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김시민 장군 이야기 2편--- 불패의 명장 김시민
아들아, 아빠는 앞에서 충무공 김시민 장군 이야기 첫 번째로 '인간 김시민'에 대해 말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명장 김시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앞에서.. 7년 조일전쟁 개전 직전인 1591년에 진주판관이 되어 부임했고,
1592년 4월 전쟁이 발발하자 진주목사 이경과 지리산으로 피신했다가..
경상우도 관찰사이자 초유사로 내려온 학봉 김성일의 명으로 죽은 진주목사 이경 대신
진주목사의 직을 대리하게 된 시점까지 말했었다.
진주목사 대리가 된 김시민 장군은 복귀 후 어떻게 전쟁을 준비했는가.
그리고 전장터에서 어떻게 싸웠고,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며 승리를 이끌어 내었는가.
명장 김시민 장군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하려 한다.
고 진주성도
아들아, 먼저 고 진주성도에서 본 진주성의 모습과 네가 여러번 가서 보고 느낀 진주성의
모습을 떠올려 보거라.
진주성이 어떻게 생각되느냐.
보통은 진주성하면 경상우도의 중심이자, 경상도와 전라도의 교통로에 자리한 큰 성으로
7년 조일전쟁에서의 전투 때문인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인줄 알았다.
그런데 실상은..그렇지 못했어.
1591년에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진주성 외성을 새로 수축해서 성의 규모를 더 키워
놓았다. 나름 그는 전쟁 준비해서 방비를 강화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아빠는 전쟁과 병법에 무지한 문신이 바보짓 했던 것이라 본다.
왜냐?
그렇게 새로 수축한 진주성의 성벽을 지키려면 적어도 수성군 1만 이상이 필요한데
현실은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 직전까지 김시민 장군이 끌어 모으고
조련한 군사가 겨우 3천이 조금 넘었어.
지킬 병력도 모자란데 성만 크게 지어 놓았으니..이걸 바보짓 했다 한 것이지.
원래 성(城)은 작아도 굳건하고 험한 것을 취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런 병략이 아니라 민정 목적에 더 어울리는 성을 만들어 놓았으니 문제지.
게다가 진주성이 남쪽으로 남강이 흘러 자연 해자로 삼고 서쪽에는 가파른 절벽이
있어 지리적인 잇점이 있다지만..성의 동쪽과 북쪽은 평지라, 전투는 이곳에서
벌어지게 되어 있으니 지리적 잇점이 없는데다 그런 위험지역인 동쪽과 북쪽 성벽의
길이가 너무나 길어..가뜩이나 병력도 모자란데.
또 성벽의 높이는 그렇게 높지 못하니..또 방어력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었어.
냉정하게 말해서..그런 관점으로 봤을때 진주성은 알려진 것처럼 난공불락의 요새는
분명 아니었다.
물론 그런 진주성의 약점을 보완하려고 성의 북쪽에 대사지(大寺池)라는 해자로
활용할 인공 연못을 파고, 참호를 만들었지만..이것도 한계는 있었지.
아들아,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 복귀 후 전쟁 대비에 진력했단다.
그가 어떻게 전쟁을 준비해서 싸워 이겼는가..본격적인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
충무공 김시민 장군상 (진주성 공북문)
먼저 진주성의 약점과 강점이 분명한 이상..
전쟁을 수행할 근거지인 진주성을 새로 수축하고 약점을 보강하는 작업에 들어갔지.
두 번째는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이기기 위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즉, 병력확보였지.
그리고 맹훈련을 통해 싸울 수 있는, 전쟁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군인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세 번째는 진주성을 지키고 전쟁에 이길 수 있는 무기 제조와 군량확보였다.
특히 총통 170여 자루를 제조하고 염초(焰硝) 510근을 확보했다는 것을
주목해라.
여기서 말하는 총통은 일본군의 주력무기인 조총에 해당하는 승자총통인데
성능이나 사거리, 정확도 면에서 분명 조총(鳥銃)만큼은 못하지만..
승자총통(勝字銃筒)은 니탕개의 난 진압 때 활약하며 위력을 떨친 화약무기다.
조선군이 보유하고 운용하는 개인 소화기(小火器)로서 진주성 전투 당시 활약한
우리의 비밀병기 역할을 톡톡히 했지.
경상우도와 좌도 지역구분도와 경상우도 창의 의병들
네 번째는 진주는 경상우도의 중심지이자 조선의 전쟁 수행을 위한 후방기지로서
중요한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을 통제하는 요지이며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최일선에 해당하는 곳이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 취약한 방어력을 높이기엔 여건상 시간도, 사람도, 물자도
한계가 있어 쉽지 않았다.
해결책은..바로 경상우도 지역 각지에서 활약하는 의병들과 연계를 강화하고
그들의 실전경험과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었지.
전쟁 발발 겨우 1년전에 진주로 부임해온 판관이..그리고 진주목사가 병사한 후
급하게 임명된 목사(牧使) 대리가 몇개월 새에 이런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다.
특히 총통과 염초를 확보하는 것은 이미 화약무기의 위력과 가치를 잘 알았다는 증거..
이것은 아마도 진주 부임전 훈련원과 군기시판관을 거치며 쌓은 경험에
니탕개의 난 진압에 참전하여 쌓은 실전경험이 더해진 것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다.
아들아, 김시민 장군은 이렇게 확보한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바야흐로
진주를 위협하고 경상우도 관내를 어지럽히는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해 출전했다.
진해, 고성, 사천에서 적과 싸워 연승했고..그렇게 진주를 위협하는 일본군의 존재를
제거했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왜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에 보내서
패전을 거듭하던 조선 육군의 승리를 널리 알려 조선군의 사기를 높였지.
이 공로로 김시민 장군은 정식으로 진주목사에 임명 되었단다.
또 의병장 김면(金沔, 1541~1593)의 요청으로 1천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여
연합작전을 펼쳤지.
금산(金山, 지금의 경북 김천) 에서 거창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를 사랑암(砂郞岩) 전투라 해.
아들아, 1592년 5월~9월 사이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의 병력을 이끌고 벌인
이 전투들은 대규모, 주요 전투가 아니라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진주성 전투를 예비하며 큰 의미를 가진다 할 것이다.
왜 그런가?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의 수성군을 모집하고 조련을 시켜 군사로 만들었지만..
실전경험이 있는 군사와 없는 군사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단다.
경험없고 오합지졸인 군사라면 수천, 수만이 있더라도 무용하니까 말이다.
그것은 1592년 6월 용인전투에서 5만이 넘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 연합
군이 겨우 1천6백의 왜군에게 무기력하게 패하며 망신살이 제대로 뻗친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지.
이때 조선군에 망신살을 안겨준 그 왜장이 바로 와키자카 야스하루(協板安治)였단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왠지 익숙한 이름 아니냐?
바로 한달 후에 한산도 앞바다에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에게 대패했던 그 자다.
그래서 김시민 장군은 군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 실전경험을 쌓았는데..
승리를 거듭하고 그동안 했던 훈련의 성과를 몸소 겪게 되니, 군사들이 자신감도 붙고
사기가 올랐을 것이다
또 그들의 지휘관인 김시민 장군의 능력을 보고 겪어봐서 잘 알테니..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진주성의 수성군은..
경상우도 아니 조선 육군 전체를 봐도 최고의 지휘관과 전투경험,
그리고 사기충천한 최고의 강군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란다.
이렇게 김시민 장군이 길러낸 군사는 1592년 제1차 진주성 전투 그리고 다음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주력군으로 활약하였지.
1592년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가 이로 미루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철저하게 준비된 전투이고, 당연히 이길 수 있는 전투였음을 이로 미루어..
아들아, 너도 알 것이다.
------장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