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주 시인의 시심을 엿본다
작성자:김육주
작성시간:2019.03.13 조회수:192
댓글
동지섣달 기나긴 밤
설핏설핏 드는 잠에도
그리움을 불러놓고
바람소리와
어슴푸레한 달빛이
공연한 심사로
심장 박동 소리는
밀랍으로
귀를 틀어막아도
더더욱 고동치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그리움
선잠 자다 깨다
밤이 깊어질 수록
고단한 심사
이마에 환한
등불만 켜놓고 있어
야속 하기만 하다
까치밥을 남겨 놓고
감꽃에서 내 유년을 본다
철없던 시절의 감꽃은
어린이들 입으로 들어가는
군것질거리였다
하얀 꽃을 입안 가득 물고
오물오물 씹고 있으면
달콤한 맛이 그만이었다
무심코 풋감을 따
먹으려 들면 떫기가
건방으로 일축했다
세월은 시나브로
나를 철들게 했고
감나무에서
인생 삶의 여정을 본다.
마냥 떫을 것 같아도
날로 농익어 가는 홍시가
내 여심에 군침을 돌게 한다
이제 철들고 넉넉함이
감나무 높은 가지에
까치밥을 남겨 놓을
여유가 생겼다
농익은 홍시처럼
입안으로 찰싹 감기는 느낌이
임의 혀끝인 듯
입안에서 뱅뱅 감돌고 있다
제철 맛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바람이려니와
봄나물이 한창 맛있을
사월 초승께
산이나 텃밭에 심어둔
푸릇푸릇한 봄나물을 케어다
상 가득 차렸으니
산에 진미가 부럽지 않다
그것도 사월 초승께
산이나 텃밭에서 케어다
갖가지 양념에 버무려
보리밥 강된장에 쓱쓱 비벼
입으로 들어가면
입안 가득 상큼함이
얍삽한 참새 뒷다리에 비할까
흰 모시 적삼이 무색하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는 웬일인지
빗나가기 일쑤다
믿을 것도 못 믿을 것도 아니라
번거롭다고 우산을
챙겨 들지 않고 길 나섰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흰 모시 적삼이 무색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비 끝에 나는 햇살에
빛바랜 적삼을
흐르는 물에 빨아서
밀 풀에 문질러 널었더니
바람이 손질하려고 나선다
꾸둑꾸둑하게 말라가는
풀칠한 모시 적삼이
내 손을 기다리지 않은 오후!
내 몸에 윤활유 김육주
성 튼 몸 어디 두고
해는 이미 중천인데
나는 앓는 소리로
늦은 아침을 깨운다.
어설피 부는 바람은
시원히 열어젖힌
창문으로 불어와도
더운 바람이다
온몸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땀땀방울이
역겨워지는 어느 여름날
절절 끓은 몸을
지키던 심장에서
고동치는 소리가
고장 난 세계 바늘처럼
성가시게 가다 서 다한다
나는 고장 난 몸에
기름을 넣는 것처럼
이열치열로
뜨거운 모닝커피를 즐겨야
하루가 평안하다
2016, 12, 22, 수정 작
연일
연일
바람 한 점 없는 침묵 속에
이글거리는 태양빛이
내 정수리로 내려앉으며
온몸을 절절 끓게 한다
계절은 시나브로
선선한 가을바람이
살랑거리며
데일 것 같았던
온몸에 열을 식혀준다
무섭게 내리쬐며
들끓던 더위도 잊은 채
시름없는 잠자리 떼
저마다의
주둥이 꽁지를 마주치며
가을 소풍이라도 즐기는 듯
즐거운 향연이 그림 같다
연실 허수아비 어깨에
다부지게 앉았다
당차게 차오르며
드넓은 하늘을 수놓는
가을마당의 잠자리 떼
거들먹거려도
가을이 깊어가니
억새꽃이
눈송이처럼 희다
바람 소리가 거칠고
하늘빛이 시리다
엄동이 코앞에 있고
날 선 바람이
제 아무리
거들먹거려도
물 항아리 채워놓고
따스한
솓 덕 앞에 앉아서
몸을 녹이니
언 몸이 봄눈처럼
사르르 녹는다
있지?
있지? 나 말이야
당신만 있으면
겨울밤이 짧았어
냉골에 석석한 이불을
덮고 있어도
당신만 있으면
훈김으로 데워지고
이불깃을 들치고
들어오는 바람도
당신과 나의
품속에서 잠들어
생콩 같은 나에게
속없이 살가웠던 당신
부끄러워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있지? 나 말이야
당신, 무진 장(無盡藏)
사랑해 알지?
제주 방언/ 석석한/ 시려운
생콩/ 익히지 않은 콩
2.풍경-김육주-
나뭇가지마다
미동 없이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다
앞산이 야트막이 내려앉고
하늘은 목화솜을 풀어 놓아
어머니 손길을 기다리는 듯 하다
매미 소리 자지러지고
까치가 반가운 손님을
불러 놓을 것 같은 아침나절
밤 새 울던 귀뚜리
날 새는 줄 모르고
귓전에서 절절하다
3.가을 햇살이 살갑다. _김육주_
먼 길을 걸어
가을 산에 다다라
손을 내밀고 더듬기만 해도
어머니 젖무덤처럼 넉넉하다
버거웠던 삶
부지런을 떨었다만
남은 건
가을 햇살이 아쉬운
게으른 몸뚱이 뿐이다
나는
한숨을 돌리며 언덕에 앉아
온 몸으로 반기는 햇살,
가없는 살가움을 느낀다
너무 멀리 오래 걸었다
숨이 턱에 차서 하늘을 보니
서녘하늘이 뉘엿뉘엿 붉다
4, 이 보오 -김육주-
산다는 것 말이오
죽어라. 사는 것도 좋지만
미련한 몸뚱이
돌봐가며 사는 것이 어떻소
노양(老陽) 앞만 보고 살아온 삶
돌이켜 보면 후회뿐
인생사,
어정어정 가을비 맞은 듯
고단한 몸을 하마, 등짐 지듯
지고 있으려니 할 수만 있다면
젊은 날 하루만 빌려오고 싶다오
길섶 귀뚜리 밤을 낮 삼아 울어도
때론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며
조금은 느긋하게 사는 삶
생각을 해 보니
때를 건너뛰는 것도 예사였고
낮밥을 먹었는지 말았는지
오후 1시[時]경에 느낌표를 쓴다오
제주방언/어정어정/서성임
5.그건 사랑이었습니다.-김육주
오늘 같이 해종일 오는 빗속을
당신이 흠뻑 젖은 몸으로 온들
안타까움보다는 반가운 마음에
젖은 몸일망정 얼싸안고
더덩실 춤이라도 출 수 있으리다
머리에 하얀 끈을
질끈 동여매고 있다가도
아픈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
어깨춤이라도 추고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부랑자처럼 오시는 당신
분명한 건 사랑이었습니다
6.비가 오고 있어-김육주-
언제부터 앉아 있었던 거야
귀엣말로 속삭여
눈이 어두워서
바늘귀가 도통 보이지 않아
골무가 터져 진물이 나는데
손짐작으로 더듬고 있어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니
터진 양말이 수두룩해
하루 품으로는 어림도 없어
할 일이 태산인데
눈꺼풀이 무거워
하품만 하는 거 날씨 때문이야
빗소리 때문에 지짐이가 먹고 싶어져
누구의 허락도 개의치 않고
걸쭉한 막걸리와 동침을 하는 것도
오늘 하루쯤은 괜찮을 거야
1,
벤치가 되고 싶다
지친 나그네 쉬어갈 수 있는
벤치가 되고 싶다
더위와 추위 속에서도
한 자리를 고집하면서
가로수가 버티고 서있는 곳
해 그림자 부풀어 오르면
오가는 님 쉬면서
한 시름 놓고 갈 수 있고
나그네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산들바람이 손 보태는 정오
가늠할 수 없이
부풀어 오르는 해 그림자
시나브로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어스름이 내려앉은 다
삽시에 떨어지는 별똥별이
내 눈을 휘둥그레지게 한다
2,
꿈엔들 잊으리까
자연의 소리가
귓전에서 익숙하게
들리던 내 고향
도시의 괴음 소리와
기차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바람을 타고
먼 듯 가까운 듯
들려오던 곳
갯 갈매기 날아드는
부둣가에선
정겨운 인심이 나는 곳
물질하던
어머니의 숨비 움 소리
호이호이 들리던 곳
자나께나 그리던
고향집은 흔적 없이
회색빛 건물들로
들어차 있고
오감(五感)으로
더듬어봐도
가늠할 없는 그리움
꿈엔들 잊으리까
3,
도론 도론
하루의
무료함을 달래줄
유효기간 없는
벗님을 불렀더니
한 다름에 달려왔다
귀중히 여기던 다기잔을
툇마루에 들고 나와
서로 마주 앉아서
도론 도론
정담을 나누며 마시는
달큼한 커피가
내 혀끝을 녹이고 있다
조심조심 다루는 찻잔 속에
일렁이는
물결을 들여다보니
하늘도, 구름도, 해님도
눈치 없이 끼어들어 있다
조금은 서운해도
더러는 야속해도
아옹다옹 다투지 말고
누구보다도 더 다정하게
벗아! 살다가 가세나
'도란도란'의 방언, 도론 도론
부추기다
젊어서는 누군가가
나를 부추기는 바람에
하느님도 내편인 듯
의기양양 했었지
남이사 믿거나 말거나
그렇게 범이라도
때려잡을 것 같았던 몸이
어느 순간 부실해지고
심장소리가
덜컥거리는 이즈음
하늘님은 무엇이
거슬렸는지
싸늘하게 토라져 있다
내 몸을 오몽해 질 때야
무섭고 두려울 것이 없었는데
허 개비 같은 몸을
지니고 있으려니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앉은자리가 가시방석이다
부추기다/ 이루어지거나, 행해지다
제주 방언/ 오몽/ 움직이다
4,
빈들에 봄 불붙듯
빈들에 봄 불붙듯
타들어 가는 가슴
이른 아침
자리끼 한 대접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날짐승의 지저귀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마냥 즐거울 수 없는 삶
ㄱㄱ
봄 불이라고
손 놓고
비 오기만 기다릴 수 없지 않은가
5,
그리움
홑이불 움켜쥐며
돌아눕는 말년에
가슴앓인 사랑이
꿈인 듯 생시인 듯
그리움도 미련도
아련하기만 한데
아직도
보내지 못한 미련이
쓰린 가슴에 맺혀
그리움에 벼 겟잎 적시며
잠을 청합니다.
가슴앓인 사랑을
꿈에서 만나
얼싸안고 한바탕
울어버리면 좋을까
괜스레 저며 오는
가슴에 상처가
고독을 새우며
긴 밤을 지새우네.
6,
어머니의 하루는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일어나셔서
식구들을 건사하시고
이슬 밝고
밭일을 나가신다
손톱이 문 드러 지도록
구슬땀을 흘리시며
여우비 한 자락에도
지친 몸을 달래어가며
서녘 해가
뉘엿뉘엿 지도록
굽은 허리
아랑곳없이
일손을 서두르시고
어스름이 되면
어김없이 이슬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신다
생각을 하면
밤을 낮 삼았던 어머니,
하룻밤이라도 느긋이
주무셨으면 좋으련만
고된 몸 누일 데 없이
골무가 터지도록
바느질하시던 어머니
무거운 눈꺼풀을
가누지 못해도
꾸벅꾸벅 졸다 깨다
호롱불이 닳도록
둘도 되고 샛도 되는
바늘 귀가 걱정이시다
7,
가을은
낙엽이 더위 먹은
시련을 겪더니
가을은
꽃 단풍을 선사하고
발긋하게
수줍어지는 얼굴엔
햇살이 내려앉으니
눈이 부십니다
고비 겪었던 시련과
바람에 부대끼는
고난에도
가을은 무르익어서
알알이 영글었습니다
새찬 바람이 불어와
엄동이 코앞에 있다고
뉘가 귀띔을 했는가
다람쥐와 청솔모가
바쁘게도 돌아칩니다
갈맷빛 푸새들이
지레 쓰러지며
흙으로 보태어지는
가을 막바지 겨울 초입에
8,
그림자 너는
종일토록 바동대는
나를 따라다니느라
지칠 대로 지친 너
하루의 노곤함을 안고
밤이면 고단함도 잊은 채
스스럼없이 따라와서
나와 동침을 하지
언제나 나의 행실을
탓하지 않은 너
내 시늉만 원숭이처럼
따라 하는 일에
익숙하기만 한 너
오늘도 너는
동트기가 무섭게
나를 따라
하루하루를 돌고 돌며
언제나 무언으로
흉 허물없이
동행을 하고 있는 너와 나
9,
끈
누구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오랜 세월 속에
무뎌져 가물가물
언제부터인지
내손엔 이미 끈 하나를
잡고 길을 나서는 버릇이 있다
또 무언가를
잃어버릴 새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끈 하나를
단단히 쥐어 잡고 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억들이
고질병으로 남아서
가을을 가는
인생의 길목에서
이러다
정신머리라도
잃어버리지 않을까란
두려움에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야무지게
끈 하나를 붙들고
길을 나서고 있다
10,
꽃
울 안에서
함초롬히 피었던 분꽃이
간 크게 담장을 넘었다
살포시 한 햇살을 보니
누가 꼬드겼는지 알 것도 같다
걱정스러워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귓 등으로 듣고
울담을 넘었으니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옛 말에 집을 나서면
고생이라던 뜻을
흘려들었던 것이
피치 못 할 병이라면 병이다
11,
안도의 한숨
아침에 일어날 수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주어진 하루가 행복하고
무탈했으면 좋겠다
창문을 활짝 열었을 뿐인데
들녘의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며 들어온다
향기 따라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사뭇 반가워지는 어느 아침
찌뿌둥하고
노글노글한 몸을
기운이 붉은 솓게
한 것 기지개를 켜본다.
12,
삶이 아득해도
삶이 아득해도
누군가가 다정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행복은 거기에 있으리라
모진 고난이
때 없이 찾아들어
마파람에 소용돌이처럼
휘둘러놓고 지나갔어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이름 모를 들꽃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모하는 마음이
다정하고 그윽한 눈빛이라면
행복은 거기에 있으리라
13,
바람 소리가 예사치 않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가 예사치 않다
태풍이라도 오려 는 지
삽사리 지키고 있는
대문의 삐꺽 대는 소리가
내 단잠을 설치게 한다
앞 냇가 물소리도 잘랑 잘랑
얼마나 소리를 지르며 흐르는지
없던 근심마저
날, 깨워놓고 있다
범이 물어가도 모르게
들었던 잠이
여시 잠이 되어버린 이 밤
가을밤을 설치며 울어에는
쓰르라미 소리가 구슬프다
14,
더 고울 수 없는 얼굴 -김육주-
매서운 추위와 꽃샘추위가
한풀 꺾이고 시냇가 물소리는
날짐승 들짐승들을 부르는
엔 간이도 시끌벅적한 사월입니다
산으로 향하는 상춘객들도
너나없이 부산을 떨며 나서고
한겨울 얼었던
크고 작은 나무 가지에
연초록 잎사귀
무수히 매달리며
푸르러지는 봄
저 고운 자태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다
젊은 날의 야릇한 사랑,
잊은 줄만 알았는데
이 봄에
꿈인 듯 만나고 있었습니다
15,
봄
봄은 상큼한 바람으로부터 오고
맑게 퍼지는 햇살로부터 온다
마중 나서는 시냇물 소리
잔잔한 선율로
현악기의 악보를 타고 있다
꼭두새벽부터
어디서 날아왔는지
물속을 점벙대던
왜가리 한 마리가
무슨 낌새를 채었는지
화들짝 놀라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완연한 봄이다
거칠 것 없이 흐르는 물소리
잔잔한 바람을 타고 있다
16,
불현듯
어느 해
동짓달 수무 나흘 날
지병으로
몸져누우셨던
아버지께서
개구리 못으로
말, 물 먹이러
가신 줄만 알았는데
아버지는 그 길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예닐곱
어린 시절에 겪었던
아버지와의
기악 없는 이별,
사둔 집에서
팥죽 허벅이
연실 보내왔던
눈이 담뿍하게
쌓였던 어느 해 겨울
동네 아이들에게
팥죽 자랑을 하며
웃줄 대고
놀았던 철부지가
불현듯 아버지 생각에
눈을 지그시 감고
유년의 그리움을
회상해 봅니다. 아버지...
* 제주 방언
허벅/물허벅의 방언
사둔 집에 초상이 나면
팥죽을 쒀오는 풍속,
17,
격 없는 만남이라면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는 시월
이 가을에 나는
생각이 같은 벗을 찾아 나선다
여행을 좋아하는 벗이라면
여행의 묘미에 빠지고
수다를 좋아하는 벗이라면
조잘조잘 너스레를 떨며
격 없는 만남이라면
더는 바랄 게 없으리라
갈매기살로 웃음꽃이 피고
지나간 세월과
다가오는 세월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아니라고
더는 늙지 않은 오늘이길
바라고 바라며
인생 오늘이 적으나마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18,
마파람
여름은 장마를 앞세우고
마파람이 거들먹거리고
불어온다
모진 비바람에도
밤꽃이 흐드러지게
치렁치렁 매달려 암내를 풍긴다
더위가 주춤거리는
장마 통에
비릿하게 풍기는 꽃이
비를 업고 오는 마파람 등쌀에
가지 몇을 내어주면서
밤꽃의 절규를 듣는다
흐드러졌던 꽃자리에
이슬 맺히면 봉곳한 꽃망울이
알알이 영글어 아람이 벌리고
그냥 건드리기만 해도
수두룩하게 떨어지는
풍성한 가을날 어머니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시단다
19,
20,
서두르지 마라.
시간이 지루하다고
안달 부리지 마라!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시간이
삽시에 지나가는 것도
세월과 더불어 가는 것이다
서두르지 마라!
물길에 얹어가는 세월
돌아올 길 없으니 허망하다
느긋할 수 없는 게
가고 못 올 인생인 것을
황혼이 붉게 타오르고
해넘이로 서둘러 넘어가면
아쉬움이 애써 잡으려 해도
형색이 없으니
잡을 수도 없거니와
잡히지도 않는 것이
세월에 얹어가는 인생이다.
살아가는 세상이 날씨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
30,
31,
당신을 기억하게 합니다
김장김치 잘 익으면
당신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렇다고 당신께
일일이 배운 것도 아닌데
어깨 너머로 보고
배웠을 뿐인데
손끝에서 우러나오는 맛이
당신의
손맛을 기억하게 합니다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호원 장담을 했건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마에 주름살과
얼굴에 검게 핀
건버섯마저도
당신을 기억하게 합니다
35,
임
임은 가없이 떠나는데
봄은 소리 질러 웁니다
겨우내 얼었던 앙가슴에
무직한 얼음덩어리가
날로 야속하더니
입춘에 나는 햇살이
살포시 멍든 가슴에
응어리를 풀어줍니다
임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만날 봄을 기다리면
등 돌리고 매정한 임
유달리 먹은 마음 없으니
밤이슬로 아롱 집니다
36,
성 튼 몸 어디 두고
놓치고 싶지 않은 오월 하늘
물비늘 서리는 풍경이
끝 간데없고
하루를 넘어가는 해는
오후 세시경
앞다투어 피어나는
꽃들이 지천에 만화방창이다.
이 좋은 풍경의
하늘 높이 뜬 점 하나
콩새가 되어도 좋고
아니면 조각구름이라도 되면
고향 산언저리에
잔디 지붕 올리고
정낭을 열어놓고 계실 것 같은
부모님이 보고 싶다
하늘 높이
날아올랐던 들뜬 마음 이사
뿌리박은 민들레 씨앗처럼
어딘들 못 가랴 만은
성 튼 몸 어디 두고
맥없이 앉아서
두물 불출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37,
흰모시 적삼이 무색하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는 웬일인지
빗나가기 일쑤다
믿을 것도 못 믿을 것도 아니라
번거롭다고 우산을
챙겨 들지 않고 길 나섰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흰모시 적삼이 무색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비 끝에 나는 햇살에
흠벅 젖은 적삼을
흐르는 물에 빨아서
밀 풀에 문질러 널었더니
바람이 손질하려고 나선다
뽀송뽀송하게 말라가는
풀칠한 모시 적삼이
내 손을 기다리지 않은 오후
38,
하늘과 땅 사이
시오리 길을
잰걸음으로 와서
한숨 돌리고
하늘을 보니
그림자는 드러눕고 있었다
진종일(盡終日)
끈질기게 따라붙더니
해거름이 되니
하늘로 숫은 듯
땅으로 꺼진 듯
총총한 별 무리가
약속이나 한 듯
임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 소린
집 안팎을 에워싸고
다떨어진 솟을대문의
삐꺼덕 소리는
밤 새도록 잠들 줄 몰랐다
40,
41,
뉘 집 뉴스를
이른 아침부터
동네 방송국 할머니가
긴 치마를
외로 두르고 다녀갔다
뉘 집 쪽 숟가락이 몇 개인지
빤히 아는 할머니가
이만하면 뉘 집사람들이
앉았는지 누었는지
먹었는지 말았는지
할머니 방송국을 통해
나오는 뉴스가
어른, 아이 없이
뉘 집을 꿰뚫어 볼 것이다
먹을 게 없으면 물을 데우고
옷을 벗으면
나의 눈이 무서우니
벗을 수 없으니
물만 데우는 일,
42,
삶은
울타리가
높이 처지지 않았다고
가난만 한 것은 아닙니다
야트막한 담장일수록
햇살이 마당 가득합니다
울타리 돌담 사이로
부는 바람이 반가운 바람입니다
풀벌레 소리
청을 높이는 여름밤이면
낮은 당장 속에
행복한 웃음소리가
울을 넘고 있었습니다
43,
목련화야
꽃샘을 무릅쓰고
그리 바쁘던가
아직은 추울 터인데
실 오락 하나 걸칠새 없이
꽃단장만 하고 나왔는가
뽀얀 얼굴을 봐도
내가 반해 버릴 터이고
발긋발긋이 홍조 띠며
수줍은 얼굴을 봐도
내가 환장할 터인데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아무래도 난 기다릴 터인데
그리 바쁘던가 말일세
44,
45,
46,
내 몸에 윤활유
해는 이미 중천인데
나는 않는 소리로
늦은 아침을 깨운다
어설피 부는 바람은
시원히 열어 놓은
창문으로 불어와도
더운 바람이다
몸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땀방울이
역겨워지는 어느 여름날
절절 끓은 몸을 지키던
심장에서 고동치던 소리가
고장 난 시곗바늘처럼
성가시게 가다 서다 한다
나는 고장 난 몸에
기름을 넣는 것처럼
이열치열로
뜨거운 모닝커피를 즐겨야
하루가 평안하다
47,
이녁
이녁은 나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거 알지
그렇잖으면
나 혼자서는 무서우니까
우리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고 사랑했던 거 맞지
언제나 이녁만 내 곁에 있으면
행복했었으니까
창밖을 보니
봄볕이 맨도롱 또똗하게
데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이녁이 한번 나가보면 안 될까
석석 하기만 한 이 가슴에 온기가
당신 때문에 맨도롱하게
데워질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제주 방언 /맨도롱 / 조금 따뜻하게
48,
49,
뽀송뽀송 하얗게
저 하늘에 핀
새하얀 목화꽃을
하느님 졸거든
눈결에 따다가
쐬기로 씨 발리고
얼레로 돌려서
뽀송뽀송 하얗게
무명 이불 만들까
임이 옷을 지을까
50,
정월 대보름 맞이
정월 대보름 밑
윷놀이대회
매년 우리 민족의 열리 행사다
동네마다 마을마다
보름맞이를 하고
떠들썩하니
푸짐한 상품들을 내걸고 있다
누구라도 한 번 줌
한 해의 운세를 보듯이
도, 게, 걸, 윷, 모
무르팍을 치며
왁자지껄 야단법석이다
정월 대보름 밑
윷판의 정겨움
언 입술에 가득 찬 술잔이
짝짝 달라붙고들 있다
51,
님의 별
한사코
침침하기만 하던 밤이
동이 뜨고 밝아옵니다
느슨하기만 했던
허리춤을 질끈 동여매고
못다 이룬 희망을
찾아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늘이 너무 멀리 있지만,
굳은 마음 하나만은
오르고 또 오를 것입니다
죽을힘으로 올라
달도 따고
무수한 별 중에 하나
뚜렷한 임의 별을
따 오고 말 것입니다
52,
새벽을 붙들고
동녘에서 불끈 솟아오른 해님이
하루의 여정 끝에서
황홀 지경에 빠져들고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는 그믐밤
보이는 것은 모두가
어둠에 묻혀버리고
주먹을 들어도 보이지 않은 밤
호수의 은빛에
별들이 숨어들어 빛을 발하고
은비늘은 호수를
여백 없이 가득 채운다
모두 다 잠들어버린 침묵을
깨우는 것은 오직 바람일 뿐
온 밤을 한달음에 다다른 듯
들숨 날숨을 고른다
동녘에서 빤히 동이 틀 무렵
먼 길을 돌아온 듯
지친 새벽을 연다
53,
동경했으므로
가을밤 갈 단풍 바람으로 울고
밤새 울던 잎새엔 사색이 인다
가을을 동경했으므로
고독의 벗을 하고
낙엽이 뒹구는 정점에서
가없는 외로움을 만나
쓸쓸한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손을 내밀어 가냘픈
영혼 하나를 건져 올린다
54,
벚꽃이어야
한철 보자고
피는 꽃이
그 혹독한 추위를
이겨 내고야
비로소 피어나니
기왕이면
상춘객 들이 몰려드는
벗꽃이어야
하지 않는가
55,
4 신발 -김육주-
먼 길을 걸어도
아프거나
생채기 나는 일 없이
오래 길든 신발처럼
닳고 다라져도 좋은
그런 벗이
두엇만 있어도 행복이다
날마다 메시지로
안부를 전하면서
정담을 나누고
내 사정 너 들으라.
네 사정 나 들으라.
서방이나 시어머니 험담을
마냥 늘어놓아도
아무 탈 없는 시점의 일상
고급진 신발이
마음 밖에 있고
하양 닳고 닳은 신발이
내게 있어 얼마나 좋은가
마음 없는 신발은
내게 걸맞지 않은
까다로운 벗처럼
질리기만 한 것을
56,
분명한 건 사랑이었습니다
오늘같이
진종일 오는 빗속을
당신의 흠뻑 젖은 몸으로
부랑자처럼 온들
내사 안타까움보다는
반가운 마음에
젖은 몸일망정 얼싸안고
더덩실 춤이라도 출수 있으리다
진종일 오는 비에
몸살 기운이 있을망정
머리에 하얀 끈을
질끈 동여매고 있다가도
아픈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
어깨춤이라도 추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부랑자처럼 오시는 당신
분명한 건 사랑이었습니다
57,
아버지
아버지의 불호령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되어버린 이즈음
아버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곰방대 소리만 들어도
위험이 서던 때가
분명 있었는데
시절이 하 수상하니
부엌 문턱이 얕아지고
자칫하다가 앞치마
두르고 있는지라
십전대보탕을 달여서
공손하게 올리고 싶다
58,
고론이 분분하니
권하여 취케 하고
따따부따 웬 말인가
공론이 분분하니
꺾은 잔이 불혹이네
세상사 허무함이
어이하여 야속한가
든 잔이 이순이라
명명백백 따져본들
명하는 형님 없고
수긍하는 아우 없어
본디 없는 버르장머리
이참에 야단칠까?
59,
유독
당신의 체취는
꽃밭에서 이는
향긋한 바람입니다
당신을 만나면 유독
심장이 마구
요동을 치니까요
당신의 향기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보이지 않는 오랏줄에
포로가 되는 것이
봄의 정원에서
살포시한 햇살과
누리는 행복에는
언제나 임의 향기가
꽃바람으로 와
있었으니까요
60,
여름
매미 소리
목청껏 자지러지며
여름을 말하고 있다
밤이면
풀벌레 소리
피아노 건반 위를
잦은 선율처럼 울어 예고
온몸을 흥건히
적시는 여름밤
앞뒷집 검둥개
들이뛰고 내뛰고
혀를 닷 발을 내밀고
야단법석으로
여름밤을 지키고 있다
61,
갈매기 끼룩끼룩
푸른 바다 갯가에
촘촘히 박혀있는 몽돌처럼
모진 파도 철석임 끝에
곱게 다듬어져
새까맣게 그을려 있어도
반짝반짝
눈길은 이미 욕심이 나
호주머니에 넣고 싶은 심정을
정작 억제하고 있었다
바다를 향해 선 마음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실어
하얗게 게워 내며
희열을 남기며 달아나 버리지만
개가 모래사장
추억 그림 한 컷 찍어놓으며
내 유년의 그리움은 없었어도
만년의 허세 같은 여유로움은
까만 몽돌을 골라
마음껏 물 사레를 튕겨본다
62,
능금
나뭇잎 새에 숨고는
볼마다
가득가득 무엇을 물었을까
웃음보가 터질 듯
얼굴에 홍조는 영락없이
바람든 처자의 얼굴이다.
저리도 고운 볼
혼기 찬 노총각들이
풍성한 가을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니 군침을 삼키며
눈독은 얼마나 들였을까
발긋발긋 수줍은 듯
탐스럽고 아리따운 자태
혼기 넘은 노총각이사
환장이 나도 열두 번 나겠다
63,
찰라
가을이 저만치 오는데
시원찮은 몸이 움츠러든다
푸르러던 잎사귀들이
꽃물에 담금질했는가
발그스름하다
미동을 느끼지 못하던
심장 소리가
발동을 하고 돈다
찰라. 감싸고 돌던 바람이
살갑게 느껴지는
가을빛 고운 볼에 입맞춤한다.
64,
나더러
당신 눈웃음이
초승달 같다던 당신은
어디에 계신가요?
함박웃음을 지어도
눈길을 돌리는
당신은 또 누구입니까?
젊은 날의 당신의
우수에 젖은 눈빛이
나를 눈웃음 치게 하더니
무정한 세월 탓에
언젠가부터
그 눈빛 보이지 않고
무덤덤한 모습이
낯설기만 하네요
65,
어느 바람에
헌 문짝의 삐거덕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람의 심술은 보이지 않게
언제 와서
일 저지레를 하고 가는지
문살 하나를 슬쩍
부러뜨려놓고 갔으니
근심스러운 마음이 춥다
창오지를 오려서
풀질하고 있지만
문짝 내 귀만
맞추고들 있어 안타깝다
보이지 않은
바람의 심술 때문에
떨어져 나간
문살을 찾아 나서고
세월을 불문하고
죄인을 잡아서
괘씸죄로 다스려야겠다.
66,
연잎에 이슬처럼
말간 연잎에 이슬처럼
팽그르르 구르고 싶다
천둥 벼락을 쳐도 모르는
심장도 뭣도 없는
아주 말간
연잎에 이슬이 되어
어디쯤 구를 것도 없이
그냥 팽그르르 구르고 싶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날
67,
여름밤의 꿈이었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청춘이여 사랑이여
불꽃 튀던 그 날의 맹세
여름밤의 꿈이었다
마르지 않은 눈물이었다
하룻밤 꿈인 듯 살아온 세월
바람만 불어도 타다남은 재
흔적도 없이 살아지고
야속한 세월만
풀지 못한 수수께끼었다
68,
문득문득
그리워할
누군가가 없다면
그 가슴이
얼마나 삭막할까?
그러나
문득문득 생각 나는
그리움이 있다면
그 절절함으로
추억 어림을 들추며
때론 흐뭇함으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리다
69,
70,
아버지
어느 해 겨울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셨던
가오리연 줄이 얼레에 감기고
東西 동네에서는 사나흘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아버지의 목마가
간절하게 타고 싶었을 즈음
어머니의 퉁퉁 부은 눈에서
눈물이 더는 나오지 않을 때
나는 아버지 어디 가셨냐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71,
여정
고향 집 굴뚝에서 피어오른
희뿌연 연기
기나긴 여정을
거처 없이 떠돌다
첫눈 오는 날
나풀나풀 나비되어
내 눈썹 위로 내려앉네
어쩜 안부도 묻기 전
손대기가 무섭게
그냥 울어버리는 심사
73,
하느님 선물
암만 보아도
하느님 선물이 틀림없다
달덩이 같은 웃음꽃이
온 집안에 피어나고
시름시름 앓던 내 몸도
명약을 먹은 듯
함박웃음 짓는구나!
아가야 넌 암만 보아도
하느님 선물이 틀림없구나
74,
뽀송뽀송 하얗게
저 하늘에 핀
새하얀 목화꽃을
하느님 졸거든
눈결에 따다가
쐬기로 씨 발리고
얼레로 돌려서
뽀송뽀송 하얗게
무명 이불 만들까
임이 옷을 지을까?
75,
호언장담
김장김치만 잘 익어도
당신 생각이 간절합니다
일일이 배운 적 없이
어깨너머로 배웠을 뿐인데
손끝에서 우러나오는 맛이
당신 손맛을 기억하게 합니다
죽어도 당신처럼 허리 휘게는
살지 않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건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마에 주름살마저도
당신을 판에 박힌 듯
닮아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76,
사랑의 부싯돌
스치는 눈빛에
사랑은 불꽃이 됩니다
그 불꽃이 활활 타오를 때
사랑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심장에서 떨림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리면
젊어 열정은 사라지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랑이 되살아나기는
생솔가지에 불붙듯
기가 찬 일입니다.
그러나 젊은 날의 열정을
불씨처럼 귀히 여기고 있다면
사랑은 언제나 불꽃이 되기에
사랑의 부싯돌을
힘껏 그어 그어 볼 것입니다
77,
한 줌 볕
삶은
봄볕 한 줌으로 행복합니다
당신의 옅은 미소와 눈웃음을
내 마음 꽃 웃음으로 화답하고
산굽이 물굽이 휘돌며
거침없는 혈기가
영락없이 당신이라서
마냥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 한세월 굴곡진 삶이라
버리고 갈 것도 많지만
가을빛 아까운 당신을
별안간 데려가고
매정한 이별을 하고 있어
선뜻 보내지 못한 미련이
해거름 저물녘이 아쉬울 뿐입니다
78,
아버지의 행복
어머니의 손놀림은
언제나 바쁘셨다
여름이면
풋감을 따다가
돌절구에 찍어 내어
질퍽질퍽한
감물을 만들어 놓고
옥양목을 끊어다
열두 번 담금질에
나는 볕에
헹구어 널기를
반복하셔서
자연 갈색을 만들어
아버지의
갈중이 적삼을
하루 한나절에
뚝딱 만들어
매무새 곱게 입히셨다
어머니의
매운 손끝으로
만들어지는
아버지의 행복
79,
샹송
동( 冬) 장군이 물러나고
썰렁했던 나목에
봄기운이 도는
물오르는 계절입니다
봄비가 오면
물오른 가지 끝에
봉곳봉곳 꽃망울이 도드라지고
비 오는 소린
어느 작곡가의 옥타브선율의
오르내림입니다
봄기운으로 튕기는 멜로디는
샹송을 틀어놓은 듯
눈을 감고 들으면
저절로 행복해지고 있으니까요
80,
두리번두리번
만날 두리번두리번
무엇을 찾고 있을까
무엇을 잃어버렸길래
정신없이 찾고 있을까
창창했던 청춘에
소라도 때려잡을 것 같은
젊음을 찾고 있을까
아니면
깜박깜박 잊어버리는
정신머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82,
어떤 날은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나를 울적하게 하고
어떤 날은
당신을 만나는 반가움이
나를 행복에 겹게 합니다
걸 밖에서 부는
하모니카 소리에
그리던 임이 왔나
이 가슴 설레게 하고
한동안 무뎠던 심장이
두1근거리면
살아 있어 누리는
행복이라
행여나 임이 왔나
울 담을 넘는 심사이기에
벗은 발로 나서기도 합니다
1
83,
단꿈을 꿉니다
외로움이 밀려드는 밤
스르르 드는 잠이
호젓이 단꿈으로 인도합니다
단꿈은 젊은 날의 나를
불러내기도 하고
사랑을 만나 파노라마처럼
희로애락을 누리게도 합니다
꿈길은 고단함도 잊은 채
그러므로 난 밤을 기다립니다
단꿈은 언제나 아쉬움으로
아침을 맞이하기에
골백번 곤두박질쳐도
호젓이 드는 잠이 천국이고
단꿈에서 만나는 임이
절절한 그리움이기 때문입니다
84,
이 얼마나 좋은가!
햇볕이 내려앉은 대청마루에
보잘것없는 먼지가 되어도
나는 오롯이 한숨 자고 일어나
세상을 향해 하늘을 향해
어깨를 펴고
기지개를 켜고 있으리라
어느 날 태풍이 불어닥쳐도
보잘것없는 처지를 알기에
몸을 더욱더 낮추고
햇살이 들어와 주기를 기다리리
볕 좋은 날
어느 부지런한 여인네의
무르팍에 깔린다 한들
나는 아직 따스한 햇볕 아래 있고
또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지는 곳에 안주하며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85,
설령 당신이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 안에만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 밖에 있는 당신을 위해
날마다 화장을 하고
꽃향기처럼 향수를 뿌린다 한들
내 마음 안에 있는 당신처럼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내 마음 안에 있는 당신은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할 수 있기에
우린 일심동체가 됩니다
설령(設令) 당신이
내 마음 밖에만 고집한다면
오늘도 나는
화장을 해야만 합니다
86,
애초부터
내겐 믿고 따라야 할
그렇다 할 지주가 없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만사 萬事를
내 뜻대로 해나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지주가 될 수 없었던 삶
이도 저도 아닌 삶에는
손끝에서 맛을 내듯
간 보는 것만을
임의 의중을 간파해 가며
옳고 그름을
스스로 깨달아가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지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소싯적에는 어머니만이
나의 지주라 여기며
깊은 산속에서
범을 만난다 해도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으니까요.
87,
호숫가
지는 해 뉘엿뉘엿
날이 저무니
산 그림자
달려드는 호수
물 위에 어리는
달님은
무엇에 놀랐는지
파르르 떨고 있는데
밤하늘의 별빛 많은
총총하기만 하다.
88,
봄은
봄은
가랑비만 내려도
빈 들에는
초록이 인다
봄바람만 불어도
그건 꽃바람이라
봄의 꽃밭에
벌, 나비 날아드니
꽃잔치 향연에
임도 가고
나도 가고
날짐승 들짐승도
기웃거리니
이 아니 좋은가
89,
봉숭아 꽃
어머니는
갈중이 적삼에
밀짚 패랭이만
있으면
올망졸망한
자식새끼들 입에
거미줄 치는 일은
없으시단다
입에 물었던 것도
아까울 게 없다고
지붕에 호박 올리고
뜰안에
봉숭아꽃을 심어
손톱에 물들여서
첫눈이 오기만
기다리시던 어머니
무슨
소원이 있으시길래
붉은 초승달
손톱을 애지중지 하시나요
90,
더위 먹은 시련도
낙엽이 더위 먹은
시련을 겪더니
가을은
꽃 단풍을 선사합니다
발긋하게
수줍어지는 얼굴에
햇살이 내려앉으니
눈이 부십니다
고비 겪었던 시련을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바람에 부대끼는 설움
날씨 탓으로 치부하며
낮은 자세로 눠 버리는
가을 가는 겨울 초입에
자연으로 돌아가서
흙이 되려는 낙엽은
더위 탓을 안 할 것입니다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때를 알고
돌아오는 봄처럼
보슬비에도 물오르며
귓불을 새울 것입니다
91,
비오던 날의 상흔
여름엔 양철지붕이
불같이 뜨겁고
단단히 박은 못 자국엔
벌겋게 녹이 슬어 간다
녹슨 자국에는
하늘 구멍이 뚫리고
허술한 지붕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의 기탄,
궁여지책으로
받아놓은 함지박엔
쇳물이 고여 들고
붕 떠 있는 벽지에
지도 곰팡이 일어
근심만이 쌓이는데
허술하기만 한
집이나마 고치는 일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꾸려 넣었으니
궁핍한 살림살이는
자랑할 일 없고
언제나 우리가
옛말하고 살아보려나
덧바르고 심은 건 희망뿐!
함지박/ 통나무의 속을 파서 만들 그릇
92,
점 하나를 찍었다
샐비어는 오늘도
미지의 세계를 걷는다
생각과 생각을
머릿속에서 놀게 하고
하얀 백지 위에
점 하나를 찍었다
어설피 잡은 연필로
시어를 쓰는 건
시적 단어와의 싸움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다 할 정답은
유명무실하고
단어 하나하나
머리에서 맴도는 시심과
어휘를 풀어내기 위해
심지어는
오늘도 여념(餘念)이 없다
93,
봄기운이 돌면
매서운 추위가 한풀 꺾이고
꽃샘추위가 봄의 문턱에서
질척대는 삼월입니다
시냇물이 꽃샘을 무릅쓰고
얼음장을 뚫고 길을 나서니
날짐승 들짐승이
입맛 다시며 기웃거립니다
한겨울 얼었던 나뭇가지에
귓불을 새우며 말문이 터지는
엔간히도 시끌벅적한 사월
개나리, 진달래 맨몸으로
상춘객들의 눈을 홀리고
그 고운 얼굴을 넋을 놓고 보다가
젊은 날의 야릇한 사랑을
잊은 줄만 알았는데
차마 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94,
마실 손님
해님이 마실 손님인 듯
우리 집 거실로 들어왔다가
들고 난 자리 없이
슬그머니 몸을 쓸어
나가버리고 있습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아껴두었던 다기 찻잔에
달 큰 씁쓸한 차를
우려다 놓고 친근한 벗처럼
살가운 정담을 나누고
입엣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빈 잔에 아쉬움만 가득합니다
젊어 불타던 마음이 석석 하게
식어가고 있지만
햇살이 들고 난 자리에
훈훈함만은 종일토록 남아서
나를 감싸 안고 돕니다
제주 방언/석석 하게/차갑다
95
96,
임
임은 가없이 떠나는데
봄은 소리 질러 웁니다
겨우내 얼었던 앙가슴에
무직한 얼음덩어리가
날로 야속하더니
입춘에 나는 햇살이
살포시 멍든 억장의
응어리를 풀어줍니다
임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만날 봄을 기다리면
등 돌리고 매정한 임
유달리 먹은 마음 없으니
밤이슬로 아롱집니다
97,
하늘과 땅 사이
시오리 길을
잰걸음으로 와서
한숨 돌리고 하늘을 보니
그림자는 드러눕고 있었다
진종일(盡終日)
끈질기게 따라붙더니
해거름이 되니
하늘로 숫은 듯
땅으로 꺼진 듯
총총한 별 무리가
약속이나 한 듯
임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 소린
집 안팎을 에워싸고
다 떨어진 솟을대문의
삐거덕 소리는 밤새도록
잠들 줄 몰랐다
98,
님의 별
한사코
침침하기만 하던 밤이
동이 뜨고 밝아옵니다
느슨하기만 했던
허리춤을 질끈 동여매고
못다 이룬 희망을
찾아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늘이 너무 멀리 있지만,
굳은 마음 하나만은
오르고 또 오를 것입니다
죽을힘으로 올라
달도 따고
무수한 별 중에 하나
뚜렷한 임의 별을
따 오고 말 것입니다
99,
호숫가
지는 해 뉘엿뉘엿
날 저무니
산 그림자
달려드는 호수
물 위에 어리는
달님은
무엇에 놀랐는지
파르르 떨고 있는데
밤하늘에
별빛 많은 총총하다.
100,
물음표를 쓰고
초록이 꿈틀거리는 초봄
붉은 화신이
봄비를 기다린다
표정 없는 시간에 빛바래고
가을 가는 길목엔
낙엽이 한둘 떨어져 뒹군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해는
고명딸 소풍 보내기 좋은
봄 햇살로 살포시 내려앉고
초저녁이면 초승달을 향해
눈웃음은 왜 치냐고
물음표를 쓰고
앞뒷집 울을 기대고 서 있는
오동나무는
초연히 외등을 들고
외방 손님을 인도합니다
101,
동경했으므로
가을밤 갈 단풍 바람으로 울고
밤새 울던 잎새엔 사색이 인다
가을을 동경했으므로
고독의 벗을 하고
낙엽이 뒹구는 정점에서
가없는 외로움을 만나
쓸쓸한 마음을 어루만진다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손을 내밀어 가냘픈
영혼 하나를 건져 올려 본다
102,
가을볕 한 줌
가을바람이 정떨어진
임의 마음처럼
쌀쌀하고 차갑습니다
발긋발긋이 무르익은
잎새들이 떨어지며
몸 둘 바를 모르고
마냥 구르고 구릅니다
두툼한 입성을 입어도
자꾸 옷깃을
여미게 하는 늦가을
길섶마다 아침 이슬이
초롱초롱
된서리라도 내린다면
어찌합니까
그러나
가을볕 한 줌이
당신의 마음이라면
나는 꽃을 들고
당신에게로
다가갈 것입니다
103
4 신발 -김육주-
먼 길을 걸어도
아프거나 생채기 나는 일 없이
오래 길든 신발처럼
달고 다라져도 좋은 그런 벗이
두엇만 있어도 행복이다
날마다 메시지로
안부를 전하면서 정담을 나누고
내 사정 너 들으라.
네 사정 나 들으라.
서방이나 시어머니 험담을
마냥 늘어놓아도
아무 탈 없는 시점의 일상
고급진 신발이
마음 밖에 있고
하양 닳고 닳은 신발이
내게 있어 얼마나 좋은가
마음 없는 신발은
내게 걸맞지 않은
까다로운 벗처럼
질리기만 한 것을
104,
사랑
눈시울 적시는
사랑이
문밖에 있는 듯
애절하기만 한
뜻 모를 심사
창밖에 봄비는
임의
발걸음 소리인 듯
저벅저벅
먼 듯 가까운 듯
105
아버지
아버지의 불호령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되어버린 이즈음
아버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곰방대 소리만 들어도
위험이 서던 때가
분명 있었는데
시절이 하 수상하니
부엌 문턱이 얕아지고
자칫하다가 앞치마
두르고 있는지라
십전대보탕을 달여서
공손하게 올려볼까?
106,
비가 오고 있어-김육주-
언제부터 앉아 있었던 거야
귀엣말로 속삭여
눈이 어두워서
바늘귀가 도통 보이지 않아
골무가 터져 진물이 나는데
손짐작으로 더듬고 있어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니
터진 양말이 수두룩해
하루 품으로는 어림도 없어
할 일이 태산인데
눈꺼풀이 무거워
하품만 하는 거 날씨 때문이야
빗소리 때문에
지짐이가 먹고 싶어져
누구의 허락도 개의치 않고
걸쭉한 막걸리와
동침을 하는 것도
오늘 하루쯤은 괜찮을 거야
107,
마실 손님
해님이 마실 손님인 듯
우리 집 거실로 들어왔다가
들고 난 자리 없이
슬그머니 몸을 쓸어
나가버리고 있습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아껴두었던 다기 잔에
달 큰 씁쓸한 차를
우려다 놓고 친근한 벗처럼
오 론도론 정담을 나누고
입엣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빈 잔에 아쉬움만 가득합니다
젊어 불타던 마음이 석석 하게
식어가고 있지만
햇살이 들고 난 자리에
훈훈함만은 종일토록 남아서
나를 감싸 안고 돕니다
108,
109,
유독
당신의 체취는
꽃밭에서 이는
향긋한 바람입니다
당신을 만나면 유독
심장이 마구
요동을 치니까요
당신의 향기에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보이지 않는 오랏줄에
포로가 되는 것이
봄의 정원에서
살포시한 햇살과
누리는 행복에는
언제나 임의 향기가
꽃바람으로 와
있었으니까요
마구/아주 세차게
110,
속절없는 세월
목구멍에서
단내가 났던 삶에
나를 울리는 건 그리움
비 새듯 울던 울음이
홍수라도 날 것 같았는데
세월은 나를
얼리고 달래어 주었다
소리 내어 울기엔
부끄럽기만 했기에
속으로 삭이며
덧없이 세월 밥을 축내며
느는 주름과 나는 한숨이
속절없구나
111,
철들지 않는 심사
철이 없었기에
바람을 한 움큼 쥐었다
아버지께 드렸고
구름을 한 움큼 쥐었다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가물가물한 그리움
머리에 서리가 내려
희끗희끗해 가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철들기는 글렀습니다
112,
여름
매미 소리
목청껏 자지러지며
여름을 말하고 있다
밤이면
풀벌레 소리
피아노 건반 위를
잦은 선율처럼 울어 예고
온몸을 흥건히
적시는 여름밤
앞뒷집 검둥개
들이뛰고 내뛰고
혀를 닷 발을 내밀고
야단법석으로
여름밤을 지키고 있다
113
찰라
가을이 저만치 오는데
시원찮은 몸이 움츠러든다
푸르러던 잎사귀들이
꽃물에 담금질했는가
발그스름하다
미동을 느끼지 못하던
심장 소리가
발동을 하고 돈다
찰라. 감싸고 돌던 바람이
살갑게 느껴지는
가을빛 고운 볼에 입맞춤한다.
114,
갈매기 끼룩끼룩
푸른 바다 갯가에
촘촘히 박혀있는 몽돌처럼
모진 파도 철석임 끝에
곱게 다듬어져
새까맣게 그을려 있어도
반짝반짝
눈길은 이미 욕심이 나
호주머니에 넣고 싶은 심정을
정작 억제하고 있었다
바다를 향해 선 마음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실어
하얗게 게워 내며
희열을 남기며 달아나 버리지만
개가 모래사장
추억 그림 한 컷 찍어놓으며
내 유년의 그리움은 없었어도
만년의 허세 같은 여유로움은
까만 몽돌을 골라
마음껏 물 사레를 튕겨본다
115,
어떤 날은
어떤 날을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나를 울적하게 하고
어떤 날은
당신을 만나는 반가움이
나를 행복에 겹게 합니다
걸 밖에서 부는
임의 하모니카 소리에
이 가슴 설레게 하고
한동안 무뎠던 심장에서
고동치는 소리
혹여 임에게 들킬까 봐
부끄러움을 감추고 싶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반가운 마음이
울 담을 넘게 합니다
116,
만약에
숱한 밤을 뒤척이다
잠이 듭니다
당신의 젊으나 젊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저 하늘 구만 장천의
머나먼 곳 달과 별은
잘도 보이는데
당신은 어디에 계신가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마셔요
만약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신다면
뚜렸한 달밤에는
저 달을 품으며
나는 불륜도
서슴치 않을 것입니다
간밤 꿈에 본 당신이
설량한 미소로다가 와도
나를 머뭇게리게 했습니다
심장도 뭣도 미동마저
느낄 수 없었기에
깨고 난 허무함이
나를 섧게 합니다
117,
넉넉한 인심
갈매기 날아드는
아침 바다는
유유히
검푸르게 일렁인다
해님은 파동 없이
하늘로 돋아오르니
꽃구름을 풀어헤치며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백합문양의
연-옥빛 파르스름한
융단을 하늘 천지에
널어놓았다
갯갈 매기 날아드는
아침 바다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넉넉하고
무한한(無限限)
인심이 있다
118,
눈웃음
당신 눈웃음이
초승달 같다던 당신은
어디에 계신가요?
함박웃음을 지어도
눈길을 돌리는
당신은 또 누구입니까?
젊은 날의 당신의
우수에 젖은 눈빛이
나를 눈웃음 치게 하더니
무정한 세월 탓에
언젠가부터
그 눈빛 보이지 않고
무덤덤하고 흐린 눈빛이
낯설기만 하네요
119,
아버지의 행복
어머니의 손놀림은
언제나 바쁘셨다
여름이면
풋감을 따다가
돌절구에 찍어 내어
질퍽질퍽한
감물을 만들어 놓고
옥양목을 끊어다
열두 번 담금질에
나는 볕에
헹구어 널기를
반복하셔서
자연 갈색을 만들어
아버지의
갈중이 적삼을
하루 한나절에
뚝딱 만들어
매무새 곱게 입히셨다
어머니의
매운 손끝으로
만들어지는
아버지의 행복
120,
세월아
바람에 날아간들
구름에 실어 간들
물길에 흘러간들
너를 따라서
나도 간다. 만,
너 가는 길
뉘라서 막을 손 가
청춘도, 사랑도, 건강도
낮 꿈결에
보내 버렸으니
허무하고
고독한 밤이
잠도 잊게 하는구나!
121,
122,
여름밤의 꿈이었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청춘이여 사랑이여
불꽃 튀던 그 날의 맹세
여름밤의 꿈이었다
마르지 않은 눈물이었다
하룻밤 꿈인 듯 살아온 세월
바람만 불어도 타다남은 재
흔적도 없이 살아지고
야속한 세월만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123,
문득문득
그리워할
누군가가 없다면
그 가슴이
얼마나 삭막할까?
그러나
문득문득 생각 나는
그리움이 있다
그 절절함으로
추억 어림을 들추며
때론 흐뭇함으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리다
124,
삶은
울타리가
높이 처지지 않았다고
가난만 한 것은 아닙니다
야트막한 담장일수록
햇살이 마당 가득합니다
울타리 돌담 사이로
부는 바람이 반가운 바람입니다
풀벌레 소리
청을 높이는 여름밤이면
낮은 당장 속에
행복한 웃음소리가
울를 넘고 있었습니다
125,
목련화야
꽃샘을 무릅쓰고
그리 바쁘던가
아직은 추울 터인데
실 오락 하나 걸칠새 없이
꽃단장만 하고 나왔는가
뽀얀 얼굴을 봐도
내가 반해 버릴 터이고
발긋발긋이 홍조 띠며
수줍은 얼굴을 봐도
내가 환장할 터인데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아무래도 난 기다릴 터인데
그리 바쁘던가 말일세
127,
설령 당신이
당신은 언제나
내 마음 안에만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 밖에 있는 당신을 위해
날마다 화장을 하고
꽃향기처럼 향수를 뿌린다 한들
내 마음 안에 있는 당신처럼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내 마음 안에 있는 당신은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할 수 있기에
우린 일심동체가 됩니다
설령(設令) 당신이
내 마음 밖에만 고집한다면
나는 오늘도
화장을 해야 합니다
129,
그대의 눈길에
포로가 되어버리는 심사
잠깐이라도
눈 돌릴 법도 하련만
그대 가슴을 붙들고
파르르 떨리던 입술과
그대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전율이 흘렀던 기억들
그대의 발등에 올라
떨어지기 어려웠던 것이
일 년이었을까
십 년이었을까
피부에 와서 닿지 않는
그리움과 외로움
달빛만이 쓰러지는 밤에
130,
이녁
이녁은 나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거 알지
그렇잖으면
나 혼자서는 무서우니까
우리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고 사랑했던 거 맞지
언제나 이녁만 내 곁에 있으면
행복했었으니까
창밖을 보니
봄볕이 맨도롱 또똗하게
데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이녁이 한번 나가보면 안 될까
석석 하기만 한 이 가슴에 온기가
당신 때문에 맨도롱하게
데워질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야
제주 방언 /맨도롱 / 조금 따뜻하게
131,
석탄 백탄
빈들에 봄 불붙듯이
타들어 가는 가슴
이른 아침
자리끼 한 대접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날짐승의 지절대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마냥 즐거울 수 없는 삶
봄 불이라고 손 놓고
비 오기만
기다릴 수 없지 않은가?
132,
여정
고향 집 굴뚝에서 피어오른
희뿌연 연기
기나긴 여정을
거처 없이 떠돌다
첫눈 오는 날
나풀나풀 나비되어
내 눈썹 위로 내려앉네
어쩜 안부도 묻기 전
손대기 무섭게
그냥 울어버리는 심사
133,
하느님 선물
암만 보아도
하느님 선물이 틀림없다
달덩이 같은 웃음꽃이
온 집안에 피어나고
시름시름 앓던 내 몸도
명약을 먹은 듯
함박웃음 짓는구나!
아가야 넌 암만 보아도
하느님 선물이 틀림없구나
135,
비가 오고 있어
언제부터 앉아 있던 거야
귀엣말로 속삭여
눈이 어두워서
바늘귀가 도통 보이지 않아
골무가 터져서 진물이 나는데
손짐작으로 더듬고 있어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니
터진 양말이 수두룩해
하루 품으론 어림도 없어
할 일이 태산인데
눈꺼풀이 무거워
하품만 하는 거 날씨 때문이야
빗소리 때문에
부치기가 먹고 싶어져
누구의 허락도 개의치 않고
걸쭉한 막걸리와
동침을 하는 것도
오늘 하루 줌은 괜찮을 거야
136,
희망
칠흑 같은 어둠 속에도
바늘귀만 한 구멍이 있다면
들여다보는 순간 희망이다
무일푼 없이도
눈과 같은 보배가 있으니 말이다
137,
여정
고향 집 굴뚝에서 피어오른
희뿌연 연기
기나긴 여정을
거처 없이 떠돌다
첫눈 오는 날
나풀나풀 나비되어
내 눈썹 위로 내려앉네
어쩜 안부도 묻기 전
손대기 무섭게
그냥 울어버리는 심사
138,
능금
나뭇잎 새에 숨고는
볼마다
가득가득 무엇을 물었을까
웃음보가 터질 듯
얼굴에 홍조는 영락없이
바람든 처자의 얼굴이다.
저리도 고운 볼
혼기 찬 노총각들이
풍성한 가을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니 군침을 삼키며
눈독은 얼마나 들였을까
발긋발긋 수줍은 듯
탐스럽고 아리따운 자태
혼기 넘은 노총각이사
환장이 나도 열두 번 나겠다.
139,
아버지
어느 해 겨울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셨던
가오리연 줄이 얼레에 감기고
東西 동네에서는 사나흘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아버지의 목마가
간절하게 타고 싶었을 즈음
어머니의 퉁퉁 부은 눈에서
눈물이 더는 나오지 않을 때
나는 아버지 어디 가셨냐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140,
분명한 건 사랑이었습니다
오늘같이
진종일 오는 빗속을
당신의 흠뻑 젖은 몸으로
부랑자처럼 온들
내사 안타까움보다는
반가운 마음에
젖은 몸일망정 얼싸안고
더덩실 춤이라도 출수 있으리다
진종일 오는 비에
몸살 기운이 있을망정
머리에 하얀 끈을
질끈 동여매고 있다가도
아픈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
어깨춤이라도 추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부랑자처럼 오시는 당신
분명한 사랑이었습니다
141,
샹송
동( 冬) 장군이 물러나고
썰렁했던 나목에
봄기운이 도는
물오르는 계절입니다
봄비가 오면
물오른 가지 끝에
봉곳봉곳 꽃망울이 도드라지고
비 오는 소린
어느 작곡가의 옥타브선율의
오르내림입니다
봄기운으로 튕기는 멜로디는
샹송을 틀어놓은 듯
눈을 감고 들으면
저절로 행복해지고 있으니까요
142,
은행입 당신
오색단풍으로
물든 그 가을에도 당신은
황금 옷을 고집하더니
하룻밤 된서리에
그 고운 옷을
주저 없이 벗어놓네
내 옷은 아직도
상수리 꼭대기에서
된서리 맞으며 얼고 있는데
한 오락도 그 가지엔
걸쳐있지 않으니
내가 당신을 부러워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한 세상 너덜너덜
찢어진 마음이 이 가슴에 있는데
얼어 죽을지라도
시원히 벗어 던질 수 있는 당신이
부러워지는 건 무엇 때문입니까
143,
애초부터
내겐 믿고 따라야 할
그렇다 할 지주가 없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만사 萬事를
내 뜻대로 해나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지주가 될 수 없었던 삶
이도 저도 아닌 삶에는
손끝에서 맛을 내듯
간 보는 것만을
임의 의중을 간파해 가며
찡그리고 흐뭇함의 편린
그릇 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아가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지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소싯적에는 어머니만이
나의 지주라 여기며
깊은 산속에서
범을 만난다 해도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으니까요
144,
단꿉을 꿉니다
외로움이 밀려드는 밤
스르르 드는 잠이
호젓이 단꿈으로 인도합니다
단꿈은 젊은 날의 나를
불러내기도 하고
사랑을 만나 파노라마처럼
희로애락을 누리게도 합니다
꿈길은 고단함도 잊은 채,
그러므로 난 밤을 기다립니다
단꿈은 언제나 아쉬움으로
아침을 맞이하기에
골백번 곤두박질쳐도
호젓이 드는 잠이 천국이고
단꿈에서 만나는 임이
절절한 그리움이기 때문입니다
145,
사랑의 부싯돌
스치는 눈빛에
사랑은 불꽃이 됩니다
그 불꽃이 활활 타오를 때
사랑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
심장에서 떨림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리면
젊어 열정은 사라지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랑이 되살아나기는
생솔가지에 불붙듯
기가 찬 일입니다
그러나 절은 날의 열정을
불씨처럼 다스리고 있다면
사랑은 언제나 불꽃이 됩니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사랑의 부싯돌을
힘껏 그어 볼 것입니다
146,
서두르지 마라.
시간이 지루하다고
안달 부리지 마라!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시간이
삽시에 지나가는 것도
세월과 더불어 가는 것이다
서두르지 마라!
물길에 얹어가는 세월
돌아올 길 없으니 허망하다
느긋할 수 없는 게
가고 못 올 인생인 것을
황혼이 붉게 타오르고
해넘이로 서둘러 넘어가면
아쉬움이 애써 잡으려 해도
형색이 없으니
잡을 수도 없거니와
잡히지도 않는 것이
세월에 얹어가는 인생이다.
살아가는 세상이 날씨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
저 하늘에 구름 가듯
한강 물 흐르듯이
살다가 가면 그만인 것을...
147,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낙엽이 더위 먹은
시련을 겪더니
가을은
꽃 단풍을 선사합니다
발긋하게
수줍어지는 얼굴에
햇살이 내려앉으니
눈이 부십니다
고비 겪던 시련을
바람에 부대끼는 설움도
잊어버리는 일
낮은 자세로
누어 버리는 푸새들
자연은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때를 알고
돌아오는 봄처럼
보슬비에도 물오르며
가없이
초록 귀 열리고 있는 봄
148,
흰 모시 적삼이 무색하다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는 웬일인지
빗나가기 일쑤다
믿을 것도 못 믿을 것도 아니라
번거로운 우산을
챙겨 들지 않고 길 나섰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흰 모시 적삼이 무색하다
집에 돌아와서
비 끝에 나는 햇살에
빛바랜 적삼을
흐르는 물에 빨아서
밀 풀에 문질러 널었더니
바람이 손질하려고 나선다
누구에게도 보탬이
되지 않는 손이 열없다
꾸둑꾸둑하게 말라가는
풀칠한 모시 적삼이
내 손을 기다리지 않은 오후
열없다 / 겸연쩍고, 부끄럽다
149,
그림자 너는
종일토록 바동대는
나를 따라다니느라
지칠 대로 지친 너
하루의 노곤함을 안고
밤이면 고단함도 잊은 채
스스럼 없이 따라와서
나와 동침을 하지
언제나 나의 행실을
탓하지 않은 너
언제나
내 시늉만 원숭이처럼
따라 하는 일에
익숙하기만 한 너
오늘도 너는
동트기가 무섭게
나를 따라
하루하루를 돌고 돌며
언제나 무언으로
흉허물없이
동행을 하는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