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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이의 아버지인 심학규와는 아무런
인척관계가 없는 심학도를 공부합시다.
우선 퇴계 이황을 알아야 심학도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조금 길고 한문이 많이 나오는 글이니까 한가할 때
살살 더듬으면서 읽어가시다보면
고향의 맛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씨 님은 한문과 고전에 깊이가 있으시니 쉽게 이해하실 수도 있겠네요.
코로나 풀리면 회원들 모아놓고 특별강연을 한 번 하심이,,, 물론 무료로요ㅎㅎ.
우선, 가볍게
퇴계 이황에 얽힌 일화 하나부터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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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改家시킨 퇴계 이황(退溪李滉)
퇴계선생의 맏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한창 젊은 나이의 맏며느리는 자식도 없는 과부가 되었다. 퇴계 선생은 홀로된 며느리가 걱정이었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가 어떻게 긴 세월을 홀로 보낼까?'
그리고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집이나 사돈집 모두에게 누(累)가 될 것이기에, 한밤중이 되면 자다가도 일어나 집안을 순찰하곤 했습니다.
어느날 밤, 집안을 둘러보던 퇴계선생은 며느리의 방으로부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순간 퇴계 선생은 얼어 붙는 것 같았습니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며느리의 방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 놓고 짚으로 만든 선비 모양의 인형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형은 바로 남편의 모습이었다.
인형 앞에 잔에 술을 가득 채운 며느리는 말했습니다.
"여보, 한 잔 잡수세요."
그리고는 인형을 향해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남편 인형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는 며느리.......
한밤중에 잠못 이루고 흐느끼는 며느리........
퇴계 선생은 생각했습니다.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이냐?
젊은 저 아이를 수절시켜야 하다니.........
저 아이를 윤리 도덕의 관습으로 묶어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다, 인간의 고통을 몰라주는 이 짓이야말로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여기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된다. 저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이튿날 퇴계 선생은 사돈을 불러 결론만 말했습니다. "자네, 딸을 데려가게."
"내 딸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 없네. 무조건 데려가게."
친구이면서 사돈관계였던 두 사람이기에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딸을 데리고 가면 두 사람의 친구 사이마저 절연하는
것이기 때문에 퇴계선생의 사돈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안되네. 양반 가문에서 이 무슨 일인가?"
"나는 할말이 없네. 자네 딸이 내 며느리로서는 참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만 어쩔 수 없네. 데리고 가게."
이렇게 퇴계선생은 사돈과 절연하고 며느리를 보냈습니다.
몇 년후 퇴계선생은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므로 한 집을 택하여 하룻밤을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 하나하나가 퇴계선생이 좋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더욱이 간까지 선생의 입맛에 딱 맞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 집 주인도 나와 입맛이 비슷한가 보다.'
이튿날 아침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반찬의 종류는 어제 저녁과 달랐지만 여전히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만 올라온 것입니다.
나의 식성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이토록 음식들이 입에 맞을까? 혹시 며느리가 이 집에 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퇴계선생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막 떠나가려는데 집주인이 버선 두 켤레를 가지고 와서 '한양 가시는 길에 신으시라'며 주었습니다. 신어보니 퇴계선생의 발에 꼭 맞았습니다.
아! 며느리가 이 집에 와서 사는구나.' 퇴계선생은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을 보나 주인의 마음씨를 보나 내 며느리가 고생은 하지 않고 살겠구나.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짐작만 하며 대문을 나서는데 한 여인이 구석에 숨어 퇴계선생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퇴계선생은 이렇게 며느리를 개가시켰습니다. 이 일을 놓고 유가의 한 편에서는오늘날까지 퇴계선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선비의 법도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다. 윤리를 무시한 사람이다." 하지만 또다른 한 편에서는 정반대로 퇴계선생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퇴계선생이야말로 윤리와 도덕을 올바로 지킬 줄 아는 분이시다. 윤리를 깨뜨리면서가지 윤리를 지키셨다."며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까요?
이런 훌륭한 분들이 이 나라의 선구자가 아닌지요?
출처 = 추포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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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퇴계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를 더합니다.
퇴계이황(退溪李滉)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1527년(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1543년 10월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1552년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학문세계와 저서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다.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다. 그가 『주자대전』을 읽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를 통해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희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 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으며, 『연평답문(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夙興夜寐箴註)」에 관해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하였고, 57세에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를 완성하였으며,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게 답해 『백록동규집해(白鹿洞規集解)』에 관해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문변(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해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구(李球)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하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했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하여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의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해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해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제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周敦頤)의 저작이며, 제2도의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복심(程復心)의 작품이다. 제3도의 제사는 주희의 말이고, 도는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제4도의 본문은 주희의 『대학경(大學經)』 1장(章)이고, 도는 권근(權近)의 작품이다. 제5도의 규약은 주희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의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복심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희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복심의 저작이며, 제9도에서 잠은 주희의 말이고, 도는 왕백(王柏)의 작품이며, 제10도의 잠은 진백(陳柏)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처는 이황의 독자적인 작품이고, 나머지 17개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부륜(金富倫)·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유일(鄭惟一)·구봉령(具鳳齡)·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정(李楨) 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다. 나아가 그는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한국 유학 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 왔다.
상훈과 추모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하여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 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 개 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비 보조로 크게 보수·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 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와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되어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 400주기 기념 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 학술지 『퇴계학보』는 2009년 126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턴·뉴욕·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독일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기념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독일·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해 주제 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 오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해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다. 그리고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 만 한 풍모가 있다.”고 했을 때, 이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해,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했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술해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 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없다.”며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해 원명 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는 ‘주자의 도통(道統)’에서 ‘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고 존신(尊信)했으며, 구마모토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해 속학(俗學)이 되어 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다.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그를 원·명시대를 통해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했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 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호경재(胡敬齋)와 명말청초의 육가서(陸稼書)·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日鮮史話)』에 의하면, 요코이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메이지 제일의 공신이며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해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해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고 술회했다 한다.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는 대학의 증축·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해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다. 이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며 거리낌 없이 그를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하게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주자가 작고한 뒤 …… 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 퇴계는 ……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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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하게 읽은 분은 알겠지만
그의 성학십도에 제 8도로 '심학도'가 등장합니다.
일단 성학십도를 소개합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란?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 인데 어릴 때 이름은 서홍(瑞鴻) 이라고 하였다 그의 관향은 진보(眞寶) 일명 진성(眞城)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황(李滉)이 1568년(선조 1) 12월 왕에게 올린 상소문. 1책. 목판본.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군왕의 도(道)에 관한 학문의 요체를 도식으로 설명하였다. ≪퇴계문집(退溪文集)≫ 중 내집(內集) 제7권 차(箚)에 수록되어 있다.
‘성학십도(聖學十圖)’라는 명칭은 본래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로 ≪퇴계문집(退溪文集)≫ 내집과 ≪퇴계전서(退溪全書)≫에 수록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진(進)· 차(箚)· 병도(幷圖)의 글자를 생략해 〈성학십도(聖學十圖)〉로 명명되고 있다.
진(進)은 〈성학십도(聖學十圖)〉의 글을 왕(王 : 宣祖)에게 올린다는 의미이고, 차(箚)는 내용이 비교적 짧은 글을 왕에게 올린다는 뜻으로 일명 주차(奏箚)·차문(箚文)·차자(箚子)·방자(膀子)·녹자(錄子)라고도 한다.(짧은 상소문 같은 종류를 말함)
병도(幷圖)는 도표(圖表)를 글과 함께 그려 넣는다는 뜻이다.
"성학(聖學)"이란 곧 "유학(儒學)"을 의미하고, 그 유학 중에도 특히 "성리학(性理學)"을 의미한다. 유학 또는 성리학을 성학(聖學)이라 일컫는 까닭은 이 학문이 곧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갖춘 학문"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특히 임금에 대하여는 "성왕(聖王)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갖춘 학문"임을 나타낸다.
퇴계가 50세 이후 고향인 도산(陶山)으로 퇴거하여 연구와 저술과 강학에만 전념하던 끝에 68세 때 [성학십도]를 지었다. 그의 별세한 나이가 70이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만년 작으로 그의 학문의 온축(蘊蓄)을 남김없이 쏟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담겨진 내용으로써 충분히 증명된다.
(1) 太極圖(태극도)
(2) 西銘圖(서명도)
(3) 小學圖(소학도)
(4) 大學圖(대학도)
(5) 白鹿洞規圖(백록동규도)
(6) 心統性情圖(심통성정도)
(7) 第七仁說圖(제칠인설도)
(8) 心學圖(심학도)
(9) 敬齋箴圖(경재잠도)
(10) 夙興夜寐箴圖(숙흥야매잠도)
이 목차만 보아도 당시 정주계(程朱系) 성리학의 총 결산서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퇴계는 이 책에서 당시까지의 정주계의 우주설(宇宙設)과 심성설(心性設) 및 수양설(修攘設)을 도해와 해설의 방법으로 총괄적이면서도 중점적으로 요령 있게 정리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퇴계 자신의 학문의 규모와 성격과 깊이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만년의 퇴계가 이것을 그 해(1568)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선조에게 "차문(箚文)"과 함께 만들어 올린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점을 상기하면 성리학(性理學)을 통한 "성인(聖人)"이 되는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는 뜻과 함께, 어린 임금으로 하여금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조건을 갖추는 "제왕학(帝王學)"의 길을 가르치려는 퇴계의 뜻이 담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또한 은퇴한 퇴계로서 국가에 바친 만년 충절(忠節)의 일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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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도표에 약한 분들은 도대체 뭔 소린이가 할 것 같아서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성학십도'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동의대 김봉건교수의 정리를 빌려옵니다.
퇴계선생과 성학십도(聖學十圖) / 김봉건(동의대 철학교수)
1. 『聖學十圖』
『성학십도』는 만년의 퇴계가 성학(聖學)의 대강을 추려 10개의 도와 도설에 집약시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선조가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어 퇴계에게 경연(經筵)을 부탁하자 당시 퇴계는 68세의 노령이라 직접 상경하지는 못했지만 성학십도를 올리는 서문(「進聖學十圖箚」)에는 어린 왕이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볼 수 있다.
퇴계는 68세 되던 해(1568) 12월에
퇴계가 만년에 자신의 원숙한 학문을 10개의 도와 도설에 간결하게 집약시킨 대표작으로서, 조선 시대 도학의 정점에 선 퇴계 철학의 결정체이다.
2. 『성학십도』의 각 도의 구성과 내용
1) 「태극도」(太極圖) : 주렴계의 「태극도」와 「태극도설」로서, 우주의 궁극 존재인 태극에서 음양·오행을 거쳐 인간과 만물이 생성되어 나오는 과정을 제시한 것이다. 주자는 이 도설을 도리의 큰 두뇌가 되는 것이요 백세 도술의 연원이라고 하여 극히 중요시하였다.
2) 「서명도」(西銘圖) : 장횡거의 「서명」을 정복심이 도상화한 것이다. 상하 2도로 구성된 「서명도」에서, 상도는 하나의 이가 사물에 따라 나뉘어 나타나는 것을 변별하는 것이고, 하도는 어버이를 극진히 섬김으로써 하늘을 섬기게 되는 도리를 밝히는 것이다. 「서명」은 천지·만물과 일체를 이루는 원리로서 인의 본체를 설명하고 있다.
3) 「소학도」(小學圖) : 『소학』의 체계를 퇴계가 도상화한 것이고, 도설은 주자의 「소학제사」이다. 『소학』은 유학을 배우는 입문서로서 오륜의 유교 규범과 그 실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4) 「대학도」(大學圖) : 권근이 『대학』의 경1장을 도상화한 것이다. 3강령과 8조목을 중심으로 체용과 지행의 구조 및 공부와 공효의 실현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 주자가 백록동서원의 학도들에게 학규로 제시하였던 「백록동규」를 퇴계가 도상화한 것이며, 도설은 주자의 「동규후서」이다. 오륜의 규범과 학·문·사·변·행에 따른 궁리·수신·처사·접물의 학문 요령을 제시하고 있다.
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 상중하의 3도로 되어있는데, 상도는 정복심이 그린 것을 퇴계가 약간 수정한 것이고, 중도와 하도는 퇴계가 그린 것이다. 도설은 정복심의 「심통성정도설」이다. 퇴계의 사단칠정에 대한 해석이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조선 후기에 가장 활발한 토론의 대상이 되었던 도이다.
7) 「인설도」(仁說圖) : 주자의 「인설도」와 「인설」로서, 사덕의 근본이 되는 인의 의미와 실현 양상을 밝히고 있다.
8) 「심학도」(心學圖) : 정복심의 「심학도」와 「심학도설」로서, 심이 신의 주재요 경이 심의 주재를 이루는 주조를 밝혀 ‘심’과 ‘경’을 도의 상하의 두 중심으로 삼으며, 심학이 경을 근본으로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9) 「경재잠도」(敬齋箴圖) : 주자의 「경재잠」을 왕백이 도상화한 것으로, ‘심’을 도의 중심에 놓고 인간의 모든 행동 속에서 경을 실천하는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10)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 : 진백의 「숙흥야매잠」을 퇴계가 도상화한 것으로, ‘경’을 도의 중심에 놓고 새벽부터 밤까지 모든 순간마다 경으로 일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3. 성학십도의 구조
『성학십도』는 제1-5도에서 천도에 근본하여 인륜을 밝히고 덕행에 힘쓰는 길을 제시했다. 그리고 제6-10도에서는 심성에 근원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며 경외를 높이는 길을 제시했다. 이것은 천도와 인도가 상응하는 수양의 ‘천인상응’의 구조를 드러낸 것이다.
『성학십도』는 또 제3 「소학도」와 제4 「대학도」를 10도의 중심으로 삼고, 제1 「태극도」와 제2 「서명도」를 학문의 처음 실마리를 찾아서 확충하고 하늘을 본받아 도를 실현하는 극치로서 학문의 표준이 되는 것으로 규정하며, 제5 「백록동규도」부터 제10 「숙흥야매잠도」까지는 선을 밝히고 자신을 참되게 하며 덕을 높이고 일을 넓히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것으로서 학문의 터전이 된다고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제8「심학도」·제9「경재잠도」·제10「숙흥야매잠도」는 ‘경’의 실천방법을 제시한 것으로 퇴계의 성학구조가 경을 핵심원리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퇴계 철학의 핵심이 천도와 심성을 하나로 꿰뚫고 있는 ‘이철학(理哲學)’이요, 이를 경(敬)의 심법으로 실현하는 ‘거경수양론’임을 알 수 있다.
4. 『성학십도』의 내용
1) 「태극도」(太極圖) :
『성학십도』의 제1도에서 「태극도」를 싣고 있는데, 이는 성리학의 교과서적인 문헌인 『근사록』이나 성리학을 집대성한 『성리대전』에서 첫머리에 도체(道體)의 문제로서의 「태극도」를 수록하고 있는 학문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태극도」는 성리학에 있어서의 궁극적 실재의 개념과 우주 생성의 기본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성리학의 근본 관심은 위태로운 인간의 심성을 천리에 계합시키는 데에 있었으므로 먼저 우주와 인간의 궁극적 실재인 천과 인간 심성과의 상응 관계를 밝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퇴계가 『성학십도』의 제1도로서 「태극도」를 선정한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라 하겠다.
「태극도」에서는 ‘태극’이 동정하여 음양이 되고, 음양이 변합하여 오행이 생긴다. 무극의 진과 음양과 오행이 묘합하여 만물이 화생하는 원리를 간략한 그림으로 표시하였다.
2) 「서명도」(西銘圖)
‘서명(西銘)’은 북송의 장횡거(張橫渠)가 자신의 좌우명으로 지은 것으로서 원명은 ‘정완(訂頑)’이나 서실의 서쪽 창가에 걸어두었다고 해서 서명으로도 불린다.
서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乾)을 부(父)라 하며, 곤(坤)을 모(母)라 한다. 나는 매우 작은 존재로서, 혼연히 그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지사이에 들어찬 것은 나의 몸이며, 천지를 이끄는 원리는 나의 본서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의 동포이며, 모든 사물이 나와 같은 족속이다. 임금은 내 부모의 종자(宗子)이며, 대신은 그 종자의 가상(家相)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는 것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근본이며, 외롭고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 어린이를 어린이로 보살피는 근본이다.
성인이란 그 덕이 천지와 더불어 합치되는 사람이며, 현인이란 빼어난 사람이다. 무릇 천하의 늙어 허약한 사람이라든가, 병들어 고통을 받는 사람이라든가, 형제가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홀아비나 과부와 같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다 나의 형제가 심히 곤란한 처지를 당하고서도 호소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다.
때로 하늘의 뜻을 보존하는 것이 내가 천지의 아들로서 천지를 공경하는 것이며, 일상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는 것이 효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천명을 어기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하고, 인을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악한 일을 더하는 자는 부재(不才)이고, 천지로부터 받은 천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오로지 부모를 닮는 자이다.
천지의 조화를 알면 그 천지 부모의 사업을 잘 계속하며, 그 조화 속의 신묘함을 다 궁구하면 그 천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게 된다. 남이 보지 않는 방구석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며,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데 게으르지 않음이다. 맛 좋은 술을 싫어하는 것은 우(禹)가 어버이를 돌보는 것이며, 영재를 기르는 것은 영봉인(穎封人)이 그 효자의 동류를 길이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고생되어도 효성의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아 마침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순(舜)의 공이며, 도망할 곳 없는 듯이 죽이기를 기다리는 것은 신생(申生)의 공경함이다. 주신 몸을 온전하게 가지고 살다가 돌아간 사람은 증삼(曾參)이며, 따르는 데 용감하여 명령에 순종하기로 손꼽힐 사람은 백기(白起)이다.
부귀와 복택은 장차 나의 삶을 두텁게 할 것이며, 빈천과 우척(優戚)은 나를 옥성(玉成)시키는 것이다. 살아서는 천지와 부모를 순하게 섬기다가 죽게 되면 나는 편안히 돌아갈 것이다.”
「서명도」는 장횡거(張橫渠)의 서명(西銘)을 원의 임은(林隱) 정복심(程復心)이 도상(圖象)으로 제시한 것이다. 퇴계는 서명의 전체적 성격을 “나와 천지와 더불어 만물이 그 이치가 본래 하나인 까닭을 반복하여 밝히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천지와 인간과 만물의 존재가 그 기질의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이치에서는 동일한 하나의 이치(一理)로 관통한다는 것이요, 이에 따라 우주안의 모든 존재는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하늘을 아버지라 일컫고, 땅을 어머니라 일컫는다.”(乾稱父, 坤稱母)고 한 서명의 사상은 “하늘의 도는 남자를 이루고, 땅의 도는 여자를 이룬다.”(乾道成男, 坤道成女)고 한 태극도설의 인식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서명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혈연관계로 나타냄으로써 더욱 강한 정감적 일체감을 드러냈다. 이를 바탕으로 어버이를 섬기는 사친(事親) 근거가 하늘을 어버이로 섬기는 사천(事天)에 있음을 밝히게 되고, 실제로는 사친을 실천함으로써 사천을 하는 데까지 나아가 통달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3) 「소학도」(小學圖)
『소학』은 주자가 동몽 교육을 위해 문인 유청지와 더불어 『예기』, 『통감』 등의 고전에서 교육과 훈화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가려 뽑아 편찬한 책이다. 주자학의 전통에서는 사서에 앞서 반드시 읽을 것을 요구하고, 『소학』과 사서를 합하여 오서(五子書)로 일컬음으로써 소학에 준경전적인 지위를 부여하였다.
『소학』의 체계는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을 강령으로 삼고 있으며, 계고(稽古)는 삼대 성현의 자취에서 이 강령을 입증한 것이고, 가언(嘉言)·선행(善行)은 한대(漢代) 이후 현인들의 언행에서 이 강령을 실증한 것이다.
조선조에서는 태조 때 권근의 건의를 받아들여 태학에 입학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소학』에 통한 지 여부를 시험한 다음에 생원시에 응하도록 하였고, 태종 때 “8세 이상 모두 학당에 나가면 소학의 도로써 가르친다.”고 법조문으로 명문화 할 만큼 소학을 매우 중시하였다.
수신으로써 치인의 근간으로 삼는 유학에서 쇄소응대진퇴지절(灑掃應待進退之節)로부터 시작하는 수기의 요결인 『소학』을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며, 포은 정몽주 → 야은 길재 → 강호 김숙자 → 점필재 김종직 → 한훤당 김굉필로 이어지는 영남 사림파의 학맥에서는 소학을 매우 중시하였다. 특히 김굉필은 스스로 ‘소학동자’로 자처할 만큼 소학에 바탕을 둔 수신을 강조하였고, 조광조가 절의를 높이고 명리를 경계하는 엄격한 도학 정치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도 그러한 실천의식의 기반에 준거를 제공한 것은 역시 소학이었다.
퇴계는 『성학십도』의 제3도로 「소학도」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도는 퇴계가 소학의 목차에 의거하여 도상화한 것이다. 퇴계는 「소학도」의 도설에서 “소학과 대학은 서로 기다려 이루어지는 것으로,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이다”(小學大學相待而成, 所以一而二二而一者也)고 하여, 유학에서 소학과 대학이 서로 떠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퇴계가 『성학십도』의 제1도와 제2도에서 천지간의 상응관계를 제시한 후 제3도로서 성학의 실천 단계에서 가장 먼저 「소학도」를 선정한 것은 그 의미가 매우 무겁다 할 것이다.
4) 「대학도」(大學圖)
『대학』은 유학에 있어서 성학의 목적과 ‘실천 과정의 절차’(行程節次)를 제시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은 성학의 목적을 명명덕(明明德)·신민(新民)·지어지선(止於至善)의 삼강령으로 제시하고, 그 목적을 실천하는 행정으로서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팔조목을 제시한다.
『대학』은 이와 같이 근본에서부터 지말에 이르기까지 인간 행위의 규제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퇴계는 권근의 「입학도설(立學圖說)」에 들어있는 「대학지도(大學之圖)」를 수록하여 제4도로 삼았는데, 『성학십도』의 열 개의 그림 가운데 우리나라 학자의 도를 전재한 것은 이 도 뿐이다. 퇴계는 자신보다 150년 정도 선배인 권근의 견해를 존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퇴계는 「대학도」에서 『대학』의 구조를 첫째, 본·말과 체·용의 구조, 둘째, 시·종의 구조, 셋째, 지·행의 구조, 넷째, 공부·공효의 구조로 해석한다.
퇴계는 학문 방법으로서의 『대학』을 중시하여 심성 도야의 방법으로서의 『소학』과 상호보완적이고 연속적 일관성을 지니는 것으로 인식한다. 즉 『소학』이 심성의 바탕을 확보하는 것으로 대학의 기본이 되고, 대학이 사업에서 실현하여 『소학』을 성공시키는 것으로서 양자를 체용의 관계로 파악하여 유기적 일체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학도」와 「대학도」를 『성학십도』의 중심에 배치시키고 있다.
5)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백록동규도」는 주자의 ‘백록동규’를 퇴계가 도상화한 것이다. 백록동규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설립하고 이 서원의 학도들을 위해 제정한 학규로서, 도학 전통에서 교육기관으로 중심적 역할을 했던 서원의 교육이 추구하는 교육 과제와 교육 방법을 가장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백록동규는 말하자면 백록동서원이라는 학교의 교훈이나 교육 목표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백록동규에서 중시하는 것은 바로 부자유친·군신유의·부부유별·장유유서·붕우유신의 오륜이다. 그리고 이 오륜이 제대로 유지되려면 또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辯)·독행(篤行)의 오교(五敎)가 이루어져야 함을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오교를 궁리, 수신, 처사(處事), 접물(接物)의 네 요령으로 요약하고 있다.
6)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심통성정도」는 만년의 퇴계가 자신의 사칠설과 심성설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설을 압축한 것이다. 이 제6도는 세 개의 도를 수록하고 있는데 정복심(程復心)의 「심통성정도」를 상도(上圖)로 삼고, 퇴계 자신이 그린 2도를 중도(中圖)·하도(下圖)로 삼았다.
이 「심통성정도」의 중도와 하도는 퇴계의 성리학적 입장을 완성시킨 대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퇴계는 53세 때 정지운의 「천명도」를 개정하면서 사단칠정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데에 깊은 침잠이 있었고, 다시 59세에서 66세까지 8년간 기대승과의 사단칠정논변을 거치면서 확립된 자신의 성리학설을 이 심통성정도의 중도와 하도에 실어놓았다.
‘상도’는 정복심의 심통성정도로서 성과 정을 심의 체용으로 통합시키는 전체적 통일성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비하여 퇴계 자신의 중도와 하도는 이기론적 구조 속에서 성이 말하여 정으로 나타나는 심의 존재 양상을 두 가지 인식 입장에 따라 정연하게 분석한 것이다. 즉, ‘중도’에서는 이기불상잡의 조건 아래 이를 가리킴으로써 성과 정의 순선한 본래 모습을 밝혔으며, ‘하도’에서는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조건 아래 이와 기의 결합을 가리킴으로써 성이 발현하는 기미에서 선·악이 혼재하는 현상적 모습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하도’의 경우에는 다시 이와 기가 함께 있지만 발현하는 계기에 따라, 이가 주장이 되어 기가 이에 따르는 경우와, 기가 주장이 되어 이가 기에 실려 있는 경우로 분석하였다. 이는 ‘중도’는 인간 심성의 주리적 순수성을 파악하는 것이요, ‘하도’는 주리와 주기의 통합적 현실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퇴계의 심성론적 입장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서 있다. 그러나 하도의 이기호발설에 비하여 중도의 입장은 이발일도설(理發一到說)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양면적인 심성론을 포함함으로써 퇴계는 전체적으로 심의 개념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곧 심의 이기론적 구성에서는 “이와 기를 결합한다.”(合理氣), 성·정과의 관계에서는 “성과 정을 통섭한다.”(統性情)고 하며, 나아가 그 내적 지위로서는 “한 몸을 주재한다.”(主一身)라 하고, 외적 관계를 “온갖 변화에 대응한다.”(該萬化)고 한다.
이와 같은 퇴계의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 혹은 ‘심통성정설(心統性情說)’은 율곡학파의 ‘심즉기설(心卽氣說)’이나 왕양명의 ‘심즉리설(心卽理說)’에 대립하여 지속적으로 퇴계학파 심설의 준범이 되어 왔던 것이다.
7) 「인설도」(仁說圖)
퇴계는 『성학십도』의 제7도로 「인설도」를 수록함으로써 『성학십도』의 후반부를 구성하는 심성수양론의 핵심에 「인설도」를 자리잡게 하고 있다. 제6도에서 제10도까지의 후반부에서 제6도인 「심통성정도」는 심·성·정의 개념 구조를 해명한 것으로 심성론의 성리학적 인식의 전반적 체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제9경재잠도와 제10숙흥야매잠도는 심성의 수양론적 전개 과정으로서 경의 실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인설도」와 다음의 제8심학도는 심성의 개념 구조에서 실천 방법으로 나아가는 연결 고리의 기능을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퇴계는 처음 제7인설도와 제8심학도를 제7심학도와 제8인설도로 거꾸로 놓았다가 두 도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 합당하겠다는 율곡의 권유를 받고 흔쾌히 받아들여 바꾸었다. 퇴계가 처음에 「심학도」를 인설도의 뒤에 둔 것은 ‘심통성정’의 명제에 따라 ‘심’ 개념을 제시한 「심학도」를 앞세우고 성 개념에 속하는 「인설도」를 뒤에 두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개념 구조에서 실천 방법으로 나가는 도상의 배열 질서에 따르면 역시 ‘성’(인)에서 ‘심’으로 나가도록 배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심학도」는 ‘심’과 ‘경’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경’의 실천방법인 9, 10도에 연결되는 성격이 더욱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인설도」는 경의 수양론에 연결되기보다는 ‘인’의 심성 구조와 ‘인’의 실천 방법을 해명함으로써 6도를 더욱 구체화시켜주는 성격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인설도」에는 주자의 「인설도」와 인설 및 퇴계의 보주(補注)로 되어 있다.
「인설도」는 그 첫머리에서 “인이란 천지가 만물을 생하는 마음으로 사람이 이를 얻어 마음을 삼은 것이다”(仁者, 天地生物之心, 而人之所得以爲心)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곧 ‘인’이 천지의 마음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마음이며, 인의 근원이 천지의 마음에 있으며 인의 실제가 인간의 마음에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8) 「심학도」(心學圖)
「심학도」는 크게 보면 ‘심’권과 ‘경’권의 상·하 두 단계로 구분된다. 「심학도」는 ‘심’과 ‘경’을 대비시키면서 심을 ‘일신의 주재’라 하고, 경을 ‘일심의 주재’라 정의하고 있다. 퇴계는 심(心)권과 경(敬)권의 차이를 본체(本體)와 활용(活用)의 관계로 파악한다. 심권의 심은 마음의 존재 양상이라 한다면, 경권은 경을 통하여 마음이 스스로 통제하는 실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심이 일신(一身)을 주재하려면 허령(虛靈)·지각(知覺)·신명(神明)의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여기서 마음은 일신을 주재하는 역할과 지위를 지닌다 하여 일신의 밖에서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주재하는 일신의 주체이다. 심학도는 이때 심이 가지는 양상을 양심(良心)·본심(本心), 적자심(赤子心)·대인심(大人心), 인심(人心)·도심(道心)으로 나타낸다.
그런데 심은 일신을 주재하는 기능과 권위를 가지지만, 만약에 그 자신 물욕에 가리어 일신을 주재하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경은 바로 이때 심을 주재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심학도는 경의 마음을 유정(惟精)·유일(惟一), 계구(戒懼)·신독(愼獨), 조존(操存)·극복(克復), 심사(心思)·심재(心在), 양심(養心)·구방심(求放心), 진심(盡心)·정심(正心), 사십부동심(四十不動心)·칠십이종심(七十而從心)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경도 실은 마음을 떠나 있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마음을 주재하는 또 다른 마음의 한 양상이므로 경이 늘 마음속에 깨어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깨어 있도록 수행을 해야 한다. 이 수행의 방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다음의 제9경재잠도이다.
9) 「경재잠도」(敬齋箴圖)
「경재잠도」는 주자가 지은 경재잠과 여기에 붙인 노재(老齋) 왕백(王柏)의 도를 합친 것이므로, 잠과 도의 어느 쪽도 퇴계가 직접 저작한 부분이 아니다. 퇴계는 여기에 제시된 경의 실천 방법과 원리를 자신의 수양론과 학문방법론에서 평생을 일관되게 관철하고 발휘하였다.
‘경재잠’은 모두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은 4구로, 각 구는 4언으로 되어 있는 총 140자의 짧은 잠언이다.
주자는 이 잠의 전체적 성격을 규정하여 “경의 조목을 설명한 것으로, 여러 가지 자리가 있다”고 하였고, 왕백(王柏)은 「경재잠도」에서 불위(弗違 : 동·정), 교정(交正 : 표·리)과 유간(有間), 유차(有差)를 상하로 대응시키고 주일(主一)·무적(無適)을 좌우로 대응시켰다. 전체적인 모습은 상단(불위·교정), 중단(주일·무적), 하단(유간·유차)의 3단의 구조이다. 여기서 상단은 경의 올바른 실천이요, 중단은 경의 원리이며, 하단은 경의 실천을 상실한 병상(病狀)이라고 할 수 있다.
경은 학문과 수양의 원리나 법칙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수양의 구체적 실천 방법이자 실천 기준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퇴계는 주자의 경재잠이 동정·표리와 주일·무적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며 이들 중 어느 하나도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 힘써야 할 요령은 말씀의 취지와 의리가 있는 곳을 따라서 반복하여 그 맛을 연마하고 실지로 체험하며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0)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
‘숙흥야매잠’은 남송시대 남당(南塘) 진백(陳栢)이 지은 것으로 도덕적 수양론의 실천 방법을 제시한 중요한 잠명(箴銘)의 하나이다. 52구 208자로 이루어져 있는 이 숙흥야매잠은 조석잠(朝夕箴)으로도 일컬어졌다. 퇴계는 이 숙흥야매잠을 분석하고 도상화하여 「숙흥야매잠도」를 그려 『성학십도』의 마지막 도로 삼았다.
「경재잠도」는 경 공부의 여러 가지 자리(地頭)에 따라 배열한 것이라면 「숙흥야매잠도」는 여러 가지 공부하는 때(時分)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두 도는 수양론의 상호 표리 관계를 이루며 경 공부의 구체적 실천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는 숙흥야매잠의 내용을 7장으로 나누었는데, 숙오(夙悟), 신흥(晨興), 독서, 응사(應事), 일건(日乾), 석척(夕惕), 겸숙야(兼夙夜)로 각 장에 제목을 붙이고 1-6장까지 각각 8구 32자씩을 배당하였으며 7장에는 4구 16자를 배당하였다. 그리고 도상에서 숙오·신흥은 이른 아침의 일로서 상단의 좌우에 있고, 독서・응사는 낮 동안의 일로서 중단의 좌우에 있으며, 일건・석척은 저녁나절의 일로서 하단의 좌우에 있다. 그리고 겸숙야는 아침부터 밤까지 전체에 걸린 일로서 중심에 놓인 ‘경’자의 위·아래에 자리 잡았다.
5. 성학십도의 특성
『성학십도』는 1568년 퇴계 이황이 17세의 소년 임금 선조에게 학문과 수양의 핵심과 요령을 간명하게 정리하여 드렸던 작은 책자로서, 송·원대 이래 정주학파의 저술 속에서 10개의 도상과 해설을 선택하여 수록한 것이다.
퇴계의 『성학십도』는 경의 수양론이 시작부터 끝까지 자신의 학문 체계를 관철하도록 응축하여 이룬 하나의 순수한 결정체이다. 그는 선조 임금에게 이 성학십도를 올리면서 차자를 통해 “제가 나라에 보답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도(圖)뿐입니다”라고 할 만큼, 『성학십도』는 성학의 방법과 체계를 가장 집약적이고 함축적으로 구성한 것이자, 퇴계문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 십도는 모두 경(敬)을 위주로 한다.”고 하여 성학(聖學)의 요체가 바로 경(敬)임을 밝히고 있다. 통치자인 임금의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곧 위민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퇴계의 『성학십도』는 조선시대 도상의 전형을 확립하였다. 『성학십도』는 왕실에서 역대 군왕이 병풍으로 만들거나 서첩으로 만들어 항상 곁에 놓고 궁리(窮理)·체인(體認)하는 전범으로 삼았고, 경연(經筵)에서는 교재로 채택되어 거듭 강의하였으며, 어명에 의해 인본(印本)으로 간행되고 반포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한 저술로서 『성학십도』처럼 많은 주석본이 나온 책은 없다. 성학십도의 주석에서 제기된 문제는 한국 철학사의 중요 문제였으며, 그 문제의 심화는 바로 퇴계학의 발전과정을 보여주기까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름입니다.
심학도에 대해서 조금은 정리가 되었나요?
얼마전 우리 회원이 참석했다는 '이승철과 도올학당'에서
목소리 카랑거리는 이가 말한
타고난 지혜와 갈고닦은 지혜 사이를 오가는 말 같은 분위기의 내용입니다.
아무튼 오늘의 끝말잇기는
토바퀸 님 덕에 두 번을 해 봅니다.
고마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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