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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와 함께 성경에서 이미지를 읽어내기
성경의 이미지 06
씨앗, 새 창조의 원리
https://youtu.be/EiqKyeuhnE0?feature=shared
성경에는 이미지가 많습니다. 그 이미지는 어떤 주제를 나타내며 성경 이야기를 관통합니다. 우리는 이 이미지를 하나씩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가 전체 이야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미지를 읽어내야 합니다.
씨, 지속가능한 창조의 원리
성경의 첫머리는 창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이 그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이 세상에 어떤 것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식물들을 만드셨는데 그 식물에는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 씨앗 때문에 식물들은 번식하고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채소와 씨 가진 식물을 내어라. 열매 맺는 각종 나무들도 땅에서 자라나라. 그 열매에는 씨앗이 있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명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작가는 조금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기록하기를, ‘땅은 야채와 씨 가진 열매 맺는 식물을 내라. 온갖 종류의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고 그 안에 씨가 있게 하라. 하나님이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합니다.
창세기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면, 하나님의 창조물은 그 안에 씨를 가지고 있어서 그 자체로 번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상의 작동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제공하신 것은 생명이 지속 가능하도록 작동되는 원리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고 다른 짐승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만드시고 두신 것은 바로 이런 능력을 가진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번성하고 충만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온 세상을 채울 수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계획이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피조세계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원리였습니다. 그 원리를 하나님은 이 세상에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서양 세계에서 종종 하나님이나 천국에 대하여 상상할 때 사람들은 천국이 구만리 창천에 멀찍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땅에 있으며 곧 하늘 아래 이곳에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려고 계획하신다면 세상에 잠깐 내려오셔서 순식간에 일을 보고 떠나신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에 출처는 아마 18세기의 이신론(理神論, Deism)이거나 신쾌락주의(Neo-Epicureanism)일 것입니다. 세상이 하늘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무슨 일을 하실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바로 그 방식은, 새로운 것이 그 안에서 솟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 세상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씨앗의 원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핵심적인 방식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 속에서 그 일들이 일어나는 방식을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의 씨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번역이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일깨워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 이야기는 창세기 15장에 나오는데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눈을 들어 하늘의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너희 자손이 이와 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손이라는 말은 바로 씨앗(제라, zera)과 같은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말입니다. 그리스 성경인 70인역(LXX)은 스페르마(sperma, 씨앗)로 번역되었습니다. 그 단어는 창세기에서 ‘자손’이라는 말로 번역되거나 때로는 ‘가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게 씨앗이라는 말은 그 두 가지로 번역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칠 준비를 마쳤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같이 하였으므로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을 하늘에 별과 같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 ‘자손’은 바로 ‘씨앗’과 같은 단어입니다. 창세기 22장 18절을 보면,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즉,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왜냐하면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창세기 15장과 22장에서 발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새로운 창조’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중지된 까닭은 인간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부르셔서 없애려고 하신 것은 아담의 죄와 그 결과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원리로서 구약성경을 읽을 때 중요합니다. 실제로 그 점은 신약성경을 읽을 때도 중요한데요, 신약성경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아담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회상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가족이 어떤 백성이 되는가 하면, 그것은 씨앗이며 자손입니다. 바로 그들 가족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앞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의 씨
아담의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성경은 모든 피조물의 문제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새롭게 강조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소명에도 드러납니다. 다윗 왕은 처음에는 선택을 받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택받지 못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무엘이 베들레헴의 이새의 집에 왔을 때의 일입니다. 사무엘은 그곳에 와서 하나님이 기름부으실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일은 사울 왕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의 일입니다.
사울은 왕이 되기에 합당하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들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을 데려오라고 했고 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장차 왕이 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자리를 잡고 자신의 왕위를 든든하게 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거하실 영구한 집을 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성전’이라는 전체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성전이 새로운 창조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언급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예언자 나단이 다윗에게 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전달합니다: ‘왕이시여, 그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는 그 생각 말입니다. 왕은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한 분이 아닙니다. 왕의 손에는 너무 많은 피가 묻었습니다. 왕은 너무 많은 폭력을 행사한 사람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후손 중에서 한 사람을 일으키리라. 그 사람이 왕위에 오를 것이다. 그 사람은 솔로몬을 가리킵니다. 그가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대부분의 번역은 ‘내가 너의 씨를 일으키리라’는 식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지금 아들이나 자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현대 영어 번역본은 그렇게 아들이나 자손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 구절, ‘네 씨로 말미암아’는 신약성경에 명백하게 인용된 구절입니다. 즉, 예수에 대하여 말하자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로 나신 분입니다. 로마서 1장 3절에서 바울은 로마서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면, 그분은 다윗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온 세상의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언자 나단을 통하여 하신 말씀, ‘내가 너의 씨를 일으키리라!’라는 본문을 초기교회가 읽으면서 그 안에 예언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자손의 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 누구도 이 본문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7장 12절의 말씀 말입니다: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하지만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이 바라던 다윗 계보의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본문은 그 자체로 새로운 생명력을 가진 것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내가 네 씨를 일으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예수께서 다윗의 진정한 씨이심을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다윗 언약이 확장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언약도 온 세계로 확장됩니다. 시편 2편을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소개합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네 유업으로 주리라. 그래서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를 것이다.’ 시편 기자는 아브라함 언약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본래 약속의 땅에 대한 것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다윗의 통치를 묘사한 것입니다. 장차 마침내 메시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이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의 나라가 온 세계에 미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땅에 대한 이야기는 다윗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거룩한 씨, 남은 자
그런데 씨에 대한 약속도 있습니다. 이사야 40장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8절)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55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 영영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시는 것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리라’(10절~11절).
하나님이 이처럼 말씀하시는 이유는 주님이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 즉, 씨를 주시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면, 이 땅을 번성하고 충만하게 하는 자니라. 그 땅은 생육하고 다시 번성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창조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 인 씨로 말미암아 될 것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런 일을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그 비유에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주제를 다루기 전에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의 고대 문서를 보면 ‘남은 자’ 사상이 나오는데 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유대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거룩한 씨’라고 불렀습니다. 그 말씀이 이사야 6장 13절입니다. ‘나무들이 베임을 당하고 불에 탈지라도 이 땅에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앗이니라.’ 하지만 거룩한 씨도 타락했습니다. 에스라 9장에 나오는 기도문을 보면 거룩한 씨가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패해졌습니다. ‘주께서 저희들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사오나 우리는 엉망으로 살았습니다(11절).’ 그들이 사용한 이 단어, 씨는 약속의 전달자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주께서는 언젠가 우리에게 다윗의 진정한 씨를 보내시겠죠.’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발 그렇게 해 주십시오. 저희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뜻을 성취하여 주십시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씨였고 다윗의 씨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리라 하시던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첫 번째 비유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가서 씨를 뿌린다는 그 비유가 그것입니다.
그 씨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사야 자신도 사실은 과거의 창세기 말씀을 반영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새로운 창조’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것은 수수께끼처럼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도전적으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바로 그 일을 하신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바로 그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씨앗처럼 다시 파종하십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며 약속하신 대로 늘 새로운 창조를 하십니다. 하지만 그 씨앗은 대부분 헛되게 허비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토록 듣고 또 들었지만 결국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지 못하고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씨에 대한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씨앗은 자라고 거대하게 되고 많은 열매를 맺으며 크게 번성하고 충만하게 된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많은 사람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주님이 많은 무리를 먹이 실 때 그 시작은 매우 적은 양의 음식이었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했던 그 시험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빵을 가지고 그것으로 더 많이 만드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책 ‘기적’(Miracles, 1947)에서 이 기적은 메시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로 그 방식입니다.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그것을 더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많이 결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씨에 대한 사도 바울의 신학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사도 바울의 신학에서도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진정한 씨’이시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메시아시라면, 즉 다윗의 씨이시라면,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도 씨가 됩니다. 그 씨는 진정으로 ‘남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수가 많아 계속해서 많아지고 성장합니다. 그들은 적은 수의 남은 자들이 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새로운 남은 자들이 되어 온 세상에 새로운 것을 제시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씨에 대한 이미지를 바로 이런 식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그에게 단 하나의 씨를 주시고 그 씨가 자라나 한 가족을 이루게 되고 그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거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는,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면,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너희는 아브라함의 씨들이니라. 즉,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번역이 그런 식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즉, ‘씨’라고 된 것은 아닙니다.
같은 이야기가 로마서 4장에도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그런 생각을 피력합니다. 그러므로 씨에 대한 생각이 처음 시작할 때에는 분명히 단순하게 보면 창세기 1장에서는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씨에 대한 그런 생각은 창조와 새 창조라는 주제를 전달해주는 주요 매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분명한 표지판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을 가리키며 지금도 하고 계시는 일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복을 주시고 번성하고 충만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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