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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1구간의 지리산 종주를 하다.
지리산 종주는 2000년도에 타 산악회에 따라 개인으로 참석하여 종주한 적이 있다.
해발 1,090고지의 성삼재에서 중산리(해발600)까지의 코스로 지리산 종주를 한다면 대다수가 이 방향으로 진행한다.
현재 백두대간을 하고 있는 산악회에서는 북진코스로 진행하다보니 1개월전 중산리에서 성삼재로 역종주로 진행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날 가족모임이 있어 어쩔수 없이 지리산종주산행을 동참하지 못하였다.
소위 지리산역종주(중산리에서 성삼재)로 올라오는 산행코스는 거의 없기에 개인적으로 따로 땜빵산행으로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멀고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개인적 차량이용은 불가하여 일반교통편인 시외버스를 이용하여 산행스케줄을 정하다보니, 성삼재에서 부산으로의 귀가시간문제상 결국 지리산 국립공원 입산시간을 어길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의 글은 평소의 백두대간 일지처럼 기록은 하되, 입산시간을 위반한 개인산행으로 제 글의 복사를 불가능하게 해놓았다.)
지리산 종주를 산악회를 이용하지 않고, 일반교통편을 이용한 개인산행으로 혼자하기 불안해서 등산후배 와 같이 산행하려고 했으나, 후배의 개인적 사정으로 홀로 산행이 되어버렸다.
산행날자를 연기할 생각도 해보았으나 이번 스케줄을 취소하면 본인스케줄상 올해는 못하고 내년에 다시 기회를 보아야 하기에 무리하더라도 그냥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산행후 결론은 혼자산행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몇몇 뜻이 맞는 동지들과 같이 산행하는 분들를 위해 부산에서 중산리까지, 종주후 성삼재에서 부산까지의 교통편까지 기록에 남기며 참조가 되기를 바랍니다.
< 부산에서 중산리까지 >
부산서부 버스터미날에서 진주행 버스를 이용한다.
차편은 약 20분 간격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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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후 5:28분 발 버스는 6시58분에 진주도착, 중산리행 7시 20분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2) 오후 6시 5분발 버스와 6시 20분발 버스는 진주 도착후 중산리행 막차인 8시50분발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만약의 경우 진주로 갔다가 중산리버스 노선이 사라졌을 경우 다시 부산으로 귀가할 버스를 감안하여 6시 5분발 버스를 이용하였다.
아래는 서부
아래는 진주버스터미날에서 중산리행 버스운항스케줄 사진이다.
1시간이상의 시간여유가 있어 진주에 저녁을 해결한다.
진주터미날에서 600m 정도 떨어진 곳의 안의갈비탕이다.
인터넷조회상 유명한 맛집으로 저녁7시반경에 갔는데, 이날은 재료소진으로 갈비탕은 판매안하고 갈비찜만 한다고 한다. ㅠ,ㅠ
발걸음을 돌려 진주중앙시장의 맛집 제일식당으로 향했다.
백종원의 방송에서도 나온 회비빕밥으로 유명한 곳인데 또 실패
(붉은색의 매운 비빕밥으로 산행전 매운 것을 먹으면 설사하는 경향이 있기에 취소)
그냥 밥집 찾아다닌다고 거의 1시간 소진하고 저녁은 C&U에서 도시락으로 해결. ㅠ.ㅠ
8시 50분 출발 진주터미날에서 시외버스를 탔다.
토요일 저녁, 승객은 주로 학생이다. 아마도 진주에서 객지생활하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주말이라 집으로 귀가하는 모양이다.
진주에서 단성을 지나 각 시골지역 학생들을 하차시킨다고 여러 정류소에서 거쳐가기에 2시간정도 걸릴 줄 알았는데, 저녁 9시 53분, 중산리 시외버스터미날에 도착했다.
11시경쯤 도차할 줄 알았는데...
아래 사진은 중산리 버스터미날의 콜택시 전화번호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찍어놓는다)
저녁 10시 중산리 도착.
중산리(中山理, 600m) : 지리산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과거 1957년 6월 23일자 어떤 선배님의 산행기를 보면 중산리도 상중산리·중중산리·하중산리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출발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천왕봉 일출도 보고, 성삼재에서 3시20분발 버스를 이용하려면 새벽1시경쯤에 출발하는 것이 좋을 듯 한데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
사실 새벽1시경에 입산이 가능하다는 보장도 없지만, 그때까지 주위 민박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 부르조틱하여 버스터미날 의자에서 잠깐의 취침시간을 가져본다.
대기의자에서 1시간 반정도 누워있었지만 의자가 딱딱하여 잠은 오지 않고 춥기도 하고 몸이 경직되는 것을 피히가 위해 11시반경에 중산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아래는 중산리 중산리탐방안내소를 무사히 지나친다. (버스막차 도착한지 2시간정도 되었으니 이 시간대에 산행할 사람은 지역주민밖에 없을 것이고, 혹시 종주 산악회버스가 온다면 새벽2-3시경쯤 도착할터이니 이 시간대에는 감시가 소홀했으리라 본다.) 개울건너 중산리탐방센터도 무사히 지나친다. 탐방센터에는 CCTV 가 처마밑에 2개가 설치되어 있지만, 원점산행이 아닌 연유로 랜턴을 끈채로 조용히 지나친다. 혼자의 적막한 산행, 드뎌 낮익은 칼바위에 도착하다. 칼바위 :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의 큰 바위 아래서 은거하면서 공부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 자를 찾아서 목을 베어오라 명하였다. 칼바위에서 조금 더 진행하면 계곡출렁다리를 건너 삼거리가 나온다. 좌측은 장터목으로 가는 길, 직진은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다. 직진이다. 그리고 오르막이다. 망바위에 도착한다. 아래는 이정표 및 망바위 사진, GPS 위치 이다. 조용한 적막이 흐르는 약간은 낯선곳에서의 홀로한 야간산행 계속 걷다보면 딴 생각도 난다. 지리산 이 지역은 곰이 사는 지역이라 그랬다. 이제는 곰 개체수가 포화상태라는 기사도 있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이지만, 이 시간은 사람이 안다니는 시간대이다. U~C~ 혼자의 야간산행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쓸데없는 딴 생각이다. 무섭따. ㅠ.ㅠ 아래지도는 문창대(文昌臺)의 지도이다. 문창대는 세존봉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행길은 세존봉/문창대 좌측 능선으로 길이 나 있다. 문창대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고 비탐방로이지만 옆을 지나가기에 적어본다. (네이버, 다음 지도에서는 문창대위치가 다른 곳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과거 문창대가 법계사 위쪽에 위치한 것으로 잘못 인식되어 발생하였다.) 문창대(文昌臺, 1,368m) (구)문창대(舊文昌臺) : 고운 최치원의 유적지로 알려져있는 진짜 (구)문창대는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때 법계사에 자주왕래하면서 이곳에 올라 멀리서편에 위치한 향적대의 바위에 과녁을 설치해두고 활을 쏘기도 하였으므로 처음에는 시궁대(矢弓臺) 또는 고운대(孤雲臺)라 하다 최치원이 문창후(文昌侯)의 시호(諡號)를 따서 문창대(文昌臺)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아래는 문창대 사진(출처 : 인터넷) 아래는 문창대에서 바라본 법계사(출처 : 인터넷) 랜턴의 불빛을 최대한 노출을 피하고 로타리 대피소를 조용히 지나친다. 로타리 대피소 바로 위에 샘터가 있다. 중산리에서 가방을 가볍게 하고 출발하여 여기서 물을 보충할 수 있는 곳인데, 야간산행으로 소리를 방지하고지 출발지에서 충불한 물을 가지고 왔기에 여기서 그냥 지나친다. 근데 위 로터리대피소의 발전기 소리로 물 보충을 해도 소리때문에 들키지는 않겠다. 법계사의 정문이다. 새벽 1시반경쯤 되었는데 경내에는 밝은 불빛이 찬란하다. 덕분에 법계사의 입구를 후레쉬를 사용하여 찍어본다. :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이다(참조. 설악산 소청봉의 봉정암은 사찰이 아닌 암자(庵子)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년)에 조사(祖師) 연기(緣起)가 창건하였다.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에게 패한 왜군에 의해 불탔고, 1405년 선사 벽계(法界) 정심(正心)이 중창했다. 1908년 일본군에 의해 불탔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또다시 불탄 채 방치되었다가 1981년 법당과 산신각, 칠성각 등이 재건되면서 겨우 절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법당 왼쪽에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법계사삼층석탑이 있으며, 절 뒤에는 암봉(巖峰)과 문창대(文昌臺)가 있다. 경내 산신각 앞에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고려 초기의 삼층석탑은 높이 3.6m의 커다란 바위 위에 높이 2.5m 되는 삼층석탑이 올라선 것인데, 독특하게도 상하층기단을 모두 생략한 채 자연암석을 기단으로 삼고 있다. 법계사 입구를 지나면 우측에 쇠말뚝제거 안내판이 나온다. 아래사진은 과거 산행후 내려오면서 찍은 사진이다. 지리산 종주를 중산리에서 시작했지만, 성삼재에서 시작했거나, 이곳을 지나갈 기회가 있으면 법계사를 반드시 둘러보고 가길 권한다. 지리산 법계사가 유명한 이유는 국내에서 가장 높이 위치한 사찰이기도 하지만 적멸보궁이기 때문이기도 한다. 적멸보궁(寂滅寶宮) : 석가모니가 설법을 펼친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을 뜻하는 전각으로 석가모니 사후에 와서는 그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 탑, 암자 등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절 자체보다는 절에서도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장소를 일컬어 보궁(寶宮)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절의 시설은 전(殿)이나 각(閣)으로 나타내지만, (대웅전, 삼신각) 진신 사리를 봉안한 절은 보궁이라 하여 궁(宮)으로 높여 부른다.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적멸보궁 중 가장 유명한 5개의 보궁을 꼽아 5대 적멸 보궁이라 하는데 ①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② 오대산 중대(中臺)상원사에 있는 적멸보궁, ③ 사자산 법흥사 (영월군)(法興寺)에 있는 적멸보궁, ④ 정선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⑤ 설악산 인제 봉정암 한국 최고높이 사찰(鳳頂庵, 원효대사연련)에 있는 적멸보궁이다. 스리랑카·태국 등지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수입하여 많은 사찰에서 자신들도 적멸보궁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진신사리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있겠지만 그리 많이 존재할 리도 없고 외국에서도 문화재감을 합법적으로 수출할 수도 없으리라 본다. 진신사리의 인증여부는 부처님(진신사리)이 사찰에 계시는 대체품인 불상이 대웅전에 보인다면 적멸보궁이 아니라는 것을 사찰 자체가 스스로 인증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면 된다. 법계사 의 적멸보궁 안내판(과거 산행에서 찍은 사진) 아래사진은 대웅전 안 모습 불상이 없다. 대신 벽에 투명한 유리가 있어 유리를 통해 맞은편의 암벽이 보인다. 사진에서 좌측아래는 대웅전 건물, 우측위 노란형광색은 부처님 사리가 들어있는 석탑이다. 신발을 벗고 대웅전안에서 절을 하고 고개를 들면 부처님의 사리가 있는 탑이 보인다. 붉은 화살표가 대웅전안에서의 시선을 말한다. 법계사를 지나 신문창대(新文昌臺; 과거 잘못 알려진 문창대)부근까지 왔는데 비가 온다. 분명 일기예보에서는 비소식이 없었는데,,, 인터넷으로 다시 일기예보를 검색해도 14일 강수확률 20%, 그 20%가 사람을 죽인다. 비올 줄 알았으면 종주시도를 안했으리라, 비올 것에 대한 대비 없는 산행이다. 비옷도 없고, 무엇보다 아직 동이 트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출발 전날 달도 반달을 넘어서 보름으로가는 상현달인 것도 확인했는데, 하늘을 보니 달도 별도 안보인다. 하늘 전체가 구름으로 가리워져 있다. 새벽이라 춥고, 비에 옷이 젖더라도 오르막 산행은 문제가 없다. 능선에서 바람이 분다면 저체온증이, 그리고 종주를 완주할 수 있을까의 걱정이 앞선다. 중도 포기해도 중산리에서 귀가문제도 애매하다. 계속 기다린 결과 10~15분후에 비가 멎었다. 그리고 이제는 비가 안온다. 강수확률20%는 폭우는 아닐 것이라는 판단하에 30분이상 지체한 후 산행을 다시 시작한다. 해뜨는 시간이 보통 5시경이니 천왕봉정상에서 4경쯤이면 사람을 볼 수 있으리라 판단,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러오는 사람과 조우하는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산행을 한다. 비에 젖지않은 바위 같은 장소 비에 젖어가는 바위. 아래는 개선문 사진(1,700m)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천왕봉 정상아래 천왕샘 사진 바위의 갈라진 틈 사이로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에 도착하다. 중산리에서 천왕봉 정상까지 4시간 반 정도 소요되었다. 홀로 산행이라 천왕봉 정상에서의 삼각대를 설치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천왕봉의 야간사진이다. 천왕봉 야간 사진 한 것을 위해 삼각대를 가져온 것에 당시는 보람을 느꼈다. (이후 성삼재 도착할때까지는 삼각대는 짐이었다.. ㅠ.ㅠ) 천왕봉(天王峰, 1,915m) : 지리산은 우리 민족에게는 성산이자 어머니의 산이다. 아버지 산이 아니라 어머니의 산이라고 하는 이유는 성모신앙과 관련 있다. 성모신앙은 천왕성모라 하고, 마고(麻姑) 때부터 존재했다. 천왕성모는 천지창조의 주인인 율려(律呂)이고, 이 율려에 의해 우주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마고가 탄생한다. 이 마고신화가 우리 민족의 생성신화인 것이다. 단군·환인·환웅 이전의 이야기다. 마고성모는 지리산 천왕할매로 알려져 있는 천왕성모로, 마고시절부터 우리 민족을 보호해온 수호신이다. 따라서 우주창조의 어머니인 마고성모가 내려온 자리가 바로 천왕봉이고, 그 이름은 노고단에 남아 있다. 노고(老姑)는 늙은 할멈을 의미하고, 마고와 일맥상통한다. 노고단은 그래서 마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통천문(通天門, 1,814m) : 천왕봉을 지키며 하늘과 통한다는 문이다. 동굴 입구에 옛날 필적으로 ‘通天門’이란 대각자가 보인다. 예로부터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하다는 전설이 전한다. 통천문을 지나서 좀 진행하니 해돋이 장관을 보러오는 사람들과 만난다. 산에서 사람이 이렇게도 반가울줄이야.... : 천왕봉과 가장 가까우면서 자매봉으로 알려져 있다. 제왕이 자리했다는 제석봉이다. 제왕이 성모천왕을 지키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이 있다. 이 제석봉에는 고사목(枯死木) 군락지가 있다. : 옛날 천왕봉 남쪽 기슭의 산청 시천 주민과 함양 북쪽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서 이름 붙여진 장터목이다. 장터목 휴게소도 있지만, 남쪽 함양방향으로 100m 내려가면 샘물이 있어 물을 보충할 수 있다. 연하봉(烟霞峰, 1,730m) : 연하봉은 구름이 노는 아름다운 봉우리라는 뜻으로 ‘지리 8경’ 중의 하나다. 반면 연하천은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 속에서 흐르고 있다 하여 ‘烟霞泉(연하천)’이라고 했던 연하천천대피소에서 12㎞정도 멀리 동쪽에 있는 봉우리이다. 연하봉 정상은 장터목에서 이정표상 400m(개인적으로는 50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정표는 연하봉 정상표식은 없으며 약 400m(개인적으로 300m) 더 진행하면 낮은 고지에 연하봉이라는 이름이 있는 이정표가 있다. 아래는 연하봉 정상 아래는 연하봉 정상이정표가 있는 곳 (1,710m) 트랭글에서 연하봉 고지임을 알리는 곳이기도 하다. 연하봉에서 진행방향으로 바라본 경치. 삼신봉은 여기서 2개의 봉우리가 보인다. 화장봉 연하봉 이정표(장터목에서 800m)에서 600m 정도 진행하면 작은 봉우리가 나타난다. 화장봉이다. 화장봉(花藏峰, 1,690m) : 아름다운 꽃을 감추고 있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삼신봉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으나 다음(daum)지도에서 명확하기 위치구분이 잘 되어 있다. 화장봉에서 바라본 촛대봉과 영신봉. 운무에 가려져 보인다. 삼신봉 가기전 우연히 발견된 바위 화살표시는 구상반려암(球狀班礪岩)이다. 지구지각의 대륙이동설의 하나의 증거가 된다고 한다. 부산의 황령산에 구상반려암 지역은 세계최대 규모의 구상반려암지역으로 천연기념물 제2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신봉 정상이다. 연하봉에서 본 삼신봉은 2개의 봉우리가 보인다. 첫번째 봉우리의 좌측편으로 등산로가 우회하여 2번째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착하면 아래와 같은 이정표가 있다. 삼신봉의 최고봉에서 진행방향으로 보면 삼신봉의 3번째 봉우리와 촛대봉이 보인다. 삼신봉의 3번째 봉우리이다. 바위 암릉이 있고, 여기서 트랭글이 삼신봉이라고 울린다. 세석평전 전에 만나는 촛대봉에 도착하다. 촛대봉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아직 아침노을이 보인다. 아직은 어둡다는 뜻이다. 한 여인이 산신령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촛대를 켜고 천왕봉을 향해 빌다가 돌로 굳어버린 모습이라고 전한다. 세석산장 대피소 세석산장에서 물을 보충하려고 했는데 아침7시부터 운영한다고 되어 있다. 아직은 오전 7시전이다. 선비샘에서 물을 보충하기로 하고 바로 출발한다. 세석평전(細石平田) : 1,570m 한국의 3대 고원평원 중에 가장 넓은 세석평전에 도달한다. 세석평원은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고 데서 유래했다. 그 주위가 12㎢가 되고, 면적이 무려 30여만 평에 달해 남녘의 개마고원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에 한국 특산식물인 구상나무도 자생하고 있으며, 세석대피소도 있다. : 낙남정맥의 분기점이 되는 영신봉이 나온다. 영신봉은 말 그대로 신령스런 봉우리라는 의미이다. 영신봉 근처에서 진행방향으로 본 봉우리들이다. 7번 봉우리에 7개의 큰 바위가 있고 칠선봉 이정표가 있는 곳이고 8번 최고봉이 칠선봉이다. 칠선봉 근처까지 왔다. 첫번째 바위 두번째 바위 3번째 바위 4번째 바위 5번째 바위 그리고 칠선봉 이정표. 칠선봉이정표(1552m)의 GPS위치는 아래와 같다. 그곳에서 진행방향으로 봉우리가 있으며 6번째, 7번째 바위가 보인다. 우측으로 6번째, 7번째 바위가 서로 붙어 있다. 윗사진의 봉우리를 지나 좀 더 가면 아래와 같은 GPX위치가 나온다. 그 곳 사진은 깜빡했다는... 그리고 칠선봉 7개의 칠선바위를 다 지나고 평탄한 정상부에 도달한다. 일곱 개의 바위가 오밀조밀 모여서 정상을 이룬 모습이 마치 일곱 선녀가 한자리에 모여 노는 형상과 같다고 해서 칠선봉이라 불린다.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비경의 암봉들이 구름이 스쳐 지나갈 때면 더욱 아름답고 고요한 운치를 돋운다. 칠선봉의 최고봉은 7개의 바위를 지나 평탄한 대(臺)를 구성하고 있다. 선비샘에서 부족한 물을 보충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지리산의 한 기슭인 덕평마을에 이씨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씨 노인은 불우한 시골촌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데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얼굴마저 추하게 생겨 사람들은 모두 이씨를 모두 멀리하며 홀대(忽待)하였다. 이씨 노인은 못생긴데다가 항상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서러웠으며 단 한번만이라도 사람 대접을 받으며 선비처럼 고결하게 살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식하고 외모가 추하게 생긴 이씨 노인을 아무도 반겨주지 않았으며 자기를 찾아오는 것조차 꺼렸다. 그러던 중 이씨 노인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여인네를 만나 두 아들을 두게 되였다. 결혼을 한 이후에도 이씨 노인은 겨우 목구멍에 풀칠이나 할 정도로 가난을 면치 못했으며 사람들로부터 항상 냉소와 천대 속에 살았다. 이씨 노인은 이렇듯 뜻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고생으로만 연명하다가 어느 날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 때 자식들에게 유언하기를 "내가 죽으면 상덕평 샘터 위에 묻어 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산에서 샘물을 마시면서 항상 샘터에 합장을 하는 것을 보아왔던 이씨 노인은 죽어서나마 공경을 받고자하는 생각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이씨 노인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아버지의 유언대로 상덕평 샘터 위에 아버지의 묘를 쓰고 장사 지냈다. 이씨 노인을 장사지낸 후 상덕평 샘터를 찾은 지리산 등산객들은 샘터에서 물을 마신 후 항상 샘을 향하여 합장을 하니 이씨 노인은 평생에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받고 싶었던 대접을 무덤 속에서나마 받게 된 것이다. 후일 이러한 내막을 안 마을사람들은 불우했던 이씨 노인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하여 이 샘을 선비샘이라고 부르자고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덕평봉 정상을 지나가지 않고 좌측(남쪽)편 능선으로 지나간다. 정상이라고 할 만한 지역이 없어 지나온 길을 사진으로 찍었다. 덕평봉(德坪峰, 1,521.9m) : 정상부가 각이 지지 않고 평평한 것이 덕스러워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산이 꽃대봉이다. 암릉 직벽구간이다 마른재 : 덕평봉과 꽃대봉 사이의 안부 꽃대봉을 지나가는 길은 암릉절벽으로 되어 있다. 산정상을 통과하지 못하고 남쪽 좌측으로 우회한다. 벽소령을 지나며 만나는 이름 없던 봉우리다. 그 이름은 여순사건 이후 제2병단 빨치산들이 봉우리를 뒤덮은 꽃이 너무나 아름다워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한다. 카메라 밧데리가 소진되어 교체한다. 야경 후레쉬로 빨리 소진되었던 모양이다. 예로부터 화개골과 마천골, 즉 지리산의 남북을 연결하는 고개 중의 대표적인 곳이다. 지리산 종주코스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지리산의 허리에 해당한다. 위치가 가장 낮은 산령(山嶺)이다. 북쪽 능선에 벽소령 군사도로가 있으며, 삼정리가 있다. 마천면의 양정·음정·하정의 3 마을을 합하여 삼정리라 한다. 벽소령의 부자(父子)바위 : 옛날 지리산 기슭 마천면 삼정리 하정부락에는 인걸이라는 사내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사냥 길목 인걸령에서는 하루에 꼭 3차례씩 무지개가 섰다가 꺼지곤 하였는데, 자세히 보니 무지개 아래 소(沼)에서 어여쁜 3 선녀가 정성껏 밥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옥황상제의 시녀들이 날마다 내려와 밥을 짓는데, 그러던 어느 날 더위를 못 참았는지, 선녀들이 소에서 멱을 감게 되었다. 이때 인걸은 선녀들의 날개옷만 입으면 자신도 옥황상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날개옷을 훔쳐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날개옷이 찢어져 버렸다. 옷 찟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선녀들은 놀란 나머지 각자 자기의 옷을 찾아 입었는데, 아미(阿美)라는 선녀만은 옷이 없어 하늘나라에 오르지 못하고, 인걸의 집으로 와서 몇 날을 지냈다. 그 후 하늘나라에서는 아미선녀를 인걸과 같이 살도록 허락하고 비단옷과 쌀이 나오는 바위를 하사해 주었다.(이 쌀바위는 작전도로 공사 때 묻혀버렸다고 한다.) 인걸과 아미는 그로부터 1남2녀를 낳아 하늘아래 첫 동네에서 지금의 하정부락 앞 솔밭 근처 연못(선유정)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인걸이 장난삼아 옛날 찢어진 아미의 날개옷을 기워서 입혔는데, 그만 아미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그 후 인걸과 세 자녀가 문바위에 올라가 아미가 다시 내려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내료오지 않아 4부자는 그만 지쳐 죽고 말았다. 그 다음날 아침에 벽소령 높은 곳에 바위 셋이 솟아올랐다.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부자바위라 칭한다. 이 바위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인걸과 아미가 세 자녀를 데리고 걷는 상(像)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계곡을 아미 선녀가 날아서 떠났다 하여 비리내계곡[비린내골]이라고 부른다.(자료출처:디지털하동대전) 벽소령 부자바위 : 깜빡하고 사진을 찍지 못했다.(출처 : 인터넷사진) 벽소령에서 본 진행방향의 형제봉과 삼각봉 군데군데 석문을 지난다. 진행하는 방향의 좌측에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다. 형제바위이다. 형제바위를 지나 조금만 진행하면 형제봉 정상에 도착한다. 형제봉 이정표는 여기를 조금지나 10m진행하면 나타난다. 형제봉에서 보면 바로 눈앞에 10여m의 높이 솟은 선바위를 보게 되는데 이 바위가 바로 형제바위이다. 우뚝 솟은 봉우리가 우애 깊은 형제와 비슷한 모습이라 해서 명명됐다. 언뜻 보기에는 한 개의 큰 석상(石像)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두 개의 석상이다. 위 형제봉 정상의 바위의 위를 올라가서 뒷편(동쪽)을 향해 바라본 풍경이다. 조금전 형제바위의 윗부분이 보인다. 삼각봉의 삼각고지이다. 삼각고지를 지나 삼각봉 삼거리가 나온다. 연하천 대피소 연하천은 높은 지대에도 불구하고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 속에서 흐르고 있다 하여 ‘烟霞泉(연하천)’이라 했다고 한다. 잠시 안경을 벗었는데 안경콧등받침대 나사가 풀어져버렸다. 다행히 나사가 주위에 떨어져 긴급 수리를 할 수 있었다. 이번 종주는 안좋은 일이 잦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연하천 발원지이자 남서쪽 봉우리가 명선봉(1,586m)이다. 명선봉에서 남쪽으로 대성리 의신마을과 삼정마을이 계곡 안에 묻히듯 가라앉은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현 위치 1,561m 이정표 좌측으로 명선봉 정상으로 갈 수 있는 샛길이 보인다. 명선봉에서 300정도 진행하면 총각샘으로가는 들입구가 나온다. 다녀오고 싶은 생각이 꿀떡같지만 혼자라는 사실이 포기하게 만든다. 힘들기도 하지만, 들입구 길도 많이 흐릿해져 있다. 아래사진(출처 : 인터넷)는 총각샘이다. 가방의 크기와 비교시 총각샘의 크기를 알 수 있다. 위치는 연하천대피소에서 약 700m정도(명선봉에서 약 350m) 진행하면 있다(운봉무덤 1 ㎞전). 진행방향 능선의 좌측(남쪽)우측에 있다. 쓰러진 고목나무 나뒹구는 능선 평지와 돌밭길에 총각샘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 길 아래 남측 40m 지점 아래에 위치한다. 총각샘은 천왕봉과 중봉의 경관이 한눈에 보이며, 이정표 남쪽 언덕 너머 커다란 벼랑(큰 얼굴 바위) 아래 바위벽에서 총각이 오줌 누듯 신기하게 솟는.. 석관수이다. 옛날 지리산에서 약초캐던 총각이 사냥꾼에게 쫓긴 노루를 숨겨주자 노루가 그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서 총각 갈증을 풀어주려 안내한 샘물이라고 한다. 옛날 화개재를 지나 이곳을 오가던 등짐 상인들, 등짐 상인이 끊긴 후 심마니 갈증을 달래주던 샘이었으나 심마니 발길이 끊긴 후 구전 속으로 사라졌던 샘물이었다. 이 샘의 소문을 듣고 찾아간 지리산악회 노총각 2명이 총각샘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장터목의 샘물은 산희(山姬)샘이라 여성적인 이름이라 해서 고심 끝에 남성적 이름인 총각샘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샘물지형은 마치 남성같다고 한다. 남성의 체모인듯 총각샘을 애워싼 구상나무 숲. 남성 근육과 같이 울퉁불퉁 험악한... 바위 지형. 총각 냄새가 느껴지는... 낙엽 썩는 퀴퀴한 숲 냄새... 커다란 벼랑 허리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남성의 심벌~ 그것을 보이기 부끄러운 듯, 벼랑 아래 숨은 총각의 형상. 여성에 비유한 지리산의 샘물들 형태와는 분명하게 다르다. 그래서 이젠 여성 등산객에게 인기있는 샘물이 되었다. 총각샘 들입구 사진, 혼자서는 못가겠다. 운봉으로 가는중에 갑자기 비가 온다. 춥지는 않지만 머리, 상의 다 젖어버렸다. 배낭에 방수포를 설치했다. 미리 설치한다는 것을 깜박했네. 운봉무덤 근처이다. 가는 길의 좌측편에 있을 것을 추정하는데 못찾았다는... 운봉(1,477m) : 화개재를 넘나들며 운봉에서 소금장수를 하던 노인의 무덤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장수는 지리산 곳곳을 헤매다가 칼바위에서 장터목 방향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태조 이성계를 노리는 자가 그 자임을 알고 칼로 내리치니 큰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었고, 칼날이 부러지면서 이곳까지 날아와 꽃인 후 하늘을 향한 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여 이를 칼바위라 하였다고 전한다.
(참조로 칼바위에서 장터목 방향으로 약 3km 떨어진 곳이라면 유암폭포 정도가 된다)
지리산 문창대를 세간에 처음 알린 사람은 조선중기 영남 사림의 중심인물이었던 진주선비 부사 성여신(莩査 成汝信)이다.
그는 1617년 중산리 법계사 코스로 천왕봉을 등정한 후 칠언고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유두루산시(流頭流山詩)를 통하여 법계사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문창대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문창대가 알려지게 되고, 그 이후 칼바위-법계사 코스로 지리산을 등반하고 남긴 여러 선비들의 기록에 문창대가 등장하면서 법계사주변의 명소로 자리 잡혀져 왔다.
지리산 천왕봉 법계사(法界寺,1,335m)
석가모니의 사리를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 하며, 진신사리는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 유학후 당고종기 승려로 현신한 문수보살로부터 가사, 진신사리 100여과, 경전을 받고, 해동에 불법을 밝히라는 보살의 말을 들은 후 율사는 친히 신라로 건너와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알리면서 가져왔다고 한다. 이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에서는 석가모니, 즉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여 다른 부처님을 상징할 수 있는 불상이나 조각을 절에 두지 않는다.
이 외에도 천왕성모는 박혁거세를 낳은 성모라는 설과 고려 태조 왕건을 낳은 위숙황후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지리산 마고성모보다는 훨씬 이후의 이야기다.
제석봉(帝釋峰, 1,806m)
타버린 나무의 공동묘지인 고사목 군락지는 사람으로 인한 자연환경의 훼손으로 흔적이다.
1950년대에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숲이 울창하였으나, 도불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애려고 불을 질러 그 불이 제석봉을 태워 지금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고사목 군락지 자체가 하나의 경광이기도 하고, 인재(人災)로 인한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의미가 있어 그대로 잘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장터목(場터목, 1,653m)
삼신봉(三神峰, 1,700m) :
촛대봉(1,703.7m) :
영신봉(靈神峰, 1,652m)
칠선봉(七仙峰, 1,564m) :
선비샘의 유래 :
꽃대봉(1,426m?) :
벽소령(碧?嶺, 1,350m)은 일명 뱁실령이라고 한다.
벽소령에서 달밤이면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碧?嶺(벽소령)’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벽소령의 달(벽소명월)은 지리산 10경중의 하나다.
형제봉(兄弟峰, 1,462m) :
옛날 지리산에 두 형제가 수도하고 있을 때 산의 요정 지리산녀의 간곡한 유혹을 받았으나 형제가 다 같이 이를 물리치고 도통성불(道通成佛)하고, 성불한 후에도 집요한 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너무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 두 개의 석불이 됐다고 전한다.
연하천대피소(烟霞泉待避所) :
명선봉(明善峰, 1,586m) :
총각샘 :
1970년 7월 지리산악회에서 다시 발견한 샘이다.
총각샘은 갈수기에는 말라버리는 단점이 있는데 총각샘 앞에 공터가 있어 야영은 가능한 곳이 있다.
아래는 운봉 무덤 사진
토끼봉의 헬기장에 도착한다. 헬기장은 정상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토끼봉(1,534m) : 반야봉을 기점으로 해서 정동쪽, 즉 24방위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 묘향/卯向, 3시 방향)에 위치하여 토끼봉(卯峯)으로 이름이 붙은 곳이다. 묘봉으로 불리다가 토끼봉으로 불리게 됐다. 한편, 토끼봉은 정상 초원에 지보초 군락지대가 있어, 야생화 이름을 따서 '지보등'이라 한다. 토끼봉 남쪽 능선따라 20리(남쪽으로 4 ㎞ 정도) 내려가면 칠불사(七佛寺)가 있어 이 능선길은 가끔 하산시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삼도봉과 토끼봉 사이의 허리목이자 뱀사골과 화개골을 연결하는 노루목이다. 북쪽 뱀사골에서 올라오면 만나는 첫 능선이 화개재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뱀사골산장이 바로 발아래 있었다. 화개재는 옛날 화개장터가 있던 자리라고 안내판에서 설명하고 있다. 화개장터는 지리산 능선에 있었던 장터 중 하나였다. 경남에서 연동골을 따라 올라오는 소금과 해산물, 전북에서는 뱀사골로 올라오는 삼베와 산나물 등을 물물교환 했다고 한다. 힘들게 겨우 삼도봉에 도착했다. 비에 쫄딱 젖은 생쥐꼴이다. 노고단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비에 젖지 않은 모양새로 보아 진행하는 동안 비걱정은 안해도 될 듯 싶다. 이 봉우리는 이름 그대로 경상남도·전라남도·전라북도의 삼도의 경계다. 반야봉 바로 아래 위치한 삼도봉의 원래 이름은 정상의 바위가 낫의 날처럼 생겼다고 하여 낫날봉이라고 했다. 그런데 발음이 쉽지 않아 음이 변형되어 ‘날라리봉’, ‘늴리리봉’으로 불리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삼도봉으로 새 이름을 부여 받았다고 한다. 삼도봉에서 반야봉을 갈 것인가 많은 갈등을 했다. 성삼재 3:20분 버스를 타려면 노루목에서 약 50분정도내에 왕복해야 한다. 평소같으면 가능하겠지만 이미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라 부담스럽다. 성삼재 막차는 5:30분 출발로 이 차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구례에서 부산으로 가는 차량을 놓치면 원치않은 1박을 해야한다. 모든 것은 여유와 안전이다. 반야봉은 포기하고 대신 작년에 다녀온 사진을 올린다. 노루목 : 반야봉 올라가는 길 바로 아래에 노루목이 있다. 노루목은 흔히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나 넓은 들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지역을 말한다. 이곳의 암두(巖頭) 모양새가 마치 반야봉에서 내려지르는 산줄기가 산중턱에서 잠깐 멈추었다가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로 내려다보는 것 같아 부르게 된 이름이다. 또 노루가 지나다니는 길목이란 얘기가 전해온다. 글을 적기위해 사진 한 컷 - 반야봉 정상 사진이다. 지리산 산신인 천왕봉 마고할미와 혼인한 도사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라 하여 반야봉이라 부르게 됐다. 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달마대사의 머리를 닮았다고 한다. 임걸령의 쉼터에 도착한다. 임걸령의 이정표가 있는 곳은 실제 임걸령이 아니다. 좀 더 진행하면 공터가 나오는데 그곳이 임걸령이다. 임걸령(林傑嶺, 1,320m) : 은 옛날 녹림호걸(綠林豪傑)들의 은거지, 즉 주변에 키 큰 나무가 호걸처럼 많이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의적 두목인 임걸(林傑)의 본거지로 진을 치고 말을 길렀다는 곳이라 하여 ‘임걸령’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임걸은 선비샘에서부터 세석고원 방향으로 활 쏘고 애마를 타고 달렸다. 목표지점에 도착해도 화살이 보이지 않자 화가 난 임걸은 애마의 목을 칼로 베었다고 한다. 그러나 애마의 목을 벤 후에야 화살이 날아온 것을 보고, 자신 쏜 화살보다도 빨리 달렸던 애마를 붙잡고 대성통곡하며 후회했다는 일화가 있다. 능선 10m쯤 아래 임걸령 샘터가 있다. 한겨울 눈이 펑펑 내리고 얼음이 꽁꽁 얼어도 이곳만큼은 물이 콸콸 나오는 신비의 샘이다. 오히려 따뜻한 느낌을 주고, 여름에 얼음 같이 차가운 그런 물이라고 한다. 임걸령은 또한 피아골에서 올라오면 주능선과 연결된다. 피아골 마을의 한자는 ‘稷田(직전)’이다. 여기서 직(稷)이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로, 보통 ‘피’라고 불린다. 풀어서 보면 직전은 피밭인 것이다. 임걸령 샘터 피아골 삼거리 멀리 노고단 정상이 보인다. ^.^ 드뎌 힘든 종주길의 등산로를 벗어난다.. 노고단 고개이다. 발바닥아~ 노고가 많았다~ 노고단은 작년부터 예약을 해야만 출입이 가능한 곳이다. 그래서 작년에 찍은 사진으로 대체를 한다. 노고단(老姑壇?1507m) : 도교에서 온 말로, 우리 말로는 ‘할미단’이며,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을 일컫는다. 서술성모를 마고할미로 부르게 된 데서 노고단이란 지명이 유래했다. 노고단은 옛날 신라시대부터 지리산의 산신 서술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던 민속신앙의 영지(靈地)였다. 성모는 나라의 수호신이었고, 매년 봄?가을에 국태민안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이곳에서 지냈다. 후대에 성모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덕황후로 신앙되기도 했고, 남악사의 성모는 신라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신앙되기도 했다. 지리산은 결국 신라와 고려의 시조를 잉태했던 성지였던 것이다. 반야봉의 신화와 연결되는 노고단의 신화는 다음과 같다. 지리산 산신 중 여신(여신)인 천왕봉의 마고할미는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이다.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그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들었다. 그리고 딸들을 한 명씩 전국 팔도로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렸다. 마고는 반야의 옷 한 벌을 만들어놓고 반야를 기다리다 고원에 핀 쇠별꽃이 바람에 일렁이며 물결칠 때마다 행여 반야가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착각에 사로잡혔다. 마고는 마침내 머리채를 나부끼며 신명나게 그 꽃잎 물결 속으로 반야의 옷을 든 채 달려갔다. 그리고 무엇을 잡을 듯 허우적거렸지만 그리운 반야는 보이질 않았다. 쇠별꽃의 움직임을 착각한 마고는 수치와 분노를 못 이겨 얼굴을 손바닥에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는 자신을 속인 쇠별꽃을 다시는 피지 못하게 하고, 반야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버리고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추어보던 산상의 연못은 신통력을 부려 메워 없애버렸다. 찢겨 날아간 옷은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갔고, 그것들이 반야봉의 풍란이 됐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 것은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만날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그녀가 메워버린 못을 누군가 천왕봉 밑 장터목에서 찾아내 ‘산희샘’이라 부르고, 찢겨져 흩어진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으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지리산 풍란을 ‘환란’이라는 별칭을 갖게 됐다는 전설도 있다. 노고단 대피소 노고단 대피소에서 내려오다보면 좌측으로 물길이 나 있다. 이 물길은 우측 성삼재쪽(붉은 화살표)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좌측의 구례방면(푸른색 화살표)으로는 원칙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무넹기는 물이 부족하여 노고단 부근의 계곡물의 일부를 화엄사 계곡으로 돌렸다고 하여 '물을 넘긴다'는 뜻에서 '무넹기'라 불리고 있다. 아래 붉은색 물흐름에서 푸른색으로 수로를 만들어 놓았다. 이 물이 바로 푸른색 방향, 즉 건너편 구례로 흘러들어간다. 붉은색 화살표는 원래의 수로방향 푸른색 화살표는 무넹기가 만들어진 후의 수로 방향이다. (이 사진에서는 좌측이 성삼재, 우측이 남쪽 구례방향이다.) 화엄사로 가는 길이정표, 무넹기라고 표시되어 있다. 성삼재에 도착했다. 산행완료 버스가 오려면 1시간이 남았다. 삼한시대의 전적지로, 마한군에게 쫓기던 진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성(姓)이 다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고 한다. 뱀사골 반선매표소가 있는 곳이 달궁계곡이고, 달궁계공의 남쪽은 성삼재가 위치한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치이고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했다 해서 황령치(재), 서쪽 능선은 정 장군으로 지키게 했다고 해서 정령치(재)라고 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성삼재 버스 출발시간표이다. 구례시외버스 정류소까지 1시간 정도 소요된다. 구례시외버스터미날의 시간표이다. 부산으로 가는 막차가 오후6:30분이다. (성삼재에서 5시30분차를 타면 촉박하게 막차를 탈 수 있다. 성삼재에서 구례행 버스가 지연되면 부산행버스를 놓친다는....) 코스가 길고 명소가 많으니 글도 쓸데 없이 많아졌다. 혼자한 산행이지만 홀로서는 결코 또 하고 싶지 않은 산행이기도 하다. 백두대간 하는 것도 힘들지만, 글 쓰는 것도 힘들고 귀찮아 그냥 즐길까하는 생각이..... ㅠ.ㅠ
화개재(花開峙, 1,312m) :
삼도봉(三道峰, 날라리봉, 1,449m) :
반야봉(般若峰, 1,728m) :
돼지령(1,370m) : 예로부터 멧돼지들이 좋아하는 둥굴레가 많이 나는 곳이어서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1929년 구례군 마산면 소재에 큰 저수지를 준공하였으나 유입량이 적어 만수를 하지 못해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그 이듬해인 1930년 해발 1,300고지 노고단에서 전북으로 내려가는 물줄기의 일부를 구례 화엄사 계곡으로 내려올 수 있도록 유도수로 224m를 개설, 저수량을 확보하여 지금까지도 매년 풍년농사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성삼(姓三)재
첫댓글 고생 하셨네요. 대단합니다.
대간의 첫 구간이라 16기 대간진행중에 숙제를 마치고 싶어 무리했습니다. ^.^
꼼꼼한 산행기까지.. 훌륭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먼저 하신분들 부러웠습니다. ^.^
아이고
다음님의 열정과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넘넘
수고하셨습니다
산행후 힘든 와중에서 총무로서 챙겨주시는 능소화님께 감사드립니다. ^.^
이 종주를 혼자서... 대단하십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산행중 후회 많이 했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
와~우 !!! 짱 대단하십니다
대간길 땜빵 품앗이 팀 하자고 하고 싶었는데ᆢ 저도 봉우리하나 못오른데가 있어서~ㅋㅋㅋ 땜빵 고민ing
반야봉은 대간 의무코스가 아니니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다음 장수덕유산 정상 2~300m 남겨두고 못 올라 가고 가로질렀어요 ᆢ그래서 꼭 다시가야 한답니다 ~ 저도 혼자 용기내 봐야지요 ㅋㅋㅋ
@문~득 겨울 눈산행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올겨울 또는 내년초 여러 산악회에서 남덕유산 코스가 나올겁니다. 그때가시면 됩니다.
고생하셨읍니다화이팅~,건강과 백두대간을 위하여 한번더 화이팅~
감사합니다. ^.^
덕분에 많은 정보도 알고
교훈도 배우고 갑니다.
자세한 정보 너무 잘보고 감동입니다.
정말 홀로 산행
수고 하셨습니다.
화이팅입니다^^
감사합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