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릉 중앙 길을 따라 "건원릉" 방향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능으로
추존(推尊) "문조"(文祖 : 1809~1830)와 "신정왕후"(神貞王后 : 1808~1890)의 능이다.
그런데 우리가 배운 역사에는 조선(朝鮮)에 "문조"(文祖)라는 王이 없다.
"문조"(文祖)는 누구일까?
"문조"(文祖)는 조선 23대 왕인 "순조"(純祖)의 아들이며, 24대 왕인 "헌종"(憲宗)의 아버지다.
"문조"(文祖)는 4세에 왕세자(효명세자 : 孝明世子)로 책봉되었다.
1827년(순조 27)에 창덕궁 후원에 "의두합"(倚斗閤)을 짓고, 거기에 거주하면서 조선의 개혁정치를 꿈꾸었다.
그때부터 부왕(父王)인 "순조"(純祖)의 명령으로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작했다.
창덕궁 후원의 "의두합"(倚斗閤)
기오헌(寄傲軒). 孝明世子가 책읽고 공부하며 생활하던 곳.
운경거(韻磬居)
의두합 서쪽에 있는 건물로 효명세자는 책과 악기를 보관하는 용도로도 썼다고 한다.
"순조"(純祖)가 38세의 한창인 나이임에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한 이유는
"김조순"(金祖淳)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세력의 정치적 독주(獨走)를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다.
19세 젊은 나이의 "효명세자"(孝明世子)는 父王 "순조"(純祖)의 기대에 부응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작한 지 사흘 만에 형조판서 등에 대한 인사 명령을 내리고,
다음 날은 고위 관료들에게 감봉 처분을 내리는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후 사류(士類), 청의(淸議)를 자처하는 세력을 과감히 등용해 "안동 김씨"가 독점하던 정국을 반전(反轉)시켰다.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다.
학자들은 "효명세자"(孝明世子)가 할아버지 "정조"(正祖)를 모범으로 삼아 개혁을 추진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효명세자"(孝明世子)는 1827년(순조 27년) 2월부터 1830년(순조 30년) 5월까지
약 3년 3개월 동안 대리청정(代理聽政)에 임하면서 朝鮮을 경영했던 實質的인 國王이었다.
"효명세자"(孝明世子)는 쓰러져가는 朝鮮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여러 젊은 人才와 소통하며 일했다.
그러나 "효명세자"(孝明世子)의 개혁의 성과가 실현되지 못하고,
"순조"(純祖)(30년 : 1830) 22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대리청정"(代理聽政)" 3년 3개월 만이었다.
일설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반대파에 의해 毒殺됐다는 說이 있으나 근거는 없다고 한다.
"효명세자"(孝明世子)의 급서(急逝)와 함께 그를 중심으로 결집되었던 세력 또한 급격하게 도태되었지만
후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등 반(反) 안동 김씨 세력이 다시 등장한 계기는
"효명세자"(孝明世子) "대리청정기"에 이미 싹트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순조"(純祖)의 뒤를 이어 "문조"(文祖)의 아들 "헌종"(憲宗)이 즉위하자
"헌종"(憲宗)은 부왕인 "문조"(文祖)를 "익종"(翼宗)으로 "추존"(推尊)했다.
추존(推尊)되었다고는 하나 "익종"(翼宗)이 3년 3개월 동안 정사(政事)에 관여한 것은 일반적인 "추존 왕"과는 차이가 있다.
"조 대비 신정왕후"(趙 大妃 神貞王后)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둘째 아들을 "고종"(高宗)으로 즉위하게 한 당사자다.
"신정왕후"(神貞王后)는 조선 왕조에서 가장 큰 실권을 휘두른 여장부다.
아들 "헌종"(憲宗)이 왕통을 이어받아 남편이 "익종"(翼宗)으로 추대되자 왕대비에 올랐고,
"철종"(哲宗)이 후사(後嗣)없이 사망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어 왕실의 권한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신정왕후"(神貞王后)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손잡고
"고종"(高宗)을 즉위시킨 뒤 "조 대비"(趙 大妃)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신정왕후"(神貞王后)가 사망한 나이는 83세로 조선의 비(妃) 중 왕실 생활을 가장 길게 했다.
처음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장지(葬地)로 결정된 곳은 능동(陵洞)의 "도장곡"(현재 어린이대공원)이다.
이곳을 장지(葬地)로 정하고 산릉 조성 작업을 진행하던 중 혈처(穴處) 주변에서 5기의 옛 무덤 흔적과 유골이 발견된다.
이에 작업을 중단하고 능을 의릉(懿陵)근처로 옮긴 후 다시 양주 용마봉(광진구 용마산) 자락으로 옮겼다가,
1855년 "철종"(哲宗)때 최종적으로 "건원릉" 좌측으로 옮겼다.
그런데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천장(遷葬)과정에는 이와 다른 이야기가 있어 더 조사를 해 봐야 할 것이다.
"수릉"(綏陵)은 제례의 시작과 끝남을 알리는 "판위"(版位)와 "참도"(參道)의 위치가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참도(參道)는 홍살문부터 시작하고 "판위"(版位)는 참도(參道)시작점 옆에 있는데,
"수릉"(綏陵)은 홍살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이 특별한 위치는 후세에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전에 있던 설명문과 현재의 설명문을 같이 올린다.
조금씩 추가 설명이 있다.
"수릉"(綏陵)은 건원릉 올라가는 길 옆에 있다.
길에서 가까워서 그러한지 이곳만 정자각으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만들었다.
"수릉"(綏陵)은 합장릉(合葬陵)이지만 단릉(單陵)처럼 봉분과 혼유석을 하나만 마련했다.
왕릉의 상설물은 대부분 "국조상례보편"을 따랐으며 능 앞의 3단 중 중계와 하계를 합쳐 문인석과 무인석이 한 단에 서 있다.
문인석은 금관 조복을 입고 있으며 길쭉한 얼굴에 광대뼈가 나오고 눈이 가늘어 전형적인 북방인을 묘사했다.
또한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빼고 있는 형태에서 조선 후기 인물 조각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세호는 좌측 것은 내려오고 있는 반면 우측의 것은 올라가고 있다.
장명등의 개석(蓋石)
비각(碑閣)
비각안에는 비(碑)가 둘이 있다.
대한 (大韓)
문조 익황제 수릉(文祖 翼皇帝 綏陵)
신정 익황후 부우(神貞 翼皇后 附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