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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스리랑카 Galle 말레이시아 랑카위 벵골만 항해 1편
- 나는 우리 딸에게 만큼은, 절대로 Nobody가 아닌 Somebody가 되고 싶은 거다.
1,201 해리. 2023년 5월 18일(화) ~ 5월 27일(토) 약 9일 간의 항해가 예상된다.
$8.ㅇㄷㄴ$
오전 9시 10분. 에이전트 Nuwan 과 함께 여권에 출국 도장을 찍고, 포트 클리어런스를 하러 세관에 가니 세관 보스가 외출중이라 30분 기다려 한다. 제네시스에 오니 호주 요트에 존과 Gavin이 수다 중이다. 아침 인사를 하고, 출항 준비를 마저 한다. 마리나에 부유물 쓰레기를 걱정하며 엔진을 켜니 엔진 소리 좋다.
오전 10시 에이전트 Nuwan이 출항허가서류를 들고 왔다. 계류줄을 풀고, ‘잘 있어요 나는 갑니다.’ 하는데 잉? 전진기어가 들어가지 않는다. 엔진 아이들링 스위치가 눌려서 나오지 않는다. 지난번 엔진 수리 때 아이들링한 채로 쩔어 붙은 모양이다. 급하게 계류줄을 다시 던져 배를 묶고 존과 Gavin이 배에 오른다. 둘이서 주거니 받거나 기어레버 박스를 뜯고 수리를 시작한다. 10분 만에 수리를 마치고 시험해 보니, 이런 기어 레버 위치가 틀렸다. 중립인데 배가 전진한다. 다시 기어레버 박스를 뜯어 기어 레버 위치를 바꾸고 시험한다. 일단 잘 된다. 그러나 여전히 조정이 조금 더 필요하다. 랑카위에 도착하면 내가 직접 조정할 거다.
오전 10시 40분. 그래서 항내의 부유물들을 피하며 정신없이 출항했다. 항밖에 나오자, 파도가 크다. 노고존 10노트, 엔진 Rpm 1,200에 선속 3.3 노트다. 펜더들을 다시 잘 정리한다. 어머니와 여동생, 리나 엄마와 화상 통화한다. 매번 출항 때는 정신 하나 없이 바쁘다. 땀을 너무 흘려 어질어질하다.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한잔 원 샷 하고, 레이더 가드 존을 세팅한다. 레이더 플로터가 그저 이상 없이 조작될 뿐인데 너무 신기하고 즐겁다. 그동안 고장 난 레이더 플로터로 얼마나 노심초사 하며 항해 했던가.
Galle 항 밖에는 대형 선박들이 앵커링 중이다. Galle 항이 인도양 항해의 요충지이긴 하다. Galle에서 랑카위 까지 항해를 뭐라고 할까? 고민하다. 지도에 나온 대로 ‘벵골만 항해’로 명명한다. 뭐 아무렴 어때? 아는 사람끼리 통하기만 하면 된다.
오후 1시 40분. 이번 항해의 첫 끼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아침에 만들어 놓은 감자볶음에, 스리랑카 아빠 ‘데릭’이 준 매운 닭요리다. 아직은 Galle 항에 가까운 곳이라, 배들이 많다. 레이더 알람도 계속 울린다. 특히 어선들이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밥을 콧구멍으로 먹는 중이다.
오후 2시 12분. 뭐가 문제지? 윈디에 따르면 뒷바람이어야 하는데 크로스홀드 6~7노트다. 엔진 Rpm 1,350에 속도도 3.8 노트. 바람 방향도 안 맞고, 역조류 같다. 앞으로 3시간 더 가서 웨이포인트 6번에서 포트 20을 하면 방향이 옆바람이 된다. 그래도 뒷바람은 아니다. 시작부터 윈디가 잘 안 맞는다. 이 속도로 가면 12일 넘게 걸리네. 흠...
오후 2시 35분. 집세일을 110% 편다. 선속 4.7노트. 바람은 계속 크로스 홀드 6~7노트다. 바람이 윈디와 전혀 안 맞는다. 국지적인 상황인가. 뭐 어쨌든 세일요트 선장은 컴퓨터 데이터가 아니라, 바닷바람과 대화하는 수밖에 없다. 선속이 5.1노트가 되자, 도착 예상이 10일로 줄어든다. 윈디를 믿어보자.
여기도 국제 코리도어처럼 항로가 뚜렷하다. 나는 지금 바다의 고속도로를 횡단하여 동쪽으로 가는 항로를 타야 한다. 대형 상선이 많아, 좌우를 열심히 살피며 간다. 점심 먹고 졸린데 큰일이다.
아직 인터넷이 된다. 김기자님이 타신 콜롬보 행 익스프레스 기차에 에어컨이 없다고 하신다. 그리고 500루피는 2등 칸이고, 일반석은 350루피라고 한다. 참 진짜 대단하다. 엄청나게 싸다. 그래야 스리랑카의 서민들이 살아 갈 수 있다. 다 맞춰서 살아간다.
어제 우리나라에 비하면 경제적으로 한참 어렵지만, 화목하고 미소가 그치지 않는 스리랑카 가정을 보았다. 외국 손님 오셨다고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K-Pop과 춤을 좋아한다고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던 스리랑카 소녀들. 엄숙하고 존경받는 아빠와 자애롭고 조용하며 집안을 사랑으로 이끄는 엄마. 내가 평생 찾던 것들이 스리랑카의 에이전트 Nuwan의 가정에 있었다. 나는 Nuwan에게 부럽다고 했다. 그가 내 마음을 알지는 모르겠다. 마음속에서 ‘오블라디 오블라다’ 가 울려 퍼지는 저녁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죽을만큼 가난하지만, 스리랑카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한 힘이 있었다. 내가 어릴 적 대한민국도, 분명히 가난했지만 행복한 힘이 있었다. 스리랑카의 경제회복과 이 구김살 없는 스리랑카 아이들의 미래가 밝기를 기도한다. 나는 이제 세일러들에게 말할 거다. 스리랑카 Galle 마리나에 가보라. 어쩌면 우리가 찾는 삶의 원형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구체적인 스케치 정도는 볼 수 있을 거다.
오후 4시. 뒤에서 고함 소리가 난다. 담요를 차양처럼 가려서 뒤가 안 보인다. 나가보니 어선이다. 물고기를 사라고 난리다. 안 산다고 하니 담배를 달라고 난리다. 너무 가까워 위태위태하다. 어쨌든 웃으면서 거절했다. 내가 가려는 방향을 막고 있어 짜증난다. 분명히 Galle 항구에서 나를 본 사람들일 것이다. 그때 리나 엄마에게서 페이스톡이 온다. 인터넷이 달랑달랑 하니, 갈라지고 끊어지는 음성만 듣다가 끝난다. 안타깝다. 내가 딴 짓을 하니 어선도 돌아간다. 한낱 어선이 저럴진데, 진짜 해적이라면? 참 보통 두려운 상황이 아닐 것 같다.
바람 크로스홀드 10노트, 집세일 110%, 메인세일 100%다. 엔진 Rpm 1,350 그런데도 5.2 노트다. 역조류가 상당하다. 계속 이러지는 않겠지. 출항하면서 자던 리나가 깨어 잠깐 통화했는데, 고새 리나가 보고 싶다. 리나는 흥! 하고 딴 짓만 하는데, 아빠의 지독한 짝사랑이다. 다른 아빠들도 다 이렇게 애를 태우며 딸을 기르나? 딸 기르기. 흥! 고거 달콤 쌉쌀하구나.
오후 5시 20분. 벵골만 항해의 첫날 저녁식사다. 남은 밥에 돼지고기 장조림, 양배추를 잘게 썰어 된장에 찍어 먹는다. 물론 스리랑카 인이 준 닭고기도 같이. 어쨌든 첫날은 만찬이다.
오후 5시 50분. 바람 12노트, 선속 6.1노트다. 바람이 더 강해지면 축범 해야겠다. 일단 동진하는 항로의 제일 남쪽, 한계선을 조금 더 벗어난다. 항로 안에는 큰 배들이 득시글하니 항로 표기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동진한다. 그래야 큰 배들이 제네시스를 추돌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할 수 있을 거다. 1,169해리 남았다. 32해리 왔다.
오후 6시 30분. 바람 방향이 바뀌었다. 메인 세일 시트를 풀어 붐을 왼쪽으로 보내는데, 소리가 이상하다. 뭐지? 하고 갑판으로 나가 마스트를 살핀다. 헛! 마스트에 붐을 고정하는 볼트 머리가 깨져 볼트가 반 쯤 나와 있다. 붐이 마스트에서 떨어지기 직전이다. 일단 메인세일을 접었다. 스패너와 망치, 드라이버로 볼트를 원위치 해본다. 안 된다. 설혹 망치로 두드려 제자리에 넣는다고 해도 볼트 머리가 없어, 금방 다시 빠져 나올 거다. 이쯤 되면 대형 사고다. 난감하다. 붐은 계속 흔들리고 볼트는 금방이라도 빠져나올 듯 위태롭다. 볼트가 빠지면 붐을 혼자서 들어 고정하긴 불가능하다. 아마 랑카위에 도착하면 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메인세일 리깅은 엉망이 되어 복구가 대단히 힘들 거다. 당장 항해가 어려워진다.
오후 6시 40분. 비슷한 사이즈의 볼트만 있으면 된다. 공구함을 선실 바닥에 막 쏟아 버린다. 적당한 볼트를 찾으려는 거다. 미친 듯이 찾아도 없다. 일단 스패너 연장로드를 가져다 망치로 두드려 끼운다. 볼트는 힘없이 갑판 바닥에 떨어진다. 연장로드는 한쪽이 고정되게 되어 있고 길이가 길다. 하지만 다른 쪽을 빠져 나가지 않게 고정해야한다. 뭘로 고정하지? 스패너 연장로드는 나사산이 없다. 그냥 매끈한 스텐 봉이다. 그대로 두면 진동에 의해 반드시 빠져 달아날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다. 완전히 어둡기 전에 임시방편 작업을 끝내야 한다. 또 선실로 내려가 미친 듯이 공구함과 서랍을 뒤진다. 스텐 나사 밴드가 있다. 이건 수도 호스 등을 고정하는 물건이지만, 9일 동안만 고정되어 있으면 된다. 어차피 랑카위에서 제대로 수리 할 것이다. 스패너 연장로드를 스텐 나사 밴드 3개로 단단히 고정한다. 확인 점검하니 빠져 달아날 것 같지는 않다. 내일 다시 큰 볼트를 찾거나, 스패너 연장로드를 더 단단히 고정할 부품이 있는지 확인하자. 어쨌든 당장 붐이 떨어져 메인 세일이 박살날 위기는 넘긴 것 같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오후 7시. 야간 항해등을 켜니 마스트 등은 두 개나 안 들어온다. 이것도 랑카위에서 수리해 야겠다. 봄 고정 볼트가 빠지는 바람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온몸이 땀투성이다. 간단히 샤워를 한다.
오후 8시. 바람은 스타보드 빔리치 7노트. 엔진 Rpm 1,350. 선속은 4.0 노트를 오르내린다. 지독한 역조류다. 바람이 12노트 이상 불어야 한다, 기다리자. 침로는 90도다. 달마처럼 정 동쪽으로 항해중이다.
5월 19일 오전 0시 25분. 배들이 3~5 해리 사이로 상당히 가깝게 있다. 빨간등이 선명하다. 잔뜩 흐려서 별은 보이지 않고 간간히 빗방울만 볼에 스친다. 잠시 까무러치듯 잠에 빠졌다가 센 바람이 스치는 낌새에 놀라 일어났다. 출항 첫날인데다, 몇 가지 고장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었나 보다. 특히 붐 고정 볼트 건은 많이 놀랐다. 옆바람 13노트에 선속은 5.5 노트. 엔진 Rpm 은 1,100 으로 줄인다. 이정도 바람에 겨우 5.5노트라니. 역조류가 상당하지만, 그나마 바람이 불어줘서 속도가 너무 늦지는 않다. 침로 90. 곧장 달린다.
오전 3시 17분. 번개가 번쩍인다. 풍속 13노트, 선속 5.7 노트. 조류가 변했나? 선속이 좋아졌다. 잠시 잠들었다가 레이더 알람에 깼다. 꿈속에서도 나는 뭔가를 해결하고 있었다. 레이더엔 6대의 배들이 표시 되고 있다. 1,124해리 남았다. 77해리 왔다. 선속이 빠르니 7일 몇 시간 남았다고 성급하게 표시 된다.
오전 6시 24분. 풍속 빔리치 13~15노트, 엔진 Rpm 1,250. 선속 5.0 노트. 파도가 세다. 바람과 파도의 크기에 비하면 속도가 영 아니다. 역시 역조류인가보다. 마스트로 나가 어제 해놓은 응급조치를 확인한다. 아직은 단단히 잘 고정 되어 있다. 힘을 한쪽으로 받는지, 스패너 연장로드가 한쪽으로 꽉 끼어져 있다. 앞으로 8일간만 잘 버텨 주기를 소망한다.
오전 8시 45분. 풍속 빔리치 11~14노트, 선속 5.9~6.3 노트. 속도가 조금 나아졌다. 메인세일 트림을 자제한다. 혹시 진동으로 스패너 연장로드에 무리한 힘이 가해져 빠져 달아날까봐. 연료펌프를 수리하고 모든 필터류를 다 갈고, 오일도 교환한 엔진은 상태가 좋다. 기계는 역시 닦고 조이고 기름 쳐야 한다. 메인 세일 고정 상태도 좋으니 너무 걱정말자. 이제 8일만 더 버텨주면 된다.
목구멍이 뻐근하다. 편도선 상태가 안 좋다. 열이 나거나 하는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목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게 뭐든 무리하지 말자. 마이신 종류의 약은 없다. 젠장 이래저래 뭘 빠뜨린 게 이리 많은지.
결국 항해는 결핍과의 타협이다. 일상과 일상적인 필요 생활용품의 결핍. 일상에서 늘 이루어지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의 결핍. 일상이 주는 대부분의 즐거움이 결핍된다. 그래서 빈곤해 지는 것은 아니다. 그 나머지 부분이 상상과 희망으로 채워진다. 결핍으로 인해 소중한 것들의 가치가 더 빛난다. 그런 이유로 지혜를 갈구하는 구도자는 숲이나 토굴로 가고, 정치적인 지도자는 투옥되어 더욱 단련되나 보다. 하나 깨닫는다. 나도 이번 항해에서 결핍이 선사하는 것들을 얻게 되길 바란다.
오전 08시 50분. 임대균 선장으로부터 위성전화가 왔다. 5월 27~28일의 예보를 듣는다. 내가 확인 하지 못한 날씨다. 20노트 이상 뒷바람이 부는 데 사이클론은 아니라니 다행이다. 어제 붐의 고정 볼트 탈락사건을 말해준다. 아무래도 랑카위에서 전체적인 점검을 하자고 한다. 나도 그럴 생각이다. 또 연락 준다니 너무 고마운 일이다. ‘랑카위에서 봅시다.’ 하고 전화는 끊겼다.
오전 9시 5분. 엔진 Rpm을 1,100으로 낮춘다. 선속 6.2노트. 바람으로 속도가 충분히 난다. 엔진은 그저 배터리 충전과 약간의 추진력으로 족하다. 이대로 라면 중간에 약간의 디젤만 보충하면 된다.
오전 9시 50분. 역시 배가 고프지 않다. 항해 중엔 늘 이렇다. 때가 되면 머리가 몸에 밥을 넣어 줘야 한다. 고 충고한다. 오늘 아침은 걸렀다. 이따 10시 30분 쯤 어중간하게 브런치 삼아 뭘 좀 먹어 줄까?
드라마 가을동화 대본을 읽고 있다. 참 재미나다. 이러니 이걸 TV로 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나는 TV 없이 30년 살았다. 드라마라곤 ‘나의 아저씨’ 밖에 본 게 없다. 그 드라마의 방영 당시, 나는 오갈 곳 없이 용산 대림 아파트 친구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눈이 참 많이 내리던 그 겨울. 촬영지가 바로 아파트 인근 철로가 지나는 골목길이었다. 친구와 나는 열광하며 나의 아저씨를 본방사수하고 드라마가 끝나면 눈 덮인 그 철길 골목을 걷곤 했다. 당시 내 처지는 주인공 아저씨와 비슷했고, 마지막 도전으로 요트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쓴 것이 뭐냐고 물으면 ‘독한여자!’ 라고 한순간도 망설임 없이 말할 거다. 소주는 달았다. 인생이 쓸수록 소주는 점점 더 달았다. 지금 이 ‘벵골만 항해’를 생각하면 나는 나름 작은 성공을 한 거다. 그러니 가자. 즐겁게 가자. 지금 내겐 가족과 세상 제일 귀여운 딸이 있다. 술은 끓었다.
오전 10시 30분. 1,082 해리 남았다. 119 해리 왔다. 어제 출항 후 역풍과 조류 때문에 속도가 많이 느렸나 보다. 120마일도 못 왔다. 오늘 부터는 바람이 좋다니 속도도 기대해 본다.
오전 10시 40분. 라면을 끓인다. 라면이 없을 때는 여러 가지 요리를 궁리하더니 라면이 생기니 고민 없이 라면이다. 역시 인간은 간사하다. 배가 많이 흔들려 가스렌지가 마구 흔들린다. 라면 하나 끓이기가 대모험이다.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지 않도록 주의한다. 상당히 거친 항해지만, 아덴만 탈출을 생각하면 뭐. (14~18노트 역풍에 역파도, 4일 동안 펀칭을 당하며 소말리아 해안을 달렸다.)
브런치 라면을 먹고 세탁을 한다. 티셔츠와 반바지, 수건 등을 빨아 넌다. 이제부터는 하루에 팬티하나, 셔츠하나, 수건 한 장의 빨래가 될 거다. 아무도 없으니 팬티만 입고 있다가 저녁에는 쌀쌀하니 티셔츠도 입는다. 풍속은 빔리치 12~15노트, 선속은 6.7 노트다. 조류가 없거나 순조류다. 메인 세일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니 불편하다. 그러나 부서져 난리가 나는 것 보다는 훨씬 낫다. 메인세일을 50%만 펴고, 흔들리지 않도록 메인세일 시트를 단단히 당겨 놓는다. 얼씨구? 나비오닉스에서는 6일 20시간 남았다고 한다. 그럼 좋겠네. 5월 27~28일 강풍을 피해가도 되니.
정오. 풍속은 12~15노트인데, 선속이 7노트를 넘는다. 아무래도 조류의 도움을 받는 것 같다. 집세일을 축범 하려다, 그대로 둔다. 바람이 18노트를 넘어가면 축범 하자. 청해부대에서 안전 확인 위성전화가 왔다. 멀리 수평선에 구름이 하늘로 솟아 있고, 제네시스는 쾌속질주중이다.
오후 2시 30분. 잠시 주위를 지나는 선박들이 많지 않은 사이, 잠들었다. 깊이 잠들어 담요가 축축해 지도록 땀을 흘리며 잤다. 선속이 7노트를 넘고, 나비오닉스는 5일 21시간 남았다고 표기 된다. 정말 그렇게 될지도 모르게 쾌속으로 달리고 있다. 축축해진 담요는 곧 해 가리개 차양으로 뒤에 널어 햇빛도 가리고, 말린다. 우현 6마일 지점으로 컨테이너선이 지나고 바람 우는 소리가 들린다. 상당히 상쾌한 바다와 하늘이다.
오후 3시. 오토파일럿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집세일을 축범한다. 선속이 6.6노트로 줄어든다. 조금 천천히 가도 괜찮다. 배에 무리가 가서 여기저기 고장이 생기는 것보다는 낫다. 어차피 항해 일정이 1~2일은 줄어들 바람이다. 1,054 해리 남았다. 147해리 왔다. 이제 스리랑카 해안을 벗어나 망망대해 벵골만으로 진입한다.
하나 잊기 전에 정리한다. 스리랑카에서 10일 동안 사용한 전기료가 50달러였다. 하루에 5달러(6,500원) 셈이다. 스리랑카의 일반 물가에 비하면 굉장히 비싼 편이다. 나는 에이전트에서 공식적인 표를 보여 달라고 했다. 1Kwh 당 얼마인가? 그리고 내가 10일 동안 쓴 전기량은 얼마인가? 그러나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고, 공식적인 계산표를 받으려면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당장 떠나야 하는 나의 약점을 노린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전기료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은 없었다. 이젠 도착지마다 1Kwh당 전기료를 꼭 확인하고, 반드시 전기미터기를 촬영해 두어야겠다. 엉뚱한 곳에서 뒤통수를 맞았다. 나는 Gavin 에게 가서 이 이야기를 해주고, 반드시 사전에 확인하라고 일러두었다. 나는 이 상황을 세계일주 선장들에게 말해 줄 거다. 나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는 일이 없도록. 황당하다.
Galle에서 총 500리터의 디젤유를 샀다. 툭툭 기사들에게 산 것이 300리터, 에이전트에게서 산 게 200리터. 둘 다 리터당 1.29달러다. 그러나 에이전트에서 산 디젤유가 훨씬 더 검은 색이다. 깨끗하지 못한 거다. 툭툭 기사들에게 산 디젤유는 마리나 입구에서부터 내가 직접 수레에 실어 날라야 한다. 힘들다. 에이전트는 트럭으로 배까지 배달해 주었다. 그러나 디젤의 상태를 미리 알았더라면 에이전트에게 사지 않았거나, 미리 깨끗한 디젤을 확인했을 거다. 정리하면 Galle 디젤을 살 땐, 에이전트에게 확실하게 깨끗한 디젤을 확인하고 사야한다.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물과, 디젤, 식품을 제외하곤 구할 수 있는 게 없다. 특히 엔진 벨트, 유수분리기 필터, 엔진오일 석션 펌프를 콜롬보에서 1~2일 이면 구할 수 있다고 장담해 놓고 모조리 실패 했다. 한국에서 임대균 원장이 구하고 김기자님이 운반해 주셔서 해결했다. 스리랑카 엔지니어를 믿고 기다렸다면 완전히 낭패를 볼 뻔했다. 스리랑카 Galle에서는 엔진 부품을 구할 수 없다. 다른 선장님들이 참고 하시길 바란다.
지금 제네시스의 모델은 독일제 바바리아 50이다. 마스트와 메인 세일 구조물도 모두 이름 있는 Selden 사 제품이다. 그러나 이번 항해 중, 붐의 모든 나사들을 모두다 새로 조여야했다. 그리고 이번에 붐을 연결하는 볼트가 빠진 것이다. Selden 사의 제품이 부실한 것인지, 원래 세계일주 할 때는 당연히 모두 확인하고 조여야 하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메인세일 붐 부분은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다. 나사 하나 빠지면 그 결과는 참혹하다. 마스트 항해등이 모조리 고장 나서 작업등을 켰다. 없는 것 보다는 낫다. 랑카위 가서 손보아야할 자잘한 것들 중 하나다.
오후 5시. 미리 저녁식사를 하고, 배를 다시 한 번 둘러본다. 이불과 세탁물을 걷는다. 바람은 13~16노트를 오르내리고, 선속은 6.6 노트. 상당히 빠르다. 엔진 Rpm은 1,100. 그저 충전하는 수준이다. 이번항해에 연료를 상당히 절약할 수 있을 것 같네. 바람이 세지니 파도도 높다. 롤링과 요잉이 상당하다. 그래도 오토파일럿이 씩씩하게 버텨주고, 새로 교체한 C80 레이더 플로터가 정상 작동해서 마음이 놓인다. 이제 6일 15시간만 더 가면 된다고 나비오닉스에 나온다. 1,031 해리 남았다. 170 해리 온 거다.
5월 20일 오전 1시 40분. 옅게 구름 낀 밤하늘 별들이 가득하다. 좌현으로 북두칠성과 북극성이 구름 사이로 보인다. 우현에는 전갈자리, 땅꾼자리 등, 남쪽 하늘의 별자리들이 가득이다. 풍속 13~15노트, 선속 6.1~6.4노트. 좌현으로 카고 한 대가 서쪽으로 진행 중이다. 남은 거리 985해리. 216해리 왔다. 어둠속에서 파도가 조금 약해졌음을 느낀다.
여기는 벵골만. <latitude 5. 36. 789 longitude 83.39.149> 어둠 속을 빠르게 달리는 세일 요트 위에서, 나이든 남자가 별자리를 헤고 있는 건 낭만일까? 철이 덜 든 걸까?
오전 5시 30분. 일출을 보고 있다. 구름이 많지 않아 깔끔한 일출이다. 편도선이 계속 신경 쓰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아마 그동안 무리 한 것이 올라온 모양인데, 맘 편히 책이나 읽고 바다나 바라보자. 말레이시아에 가야 병원을 가든 주사를 맞던 해결이 날 것이다. 최대한 이 상태를 유지 하도록, 잘 먹고 물 많이 마시자. 비타민 C도 열심히 먹고. 제일 중요한 건강이라는 요소를 소홀이 했다. 스리랑카에서 목이 뻐근할 때 뭔가 조치를 하고 왔어야 했다. 미련했다. 배만 챙기고 나를 챙기지 않다니.
오전 6시. 통영 이준희 선장님께 위성전화가 왔다. 기상예보를 상세히 알려 주신다. 약속하신 대로 실행하신다. 생면부지인 나에게 한 본인의 약속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감사하다. 말씀 言(언)을 이루는 成(성) 사람. 誠實(성실) 한 분이다. 나는 복이 많다.
메인세일 트레블러를 조정해 좌현으로 이동한다. 흔들리지 않으면서 바람을 잘 받게 한다. 어쨌든 붐을 임시 고정해 놓은 것이 풀리면 안 되니, 축범하고 무리하지 않는다. 953해리 남았다. 248해리 왔다. 전체 거리 1,201해리의 20% 온 거다. 선속 6.3노트.
오전 10시. 세일링서울팀의 안희원 선장에게 위성전화가 왔다. 세일링서울팀은 임대균 선장, 안희원 선장, 조상욱 선장 이렇게 세 명이 랑카위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장거리 항해의 매운 맛(?)을 보여줘야겠다. 늘 한결같은 아우들이다. 그들의 요트를 딜리버리 할 때는 내가 늘 잔소리꾼이 되었었다. 아, 붐 고정용 스텐볼트 두 개 사오라고 부탁해야겠다. 스텐볼트는 길이 120mm. 직경 15mm 한 1/3쯤 나사산이 있으면 된다. 2mm 두께의 와셔 4개. 풀림방지 너트 4개. 이거면 붐의 고정 볼트로 문제없다. 원래의 고정 볼트는 뭔가 멋을 부린 것 같은데 바로 그 멋 부린 곳에서 고장이 났다. 볼트는 딱 볼트처럼 생기고, 볼트로 역할을 할 때가 제일이다. 요트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전화를 끊자 바로 골아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스리랑카 Galle 마리나에 있을 때 잠을 많이 못 잔 것 같다. 보통 새벽 3~4시에 깨어, 장을 보던가 시내 구경을 하고 존 일행과 저녁 시간을 보내고, 더위에 뒤척이다 오후 10시 이후에야 간신히 잠들었다. 낮에는 찌는 더위에 선실에 있는 것도 고역이다. 바다는 육지처럼 달궈지지 않는다. 레이더로 가까운 곳에 배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 1시간 정도씩 꿀잠에 빠진다. 가드존을 원형으로 설정하면 360도 어디서 뭐든 다가오면 알람이 울린다.
정오. 마늘을 까서 마늘 볶음밥을 만들었다. 당근도 넣고 계란도 넣었다. 맛은 기대이하. 마늘이 더 많이 들어갔어야 한다. 다진 마늘이 있으면 좋을 텐데. 뭐 없는 것 타령 해봐야 소용없다. 마늘 맛이라도 봤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일부러 오이와 양배추를 많이 먹는다. 비타민 부족으로 괴혈병 걸리기 싫다. 오이는 냉장고에 잘 보관하면 보름도 가는 걸 이번에 확인했다. 내가 오이를 이렇게 애호하는지는 나도 이번 항해를 통해 처음 알았다. 강릉에 도착해서도 오이를 이렇게 먹어댈까? 나도 궁금하다.
오후 12시 30분. 붐에 볼트 대신 고정시켜 놓은 스패너 연장로드를 조정한다. 양쪽에 모두 스텐 나사 밴드를 고정해, 어느 한쪽으로 빠져 나오지 않도록 한다. 이대로 6일만 더 버텨 주면 된다.
오후 1시 레이더 알람이 울려 후방을 보니 3 해리 밖에 새빨간 카고가, 꼭 수박처럼 보이는 둥근 탱크를 2개 싣고 있다. 무슨 가스 운반 선 같은데, 초록색 원형 탱크가 진짜 거대 수박처럼 보인다. 어디로 가는 배일까? 수박은 무슨 가스 일까? 알 길은 없다. 랑카위 가면 수박도 하나 먹어보자. 빨간 배가 1.5 마일까지 다가왔을 떄 보니 초록색 수박 탱크에 LNG 라고 크게 씌여 있다. 아하.
오후 5시. 오늘 저녁은 감자볶음이다. 감자에 자꾸 싹이 나서 문제다. 감자 보관법을 알아봐야겠다. 오렌지도 하나 까고, 양배추에 된장. 밥도 감자밥이다. 파도가 높다. 그래도 이렇게 갓 지은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진짜 감사한일이다.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두자.
오후 7시. 사방이 완전히 어둡다. 벵골만에서 맞는 세 번째 밤. 풍속 쿼터런 10~11노트. 선속 6.2~6.4 노트. 제네시스는 순조롭게 나아간다. 880해리 남았다. 321 해리 왔다. 앞으로도 6일 가량 더 가야 한다. 이제 말레이시아 랑카위에 도착하면 에이전트가 없으니, 직접 서류 처리를 해야 한다.
며칠 전, 랑카위의 마리나 관리자가 에이전트를 소개하기에 무시했더니, 보험에 문제가 어쩌구 그래서 에이전트를... 하길래. 그동안 내 보험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내 친구들이 이미 랑카위에 많이 갔다. 그들 중 아무도 에이전트를 쓴 사람은 없다. 나는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보험이 문제가 된다면 다른 마리나로 갈게. 그러자 마리나 관리자는 재빨리,
[Ok, good to hear you already familiar with these. 오, 너는 이미 이것에 대해 잘 아는구나. We welcome & accept all boats.😇As for clearance, government office just next building to us. 우리는 모든 보트를 환영한다. 입국을 위한 정부 사무실은 바로 우리 빌딩 다음에 있다.] 하며 꼬리를 내린다. 도착도 하기 전에 사기부터 치려나 보다. 마리나 관리자가 이렇게 나오니, 갑자기 랑카위 로얄 마리나 요트 클럽에 가기 싫어진다. 김석중 선장님이 계시다는 랑카위의 Pulau Rebak Besar 마리나로 갈까? 그래도 한때 열 받는다고 마리나를 막 바꾸면 안 되겠지? 대 놓고 사기 치려는 에이전트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랑카위 로얄 마리나 요트 클럽 관리자 낯짝을 보고 좀 갈궈 줄까? 생각이 많아진다.
오후 8시 25분. 콕핏에 푸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린내가 확 올라온다. 또 날치가 올라 온 거다, 불을 켜고 휴지로 날치를 집어 밖으로 버린다. 날치는 살아서 좋겠지만 콕핏엔 비린내와 날치 비늘이 떨어져 있다. 레이더를 보니 좌후방 7해리 부근에 상선이 한 척 있다. 선속 6.3노트. 이제 도착까지 5일 23시간이 표시된다. 이대로 가면 하루 정도 앞당겨 지는 거다.
5월 21일(일요일) 오전 5시 45분. 오늘 아침은 쌀쌀하다. 졸다가 몇 번 깨어 담요를 끌어당겼다. 사방 24 해리 내엔 아무 것도 없다. 파도는 1.2 미터 내외. 바람은 쿼터런 10~12노트, 선속 6.2 노트. 남은 거리 816 해리. 385 해리 왔다. 총거리의 32%. 나비오닉스엔 5일 14시간으로 표시된다.
지금, 항해는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다. 처음 출발할 때 스로틀 레버 이상이나, 메인세일 붐 고정 볼트가 빠지려고 했을 땐, 연달아 벌어지는 사건들에 걱정이 컸다. 그러나 막상 항해를 시작하고 보니 늘 그랬던 것처럼 평화롭고 순조롭다. 그리고 나는 틀린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나는 7일이나 8일 만에 랑카위에 도착하기를 고대한다. 제대로 된 세일러라면, 이런 순조롭고 평화로운 세일링이 빨리 끝나기를 원할까? 예상이 9일이라면, 한 12일쯤 더 계속 되기를 기대하는 것 아닐까? 바로 이런 멋진 세일링을 위해 준비하고, 두근거리며, 출항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나는, 어서 랑카위 도착해서 배를 수리하고, 내 딸과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통화하기를 소망한다.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장거리 항해를 하며 가족과 일상의 소중함을 절절히 깨달은 것은 맞다. 눈에 닿는 곳 모두 연푸른 하늘에 흰 뭉게구름. 나는 수채화 속을 항해 중이다.
편도선이 계속 아프다. 누워 잘 때 신장이 느껴진다. 몸에 장기가 있다는 게 느껴지면 아프다는 거다. 편도에 염증이 생기면 신장에도 영향이 있겠지. 초등학교 4학년 때 신장염을 앓은 적이 있다. 이대로 가라앉기를 기도한다. ‘하느님 도와주세요. 여기서는 어떤 의료 행위도 불가능 합니다.’ 어쩔 수 없을 때, 무력할 때, 나는 하느님을 찾는다.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기도다.
편도선이 아프기 시작한 것은, 스리랑카 Galle 에서 존과 어울리기 시작한 2~3일 뒤부터다. 늦게까지 어울려 떠들며 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실은 나는 10시 전엔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인도양 항해 하느라 밤새 견시 하느라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러니 스리랑카에서는 무조건 깊이 잠 들어야 했다. 하지만 모처럼 사람 냄새 나는 존과, 신나는 스리랑카의 달밤을 보내고, 나는 매일 밤 10시나 되서야 배에 돌아갔다. 이것저것 정리하고 오후 11시~12시쯤 간신히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 3~4시에 깬 거다. 잠이 부족했다. 존과 저녁시간을 보내며 졸기도 했다. 뜨거운 스리랑카 날씨로 낮에는 잔뜩 들이 달은 선실에는 들어가기조차 힘들었다. 존과의 매일매일은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조금 일찍 먼저 돌아오던가, 어떻게든 취침시간을 더 늘여야 했다. 하나 깨달았다. 좋은 벗과 행복한 시간은 건강에 해롭다. 나는 평상심을 유지했어야 했다. 아직도 ‘적당히 조절하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철부지다. 세계일주 중엔 일상과 건강의 유지도 항해 구성 요소다. 편도선이 이대로 차츰 나아지기를 기도한다. 존과 Gavin은 몰디브 말레로 출항 했을까?
오전 7시.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생각난 일들을 해치운다.
1 스패너 연장로드를 조정한다. 스탠 밴드를 스패너 연장로드의 틈에 끼워 조인다. 아예 스텐 밴드가 스패너 연장로드의 턱에 걸려 빠지거나 밀리지 않도록 한다. 이대로라면 어느 정도 안심이다.
2 바람이 남풍에서 서남풍으로 자꾸 뒤로 간다. 이대로 가다 완전 Run이 되면 집세일은 별 역할을 못하게 된다. 메인세일을 100%로 펴고 메인세일 트레블러와 메인시트를 풀어 최대한 활짝 열어 뒷바람을 받기 좋게 한다. 로프로 붐을 좌현에 고정하여 덜컥 거리는 일이 없도록 한다.
3 집세일은 90% 로 줄여 펄럭임을 줄인다. 현재 선속 6.1 ~ 6.5노트를 유지한다.
4 빨랫줄을 햇살을 더 잘 받는 쪽에 하나 더 설치한다. 스턴 쪽에 빨래를 너니 오후 3시까지도 빨래가 축축하다. 후다닥 빨래를 하고 넌다. 햇살을 잘 머금어, 잘 구워진 빵처럼 바삭바삭한 빨래를 기대한다.
번개 같이 일을 마치고, 다시 정비석의 ‘명성황후’로 돌아간다. 명성황후에 대한 정비석의 평가는 오락가락하다가 비극으로 끝났다. 일족의 광휘를 위해 무당과 무속에 결탁하여 나를 파탄에 이르게 한 여자가 무슨 여걸인가?
오전 7시 40분. 화장실 바닥을 청소한다. 깨끗한 바다 위를 항해하는데도 흰 바닥에는 검은 얼룩이 낀다. 아마 벙커 C 유를 태우는 대형 선박 때문일 거다. 대형선박 하나의 매연이 자동차 8만대의 매연에 해당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대형 선박 여러 척이 지날 때는 매연이 바다를 가득 메운다. 우리 지구를 이렇게 사용해도 되는 걸까? 특히 마리나에 정박할 때는 육지 먼지와 새똥으로 갑판이 엉망이 되기 일쑤다. 갑판 청소를 자주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갑판에 나갈 때는 늘 배에서만 신는 신발을 신는다. 그래도 발바닥은 늘 새까맣게 된다. 어럽쇼? 청소하다보니 화장실 바닥에 작은 지렁이 같은 것들도 생겨나 있다. 대단한 생명력이다. 깔끔히 닦고 살충제도 뿌린다. 관리 안하면 벌레 천국이 되겠다.
다음은 최인호의 ‘상도’다. 5권 밖에 없어 아쉽지만, 없는 것 보다 낫다. 최인호 작가와 통성명 한 적 없지만, 딱 한번 마주친 적이 있다. 아마 1998년이나 1999년 쯤인 것으로 기억하다. 청담동 동궁타운 예식장 앞에(당시는 하드록 카페였던가?) ‘하바나’로 기억하는 코냑과 시거를 판매하는 2층짜리 바가 있었다. 두꺼운 책으로 벽을 장식하고, 진중한 마호가니색의 소파로 분위기를 낸 멋진 바였다. 원래 2층의 별실은 회원들만의 공간인데, 그곳을 아끼고 자주 들르던 내가, 거기 매니저 최모씨(여자분)에게, ‘나는 회원이 아니지만 여기를 회원들보다 더 아끼고 자주오니, 내가 왔을 때 별실에 예약 없을 땐, 무조건 내가 사용하게 해 달라’ 고 억지(?) 부탁을 했고, 최모씨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날 저녁은 별실에 예약이 있었나 보다. 2층에서 친구 J(이친구가 내 인생 최고의 배신자였다.)를 기다리며 코냑 잔을 들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왔다. 최인호 씨와 영화배우 이정재씨였다. 아마 다음 작품에 대한 의론 중이었나 보다. 이정재씨의 집중한 듯한 표정이 인상 깊었다. 우연히 하바나 바의 옆 자리에 앉아, 코냑을 따로따로 마셨다는 것 그게 전부다. 다른 장소에서는 독고영재씨, 이상면씨와 같이 술도 마셨지만 그분들은 기억하지 못 할 거다. 여배우 한 분도 소개 받았었지만, 그런 건 평생 기억에 꽁꽁 숨겨 두어야 할 이야기. 뭐 그렇다는 말이다. 항해일지가 재미 없을까봐, 옆길로 한 번 새봤다. 돌아보니 젊은 시절, 나름 퍽 재미나게 살았다. 나만 재미있는 이야기였다면 죄송합니다.
오전 8시 15분. 연료 게이지를 보니 1/4 정도 사용했다. 87.5리터. 하루 약 30리터 사용이다. 시간당 1.2 리터. 놀라울 정도로 경제적으로 사용했다. 이대로 라면 8.5일을 더 사용할 수 있다. 앞으로 5~6이면 랑카위 도착하지만, 내일 오후 쯤 파도가 얌전한 때를 기다려 연료 보충을 할 생각이다. 다시 말하지만 연료는 보충 할 수 있을 때 해놓아야 한다. 풍랑 일면 연료 보충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전 9시 30분. 바람은 쿼터런 7.0~9.0 노트, 선속은 5.4~6.0노트. 세일이 펄럭인다. 이정도 바람에 이정도 속도는 고마운 일이다. 794해리 남았다. 상도를 읽다가, 당시 내가 왜 상도 읽기를 중단했는지가 생각났다. 당시의 나는 상도의 내용이 불교나 천주교의 원리나 내용 등을 그대로 인용하여 이리저리 짜깁기한 괴상한 책이라고 판단했다. 종교적, 문화적으로 이미 많이 알려진 내용들을 최인호씨가 구성한 기본 줄거리에 길게 인용한 것은, 뭔가 제대로 된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읽다보니 당시의 기분이 그대로 떠올랐다. 당시 30대의 젊고 교만만 나의 치기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뭔가 제대로 된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그대로다. 거의 25년 만에 다시 만난 ‘상도’ 라는 책의 감상이다. 그러나 당시 제멋대로 살던 내가, 이제는 가톨릭 신가가 된 것을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상도의 마지막 장을 읽으며 터진 눈물을 감출 수 없다. 세월인가? 아마 그렇겠지.
오전 10시 5분. 바람이 9노트 이하로 약해졌다. 선속 5.0노트. 윈디상으론 그다지 약해지는 바람이 아닌데. 기다려 보자, 어차피 바람이 가자는 대로 가야한다.
오전 10시 40분. 출항 한지 꼭 3일 째다. 787해리 남았다. 414해리 왔다. 총 34.4% 온 거다. 하루 138해리, 목표 120해리보다 한참 더 왔다. 선속 5.8~6.1 노트. 지금도 속도가 좋아졌다.
오전 11시 40분. 남은 런천 미트를 계란과 함께 프라이 한다. 역시 남은 카레라이스와 잘게 썰은 양배추와 된장. 점심도 제법 많이 먹는다. 편도선이 조금 나아진 듯하다. 침 삼키기가 수월하다. 도중에 통영의 이준희 선장님께 위성전화가 왔다. 바람이 이대로 조금 약해지다가 토요일(27일) 일요일(28일) 20노트 이상으로 강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나비오닉스 상으로는 5일 이내 도착이다. 금요일(26일) 도착. 그렇게만 되면 강한 바람도 피할 수 있다. 바람은 쿼터런 10노트인데, 선속은 6.5노트다.
오후 12시 30분. 설거지를 하다 뭔가 이상해서 수도꼭지를 열고 닫아 보니 급수 모터가 계속 돈다. 뭐지? 확인 해보니, 지난번 수리했던 온수기의 급수 파란색 호스가 또 찢어 졌다. 거의 비슷한 부위다. 탱크물이 40리터 정도 순식간에 빠졌다. 이렇게 조기 발견해서 정말 다행이다. 랑카위 가면 같은 사이즈의 호스를 미리 구해 교체해 두어야겠다. 근데 왜 같은 부위가 계속 터질까?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자주 터질 부위가 아닌데. 오래 되어 경화 된 탓일까? 일단 터진 부위를 잘라내고 다시 끼운다. 자꾸 터지는 부위엔 강력 에폭시를 발라둔다. 적어도 에폭시 바른 부위는 안 터질 거다. 늘 수돗물을 쓰고 나면 급수모터를 끄는 습관은 중요하다. 아니면 잠깐 사이 물탱크의 물이 다 빠져 나간다. 순식간의 일이다. 온수기 부근의 관을 계속 체크하자! 우째 이런 일이. 식겁했다. 놀라 심장이 벌렁벌렁한다. 이번 항해는 계속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는구나. 시간 날 때, 바닥에 고인 탱크 물이나 퍼내자.
해수부에서도 매일 한 번씩 위성전화가 온다. 위험지역도 벗어났는데, 위치 확인을 해준다. 내가 전화를 못하는 상황에, 이렇게라도 체크해주니 고마운 일이다.
오후 2시. 바닥에 고인 탱크 물을 퍼내고, 샤워를 하고, 빨래를 했다. 몇 번 시험해 봐도 물이 새지 않는다. 하지만 급수호스가 언제 또 터질지 모르니 늘 확인해야 한다. 수돗물 사용하지 않을 때, 급수 모터 반드시 끄기!
만약 온수기 급수 라인이 또 터지면, 콕핏 샤워기로 가는 급수라인을 끊어서 임시로 교체하자. 콕핏 샤워기로 가는 라인은 랑카위 가서 새로 설치하면 된다. 이렇게 머릿속으로 대책을 마련하니 마음이 좀 낫다.
오후 4시 40분. 지금 스리랑카와 수마트라의 한 가운데, 벵골만의 중심을 통과중이다. 이제부터는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의 육지와 가까워진다. 선속 6.5 노트. 파도 1미터 내외. 쿼터런 9~10노트.
오후 5시. 이집트에서 산, 크노르 스프와 파스타면으로 저녁식사. 오이지와 양배추에 쌈장. 이래저래 잘 찾아 먹는다. 스리랑카 이후로 식욕도 좀 살아 난 것 같다.
오후 6시 10분. 풍속 9~12노트, 선속 6.5~7.2노트. 풍속에 비해 상당히 빠르다. 740해리 남았다. 471해리 왔다. 총구간의 38%. 나비오닉스엔 4일 16시간 남았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금요일까지는 무리 없이 도착할 예정이다. 임대균 선장 일행이 오기까지 일주일가량 기다리고 대기해야 한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랑카위에서 어지간한 건 다 고치고 떠나자.
시간이 되면 김석중 선장님 계시는 Pulau Rebak Besar 마리나로 가서, 계류조건이나 수리조건 등을 확인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Pulau Rebak Besar 마리나의 수리 환경이 더 나으면, 거기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1~2시간 돌아가면 된다.
오후 8시. 역시 SIDNEY SHELDON 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끝없는 도망자’를 펼치자, 숨도 못 쉬고 끝까지 정독해 버렸다. 그래, 이런 게 소설이지. ‘SKY IS FALLING’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항해 상황을 확인한다. 풍속 쿼터런 8~13노트, 선속 6.0~6.5노트.
좌현 후방으로는 북두칠성이 놓였다. 배 뒤편 하늘엔 금성이 초롱초롱하고, 쌍둥이자리가 바로 곁에 있다. 그 좌측 위로 사자자리다. 별이 가득한 벵골만. 단단히 기억해 두자, 한국에 돌아가면 무척 그리워질 밤하늘이다.
2023년 5월 22일 월요일 오전 4시 30분. 꿈에서 리나를 보았다. 리나는 신나게 대야의 물을 저으며 놀고 있었다. 눈을 떴다. 제네시스는 리나가 대야의 물을 저으며 놀 때처럼, 찰박이는 소리를 내며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 레이더를 살핀다. 좌후방 6마일 지점에 두 대의 선박이 지나가고 있다. 벵골만에 여명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선속 6.2노트. 남은 거리 678 해리. 523해리 왔다. 총구간의 43.5%다.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 앞에서 변침하는 7번 웨이 포인트 까지는 하루하고 20시간. 7번 웨이 포인트까지가 벵골만이다. 이후로는 말라카 해협. 수마트라 섬과 랑카위 사이를 이틀 더 항해하면 된다.
세면을 하고 커피를 끓인다. 벵골만 항해의 4번째 일출을 준비하려 여명이 먼저 달려오고 있다. 편도선이 한결 나아졌다. 침 삼키기가 수월하다. 몸에서 독소가 빠지는데, 최소 4~5일이 필요하구나. 천만 다행이다. 지나친 건강 염려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편도선이 염증으로 번져 그 염증이 신장으로 가면, 진짜 항생제나 소염제 한번 못쓰고 큰 일 날 뻔했다. 아무런 의료적인 조치를 못하니, ‘급성’ 어쩌구로 갈 수도 있는 상황. 그동안 상당히 긴장했다. 이제 마리나에 정박해도 수면을 충분히 취해야겠다. ‘존’ 같은 좋은 친구를 만나도, 딱 시간 지켜 돌아 와야겠다. 항해의 기본은 건강이다. 좋은 선장이라면 기본을 지켜야 한다.
오전 5시 15분. 이른 아침부터 다시 시드니 셀던이다. Tell me your dream. 바람이 시원해서 독서하기 그만이다.
오전 5시 50분. 신라면과 오이 된장으로 아침식사.
오전 6시 30분. 디젤 150 리터를 보충. 연료 탱크가 가득 찼다. 하루 32리터 가량 사용. 이대로라면 10일도 더 사용할 수 있으니 이대로 랑카위까지 가면 된다. 엔진 Rpm 1,100. 런에 가까운 쿼터런 7~10노트, 선속 6.1노트. 나비오닉스는 4일 15시간 남았다고 한다. 오늘 중 전구간의 절반을 넘게 될 것 같네. 땀이 너무 흘러 샤워하고 사과 주스 한 팩! 싱글핸드 항해 시엔 뭐든 소포장으로 사서 즉시 먹는 게 좋다. 큰 것을 사면 반도 못 먹고 버리게 된다. 또 상한 음식을 먹으면 답이 없다. 또 덴마크 선장 톨스는, ‘항해 중 네가 지나치게 건강하면 인도로 가란다.’ 거기서 그들 일행 모두 배탈이 나, 병원에 입원했었다고 한다. 그런 일은 절대로 겪고 싶지 않다.
오전 8시 40분. 바람이 죽었다. 풍속 5~6노트. 세일은 빨래처럼 펄럭인다. 선속 5.0 노트. 선미의 태극기도 멈추었다. 오래 계속되지는 않겠지. 항해의 순간순간은 무척 느리지만, 돌아보면 상당히 빨리 흘러간다. 시간의 마법이다. 연푸른 하늘에 흰 구름들이 도리아 식 기둥처럼 높이 솟아 있다. 구름에 햇살이 가리니, 바다는 무채색으로 무거워진다. 서늘한 바람과 미지근한 바람이 섞여서 몸에 닿는다. 내 딸 리나의 재롱이 절실하다. 이기적인 생각일까?
오전 9시 15분. 문득 존의 터그보트에 놀러 갔을 때, 존이 한 농담이 생각났다. 그는 기압계 (바로메타)를 보여주며, 여긴 아주 특수한 배터리가 들어가! 라고 했다. 기압계에 배터리가?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바로메타엔 배터리가 들어가지 않지. 그런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신입 선원이 오면, 그에게 이 바로메타의 배터리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지. 그럼 그는 가까운 가게에 가서 바로메타 용 배터리를 달라고 하는 거야. 그럼 그 가게 주인도 ‘이 녀석, 얼뜨기 신입이로군.’ 하고, ‘우리는 없으니 저기 앞 가게로 가봐.’ 하고 다 같이 신입을 골려주는 거야. 일종의 통과 의례 같은 거라네. 나는 영국선장 John Hollidge에게서 얻은 몰디브 SIM카드를 존에게 주었다. 가족도 없이 몰디브 같은 곳에 갈 이유가 없어서 나는 몰디브를 지척에 두고도 가지 않았다. 오만의 Hawaha 마리나 리조트는 정말 멋진 곳이었지만, 나는 어서 출항하고 싶어 단 하루만을 더 머물렀을 뿐이다. 가족 없이 멋진 곳에 가는 건 무의미했다. 존은 몰디브에 잘 갔을까? 궁금하지만 아직 4~5일 더 기다려야 알 수 있다.
오전 10시. 신기하다. 바람은 쿼터런 6~8노트. 세일이 계속 펄럭일 정도로 약한 바람이다. 그런데 선속은 계속 6.0 노트 이상을 유지한다. 엔진 Rpm 1,100이 6.0노트는 아닐 텐데. 4.0 노트 정도가 고작일 거다. 여하튼 약한 바람에도 쾌속 항진 중이다. 이제 나비오닉스 항해도에도 수마트라 섬이 뚜렷하게 표시 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소설들을 읽고 있다. 몇 십 년 전 SF라서 더 독특하다. 당시의 미래와 현재의 상황이 약간 뒤틀려있다. 이런 시간차가 소설을 더 재미나게 만드는 것 같다.
오전 10시. 통영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 연락이 있었다. 내가 26일 (금) 도착 예정이라고 하니 센바람 안 맞고 들어가서 다행이라고 하신다. 현재 6노트 이상 잘 가고 있다고 말씀 드린다. 둘 다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오전 10시 30분. 세일링서울팀의 임대균 선장에게 위성전화 연락이 왔다. 붐 고정용 스텐 볼트와 부품, 검은색 전기 테이프, 제일 작은 사이즈 롱노즈플라이어 등을 부탁한다. 31일 오후 7시 랑카위 도착이라고 하니, 만약 제네시스가 26일(금) 도착하면 27일~31일까지 5일을 기다리면 된다. 찬찬히 수리나 하지 뭐. 랑카위 인근에 비싸지 않고 맛난 식당이나 있으면 좋겠다.
잠시 후, 임대균 선장에게 다시 위성전화가 온다. 그의 외동딸 ‘임사랑’이가 전주대사습놀이 어린이 판소리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는 반가운 뉴스다.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 그는 사랑이의 판소리 교육을 위해 목포로 스승을 찾아 이사했다. 그의 딸 교육이 드디어 열매를 맺은 거다. 이제 사랑이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23년 전. 당시 S대학 미학과 1학년이던 미소년 임대균을 기억한다. 그는 그가 창간한 잡지 ‘미인’의 인터뷰를 위해 나를 찾아 왔었다. 눈이 무척 많이 내리던 날, 우리는 관악산 연주암으로 갔다. 그는 연주암 가는 도중, 느닷없이 눈 덮인 바위위에 서서 춘향전 중 사랑가를 맛깔나게 불렀다. 눈을 뚫고 산에 오르던 많은 등반 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후 내가 완전히 망가져 서삼릉야영장으로 갔을 때, 우리는 나무 그늘 아래서 함께 천년학, 심청전을 들으며 세월을 보냈다. 임대균 선장의 보람된 결실에, 벵골만 항해중인 나도 진심어린 갈채와 응원을 보낸다.
오전 11시 30분. 일부러 아주 짜게 끓인 된장찌개를 놓고 점심 식사를 하려는 순간, 선속이 9노트를 넘어간다. 뭐지? 뜬금없이 바람이 크로스 홀드 17노트다. 잔뜩 열어 놓은 메인 세일이 마구 펄럭인다. 일단 메인세일을 60%로 축범 한다. 메인 시트를 윈치로 감아 붐을 가운데로 옮긴다. 집세일은 90%. 그래도 선속은 8.5 노트다. 돌풍인가? 일단 세일을 조절해 놓고 점심 식사를 한다. 젠장 정신없네. 편안하게 쿼터런에서 런이더니 갑자기 17노트 앞바람이라니. 황당하다. 꼭 KTX를 탄 기분이다. 빨래가 날아갈까 걷는다. 나비오닉스는 갑자기 3일 3시간 남았단다. 너무 빠르다.
오후 12시 14분. 바람이 13~14노트로 약해진다. 메인세일을 80% 펴서 속도를 6.7노트에 맞춘다. 순간적인 돌풍이었나 보다.
오후 1시 10분. 잠깐 사이에 풍향이 바뀐다. 쿼터런 11노트. 메인세일을 다시 100%로 펴고 메인 시트를 풀어 세일을 포트로 연다. 선속 6.7노트.
(사)강릉마리나선주협회 김회장님의 위성전화다. ‘이걸로는 길게 말할 수 없고, 언제 오시나요?’, ‘네 6월말 7월초 갑니다.’, ‘아하! 빨리 오면 좋겠는데. 사무총장이 있어야 해요.’, ‘네 제가 4일 후에 랑카위에 가서 연락드릴게요.’ 협회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랑카위 가서 할 일이 많네...
오후 3시 40분. 바람이 5.0노트로 줄었다. 세일만 펄럭거려 메인 세일을 40%로 줄였다. 선속은 5.5~5.9 노트 나쁘지 않다. 601해리 남았다. 600해리 왔다. 드디어 절반 온 거다. 4일 6시간 만에 50%다. 4일 9시간 남았다고 나비오닉스에 표시된다. 바람이 사라져서 그런가? 오후 햇살을 담요로 가려도 엄청나게 덥다. 다행히 편도선은 많이 좋아졌다. ‘죽은 시인의 사회 – 톰 슐만’을 읽기 시작했다.
오후 5시. 바람은 없어지고 파도는 거칠다. 풍속 런 5~6노트, 선속 5.1~5.5노트. 오늘은 바람이 계속 변하는 하루였다. 풍속 5~17노트까지 변화무쌍이다. 세일은 아무 역할도 못하고 펄렁거리기만 한다. 세일을 여러 번 조정했더니 손가락이 아프네. 전방 하늘은 파랗고, 후방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었다.
고추장, 참기름, 계란 프라이로 밥을 비볐는데 짜다. 고추장이 왜 짜지? 텁텁하고 이상하게 맛없어서 반쯤 먹다 버렸다. 양배추와 된장은 깔끔하게 먹어버렸다. 고추장 비빔밥은 내가 좋아하는 메뉴인데 입맛이 변했나? 저녁을 일찍 먹고 샤워도 해버렸다. 낮 항해 중간에 잠깐씩 졸다 깨보면 담요가 축축하게 젖어 있고, 온몸이 끈적거린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샤워하는 건 물 소비가 늘어 좋지 않다. 저녁에 한 번 깔끔하게 샤워하고 아침까지 버틴다.
오후 6시. 엉망이다. 바람이 북서풍으로 바뀌었다. 남서풍이 북서풍으로 바뀌다니. 이런 건 윈디에 없었는데. 일단 세일을 모두 스타보드로 옮겼다. 하루 종일 바람이 아주 난리다.
오후 7시. 바람 5노트, 선속 5노트. 585해리 남았다. 616해리 왔다. 이제부터 4일이다. 초승뒤편에 달이 예쁘게 떠오른다. ‘죽은 시인의 사회’ 때문에 가슴이 답답해 졌다. 한동안 검은 밤하늘과 별을 바라본다.
5월 23일 (화) 오전 12시 17분. 선박 두 대와 커다란 구름 덩어리가 레이더에 엉켜 있다. 가드존 알람이 날카롭게 울린다. 커다란 구름 덩이가 사라지기 전엔 가드존을 설정할 수 없다. 바람은 4~5노트로 세일은 여전히 제멋대로 펄렁인다. 약해도 바람은 남풍이다. 집세일을 다시 옮긴다. 선속 5.8 노트. 554해리 남았다. 647해리 왔다. 구름이 두터워 레이더가 위치 데이터를 자꾸 잃어버리고 경보가 뜬다. 큰 배들이 지나가니 바다에 매연냄새가 난다. 수마트라 서쪽 220마일 근방 (407Km) 지점 바다 한가운데서 신선한 공기가 아닌 매연이라니. 대형 선박의 공기 오염 문제는 심각하다.
오전 2시 30분. 깜빡 조는 사이 오토파일럿이 풀렸다. 왜 풀렸는지는 모르겠다. 순간 강풍으로 방향을 틀어졌나? 배는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급히 방향을 잡고 다시 오토파일럿을 가동한다. 뒷바람 4~5노트, 세일은 펄렁거리기만 한다. 선속 5.5~5.7노트. 549해리 남았다. 2시간 동안 5해리 밖에 못 왔으니 1시간은 북쪽으로 낭비된 거다. 아 어차피 북쪽으로도 가야하니 50%, 30분 낭비.
엔진 Rpm을 1,250으로 올린다. 속도가 너무 느려 그저 조류에 떠내려가는 수준이고, 돌풍으로 순식간에 방향이 바뀌면, 오토파일럿의 방향 제어가 어려 울 수 있다. 선속 6.1노트. 나비오닉스는 3일 16시간 남았다고 한다.
오전 2시 50분. 양치와 세수를 한다. 눈꺼풀이 무거운 상태로 한밤에 깨어 있기가 정말 힘들다. 커피를 진하게 탄다. 양도 많다. 검은 벨벳에 보석을 뿌린 것 같은 벵골만의 밤하늘이다. 중간중간 먹구름으로 가려진 하늘의 검은 공터가 있다. 밤하늘이 Satin 천처럼 부드러운 어둠이어서 그런가? 갑자기 무디 블루스의 Night in white satin이 듣고 싶네. 고등학교 때 엄청 듣던 곡인데...
오전 5시 10분. 항해 6일 째 일출이 시작되려 한다. 의미 없는 4~5노트 바람이지만 다시 북서풍이다. 집세일 방향을 바꾼다. 조금이라도 바람을 잘 받으면 좋다. 좋은 선장은 부지런하다. 나는 좋은 선장은 아니지만 부지런 하려 노력한다. 부지런하면 ‘이담에 커서’ 좋은 선장이 되겠지. 선속 6.5노트.
수마트라 섬 위쪽의 열도 사이로 빠져나가려니, 큰 배들의 항로에 근접하나보다. 지나는 배들이 가까워지고 있다. 하루면 수마트라 위쪽을 지나게 된다. 오늘 오후서부터 오늘 밤 사이엔 대형 선박을 주의해서 운항해야 한다. 현 위치서 수마트라 열도까지 1일 6시간, 수마트라 열도에서 랑카위까지 2일. 총 3일 11시간 남았다. 남은 거리 532해리. 669해리 왔다. 55.7% 온 거다. 잠깐 기록하는 사이, 일출이 끝나 버렸다.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운 별명인 '스텔라 마리스stella Maris', 곧 '바다의 별'은 원래 이시스의 별명이었다. 폭풍우를 만난 선원들은 마리아를 스텔라 마리스로 찬미하는데, 이시스 또한 선원들의 수호 여신이었다. - 예수는 신화다 중 [티모시 프리크, 피터 갠디]
흠, 우리 딸 리나의 세례명이 마리 스텔라 (Maris Stella)인데. 이 책은 여러 가지로 파격적이네. 그러나 내 신앙을 조금도 훼손하지 못할 것이다. 물질적이고 진화론적인 증거가 신앙의 긍정과 부정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처녀가 애를 낳아?’ 하고 눈꼬리를 치켜 올리던 전기공학도였다. 그러던 내가 선장으로 벵골만을 지나는 것은, 살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고, 인생의 계획에 아예 없던 일이었다. 내가 하느님을 믿게 된 것도 수많은 논거와 합리적인 증거 따위는 아무 상관없었다. 어느 순간, 나는 어두운 성당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다.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는 것은 공부와 노력에 의한 전진이 아니라, 워프 항법의 순간이동이었다.
오전 6시 30분. 카레 파스타와 양배추, 마요네즈, 우유 한 잔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배경음악은 추억의 포크 송. 오늘도 밝고 연한 바다, 제네시스는 파스텔화 속을 달린다. 사방 24 해리 내에 배 한 척 없다.
랑카위 수리 항목을 정리한다.
1. 메인 붐 볼트
2. 마스트 항해등 2개
3 스로틀 레버 교체
4 빌지 펌프 확인 및 교환
5 급수 호스 구하기
6 메인시트 줄 끊고 다시 엮기
7 엔진 오일 및 기어 오일 체크
8 텐더 좌석 구하기
9 해치 방수 작업
10 선수 스텐 밧줄 받침대
11. 선외기 오일 교환
12. 발전기 임펠러, 오일교환
13 임펠러 교환
14 유수분리기 오물 빼기
15 스피드 센서 청소
16 시동 스위치 커버
17 냉장고 팬
휴, 많다. 일주일 여유 있으니 하루에 몇 가지씩 천천히 하자. 이번 세계일주 항해에서 선장들은 그랬다. ‘문제없는 배는 없고, 큰 배일수록 더 문제가 많다.’
오전 8시 10분. 북서풍 6~8노트. 브로드 리치. 선속 6.4노트. Rpm 1,250. 파스텔 톤 하늘에 고대 상형문자 같은 흰 구름이 점점이 떠 있다. 바람이 북풍 빔 리치로 조금씩 강해진다. 역시 윈디에는 전혀 없던 상황이다.
오전 9시 35분. 통영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전화. 경도 90도 통과를 축하해 주셨다. 북풍 8노트, 선속 7.2노트로 잘 진행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통화는 짧게 끝났다. 이제 2일 22시간 남았다. 26일 금요일 중 도착할 것 같네. 김기자님이 가져 오신 추파 츕스 사탕을 잘 먹고 있다. 랑카위에서 더 사든가, 임대균 선장 편이 더 가져 오라고 해야겠네.
오전 10시.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류시화 옮김) 마침 김광석의 노래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가 158해리 떨어진 벵골만 한가운데, 7.2노트로 달리는 제네시스 안에서 나는 혼자 펑펑 울고 있다. 어쩌면 울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이 방아쇠를 당겨 준 것일지도 모른다. 파스텔 톤 수평선 끝에 내 딸 마리 스텔라 (Maris Stella : 김리나 21달) 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왜 울지? 글쎄. 어린 딸과 늙으신 부모님이 그리워서 울고 있다고 할까? 눈물이 넘쳐서 책을 덮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셔 진정해야만 했다. 고독하구나. 심장이 고장 나 덜그럭 거리기 전에, 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 아이의 옆집에는 최근에 아내를 잃은 나이 먹은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 노인이 우는 것을 보고 어린 소년은 노인이 사는 집 마당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노인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나중에 아이에게 이웃집 노인께 무슨 위로의 말을 했느냐고 묻자 어린 소년은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 할아버지가 우는 걸 도와 드렸어요." - <엘렌 크라이드먼. 도나 버나드 제공>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나도 울었다. 실컷 울고 나면 뭔가 시원해지겠지
오전 10시 40분. 배의 속도가 느려지기에 집세일을 140% 편다. 선속 7.2 노트. 붐에 볼트 대신 고정해 둔 스패너 연장로드를 다시 조정한다. 확인해 보니 스텐 밴드가 약간 밀려 있다. 스텐 밴드를 스패너 연장로드의 홈 안에 밀어 넣어 밀리지 않도록 한다. 이제 3일만 버텨 다오. 임대균 선장이 랑카위 올 때 붐 고정용 스텐 볼트를 두 개 사오기로 했다.
오후 12시 20분. 점심으로 이집트에서 산 라면과 볶음김치 조금. 오만 Hawana 마리나에서 산 5개의 사과 중 4번째 사과를 먹었다. 오래되어 퍼석퍼석하다. 맛이 아니라 영양분이니 몇 입 베어 먹고는 물고기들에게 주었다. 대형 선박들이 점차 많아진다. 수마트라섬 위 열도를 지날 때 각별히 주의하자. 북풍 빔리치 풍속 5.5~8노트, 선속 6.6~7.0노트. 482해리 남았다. 712해리 왔다. 전구간의 60% 왔다.
오후 3시.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절대 보지 않았을 책이지만, 고립된 작은 요트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려면 이런 책은 고마운 존재다. 생각보다 재미난 책이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이 책의 저자 조안, K, 롤링은 거부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잘 된 일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영화도 다시 보아야겠다. 넷플릭스에 있던가?
오후 4시. 바람은 브로드 리치 8노트, 선속 6.8노트. 사방 24해리 내에 한척의 배도 없는 진공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혹시 몰라서 담요와 콕핏 시트 등에 살충제를 뿌렸다. 소독제가 따로 없으니 그거라도 뿌려 둬야지.
오후 5시. 스리랑카에서 산 닭고기 볼 통조림과 흰쌀밥, 오이 된장, 김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오이도 다 떨어져 간다. 2일 반을 더 가야 하는데, 뭐 라면도 충분하니까, 어찌 되겠지.
오후 5시 20분. 5월 18일 출항하고 오늘이 23일. 6번째 맞는 석양이다. 어느덧 이게 벵골만 바다에서 맞는 마지막 석양이다. 내일은 수마트라 섬과 말레이시아 사이, 말라카 해협에서 석양을 맞게 될 거다. 배도 잘 가고 시간도 잘 간다. 스리랑카에서 불안불안하게 출발했는데, 어느덧 말라카 해협을 하루 앞두고 있다.
아무래도 6월 말까지는 한국에 못갈 것 같다. 일단 랑카위에서 배의 수리와 임대균 원장 일행 도착을 일주일 기다려야 한다. 6월 1일 랑카위에서 출발해도 중간에 날씨가 계속 좋을 리 없고, 비바람이나 태풍을 피해야 할 때도 있다. 코친마리나(1), 코타키나발루(2), 팔라완 부상가(3), 타이완(4), 강릉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중간에 필리핀 수빅과 일본 오키나와에 들르지 않는다고 해도, 빨라야 7월 10일쯤에야 강릉에 갈 것 같다. 너무 늦지 않게 딸과 가족을 보고 싶다.
오후 6시. 이미 주변이 어둡다. 시간대가 또 바뀌어야 하나보다. 지금 제네시스는 쿠알라룸프르에 가깝다. 시계를 조정한다. 오후 8시 32분이다. 이제 한국과 시차는 겨우 1시간이다.
오후 10시. 초승달과 금성이 제네시스 바로 뒤에 있고 상선들이 줄지어 오고 있다. 수마트라 위 Sabang 섬 위로 모든 배들이 통과할거다. 나도 그 항로로 가야 한다. 오늘과 내일은 특히나 주변 견시를 잘 해야 한다.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