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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이집트 | 이스라엘 | 앗수르 | 바벨론 | 페르시아 | 헬라 | 로마 | |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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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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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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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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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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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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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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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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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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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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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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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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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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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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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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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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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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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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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
| 남 | 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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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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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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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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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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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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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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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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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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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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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표를 보는 법과 도표를 통한 이스라엘과 강대국의 교류
위 그림은 이스라엘 민족과 주변국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림을 보는 방법은 우선 이스라엘은 이집트 다음에 있는데 도표는 100년 단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800-1500년의 기원전 400년은 이집트의 종살이를 표현하고 초록색이 이스라엘인데 이집트에 한 칸 들어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들어감을 의미하고 파란색 4칸은 이집트의 이스라엘의 400년 압제를 말해 줍니다. 그렇게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를 보시는 당시의 강대국과 이스라엘의 포로를 알 수가 있고 이집트는 파란색, 앗수르는 진청색, 바벨론은 신상의 머리 부분이 금이니 노란색, 그리고 페르시아는 은색, 헬라는 놋이니깐 고동색, 그리고 로마는 철의 색깔로 진고동색으로 표시를 했는데 이집트와 같이 파란색이 강대국의 전성기에 들어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포로가 그 나라에 있음을 이야기 하고 이스라엘에 강대국의 색이 연도에 따라서 들어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 나라의 속국이거나 피지배국이라는 뜻이며 이스라엘이 기원전 약 100년경에 독립을 이룬 적이 있기에 이 부분은 역시 파란색으로 한 칸을 표시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강대국의 번영의 연대 이전의 부분은 연 초록색과 연 고동색으로 표시를 해 놓았는데 이 부분은 노아 홍수 이 후의 인간의 이동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연도는 100년 단위로 되어 있어서 정확한 연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이스라엘이 이들 강대국에게 미친 영향을 알아보는 것이 이 표의 작성이유가 되기 때문에 더욱 정확한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눈금의 정확한 작성이 더 필요함을 밝혀 둡니다.
이 표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기원전에 이 민족과의 포로의 삶이나 노예의 삶을 통해서 문화를 교류하고 지식을 나누며 그리고 자신들의 앞선 지식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그 나라의 번영에 기여를 했으며 이스라엘이 떠났거나 이스라엘로 인해 한 제국이 망하는 것을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2. 한 민족의 이동이 타 민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한국 민족을 통한 단적인 예
백제의 유민의 일본에 유입을 통한 일본의 문화의 변화와 임진왜란 때 도공을 잡아가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사실과 구한말에 일제의 압제와 가난을 피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살다가 러일 전쟁의 발발과 스탈린의 조선인 강제 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옮긴 우리 민족이 그곳에 살던 유목민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니 우선 음식문화를 바꾸어 놓았는데 개고기를 먹는 관습을 그곳의 사람들에게 심어주어 개고기를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즐겨먹게 되고 술과 고기만 먹든 그들이 풀과 같이 그곳에 자생하는 시금치를 먹게 되었고 김치와 다양한 국과 음식을 먹는 민족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으며 가는 곳 마다 빈 땅이 있으면 개간을 해서 각종 곡식을 심어서 수확해서 양식으로 쓰는 한 민족의 농경문화를 본 받아서 목축을 하며 이리 저리로 옮겨다는 유목민의 삶에서 정착을 하고 농지를 일구며 음식을 채식도 하면서 사는 사람들로 약 최근의 100년 사이에 한 민족이 정착해서 사는 곳의 중앙아시아 인들의 삶이 변하게 되었으니 구약의 말씀을 가지고 인류 최초의 사람을 조상으로 모시며 혈통을 이어오면서 하나님을 섬긴 모든 면에서 뛰어난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가는 곳은 가는 곳 마다 번영이 생기게 되었으니 예수님 오신 이후의 이스라엘인의 이동과 그들이 가는 곳의 국가가 발전한 관계를 조사를 해 보아야 할 것이나 현대에 있어서 가장 부강한 미국의 유대인의 영향력과 소련의 유대인의 영향력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독일이나 유럽의 유대인의 조사와 그들의 영향력을 또한 조사를 해 보아야 하겠지만 유대인이 세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모든 민족에 우월해서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이스라엘 민족과 강대국의 흥망의 관계에 대해서
기원전 1800년 말에 이집트에 들어간 사람은 불과 야곱과 그의 아들들과 가족을 모두 합쳐서 72명이었는데 400년이 흐르는 동안에 수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의 조상 중에 에녹과 노아와 같은 너무나 훌륭한 신앙의 삶을 보인 조상이 있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고 요셉을 옥에서 단련시킨 말씀이 있었으며 그리고 그 수백만의 노동은 이집트 번성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요셉을 통해서 1/5 토지세의 규범을 세웠는데 이는 모든 국가의 재정의 근간이 되는 법이다. 피라미드등도 유대인들이 건설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악을 행하자 그들이 하나님께 압제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짓고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드디어 출애굽하게 되는데 당시 이집트는 지상 최강의 국가였다. 그런데 모든 장자가 죽고 다른 재앙을 겪었으며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떠날 때 은과 금을 주며 떠나게 하였고 그들이 멀어지자 도저히 노동력의 손실을 보전할 길이 없는 바로의 추격이 있었으니 홍해바다에서 그들의 말과 전차와 정병이 다 잠겨서 죽게 되었으니 수백만의 노동력의 손실과 당시 모든 장자의 죽음과 그리고 병거와 군사의 죽음은 다시는 이집트가 당시에 누리던 번영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인간이 사는데 가장 훌륭한 모세 5경을 받고 40년간 광야에서 하나님께 직접 배우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당대 최고의 부를 축척하며 성전을 건축하고 성정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섬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들의 범죄로 앗수르와 바벨론과 그 뒤를 잇는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의 포로가 되고 속국이 되어 나라 없이 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남 유다 히스기야와 당대 최고의 국가 아수르의 싸움에서 앗수르 군이 하룻밤에 18만 5천명이 몰사하는 사건이 생기고 그 일로 인하여 앗수르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며 도움심을 통해서 가는 곳 마다 그 나라의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그 나라 번성의 핵심적이 역할을 하였다. 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총리를 지냈고 왕비도 나왔으며 수많은 학자와 정치지도자가 그 나라에서 배출되며 그 나라의 번영을 도왔다. 이스라엘 인의 특징 중의 하나는 한 사람이 출세를 하면 반드시 동족 이스라엘 사람 두세 명을 동시에 품고 같이 성공을 한다는 점인데 다니엘과 세 친구의 본이 후대에도 지속이 되어 이런 서로 이끌어 주는 전통이 적국에 살면서도 그리고 이방인이 되어 살면서도 그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하나님을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도 잘 섬기는 사람이 있는 곳은 반드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따라다니게 되어있으니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구약의 말씀뿐만 아니라 모든 강대국의 장점을 이어 받아 로마의 속국이 된 이스라엘 민족과 그리고 당시에 지중해 주변에 흩어져 살던 로마 인구의 약 1/10에 해당하는 700만 명 정도의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다른 민족보다도 로마의 번성에 기여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는 현재에도 영향력을 막강하게 행사하는 미국의 유대인과 유럽의 유대인의 조사를 통해서도 증명이 되리라 믿는다.
4. 이런 부분에 있어서 잘 설명을 하는 글 한 편 보기
글
홍 익희 집필자 소개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1978년 KOTRA에 입사.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 무역관을 거쳤다. 배재대학에서 유대인의 창의성과 서비스산업에 대해 가르친다.
1차 이산
유대인 방랑시대의 시작
목차
예레미야의 예언
1차 바빌론 유배
2차 바빌론 유배
기나긴 유대인 방랑시대의 시작
예레미야의(B.C627-580) 예언
솔로몬 왕 시절부터 만연된 우상숭배와 타락은 그 도를 더해 갔다. 이렇게 죄로 물들자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에서 두 번이나 신의 뜻에 따라 이산(離散)을 당한다. 첫 번째 이산부터 살펴보자.
‘눈물의 예언자’로 알려진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이 우상숭배라는 종교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는 것을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거듭 경고했다. 그는 머지않아 큰 재앙이 내려 북방 민족에 의해 유다 왕국이 멸망되며 예루살렘도 붕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레미야는 언제 어디서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대로 실천하는 삶이 궁극적인 살길임을 알려주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며 유다 왕국의 멸망을 예고했다. 그 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기억하고 그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는 희망찬 미래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는 신이 옛날 모세 시대에 맺은 계약을 새 계약으로 대체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날이 오면 신은 율법을 돌 판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직접 알게 되고 죄 사함을 받게 되리라고 했다.
《구약》에서 ‘메시아’란 단어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새 계약’ 예언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염원을 품게 만들었다. 이는 《구약》은 물론 《신약》 시대에도 대단히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예언은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말한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라는 말씀의 배경이 된다.
1차 바빌론 유배
과거의 찬란했던 바빌로니아 왕국의 계승자임을 자처한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기원전 605년 이집트 군을 대파하고 기세를 몰아 블레셋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다. 기원전 597년 이들은 아시아에서 이집트인을 몰아낸 후 시리아까지 손에 넣었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기세에 놀란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은 전통적 우방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할 때도 유다 왕국은 이집트의 보호로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집트는 신흥 강국 신바빌로니아로부터 유다 왕국을 보호하기에는 그 힘이 너무 약해졌다. 오히려 이러한 지원 요청은 결국 네부카드네자르 왕에게 침략 명분을 주어 결국 기원전 601년 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의 속국이 되었다.
유대민족은 항상 이민족에게 지배받고 노예로 전락했을 때 자신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다고 뼈저리게 뉘우쳤다. 이러한 어려움이 신앙을 회복하게 된 기회가 된다. 이교도들의 우상숭배가 강요될수록 나름대로 하느님을 따르고자 강력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 지배를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기원전 600년에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반란을 진압하려 파병된 군대가 오히려 전멸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연합군을 진두지휘해 다시 공격해 왔다. 유대인들은 용맹하게 저항했지만 이 싸움에서 타격을 입었다. 결국 기원전 59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루살렘의 최후의 날, 예레미야는 용기 있는 행동을 보였다. ‘저항해보았자 소용없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유대의 사악함을 벌하기 위해 보내진 하느님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다시 항거할 만한 8천 명을 추방시켰다. 그리고 왕과 상류층과 함께 은장이, 대장장이들을 바빌론에 포로로 데려갔다. 이것이 1차 바빌론 유배다.
2차 바빌론 유배
그래도 그는 유다 왕국을 완전히 병합하지 않고 허수아비 왕을 앉혀 놓고 속국으로 남겨두었다. 그런데 새롭게 즉위한 유다 왕이 예상외로 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다. 유다는 이집트와 동맹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격분한 네부카드네자르는 다시 군대를 동원해 결국 기원전 587년에 2차 침공이 일어났다. 이집트는 몇 주일 만에 항복했지만 유대인은 1년 6개월을 싸웠다. 6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하던 바빌로니아 군은 기원전 586년에 성벽을 격파했다. 세 차례에 걸친 대제국과의 전쟁으로 유다 왕국은 정말 어쩌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2차 바빌론 유배다.
기나긴 유대인 방랑시대의 시작
유다 왕국도 이렇게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다.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으며 사는 유대인들은 무엇보다도 신앙적 갈등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아갔다.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에 있어서도 다른 민족에 비해 월등히 앞서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보다 열등한 민족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더욱 참기 어려워했다.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고 배워 대부분이 일찍이 글을 깨우친 민족임에 반해 오히려 정복민족은 대부분 문맹으로 현격한 수준 차이를 보였다. 이러한 문화적 충돌은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다.
진압군에 대항해 예루살렘이 포위당한 채 3년 5개월을 버텼다. 하지만 반란은 실패해 기원전 582년에 처참하게 패하며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유다 왕국도 아예 멸망하게 된다. 전쟁의 참화로 예루살렘 성전은 말 그대로 초토화했다.
이때 언약궤에 안치되어 있던 모세의 십계명 석판마저 없어졌다. 유다 국토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당시 유대인 상류층은 모조리 바빌로니아로 잡혀갔다. 부녀자와 아이들을 포함하면 4만 5천 명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바빌론의 유수의 전모다.
바빌로니아에 잡혀가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제각기 흩어져 성 밖으로 도망쳤다.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로 피신했다. 이때 지중해 권역의 페니키아 식민지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제1차 이산’이다. 이때부터 1948년 이스라엘 건국까지 약 2천 5백 년간을 ‘유대인 방랑시대’라 부른다.
그리스의 속국이 된 유대
목차
알렉산더, 유다 왕국을 점령하다
유대인, 헬레니즘 문화에 빠지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해준 70인 역 《성경》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최고 업적, 70인 역 《성경》
시련의 시작, 실패한 반란이 화를 부르다
유대교 말살정책
역사상 첫 종교전쟁, 마카비 반란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하시딤이 양분되다
알렉산드라 여왕, 최초의 의무교육 실시
알렉산더, 유다 왕국을 점령하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한다. 유다 왕국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위협과 페르시아 군주에 대한 충절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결국 유대인들은 알렉산더 대왕에게 항복해 환대를 받았다. 이로써 에스라와 느헤미야 체제가 이끌었던 유다 왕국은 이 일대를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로 들어갔다. 당시 유다 왕국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이민족과의 결혼을 금지시키고 《토라》를 완성해 유대교의 보존에 힘쓰고 있을 때였다. 이때부터 유대는 그리스의 속국이 된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유대인 최고 집권자인 대사제가 알렉산더 대왕을 예루살렘 성문에서 만났다고 한다. 대사제는 어느 나라 편에 가담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꿈을 꾸고 난 뒤 대왕을 맞이하러 나갔던 것이다. 대사제를 만난 알렉산더 대왕은, 마케도니아를 출발하기 전에 꿈속에 나타나 동방을 정복하도록 용기를 북돋워준 인물이 대사제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전승은 당시 알렉산더 대왕이 누렸던 인기를 잘 보여주는 것인데, 그는 성전에 제물을 바쳤으며 유대인들에게는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7년마다 오는 안식년에 세금을 면제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건설을 돕도록 유대인들을 이집트로 데려갔다.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이 많았던 이유다.
이렇게 유다 왕국과 바빌론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 되자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제국 내 각 도시로 옮겨 갔다. 이때부터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가 지중해 연안 및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침입 당시 길을 닦아 놓은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주변으로도 많이 진출했다. 실크로드는 사실 중국 한 무제 이전에 알렉산더가 닦아 놓은 길이다. 그리고 이 길을 가장 잘 이용한 민족이 유대 상인들이다. 알렉산더의 세계 정복이 유대인의 활동 반경을 넓혀주었다. 실크로드 곳곳의 유대인 커뮤니티들이 실크로드를 이용해 중앙아시아와 인도까지의 교역을 활성화했다.
이후 지중해 연안의 유대인 커뮤니티가 주도하는 해상무역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특히 해상무역으로 알렉산드리아가 번성하자 유대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대거 몰려들었고 알렉산드리아는 당시에 가장 큰 상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구 1백만 명 가운데 40퍼센트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헬레니즘 문화에 빠지다
알렉산더 대왕의 유다 왕국 정복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 정복지역인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 흩어져 살면서도 유대인들이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공통으로 간직한 《성경》 덕분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유다 왕국 점령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문화적인 충격을 안겼다. 이른바 헬레니즘 문화 쇼크다.
기원전 3세기경에 이르러서는 헬레니즘 제국 내의 유대인들은 우수한 헬레니즘 문화에 푹 빠져 벌써 헬라인이 다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히브리어는 이미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성경》을 못 읽는 유대인들이 많아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때는 유다 왕국이 멸망한 지 이미 3백 년이 훨씬 지난 때로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백성들로서 여러 나라에 흩어져 고달픈 삶을 살고 있던 시기였다. 이산 유대인은 생업 때문에 그리스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익히고 있었다. 특히 젊은이들은 그들의 언어였던 히브리어를 거의 잊어버리고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유대 젊은이들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은 읽을 수가 없어 그리스어로 번역해야 할 필요가 생겨났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해준 70인 역 《성경》
이러한 위기를 맞아 당시 이집트의 수도인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토라》를 그리스어로 번역하기로 하고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도움을 청한다. 역대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다. 왕조의 창건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유대인들을 제국 내에 산재해 있는 알렉산드리아 도처에 안주시켰으며, 정착 후 경제적, 문화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3세 역시 유대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이자 문화의 보고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제일 중요한 곳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이 도서관에는 파피루스로 된 책들만 70만 권 이상이 있었다. 이 서적들이야말로 세계를 정복한 그리스 문화 홍보대사들이었다. 고대 유럽의 학문과 예술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나왔고 동양과 서양을 잇는 헬레니즘 문화의 사상적 체계도 여기에서 탄생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계속 무역 중심의 상업도시로 발전했고, 상업에 종사하던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살고 있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 수가 예루살렘보다 많았다. 지금의 뉴욕 격이었다. 이들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다. 왕은 유대인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왕은 사신을 보내 유대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여섯 명의 현자들을 선출해 알렉산드리아로 데려왔다. 직접 이들의 지혜를 시험한 뒤 만족한 왕은 파로스 섬에 건물을 짓고 일흔두 칸의 방에 이들을 각자 들여보내 《토라》를 번역하라고 명한다. 약속한 72일이 지나 이들이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기적이 발생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72개의 번역본이 놀랍게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로써 신의 손길이 미친 것임을 입증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켜준 《구약》에 얽힌 이야기다.
기원전 300년경에 만들어진 이 《구약성경》을 ‘70인 역’이라 부른다. 최초의 번역으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원래 정확히는 72인 역이지만 편의상 70인 역이라 부른다. 그런데 70인 역은 ‘사분법’이라는 새로운 원칙에 따라 《구약》의 순서도 재배치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읽고 있는 《구약성경》의 순서는 70인 역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최고 업적, 70인 역 《성경》
그리스어로 출간된 ‘70인 역’ 《성경》은 예상치 못한 의외의 결과를 초래했다. 바로 평상시에 유대교 신앙에 관심을 보이던 이교도들까지 흡수한 것이다. 유대인들뿐 아니라 유대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이교도들에게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로 인해 무려 3백만 명에 달하는 이교도 개종자가 나와 유대교인이 되었다.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 불리는 지지 세력들을 탄생시켰다. 이들이 훗날 사도 바울이 이방 선교를 할 때 기독교인이 되는 주력 세력이었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인용한 《성경》은 바로 70인 역 《성경》이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역시 히브리어 ‘마쉬아흐’(메시아)에 대한 그리스어로 70인 역 《성경》에 나오는 단어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며 다닐 때 바울은 청중들에게 아주 생소한 교리를 설파한 게 아니었다. 이미 청중들은 70인 역 《구약성경》에 익숙해 있는 지지 세력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70인 역 《성경》은 기독교 역사상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필자의 생각은 히브리어에 능통한 율법학자 바울은 히브리어 성경에도 능통하고 헬라어와 라틴어에도 능숙했으리라고 믿는다. 그가 가는 곳마다 동족에겐 히브리리어로 헬라인에겐 헬라어로 그리고 로마시민권자로서 라틴어에도 능숙했으리라 믿는다.
시련의 시작, 실패한 반란이 화를 부르다
그 뒤 기원전 200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던 시리아 왕국이 유다를 정복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도시 유대인들 사이에 더 널리 퍼졌다.
당시는 유대인들이 천거한 대제사장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유대 제사장 야손은 이스라엘 이름인 ‘여호수아’를 헬라식 이름 ‘야손’으로 바꾼 사람으로 친헬라파 인사 가운데 비둘기파에 속해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파와도 대화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그리스화에 협력했다. 성전을 개방해 이교도 의식을 진행토록 했고 지성소에 그리스인 동상을 세웠다. 유대 제사장들은 그리스 의상을 입고 숭배의식을 그리스 방식으로 치렀다.
그러자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두 파로 나눠졌다. ‘헬라파’와 ‘정통파’가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제사장 자리를 놓고 싸우게 되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경건자 그룹의 하시디안 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기회를 틈타 그리스화를 부르짖는 공직자와 제사장들을 성전의 담장 위에서 떨어뜨려 처벌했다.
기원전 168년 이집트를 공격한 안티오코스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의 정복하려는 순간, 그를 견제하는 로마에 의해 실패하고 이집트에서 퇴각했다. 이때 팔레스타인에서는 안티오코스가 전쟁 중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이때가 멍에를 벗어던질 좋은 기회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다.
소문은 잘못된 것이었다. 반란 소식을 들은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주민 1만여 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해 반란을 진압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에 시리아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자치권을 박탈하고 탄압정책으로 돌아섰다. 그는 배타적인 유대민족의 종교를 타도하기로 했다. 여러 종족을 통일해 광대한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의 통일이 중요했다. 안티오코스 황제는 스스로를 제우스의 지상현신이라고 주장하며 유대인들에게 제우스 숭배를 강요했다.
시리아 왕국의 유다 정복
유대교 말살정책
안티오코스 4세는 먼저 유대교 종교의식을 금지시켰다. 그 뒤 새로운 동상들이 성전에 세워지고 이교도를 예루살렘에 이주시켜 유대인과 피를 섞게 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그는 유대교 말살을 위한 칙령을 선포했다. 내용은 유대인의 안식일과 종교적 공휴일 그리고 할례를 지키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와 같은 그리스 신의 우상을 들이는가 하면 유대인이 제일 혐오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다. 유대교 율법이 금하는 동물이었다.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자 유대인의 거센 저항이 다시 폭발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을 신이 선택한 백성이라고 가르쳐 왔다. 신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가 지니는 의미를 세상에 입증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였다. 이스라엘의 임무는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의해서 지배되는 올바른 인간사회를 만들어서 하느님의 계시를 의미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게서 유대교를 빼앗으면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역사상 첫 종교전쟁, 마카비 반란
기원전 166년에 안티오코스 4세는 장대한 군사 열병식을 벌여 만방에 그의 힘을 과시했다. 열병식에는 2만 명의 마케도니아 군과 4만 6천 명의 보병이 참가했고, 그 뒤를 8천 5백 명의 기병과 306기의 장갑 코끼리 부대가 따랐다. 이때 다시 반란이 시작된 것을 통해, 놀라운 유대인 투쟁정신을 엿볼 수 있다. 모딘이란 마을의 ‘마타디아’란 늙은 제사장이 유다 마카비 등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유대교 정통파들은 마카비 가문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제우스 신상을 파괴했다. 이것이 역사상 첫 종교전쟁인 ‘마카비 반란’이다.
마카비 형제들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민족의 저항은 게릴라전을 통해 몇 번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왕의 토벌군을 유다 마카비는 간단히 물리쳤다. 그러자 왕은 이번에는 군사령관 세론을 직접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카비의 용맹에 밀려 퇴각했다. 왕은 이제 마카비 형제들의 힘이 만만찮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 형제들을 나뒀다가는 제국 전체에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왕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집중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작은 반란군 무리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체면이 설 수 없었다. 그래서 형제들의 군대를 괴멸시키기 위한 군대를 편성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가나안 땅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진압군은 보병 5천 명에 정예 기병 1천 명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마카비 다섯 형제의 병력은 3천 명에 불과했다. 기병도 없었다. 또 진압군은 갑옷 등 무장이 완벽했다. 게다가 병사 대부분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용병들이었다. 하지만 마카비 형제들의 병사들은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갑옷과 칼 등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두 군대가 부딪힌 곳은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엠마오 평원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예상을 깨고 영웅적으로 싸운 마카비 군대가 이겼다.
그러나 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섬멸작전에 나섰다. 이번에는 정예 보병 6만 명과 기병 5천 명을 동원했다. 1년 전보다 열 배가 넘는 병력이었다. 이에 마카비 형제들은 보병 1만 명으로 맞섰다. 하지만 용병 중심으로 편성된 진압군은 목숨 바쳐 싸우는 유대인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은 유대인들이 소유가 아닌 관념을 위해 영웅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경이롭게 여겼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2년간의 끈질긴 싸움 끝에 기원전 164년 12월 25일 반란군은 결국 예루살렘을 되찾는다. 마침내 유대인들은 독립을 쟁취해 자치령이 되었다.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그래서 탄생된 것이 하스모니안 왕조다. 마카비 가문의 조상 하스몬의 이름을 따 지은 왕조 이름이다. 이후 예루살렘은 1백 년간 하스모니안 왕조에 의해 다스려졌다. 이들은 제우스 신상 설치 이후 3년 반 만인 기원전 164년 12월에 성전을 정화하고 희생 제사를 부활시켰다. 이때 성전 반환을 기념해 하루 분량의 올리브기름으로 예루살렘 신전에 불을 켰는데 그 불이 8일 동안 계속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이를 하느님의 응답으로 여기고 ‘성전봉헌일’이라는 명절을 만들어 매년 이 기간에 가정에서 8일 밤 동안 촛불을 밝힌다. 이 축제는 ‘봉헌절’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를 ‘하누카’라 부른다.
유대인들이 성스러운 성물로 여기는 유대인 고유의 일곱 가지 촛대 메노라(menorah)가 바로 ‘하누카 촛대’다. 하누카는 봉헌(dedication)이라는 뜻이다. 황금의 메노라는 고대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의 예배의식 때 사용된 중요한 도구였다. 그 후로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유대 유물의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성전 반환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하누카는 12월 하순이어서 기독교인들은 하누카를 유대인들의 크리스마스라고 부른다. 유대인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명절 하누카 때는 부모들과 조부모들로부터 8일 동안 매일 선물을 하나씩 받는다.
하시딤이 양분되다
독립전쟁에 승리한 하스모니안 가문은 그만 과욕을 부려 기원전 152년에 요나단이 정권과 대제사장직을 독식하는 잘못을 범했다. 대제사장직은 대대로 그간 사두개파의 직분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독립군에 가담하던 경건자 그룹 하시딤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을 지지하는 경건자들이 바리새파를 만들었고, 그를 반대하는 경건자들이 에세네파를 만들었다.
바리새파는 사두개파를 보수주의로 간주했고 에세네파를 광신자로 보았으며 자신들은 진보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헬레니즘을 반대하며 종교는 진보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재해석하는 구전 율법을 존중했다. 이들은 유대교에 융통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것이 미래의 곤경에서 유대교를 살아남게 한다.
알렉산드라 여왕, 최초의 의무교육 실시
기원전 76년 얀네우스 왕이 죽자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녀는 지적이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의 집권기가 하스모니안 왕조의 최고 황금기로 꼽힌다. 통치 기간은 9년으로 비록 짧았지만 폭넓은 사회개혁이 단행되었다. 로마가 그리스와 다투던 시절만 해도, 로마는 유대인의 동맹이었다. 로마인은 약소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어느 정도 독립성을 인정했다.
하스모니안 왕가는 이두메인을 비롯해 자국 내 이방인은 물론 주변 국가의 많은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강제 개종시킨 바도 있었다. 따라서 1세기 로마제국 내에서 유대교를 표방하고 있는 7백만 명 중에 4백만 명이 가계로 보아 진정한 유대인이고 나머지는 개종한 이교도 또는 그들의 후손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렇듯 유다 왕국이 영토 확장 야심을 지닌 데다 이웃 여러 민족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로마 원로원이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유대 국가가 내부 분열을 일으키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이런 점을 눈치챈 살로메는 내부 단결을 도모했다. 당시 반대파로서 대중적 세력을 넓혀가던 바리새인들을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산헤드린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구전 율법도 나라의 법제 안으로 수용했다. 이를 통해 나라의 안정적 통일을 시도했다.
특히 여왕은 종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통일하려 했다. 그녀는 유대교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성경》을 읽고 율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가정예배를 이끄는 남자들이 먼저 글을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왕은 전국에 학교를 짓고 노소 구분 없이 남자들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교사 양성소도 설치했다.
이후 유대인 사회에서 최소한 가장들 사이에서는 문맹이 사라졌다. 거의 모두가 문맹이었던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 가던 뛰어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글을 읽고 쓰고 계산에 능한 유대인들은 어딜 가도 쉽게 자리 잡았다. 또한 그들 간의 서신 연락에 의한 정보 교류는 곧 상업과 무역으로 연결되어 유대인들이 부를 모으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 뒤 유대인들은 세 살이 되면 히브리어를 배운다. 율법을 암기하고 배우기 위해서다. 특히 열세 살 때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선 《모세오경》 중 한 편을 모두 암기해야 한다. 그리고 성인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이를 토대로 직접 준비한 강론을 해야 한다. 이러한 전통은 유대민족의 탁월한 지적능력으로 연결되었다.
로마의 속주가 된 유대
목차
유다 왕국, 로마의 속주로
유대인 종파들
로마제국 곳곳에 유대인 커뮤니티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사회적 상황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갈등 폭발
알렉산드리아의 폭동
유다 왕국, 로마의 속주로
로마가 그리스를 누르고 득세했다. 기원전 64년 로마는 시리아 왕국마저 멸망시켰다. 다음 차례는 유다 왕국이었다. 그 무렵 하스모니안 왕조는 로마에 대항하기보다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번영을 구가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원전 63년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에게 화평을 요청했다. 유대는 로마의 유다이아(Judaea) 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지중해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였던 페니키아, 그리스, 유대 왕국은 모두 차례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유대인 역사에 있어 ‘로마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는 바로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접수한 때부터 7세기 무슬림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때까지 약 7백 년간 계속되었다.
유대인 종파들
당시 유대에는 여러 종류의 당파가 있었다. 최고 정점에 친로마파인 헤롯당과 사두개파들이 있었다. 헤롯당은 헤롯 왕가의 지지들이며 사두개파들은 구전 율법을 배척하고 오직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받들어 대사제직을 맡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반면 민중에 대한 지도력을 갖고 있었던 계층은 바리새파들이었다. 당시 6천 명 정도였다. 이들은 《성경》과 구전 율법을 다 지켰다. 율법학자의 다수가 바리새파 출신이었다. 그들은 반로마적이었지만 무력사용에는 반대했다. 반면 유대인의 독립을 무력에 호소하는 열심당원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 속세를 버리고 황야와 사해 부근 쿰란에서 금욕적 공동체 생활을 하는 에세네파가 있었다. 이들은 사악한 제사장들 바람에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해 다윗 계통 ‘임금 메시아’와 사두개파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본래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독신생활을 했다. 예수가 올 것을 예언한 세례 요한도 에세네파였다.
로마제국 곳곳에 유대인 커뮤니티
헤롯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 수는 약 24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 무렵 예루살렘 일대의 인구는 거의 1백만 명에 달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도시였다. 이 무렵 지중해 일대와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로마제국 전체에서 조사된 총 유대인 수는 694만 4천 명이었다. 이는 로마제국 인구 7천만 명의 10퍼센트에 달하는 큰 민족이었다. 이 수치는 48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실시한 인구조사에 근거한 것이다.
로마제국 내 유대인들은 상업과 해상무역은 물론 베 짜기, 염색, 유리 제조, 금세공, 주물 및 제련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수공품 생산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밖에도 유대인들은 직업군인, 기사, 황제 측근의 고위관료, 원로원 의원, 변호사와 의사와 같은 상류 계층에도 진입했다.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이교도들 틈에 섞여 살면서도 그들과 융합하기를 거절했다. 이것은 반유대주의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사회적 상황
반면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삶은 힘든 편이었다. 밭농사, 수공업, 소매업으로 근근이 생활비를 벌었다. 해안과 갈릴리 호수에서는 고기잡이를 했고, 일부 평야에서 농업이 이루어졌으며 요르단 골짜기에서는 올리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키웠다. 수공업자들 곧 직조공, 피혁공, 재단사, 대장장이, 필사공, 도공들 역시 그리 형편이 낫지 않았는데, 특히 직업 자체가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례로 피혁공은 늘 동물 시체에서 가죽을 벗겨내는 일을 했기 때문에 부정한 자로 여겨졌고, 세리는 이교 지배자에게 충성하기에 무시당해야 했다. 이외에도 율법의 정결규정에 배치된다고 여겨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부정한 자들로 여겨졌다.
《성경》에서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가난한 사람들이 이런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종교적 부정함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가난과 구걸생활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돈 벌 기회가 있다면 어디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유대인 가정은 대개 창문이 없는 단칸방에서 살았다. 가족 모두가 한 방에서 잠을 잤고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율법을 가르쳐야 했다. 혼인은 하느님의 계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독신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자는 대개 스무 살 전후에 결혼을 했고, 여자는 열세 살을 넘기지 않았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아버지 사이에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일종의 중매였다.
당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여자는 증인으로서 법정에 나설 수 없었고, 예배에조차 참석할 수 없었으며, 성전에서도 여자들이 갈 수 있는 영역이 구분되어 있었다. 회당 예배에서는 방청만이 가능했고, 율법의 금지사항을 준수해야 했지만 율법을 공부할 의무는 없었다.
노예들 역시 율법의 금령들만을 지킬 뿐, 율법을 배우고 지킬 의무는 없었다. 유대인 노예들은 7년간 노예생활을 한 후 마지막 해에는 풀려났다. 이렇게 유대인 노예들은 율법에 의해 보호되었기 때문에, 이방인 노예들은 율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유대인이 이방인의 종이 되었을 경우에는 동족들이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를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노예들은 당시 율법과는 거리가 있는 자들로 여겨졌다. 예수가 주위에 모여든 여자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않은 것은 당시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상당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갈등 폭발
로마제국은 기원전 37년부터 팔레스타인 자치 통치를 허락했다. 이때 로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된 이가 바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영아 대 박해를 저지른 헤롯이다. 헤롯 왕은 잔인한 폭군이었다. 즉위하자 피의 숙청을 단행해 최고 대법원격인 산헤드린의 사제들 45명을 도륙했다. 이밖에도 자신에게 굴하지 않는 유대인 율법학자들은 모두 죽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인과 친자식들도 죽였다. 혈육을 죽였을 정도니 가히 그 잔악성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인간이었다.
헤롯이 죽고 얼마 지난 뒤 팔레스타인 지역은 자치 통치에서 로마제국의 직접 통치로 바뀌었다. 서기 6년에 로마는 헤롯 왕의 아들 아켈라우스를 파직시키고, 이스라엘 땅을 ‘유대(Judaea)’라는 이름의 속주로 삼았다.
66~73년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대항쟁 직전 유대인 인구는 대략 8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로마제국 통치 밖에 있었던 파르티아 왕국(바빌론)에 1백만 명가량이 살았으며, 나머지 7백만 명은 로마제국 내의 유대인이었다. 로마 황제조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민족이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내에 주둔했던 로마 군단은 네 개 군단이었다. 한 군단이 6천 명이었으니 약 2만 4천 명인 셈이다. 외세에 의한 직접 통치는 유대민족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자연히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나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 무렵 팔레스타인 밖의 상업도시에서도 경쟁 관계인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의 갈등이 커져 갔다. 복합인종으로 구성된 그리스인에게 유대인은 별종으로 보였다. 자신들을 남들로부터 유난히 구별하는 유대인은 원래 사람을 싫어하는 민족으로 보였다. 그리스인은 그들 문명이 지배하는 세계를 보편적이라는 뜻의 ‘오이쿠메네(oecumene)’라고 불렀다. 보편 그 저편에 펼쳐져 있는 ‘카오스’ 곧 혼돈의 세계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보편적 세계는 많은 인종과 많은 국가로 구성되는 세계 시민사회로 인식하고, 이를 거부하는 자는 인류 공동의 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스 사회는 자신의 문화를 표준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리스 신들이 ‘부정하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절한다는 사실은 문화적 모욕이었다. 그로부터 최초의 반유대주의가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몰래 인신 공양 제사를 드린다는 루머도 나돌았다. 그리스인들은 소문만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직접적으로 반유대주의를 부추기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폭동
당시 이집트 최대의 상업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많이 살았는데 상업적 경쟁 관계인 두 민족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기 38년 스스로를 신이라고 선언한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유대인들은 황제에게 제물을 바치며 쾌유를 빌었지만 그를 신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스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유대인들을 모함할 좋은 기회였다. 다신교를 믿는 그리스인들은 수많은 신 가운데 황제라는 신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곧바로 유대인들이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모독했다고 고발했다.
그 무렵 알렉산드리아는 인구 1백만 명의 대도시였는데 40만 명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들이 해상무역과 상권을 장악하자 이것이 기존 세력인 그리스인들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게다가 종교적 차이도 심했다. 다른 민족에게는 유대인이 점점 이해하기 힘들고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이들은 아무도 볼 수 없는 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보기에는 제우스 신 등 보이는 신도 믿기 어려운 판국에 보이지 않는 신을 이해하기는 더 힘들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는데 이제는 다른 민족들이 유대인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또한 문화적 차이도 컸다. 그리스인들은 ‘세계는 하나다’라는 세계시민주의를 지향하는 헬레니즘 문화인 반면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에 근거한 차별성을 갖는 문화이다 보니 곳곳에서 부딪혔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제 반유대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수 세력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유대민족은 미움, 질시, 핍박, 박해 더 나아가 학살의 위험에 처해졌다.
칼리굴라 황제를 핑계 삼아 그리스인들은 반 유대 폭동을 일으켰다. 해상무역 경쟁자인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항구에 정박해 있던 유대인의 배를 모조리 불태웠다. 유대인 거주 지역의 집들도 방화와 약탈로 쑥밭이 되었다. 이 폭동으로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세운 도서관에 화재가 발생해 약 49만 질의 귀중한 자료들이 불타 버렸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치안을 맡고 있었던 로마 군인들은 그리스인들 편에 서서 폭동을 방관했다. 그 뒤에도 계속되는 유대인과 그리스 · 로마인 간의 갈등은 반란의 도화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