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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言衛靈公之無道也, 康子曰: “夫如是, 奚而不喪?” 자 언 위 령 공 지 무 도 야 강 자 왈 부 여 시 해 이 불 상 孔子曰:“仲叔圉治賓客, 祝鮀治宗廟, 王孫賈治軍旅. 공 자 왈 중 숙 어 치 빈 객 축 타 치 종 묘 왕 손 가 치 군 려 夫如是, 奚其喪?” 부 여 시 해 기 상 [論語 憲問 20] 공자께서 위나라 영공의 무도함에 대해 말씀하시자 계강자가 말하였다. “(그토록 무도한데)이런데도 어찌 그 지위를 잃지 않았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숙어는 외국의 사신을 잘 접대하고, 축타는 종묘를 잘 다스리고, 왕손가는 군대를 잘 다스렸습니다. 이와 같으니 (유능한 신하들이 있으니) 어찌 그 지위를 잃겠습니까?” |
○ 衛靈公(위령공: 미상 ~ BC 493년)
: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君主(군주). 이름은 원(元)이고, 헌공(獻公)의 손자.
재위 기간은 42년.
이 대화는 공자 귀로 후의 대화이지요. 위령공은 공자 귀로 전에 죽었고, 공자와 위령공은
기나긴 애증의 관계가 있었지요.
계환자가 죽을 적에 강자에게 유언하기를 반드시 공자를 부르라고(불러 등용하라고) 했으나 그 신하들이 저지하자, 강자는 마침내 염구를 불렀다. 공자가 채나라에서 섭땅에 이르시니 초나라 소왕이 장차 서사의 땅을 공자에게 봉해주려고 하였으나 영윤인 자서가 불가하다 하니, 그만두었다. (공자가)다시 위나라에 돌아왔을 때 영공이 이미 죽고 위나라 군주인 첩이 공자를 얻어(등용하여)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며, 염구가 (노나라)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자, 강자가 마침내 공자를 불렀으므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시니, 실로 애공 11년 정사년(B.C. 484)으로 공자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노나라에서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아니했고 공자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셨다. |
○ 無道(무도)
: 위나라 영공은 일곱 살 때부터 42년간이나 군주로 있었으나, 부인 南子(남자)에게
빠져 정치에는 무관심했다. 결국 그가 죽은 뒤에 내란이 일어났다.
공자는 45세 때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에 들러 영공을 만났으나 공자를 예우하려던
영공의 뜻에 반대하는 자가 있어서 1년 남짓에 위나라를 떠났다. 뒤에 공자가
다시 위나라에 들렀을 때 영공은 軍陣(군진)의 일을 물었다. 공자는 軍旅의 일은
공부하지 않았다고 대답하고 위나라를 떠났다.
영공의 부인 남자(南子)는 음란하여 송(宋)나라의 공자조(公子朝)와 사통(私通)한 바
가 있었다. 재위 39년 위령공의 태자(太子)인 괴외(蒯聵)가 이 사실을 알고 매우 분
노하여 가신(家臣)인 희양속(戲陽速)과 상의해 남자(南子)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런데 도리어 남자(南子)의 측근들에게 발각되어 태자 괴외와 그 측근들은 송(宋)
나라로 망명했다. BC 493년, 위령공(衛靈公)이 죽자 남자(南子)가 위령공의 뜻에
따라 공자영(公子郢)에게 계승토록 하였으나, 공자영이 사양하여 괴외(蒯聵)의 아들
인 첩(輒)이 계승했으니, 바로 위출공(衛出公)이다.
그리하여 위령공 사후, 부자간에(아들 괴외와 손자 첩) 왕의 자리를 놓고 16년이라
는 긴 세월 동안 다투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대혼란이 위령공의 無道(무도),
즉 ‘정치적인 무능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 康子(강자)
: 춘추 시대 말기 노(魯)나라 사람. 계손사(季孫斯)의 아들이고, 계손비(季孫肥)로도
불린다. 아버지 계환자를 이어 대부(大夫)가 되어 국정을 전담했다. 나중에 공자
(孔子)를 위(衛)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게 했지만 등용하지는 못했다.
시호는 강(康)이다. 그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은 내용이 『논어(論語)』 「안연
(顔淵)」편에 나온다.
계환자(季桓子), 즉 계손사(季孫斯).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 계손여의(季孫如意)의 아들이다.
노정공(魯定公) 5년 아버지를 이어 대부(大夫)가 되었다. 가신(家臣) 양호(陽虎)가 난을 일으키자
그를 가두고 동맹을 맺었다. 8년 양호가 삼환(三桓)을 없애려고 노정공을 위협해 맹씨(孟氏)와
계씨(季氏)를 정벌했는데, 전투에서 지자 달아났다. 12년 제나라 사람들의 여악(女樂)을 받아들여
정공과 함께 구경하고 조례(朝禮)를 폐했다. 공자(孔子)가 당시 대사구(大司寇)를 맡았는데, 이로
인해 번조(膰俎)를 받지 못했다는 핑계로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로 갔다. 시호는 환(桓)이다.
「제나라 사람들이 미녀 악사를 보내어 (노나라의 국력이 강대해지는 것을) 저지하니, 계환자가 이를 받았으며, 교제에(제사가 끝나고) 또한 번조(제사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주지 않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셨다.」
○ 夫如是(부여시) ‘무릇 이러하면’
○ 奚而不喪(해이불상) : 어째서 망하지 않는가.
奚而(해이) : 어떻게 하여, 어찌하여, 무엇 때문에. 奚以(해이) · 奚爲(해위)와 같다.
○ 喪(상) : 군주의 지위를 잃음.
○ 仲叔圉(중숙어) 공문자(孔文子) [마부 어, 곤할 어]
위(衛)나라의 대부로 성은 공(孔), 이름은 어(圉)이며, 문(文)은 시호(諡號)이지요. 위령공(衛靈公)
의 맏딸 백희(伯姬)의 남편, 즉 위령공의 맏사위이지요. 그런데 공어(孔圉)에게는 문(文)이라는 시호
에 어울리지 않는 좋지 못한 행적이 있었지요.
문(文)이라는 시호는 죽은 사람에게 바치는 시호 중 최고의 것 가운데 하나로, 학문에 뛰어난 업적이 있거나 도덕이 높은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건 아시지요?
『춘추좌씨전』 애공 11년(B.C. 484)의 기록에 의하면, 위(衛)의 태숙(大叔: 임금의 숙부)인 질(疾)은
송(宋)의 자조(子朝)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그 잉첩(媵妾: [줄, 따라보낼 잉/ 첩 첩] 예전에, 시집가던 여인이 데리고 가던 시첩(侍妾). 신부의 질녀(姪女)와 여동생으로 충당.)으로 따라온 처제를 더 총애하였지요. 그런데 자조(子朝)가 위나라를 떠나 송(宋)나라로 돌아가자 공어(孔圉)는 태숙질에게 그 아내와 강제로 이혼케 하고 자신의 딸인 공길(孔姞)을 아내로 맞아들일 것을 강요하였지요.
그러나 태숙질은 공어의 딸과 결혼하고 난 후에도, 예전의 처제를 잊지 못하여, 려(犁)라는 곳에
그녀에게 따로 집을 지어 주어 살게 하였지요. 결국 태숙질은 두 부인을 거느리게 되었고, 공어는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태숙질을 공격하려고 마음먹고, 그것을 공자와 상의하려고 하였지만,
공자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떠났지요. 그러자 공어는 그의 딸 공길을 데려왔고, 그후 태숙질은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송나라로 달아났고, 위나라에서는 태숙의 자리에 질(疾)의 동생인
유(遺)를 세웠지요. 그러자 공어는 자신의 딸을 다시 유(遺)와 결혼시켰지요.
또한 공문자가 죽자 그의 부인이었던 백희(伯姬)가 젊고 잘생긴 노비 혼량부(渾良夫)와 정을
통하였고, 그 어리석은 혼량부를 매개로 해서 괴외(蒯聵)가 다시 출공을 축출하고 위나라로
복귀하는 쿠데타에 성공하였고, 그에 반항한 자로(子路)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지요.
이런 공어의 행적을 문제시한 자공이 그가 어찌하여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묻는 대목이 있지요. 【子貢問曰 :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子曰 :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자공문왈 : “공문자 하이위지문야?” 자왈 : “민이호학 불치하문 시이위지문야.”]
자공이 여쭈었다. “공문자는 어찌하여 ‘문’이라는 시호가 주어졌습니까?” 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영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에, ‘문’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이다.” -公冶長(5) 14-】
여기서도 역시 공자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구분하고 있지요.
공문자가 비록 행실에 문제는 있었으나, 그가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 학문에 대한 자세 때문이지 다른 것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 治(치) 맡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
○ 祝鮀(축타) = 史魚(사어)
이름은 타(佗)이며, 자는 자어(子魚), 사추(史鰍)이다. 춘추(春秋) 시기 위(衛)나라 대부(大夫). 위령공(衛靈公) 시기에 축사(祝史)를 맡았는데, 위나라 사직신(社稷神)의 제사를 책임지고 있었다. 축타(祝佗)라고 불림. 오(吳)나라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위나라를 지나갈 때에 사어를 위나라의 군자(君子)이자 주석(柱石: 기둥과 주춧돌. 즉, 국가의 중임을 진 사람의 비유) 같은 신하라고 칭찬했다고 함. 제사의 예법에 따라 축문(祝文)을 잘 꾸밀 줄 아는 축타에게 종묘의 일을 맡겼다.
축타의 말재주를 일컬은 대목도 있지요?
【子曰 : “不有祝鮀之佞, 而有宋朝之美, 難乎免於今之世矣.” [자왈 : “불유축타지녕, 이유송조지미,
난호면어금지세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축관(종묘에서 제사를 관장하는 관리)인 타의 말재주
가 없었다면, 송나라 사람 조(朝)의 미모가 있다하더라도, 지금 세상에서 화를 면하기가 어렵다.“
-雍也(6) 14-】
위령공(衛靈公) 38년(BC 497)에 위나라의 공숙자(公叔子)가 일찍이 집안에서 영공을 초대하여
잔치를 열자, 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하지요. “그대는 부유한데, 군주가 가난하면 장차 반드시
재앙이 될 것이오. 화를 피하는 방법은 단지 부유하더라도 교만하지 않고, 삼가 신하의 도리를
지켜야 할 것이오.”
그는 여러 차례 위령공(衛靈公)에게 거백옥(蘧伯玉)을 천거했으며 미자하(彌子瑕)를 멀리할 것을
간곡히 권고했지요. 때문에 ‘시간(屍諫)’이라고도 불렸지요. 공자는 그를 “굳구나, 사어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화살처럼 곧고, 나라에 도가 없어도 화살처럼 곧으니, 군자로다.”라고 평가했지요.
신후지간 (身後之諫) : 죽은 뒤에도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간언(諫言)하다'라는 뜻으로, 주검으로써 간언하는 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 중국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충신 사추의 고사에서 유래되었음.
시간(屍諫:屍는 尸라고도 씀)이라고도 한다. 사추는 자가 자어(子魚) 또는 사어(史魚)이며, 위나라 영공(靈公)을 섬기며 대부 벼슬을 지냈다. 사추는 위령공 에게 어질고 능력 있는 거백옥을 천거하였으나, 위령공은 그의 충언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간신 미자하(彌子瑕)를 중용하였다. 그러고도 사추는 여러 차례 거백옥을 등용하도록 간언하였으나 위령공은 듣지 않았다. 나중에 사추는 병이 들어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내 능히 거백옥을 군주에게 나아가게 하지 못하고, 군주로 하여금 미자하를 물리치도록 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군주를 바로잡지 못한 것이다. 살아서 군주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죽어서도 예를 이룰 수 없다. 내가 죽으면, 너는 내 주검을 창 아래에 두도록 하거라"라는 유언하였다. 사추의 아들은 그 말대로 따랐다. 위령공이 조문하러 와서 사추의 주검이 창문 아래 놓여 있는 광경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추의 아들에게 무슨 까닭인지 물었다. 위령공은 그 아들 에게서 사추의 유언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사추의 주검을 올바른 자리에 모시게 하였고, 거백옥을 등용하고 미자하를 내쳤다. 공자가 이 일에 대하여 평하기를 "옛날에 간언의 반열에 든 사람이라도 자신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추처럼 죽은 뒤에도 주검으로써 간언하여 그 군주를 충성으로 감동시킨 사람은 없었으니, 충직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古之列諫之者, 死則已矣, 未有若史魚而尸諫, 忠感其君者也, 不可謂 直乎)"라고 하였다. 이 고사는 《공자가어》의 〈곤서(困誓)〉편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신후지간은 주검으로써 간언하는 충직한 자세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
○ 王孫賈(왕손가)
위나라 대부. 국방을 맡음. 왕손가에 관한 내용은 앞에서 공부한 것을 다시 볼게요.
【王孫賈問曰 : “與其媚於奧, 寧媚於竈. 何謂也?” 子曰 : “不然. 獲罪於天無所禱也.”
[왕손가문왈 : “여기미어오, 녕미어조. 하위야?” 자왈 : “불연. 획죄어천무소도야.”]
왕손가가 여쭈었다. “‘안방에 아첨하느니 차라리 부엌에 아첨하는 것이 낫다.’ 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소(천만에)!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조차 없소.” -八佾(3) 13-】
당시 위나라의 실권을 미자하(彌子瑕)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왕손가가 위령공(奧; 안방) 보다는 미자하(竈; 부엌)에게 잘 보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여쭤보는데, 공자의 답은 단호하지요.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지 말고, 도리에 맞게 처신하라고 대답을 한 것이지요.
○ 軍旅(군려) ①군대(軍隊)의 수 ②군세(軍勢)
▶軍(군) : 고대의 병제(兵制)로서 군사 12,500명을 이름. 三軍(삼군)
▶旅(려) : 오백 명의 군사 [군사 려]
공자시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제사와 군사의 문제가 국가의 존속을 위한 것이었고, 외교는 군사문제와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이지요. 위령공이 비록 무도하였으나, 인재를 기량에 따라 임명해서 책무를 다하게 하는, 정치에 있어 용인(用人)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요. 다시 말하면, 군주의 개인적 도덕성과 정치적 능력은 상호 독립적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공숙어 등은 결코 완전한 인격자가 아니었지요. 공숙어는 인륜을 혼란시켰고, 축타는 아첨을 하였으며 왕손가는 권력을 좇았지요. 하지만 그들의 재능과 식견은 나라를 보존하기에 넉넉했던 것이지요. 지도자의 德望(덕망)보다 용인(用人)의 중요함을 거듭 깨닫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