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질경을 반연하여, 유부무기이고 정(情)과 본(本)에 통하니,
帶質有覆이며 通情本이니.
대질(帶質境)이란 주관과 객관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적 대상으로 비량(比量) 즉 유추하여 분별하는 것인데 이것은 진대질(眞帶質)과 사대질(似帶質)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진대질은 제7말나식이 제8식의 견분(見分)을 자아로서 반연하는 것으로, 이것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반연하는[似心緣心] 것이지 객관적인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대질은 제7식에 해당하는 것이빈다. 사대질은 마음으로 경계를 반연하는[似心緣心] 것입니다. 따라서 진대질은 전적으로 주관에 그치지만 사대질은 주관에서 객관을 반연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거나 나무를 볼 때 비량으로 분별하여 아는 것을 사대질이라고 하기 때문에 여기 7식송에서 말하는 대질은 곧 진대질 인 것이며, 사대질은 외경을 반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에 속하는 것이 됩니다.
선·악·무기의 삼성(三性) 중 무기는 선·악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유부무기(有覆無記)와 무부무기(無覆無記)로 구분됩니다. 유부무기는 제7식의 18가지 마음작용이 먼지가 덮여 있듯이 덮여서 수행을 방해하기 때문에 유부라고 이름하며, 무부무기는 무엇이 덮여 있기는 하지만 제8식에서 다만 5변행(行)만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에 무부라고 이름합니다.
실제로는 진여자성을 깨친 대원경지에서 볼 때는 제8식도 무부무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는 제7식은 18심소에 덮인 것이 심하기 때문에 쉽게 그 덮인 것을 알 수 있어서 유부무기라 하고, 제8식은 5변행만이 작용하여 미세하므로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부무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情)·본(本)의 정은 제8식의 견분을 말하고 본은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제7식은 바로 이 정과 본에 모두 통하여 작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과 본에 통합이란 제7식이 제8식의 견분을 반연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연을 따라 자아를 집착하며 비량(非量)이라.
隨緣執我하며 量爲非라.
제7식은 인연을 따라 자아를 집착하는데 이것은 비량에 속합니다. 비량은 안개를 연기로 잘못 보듯이 제7식이 제8아뢰야식을 자아로 잘못 보고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덟 가지 큰 번뇌와 변행과 별경 중의 혜(慧)와 탐욕과 어리석음과 아견과 아만이 서로 따르느니라.
八大 (편)行別境慧와 貪痴我見慢이 相隨니라.
제7식에는 51가지 마음작용 중에 18가지가 작용하는데, 대수혹(大隨惑) 여덟 가지와 변행( 行) 다섯 가지, 다섯 가지 별경(別境) 중에서 혜(慧)와 탐욕(貪)과 어리석음[痴]과 아견(我見)과 아만[我慢]의 18가지가 서로 상승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항상 심사하고 사량하여 아상(我相)이 따라서 중생이 밤낮으로 혼미에 빠지며,
恒番思量我相隨하여 有情이 日夜로 鎭昏迷라.
제7식은 제8식의 견분(見分)을 자아[我]라고 항상 심사하고 헤아립니다. 항상함과 심사[恒審]에 4가지 구별이 있습니다. 제8식은 항상 하지만 심사는 없고[恒而非審], 제6식은 심사하지만 항상하지 않고[審而非常], 전5식은 심사도 항상도 않고[非恒非審], 제7식은 항상하고 심사합니다[亦恒亦審], 이처럼 제7식이 항상 자아를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의해서 중생은 늘 혼미하여 생사를 유전하는 것입니다.
네 가지 미혹과 여덟가지 큰 번뇌가 상응하여 일어나며 6전식은 (제7식이) 오염과 청정의 근거가 된다고 하느니라.
四惑八大相應起하니 六轉은 呼爲染淨依니라
네 가지 미혹[四惑]은 탐욕[貪]·어리석음[癡]· 아견(我見)· 아만(我慢)의 네 가지 번뇌를 말하고, 여덟 가지 큰 번뇌[八大]는 도거(掉擧)·혼침(昏沈)·불신(不信)·해태(懈怠)·방일(放逸)·실념(失念)·산란(散亂)·부정지(不正知)의 여덟 가지 대수혹을 말하는데, 제7식에서는 이4혹과 8대가 항상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전(六轉)이란 안·이·비·설·신·의의 6식(六識)전체를 말하는데, 이 전6식(前六識)은 제7말나식을 의지하여 오염과 청정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7식은 전적으로 전6식의 오염과 청정의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환희지의 초심에서는 평등성이고, 무공용행에서는 아집(我執)을 항구히 부수느니라. 여래 가 타수용신을 나투니 십지 보살이 가피를 받느니라.
歡喜初心에 平等性이요 無功用行에 我恒 라 如來가 現起他受用하니 十地菩薩所被機로다.
초심은 초지(初地)를 말하고 무공용행(無功用行)은 인위적인 공용(功用)이 필요없는 제8지를 말합니다. 환희지인 초지에서는 제7식이 전환하여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이루지만, 제8지의 멸진정에 가서야 자아[我]라는 분별집착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거기에서는 자아라는 것이 완전히 떨쳐버려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과위(佛果位) 중에서는 여래가 타수용신(他受用身)을 나타내어 일체중생을 제도하게 되는데 십지 보살도 여기에서 그 가피를 받아 전체가 다 이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타수용신은 초지(初地) 이상의 성인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불신(佛身)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8지에서는 말나식이 없어지고 제7지에서는 6식이 없게 되는데 6식이 무루가 되면 중간의 제7식의 존재 여부가 필요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원효(元曉)스님은 그의 「기신론소」에서 말나식을 배당하여 7지보살은 말나식에 머물러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현수 법장(賢首法藏)스님은 의견을 달리하여 말나식을 위로는 제8식에 합하고[上合第八] 아래로는 제6식에 합하여[下合第六] 본래 그 자체가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제7식을 빼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유식의 본의에 입각하면 원효의 주장이 옳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다음은 제2능변이니 이 식을 말나식이라 이름한다. 저(아뢰야식)를 의지하여 전변하며 저 (아뢰야식)를 반연하며 사량으로 성(性)과 상(相)을 삼느니라.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하니 아치와 아견과 아만과 아애이며 더불어 나머지 촉 등과 함께 하며 유부무기에 포섭되느니라. 생하는 곳에 따라 계박되니 아라한과 멸진정과 출세도에는 존재하지 않느니라.
次第二能變이니 是識을 名末那라. 依彼轉緣彼하여 思量으로 爲性相이라 四煩惱常俱하니 謂我痴我見 幷我慢 我愛이요 及餘觸等俱하며 有覆無記攝이라 隨所生所擊하니 阿羅漢과 滅定과 出世道에 無有니라 [제5송-7송]
이 글은 유식삼십송에서 제7식을 설한 것입니다. 제2능변, 즉 제7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의지하고 그것을 인연으로 하며 사량으로써 성(性)과 상(相)을 삼는 것입니다. 원문에서 '저[彼]'는 아뢰야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7식은 바로 이 아뢰야식의 근본종자를 의지하여 활동하며 제8식의 견분을 반연하는 것입니다. 즉 그것이 의지하는 근본도 제8식이며 활동하는 상대도 제8식의 견분을 반연하는 것입니다.
또 여기에서 말하는 사량(思量)은 제6식의 사량과 구별되는 사량입니다. 제6식의 사량은 완전히 드러나게 이것저것을 의식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며, 제7식의 사량은 잠재적으로 분별하는 사량입니다. 제7식에는 네 가지 근본번뇌, 즉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와 촉(觸)등이 수반되어 덮여 있기 때문에 제7식은 유부무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질을 가진 제7식은 삼계(三界)의 아홉지위[九地: 지옥·아귀·축생·아라한·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에 따라서 생하며 거기에 계박되지만 즉 아라한과 멸진정과 출세도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면, 그것이 바로 멸진정입니다. 7가지 이상의 성인을 출세도(出世道)라고 합니다.
제6식은 제7지에 와서 완전히 무루가 되며 8지 이상에서는 말나식이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중간의 제7지는 말나식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7지의 존립 여부에 대한 견해는 원효스님의 말씀이 유식사상에서 보다 더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