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문화재지-非指定文化財[정읍문화원 간행] 663~665 쪽에 실려 있는 글
초강정지(楚江亭址)
□ 所 在 地 : 井邑市 井一洞 公平마을
삼복평야(三伏平野) 서쪽의 정읍천(井邑川) 건너편의 소년봉(少年峯 : 속칭 소누운 봉)에 초강정이 있으니 인조(仁祖)때의 공신(功臣) 김준(金浚 : 1582~1627)이 한때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서 있을 때 세운 정자이다.
김준은 광해(光海) 6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시묘(侍墓)하고 조정에서 선전관(宣傳官)으로 불렀으나 그때가 광해의 혼정기(昏政期)이어서 나가지 않고 고향에 머물러 있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후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제수되어 1627년(仁祖 5년. 丁卯)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안주성에서 순절하였다.
1944년에 후손들이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민병승(閔丙承)이 기문(記文)을 썼다.
□ 초강정 유허비명(楚江亭 遺墟碑銘)
오호! 영주(瀛州)의 치소(治所) 동남쪽 십리 남짓한 곳에 산세는 수려하고 대강(大江)이 둘러 흐르는 데 강 언덕에 정자가 하나 있으니 이름을 초강정이라 한다.
고(故) 충신 좌찬성(左贊成) 장무(壯武) 김공(金公)이 노닐던 곳인데 지금 그 정자는 없어졌다. 공의 후손 기호(基鎬)가 그 종인(宗人) 몇 사람과 함께 그 유지(遺址)에다 비를 세워 세상에 알리고자 함에 고을 선비 권순명(權純命)이 천리에 사람을 나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어른에 대한 글은 자네의 명덕(名德)이 아니면 마땅한 사람이 없다하였다. 내 사양할 수 없어 옷깃을 여미고 말하기를 공의 정충탁절(精忠卓節)은 이미 역사에 빛나 름름(凜凜)한 생기가 흐른다. 나 같은 박재(薄才)가 어찌 감히 이 일에 참여 하겠는가 그러나 예의가 망하고 인륜이 무너지기가 물론 오늘 같이 심한 날이 없다. 국란에 다달아 왕사(王事)에 죽었다는 말은 들어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때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실로 윤리를 바로 잡고 풍습을 가다듬는 한가지 좋은 일인데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공의 휘(諱)는 준(浚)이요 자는 징언(澄彦)이며 언양인(彦陽人)으로 선조 임오(壬午 1582) 5월 1일에 나셨다. 지기(志氣)가 척당(倜儻)하고 국량이 넓으시며 일을 대하면 풍채가 분발하였으며 교유하는 벗은 모두 당시의 영웅호걸이었다.
일찍이 칼 한 자루를 갈아서 옆에 두고 말하기를 만일 급한 일을 당하면 사나이가 구차히 살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젊어서 유학(儒學)을 공부하다가 뒤에 붓을 던지고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교동현감(喬桐縣監)으로 나가니 이때의 나이는 二十여 세였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당하여서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십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지 않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죽산부사(竹山府使)에 발탁되었다.
마침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오니 공은 후영장(後營將)으로서 임진강(臨陣江)을 지키고 있었으나 장수(將帥)가 항복하고 병졸이 무너지니 공은 부하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달려오니 호령이 엄숙하여 군심(軍心)이 안정되었다.
적을 평정한 뒤에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천배(薦拜)되니 너무 급히 승진한다고 반박하는 자가 있어서 봉산군수(鳳山郡守)로 체직되었다.
얼마 뒤에 안주목사(安州牧使)겸 방어사(防禦使)로 승진되니 안주는 서로(西路)의 요충지로서 주력부대가 모두 창성(昌城) 의주(義州)의 두 진영으로 모였다. 공의 수하에는 병력이 없었다.
승군(僧軍) 천명을 모집하여 자못 정예(精銳)하였으나 유사(有司)에 불편하다는 의론이 있어서 해산하였다.
공의 가까운 빈 개(介)에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북쪽 오랑캐가 틈을 노리고 있는데 두 병사(兵使)는 병사(兵事)를 다스리지 않고 나는 헛된 방어사의 이름만 가지고 있으니 오랑캐가 오지 않으면 다행이거니와 만일 왔다고 하면 나는 죽는 길 뿐이다하였다.
이듬해 정묘(丁卯)년 정월에 오랑캐가 침입하여 연달아 두 진영(陣營)을 함몰하였으며 진격하여 안주성을 애워싸고 글을 보내어 강화하고 위협하니 공은 의리를 들어 오랑캐를 꾸짖었다.
적은 급히 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성이 함락되니 공은 불을 지르고 스스로 분사(焚死)하였고 공의 아들 유성(有聲)도 전사하고 十六세된 딸 나씨부(羅氏婦)도 또한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처(妾) 김씨도 어린 딸과 함께 죽었다. 이때 공의 나이 四十六세였다.
임금이 명하여 공에게 좌찬성(左贊成), 아들 유성에게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증직(贈職)하고 아울러 조관(朝官)을 보내어 치제(致祭)를 드리고 왕세자(王世子)도 또한 관직(官員)을 보내어 치제를 드렸다. 처와 라씨부인에게 함께 정려(旌閭)를 내리고 공의 장자 진성(振聲)은 六품직(品職)에 제수(除授)하였으며 고부와 안주에 사당(祠堂)을 세우고 나라에서 사액(賜額)하였다.
숙종때 특히 절혜(節惠)의 은전을 베푸니 군자(君子)들은 표충장절(表忠彰節)함이 지극하다 하였다.
오호라! 강상(綱常)이라는 것은 국가의 기둥이요 강상이 무너지면 국가는 망하고 사람은 금수가 되리라. 그러므로 성현은 교(敎)를 세웠고 제왕(帝王)을 따라서 다스릴 수 있었다. 공은 예의의 나라에서 예의로써 입신왕가(立身王家)의 근본을 삼고 대저 위난을 만나서 아버지는 충(忠)에 죽고 아들은 효(孝)에 죽고 부인은 열(烈)에 죽었으니 한 집안의 삼강(三綱)이 천지에 빛나게 하였다.
숭산(嵩山)과 태산(泰山)보다 더 높고 해와 별보다 더 밝으니 어찌 거룩하고 장하지 않으랴? 이는 열성조(列聖祖)가 포숭(褒崇)의 은전을 다하고 국인(國人)들이 몸이 다하도록 사모하는 까닭이라 하겠다.
오호라! 모든 군자들이여 바라건데 이곳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경건한 예를 드릴지어다.
규장각(奎章閣) 직제학(直提學) 여흥인(驪興人) 민병승(閔丙承)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