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관오리의 동학기행
< 예천 동학 이야기 2편 >
‘갑오척사록甲午斥邪錄’과 ‘학초전鶴樵傳’
예천 유학자 반재원은 ‘갑오척사록甲午斥邪錄’에 동학혁명 시기에 예천지역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결성한 예천집강소의 설치 배경에서부터 해체할 때까지 전 활동을 일지로 정리해서 기록했다. 1894년 예천에서 동학군들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거기에 대항하여 보수(유림) 집강소 설치와 민보군이 동학군을 섬멸해 가는 과정을 전해주고 있다.
1894년 3월 이후 예천 동학군의 동향, 동학군의 대지주 투쟁, 7월의 유림 집강소의 설치와 조직, 약조, 8월 28일 읍내공방전, 보복, 부병(部兵, 민보군)의 상주 파병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갑오척사록’에서 반재원은 향반의 입장에서 동학군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학초 박학래(朴鶴來, 1864~1942)는 예천의 양반이자 지주였지만,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혁명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정리한 ‘학초전鶴樵傳’을 남겼다. 경상도 북서부지역에서 처음 발굴된 동학군 기록인 이 자료는 박학래의 증손인 박종두씨가 공개해 알려지게 됐다. 박학래가 동학혁명 지도자로 활동한 것은 양반 일부도 동학혁명사상에 공감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갑오척사록’, ‘학초전’ 두 책자는 시간, 날짜, 지역, 인물에 관한 기록뿐만 아니라, 전투 상황의 기록도 차이가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예천 동학 이야기 1, 2는 ‘갑오척사록’, ‘학초전’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였다.
예천 유림 집강소 설치
동학군의 세력이 커지자 일부 동학군의 횡포와 한풀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지배층은 예천 객사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여 예천 객사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게 된다. 동학군을 물리치기 위해 예천 관아와 지역 향리와 유생들이 집강소라는 명칭을 활용하였다. 후일 학자들은 동학의 접 조직인 집강소와 구별하기 위해 보수집강소라고 명명하고 있다. 소설 ‘녹두장군’에서는 유림집강소라고 했다.
대창고등학교 내 객사(보수(유림) 집강소 설치)
대창고등학교
예천초등학교(예천 관아터)
예천군 관아와 객사 건물은 본래 예천읍 서본리(現, 예천초등학교 일대)에 있었다. 관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객사는 동쪽으로 약 500여m가량 떨어진 현 위치(現, 대창고등학교)로 옮겨진 것은 1920년 무렵이고, 대창학원을 설립하여 객사 건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보수(유림) 집강소를 설치하고, 민보군을 모집하고 관아의 무기로 무장하자, 동학군들은 1894년 8월 2일 읍내로 들어가는 사방 통로를 막아 예천 읍내 지역을 봉쇄하고 유림 집강소 세력을 압박해 나갔다. 이렇게 양측이 대치하던 중 동학군 11인을 모래밭에 생매장한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분노한 동학군들은 예천 읍내로 들어가는 모든 길을 봉쇄해 양곡과 땔감 등의 보급을 차단하고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면서,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로 뭉쳐 일본군을 무찌르자 호소하며 압박해 나갔다. 결과적으로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동학군 지도부의 실책이었다.
예천 동학군과 유림 집강소, 굴머리전투
관동대접주 최맹순을 비롯하여 13명의 접주가 상주 산양과 예천의 금곡과 화지에서 도회를 열었다. “당년 팔월 모일에 용궁을 거쳐 소야에 모이라는 도회 통지가 각 접에 도달하였다”
직곡접의 학초 박학래는 수하를 이끌고 용궁을 거쳐 소야로 갔는데, 용궁읍에 도달했을 때 벌써 소야 상접과 각 처에서 온 동학군이 동헌을 둘러싸고 있었다. 소야접의 동학군들이 군기고에서 총을 탈취하여 소야로 갔다. 소야에는 이미 대장도소, 중군도소, 좌우익도소, 급량도소, 서기 후보 정탐 등의 조직이 편재되어 있었다.
8월 24일 학초 박학래는 수하 5,277명을 이끌고 ‘화지도회花枝都會’에 갔다. 지금은 경천댐이 들어섰지만 꽃재(‘사람이 곧 하늘이다’ 비 설치)를 넘어, 예천 내화리(現,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숫돌봉 8부 능선의 화장산성을 거쳐 예천읍 주변으로 집결하였다. 본격적인 예천 공격을 준비하던 화지 대도회에서는 김한돌(안동 진영장교 출신)이 대장소의 대장이 되어 동학군의 예천 관아 공격을 지휘하였다.
굴머리전투 현장, 유정자 들판
굴머리전투 현장, 유정자 들판
꽃재, 동학군 집결터 비.
사곡리 국사골 마을 돌문에서 국사봉 오르는 길목에 예천군 유천면 사곡리와 문경시 동로면 마광리의 경계지점인 꽃재(花嶺)가 있다.
예천 유림 집강소에서는 8월 21일 안동부 도총소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23일에는 민보군 300여 명이 화지를 공격했으나 윤치문이 이끄는 예천의 동학군과 안동·의성에서 합세한 동학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윤치문(1866~1894)은 경북 예산 유천면 고산리 출신이다. 1888년 무과에 합격하여 사헌부감찰을 역임했다. 갑오년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예천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사)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전장홍 회장과 유진상 부회장의 도움을 받아 윤치문 지도자의 묘를 함께 찾아가 예를 올렸다.
소야의 관동대접주 최맹순은 8월 24일 다시 각 접에 사통을 보내 함께 예천읍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8월 25일에는 수천 명의 동학군이 용궁현 관아로 쳐들어가 무기를 탈취하여 갔다. 다급해진 예천군수 조원하는 8월 24일 다시 안동도총소에 구원을 요청하고, 25일에는 경상감영에 원병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즈음 예천 읍내는 동학군에게 사방이 포위되어 보급로가 막히면서 읍내에 양식이 떨어져서 군수까지 죽으로 끼니를 때우게 되자 읍내의 민보군은 전면 결전을 시도하고 먼저 도발한다. 실제로 예천 읍내는 절박했다.
‘갑오척사록’은 “읍내의 방수가 거의 한 달 동안 밤낮으로 계속되어서 사람들이 잠을 자지 못하고 저자와 길 막힌 것이 또 한 달 가까이 되어 땔감과 양식이 끊어져 읍내 백성들이 모조리 주려 있고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하고 있다”고 했다.
동학군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유림 집강소에서는 8월 27일 소총수 100여 명을 징발하여 현산(峴山, 現 흑응산) 옆의 골짜기에 잠복시키고 밤이 새도록 지키게 하였다. 예천 읍내 공격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예천읍 서쪽에 있던 화지 동학군이었다. 현산에 나가 있던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8월 28일 오후 동학군 1만여 명이 한천 남쪽의 유정柳汀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한천 제방 위에 진을 치고 있던 민보군들이 서정西亭의 긴 제방을 에워싸고 양면에서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협공을 약속한 금곡(금당실)의 동학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양쪽의 싸움은 밤까지 이어졌는데, 갑자기 동산에 횃불이 오르면서 “안동의 구원병 3천 명이 온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민보군이 거짓으로 떠들어댄 것이다. 동학군은 일시에 무너져 달아나다가 서정자 들판의 동남평 논에 무수한 시체를 남기고 퇴각했다. 민보군이 읍내로 들어와 승리를 자축할 적에 금곡(금당실)의 동학군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민보군은 한천의 모래밭에서 일제히 동학군을 공격해 퇴각시켰다.
퇴각했던 동학군 수천 명은 금곡에서 도회를 갖고 예천 읍내를 다시 공격하려 했지만 8월 29일 원병으로 온 안동 민보군 3,500여 명과 예천 민보군이 공격해오자 사방으로 흩어졌고 활동은 약해졌다.
함양 박씨 유계소, 동학 도소(금곡 포덕소)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닮았다 해 금당실이라는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금당실 마을은 조선 명종 때 풍수학자 남사고가 ‘정감록鄭鑑錄’에서 “병화가 들지 못한다”는 십승지 중 하나로 꼽은 곳으로, 임진왜란 때도 화를 피했던 곳이나 하지만 이 예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금곡(금당실) 마을은 동학혁명 당시 이곳 송림을 사이에 두고 동학군과 일본군이 대치했던 곳이기도 하며, 예천의 동학군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전기항(全基恒, 1827~1900)의 고향이자 활동무대이기도 했던 곳이다. “고조부는 당시 동학군 군수물자 책임자 격인 모량도감募粮都監을 맡고 있었는데, 워낙 풍채가 좋아 돼지의 한문 표기 ‘전 도야지(刀也只)’로 불렸다고 합니다” 전기항의 고손자 전장홍 씨의 이야기다.
민보군이 승리를 장식한 이튿날, 일본군이 읍내로 들어왔고 민보군은 금곡(금당실)의 동학군 포덕소인 함양 박씨 유계소(儒契所, 함양 박씨의 유생이 모여 문중 일을 논의하거나 경전을 강론하던 곳) 건물에 불을 질렀다. 동학혁명 시기 동학군은 이곳에 도소(금곡 포덕소)를 설치했으나 민보군이 불을 질러 함양 박씨 문중에서 복원하여 경담재라는 현판을 걸었다. 무수한 동학군이 잡혀 죽었으나 최맹순과 전기항은 몸을 숨겼다. 최맹순이 처음부터 읍내를 공격하지 않고 봉쇄로 자멸을 기다린 것이 전술적 착오였을 것이다. 이 전투 이후 유림 집강소 민보군의 만행에 대해 박학래의 ‘학초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용문면 금곡(금당실)은 동학의 소굴이라며 처절한 보복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함양 박씨 유계소, 동학 도소(금곡 포덕소) 입구
함양 박씨 유계소, 경담재
웅장하고 울창한 소나무들이 겸손한 곡선미를 뽐내는,
금당실 송림(천연기념물 제469호)
예천의 젖줄이자 동학군 이동로, 내성천
동학군 병참기지, 석문전투
최맹순은 동학군도 일본군처럼 예천 석문石門에 동학군의 병참기지를 설치했다. 8월 29일 공병 소위 고토後藤馬次郞가 인솔하는 충주병참부의 일본군 25명과 일본 인부 12명은 문경으로 가던 도중 석문에서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는 전국을 통틀어 동학군과 일본군이 벌인 첫 전투였다. 당시 석문에 집결해 있던 동학군은 600여 명이었으나, 불의의 습격을 받고 2명이 전사하고 다수의 부상자를 내었다. 병영으로 쓰던 11채의 가옥은 모두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으며, 화승총 103정, 도검 4자루, 창 3자루, 말 2마리, 동전 9관貫을 빼앗겼다. 그 뒤 석문의 이름도 이곡리로 바꾸어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동학군 병참기지 및 석문전투지, 석문정
관동 수접주 최맹순의 최후
관동 수접주 최맹순은 강원도 평창으로 도피해 가서 동학군을 규합해 충청도를 거쳐 다시 예천 적성동을 공격했다. 이어서 충주 독기령을 넘나들며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끝내 11월 21일 아들 최한걸, 접사 장복극과 함께 문경 벌천(伐川 또는 충주 독기)에서 체포되어 잡히는 몸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다음날 남사장南沙場에서 예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맹순은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고 최한걸과 장복극은 총살당하고 모래사장에 묻혔다. 최맹순, 최한걸 부자의 죽음은 매우 비극적이다. 부자가 함께 죽임을 당한 그 날은 독자인 아들 최한걸이 혼례를 올린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때 최맹순의 부하들은 읍내로 숨어들어와 구출을 도모했다 한다. 금곡(금당실) 포덕소의 모량도감 전기항은 잡히지 않고 뒷날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많은 재산은 모두 구실아치들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굴머리전투와 석문전투에서 패배한 후 유림 집강소의 민보군들은 예천 일대에서 동학군 근거지를 수색해서 불에 태워버렸고, 집요하게 추적해서 보복을 가하면서 동학군이 소유한 토지까지 몰수하였다.
경상도 서북부 지방은 전봉준의 전라도 동학혁명에 가려져 있지만 뜨겁고 처절한 동학혁명의 현장이었다. 예천 동학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상주 동학처럼 상주성을 점거하는 무력행사를 위주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력, 전세가 훨씬 유리했던 예천 동학군이 한 달 동안 시간을 끌 이유도 없이 바로 예천을 점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온건주의였던 예천 동학군들은 보수(유림) 집강소와 통문을 주고받으며 평화적인 타협을 위해 노력했지만, 경상도 양반 유림의 인식은 변함이 없었다.
삼강 주막 주모의 구슬픈 가락이 소야리, 꽃재, 화장산성을 넘어, 석문정 금천을 적시고, 용궁 내성천에서 크게 돌아, 화지 서정들에서 한천을 따라 흑응산으로 흥이 넘치고 한이 넘친다. 동학군들의 후렴 가락은 쉼 없이 낙동강에서 울어댄다.
아리아리 아리아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가요
아롱 아롱 아롱 아롱 앓지 마라
나 앓는 속내를 내가 안다.
디리고 디리고 디리고야
(탐방 팁)
예천 관아 객사, 보수 집강소 : 경북 예천군 예천읍 효자로 43 (現, 예천초등학교)
객사 건물 (移轉) : 경북 예천군 예천읍 대창학교길 33 (現, 대창고등학교)
예천 동학 총본부 최맹순 수접주 집터 / 소야리 동학군 주둔지 (소야 도회) : 경북 문경시 산북면 소야길 170 (소야리 148 / 소야리 동회관)
용궁현 관아 터 :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읍부1길 43 (現, 용궁초등학교)
만파루萬波樓 :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읍부2길 7 (예전 예천 관아 內 건물)
(참고문헌)
학초전 1.2 / 새로 쓰는 동학기행 2 / 지식백과
『학초전』을 통해 살펴본 경상도 예천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갑오군정실기』를 통해 본 경상도 농민군의 활동
- 예천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중심으로
『갑오척사록』에 나타난 예천 동학농민혁명 고찰
동학사상과 경상도 예천 지역 양반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 『학초전』을 중심으로
[출처] 예천 동학 이야기 2편|작성자 푸른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