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부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로서, 한국의 건축가들이 뽑은 가장 아름다운 건물인 무량수전이 있는 곳이다. 고려시대의 목조건물로 오랜 역사도 지니고 있지만, 볼록한 배흘림기둥과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의 아름다운 추녀 곡선은 한국미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부석사는 통일신라시대 676년(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십찰* 의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 들어 원융(964~1053년)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고, 1358년(공민왕 7년)에 왜적의 침탈로 가람의 일부가 소실되기도 하였다. 1376년(우왕 2년)과 이듬해에는 원응국사 천희가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중수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절 이름을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고도 불렀다. 1580년(선조 13년)에 사명대사가 중건하였고, 1746년(영조 22년)에 화재로 전각과 요사 등이 크게 손실되어 이듬해 모두 복원하였다.
부석사의 일주문은 1980년에 세운 맞배지붕에 다포식의 일주문이다. 당간지주가 안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일주문은 원래의 위치에 세운 것은 아니다. 일주문에 들어설 때는 오직 일심으로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액은 박병규(朴秉圭)의 글씨로 '太白山浮石寺'라고 쓰여져 있다. 일주문 뒷편에는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 부석사 경내로 오르다 보면 왼쪽 길가에 보물 제255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를 만게 된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절에서 각종 법회나 행사시 당(깃발)을 내걸 때 사용하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지주를 말한다. 높이 428센티미터의 두 지주가 1미터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서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간지주이다.
부석사는 9개의 석축과 108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9개의 석축은 9품을 의미한다. 9품이란 9단계의 극락세계를 의미한다. 살아 생전의 선행과 공덕에 따라 환생되는 것이다. 천왕문에서 범종루까지 3개의 석축은 하품의 경계를, 범종루에서 안양루까지는 중품의 경계를, 안양루에서 무량수전까지를 상품의 경계로 구분하여 보여주고 있다. 위 사진은 하품에 해당하는 천왕문을 지나서 범종루로 오르는 3개의 석축이다.
* 신라시대 화엄십찰 :
현재 가람의 동쪽 약사골 절터에 있던 쌍탑을 1966년에 현재로 자리로 옮겼다. 1966년 옮겨올 때 익산 왕궁리 오층 탑에서 출토된 사리 5과를 석탑에 안치하였으며, 동탑의 모습이다.
약사골 절터에서 옮겨온 서탑의 모습이다. 이중기단에 3층 탑신을 올린 신라 기본 형식이지만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보여 주므로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범종각이다. 건축학에 관련된 사람들이 찬탄해 하며 찬사를 보내는 건물이다. 건물은 측면으로 앉아 있고 건물의 앞쪽은 팔작지붕의 형태이지만, 뒤쪽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는 비대칭형 건물이다. 그러나 건축학적 측면에서 보면 정말 자연 친화적이며, 부석사의 전체 모습을 살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뒤쪽에서 바라본 맞배지붕 형태의 범종각.
이 건물은 위쪽과 아래쪽의 현판이 서로 다르다. 올라가면서 앞쪽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고 되어 있고, 위쪽의 마당쪽에는 '안양루'라는 편액이 붙어있다. 하나의 건물에 문과 누각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安養)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그리고 안양문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글씨임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글씨인 무량수전 현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공포는 내3출목, 외2출목의 다포식이다.
무량수전 앞 마당쪽에서 본 안양루이며 안양루 편액은 소남 김종호* 선생이 갑신년 가을(1944년)에 쓴 글씨이다.
김종호(金宗鎬, 1901~1985)
본관은 의성, 호는 석당(石堂), 소백산인, 소남(小南)이다.
김영숙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석당은 술을 좋아하고 호탕하여 글씨를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글을 써주었는데 현판 글을 쓸 때 대필이 없으면 작은 붓 두세 개를 고무줄로 묶어 큰 글자를 썼다고 한다. 붓을 직접 만들어 썼다고 한다. 특히 서수(鼠鬚)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쥐의 수염으로 붓을 만들어 쓴 듯한 <구고연금(求古硏今)>이나 <금서실(琴書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처음과 끝부분의 획이 고르지 않은 것은 작은 붓을 묶어서 쓴 때문이다. 또 독특한 서법인 절목체(折木體)라 하여 한 획에 3번을 꺾는 기예로서 내리긋고 삐치는 획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운용하는 필체를 말한다.
절목체에는 ‘경사입초’(驚蛇入草, 놀란 뱀이 황급히 풀숲으로 들어가는 것), ‘비조출림’(飛鳥出林, 새가 수풀에서 날쌔게 날아오르는 것) 하는 것 같이 써야만 절목체가 형성된다고 했다. “글씨의 생명은 획에 있다.”라는 것이 석당의 지론임에 비추어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다.
석당의 현판 글씨는 ‘누대정각방명부현판(樓臺亭閣芳名簿懸板)’이란 자료 속에 목록들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 따르면, 영주 부석사 <안양루>, 예천 용문사 일주문 <소백산 용문사>, 중국 절강성 하진무(夏震武)의 <영봉정사(靈峯精舍)>, 일본의 <진충사(盡忠祠)> 등 전국에 걸쳐 대략 160점의 작품을 남겼다.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무량수전 앞 석등은 국보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297센티미터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지대석과 간주석, 화사석, 옥개석이 완전한 형태의 석등이다. 화사석은 사면의 화창이 있고 다른 사면에는 각 한 구씩의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간결하면서도 정제된 미를 간직한 석등 조각의 백미라 칭송할 만하다.
의상대사를 흠모하다가 용(石龍)으로 변한 선묘의 머리는 무량수전의 부처님 밑에, 꼬리는 무량수전 앞 석등 밑에 묻혀져 있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의미 있는 석등이다.
무량수전앞 석등(국보 제17호)은 안양루에서 무량수전 올라가는 계단에서 보면 올라갈수록 석등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은 무량수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동쪽에 있어 방문객으로 하여금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갈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이다.
동쪽 기단면에는 '忠原 赤花面 石手 金愛先'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지금은 많이 훼손되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전으로 신라 때의 것으로 보이는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공포는 주심포식이다. 전체적인 건축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의 건물로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이며,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의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과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 그리고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한 것과 기둥머리가 넓어 보이는 눈의 착시현상을 막기 위한 배흘림(엔타시스) 형식의 기둥 등은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들이다. 내부에는 국보 제45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고려시대의 소조아미타여래불이 봉안되어 있다. 서방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인데도 동남쪽을 향해 결가부좌한 자세로 수인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참고 : '화엄경'의 교주는 비로자나불이다. 그런데 화엄사상을 배경으로 조성된 부석사가 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구품세계를 펼쳐 놓은 것은 의아한 일일 수도 있다. 이는 어러운 화엄사상을 중생에게 쉽게 전하기 위해 마련한 방편에서 채택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것은 원효대사의 화엄사상이 외적으로 나타난 신앙형태가 아미타불이었다는 점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주법당인 무량수전에는 극락정토의 교주인 무량수불(아미타불)을 모셨다. 제자들이 의상대사에게 왜 탑을 세우지 않는가를 물으니 "무량수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열반하는 일이 없으며 지금도 시방에 항상 계시므로 탑을 세우지 않는다"라고 답했다고 전해 온다. 실제 무량수전의 동쪽 언덕에 있는 삼층석탑은 동방사 터에서 옮겨 왔으며, 범종루 앞의 삼층석탑 2기는 절의 동쪽 약사골 절터에서 옮겨 온 것이다.
국보 제45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은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설명 출처 : 문화재청)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 '無量壽殿'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신 전각이다. 무량수전이라는 이름은 한량없는 수명과 한량없는 지혜를 지닌 아미타여래를 무량수무량광불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