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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상도, 하도)는 경남 통영의 남쪽 바다에 위치한 섬으로 동서로 나란히 누워 있다.
사량도는 이러한 지형적인 위치 때문인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여 고려시대부터 수군이 주둔하였다.
상도 면적 10.798km2, 해안선 길이 17.5km, 최고 높이 400m(불모산)이다.
인구는 546가구 982명(2015)이다.
하도는 면적 14.702km2, 해안선 길이 22.5km, 최고 높이 349m(칠현산)이다.
인구는 350가구 566명이다.
통영시에서 14km, 삼천포에서 남동쪽으로 16km 해상에 있으며, 두 섬은 1.5km의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이 해협은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배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천혜의 항구 역할을 하며 미역과 기타 양식장으로 사용된다.
사량도는 사량면소재지 섬으로 상도와 하도로 이루어졌다.
사량도 옆에 수우도가 있고, 그 옆으로 농개도, 잠도, 목도, 죽도, 술미도 등 8개의 무인도가 있다.
사량도는 상도와 하도 사이를 흐르는 해협이 뱀처럼 생겼다 하여 생긴 지명이라는 설이 있다.
사량도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듯하다.
상도의 금평리 진촌마을에 형성되어 있는 패총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주택가로 변했지만 표토 밑 40~50cm 내려가면 패각총이 나타나고, 50cm 정도의 패각총을 지나면 다시 부식토층이 나타나는데 현재도 이 층위에서 토기 조각 또는 목탄이 출토된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사량도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전 생활의 터전을 찾아 연암 차씨, 김해 김씨, 남평 문씨가 정착하였고 그 후 1840년 진양 강씨가 들어왔다고 전한다.
사량도의 옛 섬 이름은 박도였다.
두 개의 사량도 중 서북쪽 위편에 위치해 있는 섬의 조선 초기 지명은 ‘상박도’였고 아랫섬은 ‘하박도’였다.
고려시대에 박도구당소가 있어 봄 · 가을로 관할 고성수령이 남해의 호국신에게 남쪽변방의 보전과 함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망제를 지냈다.
조선초기 박도에 인접한 만호진의 수군 및 병선의 초계정박처가 되었으며, 섬에 영전을 일구어 병사들이 내왕하며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가 진영을 이곳 섬으로 옮겨 사량만호진이 설치되고 성종 21년(1490) 사량진성을 축성하여 비로소 진영의 위용을 갖추었다.
사량진은 임진왜란 때에 영남과 호남의 해역을 잇는 조선수군의 중요 거점이었다.
그 후 통제영이 설치된 이래 통영군창 둔전과 통영둔우의 방목처와 더불어 거북배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에 장졸 합 216명 규모의 병력이 상주하며 이곳 해역을 지켰다.
이후로 진영이 더욱 중요해지자 점차 원래의 섬 이름인 ‘박도’보다는 ‘사량진’, ‘사량’ 등으로 일컬어지게 되었으며, 조선후기에 이르러 결국 이러한 군영의 이름이 섬지명으로 전용되어 보편적으로 ‘사량섬’, ‘사량도’라 칭하게 된 것으로 사료된다.
즉 ‘사량’은 원래 두 섬 사이를 흐르는 해협을 일컬었던 옛 이름명에서 유래했다.
종래의 지명유래에 의하면 이곳 옥녀봉에 얽힌 비련의 설화에서 연유되어 ‘사랑’이 ‘사량’으로 변천되었다는 설과 섬에 뱀이 많이
서식했다는 설, 그리고 섬의 형상이 뱀처럼 기다랗게 생긴 것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사량도가 유명해진 것은 지리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꾼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도 사량도 지리산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날씨가 선선한 봄과 가을의 주말이 되면 줄을 서서 올라갈 만큼 수많은 사람이 찾는다.
사량도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도 봄에 여수에서 등대호를 타고 경상도 섬 답사 중에 사량도 상도와 하도를 둘러보고
하도에서 1박을 하면서부터였다.
그 외에도 두 번을 더 왔지만 명산인 지리산을 시간 관계상 등반하지 못했다.
사량도 면소재지인 진촌마을.
육지에서 여객선을 타고 오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마을이다.
여객선이 닿는 곳은 금평선착장.
양쪽으로 경사진 접안 시설이 두 개나 있다.
배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사량도여객선터미널’이다.
섬의 규모 아니 명성만큼이나 제법 크다.
터미널 앞에 ‘진촌마을’이라는 마을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 두 개의 장승이 있는데 환영인사와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선착장에는 두 개의 여객선 안내판이 있다.
통영항, 신구 삼천포항에서 운항되고 있다.
고성 용암포에서 오가는 배와 통영에서 오가는 배가 서로 다르다.
‘사량호’는 통영 가오치와 하루 6회 연결되고, ‘뉴다리호’는 고성 용암포와 하루 10회 연결된다.
연결횟수가 차이가 나는 것은 고성과는 20분이 걸리지만 가오치와는 40분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그 외에 사량도로 향하는 배는 다양하여 선택의 폭이 넓다.
통영 여객선터미널과 사천의 삼천포항에서도 출발한다.
사량도가 속한 행정구역이 통영이지만 통영 여객선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배는 차를 싣지 못한 일반선으로 하루에 2회 왕복한다.
차를 가지지 않는 노인네들이 통영에서 일을 본 다음 이 배를 타고 다시 들어간다.
4개 포구 중에서 통영 여객선터미널이 가장 멀다.
보통 섬들은 여객선 노선이 겨우 한 곳을 통하여 들어간다.
그러나 사량도는 육지와 매우 가깝고 풍랑주의보와 상관없이 다닐 정도로 육지와 섬들이 가려서 바다가 잔잔하다.
사량도는 네 곳에서 배들과 연결되어 교통이 최고로 좋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아름다운 산인 지리망산을 찾기 때문이다.
사량도 금평 선착장에는 다리 건설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사량도 윗섬과 아랫섬을 연결하는 연도교가 올해 준공되었다.
사량 상도(윗섬) 금평리 진촌마을과 하도(아랫섬) 읍덕리 덕동마을을 연결하는 이 연도교는 왕복 2차로(총연장 1465m 중 교량 530m)이며, 총사업비 476억 원이 투입돼 2010년 4월 착공됐다.
이곳은 이제 지리망산과 함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면서 연간 60만명 정도가 사량도를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지척의 두 섬 주민들은 여객선과 어선을 이용해 왕래하면서 야간에는 갈 수 없기에 큰 불편을 겪어 왔다.
지금까지 상도에만 주로 관광객이 몰려왔지만, 소외 받던 하도의 칠현산에도 등산객이 몰려들면 동반 성장이 가능하다.
여객선터미널 뒤로 이어지는 골목길.
밭이 있는 공간에 닿게 되는데 외따로 떨어진 건물은 로타리클럽 회관.
이 건물 뒤로 가정집처럼 보이는 건물 옥상에 하얀색의 예수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진촌2길 15-11’에 들어선 문에는 ‘천주교회 사량공소’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기둥만 있고 문이 없는 이곳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성모마리아상이 나무 그늘 아래에 있고, 옥상에는 두 팔을 벌린
예수님상이 있다.
해안길(진촌1길)을 걸어서 서쪽으로 가다가 낚시점 옆으로 난 골목길로 들어가면 제일 위쪽에 교회가 있다.
‘사량제일교회’이고 이 옆으로 길이 있는데 진촌2길이다.
오른쪽으로 담장을 두른 공간에 솟을문이 있다.
이곳에는 200년 이상 되는 팽나무 한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 뒤로 있는 산이 ‘고동산’으로 유채꽃이 볼 만하다.
고동산은 산형이 소라 고동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촌마을 왼쪽 끝자락에 사량면사무소와 함께 보건지소가 있다.
면사무소 뒤로 큰 길이 있는데 이 길이 ‘상도일주로’다.
여기서 북쪽은 대항마을로, 서쪽은 돈지마을로 가는 길이다.
이 앞으로 팔각정자와 함께 ‘사량만호 선정비’가 몇 기 모여 있다.
사량면은 조선시대 만호진(종4품)의 수군 및 병선의 초계 정박처로, 성종 21년에는 사량진성을 축성, 조선수군의 중요거점으로
통영을 지키던 군사적 요충지이며 군사 도시였다.
이에 진촌마을에서 지난 2012년에 사량진촌 마을 내 우물 속에 있던 사량진 만호 선정비 3기와 사량중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던
2기를 이곳으로 이전 복원했다.
사량도는 해안의 특수성 때문에 수군 전략 요충지로 유서가 깊다.
사량도는 고려 때부터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인해 이를 막기 위한 수군 전초기지로 이용되어 왔다.
특히 고려 말에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그 당시 최영 장군이 남해안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이곳에 진을 치고 왜구를 격퇴한 공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이 세워진 것이다.
조선시대 1544년(중종 39) 4월에 왜인들의 약탈사건 ‘사량진왜변’이 일어난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년 6월 1일 저녁에 사량도 하도(양지리 앞바다)에서 군사들을 쉬게 하고 난중일기를 썼으며 6월 2일 지금의
당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무찔러 당포대승첩을 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계속 사량에서 충무공이 진을 치고 머물렀으며, 사량 만호 이여염과의 접촉은 수차에 걸쳐 이루어졌다(난중일기에 사량이 나오는 횟수가 14회 이상이다).
사량도의 진촌 마을에는 객사터와, 서쪽에는 옥터가 있다.
상도의 동강 건너편 하도의 칠현봉 중 망봉에는 봉화터가 있다.
현재 덕동마을의 옛지명이 공수리이며, 이 일대의 산을 공수산이라고 했다.
사량면사무소 앞에 사량중학교가 있고 그 옆으로 배 한 척이 전시되어 있다.
70년대 남해를 주름잡고 달리던 ‘엔젤3호’다.
엔젤호는 (주)한려개발이 이탈리아에서 도입하여 1971년 4월 19일 취항 이후 1997년 9월 10일까지 약 26년 5개월간 통영을 기점으로 부산, 거제, 사량, 삼천포, 남해, 여수를 운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쾌속여객선이었다.
엔젤호 선사는 경영난과 사고까지 겹치면서 운항을 중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엔젤호는 1980년대에 연속해서 두 번의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1980년 6월 24일, 거제 장목면 잠도 근해에서 통영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엔젤1호와 부산에서 여수로 달리던 엔젤2호가 짙은
안개로 충돌했다.
안개 속에서 무리한 운항으로 5명 사망, 18명 중경상을 입었다.
엔젤2호는 운항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폐선 조치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1년 뒤인 1981년 6월 16일, 엔젤5호와 6호가 부산 가덕도
이 일대는 예전부터 상습적 안개 지역이었다.
마의 해상길목으로 대형 해난사고가 잦았던 바다이다.
안개가 짙게 끼면 앞이 보이지 않아 까막눈 신세가 된다.
‘안개 속에는 명선장이 없다’라는 말처럼, 안개는 바다의 무법자와 다름없다.
육지와 달리 바다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일기예보를 중요시하고 무리한 항해를 금지해야 한다.
그러나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수성 때문에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이런 아픈 사연을 안고 있는 ‘엔젤3호’를 2005년에 새로 단장하여 해상이 아닌 육상인 사량도의 진촌 물양장에 전시한 것이다.
부산항을 기점으로 거제 · 통영 · 여수 등 남해안 뱃길을 30여 년 동안 운항해 해상 교통문화에 큰 변화를 몰고 온 쾌속선 엔젤호의
추억을 되살렸다.
사고와 경영부실로 인하여 지난 1998년 3월에 폐선된 엔젤3호를, 시의원을 지냈던 김채원(사량면) 씨가 960만원에 낙찰을 받아
보관해 오다 2004년 7월 통영시
추억의 엔젤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분명히 사량도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본다.
엔젤호 앞에는 삼거리가 있다.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또 다른 마을로 가는 길이고 직진은 여객선 터미널 가는 길이다.
안내도에 의하면 또 다른 마을이 있는 선착장 부근은 동강이자 탄금대로 표기되어 있다.
하도 덕동선착장 바로 앞에 위치한 그 선착장이다.
아랫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선 모래기미 동북쪽에 있는 ‘동강나루터’를 이용하여야 한다.
사실 동강은 상 · 하도 사이의 바다인데 강으로 통하고 있다.
여기서 나룻배를 타고 상도와 하도 사람들이 교류를 하였다.
이 나룻배를 타고 학교를 다녔으며, 하도 사람들은 상도로 건너와서 행정적인 일과 생필품을 사들고 갔다.
동강은 긴 산자락을 물고 있는 바다가 마치 호수와 비교될 만하다.
‘탄금대’는 옥녀봉 앞에 있는 작은 산인데 형상이 거문고와 같다.
상도 일주로는 오른쪽은 산을, 왼쪽으로 하도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옥녀봉을 연결하는 구름다리가 보인다.
최근에 사량도 지리산 등산로 연결사업을 완료했는데 그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구름다리다.
등산로 연결사업은 향봉과 연지봉 일원에 보도 현수교인 일명 출렁다리를 설치하는 것으로, 총연장이 61.20m에 이른다.
옥동마을 왼쪽으로는 하천이 흐르고 있다.
옥동마을 오른쪽의 암반으로 된 봉우리가 ‘가마봉’일 것이다.
가마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관광안내도에 의하면 옥녀봉과 가마봉 사이에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있다.
일주도로인 오르막길 왼쪽 언덕에 팔각정자가 있다.
옆길은 ‘성자암’ 가는 길이라고 되어 있지만, 역시 마을로 가는 길임과 동시에 등산로이기도 하다.
불모산 가는 길목이다.
‘불모산 고찰 성자암’이라고 표기된 것도 그 이유다.
여기서 700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성자암 가는 길목에서 마을을 보면 이곳은 전형적인 산촌 형태다.
정자 옆으로 이어지는 해안일주도로를 타고 계속 걷는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왼쪽 해안으로 작은 포구가 있다.
이 포구 역시 옥동이다.
통로가 2미터 조금 더 되어 보이는 사각형의 계류장을 가진 포구다.
당연히 이곳에는 배 한 척이 없다.
집도 서너 채 정도로 보인다.
이곳에도 약간의 농지가 보인다.
횟집 한 채와 펜션시설이 두 채 정도 있다.
해안도로가 급격하게 꺾이는 지점에서 돌아서면 바로 앞에 마을이 있는데 ‘사금마을’이다.
사금마을 역시 반원형의 선착장과 두 개의 방파제가 있다.
두 개 다 남쪽에 위치해 있고, 방파제 사이에 물양장이 있다.
사금마을은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도로를 중심으로 하여 선창 부근에 집중되어 있고 도로 주변에 집이 몇 채 있을 뿐,
비교적 작은 마을이다.
그리고 해안일주도로와 선착장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
도로와 마을 사이에는 농지가 자리하고 있다.
좁은 내리막길인데 찻길은 양쪽으로 있다.
일주도로 에서 사금마을로 가는 길은 ‘사금길’이다.
역시 선착장 주변에 집들이 모여 있고 그 뒤로 밭이 경사를 이루고 있다.
바로 보이는 높은 곳이 지리망산(398m)이다.
불모산이 주산이지만 지리산이 더 인기가 있다.
지리산이 보인다고 해서 지리망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산에 오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홍보물을 보면 난이도와 산행시간을 고려한 4~5개의 산행구간이 소개되어 있으나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코스는 크게 두 가지이다.
사량도 서쪽의 돈지리에서 여객터미널이 있는 동쪽 끄트머리 진촌마을까지 6개의 봉우리를 잇는 종주 코스와 옥동마을 성자암을
출발해 불모산-가마봉-옥녀봉을 거치는 능선을 타고 진촌마을로 빠지는 코스다.
작은 방파제 옆에는 양쪽으로 부교가 있다.
이 부교를 통해 사람들이 배를 탄다.
오른쪽 큰 방파제의 3분의 2정도 길이의 방파제다.
이 방파제 왼쪽으로 아주 짧은 방파제가 있고 그 사이에 경사제가 있다.
이것은 철부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작은 배들을 물양장으로 올릴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크레인이 없다.
방파제에서 해안을 따라 맞은편 갯바위 해안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는 ‘종사금길’이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중간지점에 2층짜리 건물인 마을회관이 있다.
해안길 끝으로 가면 왼쪽으로 골목길이 있다.
왼쪽은 밭이고 오른쪽으로 집이 몇 채 있을 뿐이다.
이곳의 일주도로는 정확하게 ‘상도일주로’다.
그런데 사금마을 주변에서부터 돈지마을로 가는 길은 급커브가 많다.
언덕을 넘어가는 것이기 때문인데 상도의 최남단지점에 해당하는 부분에 이르면 앞으로 작은 섬이 하나 보인다.
대섬이라는 무인도다.
이 지점이 돈지마을이 시작되는 곳인데 덴지게(돈지마을) 서남쪽에 있는 이 ‘댓섬(竹島)’은 조선시대 초기에는 활을 만들기 위해서
대나무를 심었던 곳이다.
사량도는 종가도, 죽도, 잠도, 학도, 목도 등 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급커브 지점을 지나면 왼쪽으로 밭이 있고 집이 몇 채 보인다.
여기가 ‘작은 돈지’라고 하는 곳이다.
농막도 있고 해안길도 만들어져 있다.
작은 돈지 앞 오른쪽으로 길이 있다.
‘돈지길’로 돈지마을의 첫 골목길이다.
포장을 하긴 했지만 마을과는 약간 떨어진 밭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여기서 어느 정도 가면 왼쪽으로 배수지가 있다.
하천을 낀 이 주변에 몇 채의 집이 있을 뿐 나머지는 농지다.
이곳에서는 논농사도 한다.
하천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면 위아래로 길이 있어 오른쪽으로 간다.
집들이 별로 없고 농지만 있는 이곳을 계속 올라가면 몇 채 펜션시설만 있을 뿐이다.
한참 올라간 다음 펜션 옆으로 난 샛길을 통해 가면 마을로 이어진다.
여기는 마을과는 상당히 떨어진 지점으로 등산로 입구에 해당한다.
이 길로 해서 계속 가면 ‘촛대바위’ 와 ‘평바위’가 있다.
마을의 서쪽 방파제로 이어지는 물양장이 있는 곳, 버스정류장 주변으로 다양한 안내판 시설을 해두었다.
그 옆으로 마을표지석이 있다.
돈지마을은 500여 년 전 진촌마을에 진을 설치할 때 다른 부락에 비해 가장 부역을 많이 한 마을이라 하여 ‘고된 지게’라는 뜻에서
‘덴지게’라 일컬어오다가 그 후 개(浦)가 못처럼 생겨서, 혹은 마을 형상이 못처럼 닮았다고 하여 ‘돈지’라 부르게 되었다.
돈지마을 동제는 매년 음력 6월 5일에 지낸다.
이곳 물양장은 상당히 간결한 편이다.
잡다한 것이 거의 없다.
바닥에 곡식을 널어놓은 것이 전부인 물양장 뒤로 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몇 그루의 야자수 나무와 정자 등의 시설을 갖추었고, 앞에는 지리산숲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큰 방파제 가는 길목에는 공중화장실이 있다.
큰 방파제 끝에는 하얀 등대가 있다.
화장실 옆으로 오르막길이 있다.
이 길이 일주로이자 지리산으로 가는 길이다.
S자형 도로의 끝자락에 서면 서쪽으로 무인도가 보인다.
‘농개도’라는 섬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보는 방향에 따라 섬의 형태는 달리 보이는 법.
여기서는 정면으로 바라보인다.
왼쪽으로는 뭉툭한 산으로 된 형태고, 오른쪽으로는 가늘게 늘어진 올챙이처럼 보이는 섬이다.
그 뒤로 조금은 커 보이는 섬이 수우도, 약간의 커브성이 있는 길은 오르락내리락 형태다.
이 길은 섬의 서쪽을 끼고 달리게 되어 있어 남해와 삼천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을 이룬다.
특히 여기서 보는 삼천포대교의 멋도 일품이려니와, 일렬로 달려가는 고깃배들의 행렬은 마치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장면과도 같다.
섬의 북쪽에 위치한 서쪽 마을이다.
이곳은 고성군 하일면에서 사량을 오가는 나룻목인 ‘안목개’라고 하는데 지금의 내지다.
길의 중요한 곳을 말하는데 지명 개정 때 잘못 표기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서쪽 방파제 앞의 마을표지석에는 ‘환상의 섬 사량도 내지마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옆으로는 커다란 고목이 자리하고 있다.
사실은 고목들이 옆으로 늘어서 담장 역할을 하고 있다.
방파제 왼쪽으로는 경사제가 있는데 철부선용 선착장 시설이다.
두 개의 부교가 있는데 끝의 부교는 크기가 상당히 넓은 편이다.
여기서는 삼천포와 연결되는 도선이 운항되고 있다고 한다.
방파제 옆 물양장에는 포장마차 횟집들이 늘어서 있다.
다른 마을에 비해 여기는 이런 식으로 횟집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그 맞은편에 있다.
단순한 섬의 골목길이다.
집들이 몰려 있는 골목길은 두 개의 골목으로 구분된다.
‘내지길’과 ‘본내지길’이 그것이다.
밭이 많은 편이다.
내지마을 150여 명의 주민들은 반농반어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여느 섬과 마찬가지로 사량도의 내지마을 주민들도 대부분 70세 이상의 독거노인들이었다.
마을 끝, 옆으로 소하천인 내지천이 있고 그 옆에 폐교된 학교가 있다.
‘상도일주로 467’에 들어선 이곳은 ‘사량도천문대’.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학교 조형물들이 그대로 있는데 운동장 한쪽에 천문대 시설을 설치하였다.
교실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실습실과 교육실로 쓰이고 있다.
개인이 사들여 천문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내지분교 옆으로 나와 마을 안길을 따라서 불보산쪽으로 올라가면 꼬불꼬불한 골목길의 양쪽의 담벼락에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다.
넓고 시원한 캔버스 위에 그려진 수많은 동시와 동화 속 그림들이 탐방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동문학가이며 거제민속박물관 관장인 옥미조(초등학교교장 출신) 선생이 자신의 초등학교 교사 첫 발령지인 이곳 사량도
내지마을에 꾸민 것이다.
옥미조 선생은 부산사범학교를 나와 1961년 청년 시절 애송이 교사로 1년 9개월 동안 근무했던 인연이 있었다.
삽화가 그려진 골목을 나와 오른쪽 오르막길은 진촌으로 이어지는 일주로다.
내지에서 대항으로 이어지는 길 중간에도 작은 마을이 있다.
조금 더 가면 왼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답포’이다.
답포마을은 두 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덕을 중심으로 왼쪽 마을에는 선착장이 있지만 오른쪽 마을에는 작은 섬으로 방파제를 연결하였다.
이 마을에 마을회관이 있는데 ‘솔미’라는 지명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앞 섬 이름이 바로 ‘솔미섬’이다.
그래서 해안도로는 ‘솔미길’이다.
상도 북쪽 방면 동쪽에 위치한 대항마을.
상도에 일주도로가 생기고 전국적으로 도로망이 발전하면서 고성의 용암포와 사량도 대항 간의 거리가 20분으로 단축되어
대항마을은 뜨는 마을이 되었다.
마을 입구에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여기서 옥녀봉을 바라보면 구름다리가 확실하게 보인다.
이 길이 ‘대항길’이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대항선착장에 닿는다.
물양장에는 크레인이 있고 주변으로 횟집이 몇 곳 있다.
방파제 입구에 포장마차촌이 있다.
방파제 중간에 부교가 있다.
이곳 역시 삼천포와 연결되는 항로가 있다.
두 척의 일신호가 있다고 한다.
방파제 끝으로 가서 앞 옥녀봉을 바라본다.
몇 개의 암봉이 보이는데 오른쪽으로는 서로 다리로 연결되어 있지만 왼쪽의 우뚝 솟은 옥녀봉은 아무 시설도 없다.
대항길을 따라 동쪽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마을회관이 나오고 더 걸어가면 일방통행의 길이 있다.
그 옆으로 화장실과 샤워장, 야영장, 파고라 등의 부대시설이 있다.
그 맞은편 해안은 물이 아주 맑은 모래밭의 해수욕장이다.
바로 사량도 유일의 ‘대항해수욕장’이다.
물도 맑다는 느낌을 주지만 모래도 참 곱다.
해수욕장을 따라 계속 가면 선착장이 나타난다.
사량도의 지리망산은 국내 100대 명산 중 하나이며 모험과 낭만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 지리망산은 25위를 차지했다.
사량도를 방문하는 사람 10명 중 8명은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다.
사량도를 찾아오는 관광객은 한 해에 40만 명 정도이다.
사량도 산행의 절정은 3월 중순부터 4월까지이다.
이 무렵에는 주말에만 보통 7,000명 정도가 몰려온다.
이렇게 사량도가 유명한 섬이 된 것은 상도에 지리망산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들어오는 코스도 다양하다.
통영항, 통영 가오치, 고성 용암포, 사천 삼천포항 등 4군데 항에서 출항한다.
육지와 매우 가깝고 풍랑주의보에 걸리지 않는 천혜의 섬이다.
육지에서 여객선이 사량도 내항마을, 돈지마을, 금평항에 도착한다.
내항과 금평항에 도착한 여객선에서 내린 방문객들은 ‘콩나물 시루’로 변한 마을버스를 타고 15분이면 돈지마을에 도착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이곳은 어업과 밭농사를 하는 등 평범한 섬이지만, 봄과 가을 산행 철에는 전국에서 몰려드는 산꾼들 때문에 매우 북적인다.
돈지마을에서 사량도 지리망산의 종주 코스가 시작된다.
가장 인기 있는 산행은 상도의 4개 산봉우리를 모두 통과하는 8km 종주코스로 보통 5시간이 걸린다.
돈지항-지리망산(398m)-볼모산(400m)-가마봉(301m)-옥녀봉(303m)-금평항으로 이어진다.
돈지마을에서 산 능선을 따라 오르면 병풍처럼 돈지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촛대봉에 도착한다.
한 시간 정도 가파른 촛대 바위산에 오르면 지리망산397m에 당도한다.
산행 처음부터 황홀경에 빠져서 탄성이 나온다.
낭떠러지 절벽과 급경사의 등산 코스로 유명하다.
전문적으로 산을 타는 산악인들도 깎아진 산 능선에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사량도의 최고로 높은 봉우리인 볼모산(400m)까지 가는 도중에 가파른 암반과 해송 숲과 나무들이 경쟁하듯 등장한다.
해발 4백미터 정도의 봉우리들을 연결한 출렁다리와 90도 경사에 가까운 수직 철계단 코스까지 ‘악산’으로 이름난 지리망산은
작지만 매서운 곳이다.
지리망산에서는 멀리 남해와 삼천포대교가 보인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진짜 지리산까지 조망할 수 있기에 지리망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사량도의 산은 뭍에 비해 높이나 그 규모는 작지만, 산행코스와 암릉미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가마봉 아래의 전망대에 올라서면 옥동마을과 대항마을 해수욕장, 다랭이 논, 상도와 하도의 굽이치는 해협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망산의 산행 하이라이트는 가마봉과 옥녀봉 구간이다.
2013년 3월에 출렁다리가 만들어졌는데 그 전에는 밧줄과 수직계단을 이용하여 가마봉에서 내려와 다시 바위를 타고 옥녀봉에 올랐기에 힘이 들었다.
공룡의 등뼈 같은 암릉의 능선을 따라서 철제계단과 로프, 줄사다리 등을 타고 옥녀봉으로 향하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마치 군대의 유격훈련장을 방불케 하였다.
지금은 산행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출렁다리를 설치했기에 짜릿한 묘미는 사라졌다.
400m 높이의 두 봉우리를 잇는 출렁다리를 보면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겁이 날 수밖에 없다.
출렁다리를 타고 옥녀봉으로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보는 이 일대의 경관은 형언하기 어렵다.
15년 전만 해도 산행 중 낭떠러지를 보고 무서워 우는 여자들이 많았고,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오금이 저려 당황하는 사람도 많았다.
지금은 우회 산길을 만들고, 난간에다 출렁다리까지 생겼으니 예전만큼 스릴을 느끼지 못하지만 험한 산세는 여전하다.
이제는 누구든지 안전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게 곳곳에 안전한 길을 만들어 놓아서 4시간 정도로 대폭 줄어들었다.
건강한 사람이 약간 서두르면 3시간 30분 정도면 무리없이 산행을 할 수 있다.
면사무소가 있는 금평마을에서 옥녀봉까지만 등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산행은 2시간 정도 걸린다.
그 대신 가마봉의 장쾌한 풍광은 포기해야 한다.
마지막 옥녀봉에 올라서면 사량도의 관문인 금평항이 내려다보인다.
여객선이 수시로 도착하고 떠나는 비경 때문에 매년 봄, 가을에는 옥녀봉 등반대회가 열린다.
사량도의 푸르른 바다와 기암괴석을 보면서 황홀경에 빠지고 자유로움을 마음껏 느끼고 싶다면 이곳 지리망산에 오르기를 권한다.
통영팔경의 하나인 사량도 옥녀봉에는 애절한 전설이 있다.
아주 먼 옛날, 사량도 옥녀봉 아래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이 마을에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옥녀라는 예쁜 여자 아기가 태어났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어머니는 옥녀를 낳은 뒤 병으로 세상을 등졌고, 아버지마저 슬픔에 잠겨 몸져눕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아버지도 세상을 하직했다.
기구한 운명의 옥녀는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때 이웃에 홀로 살던 홀아비가 옥녀를 불쌍히 여겨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이집저집 다니면서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잘 보살폈다.
옥녀는 이 사람을 친아버지로 알고 성장했다.
세월은 흘러 옥녀의 나이가 열여섯이 되자 옥녀는 어여쁜 처녀가 되었다.
그 미모가 아주 뛰어나 주변에 소문이 자자했다.
이즈음 옥녀를 길렀던 의붓아버지는 마음이 동하여 옥녀를 딸로 보지 않고 이상한 행동을 할 낌새를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옥녀는 그를 친아버지로 알고 있었는데, 슬픔에 잠긴 옥녀는 이러한 위기를 벗어날 묘책을 생각했다.
“아버지! 제가 간절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라는 대로 행하시면 아버지의 요구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내일 새벽 날이 밝기 전에 상복을 입고 멍석을 뒤집어 쓴 채, 풀을 뜯는 시늉을 하면서 송아지 울음소리를 내며 저 옥녀봉으로 네발로 기어서 올라오십시오.
그러면 아버지의 요구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미련한 의붓아버지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답답한 마음에 눈물로 밤을 새운 옥녀는 다음날 새벽에 옥녀봉으로 올라갔다.
인적이 없는 새벽녘에 옥녀봉에 앉아 있는데, 상복을 입고 짐승의 모습을 한 의붓아버지가 벼랑을 기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옥녀는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린 채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열여섯 피지 못한 꽃봉오리 하나가 산산히 부서졌다.
사량도 옥녀봉 전설은 근친상간 금지와 타락한 동물적 본능을 엄중히 경고하는 교훈으로 오늘날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옥녀봉 밑에는 사철 붉은 이끼가 끼어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옥녀의 피라고 믿고 있다.
지금도 결혼식 때면 옥녀봉이 보이는 곳에서는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으며, 신부가 결혼하여 가마를 타고 가다가도 옥녀봉 아래를 지날 때는 걸어서 가는 풍습이 있다.
하기야 이 산하에서 옥녀처럼 살다가 사라져 간 처녀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이번 기회에 옥녀봉 전설을 콘텐츠로 만들었으면 한다.
전국의 산 중에서 가장 흔한 산 이름이 ‘옥녀봉’ 인데 옥녀는 말 그대로 옥처럼 마음과 몸이 정결한 여인을 말한다.
산림청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산이름을 가진 것이 봉화산(47개), 국사봉(43개), 옥녀봉(39개), 매봉산(32개), 남산(31개) 순이며 그중 옥녀봉이 세 번째이다.
각 산들의 옥녀봉이 지닌 숨어 있는가치를 발굴해 낸다면 단연 으뜸이 사량도 옥녀봉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문화 콘텐츠로 담아내서 지역축제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사량도에서는 2004년부터 옥녀봉 등반축제가 열린다.
그러나 정작 옥녀봉의 주인공인 옥녀는 뒷전이고, 등산이 주행사이다.
사량도 주민들의 삶 속 깊숙이 자리잡은 옥녀봉 전설이 영영 사라지지 않기를 고대한다.
첫댓글 사량도를 7번 가서 종주하면서도 이렇게 많은 정보를 접하지는 못했는대 좋은내용 잘 읽었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