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부처며 마음이 부처라는 일심(一心)사상”
<60> 진소경 계임에게 보낸 대혜선사의 답장 ①-6
불교는 ‘마음’을 깨닫는 공부
자유자재해 안락함 깨달아야
[본문] 삿된 무리들이 사대부들에게 가르치기를, “마음을 거두어 드려서 조용히 앉아 모든 일을 관계하지 말고 쉬고 또 쉬어라”라고 합니다. 그것이 어찌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그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수행한다면 어떻게 외도와 이승들의 선적과 단견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어떻게 자기 마음의 밝고 미묘한 수용과 구경의 안락과 여실하게 청정한 해탈변화의 묘용을 드러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강설] 불교는 마음을 깨닫는 공부다. 그런데 마음을 깨달아 알기란 좀처럼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마음에는 본래 주관과 객관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면서 또한 편의 따라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쓰기도 한다. 그러나 본래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나누면 그것은 마음을 바로 안 것이 못된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쉰다고 하는 것이나,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쓴다고 하는 말은 모두가 하나인 마음을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보는 경우가 된다. 여기에 마음의 본질을 잘못알고 모순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이렇게 마음을 알고 있으면 아무 것도 없다고 보는 단견(斷見)이나 또는 영원하다고 보는 상견(常見)에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모든 유형무형의 존재들을 무엇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견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중도적 견해를 확립하게 되면 있음과 없음에 치우치지 아니하면서 마음의 밝고 미묘한 작용을 마음껏 누리게 되며, 완전한 안락과 청정과 해탈변화의 미묘한 작용을 드러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모름지기 당인이 스스로 보아 얻고 스스로 깨달아 얻으면, 자연히 고인들의 말과 글귀에 따라가지 않고 능히 고인들의 말과 글귀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청정한 마니보주를 진흙 속에 두어서 백 천세를 지나더라도 또한 염오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까닭은 본체가 스스로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도 또한 그와 같아서 미혹할 때는 진로에 미혹한 바가 되지만 이 마음의 자체는 본래 일찍이 미혹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강설] 불교에는 8만 4천 법문이라고 하여 이론이 너무 많다. 그 많은 경전과 어록들의 각각 다른 주장을 따라 가기로 하면 끝이 없다. 그중에서 요체가 되는 점을 선불교적 안목으로 정리하면 “마음”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은 수많은 경계를 만나서 낱낱이 대처하더라도 본체는 변함이 없다. 마치 다이아몬드가 진흙 속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굴러다니더라도 변함이 없는 것과 같으며, 또한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더라도 진흙에 젖지 않는 것과 같다. 선게(禪偈)에 이런 시가 있다.
“마음은 만 가지 경계를 따라다니더라도 따라다니는 곳마다 모두 깊고 오묘하다.
경계를 따라 흘러가더라도 그 본성을 알면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다."
(心隨萬境轉 轉處悉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이것이 선불교의 으뜸가는 근본 취지다.
[본문] 만약 자기의 마음이 본래로 부처인지라 철저히 자유자재해서 여실히 안락함을 홀연히 깨달으면 가지가지의 미묘한 작용이 또한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저절로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설]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다. 선불교에서는 시심시불(是心是佛), 즉심시불(卽心是佛), 인즉시불(人卽是佛)이라는 말이 가장 흔하게 사용된다. 물론 화엄경에서도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고 하였다.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는 사람이 곧 부처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일심(一心)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마음부처나 사람부처는 불교에서도 궁극적 차원의 견해며 모든 불교사상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출처 : 불교신문 2881호/ 1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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