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보현행원과 수행- 보현행원은 과연 수행이 될 수 있을까
보현행원을 이야기하다 보면 꼭 부딪치는 질문이 있습니다. 보현행원이 수행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이야기인즉슨, 보현행원은 수행이라고 볼 수 없으며 우리가 유치원 때부터 배우고 누구나 아는 삶의 윤리 정도에 불과할 뿐, 저 높은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이라면 흔히 독경, 염불, 진언, 절, 그리고 참선 등을 꼽습니다. 불경을 읽고 부처님을 부르고 절을 하고 주문을 외우고 참선을 해야 수행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반드시 그런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든 대표적 불교 수행도 가만히 보면 사실 별 게(?) 없습니다. 독경은 책 읽는 것이고(그렇다면 유교에서 사서삼경을 읽는 것도 수행이 될 것임) 염불은 특별한 이름 부르는 것이고(그렇다면 우리가 어려울 때 어머니를 부르는 것도 수행이 될 것임) 절은 다 알다시피 우리가 늘 하는 일이고 진언은 주문 골라 외우는 것이고(드라머에서 궁예가 하듯 옴마니 반메흠만 외워도 수행) 참선은 일종의 명상입니다. 우리 삶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삶을 불법에 맞게 다시 리모델링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비만인이 살을 빼기 위해 비만 전문 치료 병원에 가면 약은 보조일 뿐 주된 치료는 식사와 운동입니다. 다만 이때의 식사와 운동은 전문 의학 지식이 가미된 것이 다를 뿐(리모델링) 식사와 운동을 떠나 특별한 비만 치료법은 없습니다. 늘 하던 일이 치료법이란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굳이 병원에서 처방하는 운동과 식이가 아니라 내가 꾸준히 나름대로 내가 잘할 수 있는 운동과 식이를 하면 비만이 치유됩니다. 우리는 특수라는 이름 아래 보편의 가치를 그동안 너무 잊고 있었던 듯합니다. 보편이 특수화된 것이 수행일텐데, 수행이 보편을 떠나 따로 저 멀리 있는 것으로 간주되고 특별한 형태로 특별히 그것만 해야 수행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대표적 대승 수행법인 육바라밀도 그렇습니다. 육바라밀의 주요 항목이 모두 일상입니다. 보시는 주는 것이고 인욕은 참는 것이고 정진은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마음으로 주고 어떤 마음으로 참고 어떤 마음으로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수행이 되느냐(無爲法) 아니면 그냥 일반행으로 끝나느냐가(有爲法) 갈립니다.
아무 댓가 없이 누구에게나 공경하면 그 공경이 보시바라밀 입니다 공경 못할 사람 공경 못할 일에까지 공경하면 그것은 인욕 바라밀 입니다 그런 공경을 어떤 환경에서도 이어 나가면 그것이 곧 정진 바라밀 입니다 거짓말 없이 한결같이 공경 찬탄하면 그것이 또한 지계 바라밀 입니다 원행을 하다 보면 저절로 사마타 위빠사나가 이뤄지니 그것이 곧 선정 바라밀 반야 바라밀 입니다 이러면 보현행원이 곧 육바라밀 입니다. 육바라밀이 따로 있고 보현행원이 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현행원이 바로 육바라밀이 되어 버리고 육바라밀도 공경 찬탄으로 하면 육바라밀이 곧 바로 보현행원이 되어 버립니다. 보현행원이 수행이 안될 리가, 또 아닐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드러난 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보현행원도 단순히 공경 공양을 하면 수행이 될 수 없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사모하며 공경, 공양을 하면 그 즉시 훌륭한 수행이 됩니다. 더구나 이세간법의 십종수행법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세간품에는 열 가지 수행법(십종수행법)이 나옵니다. 그 열 가지 수행법을 보면 보현행원은이 어느 수행 못지않은 훌륭한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열 가지 수행법에는 선지식을 공경 존중하는 것도 수행이 되며 부처님 처소에서 늘 부끄러운 마음 갖는 것도 수행이며, 중생을 연민하여 생사를 버리지 않는 것도 수행, 일을 끝까지 이르고 마음에 변동이 없는 것도 수행, 대승심을 낸 보살 대중을 전심으로 따라 다니며 부지런히 배우는 것도 수행,
삿된 소견을 멀리 떠나고 바른 길을 부지런히 구하는 것도 수행, 마와 번뇌업을 꺾어 버리는 것도 수행이며 중생의 근기를 알아 설법 하여 부처님 지위에 머물게 하는 것도 수행이며 끝없는 법계에 편히 머물러 번뇌 멸하고 몸을 청정케 하는 것도 훌륭한 수행입니다.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밝은 마음이 일어날 때 수행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 이세간품의 십종수행이 일러주는 소식입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보현행원이 수행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행이 아니라며 경시하니까 수행이 안 되는 것이지, 공경하고 찬탄하는 것이 수행이 아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은 공경수행, 찬탄수행, 공양수행, 참회수행입니다. 더구나 공경하며 절하고 공경하며 염불하고 공경하고 독경, 참선하면 똑같은 수행이 더 큰 수승한 수행으로 변해 버립니다. 수행이 순풍에 돛단 듯 그 즉시 날개를 다는 것입니다.
화엄은 이렇듯 평범한 일들을 귀한 일들로 바꾸는 묘한 재주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지나칠, 아무 일도 아닐 일들이 화엄의 눈을 가지면 별안간 모두가 귀하고 빛나는 보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진흙 자체가 모두 그대로 통째로 진주가 되어버립니다. 마음 하나가 그렇게 바꿉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인가 봅니다.
*普賢註
1.이기영은 원효에 따르면 수행은 있게끔 하는 것, 이게끔 하는 것, 되게끔 하는 것, 즉 진실한 나, 한결같은 나로 있게끔 하는 것, 이미 다 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다. 원효는 수행의 두 측면을 이야기한다. 정적인 내관(內觀)수행 즉 여실수행(如實修行)과 동적인 현실참여로 변수행(徧修行)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보현행원이 수행이 안 될 까닭이 없다. 이기영 원효사상
2.무술의 경우도 무술에 따라 여러 기술이 있지만 모두 우리가 쓰는 일상 몸짓에서 나온 것이다.
3. 열반경에는 일반 보시와 수행으로서의 보시바라밀다의 구분을 설하는 대목이 나온다. 준다는 마음이 있고 과보를 바라며 보시하면 그냥 보시, 그런 마음이 없이 보시하면 보시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4.공경심으로 하는 염불이 최상의 염불이라는 용수 말씀 상기
5. 菩薩의 十種修行法 佛子 菩薩摩訶薩 有十種修行法 何等 爲十. 所謂恭敬尊重諸善知識修行法. 常爲諸天之所覺悟修行法. 於諸佛所 常懷慚愧修行法. 哀愍衆生 不捨生死修行法. 事必究竟 心無變動修行法. 專念隨逐發大乘心諸菩薩衆 精勤修學修行法. 遠離邪見 勤求正道修行法. 摧破諸魔 及煩惱業修行法. 知諸衆生 根性勝劣 而爲說法 令住佛地修行法. 安住無邊廣大法界 除滅煩惱 令身淸淨修行法. 是爲十 若諸菩薩 安住其中 則得如來無上修行法.
첫댓글 아무 댓가 없이 누구에게나 공경하면 그 공경이 보시바라밀 입니다 공경 못할 사람 공경 못할 일에까지 공경하면 그것은 인욕 바라밀 입니다 그런 공경을 어떤 환경에서도 이어 나가면 그것이 곧 정진 바라밀 입니다 거짓말 없이 한결같이 공경 찬탄하면 그것이 또한 지계 바라밀 입니다 원행을 하다 보면 저절로 사마타 위빠사나가 이뤄지니 그것이 곧 선정 바라밀 반야 바라밀 입니다 이러면 보현행원이 곧 유바라밀 입니다
보현행원이 수행이 안될 리가 또 아닐 리가 없습니다
수행을 어떤 특정행 또는 태생적으로 타고 났거나 특별히 수련 받은 특수한 사람만 할수 있는 것 이라고 전유물로 생각하면 보현행원은 수행이 아닙니다
진주같이 귀한 법문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눈에 보이는 모든 것, 현실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의 실체가 공한 것이고,
그래서 그 공성을 체험하고 아는 것이 수행의 목적 즉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윗글에서 언급한 화엄경의 모든 수행법과 일상적인 가르침이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겁니다.
공성도 모르면서, 반야도 모르면서 중생놀음, 허깨비 짓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색즉공에 대해서는 그 경계에 도달하기 위해 다들 부단히 애를 쓰시는 반면에
공즉색에 대해서는 조금 무심한 것이 우리 수행풍토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중생세계로 나투어져 있는 이 모든 것이 여몽환포영이라 하더라도
그 역시 불성의 나툼이라 진리 자체임이 맞는게 아닐지요?
그러니 몽환포영을 부처님의 나툼으로 보고 정성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 보현행자의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깨달음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니 화엄경에선 당연한 소식입니다.
이기영 박사님의 말씀 중 < 원효에 따르면.,수행은 .... 이미 다 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게 하는 것> 이란 말씀이 매우 인상깊게 다가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수행은 닦고 닦아 올라가는 지난한 과정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중생이 부처로 화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안하면 모르는 부처이지만 행원을 하면 아는(?) 부처가 됩니다.
원효스님은 벌써 그걸 알고계셨다는 뜻이 되네요!!!
@법혜 !
@법혜 광덕큰스님의 열반송이 그렇지요
울려서 법계를 진동하여 철위산이 밝아지고/ 잠잠해서 겁전(劫前) 봄소식이 겁후(劫後)에 찬란해라/ 일찍이 형상으로 몰형상을 떨쳤으니/ 금정산이 당당하여 그의 소리 영원하리
보세요
큰스님의 분상에서는 겁전 봄소식 즉 반야 공의 理의 세계(理法界)가 겁후에(事법계) 찬란하죠 바로 반야가 꽃을 피운 겁니다
반야가 꽃을 피운 게 바로 화엄 또는 화엄 세계죠
그리고 큰스님의 분상에서는 몰형상 즉 형상없는 세계를 형상으로 떨친 겁니다 이건 정확한 화엄반야의 소식에요
몰형상은 반야
큰스님이 떨치신 형상은 보현행원
그렇게 됩니다
보현행원으로 큰스님은 반야를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거지요
그리고 이것은 화엄경 광명각품 게송
여래 몸은 색상으로 된게 아니지만 모든 색상 갖춰져 있어 세간에서 마음대로 본다는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해요
금강경은 색으로 부처님을 못본다는 걸 일방적으로 강조하지만 화엄은 못보기는 하지만 또 색이 아니면 어디서 부처님 뵈리 라고 말합니다
양변을 떠난거죠
여래非爲相爲體 但是無相적멸법
身相위의悉구족 세간隨樂皆得見
화엄경이 비로자나불로 가득 차 있고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온 법계에 뿜어나오는 것은 일체중생이 모두 빛이라는 얘기
모두가 존귀한 광명 덩어리 영롱한 보석 덩어리란 야그
이기영 박사님의
"수행은 있게끔 하는 것, 이게끔 하는 것, 되게끔 하는 것,
즉 진실한 나, 한결같은 나로 있게끔 하는 것, 이미 다 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다."
진실한 나, 한결같은 나, 그렇게 되게 하는 것!
정말 수행에 대해 쏙 들어오게 말씀 하십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보현행원으로 불국토 이루리!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인류의 보편행 일상 행을 떠나 수행이 있은 적이 없건만 사람들은 무슨 대단한 비법 특별한 것이 수행이라 생각
티벳 불교에서는 공경을 배우기 위해 절을 최소 십만번 많게는 50만 번을 하고서야 본격 수행을 시작한다는데 바로 공경을 수십만 번 하는건 왜 수행이 아닐까요 꼭 절을 수십만 번 해야 공경을 할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실 지금 안 나오는 공경이 수십만 번 절을 한다고 없는 공경이 나올까요
제가 매일 300배 7년간을 하루도 안 쉬고 했으니 50만 배는 넘었을 듯 한데 그럼에도 공경이 저같은 경우는 절을 해서 더 일어나지는 않은 듯합니다
공경 찬탄 공양 이런거는 사실 무위법입니다 한마음 사무칠때 바로 일어나는 거에요
뭘 더해서 또 더해야 일어나는 거 아닙니다
그래서 한마음 사무칠때 모든 일상사가 수행이 됩니다 그게 두엄이 말한 生來의 行에요 뭘 인위적으로 더해서 이는 행이 아닌 겁니다 이런걸 놔 두니까 공경하러 삼천배 하러가자 하는 것이지요 바로 지금 당장 이웃을 공경하면 되는데 그건 안하고 삼천배 하는걸로 공경하려 드는 것이지요
절을 공경을 배우기 위해 하는게 아니라 공경 참회를 절로 하는것
한마음 밝을때 일상사 모든 것이 수행 됨을 밝힌게 이세간품 십종수행
어두운 마음으로 수십만번 절 해봐야 굴신운동 수십만번 한것
그것도 모자란 거라 할수는 없지만.
밝은 마음은 한번의 절을 해도
그 밝은 마음이 문제 중요
그 밝은 마음이 뭐냐
공경 찬탄 공양
그래서 화엄경 은 부처님의 과거 성불 因 또는 과거생 삶을 이야기 할때 전부 공경 공양 찬탄 이야기가 나오는 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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