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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81)
*취향정 수안댁의 폭탄선언
곤혹스럽기는 김삿갓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분위기를 눙치기 위해 너털웃음을 웃어 보였다.
"아 사람들아! 술은 안 마시고 무슨 장난이 이렇게도 심하단 말인가?"
그러자 조조가 다시 손을 내저으며,
"자네는 끼어들 계제가 아니니까, 잠자코 듣기만 하게!
자, 수안댁은 우리들의 질문에 거짓 없이 대답을 하겠노라고 약속해 줄 수 있겠지?"
수안댁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좋아요. 약속할께요."
"그럼 됐네! 내가 이제부터 중대한 일을 물어 볼 테니, 자네는 똑똑히 들었다가 분명히 대답해주게!
자네는 우리들의 죽마고우인 김삿갓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사실이겠지?"
조조가 너무도 진지하게 물어보는 바람에, 방안에는 일순간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뜻밖의 질문을 받은 수안댁은 얼굴이 금새 붉어졌다.
"어마!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공개적으로 물어보시면 어떡해요."
그러자 자리에 함께한 김삿갓의 친구들이 일제히 공박을 퍼붓는다.
"이 사람아! 약속을 해놓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여러 말 말고, 어서 대답이나 똑똑히 하게!"
수안댁은 한동안 몹시 난처한 기색을 보이더니, 문득 김삿갓에게 이렇게 묻는다.
"삿갓어른! 제가 솔직히 대답해도 괜찮을까요?"
그 바람에 좌중은 "와아!"하고 환호성을 올리며 제각기 한마디씩 놀린다.
"으와! 여필종부라고 하더니, 벌써부터 서방님 허락이 있어야만 대답하겠다는 말인가?"
"서방님 비위를 거슬렸다가는 시집을 못 갈 판이니, 그럴수 밖에 없지 않겠나?
여보게 삿갓! 어서 솔직히 대답하라고 허락을하게!"
그러자 김삿갓이 좌중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어색한 어조로 말을 하는데,
"그거야 수안댁이 마음대로 대답할 일이지, 구태여 나까지 걸고 넘어갈 건 없지 않은가!"
좌중은 또다시 환성을 올린다.
"낭군님 허락이 내렸으니, 수안댁은 어서 솔직히 말해 보라구!"
수안댁은 대답이 난처한지 한동안 고개를 수그리고 침묵에 잠겼다가,
어떤 결심이 섯는지 고개를 힘있게 들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술장사 15년 동안, 우리 집 술맛이 좋다는 칭찬을 들어 본 일이 한번도 없었어요.
그래서 저희 집 술맛을 제대로 알아 주는 진짜 술꾼이 한 분도 없는 것이 얼마나 섭섭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지난번에 삿갓 어른은 우리 집에 처음으로 오셔서 술맛이 좋다고 대번에 칭찬을 해 주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제야 진짜 술꾼을 만나 뵙게 되었구나 하고, 여간 기쁘지 않았어요."
그 대답을 듣고, 좌중에는 또다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했으면 더 물어 볼 것도 없네. 두 사람 결혼은 이미 결정된 사실과 다름 없으니까, 이제는 축배를 들기로 하세 ! "
일동은 제각기 술잔을 높이 들며,
"자! 우리들의 죽마고우인 김삿갓과 취향정 수안댁과의 백년가약을 위해 다같이 축배를 올리세!"
이리하여 두 사람의 결혼이 진짜로 성립되기나 한 것처럼 축배가 빈번히 오가는데, 수안댁은 술을 몇 잔 받아 마시고 나더니 문득 다음과 같은 폭탄 선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제가 삿갓 어른을 좋아하는 것만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저는 누구하고도 결혼만은 할수 없는 몸이에요."
수안댁의 폭탄 선언에 좌중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놀라 묻는다.
"이 사람아! 다 지어 놓은 밥에 재를 뿌려도 분수가 있지, 이제와서 결혼을 못 한다는 것은 무슨소린가?"
그러자 수안댁은 한숨을 쉬며 대답한다.
"저같이 못난 여자를 위해 이처럼 애써 주시는 여러분의 성의는 여간 고맙지만요, 또 저도 삿갓 어른이 첫눈에 좋아진 것도 사실이구요. 그러나 저는 누구하고도 결혼할 수 없는 팔자를 타고났어요."
"결혼을 할수 없는 팔자를 타고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
안 할 말로, 수안댁은 결혼도 했었지 않은가?" 수안댁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그건 다 옛날 얘기죠. 지금은 안되요."
"그렇다면 혹시, 달리 둔 애인이라도 있는것 아닌가?"
"애인은 무슨 애인이에요."
"애인도 없으면서 결혼도 못하겠다면, 아닌 말로 수안댁 보물단지가 병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 "
누군가 해괴한 말을 물어 보는 바람에, 좌중은 일순간 포복절도를 하였다.
그러나 수안댁은 웃기는 커녕, 땅이 꺼질 듯한 한숨조차 쉬면서 넋이 나간 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나, 술 한 잔 주세요. 술이나 한 잔 마시고 나서 말씀 드릴께요."
그리고 술 한 잔을 단순에 주욱 들이킨 수안댁은 탄식하듯이 이렇게 말을한다.
"내가 병신은 왜 병신이겠어요. 병신이라면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어떻게 계속해 왔겠어요."
"병신도 아니라면서 어째서 결혼을 못 하겠다는거지 ? "
"내 팔자가 결혼을 못 하도록 되어 있는 걸 어떡해요. 무슨 년이 그런 팔자를 타고났는지, 생각하면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렇게 탄식하는 수안댁의 음성은 떨리기까지 하였다.
김삿갓은 애당초 누구하고든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러나 수안댁이 무엇 때문에 결혼을 못하겠다는 것인지, 그 점 만은 궁금해 견딜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안댁에게 술을 권하며, 이렇게 물어 보았다.
"여보게 수안댁! 내가 물어 보기엔 참 쑥스럽네만, 자네는 무엇 때문에 결혼을 마다하는가?
죽은 남편을 위해 수절을 하겠다는 말인가?"
"수절이오? 나같이 천한 년이 남편 죽은 후에 3년 동안이나 상을 입어 주었으면 됐지. 그 이상 무슨 수절이 필요하겠어요."
"그렇다면 어째서 재혼을 못 할 팔자라는 말인가?"
여자들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수줍움을 타는지, 김삿갓이 정색을 하고 물어보자, 얼굴만 붉힐 뿐, 선뜻 대답을 하지 못 한다.
좌중은 그 광경을 보자, 중구난방으로 수안댁을 놀려대기 시작하였다.
"자네가 무슨 숫처녀라고 부끄러움을 타는가!"–
"모르는 소리 ! 여자는 아무리 늙어도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부끄럼을 타는 법 이라네! "
"수줍어 하는 것은 자유지만, 삿갓에게만은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지 않으면, 삿갓이 섭섭하게 여길 게 아닌가 ? "
수안댁은 그런 놀림에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김삿갓의 얼굴을 그윽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말을 하였다.
82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82)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장난
"삿갓 어른! 죄송해요. 제가 왜 재혼을 할 수 없는 팔자인지, 솔직하게 말씀드릴께요."
그리고 수안댁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술주정을 하듯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공개 하였다.
수안댁은 결혼한 지 5년 만에 남편이 죽자, 삼년상을 깨끗이 치른 뒤에, 재혼을 하려고 망부(亡夫)의 혼백을 달래는 굿을 성대하게 해주었다.
그때, 그 굿을 주관한 무당은 70대의 할머니 무당이었는데, 죽은 남편의 혼백을 불러 놓고 한바탕 칼춤을 추어가며 넋두리를 한참 늘어 놓은 후, 문득 수안댁에게 다음과 같은 몸서리 치는 선언을 하는 것이었다.
"네 남편은 독주를 마시고 죽은 게 아니라, 바로 네가 청상살을 타고났기 때문에 죽은 것이로다.
그러므로 너는 재혼을 하더라도, 네가 타고난 청상살 때문에 서방을 또 잡아먹게 되리라.
만약 서방이 죽지 않으면, 서방대신 네가 죽게 될 것이니, 너는 그리 알고 행여 재혼은 하지 말거라!"
실로 소름이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무당의 넋두리였다.
수안댁은 그 말을 듣고난 이후, 재혼은 깨끗이 단념하고, 숫제 술장사로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계집이에요. 그러니 내가 아무리 삿갓 어른을 좋아하기로, 이런 팔자를 타고난 년이 어떻게 삿갓 어른과 결혼을 할 수 있겠어요."
수안댁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 같은 신세 타령을 늘어놓고, 한숨을 쉬면서 술을마신다.
좌중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수안댁의 말을 듣고나서는 어느 누구도, 수안댁에게 김삿갓과의 재혼을 권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수안댁의 신세가 무척이나 측은하게 여겨졌다. 본인의 신세도 신세지만, 그런 신세를 위로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격려와 위로의 말을 하기는 커녕, 이러저러하면 서방이나 네가 죽게될 것이라는 악담에 얽힌 말을 쏟아낸 무당이 몹시 괘씸하게 여겨졌다.
(점이나 굿 같은 것은 혹세무민을 일 삼는 자들의 헛소리가 아니던가? 그런 자들이 무엇을 안다고 허튼 수작으로 남의 일생을 좌지우지 한단 말인가!)
김삿갓은 그런 생각이 들어,
"여보게 수안댁! 자네는 사람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가?" 하고 수안댁을 정면으로 나무라 주었다.
좌중은 물론, 수안댁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김삿갓은 다시 입을 열며 말을한다.
"무당의 넋두리라는 것은 순전히 허툰수작에 불과한 것이네. 그런 것을 철썩같이 믿고, 재혼을 안 한다니, 그런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는가."
그러자 수안댁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흔든다.
"재혼을 했다가 남편이 또 죽으면 어떡해요. 팔자 도망은 누구도 할수 없다고 하잖아요."
"쓸데없는 소리! 팔자라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 내는 것이지. 누가 갖다 주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굳센 신념을 가지고, 사람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며 살아야 하는 것 이라구."
김삿갓이 이같이 말을 마치자, 친구들도 덩달아 박수를 치면서,
"허긴 그래! 귀신이라는 것은 위해 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삿갓처럼 애초부터 무시해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야.
그러니까 결혼 문제는 본인들 끼리 잘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고, 이제부터 우리들은 술이나 먹자구!"
이리하여 모두들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초저녁부터 시작한 술은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말끔한 결론이 나지 않은 김삿갓과 수안댁의 결혼문제가 마음에 걸렸던지, 친구들의 빈 술잔은 김삿갓과 수안댁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지간히 술을 하는 김삿갓도, 수안댁도 그자리에서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김삿갓은 목이 말라 눈을 떠보니,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 머리맡에는 자리끼가 있어, 한 대접을 몽땅 마셔 버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자기 자신은 이불 속에서 자고 있었는데, 수안댁은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옆에서 허리를 꼬부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보게! 친구들은 모두들 어딜 가고 우리 두 사람만 남아 있지?"
김삿갓은 수안댁의 어깨를 흔들어 깨워 보았다.
그러나 수안댁은 인사불성으로 잠만 자고 있었다.
(으흠 ...친구들이 계획적으로 우리 두 사람만 남겨 두고 도망을 가버렸구나!)
그런 사실을 깨닫고 나자, 별안간 야릇한 흥분이 느껴져왔다.
그러면서 옆에서 자고 있는 수안댁의 풍만한 육체를 아래 위로 훝어 보았다.
(이야! ......)
멀리서만 건너다 보던 여인을 눈 앞에 가까이 두고 보니, 황홀할 지경이었다.
"여보게! 자는가?"
김삿갓은 이번에는 수안댁의 젖가슴에 손을 대고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수안댁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던지, 완전히 인사불성이었다.
"여보게! 추운 모양이니, 이불 속에 들어와 자라구."
김삿갓은 그렇게 말하며 여인의 풍만한 몸을 이불 속으로 끌어 들였다.
수안댁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자, 여인의 향기로운 냄새가 물씬 코를 찔러 못 견딜 지경이었다.
김삿갓은 수안댁을 가슴에 품어 안은 채 잠을 다시 청해 보았다.
그러나 너무도 오랫동안 금욕을 한 탓인지, 불길처럼 솟구쳐 오르는 욕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안된다. 나는 누구하고도 결혼 할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
책임을 질 수도 없으면서 남의 애틋한 정조를 유린 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눈알이 뒤집히도록 맹렬히 타오르는 욕정은 김삿갓의 절제력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바로 옆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는 여인의 숨결이 끊임없이 얼굴에 불어와, 애써 누르고 있는 욕정을 자꾸만 북돋아 주었다.
(이 여인과 관계하는 남자는 모두가 죽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젯밤 수안댁이 취중에 들려 주었던 말이 번개같이 머릿속에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지금 이 순간에 와서는 그런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김삿갓은 마침내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저고리를 벗기고, 치마도 벗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인의 풍만한 유방을 사정없이 주물러대었다.
여인은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지,
"어마! 누구에요?"
호들갑스럽게 놀라면서 용수철 퉁기 듯 벌떡 일어나 앉는다.
"나야, 나! 놀라지 말고 이리와 누워요!"
김삿갓도 일어나 앉으며 달래듯 속삭이며 여인을 품속으로 끌어들였다.
수안댁은 상대방이 김삿갓임을 알자 마음이 놓이는지, "친구분들은 모두 어디 갔어요? " 하고 묻는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해, 모두들 도망을 가버린 모양이야. 그런 줄 알고 함께 누웁시다."
이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힘차게 끌어당기니, 여인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슬며시 품에 와 안긴다.
그리하여 사지백태를 녹여 버릴 듯한 뜨거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여인의 입술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장장 15년 동안이나 독수공방을 해오다가 처음 만나는 남자이다 보니, 전신이 불덩이처럼 타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바탕 뜨거운 포옹과 애무가 계속되다가, 이윽고 사나이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여인의 몸을 덮어 누르려고 하였다.
그러자 지금까지 순순히 애무를 받아 들이던 여인이 별안간 사나이의 몸을 떠밀며 말한다.
"이것만은 안되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은 안되요!" 하며 부르짖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제 와서, 여자편에서 거부한다고 곱게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김삿갓은 체면 불고하고 우격다짐으로 여인의 다리틈을 파고 들었다.
그러나 사내가 모질게 덤벼들수록, 여인은 끈덕지게 거부하며 부르짖는다.
"삿갓 어른을 위해 이것 만은 안되요. 나는 청상살을 타고난 여자라서, 나를 가까이 하셨다가는 큰일나세요."
무당의 예언대로 여인은 자신과 가까이 하는, 김삿갓이 죽게 될까 보아, 몸을 허락하지 못하겠다는 소리다.
"무당의 넋두리는 미신에 불과한 것이래두, 그러니 조금도 겁낼 것 없으니 내 말 들어요."
여인은 온갖 힘을 다하여 저항해 보았지만, 힘 센 사나이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미 그 사내는 욕정이 화신이 되어있는 상태가 아니던가.
힘에 부친 여인은 어쩔 수 없었던지 온 몸에 힘이 풀리며 몸을 허락하면서 탄식하듯 뇌까린다.
"아아, 이 일을 어떡하면 좋아요...."
여인은 몸을 허락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로 인해 김삿갓에게 흉악한 재앙이 닥쳐 올 것만 같아, 무척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막상 교접이 시작되자, 여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듯, 사나이 몸을 뜨겁게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든 것은 완벽했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마시듯, 김삿갓의 모든 것을 온 몸으로 접수했다.
김삿갓도 그녀의 대응에 흠칫 놀라며, 자신의 뼈 조차 녹아 버린 것 같은 애액을 그녀의 몸안에 사정없이 쏟아 넣었다.
83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83) 하늘이 정해 주신 연분.
휘몰아치는 폭풍이 지나고 나자, 수안댁은 새삼스럽게 불안감에 떨며 호소하듯 속삭인다.
" 나 같은 계집 대문에 삿갓 어른께서 불행해져서는 절대 안 돼요,
오늘 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할 테니, 어서 내 집에서 나가 주세요."
김삿갓은 공포에 떨고 있는 수안 댁이 측은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넌 즈 시 달래주는데,
"자네와 가까이 하는 사내는 모두 죽게 된다니까 겁이 나서 그러는 모양이구먼.
그러나 그런 무당의 허툰 수작에 휘둘리지 말고 걱정 말아요.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
"아니에요. 할머니 무당의 말씀은 허튼 소리가 아니에요.
그 무당의 예언은 한 번도 빗나간 일이 없는 걸요."
한번 믿기 시작하면 미신처럼 무서운 것이 없어서,
수안 댁의 강박관념은 여간해서 떨쳐 버리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니까 김삿갓은 어떤 방도든지 수안 댁을 공포에서 구출해 내고 싶은 의무감조차 느껴졌다.
그래서 불안에 떠는 수안 댁을 꼭 껴안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사람의 운명이 귀신의 손에 달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릴세.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한 것이 무슨 죄라고
재앙이 생기겠냐는 말이야.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말아요."
김삿갓은 수안 댁의 벗은 몸을 천천히 애무했다.
그러자 처음과 달리 수안 댁은 김삿갓의 손길을 순순히 받아주었다.
그러면서도 불안감이 쉽게 떨쳐지지 않는지, 한 마디 뇌까린다. "삿갓 어른께서 아무 재앙도 없으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허어! 나는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 안심 하라 구!
내 말이 믿어지지 않거든 몇 달 동안 나하고 같이 살아 보면 될 게 아냐?"
김삿갓은 수안 댁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수안 댁의 몸을 재차 덮어 눌렀다.
두 번째 정열도 첫 번째 못지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한 듯, 두 사람의 섞임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편의 장중한 오케스트라처럼 황홀하게 화합했다.
두 번의 정사로 남녀는 녹초가 되었다.
그들은 벗은 몸을 서로 끌어안고 달콤한 새벽잠에 빠져 들었다.
"꼬끼오~ !" 어느새 창밖이 밝아왔다.
잠자리에서 깬 두 사람은 서로를 가는 실눈으로 마주 보았다.
김삿갓을 보고 있는 수안 댁의 눈에는 까닭모를 불안감이
뭍 어 있었다.
김삿갓은 여인의 벗은 엉덩이를 만지며 속삭였다.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치우고 그만 일어나서 밥을 지어와요.
간밤에 신방을 치렀으니 이젠 신랑이 초례상을 받아야 할 것 아니겠나? 후훗 .."
김삿갓의 익살에 수안 댁도 마음이 놓이는지 일어나 옷을 추려 입으면서 수줍은 듯 미소를 짓는다.
"조반을 지어 올 테니 그동안 한잠 푹 주무시고 계세요."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밥을 짓는 것이 그렇게나 행복한 모양이었다.
얼마 뒤, 두 사람이 겸상으로 조반을 다정하게 먹고 있는데
문득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 왔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찾아 온 사람은 조조였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방안으로 들어오다가 두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대뜸 농담을 퍼붓는다.
"어럽쑈! 어제 저녁만 해도 두 사람 모두, 결혼을 안 하겠다고 우겨대더니 , 어느새 신방까지 치르고 초례상까지 받았네 그려. 과부와 홀아비가 만나더니만,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은 모양이네?"
김삿갓은 무안해서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허허, 과부와 홀아비라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네.
없던 마누라가 하룻밤 사이에 생겨 난 것은 오로지 자네들 덕택일세.
너무도 고 맙 구만 그래."
"잘했 네 잘했어.
하늘이 정해 주신 연분은 어쩔 수 없는 거야.
또 이래야만 자네가 우리 마을에서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살 게 아닌가?"
이렇게 말을 한 조조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밥상을
들여다보더니,
"아니, 수안 댁은 하룻밤 사이에 정이 얼마나 깊어 졌 길래, 새서방에게 영계백숙까지 대접하고 있는가?"
하고 수안 댁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수안 댁은 얼굴을 붉히며, "반찬이 하도 없길 래 병아리 한 마리 잡은걸요."
김삿갓도 잠자코 있기가 면구스러워,
"이 사람아 ! 영계백숙 한 마리 얻어먹으려고
간밤에 내가 수고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러는가?"
조조는 그 소리를 듣고 배를 움켜잡고 웃으며,
"하하하, 간밤에 자네의 수고가 많았으리라 짐작되네.
그나저나 허리는 괜찮은가?"
"예끼, 이 사람아!"
"하하하하...! "
조조는 이 짖 튼 걸쭉한 농담을 한바탕 퍼붓고 나서,
곧 정색을 하며 수안 댁에게 묻는다.
"오늘부터 술장사는 그만두어야 할 게 아닌가?"
"글쎄요. 아직 그 문제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걸요."
"생각을 안 해보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여보 게 삿갓!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글쎄, 그 문제는 본인의 의사에 맡기는 것이 합당할 것 같네."
"그래? 이 친구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는걸."
그러면서 부랴부랴 밖으로 달려 나가며 김삿갓에게 당부한다.
"나 어디 잠깐 다녀올 테니, 두 사람은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게!"
김삿갓은 조조가 무슨 일로 어디를 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해서, "저 친구가 별안간 어디를 다녀온다고 야단이지?"하고 수안 댁에게 물었다.
그러자 수안 댁도 고개를 갸웃하며,
"글쎄요, 무슨 일인지 모르 겠 네요"하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난 뒤였다. 조조가 대동 계장 제제를 앞세우고 20여명의 상조계원과 함께 나타났다.
김삿갓은 너무나도 뜻밖의 일로 깜짝 놀랐다.
"아니, 자네들은 무슨 일로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왔는가?"
그러자 제제가 일동을 대표하여 근엄한 어조로 선언하듯 말한다.
"우리들은 자네에게 결혼식을 올려주려고 몰려왔네.
자네가 수절하는 수안 댁을 함부로 건드려 놓고 훌쩍 도망이라도 가버리는 날이면, 그야말로 우리 마을의 불상사가 아닌가?
더구나 자네의 애매한 태도로 보아,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단 말이야.
그래서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여러 계 꾼 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네와 수안 댁을 정식으로 부부로 맺어 줄 생각이네. 자네는 설마하니 이제 와서 혼인을 못하겠다고는 하지 않겠지?"
평소에는 스스럼없이 지내던 친구였지만,
이때만은 제제의 태도가 준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계장 제제의 말이 끝나자 다른 친구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자네는 복도 많으이. 돈 한 푼 안 들이고 혼인식도 올리고 말 야!"
"그러게 나 말이야, 저 친구 좋아하는 얼굴 좀 보라 지!
"하고 제각기 놀려대고 있었다.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김삿갓도 이제 와서는 싫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옆에 서 있는 수안 댁조차 까닭 모를 불안에 떨면서도 무척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만사개유정萬事皆有定이라,
이것도 피치 못할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순간 이런 생각이든 김삿갓은 마음을 고쳐먹고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자네들의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네.
고맙네. 자네들의 호의를 받아들임세."
그러자 친구들은 쌍수를 들어 환호한다.
"우리 마을에 아까운 과부하나 없어지게 되었구나."
"수안 댁은 복도 많 으 이, 저 친구가 수안댁 남편이 될 줄이야 누가 알 았 겠 누."
하고 제각기 한마디씩 놀려대었다
84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84)
*또 다시 꿈틀거리는 김삿갓의 방랑벽
김삿갓과 수안댁의 결혼식은 뒷산에 있는 산신당 앞에서 냉수를 한 그릇 떠놓고, 대동계장 제제의 집전으로 20여 명의 친구들의 축복 속에 거행되었다. 불교에서는 부부 관계를 삼생연분(三生緣分)이라고 한다.
부부란 아무렇게나 맺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세(煎世),금세(今世),내세(來世)에 걸쳐,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어야만 맺어진다는 소리다.
김삿갓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안댁과 자기는 삼세의 인연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삼생의 인연이 있고 없고는 별개 문제로, 많은 친구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니, 수안댁과 부부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던가.
김삿갓은 결혼식을 올리는 도중에 영월에 있는 본마누라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매우 삭막한 기분이 들었다.
(마누라는 언제 돌아 올지도 모르는 나를 지금도 날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텐데, 나는 마누라를 버려두고 구름처럼 떠돌아 다니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그러니 양심에 가책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수안댁이 기막히게 좋았던 것도 아니었고, 취중에 색정을 못이겨 어찌하다 한 번 건드렸을 뿐인데, 이것이 친구들에게 들통이 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식을 올리게 된 것이 아닌가...
경과야 어찌 되었든, 여러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수안댁과 결혼식을 올렸으니 두 사람은 어엿한 부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결혼식을 올린 그날로 수안댁은 술장사를 그만두고, 두 사람은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수안댁은 까닭모를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무척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부부가 된 것이 자네는 그렇게도 좋은가?"
"제가 좋아하는 삿갓 어른과 한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으니, 기쁠 수 밖에요."
"허기는 20여 년을 독수공방으로 지내다가 알량하나마 서방이 생겼으니 기쁘기는 하겠지."
"알량하기는 왜 알량해요. 제게는 삿갓 어른처럼 훌륭한 분이 없는걸요."
"내가 훌륭한 사내로 보인다구? 하하하"
"이제부터는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내가 자네 집에 얹혀 지내게 되어 미안하기 그지없네."
"그런 생각은 잊어 버리세요. 당신은 당당한 우리 집 주인이시고 저는 당신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마누라인걸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더욱 고맙구먼" 수안댁은 결혼한 그날부터 남편 공대가 너무나도 지극했다.
김삿갓 역시도 오랫동안 방랑 생활을 계속 해오다가 새 살림을 시작하고 밤마다 살을 섞어 오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수안댁에게 정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어느날, 하는 일도 없이 공짜밥을 먹고 있기가 민망하던 김삿갓은, "내가 언제까지나 놀고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니, 봄이 오거든 농사라도 지어 볼 참이라네." 하고 말했더니 수안댁이 펄쩍뛴다.
"선비는 농사를 짓는 법이 아니에요. 농사는 나 혼자 지을테니, 당신은 책이나 읽고 바둑이나 두세요."
"선비는 농사를 짓는 법이 아니라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옛날 어른들이 모두 그러시잖아요. 나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당신을 농사꾼으로 만들 수는 없어요."
수안댁은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남편에게 농사는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말까지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보니까 우리 할아버께서도 선비였기 때문에, 농사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날마다 사랑방에서 글만 읽고 계시더라고요."
"선비라고 농사를 짓지 말라는 법이 어디있누, 그런 고루한 생각 때문에, 우리네 백성들이 언제까지나 가난에 허덕이게 되는 거야."
"누가 뭐라든 간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당신이 농사짓는 것은 못 보아요.
그리고 생활의 걱정은 마세요.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온 것도 많이 있으니까요."
수안댁의 고집은 이만저만 센 것이 아니었다.
마누라가 그처럼 고집을 부리니, 김삿갓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따라서 밤이면 모임방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잡답을 즐기거나 술을 마셨고, 낮이면 남의 집 사랑방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김삿갓이 나름, 요긴하게 쓰이는 일은, 마을에서 사람이 죽거나 제삿집이 있을 때면, 제문(祭文)을 지어 주고 만장(輓章)이나 써주는 일 뿐이었다.
이러니 천하의 방랑벽이 있는 김삿갓으로서는 하루를 보내는 것이, 좀이 쑤시는 일이었다.
차츰 시간이 갈수록 허망한 생각이 들던 김삿갓, (명산대천을 행운유수처럼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던 내가, 계집 하나 때문에 이처럼 얽매어 지내야 하는가.)
그러나 이제와서, 한 번 맺어진 인연을 과감하게 박차고 뛰쳐 나간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의 생활 속에서 마음이 산란하던 김삿갓, 40평생 유리걸식을 해오다가 늦게 차린 살림으로 팔자는 매우 편해졌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닌것 같았다.
(아니다! 나는 한평생을 거지처럼 떠돌아 다니며 살아가야 할 운명을 타고난 몸이 아니던가.
나에게 정착된 생활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마침내 김삿갓은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갈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85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85) 무당의 예언 탓인가 사고를 당한 김삿갓.
봄이 되었지만 김삿갓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낮에는 친구들조차 농사일로 모두 들녘에 나가 있으니 허탈감에 빠져있기 일쑤였다.
그러나 밤이 되면 상황은 조금 달라져
모임방에 나가 음담패설을 듣고 여담을 나누다가, 새벽녘이나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수안 댁과 정을 나누는 것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어쩌면 이런 재미라도 붙였기에 천동 마을을 쉽사리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던 장마철인 어느 날, 그날은 김삿갓이 모임방에 모인 친구들에게 술 한 턱을 냈다.
김삿갓이 술을 사게 된 까닭은 마누라 수안 댁의 충고 때문이었다.
"남의 술을 한 번 대접받거든 당신은 두 번씩 술을 사드리세요. 남의 술을 얻어먹기만 하는 사내처럼 쩨쩨한 인간은 없으니까요. 돈은 뒀다 뭤에 쓰게요. 우리 집 돈은 모두다 당신 소유인걸요."
그러면서 수안 댁은 삿갓이 모임방으로 나가기 전에 넉넉한 돈을 쥐어 주었다.
그날은 초저녁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밤이 깊어서도 계속되었다.
모임방 친구들과 나눈 술에 거나해진 김삿갓은 도롱이를 쓰고 조조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오늘은 술 맛도 좋았지만, 참새와 땡굴이 의 음담에는 정말 놀랐는걸.
너무 웃다보니 배가 다 아프구먼." 그러자 조조가 말을 받아,
"아 닌 게 아니라 그 친구들 걸쭉한 농담에 배꼽이 빠질 뻔했네." 한다.
두 사람은 오늘, 모임방에서 오가던 음담패설의 여운을 생각하며 서로 껄껄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이렇게 소리 내어 웃던 김삿갓이 흙탕길을 천방지축 걸어가다 일순간 발을 잘못 디뎌 두 길이 넘는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앗! 이 사람아!"
조조는 무심중에 경악의 소리를 질렀다.
벼랑 아래로 떨어진 김삿갓은 "아이쿠!" 소리만 한 번 질렀을 뿐, 인기척이 없었다.
조조는 부랴부랴 벼랑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김삿갓이 풀밭에 빨래처럼 널 부러져 있었다.
"이 사람아! 어디를 다쳤기에 꼼짝도 못하고 있는가?"
김삿갓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지 사지를 조금씩 움직거리며
"인명 지 재천이라, 죽지는 않았으니 걱정 말게!"하며 위급한 상황임에도 익살을 부렸다.
그러자 조조는 무심중에 웃음을 터트리며 "예끼 이 친구야!
어디를 다쳤는가 말 일쎄, 자네가 죽은 줄 알고 걱정하는 줄 아는가?"
"그러게, 죽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가 없는 걸 어떡하나.
다리가 부러진 모양이네."
"뭐? 다리가 부러져 ... 그게 정말인가?"
조조는 기겁하여 김삿갓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고 하였으나,
워낙 캄캄한 밤이라서 어디를 어떻게 잡아 일으켜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사람아! 내가 업어 갈 테니 어서 등에 업히게!"
조조는 김삿갓을 부축해 등에 업고 벼랑을 기어오르다시피 올라왔다.
그리고 김삿갓을 업 은채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집으로 데려갔다.
"이거, 미안 허 이..."
조조의 등에 업힌 김삿갓이 말하자.
"미안은 그만두고 많이 다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네!"
"수안 댁! 수안 댁! 어서 방문을 열어요!"
삿갓의 집에 다 달은 조조는 황급한 어조로 수안 댁을 불렀다. 그러자 다급한 소리에 놀란 수안 댁이 벼락같이 뛰쳐
나왔는데 비에 쫄딱 젖은 두 사람의 모습도 기가 막혔지만 남편인 김삿갓이 조조의 등에 업혀 축 늘어져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 구 머니 ... 이게 무슨 날벼락이에요!"
수안 댁은 울음 섞인 소리로 부르짖었다.
무당의 예언대로 남편이 사고가 나, 다 죽게 된 몸으로 친구인 조조에게 업혀 온 것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놀란 마누라를 보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보게!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네.
재혼을 하면 남편이 또 죽게 된다는 무당의 예언은 멀쩡한 거짓말 이었어!"
그러자 수안 댁은 남편이 죽지 않은 것을 알게 되자
한편으로 뛸 뜻이 기뻐하며,
"어디를 어떻게 다치셨어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
그러면서 황급히 방문을 열어 젖혔다.
조조의 등에서 방바닥으로 눕혀진 김삿갓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그러자 김삿갓의 험한 몰골을 씻길 물과, 비에 젓은 몸을 닦아줄 천을 찾아 황급히 밖으로 나가던 수안 댁은 조조에게 부탁을 한다.
"수고스럽지만 약국에 가셔서 의원님을 빨리 좀 모셔와 주세요. 어서요!"
조조는 황급히 의원을 부르러 약국으로 향했고, 수안 댁은 대야에 물을 받아와 김삿갓을 씻기고 있었다.
"어디를 다치셨어요?'
"응, 다리가 부러진 것 같네, 꼼짝할 수가 없 구 먼"
수안 댁이 비에 젖은 남편의 저고리는 벗겼지만
바지는 발이 부러진 김삿갓이 아파하므로 벗길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곧 가위를 가져와 김삿갓이 아파하는 다리 쪽
바지 단을 갈라내고 보니,
발목위에서 무 릅 사이 정강이뼈가 어그러져 보였다.
수안 댁이 그 모습을 보고, 공포감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편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도,
마치 자신의 팔자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조조가 의원 영감을 모시고 왔다.
의원이 진찰을 하는 동안에도 수안 댁은 공포감을 억제할 수 없었던지,
"의원 어른! 이 양반 설마 돌아가시지는 않겠지요?"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부인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사람이 죽기가 그렇게도 쉬운 줄 아시오 ?
다리뼈가 좀 부러졌으니 서너 달은 누워 있어야 겠 지 만
그러고 나면 완전히 회복 될 테니 아무 걱정 말아요!"
의원은 부러진 곳을 버드나무로 동여매 준 뒤에 산골을 듬뿍 내 주며 말했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산골이나 열심히 먹어요.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이 정도의 횡액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인데, 무슨 걱정인가!"
늙은 의원이 태평스럽게 위로해 주는 바람에,
김삿갓과 조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수안 댁만은 아직도 미신의 망령에 사로잡혀 마음을 놓을 수 없는지, 계속 불안해하였다.
모두가 가버리고 나자 김삿갓은 상처가 새삼스럽게 쑤셔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누라가 걱정할 것이 안쓰러워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부터 한잠 잘테니, 당신도 아무 걱정 말고 눈을 붙여요."
"제 걱정은 마시고 당신이나 어서 주무세요.
상처가 아파서 어디 주무실 수나 있겠어요?"
"걱정 말아요.
당신이 잠을 자야 나도 마음 놓고 잘 수 있을게 아닌가."
"알았어요. 그럼 저도 잘 테니 당신도 주무세요."하며 김삿갓에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자신도 불을 끄고 옆에 눕는다.
생각해 보면 둘은 오다가다 아무렇게나 만난 부부간이다.
처녀 총각으로 만난 처지가 아니기에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부부였다.
그러나 이렇게 만난 남녀 간 이라도 밤마다 살을 섞으며 지내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정이 두터워졌다.
그래서 김삿갓은 자신 때문에 수안 댁을 불안하게 된 게 무척 미안했다.
(수안 댁 ! 당신에게 이런 걱정을 끼치게 되어 정말 미안하네. 그러나 나는 결코 죽지 않을 테니 그 점만은 안심하게. 그러니까 당신은 "또다시 과부가 된 다"는 잘못된 망상만은 깨끗이 씻어 버리게 ! ...)
86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86)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집착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김삿갓이 눈을 떠보니 날은 어느새 환히 밝아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수안댁이 보이지 않았다.
"응 ... ? 이 사람이 어딜 갔을까?"
김삿갓은 방안을 두루 살폈으나, 마누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짓문 너머 윗방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심상치 않아, 문틈으로 윗방을 옅보다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하였다.
수안댁이 바람벽에 산신 탱화를 걸어 놓고 그 앞에 단정히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반위에 정안수와 촛불까지 밣혀 놓고, 두 손을 허공에 벌렸다가 합장하며 큰 절을 올리며, 입으로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괴상한 광경을 보는 순간, 김삿갓은 가슴이 철렁해 왔다.
물어 보나 마나 마누라는 지금 "남편을 죽지 않게 해달라"고 누군가에게 축원을 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내가 죽을까 봐 저렇게도 겁이 나는 것일까?)
다리가 부러진 정도로 죽을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겁을 내는 것은
"재혼을 하면 남편이 죽는다"고 말한 무당의 예언이 강박 관념이 되어, 머릿속에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성싶었다.
(사람이 미신에 빠지면 저렇게도 어리석게 되는 것일까?)
김삿갓은 그런 망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언제 흉악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뭐라고 말하면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기도 하여, 못 본것 처럼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수안댁은 축원을 연방 올려대며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거리고 있는데,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어 보니, 개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기사생(己巳生) 김삿갓은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사람이오니, 전지전능하신 천제(天帝)께서는 특별히 헤아리시와, 그 사람을 대신하여 죄 많은 이 사람을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 몸은 본디 청상살을 타고난 죄 많은 몸이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분수를 넘어 선량한 남자를 유혹한 것은, 오로지 이 몸의 죄이옵니다. 그러므로 천제님께서는 이 몸을 처벌 하시고, 김삿갓으로 하여금, 환생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
김삿갓은 그와 같은 주문을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 왔다.
(혹시 마누라가 정신이 돌아 버린 것은 아닌가?)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소중하다고 한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안댁은 지금, "남편 대신 자기를 죽게 해 달라"는 축원을 올리고 있음을 알았을 때, 김삿갓은 가슴이 메어져 오는 고뇌감을 느꼈다.
(저 여인과는 오다가다 만난 부부이건만, 이렇게 까지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더란 말인가?)
김삿갓은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 무당이 함부로 지껄인 허튼 수작이 수안댁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도 크게 파급된 것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고,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리고 수안댁에게, 오랜 세월을 두고 뿌리 깊이 자라온 망상을 일조 일석에 불식시켜 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그렇다! 이런 일이란 시급히 바로잡으려다가는 오히려 역효과가 나기 쉬운 법이니,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고쳐 주기로 하자! )
김삿갓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만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수안댁은 오랫동안 축원을 올리다가, 시치미를 떼고 아랫방으로 내려왔다.
"어떻세요? 간밤에는 상처가 아프셔서,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죠?"
김삿갓은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간간이 아프기는 했지만 잠을 자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 당신은 새벽부터 어딜 다녀오는 길인가?"
"옆집에 잠시 다녀오는 길이에요. 아침을 곧 지어 올테니, 그동안 한잠 더 주무시도록 하세요."
수안댁은 제단을 모아 놓고 축원한 일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은밀한 일이 알려지면 효과가 없어지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김삿갓 역시 그 일에는 일체의 언급을 회피하며,
"하룻밤 자고 나니까, 아프기가 훨씬 덜 하군 . 이대로 가면 의원이 말대로 석달 안에 틀림없이 완쾌할 거야"
일부러 수안댁이 듣기 좋아할 소리만 했다.
그러나 남편이 무슨 소리를 하든 간에 수안댁은 김삿갓이 매일 잠든 때 마다, 비밀리에 정안수를 떠 놓고 축원을 올리는 일은 한 번도 빠트리지 않았다.
매일 남편이 잠든 오밤중부터 축원을 올리다가 새벽닭이 울면 부랴부랴 아랫방으로 내려오곤 하였다.
이러기를 두어 달 지나는 동안에 김삿갓의 부러진 다리는 거의 붙어, 스스로 변소 출입을 비롯해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자, 어느날 마누라에게 이런 농담을 하였다.
"그동안 자네는 내가 죽을까 봐 무척 겁을 냈던 모양인데, 이것 보라구. 내가 죽기는 왜 죽는가?"
김삿갓이 입빠른 농담을 지껄인 것은, 마누라를 기쁘게 해 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수안댁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말한다.
"에그머니나! 천제께서 들으시면 어쩌려고, 그런 방정맞은 말씀을 하고 계세요.
상처가 아무리 좋아졌기로,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천제께서 노여움을 타시면 무슨 앙화를 받게 될지 모르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지금 그 말씀은 당장 취소하세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 "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우리나라 풍속으로는, 병자가 자기 입으로 "병이 좋아졌다"는 말은 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천제께서 그 말을 듣고 노여움을 타, 병을 또다시 나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미신이나 다름없는 민속 신앙인지 모른다. 김삿갓도 그런 풍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뱉어 놓은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왕 말이 난 김에, 마누라의 미신적인 망상을 조금이라도 시정해 주고 싶어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것은 모두가 미신에 불과한 것이야. 한번 좋아진 상처가 그런 말을 했다고 다시 나빠질리는 없지 않은가. 당신은 무당의 말을 과신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는 게 좋아요.
세상에 무당처럼 무식한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무당의 허튼 수작을 신주처럼 떠 받드냐 말이야."
김삿갓은 마누라의 생각을 고쳐 주려고 무당을 의식적으로 깎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수안댁은 그 말을 듣고 몸을 벌벌 떨기까지 하면서, 남편을 나무라는데,
"당신은 어쩌려고 오늘따라 그런 무서운 말씀만 함부로 하세요.
무당처럼 무식한 사람이 없다지만, 무당은 학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유식하더라도 천제께서 신(神)을 내려 주지않으시면 무당이 절대로 될 수 없어요.
무당은 학식이 없더라도 전지전능하신 천제로 부터 특별히 점지 받고 인간 세계와 하늘을 연결하는 "하느님의 사자(使者)" 라는 것을 아셔야 해요.
당신은 그런 것도 모르시면서, 어쩌면 무당을 그렇게도 업신여기세요."
김삿갓은 무심중에 반발심이 솟구쳐 올라 대번에 마누라를 공박했다.
"뭐? 무당이 하느님의 사자라고? 자네가 무당을 그렇게까지 신봉하고 있는 줄 정말 몰랐는걸.
무당은 어디까지나 혹세무민하는 속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야. 무당 따위가 무슨 빌어먹을
"하느님의 사자"란 말인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깨끗이 청산해 버려요."
김삿갓은 정면으로 공격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고 참아 오던 불만이 무심중에 폭발한 것이었다. 이런 저변에는 마누라인 수안댁에 대한 애정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질책으로 인해, 무서운 결과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수안댁은 책망을 받고 나자, 두려움으로 몸을 벌벌 떨더니,
"다 당신은 천 천제님한테, 무슨 앙화를 못 받으셔서, 그 그런 저주의 말씀을 하 함부로...."
거기까지 말을 하더니 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그 자리에 푹 쓰러져 버리는 것이었다.
원인 불명의 공포감에 질려 졸도를 한 것이었다.
"여보게! 자네, 왜 이러는가?"
87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87)
금반삭립봉천첩金盤削立峰千疊
(소반위에 나란이 빚어 놓은 송편은 수많은 산봉우리가 첩첩히 겹쳐 있는것 같다.)
김삿갓은 혼비백산하여 마누라를 잡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수안댁은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여보게 정신 차리라구!" 얼굴에 냉수를 끼얹고 인정人定을 비벼주고 하여 한바탕 소란을 떤 뒤에 수안댁은 간신히 숨을 돌렸다.
"여보게! 정신이 좀 드는가? 자네, 별안간 왜 이러는가?"
수안댁은 남편의 얼굴을 얼빠진 사람처럼 멀거니 바라 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한다.
"몸도 불편하신 당신에게 이런 꼴을 보여 드려 미안해요.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요, 잠시 그대로 누워서 안정을 취하구려."
김삿갓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당을 저주한 말이 당신 마음에 거슬렸던 모양이지?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을테니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말아요."
사실 이제 앞으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누라에게 정신적인 타격을 줄 말은 안 할 결심이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다니까요. 당신만 빨리 회복해 주세요."
"나만 회복해 가지고 되는가, 자네도 건강해야지."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수안댁은 일어나 앉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을 연방 외어대고 있었다.
이렇게 졸도 사건이 있은 날 부터 수안댁의 얼굴에는 날마다 수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밤중이면 제단 앞에 정안수를 떠놓고,
남편의 환생을 비는 축원만은 어느 하루도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김삿갓은 "제발 그런 짓만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누라 혼절을 겪어 본 바가 있으므로 무슨 오해를 사게 될지 몰라, 숫제 수안댁의 일은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김삿갓도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가까운 곳을 다닐 수 있을 만큼 상처가 좋아졌다.
그러나 수안댁의 공포 증세만은 여전히 가실줄을 몰랐다.
그런 마누라의 안색을 눈여겨 본 김삿갓은 마누라의 마음도 추스릴겸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지난 여름은 여러가지로 우울한 계절이었어,
이제 계절도 바뀌었으니 이번 가을에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행복이 찾아 올거야." 마누라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위로의 말이었다.
"고마워요. 그래 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말은 "고맙다"고 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보면 수안댁은 아직도 정체 불명의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것은 단순히 피해망상으로 보기 보다는 "신의 저주를 두려워 하는 공포감"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만 같았다.
김삿갓은 마누라의 정신상태를 바로 잡아 줄 방도를 여러가지로 궁리해 보다가 어느날
"참, 수안 고을에 당신 큰아버지께서 살고 계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번 가을에는 우리 둘이 큰아버지를 한번 찾아가 뵙기로 하면 어떨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누라의 얼굴에는 불현듯 싱싱한 기쁨의 빛이 역력하였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요. 우리 둘이 함께 찾아가면 큰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래요, 조만간 수안에 한번 다녀오도록 합시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김삿갓의 상처는 거의 완쾌되어 갔다.
그러나 수안댁은 오밤중만 되면 남편 대신에 자기를 죽게 해 달라는 축원을 하루도 빠트리는 날이 없었다.
그런 마음의 고민을 안고 지내는 탓인지 수안댁의 얼굴은 점점 수척해갔다.
김삿갓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그날그날을 살얼음판을 밟으며 살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날은 마누라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주려고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었다.
"추석 명절이 가까워 오니, 우리 송편을 한번 만들어 먹을까?"
송편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누라의 불안한 심리를 다른 일로 상쇄시켜 보려는 심산이었다.
마누라는 그 말을 듣더니 과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어머! 송편이 잡수시고 싶으세요?"
"응, 당신이 만들어 주는 송편을 먹고 싶네."
"가만계세요. 당신이 자시고 싶다는데 오늘 당장 만들어 드리지요."
수안댁은 전에 없이 밝은 얼굴로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다가 반죽을 하여 송편을 빚기 시작하는데 그 솜씨는 보기만 해도 신기할 만큼 능숙하였다.
적당히 반죽한 재료를 조금 떼어내 두 손바닥 사이에 넣고 달달 굴리니 새알처럼 동그란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엄지와 검지의 네 손가락으로 새알의 한복판을 오목하게 파헤치고 그 속에 고물을 넣은 뒤에 가장자리를 마주 잡아 오므리니 조그만 조가비 같은 송편이 되었다.
이렇게 빚은 것을 쟁반위에 하나씩 나란히 세워 놓으니
얼른 보기에는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첩첩히 늘어서 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도 재주 좋은 여인이 어째서 허망한 공포감에 시달리고 있을까?)
생각할수록 측은한 생각이 든 김삿갓이 문득 이런 말을 하였다.
"여보게! 자네가 송편을 빚는 모양을 보니, 나는 시흥이 샘 솟네그려. 내가 "송편"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수 읊어 보기로 할까?"
생각조차 못 했던 말을 듣고 수안댁은 어리둥절하는 표정이었다.
"송편을 빚는 모양을 시로 읊어 보신다고요?"
"그래, 시로 읊어 볼 테야."
"그런 시도 지을 수 있어요 ? "
"그럼."
"어디 한 번 써보여 주세요."
수안댁은 김삿갓이 유식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까지 능숙하게 지을 줄은 몰랐는지 흥미로운 눈으로 남편을 바라 보았다.
지필묵을 꺼낸 김삿갓, 그 자리에서 "송편"이라는 제목으로 한시, 한 수를 써갈겼다.
수리회회성조란手裡廻廻成鳥卵
지두개개합방순指頭個個合蚌脣
금반삭립봉천첩金盤削立峰千疊
옥저현등월반륜玉著懸登月半輪
물론 그 시는 한문이었기에 수안댁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에요? 나는 한문을 몰라 알아볼 수가 없네요."
"이 시는 자네가 송편을 빚는 모습을 글로 표현한 것이라네. 내가 설명을 할 테니 잘 들어 보라구."
김삿갓은 첫째 줄과 둘째 줄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며 이렇게 설명하였다.
"'수리회회성조란手裡廻廻廻成鳥卵이란
쌀 반죽을 손바닥으로 달달 굴리니까 새알처럼 동글하게 된다'는 소리요."
"'지두개개합방순指頭個個合蚌脣은
송편 속에 고물을 넣고 가장자리를 하나하나 조가비 처럼 오므린다'는 소리라네."
"어머나. 당신은 어쩌면 솜씨가 이렇게도 오묘하세요.
반죽한 것을 손바닥으로 새알처럼 동글하게 만든다는 것도 재미있지만, 송편의 가장자리를 조가비처럼 오므려 만든다는 말은 기막히게 좋네요."
"그 다음을 마저 설명해줄테니까,끝까지 들어보라구."
하며 이번에는 셋째 구절과 넷째 구절을 가르키며 설명을 계속 하였다."
"'금반삭립봉천첩金盤削立峰千疊
빚어 놓은 송편을 쟁반위에 차례로 세워 놓으니까,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가 첩첩이 겹쳐 있는것 같다'는 소리요.
"'옥저현등월반륜(玉著顯登月半輪)은
빚어 놓은 송편을 젓가락으로 하나씩 집어 드니까
마치 하나 하나의 송편이 반달처럼 보인다'는 말이야.
어때? 이만하면 잘 지었지?"
"나는 시를 모르기는 하지만, 정말 재미있게 지으셨어요.
당신이 글을 잘 아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재미있게 시를 지으시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수안댁은 모든 시름을 잊은 듯이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88회로~~
121년 전 나라를 해체하며 검찰권을 박탈했던 고종 - 조선일보 - https://www.chosun.com/opinion/2022/04/16/352WLK67IRGGVAY4GJGQM62YIQ/
치매예고 테스트
https://youtube.com/shorts/LTNkNgpP500?feature=share
방랑시인 김삿갓 (88)
김삿갓에게 닥친 불행
그로부터 며칠 지난 비 오는 날 밤, 김삿갓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변을 보려고 요강을 찾았다.
"여보게! 요강이 어디 있지?"
수안댁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마, 내 정신 좀 봐!
요강을 우물가에 그냥 내버려두었네요. 지금 곧 가져올께요."
김삿갓은 비가 오는데 심부름을 시키기가 안되 보여서
"자네는 그냥 앉아 있게. 내가 나갔다 옴세."
"아니에요. 남자가 요강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남들이 뭐라 하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남자가 요강을 들고 다니면 안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내가 갔다 올테니까 당신은 그냥 있어요."
김삿갓은 마누라를 억지로 못 나오게 막았다.
마누라의 수고와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심정에서 자기가 요강을 가져오려고 한 것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다
칠흙 같은 어둠으로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어둠 속에 더듬거리며 우물가에 도착한 김삿갓은
우물가를 한 바퀴 돈 뒤에야 요강을 찾았다.
그리고 어둠속에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돌 층계에서 발을 헛디뎌 앞으로 고꾸러졌다.
"쨍그렁!"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요강이 허공에 떳다가 돌 위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냈다.
"에구머니! 이게 무슨 소리예요! "
방안에 있던 마누라가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달려 나왔다.
"저런! 아무것도 아니야, 돌에 미끄러져 잠시 넘어졌군.
걱정 말고 어서 방으로 들어가요."
김삿갓이 넘어져 비에 젖은 옷을 툴툴 털고 마누라와 함께 방으로 들어와 보니 김삿갓은 무릎이 까져서 피가 한줄기 흘러 내리고 있었다.
수안댁은 피를 보자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어마! 저 피!"
"괜챦아요. 이 정도를 가지고...."
"아니예요. 당신은 지금 신의 천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것만은 무슨 재주로도 피할 수 없는 천벌이에요."
"이 사람아! 어두운 밤중에 한 번쯤 넘어진 것을 가지고
당신은 무슨 말을 그리하는가?
하룻 밤 자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테니 어서 잠이나 자요."
김삿갓은 마누라를 가까스로 달래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마누라는 어둠 속에서도 공포감으로 떨고 있었다.
김삿갓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잠도 자지 못하고
마누라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자기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깐 동안 눈을 붙였다 다시 떠보니 옆에 누워 있던 마누라가 없지 않은가!
"여보게! 어디 갔는가?"
김삿갓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 나가며 소리를 또 한 번 질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까지 부슬부슬 오던 비가 지금은 억수로 퍼붓고 있었다.
게다가 천둥이 울고, 번갯불이 번쩍이며 뇌성 벽력까지 귀청이 따갑도록 때려대고 있었다.
김삿갓은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천방지축 마누라를 찾아 헤맸다.
"여보게 ! 나를 두고 어딜 갔는가?"
섬뜩한 예감까지 압도했던 김삿갓의 소리는 차라리 피를 토할 것 같은 절규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무리 애간장이 타도록 불러도 마누라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물가에 가 보았으나, 거기에도 없었다.
개천으로 달려가 보았으나 개천가에도 없었다.
"여보게! 자네가 나를 두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김삿갓은 미친 사람처럼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산으로 들로 허겁지겁 찾아 헤매다가 문득 눈을 들어 보니,
저 멀리 산신당山神堂 나뭇가지에 무엇인가 허연 것이 공중에 대롤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엉? 혹시 저게 바로...?"
김삿갓은 눈 앞이 아찔해 오는 전율감을 느끼며 부리나케 달려와 보니, 나뭇가지에 목을 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은 틀림없는 마누라가 아닌가!
김삿갓은 부리나케 밧줄을 끊고 마누라를 집으로 업고 돌아오며 울부짖었다.
"이 못난 사람아 ! 이게 무슨 짓인가 ! "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방바닥에 눞혀놓고
인공 호흡도 해보고 손과 발을 주물러 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마누라의 사지백태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마누라는 무당의 예언대로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이 대신 죽어 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못난 사람아! 죽기는 왜 죽어?
나를 살린다고 자네가 대신 죽는단 말인가!"
김삿갓은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부등켜안고, 무당처럼 푸념을 하며 울부짖었다.
"자네가 청상살을 타고났다면 내가 죽어야 할 일인데
어째서 자네가 죽는단 말인가?"
김삿갓은 애간장을 녹여내는 넋두리를 한없이 계속했다.
새벽부터 곡소리가 들려 오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도 너무도 처참한 현실이 놀라워 한동안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숨가뿐 침묵이 잠시 계속된 뒤에 대동계장 제제가 입을 열어 물었다.
"여보게, 그만 울고 진정하게. 어쩌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
김삿갓은 울음을 멈추고 그간의 자초지종을 대강 말해 준 뒤에
"마누라는 나를 대신해 죽었으니 세상에 이런 비통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며 울부짖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할 건 아니지.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수안댁이 이런 식으로 죽은 것은 어쩌면 그녀의 팔자인지도 모를 걸세."
"팔자 .... ?
나와 결혼만 하지만 않았다면 죽을 일은 없었을 것 아니겠나!"
"그러고 보면 수안댁은 전 남편이 죽었을 때에도,
남편 대신에 자기가 죽지 못한 것을 무척 한탄스러워 했거든.
그러니 수안댁은 남편을 기피하는 직성을 타고난 여자였는지도 모를거야."
"그렇다면 수안댁을 죽게한 죄인은 나였다는 말이 되지 않은가?"
김삿갓은 그런 생각이 점점 확고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제제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자네 식으로 따지자면 수안댁을 죽인 죄인은 자네가 아니고 우리들이었을 걸세.
왜냐하면 두 사람을 강제로 결혼시킨 사람은 우리들이었으니까 말이야.
이러나 저러나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려 버리고, 너무 상심하지 말게."
그러자 동석했던 늙은이 하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참견을 했다.
"옳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었거니와 산 사람은 어디까지난 살아야 하거든.
인생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이제는 그만 고정하고 장사 치를 의논들이나 하라구."
살아 있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생의 영원한 지리인지도 모른다.
늙은이는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불쑥 다음과 같은 말을 하여 듣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89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89)
김삿갓이 몰랐던 수안댁의 감춰진 비밀
"요새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겠지만, 실상인즉 수안댁은 3대째 내려오는 무당의 딸이었다네.
수안댁이 하필이면 산신당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은 것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 할머니가 모두 산신령을 추앙하며 모셨던 것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야."
수안댁이 3대 무당의 딸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에 제제도, 김삿갓도 놀랐다.
모두가 처음 들어 보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어르신! 수안댁이 무당의 딸이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조조가 놀라면서 노인에게 물었다.
"이 사람아! 내가 죽은 사람에 대해 왜 거짓말을 하겠나?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려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틀림없이 할머니도 어머니도 무당이었다네."
김삿갓은 그 말을 듣자 , 내심 크게 한탄하였다.
(아, 그래서 그 사람이 무당에 대해 각별한 숭앙심을 가지고 있었구나!
게다가 그 무당의 말이 자신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씀이었으니,
어찌 각별히 받들지 않았으랴!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이 철썩같이 의존하고 있었던 무당의 예언을 혹세무민으로 몰아 세우지 않았던가! 아! 진작에 이런 사실을 알았던들....
이제는 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러나저러나 수안댁이 무당의 딸이었든 누구의 딸이었든 간에 마누라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김삿갓으로서는 그녀를 장사 지내 줄 의무가 있었다.
수안댁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안장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이 도와 주어 장사는 어엿하게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장사를 잘 치러 주었다고 마누라를 잃은 슬픔이 가셔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삿갓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파 마누라를 땅속에 묻으며,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망인에게 들려 주었다.
"여보게 마누라! 나를 두고 죽다니, 자네는 너무도 무심하네 그려.
부부가 되려면 삼생지연三生之緣이 있어야 한다는데
나만 남기고 자네는 죽었으니 우리 두 사람에게는 본시부터 삼생지연이 없었더란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의 인연은 없었는지 몰라도
이승에서는 잠시나마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 왔으니, 금생지연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삼생지연이 없으면서도 이승에서나마 부부 관계로 살아온 우리들의 만남은 얼마나 소중한 일이었는가?
자네는 진실로 마음이 곱고 인정이 많은 여인이었네.
자고로 부침浮沈은 천고의 상사常事고,
꽃이 필 때면 풍우가 많고, 인생에는 이별이 다반사이거늘,
오늘날 자네와의 별리에는 가슴이 너무도 아프이.
때마침 가을인지라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의 슬픔만은 참을 수 있어도
당신이 마당가에 심어 놓은 국화꽃을 이제는 누구와 더불어 즐기라는 말인가? 그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네그려.
당신의 얼굴은 모란꽃처럼 아름다웠고,
또 웃음은 꽃이 피어나는 듯이 화평하였고,
그대의 목소리는 옥쟁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아름다웠나니,
이제와서 눈물을 흘려 본들 지난날의 즐거움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다만 두 손 모아 자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비노니
희노애락이 없는 극락 세계에서 부디 편히 쉬어 주기를 바랄 뿐이네."
김삿갓의 고별사가 얼마나 애절했던지, 조문객들은 한결같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수안댁이 저승에서 저 소리를 들었다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조문객들 가운데는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마누라 없는 집안은 무덤처럼 쓸쓸했다.
김삿갓은 마누라가 죽은 뒤로는 방안엔 들어가기도 싫어
날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많은 시간을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태로 보내고 있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노라면
마누라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줄 것만 같아서였다.
사람은 이미 갔건만 그녀가 가꾸어 놓은 국화꽃은 아직도 싱싱하게 피고 있어 마음을 몹시 아프게 하였다.
이렇게 마음이 쓸쓸하다 보니 어느 하나 쓸쓸해 보이지 않는 게 없었다. 김삿갓은 뜰에 무성히 자란 잡초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옛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가을 풀을 쓸쓸하게 바라보려니
슬픈 바람이 천리를 불어온다.
슬프다 가을 바람에 낙엽만 휘날리고
메마른 버들가지엔 부엉새만 살고있네
오늘도 그대 생각으로 눈물만 자꾸 흐르는데
국화꽃은 해마다 피어도 그 누가 알아 줄 것인가]
김삿갓은 한숨을 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도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구나!"
그러나 길을 떠나기에 앞서,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수안댁의 재산 정리 문제였다.
사후에 알고 보니, 수안댁은 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살던 집을 비롯하여 밭은 3천여 평, 임야는 1만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재물들은 응당 남편에게 귀속될 재산이었다.
아울러 그것은 남편의 권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삿갓은 수안댁이 남기고 간 그 어떤 재물도 자신이 차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은 상조계원을 모아 놓고 제안을 했다.
"나는 마누라가 죽은 것을 계기로 천동 마을을 떠나 갈 생각이라네.
수안댁이 남겨 놓은 재산이 적지 않은데 자네들은 그 재산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을 것 같은가?"
계원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들 어리둥절하였다.
"이 사람아 ! 마누라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 마을을 떠날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힘을 모아서 새장가를 들여 줄 테니, 행여 떠날 생각은 하지 말게!"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안 될 말이야."
김삿갓이 계원들과 함께 유산 문제를 상의하고 있을 때, 계장인 제제는 무슨 이유인지 일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열어 말을 했다.
"자네가 우리 마을을 떠나려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네.
그러나 우리들의 우정을 생각해서 그냥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가?"
"아니야! 나는 처음부터 한 해 겨울만 지내고 떠나갈 예정이었어.
자네들의 권고에 못 이겨 마누라를 얻는 바람에 이태 동안이나 더 살아왔는걸.
나는 본디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팔자를 타고난 놈이라는 것을 자네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김삿갓의 결심은 확고부동 하였다. 그러자 제제가 조용히 말한다.
"그럼 이렇게 하세.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는 데도 돈은 필요할 게 아닌가?
수안댁이 남긴 유산은 모두 자네의 것이니까, 집이랑 밭이랑 산이랑 모두 팔아 가지고 떠나게." 김삿갓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럴 생각은 없네.
수안댁의 유산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재산이지 내 것은 아니거든."
"수안댁은 자네 마누라가 아닌가?"
"나는 사람하고 결혼했을 뿐이지 돈하고 결혼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나는 횡재를 바라는 놈도 아니고 올 때에도 빈손으로 왔으니까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가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겠나?
수안댁의 유산은 자네가 적당히 처분해 주었으면 좋겠네."
"이 사람아!
남의 재산을 내가 어떻게 처분한단 말인가?"
김삿갓은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힘차게 들며 말했다.
"자네가 독단으로 처분하기 어렵거든 내가 말하는 대로 처분해 주기 바라네.
지금 자네들이 쓰고 있는 "모임방"은 너무 협소해, 따라서 수안댁과 내가 살았던 집을 마을의 공청公廳으로 쓰도록 하고,
3천 평짜리 밭은 계원들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거기서 나오는 소득은 마을의 공동 재정으로 쓰도록 하고, 또 1만여 평의 산은 공동으로 조림造林을 한다면 좋을걸세."
유산의 처리 방법을 그렇게도 소상하게 말해 주는 바람에
계원들은 더 할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김삿갓은 기어이
전과 다름없는 죽장망해로 천동 마을을 떠났다.
마을 친구들은 멀리까지 배웅을 나오며 약간의 전별금도 모아주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친구들의 성의를 생각해서 몇 푼만 받아 넣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 주었다.
"이 사람아! 아무리 방랑생활을 하기로 돈 없이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는가?"
김삿갓은 허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수안댁의 경우를 보게나. 인생이란 공수래空手來공수거空手去하는 것이야.
나는 이미 돈 한푼 없이 40여 년 동안이나 살아온 놈일쎄."
90회로~~
방랑시인 김삿갓 (90)
다시 떠나는 방랑길
천동 마을을 떠나 다시 방랑길에 오른 김삿갓은
지나간 만 일 년 동안의 일로 오만가지 감회에 젖어든다.
애당초 방랑에 나선 것은, 인간사로 구애를 받지않고
허공을 떠도는 한조각 구름처럼 자유자재로 살아가자는데 있었다.
처자식과의 인연조차 끊어 버리고
표연히 방랑 길로 나선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세상 일은 결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지난 일년 동안은 수안댁과 생각치도 못한 결혼생활을 해오지 않았던가.
이제와서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수안댁과 결혼을 했던 일도 꿈만 같았고,
그런 생활이 일 년 남짓하게 계속되다가
갑자기 사별死別을 하게 된 것도 꿈만 같았다.
인생이란 어느 누구나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남은 모든 것과의 헤어짐이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과정에 의해 이루어진 죽음이라면 ,
어느 정도는 애를 써보고
이별을 받아 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였다면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일 년 동안의 수안댁과의 짧은 결혼 생활은,
두 사람 사에에 복잡한 사연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멀쩡해 보이던 여인이 미신의 망령에 사로잡혀 공포감에 떨던 일도 흔히 보는 일도 아니려니와,
남편을 살리겠다는 일념에서
남편 대신 목을 매 죽은 것도 몸서리쳐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처럼 복잡했던 일도 일단 지나고나니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조용하기만하다.
김삿갓은 구월산과 평양을 가볼 생각으로 발길을 서쪽으로 돌렸다.
산길을 걸어 가노라니 바람은 차고 등에서는 땀이 흘렀다.
땀을 식히려고 가던 길을 멈추고 풀 언덕에 주저앉아
삿갓을 벗어 들고는 눈 앞에 펼쳐진 초겨울의 유리알 같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쓸쓸한 자신의 마음을 시 한 수에 담았다.
생종하처래 生從何處來
인생은 어디로부터 오며
사향하처래 死向何處來
죽어서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생야일편부운기 生也一片浮雲起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과 같고
사야일편부운멸 死也一片浮雲滅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흩어짐과 같구나
부운자체본무실 浮雲自體本無實
뜬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생사거래역여시 生死去來亦如是
삶과 죽음 역시 그와 같겠지.
산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새소리를 들어 가며 산을 넘고 언덕길을 굽이굽이 감돌아 내려가니 산골짜기에 조그만 주막이 하나 있었다.
문 앞에 세워 놓은 말뚝에 야몽夜夢이라는 두 글자가 써있는 주막이었다. 김삿갓은 주막 마루에 걸터앉아 주모에게 술을 청하며 물었다.
"이 집을 들어오다 보니, 야몽이라 쓴 말뚝이 있던데
그 야몽이란 어떻게 나온 말인가?"
주모가 술상을 갖다 주며,
"나도 모르지요. 간판도 없이 술장사를 시작하는 첫날,
어떤 점잖은 첫 손님이 마수걸이 외상술을 잡숟고 가시면서, 주막 이름을 야몽으로 하라고 일러 주더군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술장사를 시작하는 첫날 첫 손님부터 외상술을 주었다니
그래 가지고서야 장사가 되겠는가?"
"장사가 되든 말든,
술을 자시고 싶은데 돈이 없다는데 어떡해요?
그러니 인심을 좀 쓰기로 설마하니 밥이야 굶겠어요?"
주모는 얼핏 보기에 수안댁과 인상이 비슷했는데
대답 또한 천하태평이었다.
"마수걸이 외상을 주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 이름은 알고 있는가?"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름을 어떻게 알겠어요?"
"하하하하...
이름도 모르면서 외상을 주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외상값은 언제 받으려나?"
"갖다 주면 받고, 안 갖다 주면 못 받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술 한 잔 선심 썼다고 여기지요 뭐."
가뜩이나 수안댁을 닮아 호감이 갔었는데
마음을 쓰는 통이 넉넉한 주모를 만나니
김삿갓의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졌다.
해서, 짖궂은 소리를 해보는데,
"혹시 내가 외상술을 먹겠다고 해도 외상을 줄 수 있겠는가?"
"돈이 없다는 말씀만 하세요. 그러면 외상도 드리지요."
주모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허기는 그 양반은 개업하는 첫날 첫 손님이었는데
마수걸이 외상술을 마시기가 미안했던지,
떠날 때에 저 바람벽에 시 한 수를 써 주고 가셨다우.
저기 보이는 저 시가 그 양반이 써 주신 시라오."하며
벽에 씌어 있는 시를 가리켜 보였다.
김삿갓이 주모가 가리킨 바람벽을 보았더니
첫 눈에 보아도 기막힌 명필이었고,
제목은 야몽(夜夢)이었다.
향로천리장 鄕路千里長
고향길은 천리 밖 멀고 멀은데
추야장어로 秋夜長於路
가을밤은 그 길보다도 더욱 길구나
가산십왕래 家山十往來
꿈속에선 고향에 갔다 왔건만
첨계유미호 詹鷄猶未呼
깨어보니 새벽 닭이 울기도 전이네.
낙관落款이 산운山雲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본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산운 이양연李亮淵은 당대의 유명한 풍류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여보게! 저 어른이 언제 여기를 다녀가셨는가?"
"어머 ! 손님은 저분을 알고 계세요?"
"알구말구, 직접 만나 뵌 일은 없어도 유명한 시인이신걸.
저 어른이 언제 여기를 다녀가셨는가?"
"내가 술장사를 시작했을 때 다녀가셨으니까, 벌써 7년 전 일인걸요. 그때도 60이 넘어 보였으니까, 지금쯤은 돌아가시지 않았을까요?"
"만약 돌아가셨다면,
자네는 외상값을 영원히 못 받게 될 것 아니겠나?"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 돈을 못 받는다고 죽을 형편은 아니니까요."
"가만있자, 그 어른 외상값이 얼마인가?
그 돈은 내가 갚아주기로 하겠네."
그리고 김삿갓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주모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 어른이 그렇게 훌륭하신 분이라면, 저는 그 외상값을 받지 않겠어요."
"내가 외상값을 대신 갚겠다는데 어째서 받지 않겠다는 말인가?"
"외상값이래야 몇 푼 아닌걸요.
그 돈을 받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 처럼 훌륭한 분한테 외상을 지웠다는 사실만 하더라도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어요! 안그래요? 호호호..."
주모는 호탕하게 웃어젖힌다.
마음이 유쾌할 때면 호탕하게 웃어 젖히던 버릇도
어딘가 모르게 죽은 수안댁과 비슷해 보였다.
(수안댁도 이와 같은 경우였다면 과연 외상술 값을 받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91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