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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일런스(2016)를 보고…
참 신앙과 종교는 같은 것인가?
영화 사일런스는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의 책, ‘침묵’(Silence)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 영화는 1640년경에 일본에 간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이야기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일본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이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일본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그들의 반응을 담은 영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자신들의 신앙이 가진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 영화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의 ‘순교열전’이라기 보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대한 질문을 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본다:
1.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성화를 밟는 행위는 기독교 신앙을 배교하는 행위인가?
2. 기독교 신앙은 천국에 가는 것이 목적인가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하는 것이 목적인가?
3.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왜 나쁜 일인가?
4.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
5.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마다 하지 않았던 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들은 외골수였는가, 아니면 그들은 왜곡된 신앙을 가졌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6. 다시 한번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7. 엔도 슈사쿠는 이 소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8. 일본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배척한 것일까?
9. 오늘의 선교와 신앙생활에서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위의 질문에 대해서 하나씩 생각을 해 봄으로 이 영화를 보고 난 소감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의 얼굴을 밟는 행위는 기독교 신앙을 배교하는 행위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부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주님도 그 사람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시인할 것이라고 하셨다(마태복음 10:32~33).
이 말은 자신의 신앙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참 신앙은 세상 권세와 물질과 명예보다 더 귀하다. 그런데 참 신앙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것이요, 그 도의 핵심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순교의 희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나오는 두 사람의 신부는 각기 다른 길을 걸어갔지만 결국 두 사람 다 하나님의 참 신앙을 좇았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은 자신의 교우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바다에 빠져 죽는 길을 택했다. 그것은 하나님께 진실한 행동이요,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한 희생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성화를 밟고 사람들이 말하는 ‘배교의 길’을 걸었다. 그 사람도 역시 사람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양심으로부터 듣고 순종한 사람이다.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중심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2. 기독교 신앙은 천국에 가는 것이 목적인가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하는 것이 목적인가?
일본의 가난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이 너무 힘들고 고단했는데, 그들에게 온 선교사들로부터 천국에 대해서 듣는다. 그리고 그곳의 아름다움과 행복에 대한 희망이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온 선교사들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끝까지 보호하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천국을 소망하면서 이 세상의 관원들이 몰고 간 바다에 수장된다. 그들은 끝끝내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한다. 그들에게 이 세상은 희망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오직 주님의 품 안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살아야 할 목적은 그들에게 있어서 천국뿐이었다. 현실이 너무 고단하고 비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소망을 가져다 준 사람들은 선교사들이다.
그러나 천국에 대한 소망은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자신을 사랑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보호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버린 참 희생과 진실함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신앙은 천국을 가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소망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삶을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 아닐까? 이 세상의 더러운 재물이나 구차하게 연명하며 살아가는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결심할 용기를 주는 것,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닐까? 여기서 말하는 더 가치 있는 일이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신 그것이다(요 15:13).
그러므로 천국 자체에 대한 집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천국에 대한 진정한 희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희생을 통한 한 영혼의 사랑으로 인도한다. 그것이 진정 사람답게 사는 삶이다. 그리고 천국에 대한 진정한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땅에서 진정한 사람으로 살아갈 용기를 준다.
3.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왜 나쁜 일인가?
이 영화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과도하게 억압하던 시절의 일본을 그려준다. 이런 종류의 일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의 어느 곳에서는 벌어지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은 사람의 양심을 억압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 사람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행위가 된다. 누구든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종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사람의 인간성을 짓밟아 버리는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살인과 같고, 사람을 멸시하는 것과 같다. 인간성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포교활동은 오직 사랑의 실천을 통한 인격적 감화로만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고, 결국 종교로서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것은 참 신앙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이름으로 타인을 굴복시키려는 악한 행동이다.
그 동안 기독교의 선교는 이런 양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까닭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으로 이해하면 좀 강압을 하더라도 이 땅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유익이 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과 천국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온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단지 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진리를 찾고자 하는 구도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4.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 중에도 사안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다. 박해의 상황에서 가족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성화를 밟아도 된다고 하는 사람과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다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순수한 동기와 마음을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 좋다. 물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그들 종교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고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부차적인 부분의 다름으로 접근하면 종교간의 대화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한스 큉의 말처럼 종교간이 대화 없이는 세계 평화는 없다! 그리고 종교간의 대화가 가능하려면 종교의 근본에 대한 탐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차이에서 일어나는 오해를 극복하고 공통점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통점의 발견은 우리에게 서로와 대화할 수 있는 소재를 더 많이 제공할 것이다.
5.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마다 하지 않았던 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들은 외골수였는가, 아니면 그들은 왜곡된 신앙을 가졌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순교자 그들은 자신의 최고 가치를 위해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신앙이 외골수적이고 왜곡된 것이었는지 여부는 사람들이 판단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그들에게 그것이 가장 최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며, 자신의 양심에 따라, 진리에 충실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또는 자신의 관점에서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리어 그분들의 삶은 우리에게 우리는 어떤 가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는지 물어오는 것이 아닐까?
6. 다시 한번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보고 그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는 일본의 가난한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정통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했고, 로드리게스 신부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했다. 세례를 받았거나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에 참석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있고, 비록 약할지라도 그 가르침이 옳은 줄 알고 믿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고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 그 가르침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로드리게스 신부는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잡고 죽은 참 그리스도인이다. 그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평가가 엇갈릴 수도 있지만 그는 정녕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그에게 여러 차례 배교를 회개한 일본인도 결국 성화를 밟는 행동을 하지만 그는 자기 품에 예수님을 품고 살았다.
7. 엔도 슈사쿠는 이 소설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진정한 신앙은 겉모습이나 형식이 아니라 그 중심에 무엇을 품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 아닐까?
8. 일본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배척한 것일까?
일본의 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이 가져온 기독교 신앙을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자기 나라의 체제를 흔들 수 있다고 본 것이리라. 그리고 일본의 지도자들이 보기에 서양의 기독교는 제국주의적 야망과 함께 오는 바람에 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여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돈을 벌어 선교 사역을 감당함으로 자신의 사역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오해 받지 않게 한 바울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선교 방식에도 적용해 볼 일이다.
9. 오늘의 선교와 신앙생활에서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는 일본의 교활한 지도자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영화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을 집단적으로 배교하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이 영화는 침묵 속에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며, 신앙생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400년 전에 일본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기독교의 선교와 세상을 향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한 영혼을 위하여 자신을 바친 그리스도의 정신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지 생각해 볼 때,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은 우리 속에서 종교성의 껍질을 벗겨내고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수한 복음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한 말씀이다. 그 길을 찾아 오늘도 자신의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껍질을 깨고 진리의 가볍고 깨끗한 옷을 입자.
첫댓글 다음에 기회가된다면 청년들 학생들이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