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의 시간, 그 앞의 존재
-이사라 시인 신작시론
안서현(문학평론가)
시간의 얼굴을 본 일이 있는가? 아무도 본 적 없는 시간의 얼굴을 그리는 ‘몽타주 작가’가 여기 있다. 이사라 시인은 세 번째 시집 시간이 지나간 시간 이후 일관되게 ‘시간’이라는 화두에 천착해온 ‘시간 이미지’의 대가이다. 특히 ‘시간의 공간화’라는 독특한 시도를 지속해온 이 시인은, 제4 시집 가족박물관에서는 과거를 향한 공간인 ‘박물관’을, 근간 시집 훗날 훗사람에서는 미래를 향한 공간인 ‘요양원’이나 ‘노인 병동’을 주된 시적 공간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 두 공간은 ‘시간의 공간화’ 이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을 갖는데, 그것은 바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이 그 안에서 서로 만나는 역동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오천 년 전의 유물인 은팔찌가 “박물관 속 낙조 같은 조명 속에서/ 오늘을 껴안는 것처럼” 놓여 있기도 하고(「낙조」), “미래를 사는 아기는 유모차를 타고 박물관에서 잠”들기도 한다(「겨울, 박물관」). 또 다인실 병실은 “편자를 달고 흙먼지 날렸던 트랙이나/ 요람 속 흔들의자의 리듬들/ 이곳에 그저 두고” “탈신(脫身)”하는 현장이며(「어떤 나라」), 요양원에서 누워 있는 “그”의 발바닥은 먼 과거로 회귀하여 “발바닥으로 쓰다듬던 반질반질한 사랑으로/ 사람으로 살려 애썼던 그 동굴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세상의 창 안에는」). 이렇게 이사라 시인은 여러 차원의 시간들이 만나고 넘나드는 중첩과 이행의 공간을 시적으로 재현하는 데에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번 호에 소개된 시인의 신작시들에도 이러한 시간과 시간의 ‘사이’, ‘경계’, ‘문지방’의 공간이 시의 주된 배경으로 채택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신작시 가운데 「저 너머에는 저 너머의 것이」는 이러한 “그 집 앞”이라는 경계의 공간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작정하고 찾아온 “그 집 앞”에서 “문턱이 두려워서” 들어가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그 사람”의 모습은 우리에게 엄습해오는 미래에 압도되어버린 존재의 모습에 다름아니다. 시간과 타자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말해주듯이, 미래라는 시간은 절대적인 타자성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미래는 우리가 결코 소유할 수 없고 장악할 수 없고 지배할 수 없는 미지와 신비, 불확실성의 영역인 것이다. 그리하여 미래 앞에서 인간은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레비나스에 따르면 미래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도래할 수 있는 시간이다(미래는 타자로서, 타자를 통해서 도래한다). “그 사람”에게 미래라는 시간은 결국 “그 집 앞”의 “문턱”을 넘어가 그 너머의 누군가를 만나야만 개시되는 것이다. “생각도 멍하니 / 기억도 멍하니 / 모습도 멍하니” 서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은 일견 무력한 행동의 유예와 정지 상태로 보이기 쉽지만, 사실 그는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도 느끼고 있으며, 이와 같은 이중적 감정 속에서 “끝없이 망설”이며 타자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 사람”의 모습은 타자에게 기꺼이 압도되어 자신의 일부를 저당잡히고자 하는 ‘사랑에 빠진 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러한 “문턱”의 시간은 “그 사람”이 타자에 대해 열린 존재로 변화하는 시간, 타자와의 관계를 위한 용기 있는 도약을 감행하려 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이와 같은 이러한 “문턱”의 시간은 미래와 타자(성)의 시간, 부정(不定)과 가능성의 시간, 기대와 약속의 시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멍하니”의 시간에 이어 이번에는 “뭉텅”의 시간에 관해 노래하고 있는 시편을 계속해서 읽어보자. 제목이 「뭉텅」이다. 이 시에서 제시된 살다가 “뭉텅 내려 앉을 때”란, “나”가 점유한 육체의 공간이 사라지는 순간, 그리고 “나를 장악한 시간”이 “심연으로 무너”지는 순간이다. ‘뭉텅’이라는 말은 본래 큰 덩어리가 일순간에 떨어져나가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짧은 일회적 순간이라는 시간적 의미를, 또 한편으로는 상당한 부피와 양감이라는 공간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절묘한 단어이다. 그러니 “뭉텅”의 시간이란 존재의 기반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리는 순간을 뜻한다. 즉, 존재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허무가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이 시의 화자 “나”는 “뭉텅 가슴 아픈/ 뭉텅의 시간을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랑의 의지의 천명은 무엇을 의미하며, 또 어떻게 실천 가능한가? 이 부분의 해석을 위해서는 우리가 잠시 이사라 시인의 다른 시들을 참조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 몸 단풍 드는 몸
詩
내 속에 서 있는 나무
죽을 줄 모르는 죽음으로
살 속의 물과 꿈, 긴 속삭임 다 쏟아내고
내 속에 뼛가루 꽃나무를 꼿꼿하게 세운다
(「단풍」, 부분, 시간이 지나간 시간 수록)
책 한 권을 피우기도 했다
한 오백 년
책갈피 갈피 햇살과 빗물이 스며들듯
주름 같은 나이테
낡아가는 몸에 새기고
차츰
오래된 것도 버릴 수 없는 사람들처럼
숲을 뒤지며 헤매는 날이 간다
어느새
한 그루 나무가 뼈 숭숭 뚫린 잎을 무성히 달고 서 있다
골목은 막다른 골목으로 이어지고
이제 헌책방 가는 길로 접어들어
닳고 닳은 사람의 지문들이
몸속에서 조용히 웃는 날이 오리라
(「낡은 심장」, 부분, 훗날 훗사람 수록)
시인은 “뭉텅”의 시간의 예를 들면서 녹음이 지는 때를 꼽았다. 나무들이 “뭉텅 내려앉”는 때가 이때라 했다. 그런데 위의 두 시에 나타나는 나무의 이미지에 주목해보자. 위 시들에 나오는 낙엽의 시간은 존재가 허무와 대면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오히려 존재가 헛것들과 결별하는 시간이다. “오래된 것도 버릴 수 없”었던 집착을 버리고 자신 안의 비본질적인 것들을 모두 “쏟아내”면서 본질만 앙상하게 남은 한 그루 “뼛가루 꽃나무”로 남게 되는 시간인 것이다.
이어서 「장례식장에서」를 읽어보자. 장례식장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내가 죽지 않아도 죽는”, 죽음이라는 사건의 타자성이다. 죽음이야말로 온전한 미래의 사건이자 우리가 이해, 개입, 장악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사실 죽음이야말로 “문턱”을 건너 “저 너머”로 발을 내딛는 사건이자 온 존재가 통째로 “뭉텅” 내려앉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이 사건을 목도하는 일이야말로 “문턱” 앞에 서서 잠시 “멍하니” “저 너머”를 응시하는 경험인 것이다.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시간은 “마음에 노을이” 지는 시간이다. 밝은 낮에서 어두운 밤 사이, 빛도 어둠도 아닌 어스름의 시간이자 낮에서 밤으로 이행해가는 해거름의 시간이다. 화자는 이러한 “노을”의 시간에 드는 일이 “다행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 쪽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잠시나마 서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문턱”에 한발만 얹었다가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때면 “나와 나 사이에 국화꽃이 천만 송이도 더 피었다 진다”고도 하였다. 그 자신은 아직 시들어 죽지 않았으면서도 타인의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는 매개가 되는 국화꽃이 잘 보여주듯이, 혹은 꽃을 피우는 힘(에로스)과 꽃을 지게 하는 힘(타나토스)이 서로 인력과 척력으로 작용하며 “천만 송이”ᅌᅴ 국화꽃을 피워내고 있는 장면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이 “문턱”의 꽃밭에서 삶과 죽음은 서로 잘 구분되지 않는다. 이곳에 한번씩 다녀갈 때마다, 그 구분선은 점점 더 희박해질 터이다.
이러한 “사이”의 시간은 「바람이 휘어지면」에서 다시 “바람이 휘어지”는 시간, ‘굴절’의 시간으로 변주되고 있다. 이 시에서 “나”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자신의 일부가 사라지거나 자신이 본래의 “내 얼굴 내 목소리”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현재의 “나”가 본래의 “나”와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바람이 휘어지는”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것은 모래시계가 뒤집히듯 시간이 자신의 방향을 반전하는 시간, 혹은 상대성 이론에서 설명하는 물리적 시공간의 휘어짐과도 같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만나게 되는 ‘블랙홀’과 같은 시간을 의미한다(전자도 후자도 죽음이 도래하는 시간을 어렴풋이 암시하고 있다(죽음 이후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만나고 섞이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시간의 굴절이 존재의 전제조건이며(“바람이 휘어지지 않으면 / 내가 없을 것이니”) 또한 그러한 경험이 상실한 본질적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믿고 있다(“바람이 휘어지면 그 때 / 바람 안에 있는 내가 / 나를 만날 것이니”). 그리고 “날마다 그리워하”던 그 날이 “곧 오리니”라는 차분한 ‘기다림’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기다림’은 시간의 단절과 변화를 맞이할 자신의 운명에 대한 강력한 긍정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읽은 네 편의 시에서는 “문턱”의 시간의 의미도 모두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 시간을 경험하는 자(혹은 “나”)의 태도 역시 조금씩 순응과 긍정 쪽으로 변화해나가는 양상을 엿볼 수 있었다. 이는 점차 미래를 향해 열리는 인간의 모습과 그 운명애(amor-fati)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말단의 사랑」을 읽어볼 차례다. 이 시에는 ‘시간의 나무’라는 형상이 등장한다. 이사라 시인의 시에서 종종 등장하기도 했었던 이 나무는 모든 지나온 날들을 잎사귀처럼 가득 달고 있는 ‘인생의 나무’, 지나간 시간의 “박물관” 혹은 “헌책방”과 같은 나무, 그러나 결코 과거 속에 화석화되어버리지 않고 아직까지도 살아숨쉬는 나무이다. 모든 시인에게는 자신만의 시적 우주의 질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시목(詩木)이 있게 마련인데, 이사라 시인의 경우에는 그것이 ‘시목(時木)’ 즉 ‘시간의 나무’인 셈이다.
이 시가 포착해내고 있는 장관은 인생의 모든 지나온 날들이 저마다 하나씩의 이파리가 되어 나뭇가지의 말단에서 “하늘거”리고 있는 광경이다. 나무는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제몸에 품고 있는 생의 육체이다. 시간 속의 존재다. 말단의 이파리 하나를 보아도 물기와 녹색이 어려 있듯이 존재는 “몇 개의 잎사귀를 지닌 지도 모르”면서 일일이 지나온 것들을 품는다. 존재의 시간에 대한 사랑이다. 또한 이파리는 끝까지 나무 곁에 붙어 있으며 부드럽게 “하늘거리”는 운동성을 지니고 있다. 존재 속의 시간이다. 이파리들이 모여 이루는 빛으로, 또 이 이파리들이 “온 힘을 다해 둥치를 붙”드는 힘으로 나무는 자신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한다. 시간의 존재에 대한 사랑이다. 이와 같이 존재와 시간이 서로를 품고 붙들면서 ‘하늘거’리는 사랑의 운동을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시가 전하는 생의 진경이라 할 수 있다.
이사라 시인의 시가 시간에 대한 탐구라는 말은 반만 맞는 것이다. ‘시간 앞에 선 존재’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다고 해야만 그 시작(詩作)의 의미에 대한 온전한 설명이 된다. 시간의 “문턱” 앞에 선 존재, 미래라는 타자적 시간으로의 이행을 앞두고 ‘직전’의 무기력과 ‘사이’의 신열을 앓는 존재, 시간의 ‘내려앉음’과 그 방향의 ‘휘어짐’을 겪으며 허무를 경험하는 존재, 오우로보로스의 뱀들처럼 시간과 ‘서로 껴안음’이라는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 이러한 존재들의 역동적인 드라마가 상연되고 있는 ‘시간극장’이 바로 지금 이사라 시인의 시 속에 막 문을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