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66.투르판에서/ 교하고성, 고창고성, 아스타나고분군
현장스님이 ‘인왕경’설법했던 고창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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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고성> |
사진설명: 투르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46㎞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창고성은 둘레 5㎞,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최고 높이가 11m에 이르는 거대한 유적지다. 당나귀수레들이 관광객을 태우고 성안으로 왔다갔다하고 있다. |
서역(西域)의 동쪽 끝 부분에 위치한 투르판은 옛부터 다른 오아시스 도시들에 비해 물산(物産)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농경에 적합한 비옥한 토지와 관개수로가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천산산맥의 눈 녹은 물을 끌어들이는 지하 관개수로(灌漑水路)인 카레즈는 - 천산 기슭에서 시작해 약 30m 간격으로 판 수직우물을 횡으로 연결한 수로 - 동 투르키스탄 지역 중 투르판에서 가장 발달했다. ‘허풍 치기’로 유명한 중국인들은 카레즈를 ‘중국 민족이 발견한 건축’에 포함시키는데, 사실 카레즈는 페르시아 방면에서 전해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투르판의 이런 지리적 경제적 여건 때문에 타림분지 일대를 장악하고자 하는 사람이나 나라는 반드시 투르판을 먼저 손에 넣고자 했다. 천산산맥 북쪽의 유목민족이나 한족(漢族)들이 투루판을 놓고 유사 이래 항상 다투어 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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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지하 관개수로인 카레즈. 투르판의 명물이다. |
그러나 사료(史料)에 의하면 소륵국(카슈가르), 쿠차국, 언기국과 마찬가지로 투르판에도 농경생활을 하던 인도-이란계의 선(先)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본격화된 흉노와 한(漢)의 공방과 함께 ‘투르판 수난의 역사’는 시작됐다. 흉노인들은 서역을 정탐하고, 서역과 중국 간 무역에서 중계이익을 얻기 위해, 투르판에 차사전국(車師前國)을 세웠다. 차사전국의 도성이 바로 현재의 교하고성(交河故城)이다.
그러나 전한(前漢) 선제 신작(神爵) 2년(기원전 60) 서역도호에 취임한 정길(鄭吉)은 투르판의 흉노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기원전 48년 술기교위(戌己校尉)를 두고 고창벽(현재의 고창고성)에 한병(漢兵)들을 둔전(屯田)시켰다. 후한이 망하고 삼국시대·서진·위진남북조시대를 거치며 중국 대륙이 내전에 휩싸여 있는 동안, 투르판은 거의 독립국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결국 329년 하서회랑에 있던 전량국(前凉國. 301~376)이 투르판에 고창군(高昌郡)을 설치하자 대륙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후량(386~403), 서량(400~420), 북량(397~439) 대에도 통치는 이어졌다.
대승·소승불교 모두 성행
그러던 442년경. 흉노 출신인 북량의 저거씨 일족이 이 땅에 근거를 두고, 450년경 차서전국왕을 몰아내고 고창국(高昌國)을 - 도성은 현재의 고창고성 - 건설했다. 물론 이것이 투르판 역사의 종점은 아니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유목민족인 유연(柔然)이 460년 저거안주가 세운 저거씨 고창국을 멸망시켰다. 당시 유연부족의 힘을 빌린 한족(漢族) 출신의 엄씨가 고창국 왕이 됐다. 그렇다고 엄씨의 세상이 되지는 않았고, 장씨(張氏)·마씨(馬氏)·국씨(麴氏) 등에 의해 왕이 교체됐다. 이들 한인들은 주로 하서(河西. 감숙성) 지방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난주(蘭州) 출신인 국가(麴嘉)를 원조로 한 국씨 고창국(499~640)은 당나라에 멸망될 때까지 140년간 역사를 이어갔다. 국씨 고창국이 사라진 뒤 투르판은 당의 직할지인 서주(西州. 640~792)가 됐다. 그러다 8세기 후반 토번(티벳)과 위구르족이 투르판을 사이에 놓고 쟁탈을 벌이다, 위구르족이 차지했다. 결국 9세기 중엽부터 투르판엔 위구르왕조(840~1283)가 건립돼 13세기 말, 왕가(王家)가 감숙성 영창으로 이주할 때까지 존속됐다.
이처럼 투르판의 역사는 비교적 자세히 남아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불교가 언제 어떻게 이곳에 전래됐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토육석굴 속에서 발견한〈제불요집경〉단편이 296년에 필사(筆寫)된 것이어서, 적어도 3세기경 투르판에 불교가 유입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출삼장기집〉권8에 실린 도안스님(312~385)의 ‘마하발라야바라밀초서’에 “건원 18년(382) 당시 투르판 차사전국의 국사 구마라발제스님이 호본(胡本)〈대품반야경〉이만송을 전진 부견왕(338~385)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4세기 후반 투르판엔 대승불교가 유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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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투르판 시내에서 만난 위구르 가족. |
그렇다고 대승불교만 성했던 것은 아니다. 투르판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통해 소승불교가 유행했으며, 당시 주변의 언기국 쿠차국에도 소승계불교가 성행하고 있었기에 투르판에도 역시 소승불교가 전해졌을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한다. 불교 이외 다른 종교도 있었다.〈위서(魏書)〉〈수서(隋書)〉등에 “속사천신(俗事天神) 겸신불법(兼信佛法) - 민간인들은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천신을 믿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민간에서는 재래신앙이 신앙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네스토리우교(동방 기독교. 경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등도 신앙되고 있었다.
어찌됐던 늦어도 3세기경 투르판에 불교가 유입됐고, 15세기 이슬람이 투르판을 점거할 때까지 1000년간 불교는 투르판에서 주된 신앙이었다. 특히 북량이 고창군을 설치한 때부터 국씨 고창국이 멸망할 7세기까지가 불교의 전성기였다. “투르판 분지의 주인이 누가 되던,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까진, 부처님 가르침은 항상 주된 종교였기에, 고창지구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 불교는 막강한 영향을 미쳤고, 동시에 불교미술도 발달했다”고〈서역불교조각사〉(일지사)의 저자 임영애씨는 분석한다.
투르판에 도착한 지 이틀 째 되던 2002년 9월24일. 고창국 당시 도성이었던 고창고성(高昌故城) 유적지로 달려갔다. 둘레가 5km,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최고 높이가 11m에 이르는 거대한 유적지였다. 입장권을 구입해 들어가니 먼지만 풀풀 날리는 도성의 흙길이 먼저 보였다. 다들 당나귀 수레를 타고 도성 중심지로 들어가는데, 취재팀은 일부러 걸어 들어갔다. 당나귀 수레가 다니는 길을 피해 걸었다. 무슨 용도로 사용됐는지 모를 건물의 잔해(殘骸)들이 주변에 즐비했다. 30분 정도 걸어 고창고성 중심부에 있는 절터에 도착했다.
고창고성은 주지하다시피 투르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46km 떨어진, 화염산 언저리 오아시스에 세워진 성곽도시다. 흙벽돌로 구축한 사각형 성곽인 고창고성의 중심부인 궁전지 주변엔 많은 절터들이 자리 잡고 있다. 고창고성 중심부에 있는 복발탑 바로 옆에 있는, 상당히 높은 유적지 위에 올라 유적지 전체를 일별했다. 대단히 넓었다. 북쪽엔 화염산이 예의 그 붉은 자태를 뽐내고 있고, 관광객을 태운 당나귀수레가 부지런히 길을 오가는 모습도 보였다. 현장스님이 머물렀을 당시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스타나 고분군서 미이라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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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국씨 고창국 시기의 귀족들이 묻혀있는 아스타나 고분군. |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 의하면 현장스님은 630년 2월경 고창고성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1개월 정도 머물며 당시 국씨 고창국 8대왕 국문태(麴文泰. 재위 620~640)와 신하들에게〈인왕경〉등을 설법했다. 국문태 왕은 현장스님이 고창국에 머물며 국사가 돼 줄 것을 강권(强勸)했다. 이에 현장스님은 3일 동안 물 한 방울 넘기지 않고 단식하며, 천축으로 가 불경을 구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오겠다는 신념을 바꿀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국문태도 생각을 바꿔 현장스님과 형제의 인연을 맺고, 1개월 동안 머물며〈인왕경〉을 강의해 줄 것을 부탁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고창고성의 유적지. 먼지 날리는 길에는 당나귀수레들이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있을 뿐, 현장스님과 설법을 듣던 국문태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고사하고, 당시 성행하던 불교도 흔적 없이, 유적에만 자신의 존재 역사를 새겨놓은 채, 사라지고 없다.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 안고, 국씨 고창국 시대와 당나라가 지배하던 시기에 살았던 귀족들이 묻혀있는 아스타나 고분군으로 갔다. ‘아스타나’는 ‘휴식’과 ‘영면’을 뜻하는 위구르어. 영원히 잠든 묘지라는 의미다. 공동묘지답게 그곳엔 많은 무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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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차사전국 시절의 도성인 교하고성. |
이곳에 묻힌 사람들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1916년부터 오렐스타인 등에 의해 간헐적으로 발굴되다, 1953년 이래 중국정부가 대대적인 발굴을 해 잠들어있는 400여명의 사람들을 깨웠기 때문이다. 투르판 분지가 건조한 곳이다 보니, 아스타나 고분군에 잠들어있는 사람들 시신도 그대로 미이라가 돼, 옛 역사를 복원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는 얼마나 불운할까. 발굴된 400여기의 분묘들을 둘러보고, 교하고성으로 갔다. 교창고성과 교하고성의 거리는 60km 정도. 고창국 이전에 있었던 차사전국의 왕성이 바로 교하고성. ‘냇물이 교차해서 만나는’ 곳, 아니 두 강 사이에 절묘하게 형성된 구릉지 위에 조성된 교하고성의 원경(遠景)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차사전국 사람들이 걸어 다녔을 길을 따라 점점 성 안으로 들어갔다. 따가운 햇살이 머리에 내리꽂혔다. 이곳저곳 아무리 돌아보아도 선인(先人)들은 없고, 그들이 살았던 흔적과 유적만 보였다. 절터들도 즐비했다. 절터가 나올 때 마다 ‘감탄’ 보다는 ‘안타까움’만 더했다. 천여 년 동안 투르판 분지에 생명수를 공급했던 불교가 이젠 유적 속에만 남아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가는 나그네. 속절없이 하늘만 올려다보고 길을 따라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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