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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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17 11:20
29집 작품 올립니다.
정해영
조회 수 228 댓글 0
나무의 얼굴
용연사 극락전 앞 오래된 느티나무가 그늘 한 채 잘 지었다 수백 년을 통증에 기대어 쌓아올린 단청 없는 법당 환하게 열어 놓았다 참 어이없는 사람의 그늘처럼 누가, 키우던 자식과의 緣을 면도날로 잘라 갔다든지 병마와의 싸움에서 져 남편을 내 주었다든지 말 못할 풍상을 격고 그 허당을 메우려 밤마다 愁心으로 집을 지었을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것을 잊으려 나무는 한쪽 어깨를 내 주었다
잊을 수 없는 것을 잊은 나무의 얼굴
무성한 이파리 사이로 보이는 높은 하늘이 못 견디게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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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의 수련
무지개가 사라질 때
자기색깔을 어디다 버리고
가는지 궁금하다
모네의 연못에는
감정을 회칠한
수천의
빛이 살아서 움찔 거린다
구름이 흘러가고
석양에 불붙는 하늘이
연못 안에 들어 있다
수양버들 그늘위로
수련이 떠 오른다
모네의 연못은 우주의 평화
자연을 베낀다
빛을 베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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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秋
피난하였다
가을 속으로
모서리란 모서리 다 닳아
없어진 줄 알았는데
다시 격전을 치르고
송림사 계곡을 그윽이 덮은
방금 상처와 헤어진 낙엽들
피처럼 붉다
‘자신을 온전히 비워야
비로소 내가 있다‘는
경전 속 글귀가 스친다
한때 눈부신 날개였던
부분마저 뜯어내야 한다
벌써 나목이 된 나무들이 많다
몇 안남은 잎 하나가
천천히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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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툭, 떨어지면
그 환한 속이 보여야 하거늘
껍질이 투박한 견과류 같다
강물과 바람, 그리고 햇빛이
수백년 키워 낸
말의 나뭇가지에 달린 열매들
울퉁불퉁 얼룩덜룩하지만
그 곳 사람들만 맛을 알아
돌아가신 할머니의
입맛에도 맞았던
구수한 열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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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쓸쓸하다
어릴 적 밥상머리 가르침은 손등을 맞아가며 숟가락을 왼 손에서 오른 손으로 옮기는 일 이었다 세상물미가 거의 오른 쪽으로 트여 있어 오른 손 주의는 거칠게 엄격 했다 치열하게 오른 손을 익히는 동안 본래의 나는 점점 이동 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자식의 혼례식장에서 하객들과 악수를 나눌 때 가위 눌렸던 왼 손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와 화사한 분위기를 찌르거나 제삿날 조상님께 올리는 눈물 담긴 술잔이 향불위에서 슬그머니 왼쪽 길을 돌아 나오는 일은 막을 수가 없다 식구들 밥상을 차리다 느닷없이 봄빛 어른거리는 물길을 따라 나서고 싶다 든지 한 해의 한 번 쯤은 후미진 세계의 한 모퉁이를 후비듯 들여다보고 싶은 왼 편의 꿈은 말라버린 지 오래다
나의 왼쪽에는 추억도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가끔씩 뼈가 시린 까닭은 원래 나였던, 빈 그루터기에서 나는 바람소리 때문 일 것이다