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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들의 전쟁
본문: 시68:1-35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산들의 전쟁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전쟁도 참 여러 가지에요.
언뜻 생각나는 것들이 뭐가 있습니까?
별들의 전쟁, 스타트랙이라고 해서 시리즈로 나오는 미국영화들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꽃들의 전쟁이 있지요. 우리나라사람들이 레저타임이면 많이 갖고 즐기는 화투, 꽃들의 전쟁 아닙니까?
또 제가 여러 번 말씀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반복합니다마는 말씀들의 전쟁, 세상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 세상의 말씀을 말씀이라고 할 필요가 없는데 세상의 말하면 하나님의말씀과 경쟁관계에 있다고 하는 뉘앙스를 풍기기가 힘들어서 그냥 세상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전쟁을 하는 겁니다.
물론 그 전쟁의 전쟁판은 내 마음이 되겠죠.
별들의 전쟁은 우주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고 꽃들의 전쟁은 뭐 높은 수를 확인하려고 합니까? 뭘 얻으려고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화투를 잘 몰라서.
어쨌든 말씀들의 전쟁이 그런 거예요.
오늘은 산들의 전쟁이라는 제목이 붙었어요.
산들이 싸웁니다. 말씀들의 전쟁은 한사람의 마음을 뺏으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이 말씀.
아니야. 하나님 한분 계시면 살 수 있다. 이 말씀.
싸웁니다. 뭘 뺏기 위해서?
마음을 뺏기 위해서.
그래서 돈이 있어야만 된다는 생각으로 사로잡혀버리고 그리고 사람들은 돈 벌기 위해 하루 종일 뛰어다닙니다.
말씀이 세상의 말씀이 이긴 것이지요.
하나님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 그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은 돈 버는 현장에 가도 하나님과 동행할 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고 있을 뿐이고 돈 버는 일 자체는 하나님의 일로 넘겨지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믿음 아닙니까?
산들의 전쟁은 그러면 말씀들의 전쟁이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뺏으려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별들의 전쟁이 우주의 영토를 확장하려하는 것이라면 산들의 전쟁은 도대체 무엇을 뺏으려는 전쟁일까요?
여러분, 참으로 특이하게 짐을 많이 지겠다는 전쟁입니다.
짐을 덜어놓겠다는 전쟁이 아니라 짐을 많이많이 지겠다는 전쟁이에요.
마치 서울역에 계시는 지게꾼아저씨들의 전쟁과도 같아요.
지게꾼아저씨들의 전쟁이 뭡니까?
짐을 많이많이 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결국 돈을 많이 벌겠다는 거지만(궁극적으로는). 그 현상만 보면 짐을 많이 지시려는 현상만 보면 지게꾼아저씨들의 전쟁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에요.
산들의 전쟁은 짐을 많이 지겠다는 전쟁입니다.
내가 할래. 이건 내 일이야. 이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대부분 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잖아요.
수련회가 이제 다가옵니다만 수련회 가면 일하는사람만 일을 해요.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잠자는 방을 어느 집사님이 걸레질을 하면 아이고, 미안해서 뭐 같이 거들고 그러는 게아니라 구루프 말면서 다리 드는 집사님들이 계세요. 당신 할 거 다하고 궁뎅이를 방바닥에서 떼지를 않아요.
어떤 집사님은 무수리라서 청소하시고 어떤 집사님은 공주라서 구루푸 말고 있습니까? 어떤 집사님은 꼼짝달싹을 안 해. 뭐 밥을 나르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도 가만히 앉아서 숟가락하나 밥상에다 안 놓는 사람도 있어요.
짐을 안 질려고 그러지요.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두가 다 또 짐을 지려는 전쟁을 하고 있어요. 짐을 많이 지려는 전쟁을 다하고 있다는 겁니다.
내용이 도대체 뭘까?
높은 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 15절에 보면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로 그 앞에 14절은 전능하신 이가 왕들을 그중에서 흩으실 때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하는 말이 나와요.
그리고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인데 16절,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계시려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냐. 하는 말이 나와요.
이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구원하심 이 모든 하나님의 활동을 행하시는 그 하나님을 바산의 높은 산으로 비유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높은 산들이 그 산을 시기한다는 것이에요.
이 높은 산, 높다고 하는 이 말을 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라.
이 짐을 지시는 주와 높은 산에 계시는 하나님의 높은 산이라는 말과 연결을 시켜보시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부르는 이 찬양시,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을 위하시는 그 은혜의 활동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를 지금 높은 산과 짐을 지시는 하나님이라고 연결을 시키고 있어요.
참 탁월한 신앙적 통찰뿐만 아니라 문학적 통찰도 함께 지니고 있는 자가 다윗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러냐?
여러분, 이 땅에서 높은 곳이 산 아닙니까?
이 땅에서 높을수록 짐이 많아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습니다마는 대통령이 높습니까? 장관이 높습니까?
당연히 대통령이 높습니다.
그러면 장관이 짐이 많습니까? 대통령이 짐이 많습니까?
당연히 대통령이 짐이 많습니다.
장관은 교육부장관, 교통부장관하면 교통부 일만 하고 교육부 일만 하면 되는데 더 높은 대통령은 교통부와 교육부 모든 부처의 일을 다 알고 계셔야 합니다.
높을수록 짐이 많습니다.
제가 짐이 많습니까? 우리 초등학교 3학년 된 아들아이가 짐이 많습니까?
당연히 제가 짐이 많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높다, 낮다 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지만 제가 아들보다 높다 해서 틀린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높아요. 짐이 당연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높아지려는 마음과 짐을 많이 지려는 마음은 항상 같이 가게 되어있다는 것이에요.
높아만 지려고 하는데 짐을 지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병이에요. 정신병.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보통 이렇게 얘기해요.
성실함과 책임감 때문에 일을 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책임감이라고 하는 그 말의 아주 깊은 영적인 통찰은 어떤 건지 아십니까?
높아지려는 마음이 그 속에 있는 것이에요.
내가 책임을 지려고 한다는 것은 성실한 것이아니고 신실한 것이기 이전에 영적으로 보면 높아지려는 계기가 그 마음 밑바닥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짐을 지려는 마음이 있는것이에요. 일을 하겠다. 이건 내 일이라고 채택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는 것이에요.
자, 그러면 높은 산과 짐을 진다고 하는 말은 바로 이렇게 맞물려갑니다. 맞물려가요.
그런데 다윗이 지금 18절에 보면 선택받은 백성들과 맞서는 대적들 사이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얘기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3절에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이시지만 3절과 4절에 보면 그러잖아요.
4절에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이에요. 구름을 타고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을 이끄신 분이에요. 하늘을 타고 다니시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이 땅의 산이 높아도 그 산들은 다 하늘아래 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을 이 땅에 있는 산으로 비유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백성들 삶에 들어오셔서 역사를 하시니까.
실제로 움직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서 높은 자들과 비교를 하는 겁니다.
이 땅에서 높은 자들이 뭐예요?
왕들이에요. 왕들. 왕.
하나님이 왕들을 흩으실 때에 살몬에 눈발이 날리는 것과 같았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14절에.
이 세상의 높은 산들이 하나님이라는 바산의 높은 산과 같은 하나님이라는 산을 시기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이 높으신 분이라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삶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높은 king of king. The king of king.
왕들의 왕이신 하나님, 가장 높으신 분이라면 그분이 높다고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뜻하는 것은 짐을 지신다는 뜻이에요. 19절에. 짐을 지신다.
그런데 짐을 지시는 하나님, 가장 높으신 하나님, 이 땅에서 활동하시는 자중에 모든 왕들을 다 통틀어 놔도 가장 높으신 분, 가장 높으신 왕이신 하나님을 다른 왕들이 시기한다는 것이에요.
이것이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민족을 대항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얘기한 것이죠.
선택받은 백성들 사이에 하나님이 거하고활동하고 계시는데 선택받은 백성들의 짐을 다 떠맡고 계시고 심지어는 이 땅위에 다른 이방민족들의 역사까지도 책임을 지시려고하는데 이방민족들은 우리 역사는 우리가 알아서 한다. 우리가 짐을 지겠다. 하나님과 경쟁하는 겁니다.
더 높아지려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시기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나님과 시기하며 하나님을 시기하고 하나님과 경쟁하려하느냐?
내가 짐을 지려하면서 하나님과 경쟁하고 하나님과 싸우고 하나님과 대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개인적으로 갖고 와 봐요. 어떤 얘기가 됩니까?
내가 짐을 지려하는 모든 행동이 높아지려는 마음이에요.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마음을 먹는 것은 대한민국을 내 짐으로 채택하겠다는 것이에요. 대한민국을 내가 어깨위에 짊어지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잖아요.
내 가정을 내가 내 짐으로 내 어깨에 걸머지겠다는 것은 그만큼 높아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높아지겠다는 이야기에요.
내가 내 인생의 미래를 내 짐으로 생각하겠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높은 산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내일을 오늘 하루의 염려로 그쳐라 라고 말씀하세요.
그건 뭐냐?
내 일이라고 하는 인생의 내 일의 짐은 하나님이 지신다. 그만큼 하나님이 네 인생 안에서도 너보다 높으시다. 라는 걸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내일 일을 내가 걱정한다는 것은 내 일을 내가 짐으로 졌다는 것이고 내일이라고 하는 일을 놓고는 하나님과 싸우고 경쟁한다는 것입니다.
내 짐입니다. 내가 지겠습니다. 그리고 믿는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오해하느냐?
내가 짐을 지고 내가 짐을 졌다는 건 뭡니까?
그 일이 어떻게 되는 것이 잘되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내가 판단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짐을 지고 있는 거예요.
내 자식은 어떻게 되는 게 잘되는 거라는 걸 내가 스스로 결정하고 있는 게 그게 짐을 지는 거예요.
어떤 게 잘되는 거라는 걸 알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됩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힘을 동원하지요. 그게 내가 짐을 지고 있는 거예요. 내가.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부리는 거지요. 하나님이 어깨에 걸머져달라고 하는 것도 내가 하나님어깨에 올려놓는 것이에요. 내 하인으로.
그러므로 여러분, 뭔가를 내 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건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는 뜻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짐 안지면 뭐합니까?
3절과 4절 한번 보세요. 3절과 4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4절,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이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뭐라고 합니까?
그의 앞에서 뛰놀지어다. 뛰놀지어다.
내 앞에 놓여져 있는 인생의 일들을 내 짐으로채택하려는 것은 내가 걱정하며 내가 염려하며 내가 그 일들을 판단하는 이것은 내가 하나님처럼 높아지겠다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시기하여서 왜 당신만 짐을 지십니까? 왜 당신만 높으십니까? 나도 짐을 질 만큼 높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엉까는 거예요.하나님께 대드는 거예요. 하나님을 시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일을 짐 지면서 내가 짐으로 채택하면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으로 만들어놓고 그 대적이 되신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과 원수로 만들어놓고, 경쟁대상으로 만들어놓고, 내가 짐을 지고 나도 당신처럼 높아질 수 있다고 말을 해놓고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비는 행위, 이건 영적인 변태에요. 변태. 매조키즘. 뭐 이런 것처럼 변태라고요.
왜? 왜? 여러분의 인생의 짐을 여러분이 집니까?
여러분, 뭐하시는 분들입니까?
높으신 분은 하나님이세요. 대통령이 높은 것처럼(장관보다) 또 각 부처의 국장보다 장관이 높은 것처럼 하나님이 높으신 분인데 그 하나님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다니시는 분이 우리 삶 가운데 들어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삶 가운데서 그분이 높으시다는 얘기는 우리의 삶의 모든 짐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와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하나님.
그럼 우린 뭐합니까?
우린 짐 지는 자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일을 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 앞에서 뛰놀지어다. 뛰노는 자들입니다.
팔짝팔짝. 깡충깡충. 기뻐하며 뛰노는 자들이에요.
인상 쓰고 성실하게 땀 흘리며 일하면 하나님이 착하다 하실 줄 아십니까?
아니에요.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성실해야 된다고생각하고 내가 책임을 져야한다 생각하며 열심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높은 산이신 하나님과 함께 경쟁해보고나도 하나님이 못 될 게 뭐있냐 라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뭐 짐을 지라.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짐을 지지 말라. 또 믿는 형제들과 함께 짐을 지라. 이런 얘기가 나와요.
그 짐을 지라 할 때 짐을 지라는 것은 오늘 28절에 보면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라는 말이 나와요. 너의 힘을 명령하셨다.
하나님이 짐을 져주신다고 하는 것,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짐을 져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힘을 우리한테 넣어주셔서 우리 힘으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일을 하는 거예요.
우리가 좋아하고 자주 쓰는 말로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당신의 일을 행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접촉하지요. 일을 접촉하는 것은.
그러나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주어진 힘을 통해 일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짐을 져주시는 겁니다.
마치 우리 아이의 손을 붙잡고 내가 그 아이가 붙잡고 있는 것을 들어주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접촉하고 있는 건 그 아이지만 실제로 드는 것은 제가 드는 겁니다.
힘을 명령하는 겁니다. 우리 아이의 팔에 아빠의 힘이 명령으로 들어가서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가 접촉하고 있는 것들을 들어주는 것, 이게 바로 여호와께서 짐을 져주시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우리 마음은 어떡합니까?
뛰노는 거예요. 뛰노는 것.
그러므로 오늘 주어진 하루의 일과를 수행함에 있어서 랄라룰루 뛰노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여러분 뭐하는 줄 아십니까?
내가 이 일을 해야 돼. 내 책임이 있어.이런 생각을 갖고 일에 임하신다면 여러분은 계속 높고 높은 가장 높으신 왕 되시는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산이신 하나님을 시기하며하나님과 경쟁하며 왜 당신만 짐을 지시려 하십니까? 나도 짐을 지렵니다. 싸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에요.
어떻게 우리 삶에 들어오신 하나님 앞에서 뛰놀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죄적 근성, 높아지려는 근성이 책임감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이 죄악의 현실을 어떻게 두 동강이 나게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이 땅에서 내가 책임을 져야 될 것이라는 모든 일에 대해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세요.
그게 비성실, 불성실한 게 아닙니다.
그걸 책임지려는 마음자체가 하나님과 동등되게 되려는 높은 산이 되려고 하나님을 시기하여 작동하는 죄악된 마음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적 모습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도 맡기지 않으셨어요.
착각하지 마세요.
뭘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애를 키워요? 아이고, 기가 막힌 노릇이에요.
누가 누구를 키운다는 겁니까? 내 마음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남편을 도와 내조를 해요? 드라마에 보니까 내조의 왕이 있더만요. 누가 누구를 내조해요? 지나 잘해요. 지나. 누가 누구를 돕겠다는 겁니다.
못해요. 못해.
내가 책임을 져야 된다고 느끼는 모든 일에 대해서 땅바닥이 되세요. 자꾸 높은 산이 되려하지 마시고.
그리고 여러분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느끼는 그 일 옆에 서계시는 하나님을 보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뛰노세요.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은 날마다 짐을 지시는 하나님,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하나님, 우리가 짐이라고 내 짐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져주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짐을 다 벗고 뛰노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믿으세요.
내가 책임지고 내가 손대고 내가 계획하고 하지 않아도 돼요. 돼요.
잘살 수 있어요. 하나님이 잘살게 해주세요.
제발 이 세상의 죄악이 가르쳐준 그 알량한 책임감과 성실감에 마음을 몰아가지 마세요.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이 세상 모든 책임감과 모든 성실감에 대해서 다 죽으세요. 제발 좀 하나님에 대해서 좀 책임을 져 봐요.
내 마음을,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드려야 될 게 내 책임인 걸로 좀 인식을 해 달라 이겁니다.
내 힘과 내 뜻은 전부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좀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하라는 것만 해봐요. 하라는 것만.
그 다음에 이 세상일은 세상에서 자꾸 내 일, 내 일, 내 일, 이게 내 일, 이러지 마세요.
속보여요. 어떤 속?
이 세상에서 내가 잘나보겠다고. 왕 되겠다는 거예요. 왕 되겠다는 것.
하나님을 시기하고 하나님과 경쟁하고 하나님을 모반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일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이요 그러면 인간의 책임감과 성실성은 어디로 향합니까?
하나님을 향합니다. 내 마음을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게 내 책임이요.
하나님께 마음 다 드리는 게 뭡니까?
다 드리고 나면 이 세상일은 마음으로 느낄 감각이 없어요. 간섭할 에너지도 없어요. 힘을 다했으니까. 말을 할래도 힘이 없어서 말을 못해요. 마음의 힘이 없어서. 참견을 할래도. 다 드리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 붙잡고 있는 동안에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날마다 우리의 짐을지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고 책임져야 될 일에, 짐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고 오늘하루 종일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하루, 방방 뛰는 하루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에서 배운 대로 하지는 못하면서도 책임감 있는 사람, 세상일에 대해 성실한 사람이 돼야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왜 세상이 가르쳐주는 대로만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쳐준 바대로는 인간의 책임감과 성실성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는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세상의 책임들을 세상의 일들을 짐을 지며 살았습니다.
하나님, 이 깊은 속에 우리 스스로 왕 되려하고 높은 산 되려했던 우리의 죄악들이 있었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시고 주님의 십자가 붙잡음을 통하여 이 세상에 대해책임감이라는 허울아래 묶여있는 우리의 구속을 깨주시고 매임을 풀어주셔서 오직 우리 짐을 날마다 져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루 종일기뻐하며 뛰노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