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BS 낸시랭의 신학펀치 제44, 45회 테마에 대한 유튜브 댓글 모음
1.
CBS 낸시랭의 신학펀치 제44회 ‘구원은 행한 대로 받나요, 은혜로 받나요?’
https://youtu.be/TrhXVM7PWrc
holy fisher
김 교수님은 권 교수님이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붙잡고 성경의 전반적인 주제를 뒤흔든다고 말씀하시는데, 사실은 김 교수님이 로마서의 한 구절을 붙잡고 성경의 전반적인 주제를 뒤엎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원에 대한 대원칙은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입니다. 바울의 이신칭의도 상당히 왜곡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칭의란 행위를 배제한 칭의가 아니라 행위로 증명되는 칭의를 말한 것입니다. 성경의 대주제와 일치합니다.
holy fisher
바울은 유대인과 대비해 언약의 약속에 대해서 완전히 소외되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언약관계에 들어오게 된 것을 은혜요 구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었고 메시아의 소망도 없었으며 율법을 통해 주어지는 언약관계에 대해서도 완전히 소외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는 이러한 소망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지게 된 사실을 사도바울은 구원이요 은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기초로 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맺는 언약관계의 본질은 구약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관계와 다르지 않습니다.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변함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시인한 바이구요.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사도 바울은 예수 믿은 다음에 행위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은혜를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방인들 역시 구약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언약관계를 통해서 주어지는 소망에 대하여 참예하는 자격을 얻은 것을 구원이요 은혜로 주어진 바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고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구약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일한 선상에 서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신 4:1).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우리의 행위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더 높이는 것입니다(김철홍 교수님에게 말씀드리고 싶군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그러한 인간들이 각자의 의지의 판단대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도록 배려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의 관점에 의하면 구원은 취소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언약백성의 지위)을 얻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의 부정직과 부패된 행위로 그 언약관계를 깨트리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논지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5).
Jonghyuck Kwon
단순하게 은혜로의 구원이냐 행위로의 구원이냐에 대하여 선택을 논한다면 분명 은혜에 그 근거가 있음은 당연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거룩하며 완전한 성향을 포함하며 인간의 구원은 그 완전성에 부합되어야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완전성은 100퍼센트 깨끗함이며 이것은 인간 행위의 범주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가능하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고 그것을 믿는 것이 의(칭의)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정죄가 없습니다.
행위에 대한 말씀은 구원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때까지 성화되어 가는 방향성에 대한 것으로 이해되며 이것 또한 은혜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 또한 성화에서조차 행위의 근거에 의한 구원이 아닌 것은 우리가 믿은 후에도 완전히 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이것은 우리가 아직 육체 안에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이 성화에 관련된 행위는 완전이 아닌 온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성화되어가는 행위와 죽음 이후의 구원에 관련된 행위는 분명 구분되어져야 합니다. 질문을 하자면 구원에 관련된 행위가 구원의 어떤 부분을 담당하며 그 구원에 관련된 행위의 범위가 어느 정도여야 합니까?
분명 행위에 구원의 근거가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정확히 측량할 수 있는 말씀을 주셨을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이 구원에 있어서 행위를 말씀하실 때 자신의 위치가 정녕 구원을 이루는 데 충분한 정도까지 이루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 기준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을 저에게 알려주실 분이 있으면 저에게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이 글을 쓰는 저는 예수님을 믿지만 슬프게도 아직 어느 정도는 죄에 노출되어 있기에 저의 위치를 측량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분명 구원의 은혜 안에 있는 자녀들에게는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동행하심과 중보하심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를 미워하고 악을 싫어하는 마음을 주시며 또한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이 은혜 안에서 우리의 행위는 계속 의로 향해 갈 수 있으며 그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 곧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의 인생에 관여하시는데 어찌 우리가 다시 죄의 길을 즐거워 할 수 있습니까? (성화는 완성이 아니며 영화에 이르기까지 진행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은혜 안에 있는 결과이며 확신입니다.
이 행위 또한 은혜의 산물입니다. 만약 이 행위에 대하여 자랑하려면 사도 바울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바울을 높이지 않고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믿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로마서 4장을 읽어보시길 바라며...).
물샘열둘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장 24).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 17:2).
예수님께서 유다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다행이었을 것이라고...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을 원했기에 공식적인 예루살렘 입성 후에도 예수님의 어떠한 뚜렷한 정치적 행동이 없음을 보고 예수님에게 실망했고 그 실망은 그를 실족시켰고 끝내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정적들에게 팔아 넘기게 됩니다.
만일 유다가 실족한 후에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을 테고 결국은 해피엔딩이 될 것이었으므로 태어나는 것이 유다에게 나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에 유다는 궁극적으로 지옥에서 영벌을 받을 것이므로 차라리 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그에게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믿음이 약한 자를 실족시키는 것보단 차라리 그를 죽이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심으로 실족하기 전에 죽는 것이 더 살아서 실족하는 것보단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보단 부인하기 전에 차라리 먼저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지요.
야고보서는 물론 행함을 강조하지만 그 행함의 기준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즉 야고보가 제시하는 행함의 기준은 타인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그런 고귀한 류의 희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기본적인 생활의 필요를 채워주는 정도면 충분함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야고보의 행함의 기준은 자신의 힘대로 형제들을 도와주는 정도면 구원을 유지하는 데엔 충분하며 다른 신약의 행함의 기준을 부가하자면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죄에서 자신을 지키면 그는 구원에 궁극적으로 이르게 됩니다. 즉 구원은 믿음이란 이름의 행함을 통해 이루어지고 율법이 말하는 최소한의 행함으로 완성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만일 예수님을 주로 믿은 후에도 살인이나 간통이나 율법이 규정하는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하게 된다면 구원은 취소됩니다. 행함과 은혜가 충돌하는 것은 행함을 너무 과장함으로써 그 기준을 너무 자의적으로 높여놨기 때문입니다. 즉 행함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선 구원이란 것이 너무나 고귀한 무한한 궁극의 가치를 지니기에 행함 또한 그에 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행함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인데 그런다고 그것이 영생의 대가가 될 순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죽을 운명이기에 타인을 위해 죽는다 한들 좀더 일찍 죽는 것일 뿐이므로 그 행함의 가치는 유한하며 고로 무한한 천국의 가치에 대한 대가로 지불되기에는 가당찮은 것입니다.
즉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구원의 대가로 지불될 수 없으므로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긍극적인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생명... 그 피가 이 땅에 십자가를 통해 뿌려지게 된 것입니다. 믿음도 행위입니다. 즉 믿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지 믿음이 없는 행위...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요.
예수님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관계... 하나님과 우리의 부자지간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심각한 죄를 범한 것도 아닌데 타인을 위해 대신 죽지 않는다고 아들을 내칠 수가 있을까요? 즉 우리는 믿음 안에서 그냥 평범하게만 살면 모두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hoingik ingan
행위와 은혜는 그 주체가 다른데 비교 대상이 되는지 의문입니다. 차라리, 행위와 믿음이 비교가 되었다면 적절한 토론이 되었을 텐데, 계속 평행선을 달리는 느낌이네요. 개인적으론 권 교수님 완승인 듯싶습니다.
Good news
기독교에서는 원죄설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죄를 갖고 태어난다는 성악설입니다. 이 상태는 전적 부패, 전적 무능 상태라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신이 은혜를 주셔서 원죄를 제거해주시고 이제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행함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은혜가 전제가 되어서 행함을 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인과관계로서 어떻게 본다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과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DN E
신학펀치 보면서 어느 쪽이 더 맞다고 치우치곤 했는데... 이번 회처럼 팽팽하고 난해한 게 없네요. 행위로라면 일단 제가 들어갈 가능성이 없긴 한데... 믿음으로, 은혜로 100퍼센트 구원이라는 건 뭔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조금 엇나갔다는 것이 느껴지고... 흠...
LikeACloudInTheSky
결국 행위보다 은혜(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강조하자는 거 아닌가? 근데, 은혜를 말하지만, 십자가의 뜻(대속)을 믿지 않으면(이걸 예수 믿는다고 말하는데) 그 은혜조차 작동하지 않는다면(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하므로) 그게 과연 진정한 은혜인가?
즉 조건을 내걸고 그 조건을 받아들이면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 아니면 심판의 저주를 내리는 신이라면 과연 그게 은혜로우신 신이요, 지고의 사랑의 신인가? 이들이 말하는 신학이란 게 이처럼 온통 모순과 억지의 뒤범벅인데, 그런 언어를 참으로 뻔뻔하게 천연덕스럽게 말들 하는 저 태돌들이라니!!!!
김성민
몇 번을 리플레이하며 봤습니다. 저에겐 아주 중요한 문제라서요. 문제 해결은 안 됐지만 그래도 실마리는 잡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신학펀치가 있어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박안드레
마지막 부분에 갑자기 유치해지네요. 여기서 행위는 도 닦고 선행하는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권 교수님이 말한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려는 행위,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는 행위를 말한 거지 불교, 천주교에서의 행위와는 다른 것이죠. 성경을 너무 자기가 원하는 중심대로 해석하네요. 구원은 우리가 믿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는 것이라는 권 교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권 교수님이 신학펀치 고정출연이라는 것이 참 다행입니다.
holy fisher
권 교수님 같은 분이 계셔서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적이고 복음적이고 양심적인 학자들이 더욱더 진실된 소리를 크게 외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구글
맞습니다. 김 교수 같은 사람의 말을 믿고... 지옥 갈 신자들이 상당히 많을 것 같습니다. 권 교수같이 성경을 근거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사람이 올바른 신학 교수입니다.
Miss Riri
구원은 은혜와 행위가 같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이땅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이해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좁은 길로 가야지 구원받습니다. 예수님한테 배웁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산 증인이시고 구원자이시고 몸소 삶을 가르치셨기에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면 거기에 구원의 길이 확실합니다.
Jungil Son
신학교수란 사람이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을 인간들 편한 대로 해석하는 이유가 정말 소경이어서 그런 겁니다.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어찌 그리 이해할 수 없을까요? 그런 교수님 밑에서 신학을 배운 학생들이 목사가 되어 한국이 지금 중세 암흑기가 되고 개독교로 전락되었습니다. 권연경 교수님, 더 크게 담대하게 외치십시오. 절대 주눅들지 마시고요. 신자들 99%가 반대해도 예수님 말씀이 진리고 성경이 옳은 겁니다.
김성훈
물론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할 수도 있지만, 자칫 면죄부가 되어버릴 수 있는 크나큰 위험이 있죠. 또 지금 약간 논쟁이 평행선을 달리는 이유가,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지금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닐까요?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시는 분이고, 만약 우리가 봤을 때 저 사람은 분명히 구원은 받은 거 같은데 나중에 엄청나게 타락한다면 애초에 하나님의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받고 선택되었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후회를 샀던 사울 왕처럼요(물론 저는 사울 왕이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선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완벽히 정의로우신 분이라면 우리 인간들 모두를 모두 지옥에 보내야 마땅합니다. 누구도 누굴 미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야한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없고, 거짓말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자신은 그런 적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교만이라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없었다면 천국에 갈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크든 작든간에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는 다 범죄자입니다. 모두 지옥행입니다. 누가 구원받았는지는 아마 천국에 가서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풀고자 한 사람에게 베푸셨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가 우리 행위로 결정된다면 그것은 상이지 은혜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일컫는 사람이 한 번도 하나님의 법이 주어진 적도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 열매로서 알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애초에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요(물론 삶의 끝에 진정한 회개를 한다면 모르겠죠).
하나님의 은혜가 깨달아지고 믿어진 사람은 막 살 수 없을 거 같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내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인해 선한 행위가 나와야 되는 게 아닐까요? 토론을 가만히 보니 은혜 쪽에 좀더 비중을 두는 거 같은데, 저는 둘 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 내 몸과 판단할 수 있는 이성, 내 능력, 내 양심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과 조건에 감사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솔직히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따라 살려고 노력하지만, 제가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나아가는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제가 가지고 있는 개념도 그리 건강한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 같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구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만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헛소리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이 선택받은 민족(신약시대의 '하나님의 자녀'와 비슷)이라 해서 자기의 악행과 상관없이 축복을 받는다고 믿었을 때... 그건 헛소리라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신자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진리로 인도받습니다. 자신의 죄성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 됩니다.
samyabegi
행한 대로 갚아준다는 것은 불신자에 대해서는 지옥 형벌의 경중을, 신자에 대해서는 천국에서 상급의 구별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다른 말로 절대로 지옥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 받은 신자는 죄를 지으면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그때는 하나님의 책망 또는 준엄한 사랑의 채찍을 받습니다.
이때 신자는 속히 죄를 돌이켜 참회하고 “예수님 보혈로 죄를 씻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죄는 예수님의 피로만 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죄를 용서 받고 다시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의 피로 값 주고 사서 자녀삼은, 귀히 여기시는 우리를 죄 짓는다고 지옥에 던지시겠습니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훈계와 책망 때로는 채찍으로 올바른 성도(성화)가 되도록 하시지요.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요 죄에 대해선 엄하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 믿어 지옥형벌 면제 받고 천국 가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 쌓은 여러 가지 공로를 인정받아 각각 다른 면류관을 받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는 갔으나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은 받을 상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상할 때 마냥 앉아서 다른 사람에게 박수나 치고 있어야 됩니다. 우리 주위에 겉으로는 예수 믿는다고 하나 맨날 죄 짓고 살아도 아무 일 없이 잘 사는 사람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보면 거의 틀림없을 것입니다.
Kinglovesyoutodeath
회개와 뉘우침으로 인해 회심을 경험하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적에 회개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습니다. 이 강도는 회개 외에는 별 다른 성스러운 일을 행해본 적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박현욱
믿음은 관념적인 개념이지만 믿음은 사상의 공명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며, 그 사상에 대한 동의를 포함합니다. 그 기본적인 사상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며, 이것이 올바른 믿음이 아닐까요?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며,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예수님의 대속)도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앙꼬 없는 찐빵이요 고무줄 없는 팬티가 아닐까요?
Nun Parqui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은 맞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이셔서 주님을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께로 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도 양을 잡아서 우리의 죄를 양에게 전가해서 제사를 지냈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그 양이 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믿습니다” 하고 막 사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지요. 믿음의 열매는 순종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을 믿고 주님을 주인이자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면 주님께 기쁨으로 순종하겠지요.
하지만, 순종하지 못하고 내 삶,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들 등등 "내가" 하나님 위에 있다면, 말은 “주여, 주여” 해도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를 따르느냐, 나를 따르느냐의 믿음과 그 마음의 중심,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행위는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결국 "은혜로 구원을 받고 순종으로 사는 것"이 정답입니다.
어느 신학이 맞느냐 이런 걸로 하나님을 판단하시지 말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신학공부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공식을 알아낼 수도 없지만, 혹시 알아낸다고 해도 그대로 살지 않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구원은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느냐 아니냐입니다. 예수를 따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와 함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두 계명은 “주 너의 하나님을 네 목숨과 생명과 온 힘을 다해 사랑하라”, 그리고 “너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복음은 단순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이 두 가지만 생각하면 됩니다.
hwani cho
장신대 교수님은 확실히 이신칭의라는 루터의 교리 틀 안에서 말하고 있고 권 교수님은 철저히 성경 안에서 풀어가시려고 노력하시는 거 같네요. 좀 많이 부족하시지만 프로그램의 정해진 시간 탓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Sonny Han
한 번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하시고 이끌어 가시기 때문에 구원이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변화가 있게 됩니다. 교회생활을 시작해서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의 처음출발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Suh MinHyuk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믿음은 관념적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순종이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봅니다. 순종은 바로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물론, 완벽한 순종은 있을 수 없지만, 우리의 순종의 마음을 분명 주님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의미보다는 겸손한 자의 순종으로 말씀에 따른 자에게 구원이 있다고 보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관념적으로만 가지고 있는 "믿음만으로 구원"이 된다는 것으로 인해 한국의 수많은 교회의 "값싼 믿음과 값싼 구원"의 부작용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뻔뻔한 목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Kinglovesyoutodeath
예수님께서 이런 토론을 대비해서, 행위와 믿음의 관계를 잘 풀어주셨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구원에 있어서 행위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믿음이 곧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마라나타코람데오
구원을 한 가지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이런 대치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의 구원,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치료 받은 자에게 “너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실 때의 구원,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 이 세 가지의 구원을 똑같은 것으로 보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택함받은 자라 하더라도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말씀이 있듯이 죄에서의 구원, 삶에서의 구원, 천국 가는 구원으로 이어지는 구원론을 바로보지 않는다면 초대 7명의 집사 중 2명이 예수를 버리고 떠나가는 부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스데반이 될 수도 있고 예수 믿고 다시 죄의 종으로 세상으로 떠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좁은 길 가는 자가 있고 넓은 길 가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의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믿음으로 보며 그 말씀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양의 믿음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계시록에 들어가면 어린 양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자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죠.
그래서 성령님을 보내신 목적을 알지 못하면 결국 인간적인 노력만이 보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길 바랍니다.
이 주제의 토론에서 성령님으로부터, 위로부터 부어지는 능력을 빼고 논의를 하다보니 결국 늪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성령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려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야 하구요. 결국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전부 아멘 하며 따라가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떠한 한 가지의 원리에 의한 해석이 아니라 말씀이면 무조건 아멘 해야 하는것이 신부의 자격이라 생각합니다.
2.
CBS 낸시랭의 신학펀치 제45회 '우리의 구원, 안심해도 되나요 떨며 기다려야 하나요?'
https://youtu.be/k7u2sbmWq-U
이진혁
믿음의 결실은 행위요 행위의 결실은 믿음입니다. 행위와 믿음이 결국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앞뒤의 동전과 같은 것으로 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행위와 믿음을 어떻게 구분해서 말할 수가 있나요?
Matthew Kim
구원의 확신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한국교회와 교인들... 나의 삶에 변화가 없다면... 구원을 받았다는 착각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홍정욱
하나님의 환경은 영원성, 우리의 환경은 시간성이라는 특성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이미 얻은 구원으로 보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성의 환경에 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 과정이 아무 믿음, 아무 확신도 없이 가는 것이 아니고 그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시각 속에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순종이고요. 그 와중에 '두렵고 떨림'이 없을 수 없지요. 왜? 환경을 무시할 수 없기에.
그러므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존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존하는 동안은 김 교수님과 같은 잘못할 수도 있다는 가정은 기우, 즉 괜한 걱정인 것이지요. 바울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입장이 때론 하나님의 입장에서 혹은 성도인 우리의 입장에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았다면 안심이지요. 그러나 그 구원을 믿고 이 시간성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부담을 가진다면 두렵고 떨림으로 그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대로 “영생을 얻었다”라고 선언되는 말씀이나, 요한일서 5장처럼 “악한 자가 건드릴 수 없다”는 말씀도 있지요.
그러므로 영생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원한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해명하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어보는 이유지요. 성령 받으면 깔끔하게 이해됩니다. 성령 받음 없이 지적인 이해만으론 뭔가 석연치 않을 겁니다. 따라서 두렵고 떨리면서도 믿음으로 확신하는 태도가 필요하겠지요.
바울이 이 주제를 해명하는 성경이 바로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부분입니다. 참고하면 좋겠지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동안은 실패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지요. 종의 영이 아니라 자녀의 영이기에!
Jong heon Park
한 분은 교리로, 다른 한 분은 성경으로 설명하니까 계속 평행선이네요. 둘 다 통합교단 소속이면서... ㅋㅋ
holy fisher
은혜와 행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은 바울이 언급한 칭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언약관계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을 구원(칭의)이라고 보았습니다(엡 2장).
유대인이었던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달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었고, 메시아에 대한 소망도 없었으며 율법을 통하여 주어진 언약관계에 대해서도 완전히 소외된, 즉 버려진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방인들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메시아를 소망할 수 있으며 또한 율법을 통하여 주어지는 언약백성의 지위(선민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을 구원(칭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오해 많은 에베소서 2장 8, 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언약백성의 지위)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새언약 관계하의 선민의 지위는 유대인들처럼 육적 할례(율법의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그리스도를 믿음)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위 에베소서 구절의 의미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은혜로 값없이 얻은 구원(선민의 지위)은 우리의 행위로 절대 취소될 수 없는 완전한 구원(영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언급한 은혜로 주어지는 언약백성의 지위(구원=칭의)는 구약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언약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영생의 대원칙은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은 구약 육적 할례를 통한 유대인이나 신약 십자가의 영적 할례를 통한 그리스도인이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변함이 없는 원칙입니다. 바울의 입장이기도 하구요.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바울이 언급한 구원을 우리의 순종의 행위에 상관없이 영원히 취소되지 않는 보장된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김철홍 교수님 같은 분...). 바울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언약백성의 지위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얻게 되었다는 것을 구원(칭의)이라고 말했을 뿐이며, 그 지위(구원)는 언약관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또한 바울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위의 영상에서는 권연경 교수님의 말씀이 보다 성경적입니다.
-답글
송호정
신학자들이 바울이 언급한 칭의를 오해했다뇨? 이러한 견해도 있다고 말씀하셔야죠. 칭의에 관한 이해는 npp 관점(바울신학의 새 관점) 해석이군요. 전 동의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기 위해서 칭의라는 말을 끌어다 쓰기보다 예수님의 완전한 의로운 사역에 대해 말했다고 전 봅니다.
그렇게 칭의를 점진적이고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의 완전한 대속 사역의 초점이 흐려지며 인간의 의지나 행위 자체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믿음까지도 허락하시는 성령의 인도함이나 성령의 역할 자체도 의미가 많이 약화됩니다.
-답글
holy fisher
칭의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장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이제는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하나님의 의로운 언약 백성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의미로 칭의를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절하고 할례나 자신들의 형식적인 행위로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선민임을 자랑하려고 했고요.
바울은 그런 유대인들을 향해 이제 누구나 값없이 하나님의 언약관계 속으로 들어오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을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완전한 대속이라는 것이 우리의 행위에 상관없이 끝까지 영생을 보장하는 보험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완전한 대속이란 옛날 짐승의 피로 제사드릴 땐 그것이 우리의 양심을 깨끗게 하거나 더러운 행실을 해결해 주지 못했는데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가 죄를 버릴 수 있도록 완전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완전한 대속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의 사역,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거구요.
결국은 우리 힘으로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과 그분의 은혜의 능력으로 우리가 죄를 버리게 됨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대속을 김철홍 교수님 같은 분은 우리의 불법과 부정, 그리고 죄를 품은 상태에서도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대속이라고 주장할 우려가 있어서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답글
송호정
완전한 대속이라고 말하는 것이 예수를 믿기 전까지 지은 죄의 구속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완전한 것인가요? 그 뒤에는 완전히 죄를 버릴 은혜를 주셨다고 말하는 작성자 분은 완전히 죄를 버리고 사십니까?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하나님은 태초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다고 말하는데 우리의 행위에 따라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하면 그 분이 이미 우리의 행위를 보기도 전에 택했다는 그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구원에 대한 책임이 우리 쪽에 있는 것 아닌가요? 의롭다 칭한다는 이 사실 자체에는 우리의 행위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죄를 짓고 방종하며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원 받은 자는 성경이 말하는 행위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겁니다. 그것이 물론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성화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고 행위는 구원받은 증거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물론 이 결과는 하나님만이 아실 겁니다.
-답글
김일한
구약, 신약 모두 말씀하는 바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롬 4장 2절, 3절, 13절, 23절-25절). 하지만 이제 새로운 종교 혁명은 예수님의 제자 된 사명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현욱
성경 해석에 있어서 바울 서신이 예수님 어록에 앞서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집 짓기, 양과 염소, 거지와 부자, 달란트의 비유를 들어 구원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과 행함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바울에게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믿음과 실천으로 영생에 이른다고 한 것인데, 김 교수님이 너무 바울의 한 마디 말만으로 해석하고 있어서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 말이 아니라 로마서 전체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holy fisher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고 메시아에 대한 소망도 없으며 율법을 통해 주어지는 언약백성의 지위에 대해서도 완전히 소외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언약백성 선민의 지위를 얻게 되었음을 구원이라 표현했습니다. 그 선민의 지위는 유대인들처럼 할례나 형식적인 율법 지킴(율법의 행위)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차별없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바울은 은혜라는 표현을 썼구요.
하나님의 언약관계에 대해 완전히 소외되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언약백성의 지위(하나님의 권속)를 얻게 되었음을 은혜라 표현한 것이지 그 언약관계를 무시하고 불순종해도 구원을 얻을 것이란 의미로 은혜를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통한 새언약 하의 그리스도인들일지라도 유대인들처럼 율법(계명)에 불순종하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매 서신마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오해하여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로 거저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이며, 그런 가르침을 따라가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답글
Jonghyuck Kwon
우선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하여 바른 이해가 있어야 될 거 같습니다. 이 둘은 서로 공존할 수 없음이 당연함은 이 둘이 가진 목적과 능력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먼저 율법의 기준은 인간의 행위이며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는 우리를 더 죄인 되게 하는 기준이 되며 복음의 능력은 이 행위의 무능력함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나타냅니다(복음을 믿음은 실재이며 능력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느낌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여기서 계명은 신약에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의미하며 이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사랑의 능력을 주시길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를 온전한 행위로 이끌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능력이 될 것입니다.
이 율법과 믿음에 관하여는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분명 율법의 행위에 속하면 저주 아래 있는 것(갈 3:10)처럼 율법은 믿음(은혜)과 배치됩니다(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은 안식일교에서 안식일을 율법에 의거해서 지킨다면 그들은 유대인이 받은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다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과연 그들이 그것들을 다 지키는지 의문스럽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온전한 사랑의 능력을 나타내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Hanbyul Kang
권연경 교수님께서 그나마 본질이 흐려지지 않도록 방향을 잘 잡아주셨네요. 장로교 신학교는 김철홍 교수님처럼 가르치나요? 그렇다면 참 심각하네요. 마치 고 3학생이 서울대학교에 가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것으로 확실하게 믿으면 서울대학교 가나요?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들어가겠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확신을 가지라니... 오히려 권연경 교수님 말씀대로 출애굽의 은혜는 받았지만 아직 광야에 있는 것이고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천국에는 아직 들어간 것이 아닌데(물론 들어가도록 노력을 해야겠죠. 이스라엘처럼 멸망받지 않으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은혜로밖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서울대학교 들어가는 것보다도 쉬운 걸로 생각하시나 보네요,
양현주
사람의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어떻게 받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그냥 의롭다 함을 받습니까?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기게 된 것인데 율법을 지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을 통해 온 인류의 죄, 지금까지의 죄는 물론 앞으로 지을 죄까지 다 사하였습니다.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입니다. 영원한 죄 사함이 아니라면 행위로 천국을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류는 아무도 천국 못 들어갑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 죄를 누가 담당하셨습니까? 예수님입니다.
samyabegi
구원을 어렵게 설명하지 맙시다.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구원받은 겁니다. 거듭난 사건은 각자 본인의 확실한 체험입니다. 만일 분명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이루신 십자가 사역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믿어지면 이미 성령이 임하신 것이고 그 순간 거듭난 것입니다.
이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꾸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훗날 각자 행한 대로 다른 상을 받는 심판을 받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가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구원은 선한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믿음으로 인하여 은혜로 받는 것이며 이후 그의 모든 행위는 그 쌓은 공로에 따라 받는 상이 달라지게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행로에 깊이 관여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책망도 하시고 때로는 채찍도 드십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사생아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러므로 진정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함부로 살지도, 살 수도 없습니다.
hwani cho
칭의의 세 가지 시제적 측면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시제적으로 표현된 구원에 관한 3개의 구절이 있습니다. 먼저 과거 시제입니다. “그 때에…… 따랐으니…”(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 다음은 현재 시제입니다. “더욱 지금…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마지막으로 미래 시제입니다. “… 구원하시리니…”(딤후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러면 이제 ‘칭의’의 3가지 시제적 측면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의의 선물'로서 이는 ‘과거적 측면의 칭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의의 선물’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법적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얻은 과거적 측면의 ‘칭의’입니다. 선물은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은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를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입니다.
두 번째로는 ‘의 의 열매'로서 이는 ‘현재적 측면의 칭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빌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의의 선물’을 받은 것으로 ‘의’에 대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의’는 법정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관계적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의의 선물’을 받은 그 때부터,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의의 열매’는 칭의의 현재적인 측면입니다. ‘의의 선물’은 칭의의 과거적인 측면이고 ‘의의 열매’는 칭의의 현재적인 측면입니다. 그것은 이미 얻은 ‘칭의’의 은혜 가운데 계속적으로 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언약 백성의 의무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계속 거할 수 있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때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의’도 ‘새 언약’도 ‘옛 언약’과 구조가 같다고 후커 교수가 지적했습니다. ‘새 언약’도 ‘옛 언약’과 구조가 같습니다. 우리도 의를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의의 열매’를 맺음으로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의무로 주어진 것이 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를 행함으로써 예수님의 자녀 된 관계 안에 거합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의 가지로서의 관계 안에 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관계 안에 거합니다. 계속 그 구원을 잃지 않고 유지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때 ‘의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선물은 값없이 주어지지만 열매는 가지인 우리가 맺는 것입니다. 선물은 공짜로 받지만 열매를 맺으려면 힘써야 합니다. 성령님의 은혜로써 된 것이지만, 우리도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선물과 달리 열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단지 교회를 다니고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은 ‘의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세 번째로는 ‘의의 소망'으로서 이는 ’미래적 측면의 칭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의의 선물’ = ‘의의 열매’ = ‘의의 소망’이라고 합니다. 소망은 추억이 아닙니다. 소망은 과거가 아닙니다. 소망은 현실도 아닙니다. 현재가 아닙니다. 소망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칭의’에는 과거적, 현재적, 미래적인 측면이 있는데, ‘의의 소망’은 미래적인 측면입니다. ‘의의 소망’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최종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의롭다 함의 완성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한 신학자가 권연경 교수님입니다.
권연경 교수님은 ‘의의 소망’을 자신의 책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말하는 칭의는 ‘의의 소망’, 즉 소망의 대상이라고 분명히 못박는다. 갈라디아서의 싸움터는 ‘칭의’다. 엄밀히 말해서, 현재적 ‘칭의’가 아니라 ‘의의 소망’, 곧 미래적‘칭의’가 주제다. 이 ‘의의 소망’을 두고 ‘율법의 행위’와 ‘믿음’이 서로 싸움을 벌인다.
유대교 전통에서 ‘칭의’란 본래 마지막 심판을 배경으로 한 사상이다. ‘의롭게 한다’ 혹은 ‘의롭게 여긴다’는 것은 마지막 심판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충실히 지킨 이들을 의로운 자로 인정해주신다는 뜻이다. 바울은 ‘칭의’가 종말론적 소망의 대상임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우리는 성령으로 믿음으로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라는 갈라디아서 5장 5절의 이 구절은 갈라디아서의 칭의 논증을 요약하는 핵심 구절이다.
이 결정적 대목에서 바울은 ‘칭의’를 간절히 기다려야 할 소망의 대상으로 제시한다. ‘칭의’를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주장할 요량이었다면 결코 나와서는 안 될 진술이다. 그런데 바울은 ‘칭의’를 미래적 소망의 대상으로 당당히 밝히고 있다. ‘의의 소망’이 무엇인가? ‘칭의’는 ‘의의 소망’, 곧 소망의 대상이다. 그 다음에 ‘의의 소망’은 곧 ‘미래적 칭의’다. 즉, 심판석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유대교 전통에서 ‘칭의’는 마지막 심판을 배경으로 한 사상입니다. 바울은 ‘의의 소망’이 종말론적인(종말론적이란 예수님 이후의 성취된 것들을 말한다) 소망의 대상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 미래 심판석에서 받을 ‘칭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이 땅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그 믿음에 서 있는 사람이 마지막 날에 심판석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소망’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의롭다 하는 것을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인들은 이것을 자꾸 현재적인 것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으로만 너무나 이런 쪽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칭의의 교리’가 왜곡되는 것이고 윤리가 상실되는 것이고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교회가 타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의 소망’은 ‘칭의의 교리’인데 ‘미래적인 칭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0-14).
바울이 달려갑니다. 사람들은 ‘상’이라는 단어에 속아서 바울이 상 받기 위해서 달려간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서의 ‘상’은 최종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목표로 정한 부르심의 상입니다. 이것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너무 작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신자면 다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천국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삶의 목표와 바울이 이 땅에서 달려간 궁극적인 목적은 부활에 이르는 것이었고, 최종적인 ‘칭의’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면 무엇 합니까? 비리와 범죄로 얼룩지고 교회 헌금을 횡령하고 사적인 용도로 잘못 사용하고 불신자도 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이들이 회개치 않으면 어떻게 천국에 가겠습니까?
목회자로서 교회가 부흥하고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운 것이 대단한 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것을 위해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종적으로 구원을 목적으로 달려갔습니다. 바울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 큰 교회와 큰 사역을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라면 나그네가 아닌 것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입니다. 세계 최대 교회를 세웠어도 그 사람은 세상 사람인 것입니다.
바울은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최종 구원을 목표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얻으면 전부를 얻은 것입니다. 그것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목표를 바로 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무엇이고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목적은 반드시 ‘의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재물의 소망이나 성공의 소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종적으로 심판석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그 때에 주님 앞에서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받는 ‘의의 소망’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2-3).
이 ‘의의 소망’을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소망의 인내’라고 표현했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최종 심판 때 칭의를 받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기도 많이 하고, 사랑하고, 거룩한 이런 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의 푯대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의 인내’, 즉 ‘의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세속화되면 안 됩니다. 절대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조들이 산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다 얻고 이 땅에서 다 누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에 쌓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심판대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목사고 진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렇듯 ‘칭의’는 3가지입니다. ‘의의 선물’, ‘의의 열매’, ‘의의 소망’입니다. 과거가 없으면 현재도 없고 현재가 없으면 미래도 없습니다. ‘의의 선물’이 없으면 ‘의의 열매’도 없고 ‘의의 소망’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합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그가 목사라도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의의 열매’는 ‘의의 선물’과 ‘의의 소망’ 중간에 위치해 있으면서 다리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삶에 ‘의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절대로 최종적인 구원인 ‘의의 소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목사와 부흥사들이 ‘구원의 확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겉포장만 말씀을 지키고 평토장한 무덤처럼, 회칠한 무덤처럼 속에는 음란과 방탕과 탐심과 교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NAM YESUNIM
가슴이 아픕니다. 신학자라는 분들이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와 분별을 구하지 않으면서 얘기를 나누시는지 대한민국의 신학교들의 수준을 알겠습니다. 그러니 신학교를 가면 사람들이 병들어서 오는 것입니다. 바른 진리가 아닌 잘못된 교리를 교리라고 배우기 때문에 눈먼 목자가 양들을 이끌고 가게 됩니다.
신학자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으십시오. 그것이 사람들을 살릴 것입니다. 이 영상을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요한복음 5장 24절 말씀에 나오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는 말씀은 영어로 ‘...is passed from death unto life’입니다. 과거형 ‘passed’가 아니라 현재분사 ‘is passed’입니다.
현재분사란, 현재 진행 중임을 나타내는 동사의 기능과 체언을 수식해 주는 형용사적인 기능을 동시에 가집니다. 즉, 요한복음 5장 24절의 말씀에서 언급하는 구원은 미래적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현재분사적 구원입니다. 선악과를 먹느냐 생명나무를 먹느냐 하는 문제에서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 것이죠.
분명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으면 결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생명나무를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생명나무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그 길을 주의 부르심에 따라 순종하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걸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느냐, 아니면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이 만드느냐 하는 것은 당신의 몫입니다.
현재분사는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선택해서 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며 소리치고 계십니다. 이제 그 부르심을 따라가겠습니까, 아니면 불순종하겠습니까?
- 답글
ahnkooon
말씀하시고 싶은 게 수동태이신 듯합니다. 현재분사는 동사의 ing형 분사죠. 그리고 그 요한복음 5장 24절의 “but, is passed from death unto life”는 “다만,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졌다”라는 뜻일 뿐입니다. 과거형이나 현재진행형이나 별로 상관없는 현재형이죠. 만약 과거형 수동태였다면 ’was passed‘이겠고 그 뜻은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졌었다‘(지금은 그런지 아닌지 모르는데 하여튼 그렇게 되어졌었다)이죠.
조조
김 교수님의 주장이 장신대의 공인된 주장이라면, 도대체 그렇게도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구원파의 구원론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요?
bbcarp812
늙고 가난한 홀어머니에게 재산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리는 십일조 잘 하고 교회 봉사 열심인 집사는 구원받나요, 못 받나요? 늙고 가난한 홀어머니를 잘 모시기 위해 십일조와 교회봉사를 못하는 집사는 구원을 받나요, 못 받나요?
Beomkwang Jo
왜 지난번과 다를 바 없는 걸 또 반복하는지 모르겠네요. 이건 토론의 주제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토론의 질이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차라리 권 교수님과 다른 권위 있는 교의학자와의 토론이 낫겠습니다. 성경도 잘 인용하거나 자신의 논지를 세밀하고 치밀하게 말하지 못하고 같은 말만 하는 성경신학자 말구요.
물샘열둘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위의 구절의 적용범위를 최대한 확대해서 해석하면 “나 자신도 구원을 취소하지 못한다”라는 결론이 되는데, 배교할 때엔 구원이 취소된다면 논리적인 역설이 발생합니다. 즉 위의 구절은 “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외부적인 요인으로 구원이 취소될 순 없다. 고로 나 자신은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써 구원을 말소시킬 수 있다”로 해석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스스로 구원을 말소시킬 수 없다면 예수님의 실족함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예수님을 부인함에 대한 경고의 말씀은 뭔가요? 왜 하나님이 번복하면 안 된다고 생각들 하십니까? 그분이 어떤 사안에 대해 절대로 번복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후에 번복하신다면 문제가 되지만, 구원에 대해서는 구원을 주신 후에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그것을 취소하지 않는다고 예수님이나 제자들, 사도 바울은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평생 죄의 유혹과 싸워야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죄에서 떠나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삶... 거룩이란 것은 우리가 사역에 헌신해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 등의 특별한 헌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구약에서 맨 처음 등장하고 율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이기에 율법이 말하는 거룩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거룩이란 죄에서 떠나서 자신의 힘대로 형제를 돕는 것을 말합니다. 형제를 돕는 것도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극빈자들의 생계를 유지해 주는 정도면 충분하지 그런 자들을 위해 자기 전 재산을 갖다 바치는 그런 헌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이런 형제를 위한 선행의 기준을 자신의 힘대로, 자신의 힘을 헤아려서 하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형편에 맞는 구제를 제안하고 있을 뿐인데, 구원의 은혜가 너무 크기에 거기에 보답하려면 우리의 헌신도 최대가 되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에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구원의 은혜는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은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에 감격해서 그냥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 감격과 달란트의 정도에 따라서 개인마다 헌신의 차이가 있고 그로 인해 상급의 차이가 있지만, 사역자로 헌신하지 않는다고 구원이 취소되진 않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일 때에는 우리가 죄에서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기에 죄의 종이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해방된 후에는 우리가 죄에서 떠나려고만 한다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떠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율법이 금하는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죄에 그냥 빠져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행위, 죄를 사랑하기에 죄를 짓는 것이고, 이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구제받을 수 없는 상황을 자신이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종일 때에는 자기 자신의 주권이 죄에게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해방된 후에는 그런 핑계가 더 이상 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karis kim
하나님의 은혜로 칭의받은 자는 그 구원의 능력으로 반드시 성화되어져 갑니다.
십자가의 영성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지탄받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절대진리를 교회가 제대로 신자들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 또한 믿음의 구원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그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지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어느 순간부터인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은 무한한 죄의 허용, 즉 내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나는 구원받았으니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실제적인 기독교 신자들의 삶으로 나타나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비판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죄의 허용을 허락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출하고 거룩의 자리로 옮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이제 죄로부터 구원되어 거룩의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거룩의 선상에 서서 거룩의 푯대를 향해 달려감이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들이 달려가야 하는 길, 즉 거룩의 푯대를 향해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받아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인간은 아직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온전히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의 길(거룩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함(성령의 인도함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순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신자들 중 자기를 절대로 부인하지도 않고, 예수님 안에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으며 세상과의 친밀함을 여전히 의지적으로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지식적으로만 자기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구원의 믿음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신념을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믿음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구원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구원받은 자의 증표가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 안으로 들어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르는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자면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죽도록 충성하며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기 위해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능력이요 믿음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거룩을 이루며 살아갈 순 없지만 늘 주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으로 심령이 가난해지며, 애통함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자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로 절대로 메꿀 수 없는 우리의 부족함들을 친히 당신의 핏값으로 채워주셔서 우리를 완전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구원입니다.
조조
낸시랭의 신학펀치의 최대 공헌은 교단신학교 신학자들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만천하에 폭로했다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이야기를 하고자 할 때 항상 밑에 있는 원고를 봐야만 하고, 자기도 설득되지 않을 주장을 내뱉으시는 것을 보면...
holy fisher
욕망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욕망에게 져서 욕망을 품게 되는 것이 죄이지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약 1:15). 우리 속에 일어나는 충동이나 욕망 자체를 죄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원죄론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죄는 고의로 욕망을 품고 불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죄는 불법이니라"(요일 3:4). 욕망이나 충동 자체를 죄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죄에게 져서 죄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김철홍 교수님처럼 구원을 완전히 오해하게 됩니다.
죄란 고의적으로 불법을 선택하는 것이고 성경은 그 길을 떠나서 순종의 생애를 택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명이요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죄를 이해해야 마지막 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한다는 성경의 말씀이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원죄론의 오류에서 벗어나와야 합니다.
holy fisher
진리와 오류가 극명히 대비되는군요. ‘순종하라 VS 안심하라.’ 결국 자신이 택한 길에서 자신의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순종으로 꼴 지어진 성품과 거짓평안으로 꼴 지어진 성품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마지막 날에 알곡과 가라지의 정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 CBS 낸시랭의 신학펀치 제44회 ‘구원은 행한 대로 받나요, 은혜로 받나요?', 제45회 '우리의 구원, 안심해도 되나요, 떨며 기다려야 하나요?' 유튜브 동영상 댓글 모음

첫댓글 CBS가 기획한 ‘낸시랭의 신학펀치’ 시리즈 가운데 장신대 김철홍 교수님(오직 믿음과 은혜로 구원)과 숭실대 권연경 교수님(행함이 있는 믿음과 은혜로 구원)이 토론자로 참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신자의 순종, 믿음과 구원의 문제에 대해 다룬 두 번의 토론 방송에 대해 네티즌들이 유튜브에서 댓글로 남긴 찬반 의견들을 함께 나눠봅니다.
개인적으로 CBS가 만들었다는 낸시랭의 신학펀치는 성경적인 주장보다 각 사람의 신학사상이 많더군요 --;;;
개인적으로 저는 이 테마가 지금 한국교회 내에서 자신을 기독교인으로나 그리스도인으로 자각하는 많은 분들의 구원 문제에서 가장 중차대한 이슈 가운데 하나라고 믿습니다. 전통적인 교단 신학이나 교리도 중요하겠지만 현재 세계적으로 새롭게 이슈화되고 있는 ‘행함이 있는 믿음과 구원’의 문제에 대해 좀더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교리적 전제를 내려놓고서라도 좀더 허심탄회하게 성경적인 대안들을 찾아나가게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성도들 각자의 영혼을 보살피는 목양의 현장에서도 이 문제를 올바로 가르치고 실천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교단의 눈치를 살피며 그저 논란에 휘말리기 싫어서 전통 교리에만 안주해 있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도 클 것이라고 느낍니다. 한국교회 성도들 각자의 참된 회심을 이끌어내고 그로 인해 한국교회에 진정한 개혁의 기초를 놓을 수 있는 길이 이 부분을 그저 교조적으로 가볍게 취급하고 넘어가려 하기보다 좀더 진지하고도 성경적으로 다뤄나가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구원자로서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며,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은 일관되게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리에서는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만큼 그렇게 자주 강조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구원에 어떻게 인간의 행함이 조금이라도 보태질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식의 원론적인 논리나 교리적인 잣대와 선입견만으로 흥분하기 이전에 성경이 처음부터 이 문제에 대해 실제로 어떻게 일관되게 말해오고 있는가를 세밀하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마지막 심판의 날 많은 성도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판결을 받고 망연자실해 할 것을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아주 중요한, 영원히 중차대한 이슈가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성도의 영원한 견인을 강조하는 분들도 성경에서 이 부분 또한 함께 가르치는 것이 성도들의 영원한 안전에 더 안전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의 날 사역자들을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분께 나아와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마 7:22)라고 변명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일했다는 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영접했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했던 사람들입니다(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들은 처음부터 안 믿었던 사람이라 쉽게 치부해버리고 말지만, 전후 문맥상 그런 의미가 아님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정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 바로 앞에 이미 밝혀두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견해로 나뉩니다.
진실로 믿는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반드시 순종의 열매가 나타난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은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하여 그분을 삶의 주인으로도 섬기며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만 진정한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 참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놓고 신학적으로 격돌한 두 분 교수님의 토론을 유튜브 동영상으로 접한 네티즌들의 의견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보석 같은 지혜와 교훈들이 있습니다. 무조건적 이중예정론 같은 교리적 대전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도 합당한 사유와 묵상을 통해 성경적인 근거와 대안을 찾아나간 흔적이 뚜렷하게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Stephan님같은 분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면 우리는 주 안에서 교제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