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독서 ≪93년≫ 빅토르 위고
혁명과 양심의 갈등 드라마 (1)
빅토르 위고 (1802-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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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 위고.
혁명의 대서사시,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93년》을 완독. 많은 것을 느꼈다. 우리나라에도 그와 같은 대소설가가 출현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51년 1월 13일에 쓴 ‘일기’의 내용이다. 당시 나는 스물세 살이었다.
낭만파의 거장 빅토르 위고를 말할 것 같으면, 은사 도다 조세이 선생님도 그의 작품을 애독하셨다.
우리 청년에게도 “위고의 작품을 읽어라.” 하며 강하게 자주 권유하셨다. 위고의 작품이라고 하면 청년시절에 거의 다 완독했다.
생각해 보면 도다 선생님의 생애도 또한 위고의 문학을 몸으로 나타낸 듯한 일생이었다. 그것은 ‘정의’와 ‘인간애’에 불타오른 생애였다.
오만한 사람과는 철저하게 맞서 투쟁하고, 사악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괴로워하는 사람, 고생하는 사람, 더 나아가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는 한없이 온정을 베푸는 은사이셨다.
우리는 은사를 둘러싸고, 위고의 《93년》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통해 인도주의와 인권, 혁명과 교육의 혁혁한 이상(理想)을 배웠다. 프랑스 대혁명의 시대 배경이나 등장인물의 사상을 분석하면서 철저하게 읽었다.
그때 혼을 뒤흔들던 감동과 공감에 지금도 만감이 교차하며 가슴이 벅차오른다.
파란만장한 생애
빅토르 위고는 19세기 프랑스가 낳은 시인이자 위대한 문호이다. 일본에서도 구로이와 루이코가 번안한 《오, 무정함이여》(《레 미제라블》을 말함. 이 작품에 대해서는 전에 거론했다)의 원저자로서 유명하다.
그는 시인으로 출발하여 그 천부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위고는 소년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위대한 인물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버지와 황제다. 이유는 확실히 모르겠다. 마음속으로는 미워하면서도 이 두 사람을 무척 동경했다.”
위고의 아버지는 위대한 나폴레옹군의 장군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오는 ‘황제’란, 젊어서 프랑스 혁명에 몸을 던진 영웅 나폴레옹 1세이다. 두 사람 모두 소년 위고에게 매우 친근한 인물이었음은 당연하다.
일찍부터 ‘신동’이라고 불린 위고는 열일곱 살에 형과 함께 잡지를 창간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스무 살 무렵에는 처녀시집 《송가집과 잡영집》을 저술했다. 위고는 낭만파 시인으로서 화려하게 출발했다.
1829년, 위고는 스물여섯 살에 《동방시집》을 발표했다. 《동방시집》은 오리엔트, 그리스, 터키,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 동방의 신세계를 동경하여 읊은 시집이다. 이 시집으로 시인 위고의 명성은 확고부동해졌다. 그는 순식간에 낭만파의 젊은 리더가 된다.
1841년, 위고는 대망의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예술원)의 회원이 되었다. 그때가 서른아홉 살이었다. 더 나아가 1845년, 마흔셋에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물론 그는 정치의 힘만으로 사회를 변혁하려고 하지 않았다.
1848년, ‘2월 혁명’의 거센 바람이 몰아쳤을 때에는, 민중의 편에 서서 총검 앞에서 맨손으로 대항했다. 그리고 1850년에 열린 의회에서는 “지상의 빈곤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사
회의 모순을 깊이 자각한 위고는, 일부 권력자가 모든 것을 독점하려는 사태에 맹렬히 항의하며 민중을 옹호했다.
하지만 1851년 12월, 쿠테타를 일으킨 루이 나폴레옹(황제 나폴레옹 3세)이 위고 등 공화파를 추방한다. 새로운 이 독재자 때문에 학살된 공화주의자도 있었다.
그 결과, 위고는 부득이하게 벨기에의 브뤼셀과 당시 영국령이던 저지섬과 건지섬을 전전하며 참으로 19년에 이르는 오랜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시기는 가장 활약해야 할 마흔아홉 살부터 예순여덟 살에 이르는 기간이다.
그러나 위고는 “망명한 것은 내가 아니다. 자유가 망명했다.”고 말하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조국 프랑스에 ‘자유’가 돌아올 때 나 역시 프랑스에 돌아가리라.”라는 결의대로 마지막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압정에 굴하지 않았다.
악운(惡運)이 강한, 빛나는 저 제국 위에
신의 분노 가득한 천둥을 피한 승리 위에
형벌대를 더욱 많이 세워
그것을 하나의 서사시로 만들자!
1853년에 펴낸 이《징벌시집》에는, 황제 나폴레옹 3세에 대한 항의와 저항 그리고 복수심 등이 마치 언어의 폭풍처럼 몰아치고 있다.
위고는 신(神)을 대신하여 ‘언어’로 나폴레옹 3세를 질타하고 징벌하여, 그 비열한 행위를 ‘형벌대’로 끌고 가서 고발하려고 했다. 명확하게 지명하지는 않았지만, ‘저 악당!’이라고 부르며 황제의 압정을 규탄한 시도 있다.
생각하면 위고의 생애는 어느 면에서나 불우했다.
사회적으로는 박해, 탄압, 망명이 계속되었다. 가정불화 그리고 자녀들의 죽음이 잇달아 덮쳤다.
나는 그 성난 파도와 같은 삶의 궤적을 보며, ‘어찌하여 인간은 저토록 빛나는 혼의 외침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불가사의하게 생각했을 정도다.
혁명과 내란의 1793년
도다 선생님은 청년연수회에 참석하여, 위고의 마지막 소설 《93년》을 거론하셨다.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을 주제로 삼은 것이지만 동시에 그 속에는 ‘폭력과 비인간적인 것에 대한 인간애의 승리’라는 주제가 일관하여 맥동하고 있다.
위고는 어느 우인에게 보낸 편제에서 소설의 의도를 이렇게 말했다.
“혁명을 이 공포에서 해방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작품 속에서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혁명을 지배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나는 이 무서운 ‘93’이라는 숫자 위에 공포를 없애는 빛을 비추려고 노력했습니다.”
위고가 작품의 제목으로 붙인 ‘93년’은 1793년을 가리킨다.
1793년 초, 4년 전 일어난 ‘대혁명’의 혼란은 진정되지 않은 채, 결국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위고가 ‘무용지물’아라고 했던 공포의 단두대는 한해 전인 1792년부터 사용되었다. 왕당파이건 혁명파이건 잇따라 단두애에 올리는, 이른바 ‘공포정치’가 계속되었다.
그러한 혼란의 와중에 소설의 무대가 된 방데지방에도 반란의 불길이 치솟았다. 1793년, 왕당파와 공화파로 갈라져 격심한 증오의 참극을 되풀이했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방데숲’에서 시작된다.
◇
여기까지 《93년》의 시대적 배경을 쓰다 보니, 독서법에 관한 도다 선생님의 지도가 떠오른다. 전에도 썼는데, 그리운 은사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소개할까 한다.
“책을 읽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줄거리만 쫒아서 그저 재미있게 읽으려는 방법은 가장 얄팍한 독서법이다.
다음으로 그 책이 발간되기까지의 사연과 역사적인 배경을 조사하고, 당시 사회정세와 등장인물의 성격 등을 파악해서 깊이 사색하며 읽는 독서법이 있다.
그리고 셋째로 저자의 인품과 경애, 그 사람의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 더 나아가서는 사상까지 깊이 파악하는 독서법이 있다. 그 정도로 읽어야만 진정한 독서법이라 할 수 있다.”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우리가 연수회에 임할 때도 “사전에 자세히 조사하라.”라고 하셨다.
다음 공부할 책으로 위고의 《93년》을 채택했을 때에도 담당을 정하여 각자 줄거리, 프랑스혁명의 시대 배경, 등장인물의 성격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토론 당일에는 차례로 일어나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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