모든 추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일반적 논리학 대신에 수학들이 대체되어야만 한다(III, 290). 이 강의는 과학들의 현실적 상태들에 대한 단순한 요약도 아니다. 왜냐하면 실증주의의 이름으로 꽁트는 자기 시대의 과학자들을 심판하고, 그들에게 참여하여야 할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강의는 과학적 작업의 배열에 대한 시론이며, 과학들 사이에 상호 연관들을 방법적 방식으로 연구한다. 이미 자발적으로 과학들은 과학들 서로 서로 간에 절차들을 이용한다(III, 69). 물리학의 본질적 절차는 관찰이며, 화학의 본질적 절차는 실험과정이며, 생물학의 본질적 절차는 비교이다. 예를 들어 화학이 분류작업의 생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도 그래도 역시 진실이다. “폭넓은 상호 응용들의 감정에 의해 그리고 자발적인 중요한 조화들의 국면에서, 마치 다양한 부류의 과학자들을 독립적이고 따로 떨어진 것처럼 통속적으로 다루었던 과학들은, 이 작품의 근본적인 개념작업의 실재성과 유용성을 아마도 끝내 이해할 것이다. 자연 철학의 여러 다른 가지들로부터 나온 추론적이고 그럼에도 특수한 문화는 실증 철학의 일반 체계에 대한 앞선 충력과 우월한 방향 아래에서, 진실로 과학적인 모든 작업들의 공통 토대와 단선적 연결을 이룬다.” (761)
이때에 각 과학은 전체 속에서 그것의 역할에 따라서 이해될 것이다. “어떤 과학의 진실한 일반 성격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우선 과학을 완전한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필수불가경하며,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이상적인 완전함이 항상 효과적으로 나타나는 다소 중대한 근본적 난점들을 올바르게 고려한다.”(II, 276) (762)
이런 방법에 따라서, 꽁트가 근본적인 다섯 과학들의 각각으로 만들었던 개념작업을 따라가 보자. (762)
우선 수학들이 구체에서 추상으로 가면서 역사적으로 전개된다. 데카르트(1596-1650)는 기하학을 수로 환원 했다. 그의 계승자들은 역학에서도 동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푸리에(1768-1830)는 이제 열역학을 이 역학으로 환원했다. 점점 더 복잡한 자연적 현상들은 이렇게 기능들[함수들]에 의해 표상되었다. 그러나 꽁트에게서 추상적인 것은 여전히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독립적이었다. 따라서 수학들은 가장 추상적인 부분들 안에서, 즉 분석에서, 수학들의 구체적인 의미화 작업과 독립적으로 수학들 그 자체들을 위하여 함수들의 연구를 대상으로 삼는다. 꽁트에 따르면, 근대 시대들에서 분석의 역사는 어떻게 분석이 동일성과 완전하게 엄밀한 논리로 향하는지를 제시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라이프니츠와 뉴턴에 의해 창조해낸 초월적 분석의 숙명들 속에서 주목하여 보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이 분석은 논리적으로 매우 불완전한 것으로 마치 낯선 물체처럼 보였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의 방법은, 결과물들 속에서는, 계산에서 방법에 사용했던 보조적인 무한소들을 제거하는데 있다. 그러나 어떤 권리로 이런 제거를 하는가? 라이프니츠는 그 자신은 이 무한소들을 모래알들에 비교하였다. 이것은 그의 방법으로 근사치 계산을 하는 것이다. 마치 카르노가 행했던 대로, 사람들은 범해진 오류가 보상받는[상쇄되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초월적 분석은 분석의 완전성에 도달했는데, 그날은 라그랑쥬(1736-1813)가 일상적인 분석에서 미분된[파생된] 함수들의 사용 덕분에 그 분석을 환원했던 날이다.일반적 방식으로 인공물은 크기들의 자리에 함수들을 사용하는데 있다. 이 함수들, 즉 지수함수들, 대수함수들, 원함수들은(오일러와 베르누이에서처럼) 수학들의 이런 통일성에 쓰인다. 그리고 이들의 진보는 이런 류의 새로운 보조적 발명에 의해 가능하다. 반대로 꽁트는 수학들의 무한정한 외연을 믿지 않았다. 이리하여 라그랑쥬에게 지지하면서, 그는 어떤 등급[차원]을 지닌 방정식들의 일반적 해법을 마치 공상괴물처럼 생각했다. (762)
기하학은 자연과학들 중의 첫째 과학이다. 기하학은 명제들을 포함하고, 그 명제들을 분석적으로 증명을 시도하는 것은 무용하다. 데카르트는 목표를 지적했는데, 그 목표를 향하여 기하학은 방향을 잡아야만 했다. [말하자면] 형태들을 분석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인공물인 좌표들에 의하여, 상황을 크기로 귀착시켜야만 했다. 그의 이상은, 자연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실재적 형태들 앞에서 잃어버린 것에 결코 휘둘리지 않는 방식으로, 모든 형태들을 가능하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일치 덕분이다.이리하여 케플러(Kepler, 1571-1630)의 발견은 타원에 관한 그리스 기하학의 작업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일치 덕분(grâce)이다. 왜냐하면 행성의 궤도가 타원형이라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분석 기하학은, 만일 이것이 이것의 목표에 도달했다면, 행복한 아자르(hasard)를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그 기하학은 기하학자들의 탐구에 의해 접근되었고, 데카르트의 방법을 곡면들에 또는 이중 곡선에서 곡선들에(클레로) 확장시켰고, 그리고 기하학자들은 몽즈(Monge, 1746-1818)의 표면의 개수들의 분류에 의하여, 불연속적인 선들 또는 불연속적 면들에(푸이에)확장시켰다. (763)
근본적인 명제들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역학적으로 큰 잘못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치 힘들의 혼성의 법칙과 같은 관찰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라그랑즈( Lagrange, 1736-1813)는 베르누이(1700-1782), 달랑베르(1717-1783), 라플라스(1749-1827)에 의해 시도했던 증명들의 불충분성을 제시했다. 분석의 환원할 수 없는 요소, 즉 당시에 이미 기하학에서 통용되던 요소는 역학 속에서 증식하고 있었다. 즉 세 가지 큰 원리들이 있다. 작용과 반작용을 동등성, 운동들의 독립성은 관찰로부터 결과로 나온다.반대로 이 원리들을 수단으로 사람들은 우선 직접적으로 운동들의 많은 성질들을 증명된 정리들을 변형할 수 있었다.이러한 것은 다른 운동의 성질들 사이에서 생생한 힘들의 보존이며, 꽁트는 이 힘들의 보존을 자연의 제1원리로서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사람들이 오늘날 경험의 직접적 도움의 필연성을 가장 잘 보았던 원리가, 즉 카르노의 원리가, 꽁트에 의해서는 마치 운동 중의 열의 변형과정에서 마찰들에 기인된 에너지의 상실을 표현하는 것처럼 단지 생각되었을 뿐이다. (763)
실증 천문학은 뉴턴의 중력의 법칙위에 세워졌는데, 뉴턴 법칙은 행성들의 궤도들에 근거한 케플러의 세 가지 법칙들을 통일성으로 귀착하게 한다. 이 실증 천문학은 꽁트에 따르면, 그 천문학이 태양계라는 자기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조건에서, 실증성의 모델[전형]을 제공한다. 행성들의 관찰에 의해 알려진 중력작용이 태양계 그 넘어서 확장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력작용 덕분에, 태양계에 한정된 세계라는 용어는 실증적 용어이지만, 우주의 용어가 아니다. 천체의 동력학은 우리의 체계의 영속성과 독립성을 증명하는 경향이 있다. 즉 체계의 영속성이란, 왜냐하면 모든 간섭들이, 그 영속성에서 주기적으로 그리고 매우 긴 주기들에서 일어나며, 원초적 상태에서 체계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독립성이란, 왜냐하면 두 별들 사이의 거리는 다른 세계들에서 오는 간섭작용들을 마땅히 지각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우주생성론에 라플라스의 우주론이 대립된다. 데카르트는 현상들의 생산 양태에 근거한 임의적 가설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라플라스는 태양을 획일적인 회전 운동과 더불어 얻었고, 우리의 세계를 무매개적으로 앞서간 상태 그 너머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그런데 사람들은 천문학이 실증적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시간 속에서 그리고 공간 속에서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별의 천문학도, 천체 물리학도 아닌, 그러한 것들은 이것들의 조건들이다. (764)
반대로 물리학은 우리에게 과학의 전형을 제시한다. 이 과학의 실증성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꽁트가 실증성을 분간하기 위하여 부여한 규칙들 중의 하나는 아래와 같다: 사람들이 물리적 탐구를, 물체들의 구조에 근거한 가설을 수단으로 하면서 만이 분석적 고찰들로 이끌어 갈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형이상학적 분위기 한복판에 있다. 이런 점에서 물리학의 부분들은 다음 질서로 배열될 수 있다. 그 질서에서 현상들의 방정식을 확립하기 위하여 구조적 고찰들의 공헌(la part, 몫)은, 그 귀결로서 실증성의 부재는, 증가해 나갈 것이다: 무게론(barologie, 무게 중심론), 열역학, 음향학(l’acoustique), 시각학(optique, 광학), 전기학(l’électrologie). 예를 들어 예를 들어 푸리에에 의한 열역학 속에서 분석의 사용과 음향학과 광학에서 사용 사이에 대조(un contraste)가 있다. 푸리에는 현상들의 무매개적 인식에서 열의 전파의 수적 법칙을 파악하였는데 비하여, 사람들은 그 현상을 기하학적 또는 정역학적인 하나의 현상으로 환원하면서 현상의 인식을 음향학으로 또는 광학으로 만든다. (764)
실증성은 또한 다음 두 성격들에서 서로 만난다. 현상들의 예견, 우리가 현상들에 향한 행동. 그러나 이 두 성격들로부터, 실증 과학들의 위계질서를 통하여, 하나가 증가할 때 다른 하나는 감소한다.이처럼 천문학에서 예견이 완전하면, 우리의 행동을 아무것도 아니다. 생물학에서 예견이 매우 불확실하고 거의 정확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우리 행동의 수단들은 특이하게 증가한다.이 점에서 물리학은 중간 정도[단계, 수준]이다. (764)
실증성에 대한 또 다른 주목거리는 법칙들의 상대적 성격이다. 꽁트에 따르면 질실로 보편적인 법칙은 없다.왜냐하면 외삽법(extrapolation)은 관찰의 한계들 저넘어에서 결코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외삽법을 인력에 관해서 보았고, 태양계의 저너머에 확장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꽁트는 훨씬 더 멀리 나간다. 물리학자인 레뇨(Regnault, 1810-1878)는 마리오뜨(Mariotte, 1620-1684)의 법칙이 확립해 놓았던 실험들을 다시 다루면서, 그 법칙은 매우 높은 압력에서 그리고 매우 낮은 압력에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런데 꽁트는 이런 탐구들을 마치 진실한 실증성에 반대들처럼 비난하는데, 진실한 실증성이란 여기서 우리의 필요들과 우리의 사용들을 지칭한다. 마리오뜨의 법칙은 단순한 법칙이며, 우리들의 필요들에 충분한 법칙이다. 사람들이 통상적인 경험의 한계들 바깥에서 할 수 있는 탐구들은 소용없으며, 게다가 무한하다. 과도한 정확성은 법칙들의 현존과 양립할 수 없다.(VI, 638) 그러나 꽁트는 절대자의 탐구에 대한 그의 거절에서, 물리학의 거대한 진보의 토대가 되었던 정확한 탐구들을 밀어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765)
마지막으로 과학의 실증성에 대한 주목들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구별된 현상들 사이에 친족관계들을 정립했던 방식이다. 이런 친족성들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수학적 분석이다. 이 수학적 분석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설없이 구조에 적용되었다. 이리하여 푸리에의 열의 확산의 방정식들은 직선의 좌표들의 진행방식에 그리고 획일저인 운동의 방정식에도 상응한다. 자, 예를 들어 빛과 소리 사이에서 사람들이 시도했던 유비와는 아주 다른 실증적 유비가 있다. 이 유비는 소리와 빛을 서로서로 흐름(un fluide)의 운동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765)
화학은 수학적 분석의 모든 용법을 결정적으로 그만둔 과학이다. 게다가 화학은 수학에 알맞은 완전성과는 매우 멀리 있다.화학에서 예견의 권능은 [천문학과 물리학에 비해] 연약하며, 화학의 설명들은 거의 정합성이 없다. 우선 화학은, 화학을 불편하게 하고 있던 형이상학적 가설들로부터 스스로 정화되어야만 했다. 물질 단위들의 가설은, 사람들이 법칙으로 세운 오성의 단위에 대한 비반성적 욕망에 기초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친성의 가설이도 있다. 이 가설에 대해 베르톨레(Berthollet, 1748-1822)는 아주 상대적 성격으로 제시했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근친성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비유기적 화학과 유기적 화학 사이에 차이의 가설이 있다. 이 가설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게다가 쉬브뢸(Chevreul, 1786-1889)이 멀리한, 오로지 물체의 기원(l’origine)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화학적 근친성을 전기적 힘으로 환원하는 것은 화학을 물리학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리라. 이런 찰나에 화학은 특히 양적인 화학은, 한정된 비례들의 법칙 덕분에, 원자론적 가설로 방향을 잡게 된다. 거기에 꽁트가 매우 생생하게 비난한 경향성이 있다. 그가 공격한 것은 법칙 자체에 있다. 이런 법칙은 예견을 허용하지 않는다. 화학은, 혼성된 것이 생산된다면 혼성의 비례들이 무엇이 될 것인지를 우리에게 말할 것이고, 그러나 그것이 [미래에] 생산될 것이라는 말하지 않는다.게다가 꽁트는 이런 법칙 속에서 규칙이 아닌 예외를본 베르톨레의 비판들을 받아들인다. 어떤 비례에 따라 이루어지는 용해(les solutions, 녹아버림)와 합금(les alliages)은 화학적 사실들의 동종들(parents, 유유상종)이다. 소위 유기적인 혼성물들은 정해진 비례들이 없다.꽁뜨의 모든 공감은 화학의 실증적인 부분인 질적이고 분류학적인 화학에로 갈 것이다: 이러한 것들로는, 산(酸)의 용어를 이렇게 일반화하는 베르톨레에 의해 발견된 암모니아의 발견, 베젤리우스(Berzélius, 1779-1848)의 전기화학의 탐구들, 뵐러(Wöhler, 1800-1882)의 요소 종합 등이 있다. (766)
실증 생물학의 콩트적인 개념작업은 블랭빌(Blainville, 1777-1850)의 생리학 강의(Cours de physiologie, 1829-1832)에 의지하고 있다. 생물학적 문제는, 사람들이 기관을 알때, 기능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기능을 알게 될 때, 기관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기관들의 연구는 정역학(la statique) 또는 해부학이다. 기능들의 연구는 동력학(la dynamique) 또는 생리학이다.생물학은 정력학과 동력학의 내밀한 통합이다. 생명 자체는 혼성(la composition)과 분해(la décomposition)의 이중운동으로, 더 좋게 말하면 흡수(l’absorption)와 발산(l’exhalaison)의 이중운동으로 정의 된다. 꽁트는 생물학에서 실험작업의 방법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왜냐하면 사람들은 한 기관과 다른 기관들의 교감(un consensus) 때문에 그 기관을 따로 실험조작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관들과 기능들의 변질작용들을 연구하는 병리학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실험작업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브루세(Broussais, 1772-1838)의 말에 따르면, 병리학은 생리학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생물학에서 양적인 탐구를 비난했다. 생명의 현상들은, 현상들의 복잡성 때문에, 계산가능할 수 없다. 그리고 수적인 화학은 신체들에 적용할 수 없다. 신체들의 분자적 혼성(composition)은 항상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탐구의 유일한 도구는 비교작업(la comparaison)이며, 즉 가장 높은 종처럼 간주된 인간 이래로 동물 계열의 모든 항들을 통하여, 기관들의 비교 연구이다. 실증 해부학은 도방똥(Daubenton, 1716-1799)과 퀴비에(Cuvier, 1769-1832)의 비교해부학과 더불어 시작했다.또한 기관의 주요 진행절차를 구성하는 것은, 한 기관과 다른 기환의 비교(예를 들어, 피부의 체계와 점막의 체계 사이에서 비샤에 의해 발견된 유비)로부터 이다. (767)
따라서 생물분류학(la biotaxie) 즉 분류작업(classification)은 목적 없지만 그래도 방법적 수단의 자격으로 초기의(primordial)의 역할을, 생물분류학이 비교의 관점으로 준비했던 조건에서, 다시 말하면 분류작업 속에서 유기체의 지위가 그것의 자연을 알게 한다는 조건에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생물분류학은 기억술의 인위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적 방법이다. 이 방법은 우리에게 “진실한 유기체적 위계질서”를, 즉 선적인 계열(la série linéaire) 알게 한다.이 계열에서 사람들은 하등동물에서부터 출발하여 기관들의 다양성이, 즉 기능들의 활동성과 수가, 조금씩 증하하는 것을 본다. 꽁트는 라마르크에 반대하고 퀴비에에게 찬성한다. 후손의 이론은 생물학에 모든 방법적 수단을 걷어낸다. “정의할 수 있는 종들과 더불어 계열의 정확한 실현화는, 만일 종들이 고정되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환경과 유기체 사이에는 안정된 균형이 있고, 그리고 유기체들은 환경에서 사라지지 않으려는 것과 같은 균형을 이룬다.목적성의 옛 원리의 역할이 행하는 것은 현존 조건들의 원리이다.그런데 라마르크는 환경을 희생시켜서 이런 균형을 부인했다. (767)
실증성에 대한 동일한 요청은, 실험과 계산의 시도들과 후손의 이론들을 비난하는데로 꽁트를 인도한다. 그리고 현미경의 탐구를 거의 배제하면서, 정태론 또는 해부학에서 섬유조직들과 기관들의 탐구를 제한하는 데로 그를 이끈다. 현미경 탐구의 남용은 이런 관념을 낳게 하는데, 이런 관념이란, “일종의 유기적 모나드들로 된 공상적 괴물들의 조립(assemblage)이며, 이 모나드들은 살아있는 신체 전체의 원초적인 진실한 요소들일 것이다.” 이 섬유를 넘어서는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유기조직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물학을 곧 새롭게 할려고 하는 세포이론으로 향하는 방향성 전체를 막는 것이다. 꽁트에게 있어서, 이런 종류의 이론은 형이상학들과 혼동되어 있는 경향이 있고, 형이상학들은 도처에 퍼져있는 생명을 본다고 하고, 생명성(la vitalité)을 자발성(la spontanéité)과 혼동하고 있다. (767)
역동론 또는 생물학에서, 꽁트는 비샤(1771-1802)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적 삶과 동물적[영혼적] 삶의 연구를 구별한다. 그러나 비샤와 반대로 블랭빌(1777-1850)과 일치하여, 동물적 생명의 두 성질들, 즉 흥분성과 감각성은 배타적으로 할당되었다. 전자는 근육적 섬유에, 후자는 신경 섬유에 할당되어 있다. 그는 구별된 해부학적 자리를 갖는 구별된 속성을 재인식하기를 원치 않았다. ‘기관 없는 기능이 없다’는 이러한 원리는 그를 갈(Gall1, 1758-1828)의 골상학에 열정적인 찬성을 부여하는 데로 이끌었다. 왜냐하면 골상학은 지적이고 도적적인 기능들에 정확한 유기적인 자리를 상응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이 각 기능에 진실한 실증적 경향성에 따라서 두뇌 회백직과 구별된 영역을 상응하게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이런 지적인 역량들의 생물학적 취급은, 생물학이 실증주의를 보편적이게 하는 가장 큰 봉사이라고 생각했다. 의식에 한정되어 있던 심리학은 그래도 여전히 기관 없는 기능의 연구이었으며, 이것은 반대로 철학적 양식(bon sens)이었다. 이데올로지는 지성과 계산에게 우월성을 부여하면서, 이데올로지가 감정들과 본능을 지성에 의존하게 했다. 그리고 이데올로지는 지성은 감각작용에 한정시키면서, 엘베시우스(Helvétius, 1715-1771)의 학설에, 즉 지성들과 이기주의의 동등성의 학설에 이른다.갈은, 각 개인의 그리고 환원할 수 없는 다수의 역량들의, 근본적 성향들의 태생성(l’innéité)에서 출발한다. 이에 따라서 그는 교육에 의하여, 마치 엘베시우스가 그렇게 생각했던 대로, 실재적인 것에 대한 임의적이고 무한정한 변모들을 믿는 신념을 피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사람들이 병치된 역량들의 분산에 반대할 수 있었을 자아의 통일성은 영혼의 통일성의 신학적 이론의 반사[반영]일 뿐이다. 게다가 꽁트는 환상주의적 국지화들을 인정하지 않았다.꽁뜨는 역량들의 생리학적 분석의 해부학적 탐구를 임시적으로 물리치는 것을 필수불가결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심정적 병리학의 연구들 중에서 탁월한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에 관한 전문연구논문(les monographies)에서 분석의 수단을 보았다. 따라서 만일 꾸쟁(1792-1867)과 꽁디약(1715-1780)으로부터 멀어졌다면, 그의 골상학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단어의 현대적 의미에서 심리학에 매우 가까이 있었다. (768)
전반적으로 보아, 생리학에 대한 그의 개념작업은 완전히 고정되고 불변하는 질서와 더불어 구별된 기관들 속에서 구별된 역량들로부터 다시 출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개념작업은, 우리가 그의 사회학에서 주장되는 것을 곧 보게 될, 정신을 분명하게 반영한다. 사람들은 수학들로부터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이동되는 과학적 이상을 본다. 과학의 완전함은 규정작업의 정확성에 있다기보다 개념작업들의 조화에 있으며, 이런 연관 하에서 부분들로부터 전체로 가는 것을 비판한 물리-화학은 전체로부터 부분으로 가는 생명-사회학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다.사회학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보여진 실증과학들의 일체는 이제 그 사회학이 체계를 형성하고, 사회학은 체계의 통일성을 이룬다. 실증과학들은 사회의 물리적 환경(천문학, 물리학, 화학)을 연구한다. 그리고 사회적 행위자(생물학)와 결국 사회 그 자체를 연구한다. 수학들의 합리성은 도덕적인 사물들에게 무차별적 참담함으로 무능한 것으로 제시되었다. 사회학은 다른 모든 과학들 보다 더 우등한 합리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사회학은 세부적인 정신 위에 정신 일체의 고양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769) (57SLH)
3절 사회학 –La sociologie 769
꽁트의 사회학(이 용어는 강의, 4권, 185쪽에서 도입되었다)은 그의 결정적인 구성에서 다음 논의들을 소개한다. 사회적 구조는 그 자체로(en soi), 진보들의 가운데서 끈질기게 이어지는 영속적 성격들 또는 영속적 기관들을 가지고 현존한다. 사회적 정태론(une statique sociale)이 있으며, 이 정태론은 기관들을 규정하고, 또 진보의 법칙들을 포함하는 사회적 역동론(la dynamique sociale)과는 완전히 독립적이다.따라서 마치 18세기의 철학자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사회들의 기원에 거슬러 올라가는 것, 그리고 그 합리적 평면 위에 사회들을 구축하고 재구축하는 것도 부질없다. 이 철학자들에게서 역동론 이외 다른 사회철학이 현존하지 않았다. 이 역동론은 사회들의 기원 자체를 설명한다고 허영을 떨었다. 그런데 꽁트에게서 역동론은 정태론으로 대체되었다. 진보는 질서로부터 온다. 진보는 전 사회의 영속적 요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요소들이란, 종교, 소유권, 가족, 언어, 정신적 힘[종교권]과 시간적 힘[세속권]의 연관 등이다.
역동론을 정태론에 복속시킴은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시대를 마감한다. 이 시대 동안에 완전히 거꾸로 사람들은 사회의 발생과 진보 속에서 사회구조의 이법을 탐구했다. 하나의 상황이 이런 변형작업의 의미와 범위를 파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실증철학 강의의 첫 작업에서 꽁트는 오로지 역동론에 거의 메여있었다. 그리고 정치학 체계에서, 그는 정태론의 거대한 진술을 시행했다. 사람들은 역동론은 그 자체에 충분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역동론의 근본 법칙인 세 가지 상태들의 법칙은 이 상태들의 각각을 소개하고, 그리고 특히 실증적 상태를 마치 분명한 사회 구조를 태어나게 하는 것처럼 소개한다. 이 때에 꽁트의 학설은 혁명적 학설에 대한 그의 태도(son allure)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사회적 구조가 세 상태들로 그것의[구조의] 이행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채 있다고 하더라도(정확하게 마치 꽁트의 천문학에서처럼, 태양계와 은하계는 전혀 변하지 않듯이, 그리고 마치 그의 화학과 생물학 속에서 종들이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사정이 그러한 것과는 매우 멀리 있었다. 꽁트의 사유보다 진화의 관념에 의해 덜 감동받은 사유는 없다. “세 상태”들은 인류가 지나왔던 상태들이며, 인류는 궁극적이고 고정된 자료(un donné)로서 남아있는 사회적 구조를 점점 더 잘 조직화 하려고 노력하였다. 실증주의는 신학과 혁명이 좌초한 거기에서 성공했다.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잘 인간들을 통합하는 인류애의 종교를 - 즉 이타애의 본능들을 발전시킨 소유권의 체제, 여성에게 진실한 정신적 권력을 부여하는 가정의 구축, 세속적 권력과 정신적 권력을 정확한 위치에 두는 정치적 조직화, - 제도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사회의 고정체들(des constantes, 상수들)처럼 있는 종교, 가정, 소유권, 권력들의 분립을 태어나게 하지는 않았다. 이런 고정체들을 부인하는 또는 이것들을 파괴하기를 원하는 모든 학설들은, 마치 사회주의처럼, 그에게는 착오들(des aberrations)인데, 그는 이것들을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770)
역동론은 세 가지 상태들의 법칙으로 환원된다. 이런 법칙은 지적인 진화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감화작용들과 행동들의 영역에서 어떠한 직접적인 응용[적용]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태론은 인간적 감화작용들 속에서, 이기주의(l’égoïsme)와 이타주의(l’altruisme) 속에서 그[구조의] 뿌리를 갖는 사회적 구조를 연구한다. 따라서 만일 사람들이 실증주의를 오로지 마치 세 가지 상태들의 법칙의 학설처럼 정의 한다면, 이런 학설은, 과학적 방법들의 사용에 대해 실재성의 어떤 영역도 제외하지 않기 위한 마치 하나의 노력처럼 전체 속에서 그리고 전체를 위해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꽁트의 제일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리트레(Émile Littré, 1801-1881)도 그 이름에 만족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세 상태들의 법칙은 정태론과 분리할 수 없는 역동론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그의 제2철학이라고 불렀던 것과는, 말하자면 체계(système, 1851-1854)[4권] 속에서 진술된 정태론 즉 실증종교와는 따로 해서, 이 제일철학이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것을 곧 이어서 볼 것이다. 그런데 끌로띨드(Clotilde, 1815-1846)의 죽음이 그의 종교적 감정에 기여했다고 하는 변형들의 중요성이 어떤 것일 지라도, 학설적 통일성은 완전하다. 꽁트 자신은강의에서 자기 진술의 흐름을 통하여, 얼마나 정태학(la Statique)에서 만들어진 부분이 불충분하였는지를, 깨달았던 것 같다. 그는 제4권에서 정치적 철학의 특별한 개론서(실증정치의 체계가 될 개론서)를 알린다. 이 개론서는 사회 정태론의 문제를 즉 강의 속에서 따로 떨어져 소개되었던 지적인, 정치적인, 사회적인, 도덕적인 진화들에 대한 수렴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강의는 뒤르켕(Durkheim, 1858-1917)학파가 이 단어를 취급했던 의미에서 사회학이라기보다 역사 철학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뒤르켕은 더욱이 역동론보다 정태론을 목표로 한다. 아마도 꽁트에게서 유기적 통일성의 학설가를 찾고자하는 이들은 강의에 적대적일 것이다. 그러나 꽁트가 진보와 질서를 서로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고 이해한 것은 확실하다. (771)
그의 역사 철학은 초기 소품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역사 철학은 아마도 학설의 가장 오래된 부분일 것이다. 사회의 재조작화를 위한 필수적인 과학적 작업들에 대한 계획(Plan des travaux scientifiques nécessaires pour réorganiser la société, 1822)(정치의 체계, 4권, 부록 81쪽)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정치학의 실증적 토대인 인간 정신의 진행에서 역사적 자료들(les données)을 대상으로 삼는다. 둘째 부분은 실증 교육을 다루었다. 셋째 부분은 자연에 관한 인간 행동을 다루었다. 거기에서 사회 정태론의 문제가 없다. 역사철학은, 마치 그 시대의 모든 철학들처럼, 혁명의 위기가 사회에 퍼뜨린 위험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생겨났다. 많은 다른 철학자들 다음으로, 꽁트는 14세기에 시작했던 정신적 권력의 자발적 조직파괴(desorganisation)[무질서화]에서 그것의 기원을 보았다. 그리고 정신적 권력의 저항주의(protestantisme, 프로테스탄티즘)는 15세기[16세기]에 절정이었다. 홉스(1588-1679)의 철학은 세속권력과 정신권력에 대한 파괴적 비판과 더불어 18세기의 모든 부정 철학을 생겨나게 한다. 18세기의 철학만큼 “허약한(débile, 바보같은, 얼간이)” 철학의 성공은, 그 철학이 끝을 맺은 해체의 일반 운동을 따로 두면, 기적일 것이다. 그 [역사]철학은 인민 주권의 그것의 독단과 함께 혁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인민주권은 실증적 원리 전체의 결핍으로 변장된 자백일 뿐이다. 자유 경쟁의 원리를 갖는 정치 경제학, 정치 제도들에 의해 사회를 그들의 기분에 맞게 변형하는 그들의 권능 속에서 입법가들의 신념, 이러한 모든 것은 동일한 부정 정신을 배반하는 것이다. (771)
이런 확인된 사항들은, 이 사항들이 드 메스트르(de Maistre, 1753-1821)와 람네( Lamennais, 1782-1854)에서 다루었던드라마적 성격을 갖지 못한다. 꽁트는 (거기에 그의 역사철학의 전제가 있는데), 이런 파괴가 단지 사회의 형식만을 타격하는 것이지, 사회자체를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 사회자체는 태양계만큼이나 또는 동물 종들의 계열만큼이나 파괴될 수 없는 것이다. 순수하게 부정적 상태는 역사 속에서 한 번도 결코 현존하지 않았다. 연속적 사회는 비판론이 파괴하고자 원했던 관념들의 오랜 체계에 의해, 이 체계가 첫 체계의 파괴 동안에 조금씩 정교화 되어가는 다른 체계에 의해 대체되는 점에까지, 지지받고 있었다. 꽁트의 역사 철학은 생시몽에 의해 영감을 받았는데, 생시몽주의자들의 것과는 동일한 것이 전혀 아니다. 그에게서는 소위 말하는 비판적 시대가 없다. 다른 시대가 준비되어 가는 동안에 소멸되어 가는 유기적 시대가 있다(IV, 411). 또한 사람들이 좀 전에 막 읽었던 조직파괴(désorganisation)는, 14세기부터 시작하여 재조직화의 역사 이면처럼 소개되었으며, 또한 시골 마을들의 해방으로부터 태어난 산업적 능력에 의해, 그리고 아랍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실증과학의 도입으로부터 결과로 나온 과학적 능력에 의해,이미 앞서 준비되었던 재조직화의 역사 이면처럼 소개되었다. 한편 군사사적 권력의 능력이고 다른 한편 신학적 권력의 능력이면서 이런 대항적인(antagoniste)능력들인데, 그 능력들 자체들은 이 둘을 세속적이고 정신적 영역으로부터 조금씩 박탈하였다.(772)
따라서 역사는 우리에게 세 가지 상태들을 제시한다. 과거 상태가 있다. 여기서는 정신적 권력이 교황에게 속하는 신학적 체제이며, 교황은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며, 그리고 세속적 권력은 황제들과 왕들에 속하며, 이들은 신의 선택받은 자들이다. [이에 비해] 미래의 상태가 잇다. 여기서 정신적 권력이 과학자들에 의해 유지되었고, 세속적 권력은 산업가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전의 상태가 있으며, 우리들의 상태이다. 이 상태는 과거를 제거하고 미래를 준비한다. 여기서부터 그 당시의 정치의 기묘함들(les bizarreries)이 나온다. 역행하는(rétrograde, 보수주의의) 정당이 있다. 그 정당은 조직화해야 하는 것이 정당한 감정이라 한다.그러나 그 정당은 죽은 ‘과거’를 되살리기를 원하는 것이 잘못이다. 그리고 그 정당은 스스로 모순되게 말하면서, 그 정당이 자기의 원리들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거부했던 자유를 자기에게 요구한다. [이에 비해] 혁명적 정당이 있다. 이 정당은 걸리적거리는 것을 치워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감정을 갖는다. 그러나 이 정당은 조직화의 필연성을 이해하면서도 자기의 비판적 원리들을, 마치 의식의 자유와 같은 원리들을 가지고, 실증적 원리들을 만드는 모순을 말한다. 그러나 이 정당은 원칙 없는 행정적 전제정의 전횡(l’arbitraire, 임의자유)을 제도화하는 대로 이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증주의만이 정합적이다. (772)
역사철학에는, 꽁트의 눈으로 보기에, 귀납법의 가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정치적 발전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지적 발전의 법칙 속에서,정치적 발전의 필연적인 이법(la raison)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한 시대의 정치적 상태는 그 시대의 지적 상태와 신념들의 상태에 의존한다. 지적 진보와 따로 있는 정치적 진보는 없다.이 원리의 최상의 예시는 중세의 찬란한 시대, 즉 꽁트가 매우 자주 인용하는 십자군의 시대와 13세기의 시대이다.모든 정치적 연관들은 그 당시에 카톨릭 신앙에 의해 지배되었다. 다른 한편 지적 발전의 기본적 법칙은 알려졌다. 꽁트는 그 법칙을 생시몽에 의해, 의사 뷔르당(Dr Burdin, 1765-1835)으로부터 받아들였다. 그가 사물들로부터 갖는 인식에서 정신은 세 가지 계속적인 상태들에 의해 통과한다. 신학적 상태가 있다. 이 상태에서 정신은 신적 권능들에 의해 현상들을 설명한다. 형이상학적 상태가 있다. 이 상태에서 그는 신들의 지위를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힘들을 놓았다. 마지막으로 실증적 상태가 있다. 여기서 원인에 대한 모든 탐구를 포기하면서, 그는 현상들 사이에 법칙들 즉 항구적인 관계들을 단순하게 규정한다. 이런 법칙은 과학들의 역사에 끌어낸 수많은 관찰들에 의해 지지될 수 있다. 물리학은 우선 보기에 신화학이다. 여기서 현상들은 신들의 변덕에 의존한다. 물리학이 특히 스콜라철학에서 현상들의 각 분류를 하나의 항구적 힘으로 모으는 형이상학이 된다. 또한 데카르트에게서 반쯤 형이상이 된다. 그 형이상학은 현상들 아래에서 상상하는 역학적 구축작업들을 탐구하였고, 그리고 그 형이상학은 뉴턴과 더불어 실증적이 된다. 알화학[연금술]에서 화학으로 이행, 형이상학적 생기론에서 실증적 생물학으로 이행, 고천문학(l’astrologie)에서 [근대]천문학(l’astronomie)으로 이행은 그만큼 많은 이것들의 증거들을 제공하였으리라. 그러나 꽁트는 관찰보다 더 멀리 갈 것이고, 이런 법칙을 정신의 성격들 자체에 결부시킬 것이다. 인간 정신의 극히 연약함은, 내가 이미 그렇게 말했듯이, 꽁트의 항구적 주제들 중의 하나였다.그 속에[연약한 정신] 이는 질서는 정신이 생각하는 대로 있는 단지 외적 질성의 반영일 뿐이다. 그런데 그는 가장 편한 방식으로 그것[질서]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현상들을 생산하는 자기와 닮은 존재들의 바깥에서 상상하는데, 이는 마치 그가, 마치 자기와 같이, 변덕스런 자기의 고유한 운동을 생산하는 것과 같다. 진보는 추상화작업과 일반화작업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의 출발점은 물신신앙(le fétichisme)이며, 그 물신신앙에서는 세계가 잘못 정의된 수많은 의지들로 서식되고 있었는데, 인간은 물신신앙으로부터 다신론으로 이행했다. 다신론에서는 현상들의 각 계층[종류]이, 즉 바다, 공기 등 각각이 구별된 하나의 신(un dieu)으로 할당되었고, 이 신은 정확한 속성들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이 신이 지배하는 사실들로부터 분리된다. 이로부터 유일 신앙이 나온다. 이 유일 신앙에서 다양한 여러 신들은 [이제] 세계의 외부에 있는 하나의 유일하고 전능한 한 온신(un Dieu)에 의해 대체된다. 이리하여 신학적 상태가 끝난다. 그러고 나서 온신의 인격성은 지워진다. 마치 그[온신]는 일반적 법칙들에 의해서만 작동하듯이, 사람들은 그[온신] 대신에 비인격적인 힘들로 대체한다.그리고 이힘들의 필연적 작용은 사실들의 예견하게 허락해 준다. 추상화 작업의 새롭고 결정적인 노력에 의하여, 그가 이런 예견의 수단들을 찾는 것은 항구적인 법칙들 또는 연관들에서 이다. 그가 있는 그대로의 외적 질서에 도달했던 것은 이런 상태에서이고 단지 이런 상태 만에서 이다. 앞선 두 상태들[신학상태와 형이상학 상태]에서는 상상작용이 다소간에 지배하고 있으며, 그는 자연을 허구들[우화들]로 심었다. [그런데] 실증 상태에서는 모든 허구들이 폐기되고, 과학에 의해 고려된 심정적 질서는 실재적 질서를 대신한다. 이리하여 정신은 자기의 결정적 균형에 도달한다. 따라서 세 상태의 법칙은,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 상상작용에서 이법(la raison)에로 이행과 같은 [의식] 역량들의 필연적 놀이를 표현한다. (774)
덧 붙여야할 것이 있다. 인류애 속에서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은, 작동 중에 있는 과학에 의해 다소 진척이 있었다. 만일 사람들이 근본적인 여섯 과학들을 고려한다면, 사람들은 실증적 상태로 이것들의 이행은 이것들의 위계적 질서에 따라서 일어났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 위계질서는 과학의 대상이 보다 더 일반적이고 보다 덜 복잡하다고 여기는 만큼 보다 더 쉬운 것이었다. 과학들 중의 마지막인 사회학은 혁명적 입법가들과 더불어 아직도 형이상학적 상태에 있으며, 꽁트가 사회학을 실증적 상태로 이행하게 해야할 임무f를 맡았다. (774)
만일 사람들이 이제 역사 철학으로 되돌아온다면, 사람들은 꽁트의 의도에서 (그리고 그가 이에 대해 매우 확신하는 이유인데), 역사철학이 마치 세 상태의 법칙의 사회학에로 적용처럼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을 볼 것이다. 고대의 다신론으로 진행했던 유일신론의 중세는 신학적 믿음 위에 세워졌다. 이행의 시대에서 부정적 위기는 형이상학적 관념들 위에 세워졌다. 결국 인류애의 결정적이고 미래 상태는 실증주의 위에 세워졌다. 신학적 상태와 군사적 정치 사이에 친근성이 있다. 이 둘은 서로 서로 일종의 폭력에의해, 그리고 일종의 상층에 의해 사회적 통일성을 확립했다.노예제와 강요된 노동은 이런 상태에 연결되어 있다.형이상학적 상태와 인민 주권과 인간의 권리들의 이론 사이에도 친근성이 있다. 인간들은 거기에서, 마치 이론들 사이에 동등한 통일성처럼, 형이상학적 힘들의 방식으로 추상적으로 고려되었다. 실증적 상태와 산업적이고 평화적인 발전 사이에 친근성이 있다. 꽁트는 1841년에 완전히 평화로운 시대의 마지막 도래를, 식민지 체제의 쇠퇴를, 내부의 무질성의 억압에 맞는 제한된 군대의 역할을 예견한다(강의, VI, 350). (774)
세 상태들의 법칙으로부터 정치적 진화로 적용에서는 어떤 애매함이 있다. 우선 형이상학적 상태는 혁명적 이전에 잘 해당하지 않는다. 지적으로 이 상태는 신학적 상태와 연속성으로 되어 이다. 자연의 힘들은 아주 추상적으로 생각된 신들이다.정치적으로 형이상학적 상태는 앞선 상태의 부정자이자 파괴자이다. 그러나 특히 사회들의 과학으로부터 실증적 상태로 이행에서 어떻게 혁명적 위기에 종말을 고해야만 하는 조직화에 도달하는가? 꽁트는 꽁도르세와 다른 철학자들이 과학으로 행하고자 하는 실천적 용도와 같은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중세의 카톨릭주의가 생산했던 변화에 유비적인 심정성(mentalité)의 변화이다. 그는 새로운 정신적 권력을 창조하고자, 즉 새로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원했다. 이런 것과 저런 것 사이에, 즉 사회적 사실들의 실증적 연구와 사회를 새롭게 해야만 하는 변화 사이에, 비례가 있는가? 그러나 더군다나, 여기까지 꽁트는 사회적 사실들을 어디에서 연구했는가? 그가 정신이 사회적 사실들의 연구에서 형이상학적 상태로부터 실증적 상태로 통과해야만 하는 사회적 사실을 증명했다고, 우리가 인정하자. 그것은 여기서 방향일 뿐이지만 말이다. (775) (57SLJ)
4절 인류애의 종교 La religion de l’humanité
충분히 예기치 않은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들이 해결 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강의에서 체계로 이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새로운 질서를 생산하는 것이 실증 사회학이기는커녕, 오히려 실증 사회학에 의해 성취되고 있는 사회에 내속하는 질서의 의지이다. 진보는 질서로부터 온다. 운동은 현존으로부터, 역동론은 정태론으로부터 온다. 이런 질서는, 만일 사람들이, 한 체제를 발견하기 위하여 과학자의 지적 우월성과 신학자의 사회적 소질을 통합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 여기서 한 체제란 지적인 요구들에 가장 적합한 것이기고 하고, 그리고 도덕적 요구들을 만족 시킬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체제는 소란스런 “심장에 반대하여 정신의 봉기”를, 즉 이법의 이름으로 부정하는 비판적 지성과 심장의 이름으로 주장하는 신학 사이에 충돌을 끝장내는 것이고, 이런 조건에서 만이, 사회는 강화될 수 있다. (775)
그런데 사회학에서 실증성의 형식적 요청은, 모든 조건들을 만족하게 하는 실재성을 파악하는 데로 이끈다. 그것은 인류애(Humanité)이다. 실증 사회학은 모든 노동과 모든 인간적 사유의 필연적 연속성을 되새기는 사회학이다. 그는 각 개인들에게 제시하기를, 각 개인은 과거에 의해서만 현존한다고, 그리고 각자는 인류애로부터 물질적, 지성적, 도덕적 삶을 끌어낸다고, 죽은 자들은 산자들 보다 더 많이 산다고 한다. 완전히 실증적 용어로서 인류애는, 분석될 수 있고 역사에 의해 알려지며, 마치 개체의 온섭리(la Providence)와 같다. 그 개체의 온섭리는 그의 위대한 인간들에서 그리고 그의 발명들에서 숭배의 대상이어야 한다. 이러한 대상 속에서 허구적인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사회학의 덕분에 인간정신은 외적 질서의 거울일 뿐만 아니라 인간질서의 거울로서 세계의 거울이 된다. (776)
종교는 개인 의지들을 규제하고, 이것들을 집결시키는 권력(le pouvoir, 능력)다. 실재적으로 이 권력만이 신의 허구적 개념 대신에 인류애의 실증적 개념으로 대체하는 종교를 갖는다. 인류애의 종교 안에서 그리스 다신론의 지적인 통일성이, 로마의 다신론의 정치적 통일성이, 크리스트교의 도덕적 통일성이 결합된다. 이 종교는 인류애가 소수적일 때 필수불가결했던 “신의 섭정”을 그만두게 한다. 이 종교는 18세기의 비판적 지성과 신학 사이에 충돌을 특징지웠던 “심장에 대한 정신의 봉기”에 끝을 낸다. 여기서 인류애의 실증적 용어에 근거한 신앙은 행동을 규제하기 위하여 사랑과 일치한다. (776)
따라서 꽁트는 카톨릭주의의 통일적이고 조직화하는 힘을 만들었던 모든 것을 간직한다고, 그리고 심지어는 인류애 용어의 객관성 덕분에 카톨릭주의를 높이 올린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종교는 의례들와 성사들(sacrements)에까지 또한 성무일지까지 카톨릭 종교의 모든 형식들을 재생산하는데 집착[열중]하며, 신을 인류애 또는 위대한 존재(Grand-Etre)에 의해, 그리고 성자들을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대체한다. 그는 독단[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기능으로 삼는 정신적 권력 또는 성직자의 권력을 제도로 만든다. 사회의 지적인 국면을 구성하는 이런 성직자는 현실적 과학을 특징지우는 헛소리들(les divagations)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 그의 작업은 탐구와 분석이라기보다 종합이며, 실증주의적 독단[교리]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종합이다. 이는 특히 “철학적 논문들의” 작성에 알맞은 “주관적” 종합이다. “이 논문들에서 각 과학은 그것의 도덕적 외연에 귀착되어 있고, 마땅히 인류애의 종교에 편입되어 있다.” [여기서] 도덕적 외연은 말하자면 과학적 작업의 내적 요청들에 의해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작업]의 사회적 용도에 의해 한정된다는 것이다. (776)
지성은 한계들을 지성 자체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 꽁트에게서 정신적 권력(le pouvoir, 능력)은 절대적 장악이 아니다. 지성은 행동하기 위해서만 사유한다. 그리고 지성은 심장과 성격으로부터 오는 동기들을 위해서만 행동한다. 따라서 독단 이라고 말하는 정신적 권력 바깥에, 산업을 본질적 기능으로 삼는 세속적 권력이 있다. 그 산업이란 다시 말하면 인간의 필요들[수요들]에 맞게 자연에 대해 추론된 개발(l’exploitation, 착취)이다. 꽁트에 따르면 산업적 활동성은 사회의 영속적 요소인 소유에 근거하며, 그것[소유]의 동기는 이기주의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에 반대하여, 꽁트가 생각하기로는, 산업 활동은 그것의 동기들이 무엇이든 간에, 각자가 타인을 위하여 일하는데 익숙하여서, 이타적인 성향들을 발전하는데 기여한다. (777)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도 행동도 그 자체로는 개체를 인류애에 합병작업하는 데 도달할 수 없으리라. 강의만이 인식하는 시대적이고 정신적 권력의 옆에는, 체계는 이타적인 감화작용들로부터 독립적인 원천의 필연성을 제시한다. 이 원천은 위대한 존재의 숭배 전체의 최종 기원이며, 지성과 의지로부터 구별된 심장(le coeur)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자연에 낯선 이타주의를 부당하게 믿는다. 그러나 이타적인 성향들은 진실로 가정에서만 전개된다.실증주의는 가정을 마치 본질적인 제도처럼 생각한다.실증주의는 그리스 기원의 이상향들에 반대하며 이 가정[가족제도]을 옹호한다. 그리고 꽁트는 이혼을 금지하면서 그리고 장자권을 제도화하면서 가정을 견고히 할 것을 주장한다. 가정에서 감정적인 충력은 여성으로부터 온다. 실증주의의 최종적 성공은 가정에서 여성이 행사할 정신적 영향에 기인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클로띨드 드 보(Clotilde de Vaux, 1815-1846)를 위한 사랑이라는 것을안다. 그녀는 꽁트에게서 감정의 역할을 터뜨리게 하였다. 그의 상상작용 속에서, 인류애 숭배의 마지막 지지점인 여성은 그에게서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성스런-오마니의 이상향은 “실증 종교의 종합적 요약이 되며, 이 이상향은 실증 종교의 모든 국면들을 조합한다.” 그는 순결한 모성애에 의해 “정신적이고 세속적인 우두머리들의 영입들을 통해서 통속적 인구제도보다 더 잘 채택된 세습 없는 계급이 솟아나게 할 것을”(정치학, IV, 276과 279) 꿈꾼다.
감정의 권력[능력]에 대한 명증화는, 체계에서, 사회학보다 상위학인 일곱째 과학의 개념작업으로 그를 이끈다.그것은 도덕학이며, 강의에서 그가 사회학에서 분리하지 않았었다. 새로운 과학의 필연성은, 마치 인류애 숭배의 마지막 원천처럼 감정의 역할에 연결되어 있다. “세속적 과학이 환경의 인식(천문학, 물리학, 화학)을 적절하게 하여 신체들의 인식(생물학)에 의해 완전하게 되었던 묘사한 이후에, 성스러운 과학(사회학)은 영혼의 체계적인 연구에 접근하며,집단적 현존을 높이 평가하며… 그러나 이러한 필연적인 시험은 최종 준비를 구성하며, 이 준비에 대한 불완전한 특성이 반박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사람들은 여기서 느끼기를, 지성의 특별 연구와 활동성의 연구는 여기서 감정의 연구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고, 이 연구들은 여기서 결과들만을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 결과들의 원천과 사명은 이 다음 과학(도덕론)에 속한다.”(정치학, IV, 232) “도덕론에 의해서 종교는 그것의 대상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주관적 기원에서 파악된다. 비록 다른 과학들이 ‘도덕학의 가지[부분]들’일 뿐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IV, 187) (778)
마지막으로 꽁트의 사상은 단선적 형식이라기보다 순환적인 형식을 띠는 경향이 있다. 인류애의 종교는 물신론의 근접되어 있다. 서방인들이 물신신상에 빠져있는 야생적 인민들을 교육시켜야 하는 임무를 가졌다고 할 때, 꽁트가 서양 문명에 의해 거쳐온 모든 매개적인 단계들이 회피될 수 있다고 믿었던 점에서 말이다. 그런데 합리적 반성은 신화와 감정의 무매개성으로 향하여 후퇴하고 있다. 종교는 인류애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자발적인 면에서 인간은 종교적 존재일 뿐이다. 인간을 이기적 행동으로 그리고 바깥의 연구로 밀고나가게 하는 것은 오직 호의적이지 않는 환경에 대한 저항(resistance)이다. 그러나 실증주의는 지성과 활동성을, 이 둘이 삼정에 새로이 예속하는 방식으로, 규칙으로 만든다. 교육은,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비약이 그 자체에 의해 가질 수도 있을, 나쁜 효과들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정치학, IV, 250; 261) (24:11, 57SLJ)
# 참고문헌 Bibliographie 778
H. Gouhier(1898-1994), La vie d’Auguste Comte, 1931; 2e éd., 1965, indique une bibliographie des oeuvres de Comte (p. 235-237); La jeunesse d’Auguste Comte et la formation du positivisme, 3 vol., 1933-1964.
Lucien Levy-Bruhl(1857-1939), La philosophie d’Auguste Comte, 1900.
P. Ducassé(1905-1983), La methode positive et l’intuition comtienne, avec bibliogr., 1939.
P. Arbousse-Bastide(1899–1985), La doctrine de l’éducation universelle dans la philosophie d’Auguste Comte, 2 vol., 1957.
G. Gurvitch(1894-1965), Les fondateurs de la sociologie contemporaine, 1955.
*
1857 레비-브륄(Lucien Levy-Bruhl, 1857-1939), 프랑스 철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La philosophie d’Auguste Comte, 1900
1898 구이에(Henri Gouhier, 1898-1994), 프랑스 철학자. 크리스트교에 영감을 받은 철학사가. La jeunesse d’Auguste Comte et la formation du positivisme, 3 vol., 1933-1964.
1899 아르부스-바스띠드(Paul Arbousse-Bastide, 1899–1985), 프랑스 철학자, 대학교수, La doctrine de l’éducation universelle dans la philosophie d’Auguste Comte, 1957)(2 vol., 1957)
1905 뒤까세(Pierre Ducassé, 1905-1983), 프랑스 철학자, 과학과 기술 사가. La methode positive et l’intuition comtienne, 1939.(avec bibliogr.)
1894 귀르비치(Georges Gurvitch, 1894-1965), 러시아출신 프랑스 사회학자. 1928프랑스 국적. Les fondateurs de la sociologie contemporaine, 1955. (57SLA)
(24:33, 57SL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