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11장 1-6절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도다
오늘 본문에 대해서는 다른 본문을 설교할 때 인용하면서 잠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세례 요한조차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가 맞는지 의심을 가진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해는 오늘날 보편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몇몇 신학교 교수님들의 책을 봐도, 그리고 몇몇 설교집을 읽어 봐도 동일합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이 세례 요한의 의구심에서 비롯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했지만 옥에 갇혀 있는 지금은,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듣고서는 그렇게 생각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례 요한의 의심으로 보는 해석이 오늘날만의 해석인가 할 때는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본문에 대하여 세 가지 해석을 말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세례 요한의 의심으로 보는 견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세례 요한조차 예수님에 대하여 의심했다는 해석은 오늘날만의 해석이라기보다는 정확하게 언제부터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 본문에 대하여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그리스도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그의 제자들은 분명한 확신 가운데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직접 보내어 이런 질문을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이 칼빈 혼자만의 해석이냐?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정 목사님에 의하면 칼빈만이 아니라 개혁자들 역시, 심지어는 일찍이 어거스틴 또한 동일한 해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 되고 있다고 합니다. 매튜 헨리 역시 세 가지 해석 가운데 한 가지로서 이런 입장의 내용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사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을 생각해 볼 때 세례 요한조차 의심할 수 있다는 해석은 그런 인간의 불완전함,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성경 해석이 인간을 높이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만을 드러내고자 하는 정신이라고 할 때는 세례 요한과 관련하여 그도 의심할 수 있다는 해석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반길 만한 그런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칼빈, 그리고 개혁자들의 해석이 오늘날 보편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고 할 때 “과연 본문을 세례 요한의 의심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는가?”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몇 차례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칼빈의 경우 기독교강요 초판 헌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 즉 성경은 믿음의 분수대로 해석을 해야 하는데, 믿음의 분수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뭐냐?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여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화로워하는 것, 이것을 믿음의 분수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석을 보면 자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리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로 계심을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오늘 본문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의 의심이 아니라, 세례 요한은 변함이 없지만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그렇게 질문하도록 했다고 한다면 “과연 오늘 본문에 대한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이 맞는가?”란 생각을 하게 되더란 것입니다.
무엇보다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해석과 칼빈의 해석이 세례 요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 분명 상반된 해석으로 있고, 또한 성경 해석이 다양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런 해석도 가능하고 저런 해석도 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고 할 때 한쪽 해석을 따른다면 다른 한쪽 해석은 분명 정당한 해석으로서 자리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본문에 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내용은 본문을 확인하면서 다시금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오늘 본문 1절부터 순차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여기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셨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살폈던 마태복음 10장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9장 말미에 추수할 것은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적어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10장에서는 그 일을 위하여 열두 명의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이나 사도행전 1장에 의하면 장차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세우셨지만,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이방인의 길도 아니요, 사마리아인의 고을도 아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냄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바로 천국 복음 전파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역시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일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해서 여러 동네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에게 명하는 자로 있다고 해서 그들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내시고 예수님 자신은 한가롭게 지내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천국 복음을 위하여 선한 열심을 가지셨습니다.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이리 저리 움직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종이라 일컬어지는 소위 목회자들은 그런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을 위하여 마땅히 선한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마태복음 10장 24절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어떻게 주의 열심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러나 주께서 주의 종으로 부르시고 세우셨다면,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부르시고 세우신 것이라면 주의 종으로서 마땅히 복음을 위한 선한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실 때 명령하신 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열심에 앞서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의 종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무조건 열심만 있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열심을 낼 수 있지만,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른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마7:22-23). 로마서 10장 2절에서는 어떤 말씀도 있느냐?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때 그는 바로 그 열심으로 예수를 박해하며 그의 사람들을 박해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실 때 명령하신 바가 있었던 것처럼, 열심을 낼지라도 명령 안에서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이 주의 종들이 받아야 할 교훈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여러분을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역시 주님의 종이고, 주님의 종이라면 당연히 주의 명령 아래서 주를 향한 열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매여 있어야 할 것은 말씀 안에서만 매여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벗어난 열심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열심과 같습니다. 자기 소견으로는 주를 향한 열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오히려 주를 대적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마태복음 10장 1절에서 분명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 그리고 그들을 보내실 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면서 보내시는 것으로 말씀하시지만,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권능을 행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마태복음 11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는 것이 초점으로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 내용은 이미 마태복음 9장 마지막 설교 본문에서 어느 정도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많은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리스도께서 초점을 두고 계신 것은 분명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그 사역에 있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사실 이후 본문으로도 연결이 되는데, 2절에 보시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안에는 어떤 기적과 이적의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을 때 그 이유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본다면(요6:26), 그리고 좀 있다가 보겠지만 같은 본문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 7장의 문맥을 통해 본다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들었다는 것은 복음 사역보다는 치유 사역에 대한 말을 더 많이 듣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만약 2절 이하의 말씀을 세례 요한의 의심으로 이해한다고 한다면, 제자들을 보낸 것은 분명 세례 요한 자신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이 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 때문에 의심한 것이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 요한은 분명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왔고 그렇게 일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자요, 주의 길을 준비하며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자로 있었습니다(마3:3). 심지어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요1:20)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요1:29-30 참조). 그렇다면 요한의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실 모든 핵심은 분명 천국 복음 전파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더란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것이 세례 요한의 외침이었고(마3:1),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와 동일한 내용을 외쳤습니다(마4:1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만 전파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치유 사역까지 곁들여 하고 계시며,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에(요6:26)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그 분이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세례 요한의 의심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같은 본문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7장에서는 분명 앞선 내용으로서 치유 사역을 말씀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알리는 내용으로 연결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 역시 치유 사역 자체가 걸림돌이 되는 것처럼 있더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절은 이 모든 문제에 있어 분명하게 정리해 두고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 마태복음 10장에서 오늘 본문 1절까지를 연결해서 이해하는 면이 있는데, 마태복음 10장 1절에서 열두 제자를 불러 치유 사역과 관련된 권능을 주신다고 해서 그것이 핵심이 아니라, 그것은 오늘 본문 1절, 즉 가르치며 전도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주신 것으로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치유 사역이 아니라 천국 복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열두 제자를 세워 보내신 것이고, 예수님 역시 그들을 보내시고 난 뒤 동일하게 천국 복음을 위하여 떠나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2절과 3절로 오시면 서두에 말씀드린 세례 요한과 관련된 내용이 나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은 이전 본문을 통해서는 소개 하고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 14장을 통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즉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 한 것에 대하여 세례 요한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하자, 헤롯은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던 겁니다(마14:3-4). 오늘 본문은 이처럼 요한이 옥에 갇혀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해 주고 있으며, 옥에 갇혀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18절에 보면 어떻게 해서 그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게 되었는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언급하는데, 거기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8절 이전에 치유 사역이 소개가 되고 있으며, 특별히 16절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그리고 17절입니다.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그러니까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즉 치유 사역이 중심이 되어 알렸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사람들의 반응이 예수를 큰 선지자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태복음 9장의 내용을 살핀 바 있지만 마태복음 9장에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만이 아니라, 거기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가세하여 금식 문제로 시비를 걸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누가복음 상에는 어디 있느냐 하면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하여 세례 요한의 제자라 할지라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마9:14-17, 눅5:33-39). 그리고 누가복음 7장으로 와서 그들이 보고 듣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의 스승인 세례 요한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천국 복음보다는 무리들이 주목하고 있는 치유 사역이더란 것입니다. 심지어 무리들로부터 어떤 말을 듣고 있느냐 하면 ‘큰 선지자’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더란 것입니다(눅7:16).
여러분,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 그때 제자들이 답변한 것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금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그러니까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말한 것은 제대로 된 답변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고, 베드로를 대표로 한 사도들의 답변이 뭐냐 하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이런 이해 속에서 볼 때 누가복음 7장 16절에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한 것, 즉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놀라운 고백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에 대하여 여전히 그리스도로서 인식하고 있지 못한 답변일 수밖에는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움이 단지 공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경외함으로 인한 두려움이고,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했는가,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맞는가에 대해서는 올바른 인식 가운데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의 이런 반응에 대하여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 자신과 논쟁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들의 스승인 세례 요한과는 다르다고 인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데 치유 사역이 중심인 듯 보이고 또 그것으로 인해 ‘큰 선지자’라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조차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지 못하고 “과연 우리 선생이신 세례 요한이 증거 한 그 분이 맞는가?” 의심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의심이라기보다는 그의 제자들의 의심이요, 분명한 확신 가운데 있지 못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자신을 위하여 제자들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강한 확신과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고 상상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거룩한 그리스도의 선구자는 자기가 갈 길의 마지막이 멀지 않음을 알고 자신의 그 모든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에 대한 자기 제자들의 확고하지 못한 신앙의 약점을 시정하기 위한, 마지막 방안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보낼 때 그의 의도는 그들의 우둔함을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매튜 풀 주석도 동일한 해석 가운데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사명을 띠고 그보다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였고, 그리스도께 세례를 베푼 자였으며, 그 때에 성령께서 그리스도 위에 임하는 것을 보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는 음성을 들은 자였고, 자기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준 자였는데(요1:29-31),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의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의심한 것이 결코 아니었고, 자신의 제자들 중 일부가 시기심으로 인해서(요3:26), 또는 메시야에 관한 유대인들의 통상적인 오해에 이끌려서, 그리스도보다 세례 요한에게 훨씬 더 호의적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마음이 움직여 동요하는 모습을 보자,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역사들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고서 확인하게 하기 위하여, 죽기 조금 전에 그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물어보게 하였던 것이다.
매튜 풀 주석을 통해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지만 세례 요한에게 주신 은혜의 내용을 생각해 볼 때도 칼빈의 해석이 정당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물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인물만 생각해 보더라도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런 그도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세례 요한이라 할지라도 연약함이나 불완전함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사용하고자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준비하러 온 자입니다. 무엇보다 요한복음 2장에서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세례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를 쫓는 자가 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 제자까지 다 빼앗아 간다고 해서 배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도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베푸실 때 사람들이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가는 것에 대하여 요한의 제자가 말하자,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3:28-30)
심지어 오늘 본문 이후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요한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9절에 보시면 요한에 대하여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서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고, 또한 그의 제자들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앞서 그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질문 전이나 질문 이후나 동일한 평가를 받고 있는 자, 그가 세례 요한이라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의심보다는 그의 제자들의 의심에 대하여 좀 더 분명한 확신을 주기 위하여 그리스도께로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에 근거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그의 주석에서 기록하기도 합니다. “본 성구는 교회의 목회자들을 향해 그들의 의무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누구를 제자로 삼거나 양성할 의도를 갖지 말 것이며 그를 유일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여야 한다.”
결국 세례 요한의 사역이란 이런 점에서 철저히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요, 그분만을 흥하게 하는 자로서 사역에 임했다 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이나 감옥에 들어가서나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고 그분만을 소개하고 그분에게로 가게하며 바라보게 하는 그런 자로 사역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사역이 그러하다면 오늘날 모든 목회자들 역시 동일한 정신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드러나고 우리가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드러나야 하고 그리스도만이 빛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점점 쇠할지라도 그분만은 흥해야 하는 그런 사역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른 것보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주의 명령 아래 있어야 할 자들이 주의 명령과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모든 것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할 수 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도 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할 수도 있지만, 주께서 기뻐하실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주님을 드러낸다는 것, 그분만을 흥하게 한다는 것은 ‘오직 성경’의 정신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성경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성경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전 성경’의 정신과 맞물려서 ‘오직 성경’의 정신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치유 사역이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어졌던 이유 그리고 그것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셨던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복음 사역을 위하여 한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 때문에, 그리고 성경 기록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에 불과하지만 성경에 있기 때문에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사고입니다. 성경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직 성경’의 정신이 아니라, ‘전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오직 성경’, 바로 그 정신으로 주의 것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정신으로서 그리스도를 드러낸다고 할 때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 헌사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고, 오직 그분만을 영광스럽게 부각시키는 그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자신은 쇠할지라도 그분만 흥하면 족하다는 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 봤자 무엇만 드러나겠습니까? 죄밖에는 드러나는 것이 없습니다. 혹은 그 죄를 가리는 외식밖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런 우리 자신은 점점 쇠해져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만 흥하면 족하다고 여기는 것! 즉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보낸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보낸 것이 그분에 대하여 의심해도 좋다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확신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분만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목회자들 역시 그들의 모든 사역의 초점이 이런 방향이어야 합니다. 당연히 성도들의 방향도 이런 방향이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시면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질문하게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것이 5절입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런데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 말을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는 것으로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칼빈의 해석을 따른다고 할 때 어려운 부분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의심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칼빈의 주석에서는 “요한은 말하자면 변장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실제로 들은 말을 보고하도록 말씀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시원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보편적인 해석을 따르기보다는 칼빈의 해석을 따라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개인적으로 인간의 불완전함,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사용하신다고 할 때, 그리고 그에게 주신 사명을 생각해 볼 때 오늘날 해석되고 있는 것보다는 칼빈의 해석이 더 합당한 해석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하여 성경이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자요, 주님조차도 오늘 본문 이후에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 자로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런 성경의 평가에 정당한 평가가 칼빈의 해석 가운데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칼빈의 해석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어쨌든 5절에서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말씀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행하고 계신 사역이기는 하지만 이사야서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사35:5-6).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으로 가시면 오늘 본문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누가복음 7장 21절입니다.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이 질문하라고 한 질문을 했을 때 곧바로 오늘 본문 5절의 답변이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로 치유 사역을 눈으로 보게 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이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쉽게 말하면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들려주셨던 겁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몰랐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예수에 대한 소문이 퍼졌고,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오늘 본문에 앞서 치유 사역을 소개하면서 그 일로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그 모든 일에 대하여 고하였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굳이 그들이 알고 있는 바를 보여 주시며 말씀하시는가? 어쩌면 치유 사역이 다가 아니라 맨 마지막에 이사야서의 또 다른 말씀을 인용하는 거기가 초점이라고 말씀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시 오늘 5절을 보시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사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 자체만 해도 분명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병자들에게 구조(救助)와 치유를 주시기 위해 극히 관대하시고 친절하시겠다고 약속”(칼빈)하신 것이 이사야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말씀은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병과 불행으로부터의 영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있기 때문에 전혀 오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좀 더 분명한 말씀을 더하시는데, 그것이 이사야 61장 1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여러분, 가난한 자란 단지 돈 없고 빽 없는 자를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입니다(cf.눅6:20에서는 ‘가난한 자’로서만 표현). 즉 물질적인 측면에서 가난이 아니라 그 영혼이 가난한 자를 의미합니다. 구원과 관련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 영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애통할 수밖에 없는 자, 바로 그들에게 복된 소식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영혼들을 치료하는 영적 의사로서 오셨음을 외적 상징들로써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취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깨달았는지, 아니면 깨닫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치유 사역만 하더라도 구약의 성취이기 때문에, 심지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곧바로 드러내시며 말씀하시기 때문에 결코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6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사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많은 부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 실족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금식 하는 문제로 실족하기도 하였고, 기적과 이적을 베푸는 문제로서도 실족하기도 했습니다. 좀 더 앞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로 있다가 마치 세례 요한을 배신하고 예수께로 가는 제자들이 있음에 대해서도 실족하기도 했습니다. 세례를 베푸는 일에 있어서도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 아니라 예수께로 가는 것에 대하여 실족하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하여 큰 존경을 나타내는 자라면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그는 점점 쇠해져 가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부각이 되는 그런 것에 의해서도 실족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분명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그 그리스도 때문에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기도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벧전2:8). 예를 들어(이하 칼뱅 작품 선집 6권, 스캔들론, p.489 참조),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교리가 인간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기 때문에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요일5:20)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시고(요1:14, 롬8:3)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빌2:7), 그의 유죄 판결로 의를, 그가 저주 받으심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갈3:13-14, 히5:8-9), 나아가 우리가 그의 죽음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롬5:18, 고후5:14-15, 살전5:10), 이 모두가 인간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게 때문에 지적인 사람일수록 더 빨리 복음을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마16:24)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롬6:6) 세상을 경멸하고(롬12:2, 약1:27) 십자가를 끌어안을 것(마10:38, 16:24)을 요구하는 엄격함 때문에 크게 실족하기도 합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자유함이 있지만, 그 자유함이란 방종의 성격이 아니란 점에서 율법의 제3사용이 있는 겁니다.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엄격함이 사람으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혹은 교리적인 문제, 다시 말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론과 같은 교리 등으로 실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있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받는 자,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스도 때문에 실족한다고는 하지만 실상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불신앙 때문이라는 것도 인식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는 그들 자신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달리 말하면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장애물로 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장애물을 넘어 주께로만 가도록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을 주시도록 구해야 할 것이고, 그런 진리의 지식이 우리의 삶 가운데 뿌리 내리도록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을 더욱 돌아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에 가톨릭의 교리로서 마리아가 있고, 성인들이 있고, 공로주의가 있다고 한다면 진리로서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께로 가는 합당한 것으로만 우리의 것을 삼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만 참된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