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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 - 1937) 프랑스의 작곡가. 음악 학교에서 피아노와 화성법을 배울 때
샤브리에(Emmanuel Chabrier )와 사티(Erik Satie) 등으로부터 반(反) 아카데믹 작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22세 때부터 포레(Gabriel Fauré)를 사사한 후 이 경향은 더욱 강해져 1899년 이색적인 작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을 발표하며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평생동안 자신의 작품에 품질 보증서 같은 효력을 발휘한, 피아노를 위한 두 작품
<소나티나>와 <현악 4중주>를 작곡한다. 그는 널리 알려진 이 작품들을 통해 완성된 양식과 장인
정신을 보여줌으로써 '초기 작품이 완숙기의 작품보다 완성도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몇 안되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다.<스페인 광시곡, Rapsodie espangnole>, 발레곡 <다프니스와 클로에, Daphnis et Chloé>,
<물의 유희Jeux d'eau>도 잘 알려져 있다.
<첼리비다케의 빼어난 작품 해석이 돋보이는 참으로 멋진 연주입니다. 꼭 감상해주세요>
세르쥬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 1912년 ~1996년 )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철학
과 수학을 공부한 후, 나중에 피아노와 음악을 공부하고 독일에서 활동한 지휘자이다.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은 '마틴 슈타인케'라는 음악가를 통해 불교를 알게 된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힐 정도로 그는
불교에 심취했다고 한다.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그가 동양철학 전반을 자신의 지휘 세계에 끌어들여 색다
른 해석을 구현함에 있어 그의 지휘에 맞추려면 당연히 단원들은 가혹할 정도로 연습을 많이 해야 했고
'가는 귀가 멀어' 단원들의 잔 실수를 알아챌 수 없었던 빌헬름 푸르트뵝글러 지휘하의 단원들로선 고역
이 아닐 수 없었을 터.
설상가상 그는 공연현장에서 듣는 음악만이 진정한 음악을 전달할 수 있는 과정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에 녹음을 극도로 싫어한 이색적인 지휘자였다. 그의 이러한 음악관은 카라얀 같은 당대의 위대한
지휘자들도 한결같이 주장하고 옹호하는 입장이었는데, 첼리비타케는 결코 타협하려들지 않았고 이점이
단원들과 사이가 틀어지는 결정적 원인이 되어 카라얀에게 베를린필의 수석지휘자 자리를 물려주고
'자유로운 영혼'의 짚시처럼 '유랑하는 지휘자'의 길로 들어선다.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카라얀도
말년에 음반 녹음 문제로 문제로 단원들과 씻을 수 없는 갈등을 빚은 후 감독 자리를 내놓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거기엔 까놓고 말 못할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이란,
음반녹음과 이의 판매로 얻은 수익의 일부가 단원들의 부수입이 되는 악단의 구조로 봤을 때 단원들
로서는 당연히 자신들의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지휘자라도 음반 녹음을 거부하는
지휘자는 기피 대상일 수 밖에......이 때문에 유명세에 비해 생전에 음반화된 녹음은 극히 적다. 간혹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녹음한 그의 음반들은 아직도 '명품 음반'로 남아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소장품
1호'라는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1945년에 임시직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던 레지스탕스 후원자 출신의 보르하르트가 미군 병사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자 첼리비다케는 1952년에 푸르트뵝글러가 공식적으로 복귀할 때까지 베를린 필과
수많은 연주회를 지휘했으며, 펠릭스 멘델스존과 조지 거슈윈,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등 유태인
혹은 적성국 작곡가 작품들의 부활 공연에도 크게 이바지한다.
평생 베를린 필의 연주회장 문턱도 한번 구경해보지 못하고 죽을 운명의 나같은 아마추어 음악 애호가
입장에서는 그의 음악관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도 또한 결코 따를 수 없는 이 운명적 비애감을 대자
대비한 불자인 그가 무덤 속에서나마 헤아려 줄 지 자못 궁금하다. 운명은 그저 운명인 것을...
'심금을 울리는 자유로운 영혼의 지휘자' 첼리비다케. 이는 전문가들이 그의 음악해석에 대해 '독일
기계 부속품처럼 정교하고 싸늘한' 카라얀과 비교하여 한 마디로 평가한 말이다.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그럴 듯하지 않는가?
<베를린 필 상임 지휘자로 벼락출세한 아르헨티나 출신 구스타보 두다멜이 '빈 필'을 지휘하는 모습>
매혹적인 아라비아풍 선율을 깔고 있는 스페인 무곡을 차용한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는 그리스 정교에서
느껴지는 신비감이 물씬 배어난다. 고전음악의 이단아 라벨...인상주의 화가 고갱의 그림을 대할 때처럼
몽환적이다.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적지 않은 훌륭한 작품들 중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당시 유명한 발레리나였던 '이다 루빈스타인'의 의뢰로 작곡하
였다는데, 똑같은 멜로디가 계속 반복되지만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들의 편성이 바뀌면서 점점
음량이 커져가는 구성으로 단순한 듯하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 싱글 동메달리스트 '카탈리나 코스트너(이태리)'의 프리 스케이팅 연기장면.
27세의 농익은 그녀의 연기는 우아함에 있어 피겨퀸 김연아를 능가한다는 평을 듣는다. 그녀가 매혹적인
눈길로 하트 블로우를 날릴 때 그것은 큐피드의 화살처럼 심장에 박힌다.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20세기 최고의 안무가 롤랑 쁘띠(Roland Petit)가 안무한 볼레로는 그와 쌍벽을
이뤘던 모리스 베자르(Maurice Bejart)의 버전과 달리 두 남녀 무용수가 춤을 추는 형식이다. 이 버전의
컨셉은 두 박서가 링에 올라 세기의 대결이라도 펼치는 듯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율동 대결을 벌이는 것
이다. 한마디로 관능적인 섹시미의 대결인데도 강력한 펀치를 주고 받으며 피를 튀기는 것 이상의 묘한
긴장감을 선사하는 게 매력이다. 밀당을 주고 받는 젊은 연인들의 풋풋하고 설익은 사랑 놀음처럼 멀어
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이내 한몸이 되곤 하는 섹슈얼리티가 반복적인 선율 속에 극도로 적나라
하게 표출되고 있다. 베자르의 안무가 예술성을 강조했다면 롤랑 쁘띠의 안무는 이렇게 관능적인 면이
강하게 느껴진다. 살아 움직이는 바비 인형 같은 발레리나 '루치아 라카라(Lucia Lacarra)'의 안무를 즐겨
보시라.
마야 플리세츠카야(Maya Plisetskaya. 러시아)의 아래 솔로 율동도 함께 감상해 보시라.
이 곡의 컨셉은 술집의 탁자 위에서 무용수가 홀로 춤을 추고 있는데, 음악의 리듬과 춤이 고조되면서
술집의 손님들이 그 춤에 합류하여 함께 열정적인 춤을 춘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베자르가 안무한 버전
은 원래의 내용에 충실하다. 20세기 최고의 프리마돈나로 불리는 마야 플리세츠카야(Maya Plisetskaya)
가 추는 위의 춤을 보고 있노라면 발레에 문외한이라고 할지라도 넋을 잃고 몰입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녀가 이 공연을 했을 때의 나이가 50세였다는 사실이 믿어 지는가? 끊임 없는 앵콜 재청! 참...
그럼 발레리노의 솔로 퍼포먼스는 어떨까요? 비교 감상해 보시죠.(아래)
니콜라스 르 리쉬 (Nicolas le Riche. 파리 오페라 발레단 소속 무용수)
실비 길렘(Sylvie Guillem 1965년 파리 産. 런던 로얄 발레단 소속)
전설의 발레리나 마고 폰테인은 마흔이 넘어 열아홉 살 아래의 20대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를 만나
환갑 때까지 춤을 추며 '세기의 커플'로 명성을 떨쳤다. 누레예프는 다시 19세였던 실비 길렘을 자신이
단장으로 있던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에투알(최고무용수)'로 키워냈다. 19세에 에투알이 된 경우는
당시 350년 오페라 발레단 역사에서 처음이란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데 대단하긴 한 모양
이다. 이들의 '스타 제조'과정을 지켜보노라면 티벳 불교의 '달라이 라마' 계승 장면을 지켜보는 듯하다.
실비는 판에 박힌 레퍼토리만 연기하는 게 지겨웠던지 소품일지라도 틈틈이 다양한 연기를 해보고 싶다
는 의사를 단장인 누례예프에게 건의했다가 거절당하자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짐을 싸서 '런던 로얄
오페라단'으로 이적해버렸더란다. 이 일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의회에서 엄청난 문책을 당할 정도로
파리가 발칵 뒤집혀버렸다는...이적 조건도 '에투알'이 아닌 그냥 '게스트 프린시펄'로. 게스트 프린시펄
이란 스타급 무용수가 복수의 발레단에서 주역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로써 다양하고 자유
로운 예술활동을 할 수는 있지만 수입면이나 안정된 활동면에선 어려움이 뒤따르는 일종의 '프리랜서'
개념이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작품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하는...그래서 이후로 오페라
전막에서 그녀의 유려하고 아름다운 연기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다큐멘타리 형식이라든가 '컬투
컬쳐' 같은 독특한 소품 위주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우연히 둘러본 그녀의 홈피 역시 그녀의 이러한 성품 탓인지 깔끔하고 정갈하기 짝이 없었다. 니콜라스
르 리쉬 (Nicolas le Riche)의 생후 두 달짜리 아이가 엄마의 팔에 안겨 포근히 잠들어 있는 모습의 사진
속에서 나는 이제 곧 50줄에 들어설 세기의 스타 발레리라의 고독을 엿볼 수 있었다. 런던의 4월 그녀
의 집 앞에 만개한 화려한 벗꽃 그늘 속에 깃든 그런 찬란한 고독 말이다.
- 20세기를 빛낸 발레리나 'Top 10' (탄생 순)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1881~1931) 1905년 미하일 포킨의 ‘빈사의 백조’ 공연. 창백한
얼굴의 여인이 길고 여린 팔을 흐느적거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흡사 진짜 백조 한 마리가 눈앞에서
처절하게 날갯짓을 하는 것을 연상시켰다. 관객들에게 안나 파블로바가 누구인지, 아니 발레리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각인시키는 순간이었다. 발레리나란 무릇 토슈즈를 신고, 어떤 기본 테크닉을
익혀야 하며, 가녀리고 섬세한 감성을 내면화해야 함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우아하고 시적인 표현력,
캐릭터에 완벽히 동화되는 능력은 그녀의 전매특허. 동시대 미국의 이사도라 던컨이 현대무용의 개척
자라면, 러시아의 파블로바는 20세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클래식 발레의 품격을 온 몸으로 표출해냈다.
http://www.youtube.com/watch?v=49gJofwu9zc&feature=player_detailpage
<빈사의 백조>
알리시아 마르코바(Alicia Markova·1910~2004) 영국 발레의 대모. 영국 최초의 프리마 발레리나
로서 영국 무용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한 인물. 14세 때 프랑스의 디아길레프 발레뤼스에 입단해 활동
하다 영국으로 돌아와 ‘발레 램버트’와 ‘빅-웰즈 발레단’(1932~35) 등에서 활동하다 1930년대 말부터는
미국 아메리칸 발레시어터(ABT)에서 활동하는 등 전 세계 주요 발레단에서 객원무용수로 활동했다.
서정성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무용수로서 갖춰야 할 민첩함과 표현력을 두루 갖춰 드라마성을 중시하는
영국 발레의 전통을 닦았다. 은퇴 후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발레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VNl4NEEpPjI&feature=player_detailpage
http://www.youtube.com/watch?v=zDETpNnazmM&feature=player_detail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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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폰테인(Margot Fonteyn 1919~91) '무대 위의 영국 여왕'이라는 별명만큼 역사상 가장 위엄
있고 고귀한 발레리나로 꼽힌다. 그는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었다. 위대한 건 그 재능을 장기간 걸쳐
발휘했다는 점이다. 발레리나로선 회갑이라는 40대에 접어들며 폰테인에겐 또다른 전기가 마련됐는데,
바로 러시아에서 망명한 루돌프 누레예프(1938~93)를 만난 것이다. 1961년 자선 갈라 공연에서 처음
호흡을 맞춘 두사람은 이후 1979년 폰테인이 60세로 은퇴할 때까지 ‘세기의 커플’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1975년 런던에서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40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는데, 이때 89회 커튼콜은
현재까지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폰테인의 무대 밖 현실은 불우한 편이었다. 1955년 파나마의
정치인 로베르토 아리아스와 결혼했는데, 1964년 남편이 총탄 공격을 받아 하반신 마비가 되고말았다.
폰테인이 오랜 현역 생활을 한 이유이기도 했다.
마야 플리세츠카야(Maya Plisetskaya·1925~) 러시아 무용수다. 1932년부터 볼쇼이 발레학교를
다녔고, 1943년 졸업과 동시에 볼쇼이 발레단 솔로이스트로 입단했다. 1959년엔 볼쇼이 발레단과 함께
최초의 미국 순회 공연을 가졌다. 그녀는 신체적 표현력을 돋보이게 하는 유연성과 힘을 갖춘 무용수로
가벼운 느낌의 낭만 발레리나와는 정반대로 자신의 역할에 강한 연극성과 열정을 불어넣었다. 특히
‘백조의 호수’ 오데트-오딜 역과 ‘돈키호테’ 키트리 역은 으뜸이었다. 완벽한 기교를 바탕으로 러시아
발레 테크닉의 교과서라는 평가다. 1960년대부턴 본격적인 연기에 도전, 영화 ‘곱사등이 말’과 ‘안나
카레니나’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Krj-QsQvYSc&feature=player_detailpage
백조의 호수
http://www.youtube.com/watch?v=9wbgEHxGVOw&feature=player_detailpage
돈키호테
카를라 프라치(Carla Fracci·1936~) ‘발레’가 이탈리아어 ‘발라레(춤추다)’에서 왔듯, 그녀는 발레
의 고향 이탈리아 발레의 상징이다. 역대 최고의 ‘지젤’로 회자되고 있다. 1967년부터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객원수석무용수로 활동했다. 1968년 9월 에릭 브룬과 공연한 ‘지젤’ 유럽 투어는 이듬해 영상
(존 랜치베리 지휘, 베를린 도이치 오퍼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영상물이 인기를 끌며
여전히 신비로운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발레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프라치를 세계 톱클래스
발레리나로 우뚝 서게 만든 계기였다. 그의 특징은 정중한 포르 드 브라(상체 움직임)와 가지런한 걸음
걸이. 청순함과 우아미를 동시에 갖추었다. ‘지젤’ 연기로는 국내 최고라는 유니버설발레단 문훈숙 단장
은 “프라치를 모르고 지젤을 추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BbYlMnFgp3c&feature=player_detailpage
'지젤(Giselle)'
나탈리아 마카로바(Natalia Makarova·1940~) 러시아 발레리나. 1959년 레닌그라드(현 바가노바)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키로프 발레단에 입단, 수석까지 올랐다. 정작 그가 유명해진 건 미국에서다.
1970년 서유럽으로 망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에서 꽃을 피웠다. 문화적 전통이
약한 미국은 마카로바 영입에 공을 들였고, 그녀의 수혈에 이어 동시대 재닛 리드와 알레산드라 페리,
니나 아나니아쉬빌리 등이 연이어 활약함으로써 아메리칸 발레시어터는 ‘프리마 발레리나의 천국’이라
는 전통을 쌓아가게 됐다. 대표작은 ‘라 바야데르’. 뛰어난 기량은 물론 여유로운 표정과 연기로 관객과
의 교감에 능한 무용수였다. 이런 재능을 발휘해 1980년대 들어선 뮤지컬 ‘그대 발끝으로’에 출연해
토니상과 올리비에상을 수상했다. 다재다능한 발레리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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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 길렘(Sylvie Guillem·1965~) 실비 길렘 하면 이른바 ‘6시 포즈’로 유명하다. 오른쪽 다리를 쭉
들어올려 귀에다 갖다 대, 일자로 만드는 자세를 말한다. 너무나 유연해 “기형에 가깝다”는 말까지 듣는
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체조 교사였던 어머니를 따라 어린 시절 기계 체조를 배웠고, 그건 훗날
그의 유연성·근력·탄력에 힘이 됐다. 16세 때 파리 오페라 발레단 정식 단원이 됐으며, 입단 3년 만에 전
격적으로 에투왈로 승격했다. 350년 역사의 파리 오페라 발레단 사상 최연소 기록이다. 1990년대 초반
그는 파리를 나와 영국 로열 발레단의 객원 무용수를 선택했고, 이후 윌리엄 포사이드, 제롬 로빈스 등
현대 무용가와의 작업에 공을 들였다. 2004년부턴 민속춤 등으로 영역을 확장 중이다. 발레라는 하나의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히 장르 융합에 나서고 있는, 21세기형 발레리나 모델로 자리매김 중이다.
줄리 켄트(Julie Kent·1969~) 그는 영상 세대의 수혜자다. 줄리 켄트를 발레팬에게 강하게 인식시킨
것은 1986년 영화 ‘댄서스’를 통해서였다. 바리시니코프가 나온 이 영화에서 17세의 줄리 켄트는 단역
에 불과했지만 청초한 매력을 발산하며 스타로 발돋움했다. 입단 27년차로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의
간판 무용수다. 미국 메릴랜드에서 태어났고, 섬세한 연기력은 정평이 나 있다. 임신한 상태에서도 연습
에 게으르지 않고, 공연을 하고 출산 3개월 만에 전막 발레에 출연할만큼 자기 관리도 뛰어난 편이다.
출산과 무대라는, 발레리나에겐 양립하기 어려운 영원한 숙제를 슬기롭게 헤쳐나가 후배들에게 무대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또 다른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www.joongang.co.kr 시사뉴스클립 발췌>
그리고 우리의 자랑 강 수 진
열정, 노력, 끈기, 도전. 이러한 단어들의 상징인 우리의 발레리나 강수진은 17세 때 독일 왕립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발레를 시작하여 발레의 본산인 유럽에서 동양인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위스
로잔 콩쿠르 우승을 시작으로 86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최초로 동양인 단원이 되었습니다. 지금
까지 30년 가까이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몸을 담으며 현재 수석 발레리나로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동양인 최초이자 최고라는 타이틀을 갱신해 갑니다. 동양인 최초로 독일 ‘캄머 탠처린(kammertanzerin)이라는 이름의 궁중 무용수로 발탁되며 우리나라로 치면 인간문화재이자 장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은 물론, 현존하는 최고령 클래식 발레리나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강수진의 성공 뒤에 숨어있는 눈물겨운 이야기들... 하루 15시간 이상씩 연습했던 그녀는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다가 발이 아파 쇠고기를 토슈즈에 넣고 연습을 했다거나 자고 일어난 후 몸이 개운하면 그날의
연습 강도는 전날보다 몇 배씩 배가해 잔인할 정도로 자신의 몸에 가혹했다는 수많은 일화들은 그녀가
성공을 위해 얼마나 연습에 몰두했는지, 그리고 지금의 섬세한 감정표현과 애절한 몸짓으로 드라마틱한
발레를 선보이기 위해 고통을 참았을지를 짐작게 한다. 그렇기에 그녀의 무대 위 모습은 우리에게 더욱
감동을 더해주는 것 아닐런지.
고통을 감춰가며 아름다움과 순수함 그리고 섬세한 몸짓을 표현해야 하는 발레리나들의 이상은 결국
엄청난 중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이 아닐까? 한계를 뛰어넘어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무용을 선사하는 우리 시대 최고의 발레리나들의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